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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121강. 다 이루었다

by IMmiji 2013. 7. 15.

121강. 다 이루었다 (요 19:23-30)

 

요 19:23-30=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는 것은 목적을 다 완성 하셨다는 말입니다.

아니 죽는데 어떻게 다 이루심이 되는가요.

 

우리는 죽으면 실패 하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으로 다 완성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가요?

 

이는 창세전 언약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예수의 피 뿌림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말은 곧 아버지께로부터 사명(使命)을 받고 오셨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명인가 하면 십자가에 죽는 사명입니다.

별 이상한 사명도 다 있지요.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는 기도를 했습니다.

왜? 기도를 했나요?

이 잔(殘)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마실 잔(殘)이란? 십자가에 죽으심이에요.

예수님은 죽기 싫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죽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천사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수종 들게 합니다.

말이 좋아 수종이지 십자가를 지도록 꼬드낀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님에게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까.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이 죽어야지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게 되어 있잖아요.

그래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낳아지지요.

 

그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아버지와 약속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와서 안 죽겠다고 하면 어찌 됩니까!

안 죽으면 창세전 언약이 수포로 돌아가잖아요.

그러니 이러지 마시고 죽으러 갑시다! 라고 도운 겁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이 죽어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안 죽겠다고 하니 천사들이 난리가 난 겁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를 지도록 수종을 드신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님에게 죽으러 오신 분이 안 죽겠다고 하면 계약 위반이지요.

그러니 얼른 갑시다.

가서 죽읍시다! 라고 수종을 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예수님은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예수님을 높이 들어서 만유의 주(主)로 삼았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서 만유의 주가 되는 대관식(戴冠式)을 치른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에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수순을 밟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땅에서 다 죽게 되어 있어요.

이는 죽기로 작정이 되고선 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죽으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그 이유를 알아봅시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살리고자 하심입니다.

이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다 이루심” 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들은 모두가 창세전에 아버지와 언약으로 예언된 것을 성취하는 차원에서 하신 일들입니다.

이는 예수님은 독자적으로 행동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였다는 말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감독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를 이렇게 저렇게 지시 하는 것과 같아요.

감독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연출을 하듯이 하나님도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예수님을 지시하고 감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때와 기한은 아버지가 정하신다고 하였어요.

이는 자신도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와 기한에 맞추어서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5=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절을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누가 누구를 보냈나요?

아버지가 아들을 보냈지요.

 

언제!

때가 차서 보냈어요.

무슨 때입니까?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서 구원할 때입니다.

 

왜? 보냈습니까?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속량하시려고 보냈어요.

속량(贖良)이란? 죄 아래 가두어진 자를 대신 죽어서 빼내 온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대속(代贖)이라고 해요.

대신 값을 지불했다는 말입니다.

대신 죽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아버지가 죄 아래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빼내 오시려고 그 아들을 대신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 아들의 죽음으로 죄 아래서 건져진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예수 라는 아들 하나를 씨앗으로 뿌려서 많은 아들들을 생산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자기 백성들도 빼내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와 기한을 누가 정하시는가 하면 아버지가 정하세요.

아버지가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을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태어나고 죽는 것도 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맞추어서 일어나는 일들인 것입니다,.

 

우연이란 없어요.

다 창세전에 계획된 필연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철저하게 계획된 일들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은 다 예수를 믿더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영생 주시기로 작정을 하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에요.

이러한 사실이 믿어지면 우리의 구원을 염려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불안해하는 것이 뭔가요?

자기 안에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확신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건 성령이 오시면 자연히 생겨요.

 

흔히들 목사님들이 구원에 확신을 가지라고 소리치잖아요.

이건 비 성경적이에요.

이건 소리칠 문제가 아니에요.

 

소리친다고 해서 없는 확신이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확신은 성령이 임하면 저절로 자연히 생겨요.

그래서 성령을 보증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못 믿는 사람들은 목사들이 구원에 확신을 가지라고 하면 자기 쪽에서 확신이 갈만한 것들을 만들어요.

그게 뭔가 하면 자기 열심과 충성이에요.

열심과 충성이 있으면 확신이 들다가도 열심과 충성이 식어지면 확신이 사라져요.

 

솔직히 대답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언제 신앙이 좋다고 느낍니까?

자기 열심과 비례하여서이지요.

 

열심과 충성이 왕성하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다가 그 왕성함이 사라지면 금새 바람 빠진 풍선 마냥 푹 쭈그러들잖아요.

이 모두가 언약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언약을 근거로 하지 않고 자기 행함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쪽에서 구원의 확신이 될 만한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는 우리가 마음먹는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우리가 결정한다고 생각하잖아요.

내가 믿고 싶으면 믿는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믿는 척 할 뿐이에요.

 

예수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때와 기한을 정하셔서 정한 때에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예수가 믿어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믿는 척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믿음은 글자 그대로 믿어지는 것이어야 해요.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실 때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그냥 쑤욱 믿어져요.

 

제가 과거에 수십 년 동안 예수를 믿고자 했어요.

그러다가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어요.

그래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믿고는 싶은데 안 믿어지니까 미치겠는 겁니다.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다 동원해도 안 되는 거에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때에 다양한 은사들을 체험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저는 다양한 은사들을 체험했어요.

병도 고쳐보고 귀신도 쫓아내고 방언도 해보고 환상도 보고 했어요.

당시에는 엄청나게 기도를 많이 했거든요.

기도 많이 하면 은사들을 체험해요.

 

그런데 그것이 할 때는 좋은데 어느 시기가 되면 이건 아닌데 라는 갈등이 생겨요.

스스로 내부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분열을 없애고자 또 특유의 열심을 가동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 종교성이 언제 나타나는가 하면 믿어지지 않으면 나타나요.

인간은 믿어지지 않으면 열심으로 믿음을 대체하는 종교성들을 가지고 있어요.

열심으로 믿음을 숨기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엄청 믿음이 좋은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사람들이 믿음 좋다고 칭찬을 해요.

저도 믿음 좋다고 칭찬을 엄청 들었어요.

 

그렇지만 제 마음은 항상 공허했어요.

진리에 대한 딜레마에 빠지면 사람이 미쳐요.

이건 목사가 되어서도 계속되었어요.

 

제가 목사가 된 것은 진리를 알고자 함이었어요.

목사님들의 설교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가서 더 헷갈리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목사 노릇을 하면서도 이 딜레마는 한참 갔어요.

그러다가 도저히 내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아서 마지막 카드를 던지고자 40일 금식 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30일째 되는 날에 양지 바른 산기슭에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다가 잠시 개미들이 와글 와글 노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내 앞에 큰 바위가 두 개가 쌍둥이처럼 서 있는 겁니다.

그 위에 개미들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겁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이쪽 바위에 있는 개미를 제가 덜렁 들고 저쪽 바위로 옮겨준 것입니다.

그때 머리에서 번쩍하는 것입니다.

야! 이거다!

 

이쪽 바위와 저쪽 바위는 큰 구렁이 끼어서 개미들 입장에서는 가지를 못해요.

제가 이쪽에 있던 개미를 저쪽으로 옮겨 주었어요.

이런 옮겨짐을 구원이라고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제 손에 의하여 옮겨간 개미는 자기 능력과 상관없이 외부의 힘에 의하여 옮겨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날아서 왔다고 할 수는 없어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어떤 분이 나를 옮겨 주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 우리의 구원이 이런 거구나!

누군가가 나를 구원 시켜주어야지만 가능한 것이구나! 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걸 깨닫고 그날로 30일 만에 금식을 끝냈어요.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깨달음인가 하면 언약이에요.

언약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수십 년 예수를 믿어도 언약이라는 것을 몰랐어요.

들어 본 적이 없었어요.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냥 율법이라는 말은 들어 보았어도 옛 언약과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몰랐어요.

더군다나 창세전 언약을 들어 본 적은 더 더군다나 없었습니다.

그냥 무식하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된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저는 엄청난 율법주의자였어요.

성화주의자였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신자 취급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언약에 대하여 눈이 떠지기 시작을 하니 성경이 달리 보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눈에 율법이라는 비늘이 떨어지고 은혜의 눈을 뜬 것처럼 제게도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이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구약의 율법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재해석하는 계시를 받았듯이 저도 일정 기간 동안 성경을 언약으로 보게 되는 간섭을 당하게 되었어요.

계시 받았다는 말이 아니고 깨닫고 정리하는 과정이 있었단 말입니다.

 

희미하던 것이 점차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깨달아지고 나니 모든 성경이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전개되어지고 있다는 것이 보여지기를 시작을 한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깨달아지고 나니까 모든 성경이 달리 보이고 시작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입만 열면 창세전 언약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모든 설교를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해요.

 

창세전 언약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져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유명한 창세전 언약이 어떤 것인지 봅시다.

 

에베소서 1장입니다.

 

엡 1:3-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바울이 창세전 언약을 깨닫고 감탄을 합니다.

찬송이 터져 나왔어요.

 

뭐라고 하는가요?

창세전에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고 합니까?

그 아들의 피 뿌림으로 한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죄에서 건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일을 하려고 만물을 창조 하였어요.

그래서 만물은 예수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3-17=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다고 하지요.

그가 누구인가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 했다고 하지요.

누구를 위해서 창조했다고 합니까?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가 된 세상이 어떻던가요?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혼돈과 공허하지요.

 

이 때 하나님 말씀이 떨어집니다.

그러자 흑암 속에서 빛이 나옵니다.

그리고는 빛과 어둠이 갈라지게 됩니다.

 

이는 곧 위에서 언급한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흑암의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준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식으로 말하면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을 은혜 아래로 옮겨준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일들이 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수십 년 동안 지독한 율법주의자로 살다가 늦게 은혜 아래로 옮겨진바 된 것도 모두가 때가 찬 하나님의 경륜에 의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 때가 찬 경륜으로 나를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때가 찬 경륜에 의하여 간섭을 당하였듯이 우리들도 때가 찬 경륜에 의하여 간섭을 당하고 있어요.

구원의 시기는 하나님이 정하세요.

그 때는 우리가 몰라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한 알갱이도 버려지지 않고 다 구원을 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구원에 대하여 신경을 끄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지 라는 딜레마에 빠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간섭을 하세요.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일정 기간 율법 아래서 종 노릇 하는 기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기간이 길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짧을 수도 있어요.

그 기간은 하나님이 정하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일어난 사건이에요.

 

갈라디아서 4장에서 그랬잖아요.

때가 차매 그 아들이 오셨고!

때가 되어서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아버지의 때가 찬 경륜에 의하여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의하여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예정된 시나리오였듯이 십자가상에서 하시는 일들도 예언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언행심사 하나 하나를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라는 말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응하게 한다”는 말은 이미 예언된 것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다 이루었습니까?

이는 창세전에 미리 예언된 것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성경을 응하게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성경을 응한다는 말은 곧 창세전에 이미 아버지와 약속을 하신 것을 성취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사셨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예수님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우연한 것이 아니에요.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각본에 따라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각본이 어떤 것입니까?

창세전 언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모든 것들을 존재케 하는 근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이에요.

오셔서 십자가에서 인간들 손에 죽임 당하시는 것도 창세전 언약을 위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도 동일합니다.

우리도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된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도 예수님과 동일하게 이미 예정된 수순(手順)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장을 봅시다.

 

렘 1:4-9=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 할지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야! 내가 너를 복중(腹中)에 짓기 전에 알았고!

태(胎)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列邦)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하십니다.

 

잘 보세요.

예레미야가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알았다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이 계획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를 구별하지요.

이는 어떤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기로 작정을 했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는가요?

이는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우리 모두를 포함하고 있어요.

우리도 예레미야와 같은 운명으로 이 세상으로 보내어진 자들이에요.

이러한 일들을 언제 하였다고 하나요?

창세전이에요.

 

예레미야가 생기기 전에 이미 계획된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계획에 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이 계획에 의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으로부터 간섭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입에다가 하나님 말씀을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가고 하라고 하는 말을 하라고 합니다.

누구에게 보내든지 무슨 말을 하라고 하든지 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말씀을 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할까요?이는 그들의 죄악을 고발하는 말을 합니다.

이게 선지자의 사명입니다.

 

선지자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고 선지자는 백성들과 긴장 관계 안에 있어요.

 

그래서 예레미야가 슬프다고 합니다.

왜? 하필 나입니까? 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재수 없이 걸렸다고 하나님께 원망하는 말이에요.

 

이건 예레미야가 원한 것이 아니에요.

오로지 하나님의 원함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성경을 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이미 창세전에 예언되고 예정된 코스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가시는 길과 같지요.

이는 예레미야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그러해요.

우리도 창세전에 예정되었고 예언이 된 코스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일을 성취하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중간에 포기 되는 것도 없고 또한 실패 되는 일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시작과 동시에 확정이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한 것도 아닌데 여기까지 등 떠밀려 왔습니다.

그럼 장차도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우리를 여기까지 등 떠밀고 오신 분께서 당신이 예정한 그 자리로 반드시 밀고 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믿어진다고 한다면 인생이 가벼워집니다.

내가 애쓴다고 바뀌거나 취소되는 인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인생을 비관적으로 아무렇게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초(歲初)부터 세말(歲末)까지 간섭하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남에서부터 이 세상을 떠나는 것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 수순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간섭하신단 말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응하게 하는 것을 약속(約束)이라고 합니다.

 

약속이란? 하나님의 맹세를 말씀에 묶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말씀이에요.

왜냐하면! 창세전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이신 하나님끼리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세워 질 때는 만물은 아직 창조가 되기 전이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는 도구로 쓰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당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세요.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신 이유가 우리 삶에 개입하여서 예수님의 삶으로 살도록 간섭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하나씩 둘씩 차압을 당하여 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도 예외 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아버지에게 자기 인생을 차압당하는 것으로 보여 주셨어요.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는 순간부터 아버지로부터 인생을 차압당하면서 살게 되었어요.

이걸 성경을 응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 속에 속한 모든 것들은 다 창세전 언약을 위한 도구들이에요.

왜냐하면! 만물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하신 약속을 펼쳐 보이기 위하여 창조가 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물 속으로 오신 예수님도 아버지 손에 의하여 성경을 응하게 하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맘대로 살지 못하였어요.

언약 때문에 육신을 입고 오셨고!

언약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철저히 아버지의 간섭하심 속에서 살았습니다.

태어나는 것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짐승의 밥통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만물이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였어요.

이는 만물 속에 포함이 된 우리가 예수 안에서 나왔고 예수 안에서 살다가 예수 안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도 예수님의 운명에 포함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운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운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예수님의 이야기가 남에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들이 곧 우리의 삶 속에서도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발가벗김 당합니다.

 

옷을 벗김 당합니다.

그런데 그 아래 있는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서 각각 취합니다.

이건 마치 에덴동산의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한 죽음입니다.

대속제물로서의 죽음이에요.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하실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축사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뭡니까?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언약의 피” 라고 하였습니다.

 

왜? 언약의 피라고 합니까?

이는 창세전 언약에 이미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피가 되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피가 무슨 피라고요?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죄사함의 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죽으시는 것입니다.

 

이걸 에덴동산의 그림으로 그려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어요.

죄인이 되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흠 없는 제물을 죽여서 그 가죽을 벗겨서 옷을 만들어서 죄인인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려주셨어요.

아담과 하와는 가족 옷으로 죄의 수치를 가리게 되었습니다.

짐승은 아담과 하와의 죄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었어요.

그러니까 짐승의 피는 곧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흘리는 죄사함의 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림이 지금 십자가상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옷을 벗겨서 주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벗어 줍니까?죄인들에게 벗어 주시고 있어요.

 

이사야 53장을 봅시다.

 

사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립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그가 상합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그가 채찍에 맞습니다.

우리가 나음을 입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가 죽임을 당하였어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곧 우리의 살으심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우리를 맞 바꾸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를 내어 주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발가벗김 당합니다.

온갖 조롱과 수치를 당하십니다.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바로 자기 백성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발가벗고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옷을 벗어서 우리에게 입혀 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옷을 벗어 주신 것입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흠 없는 제물이 희생당하였듯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에 수치를 가려주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벗어 주신 그 옷으로 수치를 가리고 있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흩어진 자기 백성들을 모으시는 일을 하셨어요.

 

이제 예수님의 죽음으로 새로운 민족이 생겨납니다.

이 민족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생겨난 민족입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옷이 입혀져 있어요.

 

옷이란?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처음 창조가 된 인간에겐 옷이 없었어요.

옷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후 생겨났어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자신들이 발가벗음을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선악과가 수치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자신들의 발가벗음이 수치라 여겨지자 가리기 시작합니다.

그것도 자기들 방식으로 가립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수치를 가린다는 말은 타인을 의식하여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누구를 의식하였나요?

하나님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발가벗음이 수치가 된다는 것을 누가 판단한다고 생각 했습니까?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였지요.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 입고 온 옷을 벗겨 버립니다.

그리곤 흠 없는 짐승을 잡아서 가죽 옷으로 입혀 주십니다.

이는 곧 죄의 수치는 곧 하나님이 가려 주신다는 말입니다.

 

수치는 인간 쪽에서는 가릴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왜냐하면! 수치다 아니다 를 판정 하실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입혀 주시는 옷을 입어야지만 하나님 앞에 수치가 가려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아담처럼 자기들 방식으로 수치를 가리고자 하면 하나님이 찢어버려요.

그것은 자기들 방식의 수치 가림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아니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려 주세요.

그것이 곧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죄인의 허물이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는 방식으로 가려 주시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 방식으로 해결할 수가 없어요.

죄를 판단하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어요.

 

죄는 우리를 위하여 도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서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죄를 도말하는데 누가 누구를 위해서 한다고 합니까?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한다고 하시지요.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도말해 주십니까?

이는 죄인을 두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에요.

그런데 자기 백성이 죄로 가득해요.

죄인을 보면 하나님이 불편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죄를 가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려주시는가 하면 흠 없는 제물이 대신 죽어서 그 가죽 옷을 벗어줌으로서 하세요.

지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지고 이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준다는 말은 짐승의 가죽이 벗겨지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의 가죽 옷을 누구에게 입혀 줍니까?

자기 백성들에게 입혀 주셨어요.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기백성들이에요.

그런데 이 놈들이 전부 율법 지킴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율법 지킴을 의(義)로 여기고 산단 말입니다.

 

이건 마치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를 입고 있는 것과 같아요.

이 치마를 입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어요.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에는 인간의 의(義)로 가득해요.

자기들 공로가 담겨져 있어요.

 

율법 지킴이 그러해요.

율법 지킴 속에는 인간들의 자랑거리들로 가득해요.

인간들이 율법을 지켰다는 의(義)가 있어요.

지금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만든 치마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율법 지킴이라는 치마를 벗겨내고 예수님의 가죽 옷을 입혀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義)를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옷을 네 깃으로 나누지요.

이는 곧 온 세상에 흩어진 자기 백성들에게 주어진 옷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의(義)에 옷을 입혀 주시는 일을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하신 것입니다.

 

우린 지금 그 의(義)에 옷을 입고 있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죽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옷을 입혀 주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첫 마디가 무슨 말인가요?

 

눅 23:34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쌔”

 

십자가상에서 첫 마디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고 있어요.

자기를 죽이는 자들이 누구인가요?

자기 백성들이에요.

 

그러니 용서하는 것입니다.

남에 백성에겐 용서가 필요 없어요.

용서는 오직 자기 백성들에게만 허용되어요.

 

용서란?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가 주어져요.

 

용서란? 용서 받는 자 위에 용서 하는 자의 의(義)가 덥혀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용서 받은 자는 보이지 않고 용서 한 자만 보이게 됩니다.

이걸 예수그리스도의 의(義)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자기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알게 하세요.

그리곤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게 하세요.

성령이 오시면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自覺)하게 되어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라야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수치를 가리려고 벌리신 사건임을 알게 됩니다.

이러 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사람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새로운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새로 생겨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창세전 언약에 예정이 된 우리에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우리” 라는 한 무리가 나옵니다.

 

다시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4-7=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지요.

우리란? 복수의 무리를 말해요.

한 집단을 말합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에요.

“아들”이 아니고!

“아들들”이라고 하지요.

아들이라는 단수가 아니고 아들들이라는 복수에요.

 

이건 예수 안에서 수 많은 무리들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한 민족이고 한 나라에요.

좁게 말하면 가족이고 넓게 말하면 민족이고 나라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 보면 예수님의 가족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나오지요.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자들이에요.

 

“마리아” 라는 말은 “높다” “미녀” 라는 뜻인데 이는 높은 곳에 거하는 여자란 뜻이에요.

높은 곳이 어디인가요?

하늘나라에요.

하늘나라에 거하는 미녀란? 예수님의 신부들을 말해요.

 

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늘에 속한 자들을 낳고 계신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마리아에요.

우리가 바로 예수님이 피 흘려서 낳은 마리아에요.

그런데 이 마리아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 앞에서는 여자이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아들들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뭐라고 했나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한 무리”가 나오는데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였지요.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한 무리가 나와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에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이고 이들이 곧 하늘나라에서 살아갈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로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될 자들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들을 누가 모십니까?요한이 모시지요.

요한은 예수님 품에 안겨서 사랑을 입은 자에요.

 

그래서 요한을 말할 때 그냥 요한이라고 하지 않고 “주께 사랑을 입은 요한”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합니다.

이게 엄청 중요해요.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안겼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한 몸이란 말입니다.

이게 교회에요.

교회는 사도들이 터 위에 세워졌어요.

 

요한이 사도에요.

그것도 예수님 품에서 사랑을 입은 사도에요.

그래서 사도들이 터위에 세워지는 교회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라고도 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낳은 가족을 요한에게 부탁을 하지요.

이건 요한과 같이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교회가 예수님의 피로 난 자들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누가 모이는가 하면 주께 사랑을 입은 자들이 모여요.

 

이들이 어떻게 생겨났는가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생겨났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은 것입니다.

이들이 마리아에요.

 

예수님은 하늘에 마리아를 낳기 위하여 땅의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어요.

땅의 마리아는 하늘에 마리아의 모형이에요.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어머니에요.

 

마리아가 누구를 통해서 예수님을 낳습니까?

하나님을 통해서 낳지요.

하나님이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자기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려내고 있어요.

예수님이 마리아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미가 되어서 자기 몸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생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하늘의 마리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마리아를 보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고 하는 말은 당신이 하나님을 통해서 나를 낳아주었듯이 내가 이제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낳습니다! 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마리아가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마리아들을 누가 맡아서 기르느냐 하면 요한이 해요.

요한과 같이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교회들이 성도인 마리아들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이 어떠한 원리로 구원을 받는지를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흙(육)에 속한 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하늘(영)이 되는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의 관계가 마치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와 같아요.

땅에 속한 유대인이 하늘에 속한 예수님을 낳았어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역(逆)으로 땅에 속한 유대인들을 하늘에 속한 자로 낳고 있는 것입니다.

 

요 12:32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어떻게 낳나요.

자기 죽음으로 낳고 있어요.

모든 유대인들을 자기 몸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비로소 창세전 언약이 다 이루심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다 응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시고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다 이루심이란? 창세전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말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이 죽어야 이루어져요.

그래서 예수님은 죽으면서 아버지의 뜻이 다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다 이루심에 신앙을 고수하려면 어찌 하여야 할까요?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훼손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겠지요.

반대로 마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미흡하게 하는 것으로 미혹을 하겠지요.

마귀는 포도주에 물을 섞듯이 예수님의 피에다 인간의 행함을 섞는 일을 해요.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맛을 잃어버립니다.

이걸 타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들이 포도주에 물을 섞어 버렸어요.

복음을 훼손하는 혼합주의가 만연해요.

 

이걸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하는 말이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축복은 행함으로 받자고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해지라고 하잖아요.

들으면 그럴듯하지요.

그러나 이게 물이 섞인 포도주에요.

 

구원이나 거룩이나 축복은 모두가 하늘에 것들이에요.

이건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의 행위로 거룩해지지 않아요.

거룩은 거룩하신 예수 안에 거하면 거룩해져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거룩해지지 않아요.

거룩은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에요.

 

축복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반응하시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는 복 받을 짓이 없어요.

복 받을 짓을 해서 얻어 내는 복은 이미 복이 아니에요.

 

그건 댓가에요.

은혜가 아니고 삯이에요.

행위에 대한 보상이지 선물일수 없어요.

 

그럼에도 이러한 말을 교회 안에서 복음으로 둔갑되어서 외쳐지고 있어요.

어떤 목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면서 성령이 우리 맘을 터치하면 우리가 반응하지 않으면 성령도 어찌 하지 못한다고 해요.

 

내 쪽에서 영접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신인협동설(神人協同說)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반응함으로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인간이 자기 주체를 챙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이 아니고 종교에요.

세상 종교들이 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이러한 것을 사람들이 좋아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인간의 가치를 챙겨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적용해 보세요.

그럼 어찌 될까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성령이 터치하는 것을 받아 들였어요.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성령의 터치에 반응하지 않았어요.

 

그럼 성령의 반응에 터치한 사람이 터치 하니 못한 사람에게 뭐라고 할까요?

마음 문 열어서 성령을 받아들이세요! 라고 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구원이 우리의 반응 여부에 따라서 결정이 되겠지요.

 

아무리 하나님께서 구원을 해 주고 싶어도 우리가 반응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잖아요.

이게 구약 신앙이에요.

옛 언약적 신앙이에요.

 

옛 언약인 율법 신앙은 신인협동설로 이해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남편이 되어서 곁에서 도와 주셨으니 그렇게도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실패 했어요.

구약 이스라엘을 샘플로 보여주셨어요.

 

구약이 뭔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안 되더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환경을 주고 곁에서 도와주어도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 안에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죄인에겐 그 어떤 것을 주어도 결국엔 실패하더라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일을 하세요.

 

그게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달라요.

 

예레미야 31장과 에스겔 36장을 봅시다.

 

렘 31:31-3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보라! 날이 이른다고 하지요.

그 날이 무슨 날인가요?

새 언약을 맺는 날이에요.

 

하나님이 새 언약을 세우는데 이는 옛 언약과 다르다고 합니다.

옛 언약은 겉에서 도와주는 언약이에요.

그래서 애굽에서 나와서 남편이 되어서 곁에서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언약을 파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주 다른 언약을 세우겠다고 합니다.

어떤 언약인고 하니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신다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우리 마음에 새겨 주겠다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요.

 

이걸 에스겔에서는 새 영(靈)을 주신다고 했어요.

 

겔 36:24-28=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靈)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神)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새 영(靈)이란? 성령을 말해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율례와 규례를 행하고 지키게 하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고 지키게 하는 율례와 규례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곧 나를 위한 것임을 믿어지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행함이 들어갈 것이 없어요.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의 구원이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인협동설(神人協同說)을 주장하는 것은 비 성경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를 보고 축복을 해 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새 언약 하에서는 하나님은 예수님하고만 상대 하세요.

 

옛 언약에서는 인간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어요.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인간의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하세요.

인간의 가능성을 의지하는 것이 죄가 되어요.

새 언약에서는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새 언약은 예수님과 하나님 두 분이 맺었어요.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맺었어요.

그러니까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에 언약인 것입니다.

 

이 예수그리스도의 피에 언약이 바로 창세전 언약의 핵심이에요.

이 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천국에서 세세토록 어린 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이게 온 성경이 말하는 핵심 내용이에요.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완성이 됩니다.

성령은 이렇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완성된 것을 성도 안에서 적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우리 안에서 새 언약이 믿어지도록 일을 하세요.

 

그리고 그 새 언약이 주는 혜택을 입고 살도록 하십니다.

어떻게 혜택을 입고 살게 하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했습니다.

이는 내 행위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다 이루심 안에서 사는 것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새 언약이 믿어지는 성도는 더 이상 정죄 당하지 않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아요.

구원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아요.

 

구원에 대하여 두렵거나 불안해 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새 언약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이 안 믿어지면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하여 뭔가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인간이 취할 조치란 다름 아닌 믿음을 대체하는 수단이에요.

 

안 믿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 열심이에요.

열심히 뭔가를 하여서 불안감을 떨쳐보고자 합니다.

 

이는 모두가 그 안에 믿음은 없고 율법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율법이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닦달을 해요.

그럼 우리 안은 불안하고 두려워요.

지옥인 것입니다.

이 지옥을 떨쳐버리려고 행함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갈멜산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신이시여 내가 이렇게 정성을 쏟는 것을 보시지 아니하시니이까 라고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종용히 언약을 의지하고 기도합니다.

언약을 기억하사 이 백성을 치료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엘리야의 제사를 흠향하십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말씀은 그냥 관념이에요.

말은 알겠는데!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새 언약이 주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살아요.

우리는 믿음을 받았어요.

새 언약 안에서 난 자들입니다.

그 증거로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성령이 우리를 새 언약 안에 거하게 하시려고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새 언약의 법을 심어 주셨어요.

우린 성령이 새겨놓은 새 언약의 법으로 살면 되어요.

 

예수님이 그럽니다.

얘들아! 그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예수의 피를 내어 놓으라고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러십니다.

 

“내가 그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부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벗어주신 그 피 묻은 옷을 입고 사단의 참소를 이겨 내세요.

그리고 그 어떤 정죄함 속에서도 너끈하게 이기시고 평안하게 감사하면서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발가벗김 당하고 우리가 그 옷을 입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이 믿어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어떤 참소나 정죄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주어진 구원을 믿음으로 감사하면서 지켜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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