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할 때 강함 되시네(I)
(김성수 목사)
(계 11:7-13) “7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에, 아비소스('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을 일컫는 그리스어, 무저갱)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서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시의 넓은 거리에 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 또는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곧 그들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입니다. 9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 두 예언자의 시체를 볼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10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 시체를 놓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것은 이 두 예언자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2)생명의 기운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12 그 두 예언자가 "이리로 올라오너라" 하는 큰소리가 하늘로부터 3)자기들에게로 울려오는 것을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13 그 시각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그 도시의 십분의 일이 무너졌는데, 그 지진으로 사람이 칠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살아 남은 사람은 두려움에 싸여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제가 일 년 전에 요한계시록 강해를 시작하면서 여러분께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제 나름대로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어떠한 책을 읽을 때 미리 구조를 알고 그 구조를 염두에 두고 책을 읽으면 훨씬 더 이해가 빠르고 쉽기 때문에 많을 시간을 내서 나름대로 열심히 분석을 해서 여러분께 알려 드렸습니다. 제가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요한계시록은 점진적이며 점층적이며 반복적인 기법으로 기록이 된 책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러한 관점에서 구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한 절 한 절 풀어가다 보니까 조금씩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나오더라고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일곱 재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저는 그 일곱 재앙, 인의 재앙, 나팔 재앙, 대접 재앙이 같은 재앙을 반복적이며 점층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보았고 많은 성경학자들도 그렇게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을 여러 참고 서적들을 보며 확인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절 한 절 풀어 가다 보니까 그 내용이 같지 않아요. 분명 인의 재앙은 자연재해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고 나팔 재앙은 영적이며 정신적인 재앙의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중에 공부하겠지만 대접 재앙도 그 내용이 다릅니다. 그리고 17장에서 음녀의 심판이 나오고 18장에서는 바벨론의 심판이 나옵니다. 그리고 19장에서는 거짓 선지자의 심판이 나옵니다. 저는 이 심판도 같은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기라성 같은 신약 신학의 대가들도 전부 그렇게 봅니다. 그런데 잘 보면 17장의 음녀는 다른 신을 섬기게 하는 세력, 즉 혼합주의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18장의 바벨론은 경제적 정치적 힘을 추구하게 만드는 악한 세력에 관한 심판입니다. 그리고 19장의 거짓 선지자는 신비주의, 기적 등을 가지고 성도들을 미혹하는 세력입니다. 보시다시피 다 다른 내용입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세대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이 부분을 걸고 넘어왔을 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참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던 차에 제 스승님께서 요한계시록의 대가인 리처드 보캄 교수님의 아직 발표되지 않은 논문집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제가 요한 계시록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 청년들에게 필독서로 한권씩 나눠준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저자이신 합동신학교의 이필찬 교수님이 그 분의 책에서 많이 인용하신 그 논문집입니다. ‘The climax of prophecy’ 역시 대가는 대가구나 하는 감탄이 나오더라고요. 제가 이번에 참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 스승님께서 한마디 힌트를 주셨습니다. ‘디즈니랜드의 입체 영화관을 생각하라’
여러분 가보셨어요? 그 극장은 돔형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그 천정 전체가 모두 스크린입니다. 그래서 한 눈에 다 볼 수가 없어요. 동쪽 화면에서는 농부가 씨를 뿌립니다. 서쪽 화면에서는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놉니다. 남쪽 화면에서는 아낙네들이 빨래를 합니다. 북쪽 화면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 전체는 일시에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의 시야가 그리 넓지 못하기 때문에 따로 따로 봐야 다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지금 교회시대라는 한정된 시간동안에 동시에 일어나는 일들을 따로 따로 환상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 ‘또 내가 보매’인 것입니다. 요한은 동쪽 화면에 그려진 환상을 보고 그 환상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일어나는 서쪽 화면의 환상을 그 다음에 봅니다. 그 환상을 다 본 다음에 또 동시에 일어나는 남쪽 화면의 환상을 보고, 그 다음에 북쪽 화면의 환상을 보고, 그것들을 ‘또 내가 보매’라는 단어로 연결해서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요한계시록은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교회시대라는 한정된 시간동안에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보고 반복하여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재앙의 내용도 분명 교회 시대 동안에 한꺼번에 세상에 내리는 것들을 각기 다른 화면으로 보고 각기 다른 관점에서 기록을 해 놓은 것입니다.
한번은 자연재해의 장면을 보고 기록하고 한번은 영적, 정신적 재앙의 화면을 보고 기록하고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강도는 종말로 가면서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4분의 1, 3분의 1 이런 숫자를 동원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요한계시록이 끝날 때까지 그 개념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입체영화관’ 아셨죠? 요한계시록에는 ‘또 내가 보니’라는 단어가 스무 번이 넘게 나옵니다. 그 때마다 요한은 다른 화면을 보는 것입니다. 그 관점에서 11장을 보시면 훨씬 이해가 쉽겠지요? 요한은 9장까지에서 교회 시대 동안에 내릴 재앙들을 설명하다가 다른 화면에 비친 장면, 즉 그 교회 시대동안 교회는 어떤 식으로 재앙에 노출이 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두 증인에 관해 공부하면서 두 증인은 하나님의 백성들, 즉 교회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두 증인에게는 예언 사역, 복음 증거의 명령이 떨어졌고 그들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교회 시대 내내 삶으로 입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권세가 주어졌는데 그 권세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와 같은 왕 같은 제사장의 권세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의 전투에서처럼 그들은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 것이라는 것도 함께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모습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 6절까지의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7절부터는 교회의 삶이 더 구체적으로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계 11:7)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가(두 증인)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두 증인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고 그 두 증인을 죽입니다. 이 구절 역시 문자 적으로만 보면 먼 훗날에 일어날 사건으로만 보입니다. 먼 훗날에 교회가 그 증거를 다 마치면 그 때 무저갱에 갇혀있던 짐승이 올라와서 두 증인을 죽이는 것으로 충분히 해석을 할 수 있지요? 여기서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에서 올라 온 짐승이 두 증인을 죽인다는 것’은 두 증인, 교회는 그 증거의 삶을 완전히 마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아나바이논’은 명사형 분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시제를 나타내는 단어가 아니고 성격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이라는 구절은 언젠가 마지막 때에 올라오게 될 짐승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록에 처음 등장하는 ‘짐승’이라는 놈이 ‘어떤 놈인가’ 그 신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짐승이 마귀의 처소인 무저갱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악마적인 기원과 성격을 나타내 주는 수식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두 증인이 증거를 다 마친 다음에 ‘그 다음에 무저갱으로부터 기어 올라온다’라는 시간적인 순서로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이 11장 7절을 20장 7절 이후에 나오는 곡과 마곡의 전쟁과 연결해서 마지막 때에 더욱 잔인하게 기승을 부릴 악마의 세력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 틀리지 않습니다. 사단은 지금 무저갱에 갇혀있고 그는 종말이 가까울수록 더욱 기승을 부리다가 최후의 종말의 때에는 더욱 더 잔인하게 교회를 핍박할 것입니다. 그것을 그 ‘마귀가 무저갱에서 풀려난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죠. 분명 그런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지금은 안심해도 되나요? 아니죠? 마귀는 지금 무저갱에 결박당해 있다고 하는데 지금 그 마귀가 아무런 활동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물기 위해 우리의 문 앞에서 늘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뭅니다. 최후의 종말 때 성도들이 마귀에게 당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 그 고난의 삶을 성도들은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가 무저갱에 갇혀있다는 의미가 무슨 의미인가? 여러분이 이 개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마 12:26-29) “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자 바리새인들이 ‘저가 바알세불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마귀가 마귀를 쫓아 내냐? 내가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를 건져내는 것은 그 사로잡고 있는 자를 내가 결박하고 건져내는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단의 종노릇을 하고 있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 구원의 사건을 예수님께서 ‘내가 사단을 무저갱에 결박했다’라고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해 내는 것을 마귀는 전혀 방해를 할 수 없게 된 것, 그게 ‘마귀가 무저갱에 결박되어져 있다’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그 마귀가 예수님께 자기의 세간을 늑탈 당하고 가만히 있을 존재가 아니죠? 자기가 빼앗긴 세간을 멸망의 순간까지 다시 빼앗아 오기 위해 발악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과 마귀가 전쟁을 한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고 그 마귀가 성도들을 죽인다는 표현이 7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최후의 종말 때에 마귀가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되는 그 처절한 죽음의 삶을 지금도 맛보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두 증인이 무저갱에서 올라 온 짐승에게 죽습니다. 여기 짐승이라는 단어 ‘떼리온’ 앞에 ‘토’라는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짐승’ 이라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처음으로 짐승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 짐승’이라고 관사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 말은 당시 이 요한계시록을 처음 받아 읽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짐승’하면 어떤 짐승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는 얘기죠? 어떤 짐승일까요? 다니엘 서 7장의 짐승입니다.
(단 7:2-7) “2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바다는 무저갱과 같은 개념) 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7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네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네 짐승을 보았는데 그 짐승들이 사자 같고, 곰 같고, 표범 같고, 열 뿔이 있는 무서운 짐승입니다. 다니엘서 자체가 그 짐승이 무엇인지 해석을 해 줍니다.
(단 7:17-26) “17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18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19 이에 내가 네째 짐승의 진상을 알고자 하였으니 곧 그것은 모든 짐승과 달라서 심히 무섭고 그 이는 철이요 그 발톱은 놋이며 먹고 부숴뜨리고 나머지는 발로 밟았으며 20 또 그것의 머리에는 열 뿔이 있고 그 외에 또 다른 뿔이 나오매 세 뿔이 그 앞에 빠졌으며 그 뿔에는 눈도 있고 큰 말하는 입도 있고 그 모양이 동류보다 강하여 보인 것이라 21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22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위하여 신원하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가 나라를 얻었더라 23 모신 자가 이처럼 이르되 네째 짐승은 곧 땅의 네째 나라인데 이는 모든 나라보다 달라서 천하를 삼키고 밟아 부숴뜨릴 것이며 24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25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26 그러나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요”
계시록 11장과 아주 흡사하지요? 여기서 짐승이 무엇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까? 바벨론, 메데, 바사, 로마 같은 이스라엘의 대적국가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 짐승에 달린 뿔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짐승이 성도들과 싸워 이긴다고 나오지요? 그러니까 그 짐승은 이스라엘의 대적 국가들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교회시대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세상 권세 잡은 마귀의 세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세력이 성도들과 싸워 이깁니다. 성도들은 죽습니다. 그 일은 분명 우리의 신앙의 여정동안에 일어 날 일들입니다. 계속해서 8절을 보시면 좀 더 명확해 집니다.
(계 11:8)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그 두 증인의 시체가 어디에 놓이게 됩니까? 큰 성 길에 놓입니다. 그런데 그 성은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며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예루살렘이라고도 합니다. 먼저 큰 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에 큰 성이 여러 번 나옵니다.
(계 14:8)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 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계 16:19) “19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계 18:2) “2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아니겠지요? 그럼 그 큰 성 바벨론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계 18:21-24)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22 또 거문고 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취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24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가 이 성중에서 보였느니라 하더라”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 그 큰 성 바벨론 안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선지자들과 성도들이 모두 바벨론에서만 죽었나요? 아니죠? 그러니까 그 큰 성 바벨론은 역사적이며 국지적인 어느 한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그 큰 성 바벨론은 어디를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마귀의 손아래 놓여 있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큰 성은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고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이다’라고 하는 구절이 그 의미를 더 확실히 해 주죠. 소돔이 어디입니까? 그 패역함과 타락이 극에 달해서 하나님이 불로 멸망시켜 버린 곳이죠. 애굽은 어디입니까?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한 곳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곳은 어디죠? 그 곳은 단순히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못 박아 죽이는 악마 적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증인이 죽어서 큰 성 길에 내 버려졌다는 것은 우리 교회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죽은 시체처럼 버려질 정도로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계속해서 9절을 보시면 세상이 어떻게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시하는가가 나옵니다.
(계 11:9)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죽은 시체를 길바닥에 던져놓고 장사도 지내주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장사를 지내주지 않는 것은 당시 고대 사회에서 가장 극악한 모독 행위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렇게 모독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왜 그렇게 세상이 우리를 멸시하게 되는 겁니까? 그 이유가 10절에 나옵니다.
(계 11:10)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교회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했기 때문에 세상이 교회의 고난을 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특징이 뭡니까? 죄의 특징은 전염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늘 공범을 만들려고 합니다. 많은 공범을 만들어 놓아야 자기의 범죄 행위에 대해 죄책감이 덜 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해도 반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이 서너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공범을 더 만들려고 친구들에게 흡연을 권장합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과 친해져서 함께 다니게 되는 아이들은 여지없이 담배를 피우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어디서 야한 책, 도색잡지 같은 것을 구해오면 꼭 반 전체에 돌립니다. 죄는 끊임없이 공범을 만들려고 시도를 하고 아주 강한 전염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무리가 나타났는데 전혀 그 죄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그 무리를 미워하게 되고 심지어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추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그런데 어떤 녀석들이 빛이 되어서 자꾸 자기들의 추한 모습을 비춰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빛을 밟아서 꺼 버리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선교사님께서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를 떠나셨습니다. 그 선교사님께서 거처를 정하시고 문 밖 나무에 거울을 걸어 놓으셨답니다. 사람들이 와서 그 신기한 물건을 이리저리 관찰을 했습니다. 잠시 후에 그 마을 추장 부인이 그 선교사님을 찾아왔습니다. 통역을 통해서 그 부인이 이야기하기를 ‘저 밖에 매달려 있는 물건 속에 웬 괴물이 들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그건 거울이라는 것이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다’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 추장 부인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 거울을 팔라고 선교사님께 졸라대었습니다. 그 선교사님께서 그 거울을 그 추장 부인에게 주자 그 부인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 거울을 박살내 버렸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부끄러운 것이나 어두운 것들을 감추고 싶어 합니다. 아니면 많은 공범을 만들어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 합니다. 그게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이 왜 그 빛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꺼 버렸습니까? 그 빛이 자꾸 자기들보고 ‘너희는 어둠이다. 너희들 회개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하면서 자기들의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께서 목사와 설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여러분은 기독교를 너무나 감상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예수님을 사모한다고 하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지금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성도라고 자처하면서 예수님을 예배하고 있는 예배당에 나타나신다면 그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또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어두움 속에서 빛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정말 예수님이 보고 싶으세요? 그 분이 오셔서 여러분을 그 분의 빛으로 비추시면 여러분은 지금 그 예수 님 앞에 당당히 서실 수 있으세요? 아니면 ‘누가 나의 이 부끄러운 부분을 들춰내는 거야?’ 하면서 돌로 치실 겁니까?
여러분,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맞다 면 정말 우리 이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보고 찔림을 받기는커녕 세상이 교회를 걱정해 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코미디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 우리는 세상이 우리가 존재함으로 찔림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는 그런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남 이야기처럼 들으시면 안 됩니다. 바로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오늘부터 그렇게 사셔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 ‘그리스도인들아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명백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아마 가짜일겁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십시오. 그래서 그 죄란 녀석이 여러분의 존재로 말미암아 치명상을 입도록 오늘을 싸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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