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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선택(III)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20.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선택(III)

 

(김성수 목사)

 

 

(엡 2:10) “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선택의 문제 중에서 인간의 선택에 관한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여전히 여러분들의 의문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조금 더 우리 인간의 행함, 즉 선택에 대해서 살펴보고 우리의 책임 문제에 대해서도 답을 제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복습을 조금 하겠습니다. 인간이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 행복하게 자기의 존재를 확장해 가며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했습니까? 복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의 복 “바라크”는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했지요? 복“바라크”는 인간이 행복하게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생명력을 “복”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바로 그 생명력으로부터 파생되는 아주 작은 결과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은 그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만 복으로서 유효하다고 했습니다.

 

분명 이 세상의 부나 명예나 쾌락 같은 것은 복의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제가 “복”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는가 하면 하나님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그러한 “복”의 결과물들이 죄인들에게는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는 흉기가 되고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언약의 관계 속에 있을 때에 비로소 “복”이 되는 것이며 인간은 그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의 원리를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 율법은 우리가 지켜야 할 법 조항이나 금기 사항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하나님의 백성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삶의 원리입니다. 이 땅에서 그렇게 살다 가신 분이 꼭 한 분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하게 회복되어 그 분의 뜻에 맞게 살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행복한 삶의 모델, 정답의 삶이었습니다. 고통과 배반과 아픔과 슬픔의 사건들이 닥쳤을 때도 그 마음속에 변치 않고 존재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 바로 그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회복되어야 할 궁극의 행복이라는 것의 정체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을 했고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할 “복”이 차단이 되었습니다. 분명 모든 인간은 “복”을 받고 태어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존재하는 것, 먹고사는 것 모두 하나님의 복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복은 제한된 복입니다. 언젠가 완전히 소진되어 버릴 제한된 분량의 복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 제한된 복, 제한된 생명력, 언젠가 다 소멸되어져 버릴 그 소멸로 가는 상태를 “죽었다”라고 표현을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었다“라고 표현을 한다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렇게 우리에게 영원히 복을 부어주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하고 스스로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때려죽이고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날 때 가인은 두려워합니다. 이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두려움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창 4:13-14) “13 가인이 주께 말씀드렸다. "이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 무겁습니다. 14 오늘 이 땅에서 저를 쫓아내시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를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습니다.

 

(창 4:17)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자기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집착하고 몰두하는 것을 우리가 ‘우상숭배, 중독, 자기방어, 통제성향, 육신, 사륵스, 죄’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그 개념들을 잘 숙지해 두고 계셔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에 해당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아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이미 서로 사랑하고 관심을 주고 배려를 하고 섬겨 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지극히 이기적이며 배타적이 되어 가고 심지어 적대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끼리 엘리베이터를 타면 전부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애꿎은 숫자판만 쳐다봅니다. 그거 쳐다보고 있으면 좀 더 빨리 갑니까? 아니면 자기가 눌러 놓은 곳에 안 섭니까? 왜 그렇게 서먹서먹하지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자기와 의견이 조금만 맞지 않아도 인간은 상대방을 미워합니다. 왜 미워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사랑과 관심과 배려인데 나를 반대한다는 것은 나의 안전에 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움이라는 것은 죄인들의 극도의 자기 방어와 자기 보호에서 나온 아주 악한 것입니다. 이렇게 죄는 인간 상호 관계에 치명적인 적대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어 이제 차단되었던 복이 공급이 되어 이제 내가 스스로 나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는 의미이며 그러한 자들은 다른 이들을 미워하거나 시기하거나 적대시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서로 모이면 헤어지기 싫고 오래 오래 함께 있고 싶고 그런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서로에 대해서 적대감이 아닌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롬 13:8-10)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갈 5:14-15)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율법이 뭐라 그랬죠?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삶의 원리라고 했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언약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제 율법이 우리가 가장 행복하게 사는, 삶의 원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에 율법의 마침인 사랑을 하는 자들이 되어 드디어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율법을 즐거워하게 된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마 22:36-40)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결국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복과 생명력을 다시 풍성하게 받게 됨으로써 자신이 스스로의 안전과 행복을 지키겠다고 했던 집착과 중독과 탐욕과 미움과 통제성향과 자기방어를 다 내려놓고 이웃과도 자유로운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그 자리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이웃을 완전하게 자유롭게 그리고 의롭게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우리를 오히려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유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깨달은 성도들은 아주 자연스럽고 행복하게 그들의 삶 속에서 열매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아요?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하고 기쁘다는 것을 아는데 열심히(다른 말로 하면 두렵고 떨림으로, 진지하게) 그 삶을 살아내지 않겠습니까?

 

(약 1:22-25)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롬 7:10)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이렇게 율법은 우리 인간이 가장 행복하고 풍성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는 best way of life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사회법과 같이 여겼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등’그것들이 오늘날까지 오해되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율법은 지켜야 할 법조문이 아니며 우리를 제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결코 정죄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천국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하게 풍성하게 천국의 삶을 누리기 위해 바른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마태복음22장을 보면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율법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이니까요. 그러면 세 가지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다른 것 다 필요 없어요. 지름길을 알려 드릴게요. 네 몸을 사랑하고 그 것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고 그 것처럼 네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구원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의롭게 회복된 자들을 말한다고 했지요? “의롭다”라는 말의 개념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의롭다”는 것은 justice나correctness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잘 수행하는 것을 “의롭다”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 의로움이라는 것은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여도 혹은 어떠한 모습일지라도 자기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상대방이 언약의 관계에서 떠나있을 때에 자기가 수고를 하더라도 상대방을 다시 언약의 자리에 데려다 놓는 것을 “의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롭다”는 것은 관계를 맺고 있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승인하고 그 명예를 존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배신을 하고 하나님을 향해 돌을 들었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그 분의 신실하심으로 우리를 인정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의 명예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자리에, 의로운 자리에 데려다 놓으시며 우리의 정신적인 물질적인 모든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움”은 왕 적인 미덕(kingly virtue)왕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자유로운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의로움은 곧 사랑입니다.

 

(요일 4:7-21)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는데 어떻게 나타났다고 하십니까?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그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롬 3:23-26)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이신 것이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신 것이었다고 하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사건이 요한 일서 에서는 사랑이라고 하고 로마서에서는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여러분 사랑이라는 것을 너무 sentimental하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너무 감상적이며 감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그런 사랑보다는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고 있는 중입니다. 사랑에는 분명 감정 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접촉하고 싶고.. 여러 가지 감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의 핵심적인 요소이며 본질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사랑은 감성이라기보다 의로운 자세, 의로운 태도, 의로운 생각과 의무를 이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이기 이전에 의로움의 표현이며 언약 적인 행위입니다”

 

사랑의 본질은 의로움입니다. 의로움은 뭐라고 했지요? 언약의 관계 속에서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사랑은 그런 면에서 의무입니다. 사랑은 감정이기 이전에 의로운 의무와 더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15장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고기를 쪼개놓고 그 사이로 홀로 지나가심으로 하나님의 의지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언약을 지킬 수 없음을 아시면서도 홀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내가 쪼개짐을 감수하고라도 이 언약을 지켜내겠다는 의지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관계 속에서의 의무를 수행하시는 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단순히 감정적인 사랑의 이야기로 풀어버리면 너무 가난한 해석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표현이며 성경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런 것이라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고통이라든지 탐욕이라든지 두려움이라든지 염려라든지 우울함 분노 같은 감성, 감정의 지배를 받고 영향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감정이 올라올 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에 자기를 내 던집니다. 화가 나는 것을 어쩔 수 없고, 누가 미운 것을 참을 수 없고, 욕심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운 것을 염려가 되는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러나 여러분도 경험하셔서 아시다시피 과격하고 어두운 감성에 오래 잡혀 있게 되면 우리는 인격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엄청난 해를 입게 됩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성경에서는 감정에 명령을 합니다.

 

(빌 4:4) “4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6)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사 41:10)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마 6:31-34)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엡 4:26-27)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롬 12:14-15)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시 37:4)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보이지요? 감정은 내 안에서 우러나오거나 솟아나는 것이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알고 있지 않으세요?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나의 인격의 주체로서 내 영혼이나 나의 감정에 대해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시 42:3-5) “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시편 기자는 낙심해 있고 우울증에 빠져있고 불안해하고 심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영혼에게 명령을 합니다. “내 영혼아 불안해하지 말라,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오히려 그 상황에서 찬송하라“ 그럽니다. 여러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것은 노만 빈센트 필이나 로버트 슐러의 positive thinking이나 번영의 신학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다 잘 될 거야“ 이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가 속고 있는 부분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우리의 감정을 선택할 수 있는 인격의 자유로움이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모르셨지요? “의아해 하시네요?” 여러분은 성경을 믿으십니까? 성경이 그렇다면 그런 거예요.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우리의 감정을 선택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분노와 우울’에 싸일 수 있고 ,어찌할 수 없는 질투와 시기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나쁜 감정은 왜 생긴다고 했지요? 자기를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자기 방어, 통제성향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했지요? 이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통제 성향 자기방어 집착 중독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고 아울러 그 것들로부터 오는 그러한 어둡고 무거운 감정에서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지키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에게 그러한 나쁜 감정들이 일어나는 것은 여러분을 속이고 있는 여러분의 육신, 과거의 습관, 경향, 마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그러한 나쁜 감정이 솟구쳐 올라올 때 여러분은 거기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빨리 자각하고 거기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힘들죠? 교회 잘못 왔다는 생각 안 드세요? 옛날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그냥 쉽게, 쉽게 믿을 수 있었는데 너무 복잡하고 힘들지요? 누가 예수 믿는 것을 쉽다고 했습니까?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 살아가는 것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싸움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이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미움과 분노와 질투와 시기와 우울함과 슬픈 감정이 일어날 때 이러한 감정은 내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저절로 해결 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그 감정이 삭아서 없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럼에도 그게 안 되면 오랫동안 그 분노와 미움과 증오와 우울함과 슬픔을 버리지 못 하고 계속해서 자기를 파괴하면서 살곤 합니다. 그것을 소위 상처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그래서 내적 치유니 뭐니 해서 그 나쁜 감정들을 버려 보려고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헛수고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명확하게 알고 우리의 신분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우리는 거기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사람들이 성경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어줍지 않은 심리학의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사랑과 기쁨과 활기와 생명 같은 것들을 이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하늘나라 사람들입니다. 제발 여러분의 신분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계세요.

 

(요 8:31-32)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진리를 알게 되면 우리는 자유하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롭습니다. 속지 마세요. 여러분이 그런 악하고 나쁘고 어두운 감정에 잡혀 있는 것은 여러분은 마귀나 육신이나 습관의 도움으로 여러분 스스로 그것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으세요?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실입니다. 여러분은 숨은 동기에 의해 자기 방어와 통제 성향을 따라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여전히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습관에 속아서 그것을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계신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아니 우울하고 분노하고 미워하는 게 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냐?

 

(민 14:6-11) “6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열두 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정탐하고 나왔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이 아주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에 사는 아낙 사람들은 거인이며 우리가 그 앞에 서면 메뚜기 같아서 도저히 우리는 싸울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 통곡을 하고 두려워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강한 적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백성이 언제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하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냥 감정에 붙들려서 어쩔 수 없었다. 참을 수 없었다.“ 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스스로 우리를 보호하거나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그러한 감정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미움과 분노 대신에 사랑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우울에서 벗어나 기쁨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불평과 불만에서 감사를 선택할 수 있고, 염려와 불안에서 확신과 평안을 선택할 수 있고 두려움과 불안을 떨치고 안전감과 행복감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고후 6:9-10) “9 우리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바울과 제자들은 그러한 고통 속에서 기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파괴하고 자기를 힘들게 만드는 나쁜 감정을 버리고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을 바로 자기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자유롭게, 의롭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하고 싶을 때가 있고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가고 싶을 때가 있고 가기 싫을 때가 있지요? 찬양을 하고 싶을 때가 있고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고 기도가 하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도 예배하기로 선택하셔야 합니다. 기도하기 싫을 때 여러분은 기도하기로 선택하셔야 합니다. 찬양을 할 기분이 내키지 않을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그게 위선이지 무슨 예배냐?” 이렇게 반문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시 103)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20 천사들아, 주의 말씀을 듣고, 실행할 능력이 있는 용사들아, 주를 찬양하여라. 21 주의 군대들아, 그의 뜻을 실행하는 종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22 주님께 지음 받은 사람들아, 주께서 통치하시는 모든 곳에서 주님을 찬송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다윗은 자기 영혼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설교하는 목사가 꼴도 보기 싫고 찬양을 하는 찬양 팀이 갑자기 막무가내 보이스처럼 엉망으로 보이고 성가대의 찬양도 시끄럽고 괴롭게 느껴질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선택을 하고 결단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로운 사랑이며 의로운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상대의 반응과 상대의 외모나 모양에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이 자기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짜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무슨 신비한 기적이나 신기한 현상을 보거나 감정적으로 감격과 감사가 솟아나는 상황이 연출되지 않아도, 주관적인 체험이나 감정의 변화가 없어도 여러분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기로 선택을 하셔야하고 그러한 자유로운 능력이 있으신 분들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자유롭고 의로운 사랑을 가르쳐서 천국에 데리고 가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도 자신들이 “영혼의 밤”이라고 불렀던 길고 긴 영혼의 메마름을 겪었습니다. 우울증에 신경 쇠약까지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놔두셨는지 아세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유로운 사랑을 훈련시키시기 위한 기간인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일수록 주관적인 체험이나 신비한 경험이 없어집니다. 점점 높은 단계의 자유로운 사랑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그런 감정적인 복받침이 없어도 변함없이 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체험이나 감격 같은 것을 많이 주세요. 안 그러면 삐지니까. 삼삼오오 몰려다니면서 “내 기도 받아야 일이 풀리고 복 받는다”고 떠벌리며 다니는 사람들은 지금 유아기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옹알옹알” 옹알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완전히 가짜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진짜 성숙한 신앙인은 그러지 못 합니다. 점점 갈수록 하나님께서 반응이 없으실 지도 모릅니다. 그 때 자유로운 사랑을 배우시고 그래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기를 선택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가 네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 몸과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던 간에 그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 주는 것을 “의”라고 한다고 했고 “사랑”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죠? 아니면 가짜라고 하십니다.

 

(요일 4:20-21)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롬 12)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마 5:44)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게 됩니까? 우리가 가진 사랑의 개념을 가지고는 아마 죽는 날까지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말씀드린 성경에서의 사랑의 개념으로는 가능합니다. 손양원 목사님께서 자기 아들을 둘씩이나 죽인 살인범을 양아들로 삼아서 공부도 가르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정말 그 목사님의 마음속에 우리가 생각하는 안 보면 보고 싶고, 없으면 허전하고 한 그런 사랑을 했겠습니까? 언제 봤다고 그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 그렇게 사랑스럽겠습니까? 그 목사님은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가 회복이 되신 성도로서, 한 죄인을 그 하나님과의 의로운 언약의 관계 속으로 인도 하셨던 것이고 성도로서의 의무를 다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상대방에게 걸게 되면 상대방이 나를 충분히 만족시켜주거나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 때 다툼이 일어나고 미움이 일어납니다.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상대방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 상대방이 어떤 추한 모습을 보이던 내가 그 배우자를 향해서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하는 것을 의로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로운 사랑이고 의로운 사랑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삽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대상이 자기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맡아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들이 결혼을 결심할 때 “이러 저러한 면이 믿음직스러워서 내가 나의 인생을 이 남자에게 걸어도 되겠다 싶어서 결혼했다”고 합니다. 여성 여러분, 남자는 보호해 줘야 할 존재이지 믿고 의지할 존재가 아닙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여러분의 안전과 행복을 거셔야 합니다. 그 분께 의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가 자녀가 자기를 만족시켜주지 않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않아도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집착하고 중독이 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쏟아야 할 에너지를 그 대상에게 쏟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이지 절대 사랑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자기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던 것을 기억하세요. 예수님께서 자기를 배반하고 욕하고 모욕한 자들을 위해 목숨을 내 주신 것을 기억하세요. “그건 스데반이니까, 예수님이니까 그렇죠?” 그렇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살게 되는 최선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그 분의 삶이되기 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훈련하고 연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세요. 우리 죄인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까지 멸시했습니까? 틈만 나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우상을 섬기고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에서 먹이고 입히시며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예수 님 앞에서 외치던 자 들입니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언약을 박살을 내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그런 말을 들으시면서 “참 유대인들 나쁜 놈들이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게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위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신 그 언약을 십자가에서 지키시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모든 사랑은 의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와는 다른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내가 이러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점수를 따고, 내가 행해 놓은 여러 가지 선한 행위들이 다른 사람들 보다 나를 더 돋보이게 하고 더 나은 구원의 조건 속에 들어 있게 된다.“라고 믿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의무는 구원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 풍성하게 하늘의 것을 누리며 행복하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살 수 있는가에 관한 의무입니다.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안 이상,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누구나 하늘의 것들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갈 5:13)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너희들에게 주어진 그 자유로 무엇을 하라고요? 서로 종노릇하라는 것입니다. 종노릇이라는 것은 의무를 다 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실 때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누가 너의 이웃인지를 묻지 말고 네가 모든 이의 선한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쓰나미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분들을 여러분이 보시면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을 그들에게 보여 주세요. 한국 강원도에서 큰 화재가 났습니다. 낙산사가 홀랑 탔고 이재민이 생겼습니다. 불쌍합니까? 그러면 그들에게 여러분의 의무를 다하세요. 한국에 와 있는 동남아 근로자들의 딱한 사연을 가끔 봅니다. 불쌍합니까? 그러면 관심을 가지세요. 인터넷 앞에 앉아서 “한국이 썩었다느니 사회가 왜 그 모양이냐”느니 그렇게 입으로만 사회정화 밝은 사회 외치지 마세요.

 

인터넷 게시판에는 그렇게 애국자가 많은데 왜 나아지는 것이 없어요? 팔 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입만 살아서 그래요. 정말 그런 사회를 원하시면 여러분이 여러분의 것을 쏟아 부으세요. 여러분의 돈, 여러분의 힘, 여러분의 시간을 들여서 섬기세요. 어떻게 불쌍한 자들을 위해 밥 한 끼 굶어 보지 않고 그들을 위해 뺨 한 번 맞아보지 않고 어떻게 그러한 좋은 사회를 만들겠습니까? 입으로만 사랑, 사랑 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다하세요. 바른 선택을 하세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나 먹고살기도 바쁜데 이웃을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어요?“ 새벽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세계 인구가 먹는 한 끼 식사의 양과 가치를 조사해 보았더니 미국에 사는 사람이 아주 못 먹고사는 사람의 50배를 한 끼에 먹더라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샤워 하고 싶을 때 더운물을 틀어서 샤워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 인구의 3%에 불과 하다고요. 그러면 여기 계신 여러분은 한 분도 빠짐없이 다 나눌 것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기 배만 채우고 자기의 만족과 행복만을 추구하며 산다면 그게 어떻게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행 17:26)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여기서 쓰인 “헤노스 하이마토스“는 ”한 피를 나눈 형제“ 라고 할 때 그 ”한 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를 한 혈통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타락으로, 죄로 왜곡이 되어서 서로 미워하고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게 된 것입니다. 그 왜곡된 관계를 바로 잡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안 했습니까?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상대방의 반응에 개의치 않는 사랑을 하도록 노력 해야죠. 우리와 교리가 다르다고 해서 편 갈라서 저들은 적군 우리는 아군 이러면 안 됩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저는 강단에서 여러분이 다른 길에 미혹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을 향해 화살을 날리지만 여러분까지 그러시면 안 됩니다. 끝까지 사랑으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의무만 다 하세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오지에 나가 있는 진짜 선교사들은 의로운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 대회에 가보면 선교사님들이 가끔 “나는 그들을 진정 사랑하지 못 합니다” 하고 말씀들 하십니다. 진정 마음속에서 그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안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슴을 치시면서 자책을 하십니다. 굉장히 솔직하신 겁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사랑의 의미를 잘 못 오해하고 계신 거예요. 감정적인 사랑의 마음이 솟구쳐 오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있으라.” 하신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이 의로운 사랑입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사랑은 감정과 감성이전에 언약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사랑이라 한다.“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가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 내는 것이 진짜 의롭고 자유로운 사랑인 것입니다. 절대 위선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 바른 선택을 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창조물이 되신 거예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롬 6:6-11)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길 지어다“”reckon“ "로기조마이“는 아직 완전하게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여김으로써 점점 그 목적지로 가게 되는 것을 “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기세요.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보시고 실망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이미 영적으로 완성된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여기세요. 그리고 그러한 신분에 맞게 바른 길을 선택하세요. 우리 주님께서도 모든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까지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억지로 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요 10:18)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그런데 목숨을 내 놓으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그렇게 곰 살 맞고 사랑스럽게 굴어서 우리가 너무 좋아서 그러신 것입니까? 우리는 아직 주님의 원수이었을 때입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언약의 관계가 요구하는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십니다.

 

(마 16:24)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죽을 몸, 육신을 따라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른 선택을 하면서 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입니다. 그 길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의무입니다. 여러분 아까 이런 찬양 하셨죠?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이것은 하나님 말고 다른 어떤 유형의 무형의 것들을 이제 구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내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하나님께만 맡기겠다는 말입니다. 모든 집착을 끊어 내세요. 여러분은 하나님께도 사랑이 아닌 집착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나 신비적인 체험 같은 것만을 예배당에서 구하고 계시다면 그것은 집착입니다. 그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것에 자신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건 것이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 이제 하나님 한 분에게만 나의 전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걸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다 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여러분은 그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오늘처럼 말씀을 통해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소원을 주시고 행하게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 삶이 나오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죄의 종으로, 자기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스스로 책임지면서 무거운 짐을 지고 평생을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그들은 핑계치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들이 지옥에 떨어집니까? 여러분처럼 자유로운 사랑을 선택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삶을 산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두 말 못하고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아시겠지요? 이래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여러분에게 짐이며 부담입니까? 행복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 냈을 때 오는 희열과 감격을 맛보세요.

 

정리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 율법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것으로 수렴이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 사랑은 언약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잘 수행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행하며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여러분이 가장 행복하고 기쁘게 사시는 방법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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