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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교회의 전투와 교회의 권세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18.

 

 

교회의 전투와 교회의 권세

 

(김성수 목사)

 

 

(우리는 이 땅에서 일생동안 우리의 더러운 죄와 싸우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결과로 우리에게 맺혀지는 열매가 뭡니까? 사랑이요 희락이요 화평이요 온유요 인내요 절제 아닙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그러한 회개와 참회의 삶을 경주해야하고 세상을 향해서도 그러한 회개의 삶을 살도록 외쳐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절대 힘으로 정복되지 않습니다.)

 

 

(계 11:1-6) “1 나는 지팡이와 같은 측량자 하나를 받았는데, 그 때에 이런 말씀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일어서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을 측량하고,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세어라. 2 그러나 그 성전의 바깥 뜰은 측량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그것은 이방 사람들에게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3 나는 내 두 증인에게 예언하는 능력을 줄 것이다. 그들은 천이백육십 일 동안 상복을 입고 예언할 것이다." 4 그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 앞에 서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요, 촛대 두 개입니다. 5 그들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들을 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6 그들은, 자기들이 예언 활동을 하는 동안에, 하늘을 닫아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세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몇 번이든지, 어떤 재앙으로든지, 땅을 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11장으로 넘어왔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복음을 받아먹은 자로서의 책임과 의무에 관해서 함께 확인을 했습니다. 무시무시한 나팔 재앙 속에서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여 살아가는데 복음을 받아먹은 어떤 무리가 회개를 하게 된다는 것이 지난주까지 공부한 10장의 내용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받아먹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으로 입으로 그 하나님의 복음의 내용을 살아내야 하고 전파해야 하는데 우리가 삶으로 또 입으로 기쁘게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전파의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는 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쓰디쓴 길’이라는 것이 10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리고 11장으로 넘어 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11장에서는 구체적으로 그 복음을 받은 자들의 삶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지금부터 한 절 한 절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과 2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계 11:1-2) “1 나는 지팡이와 같은 측량자 하나를 받았는데, 그 때에 이런 말씀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일어서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을 측량하고,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세어라. 2 그러나 그 성전의 바깥 뜰은 측량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 그것은 이방 사람들에게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거룩한 도시를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예언 사역을 위탁받은 요한에게 성전 척량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칼라모스’가 주어집니다. 그 갈대로 번역이 된 칼라모스는 당시 사람들이 쓰던 길이를 재는 자였습니다. 3m(10feet)정도 되는 갈대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에스겔도 똑같이 성전 척량의 명령을 받고 장대로 성전을 척량하는 장면이 에스겔서 40장에 나오지요? 한번 보고 가지요.

 

(겔 40:15-16) “15 그가 안에 있는 전 척량하기를 마친 후에 나를 데리고 동향한 문 길로 나가서 사면 담을 척량하는데 16 그가 척량하는 장대 곧 그 장대로 동편을 척량하니 오백척이요”

 

여기서 쓰인 장대 ‘카네’가 ‘갈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갈대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예언 사역의 위탁이 일어난 후에 성전 척량이 나오는가? 그 것은 당시에 어떤 경우에 성전을 척량했는지를 알면, 왜 요한에게 이러한 명령이 떨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겠죠? 당시에는 다음과 같은 두 경우에 성전을 척량했습니다. 먼저 첫 번째는 ‘파괴를 위한 척량’입니다. 어떤 건물이나 구조물을 파괴해 버릴 때 척량을 했고 두 번째는 바깥 것들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울타리를 쌓는 개념으로의 척량이 있었습니다. (파괴 혹은 보호) 이 개념을 머릿속에 잘 두시고 다음 구절을 보세요. 무엇을 척량하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이 요한 계시록이 기록된 때가 AD95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성전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AD70년에 로마의 타이터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럼 여기서 요한에게 척량하라고 하는 성전과 제단은 실제의 성전이 아니죠? 그럼 뭘까요? 하늘의 성전, 바로 교회,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성전을 척량하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척량하라’는 구절의 의미는’이제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복음을 삶으로 입으로 전하고 그 복음의 내용을 직접 살아내게 될 텐데 그 삶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삶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는 대적들이 있고 그 대적들은 그들을 실패케 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 이 땅에서 그들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 지키고 보호 하겠다‘ 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 뒤 구절을 보시면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그러시죠? 이스라엘의 성전은 맨 바깥에 이방인의 뜰이 있었고, 그 다음에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 성소 이렇게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열 개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맨 바깥의 이방인의 뜰을 성전 바깥뜰이라고 했고 나머지 부분을 성전 안 뜰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바깥뜰에서 이방인들이 안 뜰로 넘어 들어오게 되면 즉시 사형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학자들이 오늘 본문의 성전 밖 마당을 예수를 믿지 않는 죄인들로 해석을 합니다.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통과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보호하시지만 죄인들은 심판과 저주에 그대로 노출시켜 버리신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렇게 해석을 해도 아무 무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11장 전체 문맥에 좀 더 가까운 해석은 리쳐드 보캄의 해석입니다. 저는 이 해석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척량의 대상이 되는 성전 안마당, 즉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게 되는 것을 성도들의 내적이며 감추어진 실체로 보고, 척량 대상에서 제외된 성전 바깥마당을 성도들의 외적 문제, 외적 경험으로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영적인 부분, 그들의 신분과 궁극적 운명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지만 그들의 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방인들이 그들을 밟게 놔두신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기간은 42달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11장 1절과 2절이 아주 매끄럽게 풀어지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2절 후반부에 보시면 이방인들에게 내어준 그 성전 바깥마당을 이방인들이 짓밟는데, 그것을 ‘그들이 거룩한 성을 42달 동안 짓밟는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전 바깥마당도 우리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인 교회의 외적인 삶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11장 전체의 서론으로 훨씬 더 잘 어울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2절의 ‘그 성전 바깥마당을 42달 동안 이방인들에게 주었다’는 구절의 ‘주었은즉’ 헬라어 ‘에도떼’는 시제가 부정과거 수동태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이 스스로 성전 밖 마당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의해서 그 짓밟힘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전투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곱 재앙을 공부하면서 계속해서 확인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재앙과 저주 속에 노출 되도록 허락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속에서 정금 같이 단련이 되는 것이죠.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전투는 성도의 거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도떼’ 이방인들에게 성도들을 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7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징적 숫자인 144,000에 대해서 공부할 때 왜 요한이 민수기의 계수 장면을 인용 해다가 각 지파 별로 숫자를 맞추었다고 했습니까? 민수기의 인구 계수 장면은 전쟁에 나가서 싸울 수 있는 군사를 계수 하는 장면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그 장면을 인용 해다가 우리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전투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한 문학적 인용이라고 했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분명 계시록 20장에 가면 사단과 그 마귀의 세력을 누가 물리치느냐하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그들을 모두 불살라 버립니다. 그러면 결국 전쟁은 누구 것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승리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보고 이 땅에서 싸우라고 하십니까? 어차피 당신께서 다 하실 거면서... 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셔놓고 그들에게 전쟁을 시킵니까? 그들이 전쟁에 지면 못 가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가나안 땅을 칼과 창을 들고 나가 싸워서 조금 씩 조금씩 빼앗아야 합니다. 가끔은 그 전쟁에서 치명상을 입고 고통을 당하기도 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하시죠?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승리의 영광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시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어차피 승리하실 하나님의 전투에 우리를 동참시켜 주심으로 해서 그 영광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배우고 우리의 작고 보잘것없음과 부패함과 더러움을 깨달아서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발동해서 우리 자신을 의지하던 삶에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우리를 의탁하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를 고통 속에 재앙 속에 그대로 노출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 분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는 거기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수많은 전투를 통해서 우리의 거룩을 차곡차곡 쌓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시간은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42달, 이것을 연수로 환산하면 3년 반이죠, 날 수로 계산하면 1260일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사흘 반으로도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42달 삼 년 반, 한때 두 때 반 때는 교회시대를 나타내는 기간이라고 했지요? 예전에 교회론 할 때 한번 설명해 드렸었죠? 간단하게 설명을 해드리고 넘어가죠.

 

(단 9:24-27)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의 종말, 즉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오는 시기를 70이레로 기한을 정하신 것입니다. 그 칠십 이레가 가면 이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 왕 때 성전을 재건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 때로부터 성전이 재건 될 때까지가 일곱이레요 기름 부은 왕이 오실 때까지가 62이레입니다. 그럼 7더하기 62하면 얼마입니까? 69이레지요. 그럼 세상의 종말까지 얼마나 남은 것입니까? 한 이레 남았습니다. ‘이레’라는 것은 뭐지요? 하루, 이틀, 사흘.. 7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 적으로 해석하는 세대주의자들은 이것을 7년으로 잡아서 다리오 왕 원년서부터 70이레 즉490년 후에 이 세상의 종말이 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490년이 지난 지 오래인데도 아직 종말이 오지 않았지요? 그래서 그들은 남은 한 이레 7년을 뒤로 뺀 것입니다. 세대 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 지구의 종말에 있을 7년 대 환난은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7년이 지나면 종말이 온다. 하나님 왕국이 임 한다‘ 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7년 대 환난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대 환난의 시기는 있지요. 바로 지금이 그 대 환난의 시기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너무 호락호락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경이 말씀하고 계신 대 환난의 시대를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27절을 다시 한 번 보세요.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마지막 한 이레 7이 남았지요?그런데 그 한 이레의 절반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제사와 예물을 금지한다고 합니다. 제사와 예물이 금지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성전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제사와 예물을 갖다 바치던 성전이 언제 파괴됩니까? AD70년 로마의 타이터스에 의해 성전이 파괴됩니다. 이제 그 때부터 종말까지 몇 이레가 남았습니까? 반 이레가 남았지요? 반 이레는 얼마입니까? 3과 2분의1,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를 우리는 교회시대, 은혜의 시대, 3년 반, 한때 두 때 반 때, 1260일, 42개월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이나 묵시문학에 자주 나오는 숫자들이지요. 그 숫자들이 바로 우리 교회시대, 그리고 개인 적으로는 교회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교회시대 전체를 통해,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인생 내내 대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건데 하나님께서 그 42달 동안 우리에게 권세를 허락하신 답니다. 그러한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잘 살아낼 수 있는, 다른 말로 삶으로 입으로 복음을 전하며 살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3절입니다.

 

(계 11:3)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일 천 이 백 육십일 동안 교회 시대, 우리의 일생동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십니다. 여기서 두 증인은 교회를 말합니다. 어떻게 그 두 증인이 교회인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4절을 보시면 그 두 증인이 두 감람나무와 촛대라고 나오죠?

 

(계 11:4)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이 두 감람나무와 촛대는 어디서 인용이 된 단어들입니까? 스가랴서죠.

 

(슥 4:1-14) "1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2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4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5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6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9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11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12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13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14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이 부분도 지난번에 한번 자세히 설명을 해 드린 부분이기 때문에 간단하게만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여기 보시면 일곱 등대와 두 감람나무가 나옵니다. 우리가 계시록 1장 20절을 공부할 때 일곱 등대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계 1:20)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일곱 촛대가 아니라 두 촛대죠?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곱 촛대는 전체로서의 교회를 나타내는 것이고 두 촛대는 증거의 역할을 맡고 있는 교회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숫자입니다. 둘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전통적으로 증거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되는 숫자입니다.

 

(신 17:6) "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거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신 19:15) "15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이렇게 그 증거가 진실 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숫자가 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파송 하실 때 둘씩 보내십니다.

 

(막 6:7) "7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 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이렇게 두 촛대라는 것은 ‘복음 증거자로서의 교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가랴서에서 두 감람나무는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스룹바벨과 대 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왕이요 제사장의 권세를 소유한 자들 ,왕 같은 제사장의 권세를 갖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5절 6절에 보면 교회의 엄청난 영적 권세가 기술되어 있습니다. 먼저 5절을 보시면,

 

(계 11:5)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교회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원수들을 소멸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불이 뭘까요? 논리 정연한 지식? 불같은 욕? 원수들을 막 욕해서 소멸시키나요?

 

(렘 5:14) "14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이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불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으로 세상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6절을 보시면 교회가 하늘을 닫아서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세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계 11:6)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이건 어디서 인용된 구절입니까? 엘리야의 이야기와 모세의 이야기를 인용한 것입니다. 아합 왕 때 엘리야가 삼년 반 동안 비를 막아버리지요? 그리고 모세가 출애굽 할 때 강을 피로 변하게 하고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지요? 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때 교회에게 주어지는 권세를 모세와 엘리야의 이야기를 인용해서 기술을 하냐면, 교회는 강력한 이방 통치자로 상징되는 사탄과 그 사탄의 세력들의 종교와 적대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모세는 애굽 왕 바로와 바로의 술객들과 대치했고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는 아합 왕과 그의 부인 이세벨과 그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치했습니다. 구약에서 이 두 사건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사탄의 세력과의 적대관계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땅에서 그 악의 세력과 대적하여 그 세력과 싸워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그 악의 세력의 노예였던 자들입니다. 그 악의 세력이 시키는 대로 즐거이 그 일을 행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기서 꺼내셨습니다. 그러더니 우리에게 그 세력과 싸울 수 있는 무장을 시키셨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그리고 우리를 군사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싸우게 하셨습니다.

 

오늘 날 우리가 그 권세를 받은 자로서 어떻게 싸워야 하지요? 정말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태워 죽이나요? 정말 하늘을 닫아서 죄인들의 풍요를 막아버릴 수 있나요? 정말 강을 피로 만드는 것과 같은 기적적인 능력으로 악한 세력과 싸우게 되나요? 우리는 어떻게 싸웁니까? 사랑하고 용서하며 겸손하고 인내하는 모습으로 악과 싸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전에는 전혀 가질 수 없었던 그러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으로 세상과 싸웁니다. 그래서 3절에 그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굵은 베옷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참회할 때 입던 옷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일생동안 우리의 더러운 죄와 싸우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결과로 우리에게 맺혀지는 열매가 뭡니까? 사랑이요 희락이요 화평이요 온유요 인내요 절제 아닙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그러한 회개와 참회의 삶을 경주해야하고 세상을 향해서도 그러한 회개의 삶을 살도록 외쳐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절대 힘으로 정복되지 않습니다.

 

이솝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수 있는 것은 강한 추위도 바람도 아닙니다. 따뜻한 햇빛이 나그네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싸움에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너희가 천국의 열쇠를 소유하고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는 말은 우리가 천국의 문지기가 되어서 우리가 허락하면 구원을 받고 우리가 거절하면 구원이 취소되고 하는 권세를 갖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이 땅의 교회의 특성과 하나님 나라의 운용 특성이 같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경영하는 자들이 바로 교회이고 하나님 나라는 바로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곳이니까 교회는 이 땅에서도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와 방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 구절의 진의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매는 것이 하늘에서도 매이고 여기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가 뭡니까? 사랑! 우리가 갖고 있는 권세는 사랑할 수 있는 권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권세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세상을 즈려 밟고 승전가를 부르는 권세가 아닙니다. 교회는 성공을 추구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공이 아니라 충성을 향해 달려가는 자들입니다. 성공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충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힘써 좇아가는 것을 충성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권세는 물리적인 파워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게 밟히고도 그들을 용서하고 인내하고 온유함과 겸손함과 심지어 사랑함으로 대할 수 있는, 세상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그런 권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다툼과 시기와 분 냄과 살인과 거짓을 의도하고 우리에게 공격을 가합니다. 우리는 그 세상의 공격에 사랑이라는 칼을 집어 들고 싸우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이라는 창을 집어 드는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서의 성도들의 전투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그러한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하나님께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원수들과 대적하여 그들을 박살 낸 것처럼 지금 우리도 하나님께 권세를 받고 사랑과 용서와 겸손과 인내로 우리의 대적을 박살내는 전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 바깥마당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참 된 우리의 실존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무럭무럭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자의 전투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 아니었습니까? 세상에 가장 바보 같은 누명을 쓰고 가장 약한 모습으로 가셨지만 인류 역사상 그보다 더 큰 승리가 없었듯이 우리도 바로 그러한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승리하고 싶으십니까? 용서하십시오. 정말 승리하고 싶으세요? 사랑하십시오. 정말 이기고 싶으세요? 인내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사냐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권세(엑수시아)를 주신 것입니다. 그 권세를 사용하세요. 여러분에게는 그렇게 사실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able not to sin)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권세! 그 권세가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기세요. 우리는 분명 42달 동안 짓밟힌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 내내 세상으로 부터 당하게 되어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외적으로 짓밟혀 주는 모습이 1260일 동안 권세를 받고 세상을 이기는 모습이라는 이 역설이 여러분에게 이해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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