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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아이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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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아이

 

(김성수 목사)

 

 

(계 12:3-6)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 천 이 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여인과 그 여인이 낳은 아이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그 여인은 교회를 상징하는 거였고 그 여인이 낳은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우리는 여인이 아이를 낳기 위해 너무 고통스러워서 애써 부르짖는 모습을 통해서, 이 땅에서의 신자들의 삶을 보았고, 그러나 그 고통은 목적이 있는 고통이기에 우리는 힘들지만 기쁨과 기대 속에서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을 맺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시면 또 다른 표적, sign이 등장합니다.

 

(계 12:3)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붉은 용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용은 머리가 일곱 개입니다. 그리고 뿔이 열 개가 있는 용입니다. 그리고 그 일곱 머리에 일곱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그 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9절에서 해석을 해 줍니다.

 

(계 12:9)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그 머리가 일곱 개 달린 용은 사단 마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붉은 색은 성경에서 ‘죄’를 나타낼 때 쓰이는 색깔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그러죠? 그러니까 붉은 용은 죄의 원흉 사단, 마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마귀, 사단이라고 해도 될 것을 굳이 ‘용, 옛 뱀’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뭘까요? 지금 요한은 우리를 창세기부터 진행되어져 오고 있는 구속사의 가운데로 집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요한 계시록을 읽는 독자들, 교회들에게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해서 선악과를 먹게 만든 그 뱀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우리 교회를 괴롭히는 자의 정체가 무엇이며, 그 자가 언제부터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괴롭혀 온 자인지를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은 한 가지를 일관성 있게 이야기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이 머리가 일곱 개 달리고 뿔이 열 개가 달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다른 곳에도 등장을 하는데요. 13장1절을 볼까요?

 

(계 13:1)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 된 이름들이 있더라”

 

(계 17:3-4)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 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 하더라”

 

척 봐도 이 일곱 머리, 열 뿔을 가진 짐승이나 용은 우리 교회와는 적대 세력임을 알 수 있지요? 세대주의자들은 이 열 뿔이 유럽 EC공동체로 봅니다. 유럽 구주 공동체가 10개국이 되면 이제 붉은 용이 그리스도인들을 대대적으로 핍박하기 시작할 것이고 대 환난이 온 땅을 덮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EC공동체 가입 국가가 10개가 될 때를 예의 주시해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10개가 훨씬 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그들이 탈퇴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머지가 탈퇴를 하고 10개국이 남게 되면 환난과 핍박이 시작될 것이라고 아직까지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핍박이 시작되면 의로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삼 년 반 동안 사해 남쪽에 있는 요르단 평야 모압 지방, 페트라 요새라는 곳으로 피신을 가게 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미국의 세대주의 단체들이 이 요새를 구입하기 위해서 기금을 조성했고, 통조림과 저장 음식들을 사서 비축했었습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면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서 광야로 날아간다고 나오지요? 독수리를 국가의 상징으로 갖고 있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미국이죠. 세대주의자들은 의로운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국 공군기의 도움을 받아서 페트라 요새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럴듯합니까? 뭐가 그럴 듯해요? 헛소리죠. 그럼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는 EC공동체 이야기를 듣고, 미국 공군기가 실어 나르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감격해서 울었겠습니까? 성경은 전체 교회가 시공을 초월해서 동일한 메시지로 동일한 감격과 위로를 받도록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한 시대, 어떤 특정한 민족들만을 위해 기록되어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그럼 이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존재가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계시록 17장 7절로 가보겠습니다.

 

(계 17:7-12)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 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깐 동안 계속하리라 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9절에 보시면 그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일곱 산이 무엇인지 알아야 일곱 머리가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지요. 당시 초대교회의 독자들은 이 일곱 산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금방 로마를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로마는 일곱 개의 산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화폐와 여러 문헌에 이 일곱 산의 지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Septimontium, 칠산절)이라는 큰 명절을 해마다 지켰기 때문에 ‘일곱 머리’ ‘일곱 산’하면 금방 로마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로마는 누구입니까?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핍박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일곱 머리는 교회를 핍박하는 어떤 세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그 일곱 머리가 ‘일곱 산’이면서 ‘일곱 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왕은 왕국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니엘서를 보시면 네 짐승의 환상에서 네 왕을 네 왕국으로 표현을 합니다.

 

(단 7:17) “17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그런데 또 23절을 보시면 그 짐승을 왕이 아닌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단 7:23) “23 모신 자가 이처럼 이르되 네 째 짐승은 곧 땅의 네 째 나라인데 이는 모든 나라보다 달라서 천하를 삼키고 밟아 부숴뜨릴 것이며”

 

그리고 성경에서는 ‘왕국, 나라’를 ‘산’으로 표기를 하기도 합니다.

 

(시 30:7) “7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왕국을 세우신 것을 가리켜 ‘여호와께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다.’라고 기록을 합니다.

 

(렘 51:25) “2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온 세계를 멸한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대적이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가리켜 멸망의 산, 불탄 산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고 일곱 왕이다’라는 구절은 로마처럼, 그리고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대적인 애굽, 앗수르, 바벨론, 메대, 바사, 헬라처럼 교회를 대적하는 세상의 권세, 사단 마귀의 세력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일곱 머리가 정확하게 어떤 나라들이냐, 혹은 어떤 왕들이냐’를 밝히는 것은 정말 무의미한 호기심입니다. 성경은 7이라는 완전수와 우두머리를 상징하는 머리를 동원해서 그 사단 마귀가 세상의 왕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곱 머리가 전부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면류관이라고 번역이 된 ‘디아데 마타’는 ‘왕관’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열 뿔이라는 상징을 동원해서 그 마귀가 엄청난 권세를 갖고 교회를 괴롭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뿔은 권세, 능력이라고 설명해 드렸지요? 열 뿔은? 엄청난 권세를 말합니다. 그렇게 그 세력의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13절에서 그가 하늘 별 1/3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는 것으로 한 번 더 강조해 줍니다. 그런데 그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 아이가 태어나면 삼켜 버리려고 지키고 서 있습니다. 그 붉은 용은 아는 것입니다. 이 철 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는 영원한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우리 생각나는 몇 가지만 짚어보죠.

 

(1) 사단은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이게 합니다. 아벨의 라인으로 이 아이가 태어나야 하는데 아벨의 후사를 막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셋을 주십니다.

 

(2) 바로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강간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아 주십니다.

 

(3) 똑같이 아비멜렉을 통해서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똑같은 방식으로 강간하려 합니다. 역시 하나님께서 막아 주셨습니다.

 

(4) 야곱의 아들인 유다의 아들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며느리 다말을 통해 후사를 이으십니다.

 

(5) 애굽 왕 바로로 하여금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전부 죽이게 합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목숨을 걸고 남자아이들을 살려 내게 하십니다.

 

(6) 나오미의 남편과 아들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아스와 룻을 통해 후사를 이으십니다.

 

(7) 사울을 통해 다윗을 살해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키십니다.

 

(8) 에스더서에 보면 페르시아의 하만을 통해 전체 유대인을 학살하려는 음모가 나옵니다. 그러나 ‘죽으면 죽으리라’ 던 에스더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살아납니다.

 

(9) 그리고 헤롯왕으로 하여금 아기 예수를 죽이게 합니다. 그러나 천사가 나타나 도우십니다.

 

이렇게 사단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막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내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그 분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완성하시고 하나님 우편의 보좌에 앉으셔서 철장으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그렇게 그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기까지 하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를 지켜내셨습니다. 5절을 보시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지요?

 

(계 12:5)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여기서 ‘올려가더라’ ‘하르파조’라는 단어는 ‘바울이 낙원에 이끌려 올라갔을 때’도 사용되었고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교회가 휴거 되는 사건’에서도 동일하게 쓰였습니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 것은 지금 문맥의 진행이 사단의 공격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언약의 완성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지키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르파조’ ‘하나님께서 끌어 올리셨다’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인이 아이를 낳자마자 올라가죠? 낳자마자 부활하신 것은 아니잖아요. 여기서 여인이 아이를 낳았다는 말은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살펴 본 것처럼 예수님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아이를 낳으면 기뻐질 것’이라고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리켜 ‘이를 낳는다.’고 표현하셨지요? ‘너희가 지금은 근심하고 있지만, 내가 부활하게 되면 너희의 그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낳았다는 것은 바로 그 분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까지를 전부 포함한 말입니다.

 

(행 13:32-34) “32. 우리는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그 약속을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합니다. 33.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조상의 자손인 우리에게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함과 같습니다. 34.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다시는 썩지 않게 하셨는데, 이렇게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에게 약속한 거룩하고 확실한 복을,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라가셨고 거기서 왕의 철장으로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왕의 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데 왜 그 분의 백성인 우리들의 삶이 이 모양이에요? 왜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lotto도 더 잘 맞고 사업도 잘되고 돈도 더 잘 벌까요? 지금 예수님이 철장으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다면서요? 그런데 왜 우리의 삶은 이렇게 고단하지요? 그 문제를 푸는 키가 바로 "아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아이라는 단어는 ‘테크논’‘아주 어린 아이’라는 뜻입니다.

 

왜 성경이 지금 철장으로 다스리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계속 ‘남자아이, 아이, 테크논’ 왜 어린아이라고 부를까요? 왜 그분은 지금도 ‘어린 양’이라고 부르죠? 아이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여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아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의존하며 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증명하거나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스스로의 힘을 쓰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만 순종하고 충성하며 사셨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을 ‘아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하나님 앞과 보좌 앞으로 올라가셔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도 ‘아이’로서의 다스림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철 장, 그 다스리심은 겸손한 다스림, 순종의 다스림, 섬기는 다스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철장으로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여전히 ‘아이’‘테크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그리스도인의 왕 노릇에 관해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지금 이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하고 있다고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무슨 놈의 왕 노릇이 이렇게 구질구질한가?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고 계시다고 생각하세요? 왠지 선뜻 대답이 안 나오시죠? 우리는 모두 성경에 등장하는 왕을 우리 국어사전에 정의되어 있는 이 세상의 왕으로 그 왕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헛갈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왕, 하늘의 왕은 군림하는 왕, 경쟁하는 왕, 쟁취하는 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죽여서 백성을 살리는 섬기는 왕, 사랑의 왕, 용서의 왕, 포용의 왕, 아버지께 순종하는 순종의 왕입니다.

 

그래서 그 철장으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서 왕 노릇하시는 여러분도 역시 섬기는 왕, 사랑의 왕, 용서의 왕, 순종의 왕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용서하고 사랑하고 참아주고 인내하고 순종하는 그런 삶은 힘의 원리를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의 세계관 속에서는 고난으로, 고통으로, 환난으로 비춰지기 때문에 그 삶이 왕 노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예수를 믿었는데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어요?’하고 절규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왕 노릇으로 부름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하고, 여전히 인내하며, 여전히 용서하면 그게 바로 왕 노릇 제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마 18:3)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테크논’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그 어린아이가 어떤 어린아이라고요? 나의 성질대로, 나의 기분대로, 나의 힘을 사용해서 남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사랑하고 용서하고 참아주며 사는 어린아이. 그 예수라는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절대 천국 못 들어간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자꾸 나의 힘을 버리고 어린아이가 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왕 노릇입니다. 우리는 모두 천국에서 그렇게 살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가 있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게 어린아이요 우리의 왕 노릇입니다. ‘나를 자꾸 비우고 내 안에 계신 예수가 드러나게 하는 것’

 

소설가 이청준씨의 소설 중에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성경에 문둥병 환자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 한센 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 이야기입니다. 소록도에 사는 나 병 환자들은 낙후된 환경과 열악한 병원시설 속에서도 ‘나도 언젠가는 치료를 다 받고 이 섬을 나가서 저 육지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섬 소록도를 벗어나고픈 꿈을 갖고 있는데 일제(日帝)시대 때부터 부임하는 병원장들은 전부 그 나 병 환자들에게 소록도를 지상천국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비전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원생들을 그 낙원 건설에 동원시켜서 죽도록 노동을 시켰습니다.

 

병원장들은 나 병 환자들의 낙원 건설을 약속하고 공사를 진행하는데 정작 나 병 환자들은 그 낙원에서 탈출해서 육지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소록도를 나가는 것이 꿈인 이들에게 그 소록도를 지상 낙원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은 거기서 영원히 살라는 말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그 소록도 낙원건설은 공명심과 과시 욕에 가득 찬 병원장들의 꿈과 야망을 이루는 것이었지 결코 소록도의 나환자들을 위한 배려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환자들의 천국 건설’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그 낙원이 완성되는 보은의 날 그 병원장은 어떤 나환자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이 소록도는 우리 나환자들의 천국이 아니라 공명심과 과시 욕에 빠져있는 당신들의 천국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힘을 동원해서, 우리의 꿈과 비전을 바탕으로 건설하려는 하나님 나라는 어쩌면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 상관없는 우리가 만든 가짜 천국일지 모릅니다. 그냥 나의 꿈과 비전과 야망을 좇아가면서 겉으로는 그게 마치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인 것처럼 우리는 얼마든지 꾸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이 어떤 곳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있고 나의 원하는 바가 모두 이루어지는 곳이 천국입니까? 여전히 그렇게 자기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과연 천국이겠습니까? 천국은 나 때문에 다른 이들이 행복해 지는 곳이 천국입니다. 내가 나의 어깨에 있는 힘을 빼고 다른 이들의 기쁨을 위해 수고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모든 이들이 그렇게 산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지상 생애를 통해서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가신 것입니다. 그 예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비전을 따라 이 땅에 지상 낙원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나, 프란시스 쉐퍼 같은 분들도 문화운동을 주도하시면서 우리가 우리 힘으로 세상을 바꿔 보자는 시도를 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후에 네델란드 수상까지 역임을 했던 걸출한 신학자입니다. 그 때 12명의 내각 각료, 장관들이 전부 목사였습니다. 그러면 세상이 바뀔 만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 카이퍼가 네덜란드 수상일 때 네덜란드는 전 세계 최고의 포르노 생산국이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를 자꾸 비우고 어린아이처럼 낮은 자리로 가서 섬길 때 하나님 나라는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참 힘든 삶이죠. 폼 좀 재면서 가게 놔두시면 얼마나 신나요? 그런데 그렇게 가게 놔두시지 않습니다. 천국의 삶의 원리는 나를 죽여서 남을 살리는 삶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확장도 그 원리를 통해서만 이루어 가십니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나를 통해 다른 이가 행복해지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열심히 그 연습을 하다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 보면 ‘우리 교회가, 그 아이를 낳은 여인이, 1260일 동안 광야에서 하나님께 양육을 받더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양육과정“입니다.

 

여기서 양육 받고 우리는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여기는 단지 훈련소일 뿐입니다. 훈련 다 받으면 자대 배치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훈련소에서 훈련받으면서 그 훈련소 내무반에다가 1,000만 원짜리 자개농 사다놓고 쓰는 사람 보셨습니까? 수 천 만 원짜리 오디오 사다 놓고 듣는 사람 보셨어요? 훈련소에서 빡빡 기면서 조지 알마니 양복에 페라가모 구두 신고 훈련받는 사람 보셨나요? 우리는 이 땅을 그렇게 훈련병으로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살다 가는 것입니다. 지금 이 중에 훈련이 너무 고돼서 절로 눈물이 나시는 분들 계시지요? 압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잘 압니다. 그러나 목사로서 여러분께 드릴 말씀은 ‘기뻐하십시오.’ 이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훈련이 고되다는 것은 그런 훈련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훌륭한 병사라는 뜻입니다. 방위들이 무슨 유격 훈련을 받습니까? 예비군 훈련 통지서나 잘 돌리면 되지, 그러나 전투 부대 병사들은 고된 훈련을 받습니다. 싸울 만한 사람들이니까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훈련이 그만큼 고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기뻐하세요. 우리는 그 훈련을 통해서 자꾸 우리의 힘을 빼내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이외에 눈 두고 있었던 것들에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탐욕과 정욕에서 비롯된 모든 세상 적인 꿈과 비전들도 다 접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을 먼저 성실하게 수행해 나가십시오.

 

제 설교가 너무 이상적(理想的)입니까? 너무 원론적(原論的)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이게 성경의 요구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하나님의 요구를 너무 외면했고 너무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상적으로 원론적으로 들리는 것뿐입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못 하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 아닙니까?’‘네, 맞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요구를 열심히 수행하려 노력해 본 사람만이 자기가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무장을 해제하고 나면 그 때 내 안에 계신 예수가 나를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진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나를 비우는 연습을 하십시오. ‘용서해 보십시오, 사랑해 주십시오, 인내하십시오, 열심히 섬기십시오.’ 안 되십니까? 그럼 처절하게 자신의 실존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뒤로 숨으세요.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 중에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할까?’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여기서 장편은 ‘손바닥 장(掌)’자입니다. 단편보다 더 짧은 소설을 ‘장편(掌篇)’이라 합니다. 이 소설은 탐욕스러운 농부 파콤의 이야기입니다. 그 탐욕스러운 농부 파콤이 바쉬키르로 여행을 갔다가 거기서 1,000루블에 자기가 하루에 뛰어 갔다 오는 만큼의 땅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어떤 성주가 그 파콤에게 ‘1,000루블에 해 질 때까지 네가 뛰어갔다 오는 만큼의 땅을 다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 탐욕스러운 농부 파콤은 쉬지 않고 달렸습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너무나 많이 온 것 같습니다. 해 질 때까지 그 성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제 많은 땅을 가질 수 있다는 기쁨에 너무나 멀리 온 것입니다. 파콤은 죽을힘을 다해 다시 성을 향해 달렸습니다. 그리고는 성에 도착해서 죽었습니다. 이 파콤이 죽도록 달려서 얻은 땅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딱 반 평입니다. 그의 무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를 아시지요? 그가 김일성과 의형제를 맺고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궁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나도 나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저 정도의 대통령 궁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루마니아로 돌아가서 김일성 주석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대통령 궁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 동네를 다 철거해 버리고 그의 아내를 위해 그만한 궁전을 하나 더 지었습니다.

 

24년 동안 철권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수만 명의 평범한 국민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렇게 철권통치를 휘두르던 차우세스쿠는 민중봉기에 의해서 1989년에 그의 아내와 함께 총살을 당합니다. 차우세스쿠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십니까? 저 시골의 공동묘지의 묘역도 아닌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길가에 묻혔습니다. 그의 아내도 똑같이 공동묘지 길가에 묻혔습니다. 자기 힘을 믿고 자기를 위해 평생을 살았던 사람의 말로입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움켜쥐려고 했던 것이 겨우 그 공동묘지 길가 반 평 땅입니다.

 

프랑스에 가면 앙벨리드 성당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은 나폴레옹의 대리석 관이 안치되어 있는 곳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나폴레옹의 관을 보기 위해 그 앙벨리드 성당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 관 안에는 나폴레옹의 시신이 없습니다. 나폴레옹은 유배지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죽은 뒤 무려 20년이나 뒤에 복권이 되어서 다시 땅 속에서 나와 화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줌의 재가 되어 앙벨리드 성당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나폴레옹의 관이 놓여있는 앙벨리드 성당의 ‘앙벨리드’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무효’입니다. 평생을 자기의 꿈을 좇아 수 십 만 명의 젊은이의 목숨을 희생시켜가며 세계정복을 꿈꾸던 그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는 ‘무효인 삶’‘무가치한 삶’인 것입니다.

 

왜 헤밍웨이가 자기의 목구멍에다가 장총을 쐈는지 아십니까? 왜 마이클 잭슨이 ‘나는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지 아십니까? 왜 월트 디즈니가 여덟 번이나 우울증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아세요? 왜 퀴리 부인을 사석에서 만난 사람들이 ‘저 여인이야말로 비참한 여인’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모든 민중의 행복을 약속했던 모택동은 자기 아내와 아이들에게까지 미움을 받았을까요? 우리가 정신없이 좇고 있는 이 세상의 힘과 지식과 명예를 원 없이 소유했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로 말미암아 행복해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허탈하고 허망한 삶을 위해서 계속 달리시렵니까? 아니면 어린아이같이 약해 보이는 모습일지라도 다른 이들이 나 때문에 행복하고, 나 때문에 기뻐하고, 나 때문에 위로 받는 그런 진짜 왕 노릇을 하시겠습니까?

 

사도행정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쳐 준 사건이 나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하죠? ‘네가 원하는 금과 은은 내게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나사렛 예수 이다. 내가 내게 있는 그 나사렛 예수를 너에게 주마, 일어나 걸어라’ 그 때 그 앉은뱅이가 ’아니, 그거 말고 그냥 금이나 은으로 줘’ 그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소중한 구원을 놓칠 뻔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금이나 은을 주지는 못했지만 어린아이이신 예수의 마음으로 예수의 사랑으로 그 사람을 대해 주었더니 그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나은 자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다’라고 나오지요? 거기서 ‘붙잡았다’‘크라티오’라는 말은 등 뒤에서 꼭 껴안을 때 쓰는 말입니다. 정말 너무 좋아서 너무 감사해서 등 뒤에서 꼭 껴안아 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힘을 축적하고 실력을 쌓아서 그것으로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들에게 다른 것으로 주려고 하지 마시고 예수를 주십시오. 예수의 인격과 예수의 삶을 그들에게 보여주십시오. 그들이 지금 당장은 여러분을 약하고 우습게 볼 수도 있습니다만 언젠가 여러분의 등 뒤에서 여러분을 꼭 껴안아 줄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너무 고마웠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여러분을 등 뒤에서 꼭 껴안아 줄 것입니다.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예수님처럼 조용히 겸손하게 그러나 열심히 살다가 우리 예수 님 만나러 가자고요. 가서 예수님께서 ‘그래 땅에서의 삶이 어땠니?’라고 물어보시면 ‘예수 님, 예수 님 말씀하신 대로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게 섬기며 사랑하며 안아주며 살다보니까 참 행복하던데요, 그래서 저의 삶은 참 아름다웠어요’라고 말씀드려야지요. 천상병님의 시처럼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참 아름다웠다고 말씀 드려야지요.’

 

여러분, 우리 학교 졸업식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어수선합니까? 앞에서는 식순에 따라서 졸업식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연단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재학생 대표가 나와서 송사를 합니다. ‘존경하는 선배님들을 본받아 저희들도 선배님들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선배님들이 졸업하시고 없는 학교는 생각만 해도 너무 허전합니다. 이제 당장 내일부터 그 허전한 공간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졸업생이 답사를 하지요.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사랑하는 후배들을 이제 더 이상 못 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선생님들의 그 따뜻한 품을 떠나는 이 시간이 영원히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이 훈화를 하십니다. 사랑하는 제군들의 밝은 앞날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겠습니다. 제군들을 보내는 이 시간 이렇게 목이 메는 것이 왜 일까요?‘ 참 좋은 말들인데 왜 사람들이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들끼리 사진 찍고 잡담하고 그러죠? 다 거짓말인 걸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세상 사람들이 우리 신자라는 사람들의 말을 신용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복된 소식을 전해주는데, 행복해 지는 비결을 일러주는데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무시합니까? 왜 간디처럼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자들은 미워한다, 그들은 전혀 예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소리를 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지킬 의향도 없고, 믿지도 않는 이야기를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뭐라고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냐고요? 너는 그렇게 살 수 있냐고요? 우리 입에서 그런 질문이 나와야 하겠습니까? 오늘부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의 인격과 성품에 반해서 정말 가슴에서 우러나와 여러분을 뒤에서 꼭 껴안아 줄 사람들을 만들어 보십시오. 그게 어린아이의 삶이며 진짜 왕 노릇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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