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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소수에서 다수로 전파되어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31.

 

 

소수에서 다수로 전파되어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

 

(김성수 목사)

 

 

(창 7:1) “1 주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보니,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라고는

너밖에 없구나. 너는 식구들을 다 데리고, 방주로 들어가거라.”

 

 

우리는 지난주에 아주 많은 것을 공부했습니다. 왜 노아의 홍수 사건의 결론이 노아의 만취사건과 그의 세 아들에게 주어지는 축복과 저주로 끝을 맺고 있는지에 관해서도 자세하게 공부를 했고(덮어줌의 은혜), 무지개가 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는 무엇이며, 그 무지개가 어떻게 덮어줌의 은혜로 연결이 되는지에 관해서도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덮어줌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 피는 곧 생명이라는 정의가 노아의 홍수 사건에 등장하는 것도 공부를 했지요? 그리고 그러한 덮어줌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얻은 성도들은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비록 실수는 할지라도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며 성도들이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축약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덮어줌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얻은 성도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이들임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부분은 지난주에 미처 다 설명해 드리지 못한 소수에서 다수로 전파되어지는 구원의 원리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시면 분명 하나님은 노아 한사람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였다고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온 식구들을 모두다 방주 속으로 넣으셨습니다. 거기에는 한 가장의 믿음이 온 가족을 구할 수 있다는 식의 가족구원의 원리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분의 의인으로 말미암게 될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또한 그러한 원리에 의해 완성을 시키실 것임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거듭 천명 하셨습니다.

 

(갈 3:6‐9) “6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움으로 여겨 주신 것"과 같습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 8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알고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였습니다. 9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여기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다고 하는데 그 복음의 범위(範圍)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구원에 이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복이 아브라함에게서 흘러 모든 이방이 복을 받는 것까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이, 다른 말로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은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 그 덮어줌의 은혜를 삶으로 입으로 전파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필연(必然)인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복을 받아 복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하면서 성경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복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혼자서만 행복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방금 확인한 것처럼 그 복음을 받은 자에게서 다른 이들에게로 흐르는 것까지를 복음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전도만을 지칭(指稱)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한 사람도 전도 못하고 죽는 성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다른 이들이 인식을 하든 못하든 그의 삶 속에서 복음을 향기처럼 흘려보내야 하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내용이 뭡니까? 십자가의 은혜와 구속의 사랑이지요? 십자가는 곧 ‘사랑’이라는 단어로 축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나가 아닌 하나님과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향기로 풍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스라엘의 시조이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그 복음의 범위가 복의 근원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복을 전달해 주는 것까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 복을 자기들만의 것으로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은 역사 속에서, 성경 속에서 이미 확인이 된 것이지요. 그것은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거부했던 요나의 실수에서도 드러났고, 자기들만이 선민이라고 착각하고 자부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태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복음은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을 정도이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으로 역사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역사 속에서 생생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수에서 다수로 흘러가지 않는 복음은 진짜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기들만을 사랑했던 유대인들은 진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셨음에도 그 복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잘못된 복을 기대하며 복음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나에게 들어와서 다른 이들에게로 흘러 나가야 하는 것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원리를 설명하시는 것이 의인 노아와 그의 식구들의 방주 탑승 사건인 것입니다. 아직도 저의 이러한 해석이 지나친 비약인 듯싶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해 구체적인 증거를 대 드리지요.

 

(겔 14:12‐20) “12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13 "사람아, 만약 어떤 나라가 가장 불성실하여 나에게 죄를 지으므로, 내가 그 나라 위에 손을 펴서 그들이 의지하는 양식을 끊어 버리고, 그 나라에 기근을 보내며, 그 나라에서 사람과 짐승을 사라지게 한다고 하자. 14 비록 그 나라 가운데 노아와 다니엘과 욥, 이 세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세 사람은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자신의 목숨만 겨우 건질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15 ○가령 내가 그 나라에 사나운 짐승들이 돌아다니게 하여, 아이들까지 없애 버리고, 또 그 짐승들이 무서워서 그 땅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땅이 황무지가 된다고 하자. 16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건대, 비록 이 세 사람이 그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아들이나 딸도 건져 내지 못하고, 그들 자신만 겨우 구출할 것이며, 그 땅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17 ○가령 내가 그 나라에 전쟁의 칼이 들이닥치게 하고, 명령을 내려 '칼아, 이 땅을 돌아다니며 휘둘러라' 하여, 내가 그 땅에서 사람과 짐승을 사라지게 한다고 하자. 18 비록 이 세 사람이 그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건대, 그들은 아들이나 딸도 건지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목숨만 겨우 건질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19 ○가령 내가 그 땅에 전염병을 퍼뜨리고, 내 분노를 그 땅에 쏟아 부어, 거기에서 사람과 짐승이 피투성이가 되어 사라진다고 하자. 20 비록 노아와 다니엘과 욥이 그 가운데 있을지라도,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건대, 그들은 아들이나 딸도 건지지 못할 것이다. 그들마저도 자신의 의로 말미암아 그들의 목숨만 겨우 건질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에서 건져질 수 있는 자들은 자기의 의로만 건져질 수 있다고 하시지요? 그건 노아도 마찬가지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자녀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홍수 때 방주에 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노아 한 사람이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의 식구들을 함께 태우셨습니다. 그러면 창세기에서는 그렇게 관대했던 하나님이 에스겔서에서는 좀 더 인색해 지신 것일까요? 하나님의 처사에 일관성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상 일관성 없는 하나님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공의로우심에 위배되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노아의 방주 속으로 들어간 노아의 가족들의 그림 속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의인 한사람에게서 그 의가 다수에게로 전파되는 것이 바로 구원 사건의 실제 모양이며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완성도 바로 그러한 원리에 의해 진행될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러한 그림을 노아의 홍수 사건 초입에 그려 넣으신 것입니다. 한군데만 더 볼까요?

 

(렘 31:29-30) “29 그 때가 오면, 사람들이 더 이상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기 때문에, 자식들의 이가 시게 되었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30 오직 각자가 자기의 죄악 때문에 죽을 것이다. 신 포도를 먹는 그 사람의 이만 실 것이다."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자식의 이가 시리지 않는 것처럼 죄인들도 자기의 죄로만 심판을 받는 것이고 자기의 의로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메릴린 히키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 같은 책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잡서(雜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천대까지 복을 받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삼사 대까지 그 죄를 갚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건 하나님의 심판에 비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설명하는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했지요?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교리 설교 때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으니까 아직 이해가 안 가시는 분들은 교리 강해 설교를 찾아서 들어 보세요. 이렇게 복음은 그 복음을 받고 이해한 어떤 사람에게서 반드시 다른 이들에게로, 소수에서 다수로 흘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생성과 확장과 완성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의 사역 속으로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하나님 혼자 하시면 더 수월하실 텐데요.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그 새 창조의 과업 속으로 우리를 동업자로 부르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그 영광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는 모습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까? 답은 우리가 이미 알지요? 사랑입니다. 그래도 차근차근 그 복의 계통(系統)도를 살펴보면서 다시 한 번 이 땅에서 우리의 해야 할 바를 확인 하도록 하겠습니다.

 

복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복, 바라크’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영원히 충만하게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생명력이라 했지요?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복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력을 대표하는 속성’은 자신을 비우고 희생해서 다른 이들에게 부어지는 사랑이라는 샘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협의(狹義)의 정의를 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사랑의 샘의 근원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잠깐 보여 진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즉 하나님의 생명력의 집약이며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나의 희생’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 다른 이들이 유익을 얻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나에게 전해지고 내가 그 십자가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복음을 받아들였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잖아요? 복음이 뭡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해(河海)와 같은 사랑과 은혜로 원수였던 나를 대신하고 대표하여(내포적 대신)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정작 그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나에게 당신의 사랑을 쏟아 부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걸 믿는 것을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예수를 믿는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나에게 쏟아 부어진 십자가의 복음이 나에게서 다른 이들에게 전해질 때는 어떠한 모양으로 전해지게 될까요? 똑같은 것입니다. 나의 희생으로 다른 이들이 유익을 보게 되는 그 십자가의 삶으로 하나님의 복, 바라크가 다른 이들에게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그 복음을 먼저 받은 나에게서 그 복음의 내용인 ‘나의 십자가의 삶에 얹혀서’ 다른 이들에게로 전달이 되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십자가를 지고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하고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강력하게 반복하여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한 발 더 깊이 들어가 보자고요. 그렇게 하늘의 비밀을 깨닫게 되어 자기가 받은 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세상에 내리 꽂는 사람들을 성경이 무어라 부릅니까? 선지자라 부릅니다. 그 말은 복음을 이해한 모든 성도들은 이 땅을 선지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은 지금 복음을 토해내는 선지자들로 우글거리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구약의 선지자 직분은 이제 정경이 완성된 이후로 끊어졌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런데 지금도 선지자들이 우글거린단 말인가?’라고 질문을 하실 분들이 있으실 것 같아서 잠시 사족(蛇足)을 달겠습니다. 물론 구약의 선지자 직분은 이제 없어졌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하나님의 회의(보좌)에 들어가 하늘의 비밀을 직접 전달받아 세상에 내리 꽂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구원 받을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전해질 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성경으로 완성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성령이 모든 교회에 부어졌으며, 그렇게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사람들은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기 때문에 이제 그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선지자 직분은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선지자 직분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제 모든 성도들에게 공히 주어지게 된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선지자 직분은 없어졌다’고 말씀을 드린 것이고, 오늘은 ‘이제 모든 성도들은 선지자들이다’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연구해 보면 현재를 살아가는 새로운 개념의 선지자들인 성도(聖徒)의 정체성과 그들의 역할에 대해 구체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에 관해 잠시 살펴보면서 우리 성도들에게 부여된 선지자로서의 삶, 선택된 소수로서 다른 다수에게 하나님의 복을 전달해야 하는 그 삶이 성경에서 어떻게 요구되어지고, 그 직분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레미야서로 가서 선지자 직분은 어떤 사람에게 어떠한 사명으로 주어지는지를 확인한 후에 그 직분이 어떠한 방법으로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게 되는지를 보겠습니다.

 

(렘 1:4‐10) “4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5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 6 내가 아뢰었다. "아닙니다. 주 나의 하나님, 저는 말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7 그러나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여라. 8 너는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늘 너와 함께 있으면서, 보호해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9 ○그런 다음에, 주께서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고,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맡긴다. 10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이미 복중에 짓기 전에, 태중에 있기 전에 구별하셔서 열국의 선지자로 세우셨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이미 창세전에 예정이 되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7절의 말씀에서 나타나듯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는 사역을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21세기의 선지자들인 우리 성도들도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에 의해 택해진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역을 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말을 하고 하나님께서 가라는 곳에 가야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은 선지자가 되는 동시에 자기의 인생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삶을 살다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족이었던 이사야에게 3년 동안 옷을 벗고 다니면서 죄인들의 현실이 바로 그렇게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이라는 것을 알리라고 하셨을 때 이사야는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사야는 체면도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라 하시니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성전 문을 가로막고 ‘너희는 여기가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외치라 하셨을 때 예레미야는 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의 나라 니느웨로 가라고 하시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그러한 선지자 직분이 어떠한 방법에 의해 다른 이들에게 전파가 되는지를 성경에서 찾아보면서 복음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서 다른 다수에게로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어지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인 모세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의 계승은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세와 같은 선지자들’(신 18:15)에게로 흘러나가는 형국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선지자가 되었지요? 모세는 시내 산에서 떨기나무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모세에게 성령이 부어지고 모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모세의 선지자 직분은 여호수아에게로 전달이 됩니다. 모세에게서 여호수아에게 어떻게 선지자 직분이 전달이 되는지를 보겠습니다.

 

(신 18:15) “1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모세는 여호수아를 염두에 두고 그 여호수아를 ‘자기와 같은 선지자’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모세의 직분과 기능과 선지자로서의 형상을 그대로 전수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게 1차적으로 신명기 18장 15절이 가리키는 ‘나와 같은 선지자’는 여호수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문맥을 좇아 구속사적 측면에서 좀 더 광의(廣義)적 관점으로 볼 때 그 ‘나와 같은 선지자’는 모든 선지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온전하신 참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모세와 같은 직분과 기능과 형상으로 선지자로 세워진 것처럼 모세는 ‘나와 같은 선지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과 기능과 형상을 좇아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자라는 것이 그 구절 속에서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는 것은 역으로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원형으로 한 선지자였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세를 닮을 수 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렇게 보면 순서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진 성령(성령=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세에게 부어져 모세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서게 된 것처럼 여호수아 또한 모세에게 임한 성령의 임재(臨齋)로 선지자로 서게 됩니다. 선지자에게서 다음 선지자에게로 성령이 확산이 되는 모양으로 새로운 선지자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신 34:9) “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여호수아에게 지혜의 영이 넘쳤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잘 듣고 그를 따랐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선지자에게서 또 다른 선지자가 나오는 방식은 먼저 번 선지자에게 부어졌던 성령이 동일하게 후임 선지자에게 임하는 방식으로 그 선지자 직분은 확산되고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 비슷한 모습이 열왕기하 서에도 나옵니다. 열왕기하 2장 8절 이하를 보면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임 선지자로 세움을 받는데 그에게 엘리야의 영감이 머물게 됨으로서 그가 선지자로 서게 됩니다. 거기서 영감으로 번역이 된 단어 ‘루아흐’는 성령입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사는 엘리야의 겉옷을 취합니다. 그 말은 엘리야에게 부어졌던 직분과 기능과 형상이 그에게 전수가 되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선지자에게서 다른 다수의 선지자에게로 성령이 전해지므로 그 직분과 기능과 형상이 전파가 되어지는 모습은 민수기에서 좀 더 선명한 그림으로 나타납니다.

 

(민 11:14‐17) “14 저 혼자서는 도저히 이 모든 백성을 짊어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무겁습니다. 15 주께서 저에게 정말로 이렇게 하셔야 하겠다면, 그리고 제가 주님의 눈 밖에 나지 않았다면, 제발 저를 죽이셔서, 제가 이 곤경을 당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16 ○주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이스라엘 장로들 가운데서, 네가 백성의 장로들 또는 그 지도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 일흔 명을 나에게로 불러 오너라. 너는 그들을 데리고 회막으로 와서 그들과 함께 서라. 17 내가 내려가 거기에서 너와 말하겠다. 그리고 너에게 내려 준 영을 그들에게도 나누어 주어서, 백성 돌보는 짐을, 그들이 너와 함께 지게 하겠다. 그러면 너 혼자서 애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모세가 수백만의 백성들을 혼자 감당하는 것이 너무 고단해서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자 하나님께서 모세의 일을 나누어 하게 될 칠십 명의 장로들을 세우라고 하시고 그들에게도 모세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신, 성령을 부으시겠다고 말씀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선지자 모세의 직분을 나누어 받는 칠십 인의 또 다른 선지자들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시면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라는 어구가 나오지요? 거기에서 ‘임하게 하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쑴’이라는 단어는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유업을 물려 줄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에게 임한 성령을 칠십 장로들에게 마치 아버지인 모세가 유업을 물려주듯 부어주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열왕기 서에 보면 엘리사가 엘리야를 내 아버지라고 부르지요? 여호수아는 어때요? 모세를 아비처럼 따랐던 모세의 수종자였습니다. 그렇게 새로이 선지자로 서게 되는 사람들에게 아비의 직분과 기능과 형상이 전달되어지는 형국이 바로 선지자 직분의 확산인 것입니다. 그렇게 아비의 형상과 직분과 기능이 아들에게로 전해지는 모습이 조금 더 원시(原始)적인 그림으로 그려진 곳이 창세기 5장입니다.

 

(창 5:1‐3) “1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3절을 보시면 아담이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 셋을 낳았다고 하지요? 그리고 1절로 올라가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음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전에도 설명해 드렸다시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내포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충실하게 반사해 내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형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그 창조의 목적은 어그러졌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애초의 그 창조의 목적을 끝까지 완성해 내시고야 마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은 인간 쪽의 노력이나 자격이나 열심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만 완성이 될 수 있다는 그 언약의 현실이 모세로부터 보여 지는 선지자 직분의 전파와 확산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계속해서 유전되어지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잖아요? 창세기 1장 2절에서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이 어떤 무리들에게 계속해서 이어지며 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선지자에게서 다른 다수의 다른 선지자에게로 성령이 부어지고 그 직분과 기능과 형상이 전달이 되어 선지자의 직분이 확산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선지자에게서부터 다수의 선지자들인 교회가 탄생되게 되는 작은 모형들인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선지자들의 확산과 확장은 예수라는 한 의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탄생 과정과 생성 방법의 모형들인 것입니다.

 

(딛3 :5‐7) “5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거듭나게 씻어 주심과 성령으로 새롭게 해주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6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7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다고 하지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의 영인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부으심을 받은 이들은 어떻게 된다고요? 전임 선지자의 직분과 기능과 형상을 그대로 물려받는 선지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임 선지자들 중 가장 앞에 서 계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21세기의 선지자들, 성도들은 우리의 최고참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모양과 직분과 기능을 그대로 답습해 나가는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 섬기는 삶, 사랑하는 삶, 용서하는 삶, 은혜를 베푸는 삶 등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을 좇아 살아야 하는 후임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성령을 받은 자들은 사랑을 받은 자들이고 그 사랑을 쏟아내야 하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사랑이라는 단어와 혼용해서 쓰기도 합니다.

 

(살후 2:10) “10 또한 모든 불의한 속임수로 멸망 받을 자들을 속일 것입니다. 그것은, 멸망 받을 자들이 자기를 구원하여 줄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 15:26)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내려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롬 5:5)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성령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일 4:16) “16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선지자들, 성도들은 사랑을 받고 사랑을 토해내는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부연(敷衍)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한 선지자 직분이 모세에서부터 예수그리스도까지 어떻게 일관성 있게 연결이 되는지 한번 보지요.

 

(민 11:29) “29 ○그러자 모세가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나를 두고 질투하느냐? 나는 오히려 주께서 주의 백성 모두에게 그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조금 전에도 우리가 함께 읽어본 부분입니다만 하나님께서 고단한 모세의 직분을 나누어 주기 위해 칠십 인의 장로들을 세우라고 명령하시고는 그들에게 모세처럼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들이 선지자 모세의 직분을 나누어지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 칠십 인에 녹명이 된 사람 중에 엘닷과 메닷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이 진중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까지 성령이 임했고 그들이 진중에서 예언을 했습니다. 역시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그 때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그들이 예언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강력하게 건의를 했습니다. 그 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한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을 당신의 모든 백성에게 부으셔서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예언적 발언을 했습니다. 그 말 안에는 그 칠십 인의 장로들이 선지자가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이제 구약 시대에 몇 몇의 선지자들에게만 임했던 성령이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에게 임하게 되어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으로 이어집니다.

 

(엘 2:28‐32) “28 "그런 다음에,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29 그 때가 되면, 종들에게까지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의 영을 부어 주겠다. 30 그 날에 내가 하늘과 땅에 징조를 나타내겠다. 피와 불과 연기 구름이 나타나고, 31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붉어질 것이다. 끔찍스럽고 크나큰 주의 날이 오기 전에, 그런 일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32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호소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안에는 피하여 살아남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주께서 부르신 사람이 살아남아 있을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 구절은 혹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성령을 받게 되면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환상을 보게 된다는 신비주의를 옹호(擁護)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의 일 차적인 메시지는 이제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되면 소수의 선지자들에게만 부어졌던 성령이 늙은이, 젊은이, 부모, 자녀, 남종, 여종 할 것 없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지게 되는 날이 올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고(교회의 보편성), 두 번째는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죽음 뒤의 일을 알지 못해서 늙어 가는 것을 불안해하기만 했던 늙은이들이 천국의 꿈을 꿀 수 있게 되고, 전에는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젊은이들은 이상(히자욘 ‐ 다른 상을 보게 되다, 비전을 갖게 되다)을, 즉 하늘의 것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자녀들이 죽음 이후의 일, 즉 장래의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일을 이제 알기에 그 미래의 일들을 예언할 수 있게 된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단순히 성령 체험을 하면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게 된다는 그런 구절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요엘서에 표기된 그 일이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오순절에 이루어졌지요.

 

(행 2:14‐18)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엄숙하게 말하였다. "유대 사람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15 지금은 아침 아홉 시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듯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16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17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아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나이 든 사람들은 꿈을 꿀 것이다. 18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교회에게 일제히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하나로 묶이게 되었고 그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신약의 선지자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 주에 자세하게 공부를 하겠지만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이 성령을 받고 각기 자기 난 곳 방언으로 기도를 했는데 거기에 모인 모든 이들이 그 내용을 다 이해하고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하게 된다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사로, 네피림으로, 유명한 자로 서고 싶어 하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며 자신들의 힘으로 행복과 만족에 이르려, 다른 말로 하늘에 이르려 바벨탑을 쌓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저주의 심판으로 그들의 말을 혼잡케 하셨던 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성령이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다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하나님의 교회는 이제 모두가 선지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과 하늘의 비밀을 올바로 깨닫고 이해하게 되어 다른 이들에게 그 하늘의 비밀과 하나님의 뜻이 담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온전한 참 선지자는 단 한 분이셨습니다. 다른 많은 선지자들은 부분적인 하늘의 비밀과 하나님에 관해 전해 듣고 전한 자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온전한 참 선지자는 당신이 하나님이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이셔서 성부 하나님의 뜻을 그 안에 모두 담고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히 1:1‐2) “1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시켜서,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2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확실하지요? 예수님이야말로 하늘의 모든 것을 담고 계셨던 참 선지자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그 아들에게 주어졌던 온전한 복음이 이제 우리 성도들에게 부분적이며 제한적이 아닌 온전한 것으로 다 들어와 버린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한적이며 부분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고 외쳤던 선지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온전한 복음을 소유한 이들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교회를 가리켜 온전한 복음 그 자체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요, 향기요, 사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편지요, 향기요, 사신이라는 말은 그 것의 본체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그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를 대표해서 사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후 2:15) “15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고후 3:3) “3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작성하는데 봉사하였습니다. 이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 판에 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쓴 것입니다.”

 

(고후 5:20)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면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보세요.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그 분의 향기요, 편지요, 사신(使臣)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使臣)이라는 것은 그를 보내신 이의 이름으로, 그를 보내신 이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아, 그를 보내신 이의 의중을 상대방에게 전하는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계 3:7)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는 그분이 말씀하신다.”

 

이렇게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교회에게 그대로 주어지지요?

 

(마 16:19) “19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성도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이 땅에서 소유하고 그 권세로 복음을 삶으로 입으로 흘려보내야 하는 선지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 권세를 가지시고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뭡니까?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지고 이 땅에서 열심히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십자가의 삶, 다른 말로 사랑의 삶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이 땅에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갖고 해야 할 구체적인 일들을 몇 가지만 짚어보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를 보면 자명 하게 드러나겠지요?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제일 처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죄를 폭로하고 고소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선지자들의 복음 전파도 세상의 죄를 적나라하게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하심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 그 사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내가 죄인이냐고 되묻지요? 미국의 유명한 작가였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바로 숨을 거두기 전에 크리스천이었던 이모가 ‘헨리야 너는 죄인이야, 죽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고 가야해. 안 그러면 큰일 난다’라고 했더니 마지막 유언으로 남긴 말이 걸작입니다. ‘이모, 내가 언제 하나님과 싸웠는데?’였습니다. 그리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신들이 왕이 되겠다고 그 분의 품을 떠나온 죄인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선지자들이 외쳤던 것이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죄인들아, 회개하라’ 세 번째로 선지자들이 전한 것이 앞으로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가 새 언약에 대한 약속, 메시아의 필연성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메시아의 공로를 입지 않으면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정죄의 화살을 날려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어떻게 세상과 어우러져 어깨동무를 하고 살아갈 수 가 있겠습니까? 성도는 성령을 받는 순간 세상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자신들을 정죄하는 성도를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정죄하는 성도의 삶은 세상의 죄를 입으로만 지적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 자체가 세상에게 죄책감을 갖게 만드는 삶이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여전히 사랑하지 않는 모습으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어불 성설인 것처럼 성도는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심으로 사랑을 하고, 섬겨 주고, 용서를 해 주는 모습으로 세상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지도 못하고 ‘너희는 왜 하나님의 명령인 사랑을 하지 못하는가?’라고 정죄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따라서 성도는 세상을 정죄하고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들의 삶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이런 것임을 보여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은 다른 이들에게 흘러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히 11:7) “7 믿음으로 노아는, 하나님께서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을 지시하셨을 때에, 경외심을 가지고 방주를 지어서, 자기 가족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른 의를 유업으로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지요?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보처럼 방주를 지었는데 하나님은 그러한 노아의 삶을 가리켜 세상을 정죄한 삶이라고 평가를 해 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의인들은 너 자신 말고 네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라는 명령을 열심히 순종하며 살아나갈 때 세상을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중요한 선지자들의 임무는 백성 편에서 하나님께 백성을 변호하고 대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선지자들은 세상의 죄 만을 지적하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대언하는 데에 까지 헌신을 했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시내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라 하시면서 당신은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하셨을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 서서 ‘하나님 이 족속을 당신의 백성으로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청원을 하지요? 선지자들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하심까지 헤아려 죄인들을 막아서서 하나님께 그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는 자리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성도의 위대한 삶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하나님의 힘을 빌려 이 세상의 행복을 얻어내는 종교가 아닙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행복하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길어야 80년일 뿐입니다. 그 이후에는 영원이라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짧은 80년의 인생을 투자해서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사랑하며, 섬기며, 용서하며, 십자가의 삶, 천국의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 땅에서의 신분이나 역할에 크게 동요되지 않습니다.

 

조금 천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조금 못 배웠다고 해도 창피해 하지 않습니다. 건강하지 못해도 안달부리지 않습니다. 부자가 아니더라도 어깨를 움츠리지 않습니다. 자식이 속을 썩여도 소망으로 이겨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들어 ‘봐라, 내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며 이렇게 이 세상의 힘 앞에서 기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이시고 싶어 하십니다. 고통스러우세요? 힘드십니까?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노라면 금방이라도 목을 매달고 싶은 심정이십니까? 아닙니다. 그러한 여러분의 상황과 여러분에게 닥친 사건, 그리고 여러분의 처지는 잠시 잠깐 여러분에게 맡겨진 인생이라는 드라마 속의 배역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진짜 현실은 하늘의 왕 노릇을 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불쌍하지 않습니다. 제가 자주 외치는 명언이 있지요? God is not sorry that you are suffering so much. 하나님은 절대 여러분의 상황을 보시며 미안해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모든 상황과 사건과 처지들이 다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니까요.

 

지난해에 개봉이 되었던 nanny diary라는 영화 속에서 미국의 톱스타인 스칼렛 요한슨이 죽도록 고생하고 시달리는 유모의 역할로 나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여자가 미국의 톱스타로서 잠시 그 영화 속에서 유모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영화 속의 유모가 별로 불쌍하지 않았습니다. 그 영화가 끝나면 그 여자는 자신의 대궐 같은 집으로 돌아가 톱스타가 누리는 모든 것을 다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왕자, 하늘의 공주들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러분에게 맡겨진 어떠한 역할도 여러분을 부끄럽고 불쌍하게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가난한 역할, 병자의 역할, 못 배운 자의 역할, 못 생긴 자의 역할, 죽도록 고생만 하는 역할 다 괜찮습니다. 그런 것으로 기죽지도 마시고 가진 자들을 부러워하지도 마세요. 그거 다 잠시 하나님께서 맡기신 배역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힘깨나 가졌다고 교만 떨지도 마시고요.

 

당당해 지세요. 어깨를 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신부입니다. 하나님의 신부로서의 단장에 힘쓰셔야지 이 세상에서 이 세상 것으로 아무리 단장해 봐야 다 불타 버릴 것입니다. 지난주에 한국으로 들어가신 우애영 집사님과 식사를 하는데 집사님 피부가 참 좋아지셨다고 생각이 들어 여쭤 보았더니 오랜만에 신랑을 만나러 가느라 얼마 전부터 다이어트도 하시고 피부 관리도 받으시고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진짜 우리의 신랑인 하나님 앞에 순결하고 단정한 신부로 서기 위한 단장을 이 땅에서 열심히 하다가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 일에 힘을 씁시다. 사랑하십시오. 섬기세요. 용서하시고 인내하십시오. 그게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신부의 모습인 것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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