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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오병이어와 예수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22.

 

 

오병이어와 예수 그리스도

 

(김성수 목사)

 

 

(요 6:1-14)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이제 요한복음의 네 번째 표적과 다섯 번째 표적이 들어있는 6장으로 왔습니다. 이 요한복음 6장은 71절에 이르는 아주 긴 장(章)입니다.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복음의 핵심이 아주 잘 설명이 되어 있는 장입니다. 요한은 두 가지의 기적과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 그리고 그 기적들에 대한 예수님의 강해까지 동원하여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생명의 떡을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의 떡을 좇는 사람들을 극명하게 대조하며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 공부를 할 것인데요. 먼저 그 기적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이 6장 전체에서 요한이 내어놓고 있는 문제점과 그 문제점에 대한 해답이 무엇인가에 대해 개괄적으로 짚은 후에 구체적인 설명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다시피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세상의 떡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람들에게 명쾌하게 전해지자 세상의 떡을 기대했던 이들이 모두 다 떠나가고 맙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에게까지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을 하실 만큼 철저하게 세상 떡을 구하는 자들에게 버려짐을 당합니다. 그러한 버려짐의 모습이 바로 십자가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세상의 떡을 기대하고 예수를 좇고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 반드시 예수를 떠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후에 예수님을 좇아와 억지로 왕을 삼으려고 했고 예수님을 가리켜 모세와 같이 자신들의 제 2의 출애굽을 이루실 ‘그 선지자’라 불렀습니다. 그러한 모습만을 본다면 그들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본 듯싶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떠나 산으로 도망가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누가 복음에 보면 심판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을 왕 취급하지 않는 자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눅 19:27) “27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왜 주님은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이들을 피해 산으로 도망을 가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유대신학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을 왕 삼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유대신학은 종말을 태초의 회복이라고 보았습니다. 구원의 시대에는 태초의 회복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아담이 잃어버렸던 낙원이 다시 회복된다는 것이지요. 우리도 알다시피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구원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출애굽 사건을 종말론 적으로, 동시에 태초론 적으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때에 에덴의 회복이 일어났었다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 구원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인 시내 산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태초에 있었던, 그러나 아담에 의해 상실된 하나님의 영광과 계시의 회복으로 보았습니다. 그건 유대신학이 일견(一見) 잘 본 것입니다.

 

(합 3:3~4) “3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도다 (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 하도다 4 그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 손에서 나오니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광명과 광선이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에게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출 34:29~33)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 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33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려온 모세에게서 하나님의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그 모세의 광채를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고후 3:7~11)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따라서 시내 산에서 모세와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셨던 그 빛은 태초에 아담에게 부어졌던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의 재현(再現)이었던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어떠한 것을 설명한 후에 곧 사라질 영광이었던 것이지 에덴의 회복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 사라질 영광을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수건을 쓴 것입니다. 그 영광의 광채가 눈이 부실까봐 수건을 쓴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유대신학이 그 시내 산의 빛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었다는 것은 잘 본 것이지만 그 영광이 회복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신학은 출애굽 때 광야에서 먹은 만나와 므리바의 물도 아담이 태초에 낙원에서 먹고 마셨던 천사들의 음식의 회복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유대 신학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태초의 회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이후 금송아지 사건이 터졌습니다. 유대 신학은 그 것을 아담의 타락의 재현으로 봅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제 2의 출애굽을 기다리며 제2의 모세인 메시아를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그들의 신학적 배경에다가 신명기 18장 15절에 나와 있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겠다고 하신 약속을 결부시켜 종말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와서 모세가 이룬 출애굽 구원을 재현하리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초에 잃어버린 낙원의 축복을 재현하리라고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낙원의 회복이 다윗 왕국에서 이루어지는 듯했는데 다윗 왕국은 그 후손의 때에 가서 다 망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에덴의 회복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았고 그들은 계속해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 메시아가 나와서 그들에게 다윗 왕국의 영화와 같은 태초의 회복을 이루게 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관점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표적을 이해한 것입니다.

 

첫 출애굽 때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먹이셨듯이 예수께서 첫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에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당연히 자기들의 신학적 관점에서 예수가 바로 신명기에 약속된 모세와 같은 선지자인 제2의 모세라고 생각하고, 모세가 이루었던 첫 출애굽을 재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서 건너가시는 사건은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을 더욱 강화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홍해를 건넌 것처럼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시는 것입니다. make sense한 해석이지요? 개혁신학의 해석도 그러한 유대신학의 해석과 대동소이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표적들을 또다시 이 아래의 세상 적, 물질적 관점에서 해석을 한 것입니다. 요한은 이 6장에서 그러한 유대교의 정치적 메시아사상과 물질주의적 구원관을 배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유대 신학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순히 출애굽 구원의 문자적 재현이 아닙니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와 사회 정의의 실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삶은 편안한 삶인 것은 분명하지만 영생을 주는 삶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이미 선민으로서 따 놓은 당상이므로 예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출애굽의 구원을 문자적으로 재현하여, 정치적으로 로마로부터 독립시켜 자유를 가져다주고, 만나와 물과 같은 경제적 풍요를 주고, 시내 율법에 의한 사회 정의를 재현하는 메시아로 생각을 해서 예수님을 붙잡고 모세와 같은 지도자요 왕으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영적 메시아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와 사회적 자유를 얻으려고 예수님에게 몰려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게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다 죄인이므로 그들 모두에게 공히 영생을 주시는 메시아가 필요함을 밝히셨습니다.

 

(롬 3:9~12) “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예수님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요한복음 6장에서 그렇게 엉뚱한 구원관과 메시아 관을 갖고 있는 유대인들과 오늘날의 교회에게 친절하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강해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이 공히 원하는 이 세상의 떡으로 배불리 먹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 6:26)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세상의 떡 때문에 나를 찾아온 자들은 다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경고는 6장 서두에서 이미 암시가 되어 있습니다.

 

(요 6:2)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애초에 빈들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이 병을 고치신 것을 보고 그게 신기해서 모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을 좇는 이들에게 그런 세상 적 기적을 경험케 해 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시라는 결론이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떡이 아닌 본질적 생명, 즉 영생을 주기 위해 당신 자신이 떡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임을 거듭 천명하십니다.

 

(요 6:32~33)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5)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성경은 이 오병이어의 떡을 만나와 비교해서 자주 설명을 합니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내린 출애굽 광야의 만나도 하늘로부터 내려와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떡의 예표였던 것이지 단순히 인간들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양식으로 내린 것이 아닙니다.

 

(요 6:53-58)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그렇지요? 그렇게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최후의 만찬으로 이어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영생을 가져다주는 그 생명의 떡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막 14:22~24) “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붙잡히시던 날 밤에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이렇게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으로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 그림이 미리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예표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구절만 비교해 보고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마 14:19)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같은 그림이지요? 그런데 최후의 만찬이 언제 있었던 일이지요? 유월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배경은요? 역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첫 유월절인 출애굽 구원을 기념하고 종말에 그 유월절 구원의 재현을 기대하는 절기입니다. 최후의 만찬과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러한 유월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사건들이 새 유월절의 구원, 즉 출애굽 구원의 종말론적 성취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 사건들이 내용으로 담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진정한 출애굽 구원의 종말론적 성취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과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 떡을 부수고 포도주를 붓는 행위를 통해 당신의 잔인한 죽음을 예표로 보이셨던 것이고 그러한 당신의 잔인한 죽음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영생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실은 이미 이사야서에 예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 53:4-11)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어떤 이가 많은 죄인들을 대신해 속건 제물로 드려지고 죄인들이 살아나게 되는 이러한 구원의 현실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상징적 드라마를 통해 표현된 것이고,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통해 미리 예표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허락된 생명을 우리는 영생이라 부릅니다. 성경에서 영생이라는 단어는 자주 생명이라는 단어와 상호 교환적으로 쓰입니다.

 

(요 5:24)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보시다시피 영생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던 자들이 다시 살아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종종 영생을 그냥 생명이라는 단어와 상호 교환해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굳이 이러한 것들을 설명해 드리느냐 하면 왜 성경이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떡이라고 부르고 있는지를 부연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떡이지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밥이지만 유대인들은 떡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생명인 영생을 주는 것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하늘의 떡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가리켜 하늘의 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여러 차례 설명해 드렸다시피 시간적으로 긴 생(生)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문자적으로는 ‘오는 세상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이 개념은 원래 헬라의 공간적 이원론이 아닌 히브리적인 시간적 이원론을 전제하는 개념입니다. 그렇다고 구원을 시간적 이원론으로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래도 영생을 설명하는 데에는 히브리적인 시간적 이원론이 적합하기에 시간적 이원론에 근거하여 설명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적 이원론 하에서 이 세상 다음에 오는 세상이란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합니다. 따라서 영생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처소로서 사랑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담아내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는 세상의 삶’이라는 히브리 적 표현을 헬라 적 표현으로 바꾼 것이 ‘조에’ ‘영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 ‘오는 세대’가 ‘이 세대’로 뚫고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간적 이원론만으로는 구원과 영생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 이 세대 안으로 오는 세대가 뚫고 들어와 두 세대가 공존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말은 오는 세대의 사람들이 이미 역사 속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대와 오는 세대를 구분하는 정상적인 시간적 이원론에 의하면 자칫 구원과 하나님 나라는 내세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헬라의 공간적 이원론은 말할 것도 없고요. 오늘 날도 많은 분들이 천국을 그렇게 공간적 이원론에 의해 이해를 하셔서 천국은 마치 먼 훗날 미래에 우리가 가야 하는 어떤 곳으로만 알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뚫고 들어와 있다고 분명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장소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누차 설명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어떤 무리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가리켜 하나님 나라라 부르는 것입니다.

 

아울러 존재론적 이원론에 근거하여 육신과 영혼을 구별하여 구원은 영혼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알고 계신 분들도 많은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전인적인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이 모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들로 인해 오늘 날의 구원과 영생은 과격하게 추상화 되어서 오로지 관념적으로만 있지 경험의 대상이 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구원은 시간적 이원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미래의 어느 날 우리에게 오는 것도 아니고, 공간적 이원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곳이 아닌 저 먼 어떤 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존재론적 이원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영혼만 둥둥 떠다니는 그런 곳에서의 영혼의 구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가 구원과 그로 인한 영생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이 땅에서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다른 말로 영생을 경험하는 구원의 현실화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지난 주일의 접근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을 해 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영생은 오는 세상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생은 사망에 처해 있던 자가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요한복음 5장 24절이 밝히고 있지요? 그렇다면 사망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 사망에서 벗어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겠지요?

 

로마서 6장 23절에 보면 사망은 죄의 삯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 함으로 인간이 처해지게 된 상황이 바로 사망입니다. 그 말은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풍성하게 부어져야 할 하나님의 생명력이 단절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들은 스스로를 자신 안에 있는 제한된 자원 속에 가두어 버렸고 거기에서 오는 결핍으로 인간들은 고통을 겪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결핍으로 다툼과 전쟁의 고통을 겪게 되고, 지혜의 결핍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능력의 결핍으로 여러 가지 문제들 속에서 고통을 겪게 되고, 시간 속에 갇힘으로 변화의 노예가 되어 늙고 병들고 죽어가며 장소적 속박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게 사망의 상태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사망의 상태를 잘 설명해 주는 것이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은 하나님을 떠나버린 죄인들이 가지고 있는 제한적 자원을 상징하는 아버지 재산의 일부인 유산을 받아들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아버지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가 자기 아버지 곁에 있었더라면 그 무한한 아버지의 재산이 모두 자기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상태가 성경이 말하는 ‘의’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義)는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고 했지요? 그러한 의로운 상태에서는 아버지와 자녀가 서로의 처소가 되어 아버지가 누리는 모든 것을 자녀가 누리게 되는 상태인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종속 관계나 주종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를 가리킨다고 했지요? 그 것이 탕자의 비유에 어떻게 표현이 되어 있는지 보세요.

 

(눅 15:31)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보시다시피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는 그 아버지의 자원을 모두 자기 것으로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둘째 아들도 제한된 자원인 아버지의 유산을 달랑 받아들고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 아버지의 것이 모두 그 둘째 아들의 것이 되어 풍성한 삶을 오래도록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둘째 아들은 어리석게도 그 아버지에게서 제한된 자원을 받아들고 아버지를 떠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에덴에서의 아담의 모습인 것입니다. 결국 그는 제한된 자원인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돼지와 함께 쥐엄 열매를 주워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게 사망입니다. 인간들은 지금 주어져 있는 제한 된 자원을 가지고 마치 자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지만 결국 그 제한 된 자원이 끊어지게 되면 영원한 결핍인 사망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생은 아버지를 떠나 제한된 자원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며 결국 영원한 고통 속으로 떨어지게 될 자들이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려보내져서 아버지의 풍성한 자원을 자기 것으로 쓸 수 있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눅 15:24)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 하더라”

 

그 제한된 자원을 들고 떠나갔던 아들이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와서 아버지의 반지를 받아 상속자가 되는 것을 가리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 생명이라 합니다. 따라서 영생이라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원래의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그 결과로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과 그 분의 생명에 참여하며 그러한 하늘의 것들을 발산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한단어로 축약을 하면 사랑이라고 했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이중 계명 ‘혼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명령을 좇아 사는 것으로 영생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고 영생을 세상에 보여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영생이 완성이 되는 것이 진정한 해갈이고 진정한 배부름인 것이며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것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담고 있는 메시지 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자기 자신만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다툼과 전쟁과 불안과 불평등의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평등과 정의와 풍요가 넘치는 곳이 될 것입니다. 그 곳을 천국이라 합니다. 그게 진정한 만족이며 진정한 행복이며 진정한 안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배부름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빵을 찢듯 갈기갈기 찢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렇게 사랑의 이중 계명을 좇아 열심히 살아내면 이 땅이 천국처럼 변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이 땅이 천국이 되려면 모든 인간들이 하나같이 다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이용하지요. 게다가 성도들의 사랑의 삶이 지속적이지도 못해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간혹 나오게 되는 사랑의 삶, 영생을 맛보며 그 영생이 영원히 지속되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정의나 평화, 정치적 자유 등을 목표로 사회 개혁을 외치는 민중 신학이나 해방 신학은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성도들이 개혁을 외치고 실천에 옮긴다 할지라도 성도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함께 사회개혁을 해서 평등과 정의와 자유가 넘치는 지상낙원을 만들어 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사랑하는 삶, 영생의 삶을 살아냄으로 해서 가끔 사회 정의나 평화나 정치적 자유 등의 구원의 현재화 모습이 보여 질 때가 있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택하셔서 모든 인간을 구원해 주시지 않는 한 이 땅에서의 진정한 사회 정의나, 평화나, 진정한 자유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역사의 비관적인 관망 속에서 이 세상의 떡으로 상징되는 세상 적 만족이나 행복이나 세상 적 안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생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그 삶을 열심히 기대하며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구체적으로 공부해 보겠습니다. 먼저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 어디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요 6:1)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곳은 갈릴리 바다 동편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를 머릿속에 떠 올려 보세요.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갈라집니다. 그 요단강 북편에 갈릴리 바다가 있고 남쪽에 사해가 있습니다. 그 요단강 동편은 광야이고 서편은 가나안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요단 동편에서 요단강을 건너 요단 서편인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곳은 광야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나 마가, 누가는 그 곳을 정확하게 광야, 빈들이라고 표기를 합니다.

 

(마 14:13)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막 6:35) “35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눅 9:12) “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 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들 이니이다”

 

여기에서 빈들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레모스’는 광야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일부러 오병이어의 기적이 베풀어지는 곳이 광야였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복음서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바로 출애굽기의 광야 만나 사건과 연결시키기 위해 일부러 ‘에레모스’ ‘광야’라는 무대장치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것만이 아닙니다.

 

(막 6:39~40)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광야에 있는 유대인들이 오십씩, 백씩 모여 앉았다고 합니다. 출애굽 광야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나누어져 있었지요? 오십 부장, 백부장에 의해 오십씩, 백씩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로 시험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도 시험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 5절을 보세요.

 

(요 6:5-6)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주어가 ‘우리’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빌립과 함께 그 문제의 해결에 나서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라는 단어 안에서 지금 당면한 결핍의 문제를 풀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빌립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지금 당면한 문제를 우리가 되어 함께 푸시겠다고 하시는데도 여전히 돈이 모자라는 것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자원으로 생존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성도는 세상의 떡이 부족하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는 자들이고 세상의 떡이 많다고 해서 기고만장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분의 은혜를 받는 것에서 행복과 만족과 해갈과 배부름을 느껴야 하는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고 계신데 빌립은 이 세상의 떡이 없음을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어떻게’라고 묻지 않으시고 ‘어디서’라고 물으십니다. 그 말은 ‘어떻게’ 떡을 살 것인가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말 속에는 이미 너희의 배를 채울 떡을 살 능력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떡이 어디서 오는 떡인가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세상이냐? 하늘이냐?’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그러한 예수님의 속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여전히 걱정이 태산입니다. 자기는 뱃세다 사람이기 때문에 어디서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돈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시험에서 낙방을 한 것입니다. 바로 이 시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시험이었습니다.

 

(신 8:2-3)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것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잘 새겨보면 시험의 대상자는 만나를 먹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인 것입니다. 만나를 먹는 것 자체가 시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오늘 본문에서 시험을 받는 사람은 비단 빌립 뿐 만이 아니라 그 곳에서 빵과 고기를 얻어먹은 모든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빌립은 지금 그 곳에서 오병이어의 떡과 고기를 먹게 될 모든 유대인들의 대표로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시험받고 있는 빌립의 모습 속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넌지시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시험이 구체적으로 어떤 시험이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떡을 원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보잘 것 없고, 형편없고, 모자랄 때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합니다. 그 때 애굽의 고기와 부추와 마늘과 같은 만족스럽고 풍성하고 화려한 것들이 주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아주 기뻐하고 행복해 하지만 만나와 같은 보잘 것 없는 것이 주어지면 (what is this? nothing : 만나라는 단어의 의미) 처음에는 잠시 자신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는 만나가 고맙다가도 그 초라함과 모자람에 금방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지요. 그렇다고 인간들에게 그들이 좋아할만한 부추와 마늘과 고기를 준다고 해도 인간들은 절대 그 것들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험이 출애굽 광야에서의 만나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어떤 상황에서 주셨습니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굶주려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을 그리워하고 있을 때에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 속에는 ‘너희가 정말 배만 부르면 나를 원망하지 않고 나의 말에 순종할 수 있겠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나요? 금방 다시 불평이 쏟아져 나왔지요?

 

인간은 절대 육신의 배고픈 것이 해결된다고 해서 만족할 수 있거나 행복해 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주어진다고 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 텅 빈 가슴 속에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절대 인간은 행복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것을 충만히 받아 누릴 때에만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게 만나의 시험의 정답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병이어의 기적에 동원된 보리떡과 물고기 두 토막은 바로 그러한 보잘것없는 세상 것의 상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보리는 그 당시에도 짐승이나 가축의 먹이로 쓰던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리는 간음한 여인이 속죄 제사를 지낼 때 드리던 제물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간음한 여인은 짐승과 같은 자이므로 짐승이 먹는 보리로 제사를 지내게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보리떡은 보잘 것 없음의 상징이었습니다. 신약의 만나인 것입니다. 그 보리떡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졌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주셨지요? 그리고 제자들이 그 떡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족히 이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리떡을 먹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리떡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자 그 것이 카스테라나 단팥빵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왕이면 더 좋은 음식으로 바꾸어 주시지 왜 그냥 보리떡으로 일관하셨을까요? 주님은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만나 시험과 동일한 시험을 그들에게 주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구약의 만나 사건과 연결하여, 보잘 것 없는 세상 것들로 만족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며 절망하는 인간의 실존을 폭로함과 동시에 이 세상 것들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들의 만족과 행복을 채워줄 수 없음을 그 오병이어의 시험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유대인들이 굶주려 있을 때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고는 예수님께 열광하며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계속해서 짐승들이 먹는 보리떡을 만들어 주셨다고 가정해 보세요. 유대인들이 며칠이나 행복해 했을까요? 아마 며칠 못가 그들의 요구는 더 커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의 만족은 이 땅의 떡이 아닌 하늘의 떡인 예수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교회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세상의 그 어떤 힘과 풍요도 오병이어나 만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이 땅의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떡인 예수가 우리와 연합하여 함께 하시게 될 때, 다른 말로 우리 안에 하늘의 것이 가득 채워질 때에 우리는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빌립에게 ‘우리가’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이고 우매한 세상 사람들을 대표하는 빌립은 세상의 떡이 없음으로 걱정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이 세상에서 자기의 육신의 배를 불리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던 자가 창세기에도 나오지요? 에서입니다. 에서는 자기 배를 채울 팥죽과 하나님의 축복의 계승이라는 장자 권을 바꾸어 버립니다. 영적인 것보다는 당장 자기 배를 채울 팥죽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게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에서의 팥죽과 광야의 만나와 신 광야의 오병이어는 모두 그 것으로는 절대 인간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는 부질없는 이 세상의 것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것이 결론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출애굽 광야에서는 그 시험에 낙방한 사람들이 모두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약의 광야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낙방을 했지만 죽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요? 그 사실은 어떤 상징을 담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구약시대보다 더 착해지신 걸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이들을 대표할 수 있는 어떤 자격 있는 분이 대표로 그 시험을 받았다는 말이 되지요?

 

(눅 22:28)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주님은 우리 성도들이 받아야 할 모든 시험을 우리를 품에 안고 대신 다 받아내셨던 것입니다. 그 광야의 시험, 만나의 시험을 예수님께서 역시 광야에서 받으십니다.

 

(마 4:1-4)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년 시험을 사십일 동안에 받으시는데 합격을 하시지요? 그 광야의 시험에서 정답을 말씀하세요. 4절 보세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그렇게 해서 신약의 광야에서 시험에 실패한 자들이 버젓이 살아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찢고 피를 퍼내어 아직 하나님의 원수들이었던 당신의 백성들에게 먹이고 마시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광야의 만나와 신 광야의 보리떡과 물고기는 그렇게 세상 것으로 일희일비하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폭로하는 세상의 떡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소품이었을 뿐 아니라 정말 보잘 것 없는 보리떡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나 그 보잘것없는 모습의 하늘의 떡이 굶주린 당신의 백성들에게 참 생명을 주는 것임을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소품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나와 오병이어는 세상 적 관점에서의 상징과 영적 관점에서의 상징의 이중적 상징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실패의 십자가요 패배의 보리떡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이지만 오직 그 예수만이 우리를 충만하게 채워줄 수 있고 우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 광주리가 남은 것입니다. 충만히 흘러 넘쳤다는 것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미 열왕기하에서 모형으로 나타났던 기적입니다.

 

(왕하 4:42~44) “42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43 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 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44 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

 

여기는 보리떡 20개지만 여기서도 다 먹고 남았습니다. 역시 보리떡과 같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예수님에 의해 풍성한 하늘의 생명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채워지는 모양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의해 우리의 진정한 결핍이 채워지는 그림을 아주 잘 그려놓은 곳이 시편 23편입니다.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모습과 오늘 본문을 비교해 보세요.

 

(요 6:10-13)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사람들이 다 서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식사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그들을 먹일 것이 있으니 그들에게 식사 자세를 취하라고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참된 양식이 우리에게 올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뒤에 보면 그 곳에 잔디가 많다고 하지요? 푸른 초장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받아먹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다 주셨습니다. 거기에 참된 만족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내 잔이 넘치도록 풍성한 행복과 만족과 기쁨과 안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구원을 우리가 받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현실을 보면 전혀 잔이 넘치는 것 같지 않으시지요? 오히려 보리떡같이 보잘 것 없는 인생처럼 보이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보리떡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 삶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의 잔이 지금 비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니요. 여러분의 잔은 지금 충만히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신 여러분의 잔에서는 지금 사랑과 온유와 섬김과 용서와 인내와 절제의 열매들이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잔은 반드시 그러한 성령의 열매로 넘치게 될 것이고 지금 여러분의 영적 현실은 이미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이 흘러넘치는 상태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보리떡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넘치는 하늘의 영생을 우리의 잔에 채우는 훈련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는 그 날 우리와 하나님이 서로 처소가 되어 하나로 연합이 되어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영원한 자원을 받아 그 하나님의 것들을 밖으로 흘려보내는 넘치는 삶, 진정한 만족의 삶, 결핍으로부터 해방된 돌아온 탕자들이 되어 영원한 행복 속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때를 가리켜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다시는 배고프지 않는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 7:14~17)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 임이러라”

 

바로 이 요한계시록의 결론이 오늘 본문인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양식은 이 세상의 떡이 아닙니다. 우리를 진정 만족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만이 우리를 소망으로 이끌 수 있으며 우리는 그 소망을 품고 이 광야 같은 땅에서 진정한 만족과 기쁨과 안식과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분께 의존하여 살 때 가장 배가 부른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병이어의 기적은 복음을 설명하는 표적이지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튀겨서 되돌려 주신다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동일한 기적이 또 한 번 있었지요? 칠병이어의 기적입니다. 그 때도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사천 명이 먹고 일곱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 것을 오병이어사건의 오병이어와 오천 명과 남은 음식 열두 광주리와 비교해 보세요. 유대인들은 숫자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들을 담는 다는 것을 전에 말씀드렸지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보리떡 다섯 개와 오천 명에 나오는 5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모세 오경. 그러면 열둘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요? 이스라엘 열두지파지요.

 

그 것과 비교해서 칠병 이어와 남은 음식 일곱 바구니의 7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와 대조적으로 가나안 일곱 지파를 떠오르게 했을 것이고 사천 명의 4는 요한 계시록에서 공부한 것처럼 사방위로 상징이 되는 이방 세상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로 무리를 먹이신 사건은 오병이어의 사건이 유대인들의 구원에 관한 메시지였다면 칠병이어는 이방인의 구원을 같은 그림으로 보여주신 것이라는 결론이 나지요? 이렇게 예수님의 표적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영생의 복을 받게 되는 요나의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전체 문맥상으로 보더라도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복음을 설명하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오셔서 천지창조의 순서 그대로 새 창조를 이루실 것임이 그대로 드러나고 2장에서 사흘 되던 날에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하나님과 교회의 혼인잔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완성이 될 것임을 보여주신 후에 성전을 정화하시는 모습 속에서 구약의 옛 성전인 율법이 파괴되고 은혜의 성전인 새 성전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이 완성될 것임을 보여주신 후에 3장에서 니고데모를 만나심으로 인간 쪽에서 구원에 기여할 것은 아무 것도 내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복음을 전하시는 사건에서 인간 쪽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아무 것도 내어 놓을 수 없지만 하나님이 찾아가시는 자는 어떠한 죄인일지라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상반된 그림을 보여 주시고 5장에서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심으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보이시고 그러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인 것입니다. 다 이해가 가시지요?

 

우리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구원을 받은 수지맞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광야의 유대인들처럼 세상의 떡에 관심을 갖고 사시면 안 되는 분들인 것입니다. 하늘의 떡 예수 안에서만 참 해갈과 참 된 배부름이 있습니다. 세상의 떡이 아닌 하늘의 떡으로 여러분의 배를 채우세요.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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