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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38년 된 병자의 치유를 통해서 본 행위와 은혜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7. 16.

 

 

38년 된 병자의 치유를 통해서 본 행위와 은혜

 

(김성수 목사)

 

 

(요 5:1-18) “1 그 뒤에 유대 사람의 명절이 되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1)히브리 말로 2)베드자다라는 못이 있는데, 거기에는 주랑이 다섯 있었다. 아람어를 뜻함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베데스다' 3 이 주랑 안에는 많은 환자들, 곧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자들이 누워 있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4 주님의 천사가 때때로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 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가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다. 6 예수께서 누워 있는 그 사람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랜 세월을 그렇게 보내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물으셨다. "낫고 싶으냐?" 7 그 병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9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갔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대 사람들은 병이 나은 사람에게 말하였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소." 11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나를 낫게 해주신 분이 나더러,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셨소." 12 유대 사람들이 물었다. "그대에게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런데 병 나은 사람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많이 붐비었고, 예수께서는 그 곳을 빠져나가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여라." 15 그 사람은 가서, 자기를 낫게 하여 주신 분이 예수라고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16 그 일로 유대 사람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신다고 해서, 그를 박해하였다. 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 18 유대 사람들은 이 말씀 때문에 더욱더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38년 된 병자의 치유 사건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세 번째 표적입니다. 2장 1절에서부터 12장 50절까지를 표적의 책이라고 부른다고 했지요? 그 표적의 책들은 ‘표적+오해+강해’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표적의 내용은 전부 1장 마지막 절에 걸리는 것이라 했지요? 인자 위로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이 하나로 화해를 하게 되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는 책이 바로 표적들의 책인 것입니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한 요한복음 4장까지의 내용도 전부 은혜를 그 주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은혜’라는 주제 아래에서 표적의 사건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강해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잠깐 복습을 하자면 요한은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의 사건을 통해 어린양의 혼인잔치는(구원의 완성)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만 잔치답게 완성될 수 있다는 은혜의 복음을 보여주었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그 혼인 잔치의 표적에 대한 강해의 부분으로 유대 관원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해설로 붙여 놓았습니다.

 

‘어떻게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완성이 되느냐?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도 조금 보태야 하지 않느냐? ‘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강해가 유대 관원 니고데모의 이야기입니다. 부자였고 지식인이었으며 벼슬까지 하고 있었던 유대관원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거듭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인간 측에서 준비한 모든 수고와 노력을 갖다 버리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 측에서 마련한 어떠한 것도 근거로 작용할 수 없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구원은 자격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쐐기를 박는 강해가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자였고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던 당시에도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남편이라는 도구로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려 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참 생수이신 구세주 예수를 소개함으로 그 여인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 신지 알지도 못하고 그 분께 구원의 요청도 해 본적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과 그 여인의 동네에 사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은혜지요. 이렇게 구원의 주도권과 시행 권은 오직 하나님 편에만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하나님의 사역에 아무 것도 보탤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5장부터 10장까지 에서는 그러한 ‘은혜‘의 스토리를 이스라엘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율법과 절기를 통해 다시 확대해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5장부터 10장까지의 내용에서 율법과 절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를 박살내시며 그 속에 담겨 있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가 오늘 공부할 5장에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유대인들과의 안식일에 관한 논쟁을 통해 안식일이 상징하는 바인 ‘구원’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시고,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유월절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7-9장까지 에서는 초막절을 완성하시는 것을 보여 주시며 10장에서는 이렇게 유대교의 중요한 제도들(institutions)을 완성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참 메시아 됨, 즉 하나님 백성의 참 목자 됨을 드러내십니다.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절기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의 달력은 우리가 쓰는 그레고리안 력과 많이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달력으로 1월 14일을 유월절로 지킵니다. 그 때는 우리가 쓰는 달력으로는 3월 중순에서 4월 초 사이입니다. 유월절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이 되었을 때 10가지 재앙으로 애굽 왕을 굴복시키시고 마지막으로 모든 장자를 죽이는 재앙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살려낸 것을 기념하는 절기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50일 후를 오순절, 혹은 맥추절, 혹은 칠칠절이라는 절기로 지킵니다.

 

그 다음에는 수장절, 혹은 초막절이라는 절기가 있는데 그 절기는 오늘날의 추수감사절 같은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세 절기를 지킬 때는 성회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회로 모인다 함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스라엘 법규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같은 규례가 적용이 됩니다. 이 세 절기는 계절별로 절기를 삼았을 뿐이지 이 절기를 지키는 근본 원리는 안식일을 공통인수로 하여 절기 화 한 것입니다. 레위기 23장에서 26장까지에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고 있으면 5장부터 10장까지는 아주 쉽게 이해를 하실 수 있습니다.(에베소서 58번 강해 참조) 이렇게 5장부터 10장까지의 내용은 전부 안식일이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그 안식일에 담겨있는 참 된 의미와 오해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어주는 내용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럼 이제 오늘 본문의 내용 분석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38년 된 병자의 치유 사건의 시간적 배경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시지요.

 

(요 5:1)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라는 구절로 이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는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그냥 명절이 아니라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요한은 이 어구를 통해 이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내용을 미리 조금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유대인’이라는 말이 무려 70번이나 나옵니다. 요한은 다른 공관 복음서 기자들과는 달리 이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예루살렘에 근거를 둔, 그리스도와 복음을 반대했던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킬 때 주로 씁니다. 요한복음 9장에 가면 주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고치시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 소경과 부모들은 분명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을 유대인들과 구별하여 묘사합니다.

 

(요 9:22)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 함이러라”

 

이렇게 요한은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예루살렘에 근거를 둔, 그리스도와 복음을 반대했던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킬 때 주로 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요한이 이 38년 된 병자의 이야기를 ‘유대인의 명절’이라는 어구로 시작하는 이유를 쉽게 추론해 볼 수 있지요? 요한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명절의 개념, 즉 안식일의 개념을 가지고 어떤 것을 설명할 것이라는 힌트를 5장 첫 절에서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도 아주 재미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 2절을 보시겠습니다.

 

(요 5:2) “2 예루살렘에 있는 양 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지금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는 곳은 양 문 곁 베데스다라는 연못가입니다. 양 문이라는 것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여러 문(門) 중의 한 문을 말합니다. 옛 날 우리 한양에도 성으로 들어가는 문들이 여럿 있었지요?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 서소문 등의 사대문과 사소문이 있었고 시구문처럼 시체가 다니는 문들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도 그러한 문들이 여러 개가 있었습니다. 물고기를 들여오던 어문을 비롯하여 말들이 다니던 마(馬)문(門), 골짜기 문, 동문, 샘 문 등이 예루살렘 성벽에 나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 2절의 양 문입니다. 양 문은 말 그대로 양들이 들어오던 문이었습니다. 양도 그냥 양이 아니라 성전에서 희생 제물로 드려질 희생양들이 들어오던 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살아난 민족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아니었으면 애굽과 똑같이 장자의 재앙에서 죽어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양의 희생은 생명의 은혜로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양 문은 희생과 은혜를 의미하는 아주 귀한 문이었습니다.

 

(느 3:1) “1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 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 하였고”

 

이스라엘이 성벽을 재건하는데 가장 먼저 건축을 한 곳이 바로 양 문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게는 희생 제사의 제물이 들어오는 양 문이 참으로 의미가 있고 소중한 문이었던 것입니다. ‘은혜의 문‘ 그리고 또 하나의 공간적 배경으로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등장합니다. 그 연못의 이름은 ‘베이트’ ‘헤세드’의 합성어입니다. ‘베이트‘’벧‘은 여러분이 익히 아시는 것처럼 ’집‘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헤세드‘는 ’자비, 긍휼, 은혜‘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베데스다라는 이름의 의미는 ’은혜의 집, 긍휼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이 무대 배경을 잘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상징하는 제사용 양들이 들어오는 양 문 곁에, 다른 말로 은혜의 문 곁에 ‘은혜의 집’이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습니다. 그러한 공간적 배경은 구원은 바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 분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배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병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본문 3절과 4절을 보세요.

 

(요 5:3-4)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 은혜의 집이라는 연못가에 많은 병자들이 있는데 요한이 굳이 병명을 세 가지만 댑니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 입니다. 이 세 가지 병명은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던 표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그 베데스다 못 가에 모여 있는가 하면 베데스다 연 못의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전설을 믿고 그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그 베데스다 연 못이 간헐천이었기 때문에 간혹 온천물이 올라오게 되면 그 물이 동하게 되었고 그 때 피부병이나 관절염 등을 앓는 환자들이 낫기도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 연못을 두고 그러한 전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이 명백한 대조를 보십시오. 은혜의 집 베데스다에서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여 구원을 얻겠다고 베데스다를 바라보고 내 달릴 준비를 하는 무리들을 보세요. 일단 자기가 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은혜가 아닌 행위를 의지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우리 독자들에게 행위, 즉 율법과 은혜를 극명하게 대조하여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을 보태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것이라는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38년 된 병자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 율법으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그 38년 된 병자가 바로 구원 앞에서의 우리의 무력함인 것입니다.

 

죄인들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분노합니다. 자신들에게도 능력이 있고 힘이 있는데 왜 거지처럼 거저 주는 것을 받아야 하느냐는 반발심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나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고 선악과를 따먹은 그 죄 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값없이 받아야 하냐는 것이지요. 자존심 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이 세상의 방법인 베데스다 연 못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느 3:31-32) “31 그 다음은 금장색 말기야가 함밉갓 문과 마주 대한 부분을 중수하여 느디님 사람과 상고들의 집에서부터 성 모퉁이 누에 이르렀고 32 성 모퉁이 누에서 양 문까지는 금장색과 상고들이 중수하였느니라”

 

처음에 은혜의 문, 희생의 문에서 재건이 시작된 예루살렘 성이 마지막에 어떻게 끝이 납니까? 양 문에서 시작해서 한 바퀴 돌아 다시 양 문까지 오는데 그 양 문 바로 옆의 문이 함밉갓 문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심판’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짓는 이 역사 속에서의 성전은 결국 심판으로 결론이 난다는 의미가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로 홀로 지으시고 완성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은혜를 거부합니다. 그렇게 죄인들은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이 전부 소경과, 절뚝발이와 혈기 마른 자로 보입니다. 아니 그렇게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들은 구원에 관한 한 실제로 그렇게 무능력하고 불가능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병자들을 소경과 절뚝발이와 혈기 마른 자들이라고 대표적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소경이 물이 동하는 것을 볼 수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제일 먼저 달려갑니까? 불가능합니다. 다리를 저는 사람이 소화 불량이나 감기에 걸려 베데스다 연못가에 나온 사람보다 먼저 뛸 수 있습니까? 혈기 마른 자는 어때요? 여기서 혈기 마른 자라고 번역이 된 ‘크세로스’라는 단어는 손발이 마비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은 이 ‘혈기 마른 자’를 그냥 ‘중풍병자’라고 번역을 하기도 합니다. 중풍병자가 피부병 걸린 사람보다 먼저 뛸 수 있나요? 이 세 부류의 병자들은 절대 자기 힘으로 연 못에 제일 먼저 달려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 사람들의 실존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모여 있는 병자들은 모두 다 절박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물이 동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먼저 뛰어서 연 못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내가 먼저 연 못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방법만 있다면 나보다 나은 자들을 살해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세상인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구원에,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자라고 굳게 믿고 있고,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의 병만 나으면 된다는 신념하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지만 자신의 참 된 안녕과 행복을 확보하는 데에는 전혀 불가능하고 무능력한 존재가 바로 세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다 하나같이 자신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누군가가 자기보다 먼저 연 못으로 뛰어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삽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힘으로 연 못으로 뛰어 들어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세상의 죄인들은 모두 소경이요 절뚝발이요, 혈기 마른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죄인들은 자신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다른 이들이 먼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으며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원망하며 평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38년 된 병자의 모습이요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나보다 먼저 들어간 이들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문명을 만들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자기들 힘으로 반드시 지상 낙원을 이룰 수 있을 줄 압니다. 돈을 벌어 보기도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기도 하고, 높은 지위에 올라앉으려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취미 생활을 하기도 하고 무언가에 자신을 중독 시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간들이 스스로를 구원했다는 증거를 단 한 건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정말 온전한 행복을 완성하고 떠났다는 사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전부 후회와 회한 속에 죽음으로 들어갑니다.

 

38년 된 병자는 그렇게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고 있지만, 다른 말로 율법과 행위를 의지하고 있지만 무능력하고 불가능한 세상 사람들을 대표하여 예수 님 앞에 누워 있는 것입니다. 그 38년 된 병자 안에는 바리새인들도 들어 있고 제사장들도 들어 있고 바로 구원받기 전의 우리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아담이후의 모든 인간들의 모습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며 38년을 유리방황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광야의 이스라엘입니다.

 

(신 2:14) “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 년 동안이라 이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파송 합니다.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정탐꾼 열 명은 모두다 ‘가나안 땅에는 아낙 자손들이 버티고 있고 그 성들은 너무나 견고해서 절대 우리가 들어 갈 수 없는 땅’이라고 보고를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전체가 통곡을 합니다.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그 분의 능력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가나안을 정복하려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하고 통곡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뭡니까? ‘너희들을 반드시 내가 약속한 땅에 넣어 주리라’고 약속을 하신 그 하나님은 뭐가 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죄인들의 총체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대가로 광야에서 38년을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베데스다 못을 바라보며 어떻게 해서든 그 연 못에 들어가 병을 고치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능력 없음에 좌절하고 있는 38년 된 병자와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다가 좌절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이 너무나 똑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둘 다 38년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자신들의 행위나 노력을 의지하고 있는 불가능하고 무능력한 아담들에게 찾아가셔서 은혜로 거저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십니다. 어차피 38년을 앓았던 사람인데 하루 더 기다렸다가 다음 날 고쳐 주셔도 되지 않나요? 주님은 이 안식일을 어기는 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시게 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굳이 안식일 날 이 병자를 고치십니다. 이유가 뭘까요? 주님께서 안식일에 어떠한 일을 하신 것이 여기뿐만 아니지요?

 

(마 12:1-2, 10-14)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0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눅 13:11-16) “11 십 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 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십 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예수님은 고의적으로 안식일에 어떠한 일들을 하심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십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은 ‘안식일을 지키는 규례 인 율법이라는 것이 은혜의 주님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 한다’는 아주 중요한 행위와 은혜의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 속에 들어 있는 진의를 알 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613가지의 미쉬나의 규례와 전승 속에 무려 39가지의 안식일 규례를 만들어 놓고 그 것만 지키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은혜의 문, 은혜의 집에서 베데스다 연 못을 바라보고 있는 행위와 율법을 의지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얼마나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던지 안식일에는 죽어가는 사람도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한 응급조치만 했습니다. 그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침을 뱉어서 땅이 파이면 밭을 간 것으로 간주해서 안식일을 어긴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굳이 침을 뱉어야 되는 상황이 되면 바위에다 침을 뱉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천 보 이상을 걷지 못했습니다. 손수건도 나르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는지는 예수님을 잡으러 갈 때도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밤에 체포하는 것을 율법으로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러 갈 때도 새벽에 간 것입니다. 또 안식일의 규례를 그대로 적용해야 하는 유월절에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도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그 전에 부랴부랴 체포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안식일 규례를 포함한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멋대로 곡해를 해서 ‘나는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사람이다’라고 자기들의 의를 쌓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자기 의가 은혜의 예수를 때려죽이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을 포함한 요한복음 전체가 웅변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단지 요한복음에서만 강조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창세기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여섯째 날에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솨바트‘라는 단어의 의미는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완전한 창조를 전제로 내포하고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안식은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 곧 생명의 충만한 창조를 기뻐하고 즐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했습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천지 창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완성하실 참 안식의 ‘보기’를 그림자로 힌트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식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선악과를 따먹는 반란으로 인해 깨져 버렸습니다. 이제 이 피조 세계는 참된 안식을 향해 다시 재창조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제 다시는 타락하지 않고 훼손될 수 없는 참된 안식, 하나님은 그 참 된 안식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늘도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 17절 보세요.

 

(요 5:17)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정확하게 무슨 일이 되는 것입니까? 38년 된 병자 같은 무기력하고 불가능한 당신의 백성들을 이 역사 속에서 구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될 때 그 하나님의 일은 끝나게 되는 것이고 이제 참 안식이 완성이 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지금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신 것이고 주님은 그 아버지의 일을 이 땅에서 수행하기 위해 오신 분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요 6:28-29) “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지금 참 안식의 완성을 위해 당신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는 인간의 열심이 그렇게 자신들의 구원자를 때려죽이게 되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왜 성경이 이렇게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인간의 행위와 율법을 경계하고 있는지 잘 보세요.

 

지금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안식’이 깨졌습니다. 맞습니까? 여기서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셔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완성해 놓으신 것이 인간의 힘에 의해 깨어질 수도 있는 것인가? ‘ 어떠세요? 정말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완성하신 안식이 깨졌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 창세기 2장의 안식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로서의 안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창세기의 안식은 단지 하나님의 참 된 안식을 설명하기 위한 그림자로서의 안식이었고 진정한 안식을 완성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가차 없이 그 그림자인 안식을 깨도록 역사를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안식은 깨졌습니다. 인간들은 창세기 3장 5절의 ‘너희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 거야’라는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이제 자기가 자신에게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하나님의 생명력이 끊겨 버렸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기 내재적 자원으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해야 하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세워가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가 됨으로 해서 더 이상 무한함으로부터 공급을 받는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재적 자원으로 자신의 행복을 채워야 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내재적 자원의 특징은 ‘한계’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재적 자원은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비교하여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함으로부터 공급이 차단된 인간은 마치 뿌리 뽑힌 나무와 같아서 잠시 동안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살아있을 수 있지만 그 것은 이미 죽어 버린 삶, 다시 말해 죽음을 향해 치닫는 삶에 불과 한 것입니다. 한계의 끝이 죽음이니까요.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고 사약을 받아 마신 후에도 상당 시간을 또렷한 정신으로 살아있었다지요? 그 때 자신의 제자인 플라톤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대화의 대용이 ‘dialogue'라는 책으로 나왔을 만큼 오랜 시간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죽은 시간입니다. 이미 사약을 받아 마신 상태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 있었다한들 그게 살아있는 삶이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함에서 떨어져 버린 인간은 이제 한계 속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 한계는 죽음을 꼭지 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제한된 시간과 자원 속에서 죽음을 향해 치닫게 된 것입니다. 죄인들은 이미 사약을 받아 마신 소크라테스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한계’라는 특성은 곧바로 ‘결핍’으로 나타납니다. 무한에서 유한으로 갇혀버린 인간에게 무수한 결핍이 나타났습니다. 타락을 한 인간은 사랑의 결핍으로 갈등과 다툼과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지혜의 결핍으로 내일을 두려워합니다. 제한된 시간에 속박됨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의 노예가 되어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하심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지닌 자원만으로 살겠다고 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러한 결핍에서 초래되는 것이 ‘고난, 고통‘입니다. 육신의 병고와 심리적 아픔과 사회적 갈등과 가난 등과 같은 모든 고난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결핍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은 인간이 스스로 한계 속에 갇힘으로 그들에게 찾아 온 죽음의 증상들인 것입니다. 대지로부터 뿌리가 뽑혀진 나무가 당장은 살아 있지만 서서히 잎이 시들어 가고 줄기가 마르고 이내 썩어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이라는 대지로부터 뿌리가 뽑혀버린 인간의 삶에 시들고 마르고 썩어 버리는 고난이 생겨난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러한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쉼 없이 일을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일을 해서 자신의 생명을 확대하고 싶어 합니다. 이제 자기가 스스로의 하나님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확대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확대하고 안녕을 확보하는 길은 자신의 힘으로 일을 하는 방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문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명이라는 것은 분명 생명을 확대하는 면이 있지만 동시에 죽음도 확대하는 것입니다. 문명은 인간에게 생명을 더 누리게 하고 의미와 행복과 안녕을 더해주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은 동시에 죽음도 확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교수님의 책에 이런 내용이 있어 적어 왔습니다. ‘18세기 산업 혁명을 생각해 보자. 산업 혁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자연과학 지식을 생산 수단에 응용함으로써 소비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 바로 산업혁명이다. 이 같은 산업혁명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했는가? 여러 방면에서 ’생명‘을 많이 확대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것이 인간성을 얼마나 황폐화시키고 물질 화시켰는가? 이 사회의 인간관계를 완전히 물질화시킴으로 우리에게 엄청난 죽음을 가져왔다. 산업혁명이 공해로 나타나고 과학과 기술 발달이 첨단 무기로 변해 인류를 살상하고 우리 인간을 엄청나게 피폐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흔히 들고 다니는 휴대폰이 우리의 자유를 얼마나 확대했는가?’생명‘을 확대한 명이 있지만 동시에 그것이 우리를 얼마나 옭아매고 있는가? 심지어 설교를 듣는 중에도 장례를 치르면서도 전화벨이 울리면 할 수 없이 전화를 받지 않는가? 우리에게 많은 자유를 가져다주는 휴대폰이 우리를 이렇게 속박하기도 한다.

 

휴대폰은 거의 독재자의 수준으로 사람들을 속박한다. 부모님 말은 안 들어도 이 전화벨 소리에는 꼼짝을 못하고 반응을 하고야 만다. 우리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게 해서 우리의 자유를 확대하는 통신수단이 동시에 우리를 절대적으로 옭아매는 도구로도 다가와 있다. 도청장치가 얼마나 발달했는지 이제는 안방에서 부부 사이에 속말을 주고받지 못하는 그런 시대가 아닌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몰래 카메라를 찾아 두리번거려야 하는 이 시대의 문명이 과연 생명을 확장하고 있는 것인가? 죽이고 가두고 있는 것인가? ‘

 

이렇게 인간이 스스로의 신이 되어 자기를 부양하겠다고 만들어 낸 일과 문명은 생명을 확대하는 측면과 함께 죽음도 확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한국의 40대 남자들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줄 아세요? 죽어라고 일만해서 그렇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생명이 확대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죽어라고 일을 하는데 왜 진짜 죽지요? 인간의 일은 이렇게 삶과 죽음의 변증법적 구조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명사에서는 주기적으로 문명을 폐기하자는 낭만주의자들의 반 문명 운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60년대 70년대 일어났던 히피운동입니다. 그렇다고 거기에 구원이 있었나요? 자연으로 돌아가서 대마초만 피우다가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 어차피 일을 함으로써 생명을 확대하며 살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게 아담 적 실존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못 가에 모인 병자들이 모두 다 연 못 만을 바라보며 달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일과 그 일이 만들어 낸 문명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하고 있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의 백성들아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티끌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제 그만 무장해제하고 나의 은혜 속으로 들어오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는 태초에 누렸던 의미의 안식은 더 이상 없습니다. 이 세상은 아주 치명적으로 고장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그 고장 난 것을 고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제는 절대 고장 날 수 없는 완전한 새 창조를 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참 된 안식을 선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구약의 안식일에 들어 있었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완성하시고자 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일을 한다거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가차 없이 돌로 쳐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 것은 그 날이 대단한 날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밖에 있는 자들은 모두 자신을 예배하고 스스로가 왕이 되어서 사는 자들이므로 그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라는 상징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완성될 진짜 참 안식, 영생의 표징이었던 것입니다.

 

(골 2:16-17)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하지요? 그 안식일의 실체는 (여기서 몸“소마”는 실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확해 졌죠? 따라서 안식일을 범하는 자를 죽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자들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독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 안식이 뭐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 세상의 죄와 수고와 질병과 고통, 갈등, 투쟁, 슬픔 이모든 것들이 전부 물러간 영생의 상태를 안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사야서에 예언이 된 안식의 실체인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가시적으로 보여 지게 되는 일이 바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진짜 안식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상징하는 안식일에 병자가 있다는 것이 뭡니까? 그 안식일은 불완전한 안식일이죠? 그러니까 그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심으로 예수께서 그 안식일을 완전하게 하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안식이다. 바로 이게 영생이다“

 

(사 35:1-6)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4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을 죽여 버리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인간이 왜 일을 한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무한함에서 차단되어 버린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확보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인간의 일이요 문명의 정체인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질 영생’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무한하신 생명력이 다시 부어지게 된 자들이므로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의뢰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안식일에 자기의 먹 거리를 위해, 생명의 확장을 위해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영생과 관계없는 자라는 의미이므로 ‘죽음‘이라는 것으로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정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은혜의 집, 베데스다에 진정한 참 안식을 은혜로 가져다주실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베데스다 연 못만을 바라봅니다. 자기가 자신의 행복과 안녕, 즉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뚫어지게 연 못만을 째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실존은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죄인, 원수’라는 무시무시한 호칭으로 부릅니다.

 

(롬 5:6-10)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6절의 ‘연약하다‘라는 단어는 ’helpless, powerless'라는 의미입니다. 베데스다 못 가의 병자들이 바로 ‘아스떼논’ ‘도울 이가 없는, 힘이 없는, 할 수 없는’사람들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은 주님의 원수,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고요.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병자들이 자기들도 무언가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38년 된 병자도 보세요.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당연히 낫고 싶겠지요. 38년을 누워 있던 사람이 낫고 싶지 않을 리 없지요. 그리고 낫기 위해서 베데스다 못 가에 나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뭐 하러 그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바로 교회에게 38년 된 불가능한 병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이 세상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아담 적 사고 속에 들어 있더라는 것을 보여주시려 그렇게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38년 된 병자의 대답을 보세요.

 

(요 5:7)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네가 낫고 싶으냐? ‘라는 주님의 질문에 ’네 낫고 싶습니다. 저 좀 낫게 해 주세요‘라고 대답을 한 것이 아니라 ’저 좀 연 못에 넣어주세요‘라고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답답한 38년 된 병자는 은혜의 집이라는 베데스다 못 가에서, 은혜를 베푸시는 장본인인 주님을 앞에 놓고 여전히 세상의 방법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것에서 행복과 안식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방책인 재물이나 명예나 인기 등으로 안식과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오늘날의 죄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그러한 한심한 병자를 연 못 속에 얼른 넣어주시나요? 그냥 말씀만 하십니다.

 

(요 5:8-9)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서도 구원은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시는 사건에서도 아들의 살아남은 말씀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만으로 그 말씀이 실제가 되어 병자가 일어나 걸어갑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 38년 된 병자를 연 못에 집어 넣으셔서 낫게 하셨다면 그 사람은 ‘주님은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책을 도와주신 분’으로 밖에 인식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하면서도 평생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면서 주님께 그 때 그 때 도움만을 청하는 그런 엉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방책이 자기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착각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가 세워 놓은 계획에 하나님은 그저 능력으로 도움만 주시면 된다는 식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방책을 세워 놓고 ‘비나이나 비나이다‘하고 빌 때 그 방책을 안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연 못에 안 넣어 주십니다. 그냥 말씀만을 주십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게 신앙인의 삶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삶의 방책들을 도와주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방책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만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베데스다 못은 어떤 것입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잘생긴 외모입니까? 인기입니까? 그 것만 있으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아닙니다. 그 베데스다를 다 버리기 전에는 절대 여러분에게 참 된 행복이 올 수 가 없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비롯해서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은 모두 이 세상의 율법과 행위를 의지하는 아담의 후손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그렇게 연 못의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다가 하릴없이 죽음으로 던져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 중에서 어떤 무리들을 택하시고 그들이 주님이 누구이신지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에 먼저 찾아가셔서 그들을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요 5:10-13)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 대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 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보세요. 38년 된 병자는 자기를 고쳐주신 분이 누구 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이 불가항력적 은혜로 그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은혜로 사는 자들입니다. 행위와 율법은 가인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존재인지 착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이 진짜 하나님처럼 되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그들을 가리켜 소경이요, 절뚝발이요, 혈기 마른 자들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사약을 마셔버린 소크라테스들입니다. 지금은 멀쩡한 것같이 두런두런 대화도 하고 일도 하고 문명도 만들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시체들입니다.

 

이거 하나만 기억하세요. 행위는 자기의 결과에 대해 자기의 조건과 근거를 제시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는 자랑이 있습니다. 교만이 있습니다. 은혜는 자기가 얻는 결과에 대하여 자기 노력의 근거나 조건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손발을 움직여 은혜를 주신 분의 뜻대로 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바로 은혜를 입은 자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계십니까? 은혜입니까? 행위입니까? 잘 구별하셔서 여러분의 열심히 심판의 문, 함밉갓 문으로 끝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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