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와 성도가 해야 할 선한 일
(김성수 목사)
(요 5:17-30) “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18 유대 사람들은 이 말씀 때문에 더욱더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기 때문이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셔서,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살리시니,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맡기셨다. 23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3)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 또는 '정죄' 25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26 그것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셔서, 그 속에 생명을 가지게 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27 또,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 그것은 아들이 인자이기 때문이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말아라.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29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 30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는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심판한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그것은 내가 내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대로 하려 하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에는 삼 십 팔 년 된 병자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 측에서의 어떠한 행위나 노력도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은혜의 집인 베데스다에서 구원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조차도 ‘주님 나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주님께 연못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살아갑니다. 아니 잊은 정도가 아니라 그 은혜를 거부하며 삽니다. 그게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은 인간의 오만함입니다. 그래서 자꾸 자신의 힘을 하나님의 구원에 보태고 싶어 하는 것이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나도 힘이 있는데 왜 거저 받아야 하냐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죄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집니다.
인간의 힘으로 지은 성전 벽의 마지막 문이 함밉갓 문, 심판의 문으로 끝나는 것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아무 것도 보탤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좋은 상징인 것입니다. 그 38년 된 병자는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을 의지해 38년 간 광야를 헤맨 이스라엘이었으며, 자신들이 하나님의 요구인 율법과 제사를 잘 지켜내고 있다고 착각을 한 바리새인들이었으며, 여전히 이 세상의 힘과 방법으로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여념이 없는 오늘날의 죄인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그렇게 소경이며 절뚝발이이며 혈기 마른 자들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가셔서 그 저주의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일에 보탤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표현을 하시는 것입니다.
(요 5:17)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지난 시간에도 잠깐 설명을 해 드렸지만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일은 성도들을 이 저주의 땅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를 말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성도가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도 헌금이나 봉사나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19절에서 주님께서 하신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하신 일이지 자신이 스스로 하신 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요 5:19)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하실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신 일을 자기도 행하고 있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행하시는’이라는 단어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신데 자신도 바로 그 아버지가 하고 계신 그 일을 하고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대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있던 가업의 비밀을 전승하는 그림에 빗대어 설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업을 계승할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따라하도록 했습니다.
가령 목수는 대패질을 어떻게 하는지, 다림줄을 어떻게 쓰는지, 나무를 어떻게 짜는지, 못 질은 어떻게 하는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아들에게 보여주고 똑같이 따라하도록 가르쳤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씨는 몇 개씩 어떠한 방법으로 뿌려야 하며, 언제 잡초를 뽑아야 하며, 추수는 어느 시점에 하는지, 탈곡은 어떻게 하는지를 세심하게 가르쳤습니다. 도자기를 굽는 사람들은 유약을 어떻게 바르는지 화로의 온도는 어떻게 맞추는지, 도자기의 모양은 어떻게 만드는지를 그대로 모방하게 했습니다. 대장장이도 풀무의 온도는 어떻게 유지하며, 담금질은 어떠한 식으로 해야 하며, 망치질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따라하게 했습니다.
그러한 가업의 전수는 꼭 아버지가 아들에게만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업을 전수해 주면서 그 가업의 비법이 전수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업 계승에는 비밀이 생기게 되고 아주 배타적이고 은밀한 ‘관계’가 형성되게 됩니다. 이러한 고대 사회의 가업 계승의 그림을 사용해서 예수께서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관계 속에서 진행되어지고 있는 하나님과 당신의 일은 비밀이라서 너희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이 한 구절에 모두 담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20절과 21절 그리고 22절에서 밝히고 계십니다.
(요 5:20-22)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당신께 지금 베데스다에서 보이신 일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더 큰 일을 보이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더 큰일이라는 것은 21절과 22절의 말씀처럼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시는 일’과 ‘심판을 하시는 일’입니다. 구원과 심판입니다. 그러니까 이 베데스다 연 못 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더 큰 일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1장에서도 보았습니다.
(요 1:50-51)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1장에서는 그 더 큰 일을 어떠한 일로 묘사를 합니까? 인자 위로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이 연합이 되는 일을 더 큰 일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더 큰 일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 땅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풍성한 생명력을 다시 회복하여 하늘의 사람들로 구원을 받게 되는 모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을 포함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서 일으키신 기적들은 모두 그 더 큰 일을 가리키는 것들이었고 그 더 큰 일을 이루고 계신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더 큰 일은 우리 성도들에게서도 나타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 14:10-12)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10절을 보시면 오늘 본문 19절의 해설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오늘 본문 19절에서 당신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가 하신 일을 보고 아들로서 지금 일을 하고 계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의 진의는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가 하신 일을 그대로 보고 모방을 하고 계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은 한 뜻으로 함께 일을 하고 계신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5장에서는 주님께서 ‘내가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신 일을 보고서 할뿐이다’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여기 14장에서는 똑같이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 분이 직접 그의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게 왜 그리 중요한가 하면 그 더 큰 일이 우리 성도들에게까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읽으신 14장 12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더 큰 일‘을 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 더 큰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지요? 구원과 심판이라 했습니다. 성도들이 주님께서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다 가신 구원과 심판의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과 복음의 증거로 인해 구원 얻을 자들이 돌아오게 되고 심판 받을 자들에게 심판이 선포가 되게 된다는 말입니다.
(고후 2:15-16)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필연적으로 이 땅을 ‘향기‘로 살아가야 하는데 구원을 얻을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향기로, 심판을 받을 자들에게는 사망의 향기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렇게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에 구원과 심판을 전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그게 바로 ‘더 큰 일’입니다. 그런데 그 ‘더 큰 일’은 주님께서 ‘더 큰 일’을 하실 때 하나님께서 주님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처럼 우리 속에서도 성령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필연적으로 만들어 내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일관성 있게 기술하고 있는 것은 구원은 성화나 영화까지 모두 다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교리를 조금 더 부연해 주고 있는 어구가 바로 ‘진실로 진실로’라는 어구입니다.
(요 5:19,24,25)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한글 개역 성경의 ‘진실로 진실로’라는 번역은 사실 잘못된 번역입니다. ‘진실로 진실로‘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헬라어 ’아멘 아멘‘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헬라어 ’아멘 아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아멘 아멘‘이라는 단어를 그냥 발음대로 적은 것입니다. 히브리어의 ’아멘‘이라는 단어는 ’확고한, 굳건한‘’확실히 그렇습니다‘ 혹은 ’그렇게 되소서‘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 단어를 기도의 맨 마지막에 그리고 예배의 마지막에 썼습니다. 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소서, 믿습니다‘라는 의미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아멘‘이라는 단어를 당신이 하시는 말 앞에 두 번씩 반복해서 자주 쓰셨습니다. 그 말은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이미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고 아멘 한 말이니 확실하게 진리이다‘라는 의미인 동시에 ’나의 아멘이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온전한 아멘이 되었듯이, 내가 지금 하는 말도 너희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멘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라는 말인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을 보시고 그대로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나님과 아들의 뜻이 일치되어 하나님께서 그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하나님의 모든 뜻에 아멘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이루실 것이고 그 것이 옳다라는 것이 바로 ‘아멘 아멘’이니까요. 따라서 주님께서 아멘하신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도하에 완성이 될 것이라는 의미가 ‘진실로 진실로, 아멘 아멘’이라는 단어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어떤 말 앞에 ‘아멘 아멘’이라고 붙인 문장은 예수 님 이외에 그 누구도 쓴 일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 분만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 순종하시고 확신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역시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서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나님께서 마치신다는 은혜의 교리를 다루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계속해서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라고 반복을 하시는 것입니다.
(요 5:19,30)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도 당신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시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안에서 행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뜻이 주님의 인생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큰일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견조차도 개입 될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의견이나 노력이나 행위가 그 하나님의 큰일에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엡 2:8-9)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은혜로 선물로 공짜로 주셨답니다. 9절에 그 이유가 나오는데 그 이유가 우리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자랑’이라는 것을 할 수 없게 만드실까요? 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을 자랑하는 자들에서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로의 회귀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왜 하나님께 화를 냈지요?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안 받아 주시니까 화를 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자기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자신들을 자랑하고 싶었는데 예수님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자신들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혹은 다른 이들에게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게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여전히 자랑을 받으셔야 할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앉아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랑이라는 것은 죄의 본질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랑이라는 것을 손톱만큼도 용납하시지 않기 위해 온전히 홀로 성도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논리를 가지고 오늘 본문 29절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
(요 5:29)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선한 일을 행한 자만이 생명의 부활로 나올 수 있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마치 ‘선한 일을 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처럼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구원은 은혜가 아니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선한 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수 23:14) “14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여기에 나오는 히브리어 ‘선한 일’ ‘토브’는 창세기의 창조 후에 나오는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토브‘입니다. 그 ’토브‘라는 단어가 70인 역에서 ’아가또스‘라는 헬라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선한 일’과 이 곳 여호수아서의 ’선한 일’은 같은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여호수아서의 선한 일이 어떠한 일인지를 알면 오늘 본문의 ‘선한 일’이 이해가 되겠지요? 이 여호수아서 23장 14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표준새번역] “나는 이제 온 세상 사람이 가는 길로 갈 때가 되었소. 여러분은 주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선한 말씀 가운데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음을, 여러분 모두의 마음과 모두의 양심 속에 분명히 알고 있소. 그 가운데서 한 말씀도 어김이 없이 다 이루어졌소.”
지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유언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여호수아는 ‘선한 일’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셔서 당신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까지 데리고 들어가시는 출애굽의 모든 여정’을 ‘선한 일‘이라고 합니다. 그 선한 일이 이스라엘에게 모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선한 일‘’토브‘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가리키는 새 창조를 힌트 하는 단어라고 했지요?
(히 13:21) “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히브리서 기자는 ‘선한 일’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지요.’온전케 하시고‘’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이루시기를‘ 모두 사역동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쥐고 계신 것입니다. 똑같은 단어가 빌립보서 1장에 나오지요?
(빌 1:6)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여기서 ‘착한 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정확하게 ’선한 일‘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 선한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제 분명해 졌지요? 우리가 해야 할 선한 일이 뭡니까?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새 창조가 점차로 진행되어져 가면서 우리에게서 나오게 되는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열매는 누가 맺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맺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들은 당연히 선한 일이, 거룩하게 지어져가고 있는 모양이 그의 삶 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성령의 열매라고도 부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29절에 ’선한 일‘을 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고 기술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선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선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선한 일인 것입니다. 역시 은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구속 사뿐 아니라 우주의 역사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작정 아래에서 하나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일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로 잘 자라면 되는 것입니다. 그 자라남 역시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완성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우리를 바꿔 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오직 은혜만으로 우리를 완성시켜 가신다는 구원의 복된 소식을 이해하는 만큼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되고 그 터져 나오는 감사가 우리의 손발을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요. 그게 우리에게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선한 일인 것입니다.
(요 17:17)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살전 1:5)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 2:13)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보시는 바와 같이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우리 안에서 역사 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우리가 행하는 선한 일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창조에서 종말까지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사실 앞에서 분노가 치미세요? 아니면 안도가 되십니까?
아직까지도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말을 들을 때 분노를 하게 되지요. 이렇게 위대한 인간이 어떠한 절대자의 손에 의해 정해진 역사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앉은 아담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 지를 알고 그 분이 하시는 모든 일이 옳고 선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은 그러한 분의 손에 의해 나의 운명이 이끌려 간다는 것에 안도의 숨을 쉬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모든 것이 완성되고 있다는 복음 앞에 감사의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은 그렇게 은혜로 우리를 이끌고 가시는 감사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며 그 분의 계획과 의도에 나를 맞추어 가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10여 년 전에 피터 위어 감독의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짐캐리라는 걸출한 배우가 열연을 한 그 영화는 트루먼 버뱅크라는 평범한 보험회사의 샐러리맨의 이야기입니다. 한 방송국에서 작은 도시 하나를 세트장으로 만들고 트루먼 버뱅크가 태어날 때부터 그의 일생을 생방송으로 전 세계에 방송을 합니다. 아마 그 영화에서부터 인터넷 몰래 카메라가 생겨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다가 카메라를 수 십대 설치해 놓고 자기의 일상을 인터넷으로 방송을 하고 돈을 받는 사람도 있지요? 아마 영화 트루먼 쇼가 그러한 것들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 거대한 세트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그 방송을 맡은 감독에 의해 조종이 되는 것입니다. 비가 오는 것도 파도가 치는 것도 사랑하는 여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도 모두 감독의 연출입니다.
전 세계의 20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그 트루먼의 일생을 생방송으로 흥미진진하게 시청을 합니다. 그는 전 세계적인 스타입니다. 그런데 오직 그 당사자인 트루먼만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어떠한 연출가에 의해 연출이 되고 있는 드라마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트루먼은 자기의 의지를 발동하여 자신의 일생을 살지만 생의 갈림길이 될 만한 커다란 사건은 그 드라마의 연출가에 의해 조종이 됩니다. 결국 자기의 인생이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거짓 인생임을 안 트루먼은 30년 만에 사력을 다해 그 거대한 스튜디오를 빠져나갑니다. 감독이 일으키는 풍랑과 파도를 통과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그 세트장을 탈출합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이끌려 가는 삶은 가끔 저렇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끔찍한 오해를 받기도 하고 짜증나는 일상의 반복 같아 보일지 몰라도 결국 우리를 목적지에 도달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멋진 은혜의 드라마인 것이구나‘하고 내심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가와 감독의 의도 또한 그러한 것이리라 미루어 짐작을 했었지요.
그런데 제가 어떤 잡지에서 그 영화의 감독인 피터 위어의 글을 읽다가 아주 놀랐습니다. 그 영화의 원작자이자 감독인 피터 위어는 우리를 꼭두각시처럼 가지고 노는 어떤 절대자에 대한 반항과 그에게서의 탈출을 주제로 그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두고 이렇게 현저한 다른 반응이 나옵니다. 보세요. 아직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 싶어 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배려가 달갑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 그 분이 이끄시는 대로 살겠다는 순종의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항복하고 자신이 탈취했던 하나님의 왕위를 하나님께 돌려드린 성도들은 하나님의 크심과 그 분의 선하심을 알기에 그 분의 뜻과 계획과 작정에 자신의 삶을 기쁘게 맡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혹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내게 일어날지라도 혹시 나에게 고쳐야 할 부분이 없는가 하고 회개를 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일들이 내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일의 한 부분이라는 믿음 속에서 잘 견뎌 내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선한 일입니다. 동의하세요?
하늘에 소망을 둔 성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선한 일인 것입니다. 왜? 그 모든 사건들이 우리의 거룩을 합력 하여 완성해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에 풍랑이 닥쳐도 그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너끈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남들에게 억지스러운 모함을 당해도 그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알기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역사를 운행하시는 것이지 여러분을 괴롭히시기 위해 이 역사를 경륜해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배려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잘 이겨내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은혜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선한 일을 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잘 참아내십시오. 오늘 본문 29절의 내용을 잘 기억하세요. 그 선한 일을 행한 자만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는 선한 일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하루하루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the words of tru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섭리 (김성수 목사) (0) | 2013.07.18 |
---|---|
[스크랩] 교회의 전투와 교회의 권세 (김성수 목사) (0) | 2013.07.18 |
[스크랩] 38년 된 병자의 치유를 통해서 본 행위와 은혜 (김성수 목사) (0) | 2013.07.16 |
[스크랩] 배에서는 쓰더라 (김성수 목사) (0) | 2013.07.15 |
[스크랩] 121강. 다 이루었다 (0) | 2013.07.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