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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약할 때 강함 되시네(II)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20.

 

 

약할 때 강함 되시네(II)

 

(김성수 목사)

 

 

(계 11:7-13)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두 증인, 교회가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고 세상은 그들의 죽음을 보고 크게 기뻐합니다. 장사도 지내주지 않습니다. 죽어 있는 자에게까지 모욕을 가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서로 예물을 주고받으며 교회의 죽음을 축하합니다. 그 기간이 사흘 반이라고 하지요? 사흘 반하면 생각나는 것이 우리가 지난번에 배운 삼 년 반, 한 때 두 때 반 때, 1260일, 42개월이죠.

 

그런데 왜 삼 년 반도 아니고 42개월도 아니고 1260일도 아니고 사흘 반이라는 표현을 했을까요? 요한 계시록을 잘 보시면 우리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의 기간으로서의 교회시대'를 표현할 때는 삼 년 반이라든지 사흘 반처럼 짧은 기간처럼 느끼게 하는 단어를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 겉으로 보기에 고난으로 보이는 그 시간은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나타내는 영광스러운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기간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영광스러운 왕 노릇으로서의 교회시대 기간을 나타낼 때는 42개월 1260일 이라는 긴 시간처럼 느껴지게 하는 숫자를 씁니다. 둘 다 같은 기간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일어나는 일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표현한 것이죠. 그렇지만 성경은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곧 끝난다는'위로를 주기 위해 그런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흘 반 동안, 교회 시대 내내, 우리의 인생 내내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될 것이고 세상이 보기에는 무참히 밟히는 모습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8절의 말씀처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에서 함께 못 박혀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면 우리는 우리 두 발로 다시 일어서게 될 것이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게 11절 12절 말씀이죠? 그렇게 우리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에 세상이 우리를 구경하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구경하다''떼로룬타스'는 '인식하다''바르게 알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에서야 '어, 저 사람들이 맞았네' 하고 인식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를 불쌍히 여깁니까? 이렇게 좋은 크리스마스 휴일에도 교회에 나가야 하고 자기들은 관심도 없는데 목사가 억지로 권해줘서 읽어야 하는 '죄 죽이기''회심'같은 책도 억지로 읽어야 하고, 독후감 발표도 시킨다고 하고, 그들이 생각할 때 있지도 않은 천국과 하나님을 믿느라고 이렇게 수고하는 우리가 얼마나 우리가 불쌍해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우리가 맞았다는 것을 ‘떼오레오’‘정확하게 인식하게 될 날’이 꼭 올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들은 큰 성 길,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고 사흘 반 동안 죽어 있다가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시면 살아나서 두 발로 일어서,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 성도의 삶이 누구의 삶과 흡사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똑같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해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살아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하시는 거 힘드시죠? 여러분은 지금 그분의 고난 그분의 수난, 그 분의 죽음 그리고 그 분의 부활을 함께 겪는 겁니다. 요한 계시록이 계시하고 있는 성도의 삶을 정말 그대로 살아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그렇게 성도가 하늘로 구름을 타고 올라가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성의 십분의 일이 무너집니다. 여기서 십분의 일이라는 것은 십일조의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여러분, 구약에 나오는 십일조가 뭡니까? 십의 일은 하나님 것이고 나머지 십의 구는 내 것이라는 뜻입니까? 아니죠?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전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내 것은 다 하나님 것입니다’라는 고백이 십일조입니다. 애굽에서 장자가 죽은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라는 것은 남자를 대표하는 것이고 남자는 한 가족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가 죽고 장자가 살았다는 것은 악의 세력 전체가 죽고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구원을 얻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성의 십분의 일이 무너졌다는 것은 모든 것은 다 그렇게 파괴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대접 재앙이 남아있기 때문에 십분의 일이라는 숫자를 동원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7,000이 죽는다는 말은 열왕기 서에 나오는 ‘엘리야의 7,000’이 역 인용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저 혼자 남았습니다.’라고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남은 자 7,000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딱 7,000명이 남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수인 7과 많은 수를 나타내는 1,000이 곱해진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모든 자’를 나타내는 숫자가 7,000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하시는데 7,000이 죽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멸망하시기로 작정한 모든 자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멸망 한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대접 재앙이 남아있기 때문에 전체가 아닌 7,000이라는 숫자를 동원한 것입니다. 그렇게 두 증인, 성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삶으로 입으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내자, 엄청난 재앙에서도 돌이키지 않았던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13절입니다. 여기서 ‘남은 자’‘호이 로우토이’는 9장에서도 똑같이 쓰였던 단어입니다.

 

(계 9:20-21) “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9장에서의 ‘호이 로이토이’는 엄청난 재앙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1장의 ‘호이 로이토이’는 두 증인의 복음 증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인간은 재앙으로, 혹은 기적 같은 것으로 절대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은 오직 복음에 의해서만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원어 성경을 잘 보면 이렇게 성경의 단어 선택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 두 증인의 삶은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고 달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욕과 탐심과 세상 적인 기대는 큰 성 길에서 죽고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삶,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뭡니까? ‘복음 전파’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그리고 그 나라가 완성되기 위한 복음을 받아 든 자들의 거룩’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이 사역을 마치고 승천을 하니까 회개하지 않던 자들이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더라.’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갑자기 확 기분이 나빠지시는 분들 계시죠? 아니, 내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야? 그럼 난 뭐야?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왜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게 바로 제가 지난 수요 성경공부 때 열을 올리며 말씀을 드렸던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왜 자기들이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정립하지 않고 막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생을 예수를 믿어도 삶이 변하지 않는 것이죠. 수요 성경 공부 때 빠지신 분들은 오늘 나가시면서 테잎이나 CD를 꼭 하나씩 가져다가 들으세요.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겁이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사 43:7-12, 21)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8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 9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들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게 하라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12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셨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독사’‘하나님의 영광’이 뭐예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독사’‘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지요? 우리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이 뭡니까? ‘사랑, 온유, 화평, 절제, 겸손과 오래 참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세상에 보여주며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도록 이 땅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 15:8)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마 5:16)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사랑과 온유와 겸손과 인내 같은 하나님의 성품, 착한 행실을 세상에 보여줌으로 해서 세상이 ‘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저렇게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닮게 되는 것이구나.’ 라고 할 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내가 드러나면 망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질그릇이고 그 질그릇 안에 들어 있는 보석 같은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우리가 드러나는 데에 ,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하는 것으로 기독교를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정 반대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세상 종교들처럼 그렇게 자신의 힘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나의 힘과 능력을 키우기 위해 어떤 힘 있는 대상에게 도움을 청하는 종교가 아니란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고후 12:9-10)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보세요. 내가 약할 그 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약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가난하고 힘없고 능력 없는 것을 말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부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서 약하다는 것은 내가 힘이 있고, 언제든지 그 힘을 합법적이고 정당하게 쓸 수 있음에도 나를 위해 그 힘을 쓰지 않고 오히려 남을 위해 그 힘을 동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물리 적인 힘이 있고 없고’의 차원이 아닙니다. ‘내가 부자이고 가난한 것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많이 배웠고 못 배웠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 속에서 내가 나를 죽이고, 나의 힘을 죽이고 나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이 흘러나오게 하는 모든 행위가 ‘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착한 행실’입니다. 내가 내 능력과 소유를 힘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살려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힘이 없고 약하게’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약한 것’입니다.

 

‘어떻게 저 사람은 저런 상황 속에서도 저렇게 웃을 수 있지? 어떻게 저 사람은 저런 인간을 용서할까? 어떻게 저 사람은 저 원수를 사랑하는가? 저렇게 살아서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나? 참 약해 빠졌구나.’ ‘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은 어떻게 저런 모욕을 당하고도 인내하는가? 어떻게 저렇게 무시를 당하고도 저렇게 함박웃음을 짓는가?’‘돈도 없고 빽도 없는데다가 벨도 없구나. 참 약해 빠졌다’ 이게 약한 자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런 평가를 들어내야 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전부 손에 손을 잡고 추구하는 것이 뭡니까? ‘힘’아닙니까? ‘이게 어딜 까불어. 나 그리스도인이야’ 이리로들 가고 있습니다. 내가 힘을 써야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거라는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열심히 힘을 내서 일을 하면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됩니까?

 

성경은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사탄의 검은 계절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해서도 그 것은 증명이 되고 있고요.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늘 기도하는 ‘나라이 임 하옵시며’는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가 저에게 임하게 해 주세요’라고 했지요? 그 것은 ‘우리가 열심히 힘을 내서 노력할 테니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해 주세요’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탄의 검은 계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사는 교회를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처럼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분들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의 응답으로 여러분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분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삶을 통제할 능력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내 삶을 좀 이끌어 주세요. 저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만 살겠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돌봐주시지 않으면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우리는 하나님을 돌 봐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번에 이러 저러한 것을 하려고 하니까, 저에게 힘을 좀 보태세요. 그래야 하나님 나라가 빨리 완성이 되지요’ 이건 망발입니다.

 

(마 18:3-4)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우리 주님께서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자신을 통제하고, 자신들의 삶을 계획하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어린아이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자세로 살았습니다.

 

(렘 1:5-7)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왕상 3:7-8)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이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신자들의 자세입니다. 왜 신명기 7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너희가 수효가 적은 연고로 내가 택했다’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들어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죽인 약한 자들이라는 것을 상징 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힘을 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 힘이 들고 어려워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니까 기쁘게 한다.’ 이 삶이 두 증인의 삶이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잊어 가는 것, 나의 자아를 죽여 가는 것, 시퍼렇게 살아서 기고만장하며 펄펄 뛰던 나를 하나님 앞에 항복시키는 것’ 그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 것이 성화이며 그 것이 거룩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삶을 살다 가는 것입니다.

 

호세아를 보세요. 선지자였던 그가 창녀하고 결혼하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네가 삶을 통해 보여 주라’고 하시니까 자기의 소원과 기대를 접고 창녀를 죽도록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애를 낳고도 몇 번씩이나 집을 나가서 다른 남자들과 놀아나는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쉽습니까? 죽음이죠.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이사야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의 상태를 네 삶으로 보여주고 그들이 돌이켜 회개하게 하라고 하시니까 삼 년 동안이나 발가벗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예레미야는 성전 문 앞에 서서 예배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의 길을 막고 ‘너희는 모두 가짜다, 너희는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죽음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나를 죽이고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신앙은 내가 소유한 지식이나 물질, 건강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소유가 많건 적건 간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비워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비우기가 쉬울까요? 적게 가진 사람이 비우기가 쉬울까요?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 가치관, 역사관, 인생관은 세상이 정의해놓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우리를 내 맡기는 연습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죽이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흘러나오는 훈련을 통해 하나님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민주의에 의해, 힘에 의해 전파된 복음은 전부 실패작으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모조리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 곳에 다시 선교를 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선교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는 힘의 원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도 그렇게 확실하게 증명이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비움의 삶을 완벽하게 보여 주실 모델을 한 분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어린아이처럼 자기의 능력을 비우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살다 가신 분이 누구세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가 하라는 말만 했고 아버지가 하라는 일만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를 본 자들은 아버지를 보았다’ 이 삶이 바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입니다. ‘나를 본 자들은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어렵죠?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가 할 시간이 없어요. 너무 바빠요.

 

여러분, 이런 생각 해보셨어요? ‘왜 예수님은 그냥 죽으시면 되지, 꼭 그렇게 무시당하고 배반당하고 수난을 받으셨어야 했나?’ 왜 그렇죠?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왜 우리가 꼭 고난을 통과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도 되니까요. 왜 우리는 꼭 약한 자의 모습으로 가야하는가?

 

(히 2:10) “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되셨다고 하지요?

 

(히 5:7-9)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셨답니다. 이 구절들은 여러분이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께서 전에는 뭔가 부족한 분이셨는데 고난을 당하심으로 온전해지신 것으로 오해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런 분인가요? 아니죠? 만물이 그로부터 말미암고 만물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영원 전부터 완전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님께 시킨 ‘사역이’ 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이 뭡니까? 자신을 돌로 치려는 자들을 향해 사랑과 용서와 인내라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대해 주신 것입니다. 그게 고난입니다.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 원수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께서 그렇게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세상에게 당했더니, 다른 말로 고난을 당하셨더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더라.’ 이게 고난으로 말미암아 그 분의 일이 온전케 되었다는 구절의 진의입니다. 어떠세요.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11장 13절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나를 비우고 나를 죽여서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 그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이 삶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아니, 구원받은 사람들에게서는, 두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삶에서는 이 삶이 당연히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을 통해, 다른 이들이 살아나게 되는 삶, 그래서 나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통해 다른 이들을 구원하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 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모르지만 나중에 천국에 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은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인 교회라는 무리 안에서 한 지체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수고로 말미암아 다른 지체들이 이익을 보는 그런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장이 열심히 일을 함으로 해서 피가 돕니다. 간이 열심히 해독을 해야 몸이 삽니다. 다리가 열심히 움직여 줘야 갈 길을 갑니다. 나를 희생해서 다른 이에게 유익을 주고 다른 이를 살리는 이 원리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열심히 연습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고난과 수고가 있는 것입니다.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일곱 재앙이 세상에게는 심판이요 저주이지만 우리에게는 훈련의 도구요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닥치는 일곱 재앙들은 전부 우리의 거룩한 성품의 훈련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게 완성이 되어야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거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계시록 1장부터 11장까지가 머릿속에서 하나로 연결이 되십니까?

 

(사 53:4-5,10)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보세요. 예수님의 찔림과 예수님의 상함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10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 수난의 삶을 주셨다고 나오지요? 왜요?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와의 뜻이 뭡니까? 하나님의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 그것을 신약에서는 어떻게 표현합니까?

 

(살전 4:3)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내가 사랑과 온유와 용서와 겸손과 인내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요, 우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요, 내가 살길입니다. 하나님은 그 방법으로만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시겠다고 하셨고 우리는 그 자리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죽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매일 매일 죽노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오늘이 성탄절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날입니다. 왜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마구간에 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왜 우리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는지 아시겠어요? 예후에게 깔아주었던 옷을 깔아주며, 주다 마카비에게 흔들어 주었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우리에게 세상의 힘을 줄 수 있는 힘 있는 왕이 되어 달라고 호산나, 호산나 외치던 그 사람들 앞에 왜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힘으로 완성되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했습니까? 그가 전쟁을 통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힘을 소유한 자가 , 세상의 힘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전은 평화의 왕‘샬롬’ 솔로몬이 짓는 것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샬롬” 평강, 평화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우리의 거룩을 위해 사랑하고 용서하고 품어주고 인내하고 하는 우리의 죽음에서 흐르는 피를 타고 전파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에서 힘을 빼지 않으면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통해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로 쓰이는 것이지 거기에 우리의 힘을 보태는 사람들 아닙니다. 여러분, 인간의 평화를 빼앗아 가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왜 인간의 삶에 크고 작은 전쟁들이 끊임없이 일어납니까? 인간들이 힘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강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 곳에 평화는 없습니다. 내가 약해져야 합니다. 아니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래서 참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마구간에 나시고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마구간과 나귀 새끼는 곧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꼴찌가 되면 평화가 옵니다. 내가 이기려고 하니까 다툼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면서 새빨간 거짓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안 죽었습니다. 죽으셔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질투하지 마시고 져 주세요. 시체들이 무슨 질투가 있고 경쟁이 있어요. 꼴찌의 평안을 느껴보세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꼴찌들의 평안,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실력이 없어서도 아닌 자발 적인 꼴찌의 평안, 그래서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는 꼴찌들의 평안을 누리세요. 이 세상에 꼴찌의 모습으로 오셔서 꼴찌의 삶을 살다가 꼴찌들의 죽음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삶을 우리도 닮아 가십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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