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서는 쓰더라
(김성수 목사)
(인간은 심판으로는 회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심판이나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복음뿐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죠. 그러나 실제로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그렇게 바뀌어 갈 때 우리는 말도 못할 고통을 겪습니다. 수 십 년 동안 습관 되어지고 중독되어진 것들을 떨어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으로 입으로 바른 복음을 전하게 되면 세상은 우리를 가리켜 ‘고집스럽다’ ‘독선적이다’ ‘외곬수다’ 라는 욕을 서슴없이 합니다. 그것은 정말 쓴 것입니다. 어떨 때는 도대체 세상에 오직 혼자 남은 것 같이 외롭습니다. 그 복음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낸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계 10:1-11) “1 또 나는 힘센 다른 천사 하나가 구름에 싸여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고, 그 얼굴은 해와 같고, 발은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2 그는 손에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펴서, 들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발로는 바다를 디디고, 왼발로는 땅을 디디고 서서, 3 마치 사자가 울부짖듯이 큰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부르짖으니, 일곱 천둥이 각각 제 소리를 내면서 말하였습니다. 4 그 일곱 천둥이 말을 다 하였을 때에, 나는 그것을 기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나는 하늘로부터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일곱 천둥이 말한 것을 인봉하여라. 그것을 기록하지 말아라" 하였습니다. 5 그리고 내가 본 그 천사, 곧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가 오른손을 하늘로 쳐들고, 6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시고,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시는 분을 두고, 이렇게 맹세하였습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7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하여 주신 대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다." 8 하늘로부터 들려 온 그 음성이 다시 내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펴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라." 9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로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그는 나에게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하였습니다. 10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서 삼켰습니다.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고 나니, 뱃속은 쓰라렸습니다. 11 그 때에 "너는 여러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하여야 한다"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 왔습니다.”
오늘은 요한계시록 10장을 공부할 차례입니다. 이 10장은 삽입 부분입니다. 여섯 번째 인의 재앙 과 일곱 번째 인 사이에 삽입이 들어 있었던 것처럼 이 나팔 재앙에서도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나팔 사이에 삽입 부분이 등장합니다. 우리 10장까지의 구조를 다시 한 번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갈까요? 요한 계시록 1장1절에서 8절까지는 서론입니다. 그리고 1장9절에서 3장 마지막까지에서 이 땅의 불완전한 교회를 나타내는 일곱 교회에 대해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4장과 5장에서 천상의 완성된 교회를 한번 보여 줍니다. 그리고 6장에서는 드디어 첫 번째 인에서 여섯 번째 인의 재앙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고 6장의 말미에서 ‘이렇게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 설 자가 누구인가?’하고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면서 6장을 마칩니다.
그리고 삽입 부분인 7장에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144,000, 허다한 무리인 이미 하나님의 인을 받아 안전한 교회, 천상의 완성된 교회를 4장과 5장에서처럼 한번 또 보여 줍니다. 그리고 8장으로 넘어와서 마지막 일곱 번째 인이 나오고 나팔 재앙이 시작됩니다. 이 나팔 재앙도 인의 재앙의 내용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9장까지 무시무시한 여섯 나팔의 재앙이 묘사가 되고 그 마지막에 ‘이러한 무시무시한 재앙에도 인간들이 회개하지 않더라.’로 끝이 납니다. ‘그러면 진짜 회개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인가?’‘아니다. 회개하는 자들이 있다’‘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회개를 하게 되는가?’에 대한 답이 오늘 공부할 10장입니다. 그 10장을 한 절 한 절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시면
(계 10:1) “1 또 나는 힘센 다른 천사 하나가 구름에 싸여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고, 그 얼굴은 해와 같고, 발은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힘센 다른 천사가 내려옵니다. 이 천사가 그리스도냐, 아니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각자가 자기들의 의견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들을 갖다 대고 있는데 양 견해가 둘 다 상당히 논리적입니다. 제 의견은 이렇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예수 그리스도를 ‘천사’라고 표현한 곳이 없다는 면에서 그 힘센 다른 천사가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딱 집어서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그 힘센 다른 천사가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7장 공부할 때 ‘해 돋는 곳으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할 권세를 갖고 있는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치신 그 천사’를 메시야 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나타내는 천사라고 배웠지요? 여기서도 그렇게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잘 보시면 그 힘센 다른 천사에 대한 묘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와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지요? 구름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이제 척척 대답이 나오셔야죠?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고 했지요? 그래서 계시록 1장 7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표현을 했다고 했습니다.
(계 1:7) “7 볼 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이 힘센 다른 천사도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지요? 그리고 이 힘센 다른 천사는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다고 표현을 합니다. 성경에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다는 표현이 몇 번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하나님의 현현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것도 앞에서 공부했지요?
(계 4:3)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겔 1:28) “28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그 힘센 다른 천사의 머리 위에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나타내는 무지개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힘센 다른 천사의 ‘얼굴이 빛난 해 같다’고 했습니다. 역시 1장의 예수님을 표현하는 구절에서 공부했습니다.
(계 1:16) “16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그리고 그 힘센 다른 천사는 ‘발이 불기둥 같다’고 합니다. 역시 예수님을 표현하던 단어들입니다.
(계 1:15)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리고 그 천사가 오른발로 바다를 밟고 있고, 왼 발로는 땅을 밟고 있다는 표현에서도 그 존재가 온 세상을 장악하고 관장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렇게 그 힘센 다른 천사는 꼭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그 분의 하시는 일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천사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 9장까지에서 여섯 번째 나팔 재앙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왜 갑자기 10장 서두에서 예수님을 그러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까? 거기에 쓰인 단어들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왜 ‘구름, 불기둥, 무지개, 해 같은 얼굴’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엇으로 보호하셨습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지키셨습니다. 불기둥은 때로 애굽의 심판의 도구로도 쓰였지요? 그리고 무지개는 어디서 대표적으로 등장하는 것입니까?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류의 재창조 장면에서 보여주신 것이지요?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구름, 불기둥, 무지개, 해 같은 얼굴’로 묘사된 힘센 다른 천사의 모습에서 세상에 횡행하는 재앙 속에서도, 그리고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그 분이 지켜 내시며, 오히려 그런 것들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재창조의 과정이요, 방법이요, 수단으로 쓰여 지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3절을 보시면 그 힘센 다른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일곱 우레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계 10:3-4) “3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요한이 그 우레 소리를 알아듣고 기록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그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은 비밀로 인봉 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우레 소리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5절에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계 10:5-7) “5 그리고 내가 본 그 천사, 곧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가 오른손을 하늘로 쳐들고, 6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시고, 영원무궁하도록 살아 계시는 분을 두고, 이렇게 맹세하였습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 7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하여 주신대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맹세를 할 때 오른 손을 높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힘센 다른 천사가 오른 손을 하늘로 쳐들고 지금 맹세를 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일곱 번째 나팔이 울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하고 외칩니다. 심판의 긴박성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요한에게 작은 책을 줍니다. 이 작은 책은 우리가 앞에서 공부한 5장의 일곱 인(印)으로 봉한 책입니다. 5장에서는 봉인이 되어 있지만 여기 10장에서는 열려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5장에서 쓰인 단어는 ‘블리온’‘책’인데, 10장에 쓰인 단어는 ‘비블라디온’‘작은 책’이라는 다른 단어가 쓰였기 때문에 그 두 책은 다른 책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지만 헬라어에서는 그와 같은 구분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데리온’이라는 단어는 ‘짐승‘입니다. 이 ‘데리온’도 ‘데르’라는 단어의 축소형이지만 그것이 '작은 짐승'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짐승’을 표현할 때 혼용해서 씁니다. 그리고 ‘아르니온(양)’도 형식상 ‘아’”이라는 단어의 축소형이지만 이것 또한 '작은 양'만을 의미하지 않고 동일하게 '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요한과 동시대에 살았던 다른 기독교 선지자 ‘헤르마스’는 그의 저서 '목자'라는 책에서 비블리온과 비블라리디온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단어가 축소형이 쓰였기 때문에 그 둘은 다른 책이다’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5장과 10장에 보시면 공히 힘센 천사가 등장합니다. 이러한 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적 기교입니다. 각기 다른 곳에서 어떠한 같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같은 상황이나 배경을 기술하는 기법입니다. 이렇게 5장과 10장은 어떤 하나의 책을 설명하기 위해 문학적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근거를 대 드리면 우리가 5장 공부할 때 자세히 보았던 것처럼 요한은 계시록 5장의 인봉한 책에 관한 내용과 10장의 작은 책의 내용을 에스겔서 2장:9절부터 3장3절까지의 내용을 둘로 나누어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내용을 둘로 갈라서 5장과 10장 양쪽에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죠.
(겔 2:9-10) “9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요 부분을 5장 1절에다가 인용을 한 것이고요.
(계 5:1)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그리고 이어지는 3장 1절에서 3절까지를 10장 오늘 본문에다가 나누어서 기록한 것입니다.
(겔 3:1-3) “1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요 부분이 우리가 오늘 읽은 10장의 부분이지요? 그러니까 5장의 인봉한 책과 10장의 열려진 작은 책은 같은 책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5장부터 연결을 해 본다면 보좌에 앉으신 분의 손에서 어린양이 책을 취하십니다. 그리고 그 인봉을 떼시고 그 책을 펼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은 힘센 다른 천사에 의해 땅으로 취해져서 요한에게 주어지고 요한이 그것을 받아먹게 되는 것입니다. (리처드 보캄의 ‘요한계시록 신학’이라는 책에 잘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지난번에 그 인봉 한 책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다고 했지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관한 비밀, 즉 복음이 기록된 책이라고 간단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요한이 여섯째 나팔 환상이 지난 후에 받아먹습니다. (물론 시간 적순서는 아닙니다만) 왜 회개를 촉구하는 심판의 나팔 중간에 이 복음이 적힌 책이 등장하고 그것을 요한이 받아먹는 장면이 등장할까요? 인간은 심판으로는 회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심판이나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복음뿐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죠. 그 이야기는 이미 창세기부터 계시되어진 것입니다.
(창 8:20-21) “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홍수로 모든 이 땅의 기식하는 것들을 다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식구들의 번제를 드리니까 하나님께서 ‘이제 다시는 이렇게 생물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이 홍수로 사람들이 뉘우쳤기 때문에’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에, 재앙으로는 뉘우칠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타락을 했기 때문에 이제 재앙으로 사람들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0장에서는 이렇게 오직 타락한 죄인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 복음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적혀있는 책을 요한이 받아먹었는데 입에서는 아주 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리로 말미암아 인이 떼어진 그 복음은 그렇게 단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유익을 무엇에 비기겠습니까?
(시 119:103-105) “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104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말씀은 이렇게 우리에게 꿀 송이처럼 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이 정말 꿀처럼 달기만 하세요?
(시 19:7-10)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정 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송이 꿀보다 더 단,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잠에서 깨우며,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바르지 못한 길에서 돌이켜 바르게 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결과를 놓고 볼 때는 송이 꿀보다 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그렇게 바뀌어 갈 때 우리는 말도 못할 고통을 겪습니다. 수 십 년 동안 습관 되어지고 중독되어진 것들을 떨어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으로 입으로 바른 복음을 전하게 되면 세상은 우리를 가리켜 ‘고집스럽다’ ‘독선적이다’ ‘외곬수다’ 라는 욕을 서슴없이 합니다. 그것은 정말 쓴 것입니다. 어떨 때는 도대체 세상에 오직 혼자 남은 것 같이 외롭습니다. 그 복음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낸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저희 교회 고등부 회장을 했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교련 노트 필기 검사를 한다고 해서 며칠 밤을 새워서 잘 정리를 해서 제출을 했습니다. 그런데 교련 선생님께서 부르세요. 왜 노트 안 냈냐고, 안 낸 걸로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친구가 제 노트 겉장을 뜯어내고 자기 이름을 써서 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억울하더라고요. 그래서 선생님 앞에 그 아이를 끌고 가서 진실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우리 큰 아이가 얼마 전에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았는데 리키라는 백인 아이가 시험지에 이름을 바꿔서 써냈습니다. 우리 아이가 그 것을 보았답니다. 그래서 선생님한테 리키라는 아이가 시험지에 이름을 바꿔서 써냈다고 말씀을 드렸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안 믿으시더래요. 이제 6학년짜리 어린아이가 그런 일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가 끝까지 그게 자기 시험지라고 우기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채점을 해 보니까 정말 우리 아이는 0 점을 맞았고 “리키”라는 아이가 100점을 맞았더래요. 선생님이 도저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시고 번호하고 필적을 확인해 보았더니 정말 시험지가 바뀌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리키라는 아이는 suspend를 당하고 우리 아이는 500점 가산점을 받아왔어요. 제가 아이한테 물었습니다. ‘왜 너는 선생님 앞에서 끝까지 그 시험지가 네 것이라고 우기지 않았니?’ 우리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지난번에 아버님이랑 야고보서를 가지고 가정 예배드릴 때 아버님이 ’너희는 세상에 나가서 이기려고 하지 말거라, 늘 용서하고 사랑하고 져 주라고 해서‘ 그 아이한테 져 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지금까지 제가 가르친 그리스도인의 삶이죠? 바르게 산 것이죠? 그런데 저는 아이 엄마한테 그 이야기를 듣는데 막 화가 나더라고요. 그게 제 아이의 문제로 나타나니까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저 녀석, 저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고 그러나...’하고 걱정이 앞서던데요. 저는 설교를 하는 사람입니다. 설교할 때마다 ‘용서하자, 사랑하자, 나를 죽여 남을 살리자’ 하고 외쳐왔지만 실제로 그렇게 사는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니까 정말 어색하더라고요. 우리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힘이 든 것입니다. 이번에 정말 많이 회개했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손발을 움직여서 힘들지만 그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재차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셨더니 어떻게 되었습니다. 배신당하고 멸시 당하고 수모 당하고 결국은 죽임을 당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면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받아먹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이 우리가 다음 주에 공부 할 11장에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두 증인이 나오고 그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합니다. 세상은 박수를 치며 장사도 지내주지 않습니다. 그게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입니다.
(롬 8:17)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슁클레로로모스, 공동 상속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더러 예수님의 공동 상속자라고 합니다. 그 예수님께서 받으신 모든 분깃을 함께 받는 공동 상속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께 받으신 것들 중에 ‘고난’이라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당연히 공동 상속자인 우리도 그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승리와 고난을 함께 받아먹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진정한 승리를 향한 고난이라는 것을 우리가 수십 번 반복해서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관한 비밀이 적힌 책을 먹으면 그것이 우리 배에서는 쓴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선지자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렘 15:16-18) “16 만군의 주 하나님, 저는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저에게 말씀을 주셨을 때에, 저는 그 말씀을 받아먹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저에게 기쁨이 되었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17 저는, 웃으며 떠들어대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주께서 채우신 분노를 가득 안은 채로, 주의 손에 붙들려 외롭게 앉아 있습니다. 18 어찌하여 저의 고통은 그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저의 상처는 낫지 않습니까? 주께서는, 흐르다가도 마르고 마르다가도 흐르는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분이 되셨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반드시 십자가를 먼저 져야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참 아쉬운 것이 있어요. 여러 기독 학생단체들의 열심과 전도 폭발 훈련 같은 것들이 기독교에 끼친 유익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쉬운 것이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어 낼 유익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상 그들의 삶에 고난이 닥치면 어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감수해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과 그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까지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게 완전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은 자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통과해 내야 할 것들을 미리 준비하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것까지 다 듣고 그래도 그 길을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진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그렇게 다 이야기하면 하나도 안 믿을 것 같지요? 아니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은 그럼에도 돌아옵니다.
(눅 14:26-33) “26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서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29 그렇게 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그를 비웃기 시작하여, 30 말하기를 '이 사람이 짓기를 시작만 하고, 끝내지는 못하였구나'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로 밀고 들어오는 자를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를,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32 당해 낼 수 없겠으면, 그가 아직 멀리 있는 동안에, 사신을 보내서 화친을 청할 것이다. 33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망대를 지으려는 사람이 예산도 안 세우고 망대를 지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려는 사람이 미리 승산을 헤아려 보지 않고 어떻게 전쟁을 하냐는 것입니다. 그처럼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가 감수해내야 할 것들을 미리 알지 못하고는 신앙생활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제가 여러분에게 겁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아닙니까? 그렇지만 그 고난은 모두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종교행위로 신앙생활을 대치해서는 안 됩니다.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로 부흥회 가서 눈알이 빠지게 울은 것 갖고 6개월을 버티지 마십시오. 무슨 거창한 농민운동, 빈민운동, 구제사업 이런 운동들 하느라고 신앙의 본질을 놓치지 마십시오. 신앙의 본질은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거룩한 백성들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스탈린이 1947년에 ‘서방교회 침투전략’이라는 것을 세워서 1948년 WCC 세계 교회 협의회가 창립될 때 서방의 교회로 공작원 다수를 침투시켰던 사실이 스탈린 사후에 밝혀졌습니다. WCC는 지금 에큐메니컬 운동(세계 종교 통합)의 선두주자입니다. 1971년부터는 힌두교, 회교, 불교까지 합세를 했습니다. 스탈린의 서방교회 침투전략 중의 골자가 뭐였는지 아세요?
1. 교회 안으로 침투하라
2. 신자들로 하여금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고 정부에 대한 비판의식을 키우도록 교육하라
3. 모든 순수종교를 사회종교로 대체하라
지금 그대로 되고 있지요? 오늘날의 교회가 예수를 믿으면 모두가 평등하게 잘 먹고 잘 살게 해 준다고 하는 그런 구호를 걸고 있는 것은 일개 공산주의자 스탈린의 전략에 몽땅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 운동하는 단체 아닙니다. 세상의 고난을 피하게 해 줄 수 있는 집단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과하며 각자가 거룩하게 지어져 가는 것이 유일한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져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스럽습니다. 사회 운동해서 평등한 사회,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 아닙니다. 역사 진보주의자들이나 역사 낙관주의자들이 들으면 아주 화를 내시겠지요? 그러나 저는 굳이 따지자면 역사 허무주의자입니다. 아니 제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이 이 인간의 역사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 허무의 열차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어 공주의 꼬리가 사람 다리로 만들어질 때 그 인어 공주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합니까? 하물며 이 일그러진 죄인들이 깎아 놓은 밤처럼 예쁘고 아름답게 다듬어지는 데 고통이 따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복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이 어렵고 고통스러워 질 때 여러분, 기뻐하세요. 여러분은 바른 복음, 그 요한이 받아먹은, 입에서는 달지만 배에서는 쓴 바로 그 책을 받아먹은 분들이 맞다 는 것을 기억해 내시고 기뻐하세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복음을 제대로 받아먹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조언을 합니다.
(딤후 1:8) "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을 증언하는 일이나, 주님을 위하여 갇힌 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에 참여하십시오.)
복음을 받아먹은 자는 어떻게 된다고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 고난, 고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 이제 지겨우시죠? 그럼 그럴 때 이런 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지난 수요일에 몸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습니다. 진찰을 받고나니 의사선생님이 저한테 시한부 인생이래요. 저 진짜 시한부 인생이에요. 의사선생님이 ‘앞으로 30년밖에 못 사시겠네요’ 그랬어요. 정말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해도 앞으로 30년 남았어요. 그 30년도 보장된 30년 아니지요? 언제 어떻게 될지 누가 압니까?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몇 년이나 남으셨어요. 여러분의 남은 인생이 3일이던 3년이던 30년이던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언젠가는 다 죽습니다. 누구에게나 우리 인생의 종말이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그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저는 요즘 일부러 시간을 내서 매일 매일 그 죽음을 묵상합니다. 죽음은 정말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 죽음 뒤에 나는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하루에 10분씩만 묵상하신다면 우리 이렇게 사소한 것들로 아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소한 것들 안 주신다고 하나님 원망 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 뒤의 세상을 위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작은 쓴 뿌리들을 허락하신다면 얼마든지 감수해 내겠다는 용기도 아울러 생깁니다.
챨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이라는 소설이 있지요? 그 유명한 스크루지 영감이 등장하는 소설입니다. 그 구두쇠가 어떻게 개과천선합니까? 천사가 자기의 장례식장을 보여줍니다. 이제 곧 자기에게 닥칠 그 죽음 뒤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오늘을 보니 오늘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매일 매일 그 날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 뒤의 영생을 위해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 때때로 허락하시는 여러분 삶의 쓴잔을 달게 받아 내실 수 있는 실력을 키우세요. ‘내가 받아먹으니 그 책이 입에서는 달았으나 배에서는 쓰더라.’ 여러분이 경주하시는 신앙의 여정 속에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진리입니다. 다시 한 번 되새깁시다.
"내가 받아먹으니 그 책이 입에서는 달았으나 배에서는 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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