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숭배 문화에 젖어 있는 저주받을 교회(IV)
(김성수 목사)
(창 6:1‐8) “1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3 주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4 그 무렵에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와서 자식들을 낳으니,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다. 5 ○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7 주께서는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우리는 지난주에 성경이 상상할 수 없는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품고 계신 하나님께서 한탄을 하시고 근심을 하신다는 신인 동형 동성적 표현을 동원해야 할 만큼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가 바로 하나님 앞에 네피림으로, 용사로, 유명한 자로 서는 것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용사는 오직 여호와 한 분이시고 오직 여호와만 우리의 힘이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인간들은 자신이 용사가 되고 세상 것들을 힘으로 삼아 자신이 왕 노릇 하려하는 무서운 죄를 짓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밀착되어 있는 오늘날의 교회들은 소유욕과 신앙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현실도 함께 짚어 보았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이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 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 분을 섬기는 데 투자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므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은 우리의 소유를 위해 하나님의 힘을 동원하는 자가 아닌 오히려 우리의 소유를 털어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기여를 해야 하는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습관이나 물질, 명예 등의 세상의 힘을 자꾸 포기하고 이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오직 하나님으로만 힘과 행복의 근원으로 삼아 세상과 정 반대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내는 것을 신앙생활의 근간(根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해악을 끼치게 되는지 그 세상 힘의 대표라 해도 과언이 아닌 ‘돈’을 예로 들어 간단하게 설명을 해 드리고 다음 주에는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선지서, 시가서, 복음서, 요한계시록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어떻게 ‘하나님의 힘 빼기 작전’으로 명명될 수 있는 것인지에 관해 성경을 하나하나 찾아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요즘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이 무엇입니까? ‘재테크’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운용하는 기술, 재(財) technology'를 줄여서 부르는 신조어입니다. 재물을 어떻게 기술적으로 관리하여 더 많은 재물을 모으느냐가 요즘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아니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모두가 재테크라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재테크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재물에 대한 기술을 익히기 전에 먼저 재물에 대한 철학과 재물에 대한 신학,’재(財)Philosophy''재(財)theology'의 습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무엇이며, 그 재물은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며, 창조주 하나님은 그 세상의 힘인 재물을 어떻게 바라보라고 명하셨는지에 관한 충분한 공부 없이 재물을 다루는 기술만을 습득하게 되면 인간은 반드시 그 세상의 힘인 재물에 의해 망가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재물을 예로 들어 설명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비단 재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힘이라고 명명해 놓은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 시간에도 충분히 설명해 드렸다시피 돈은 그 자체에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외국에 갔다 왔을 때 주머니에 남아 있는 외국 동전은 그냥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돈 자체는 사회적 약속 아래에서 인간이 그 약속에 예속될 때에 비로소 힘이라는 것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회적 약속 아래에서 인간들이 그 화폐가 가진 힘에 예속을 하게 되면 그 돈이라는 것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곧바로 영적인 세력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좀처럼 사물을 신격화 하거나 인격화 하시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 돈을 인격적인 존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마 6:24)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여기보시면 주님께서 재물을 하나님과 반대편에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인간들을 다스리는 두 주인 중 한 주인으로 부르십니다. 거기서 주인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헬라어 ‘큐리오스’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재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 ‘맘모나스’는 신격화된 돈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주님은 돈을 하나님과 대조되는 하나님이 아닌 또 다른 신으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큐리오스’라는 단어가 원래 히브리어 ‘여호와’나 ‘아도니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거든요. 그러니까 주님은 ‘너희는 돈이라는 신과 하나님 둘 중의 한 주님만 섬기라’는 권고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돈이라는 것이, 세상의 힘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통치권을 행사하시듯이 어떤 사람들에게 주님으로, 영적인 세력으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여러분의 주님으로 모시고 계십니까? 아니면 돈, 세상의 힘을 여러분의 주님으로 여기고 계십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주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그 주님의 도움으로 예수님께서 또 다른 주님으로 명명하신 세상의 힘, 돈과 명예와 자기 자랑거리를 얻으려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진짜 주님은 누구입니까? 맘몬입니다.
이렇게 돈은, 인간들이 세상의 힘이라고 공인해 놓은 그러한 힘들은 그것을 소유한 이들에게 영적인 세력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그것들이 인간들에게 어떠한 해악과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인지에 관한 공부’를 거치지 않고 그 것들을 모으고 쌓는 기술만을 습득하여 많이 지니게 되면 그 영적 세력은 반드시 그것을 소유한 인간들을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힘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것처럼 하나님과 정반대편에 있는 또 다른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도는 재테크를 배우기 전에 재물에 대한 철학과 재물에 대한 신학,’재(財)Philosophy''재(財)theology'의 습득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저는 담뱃갑에 “지나친 흡연은 건강에 해롭습니다.”라는 경고 문구가 적혀 있듯이 돈에도 “돈을 운용할 힘이 없는 당신에게 지나치게 많은 돈은 당신의 삶에 해롭습니다.”라고 적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성경이 그와 똑같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겔 28:4‐5) “4 너는 지혜와 총명으로 재산을 모았으며, 네 모든 창고에 금과 은을 쌓아 놓았다. 5 너는, 무역을 해도 큰 지혜를 가지고 하였으므로, 네 재산을 늘렸다. 그래서 네 재산 때문에 네 마음이 교만해졌다.”
(눅 16:13) “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떠받들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첩경으로 재물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잠 23:4‐5) “4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을 끊어 버릴 슬기를 가져라. 5 한순간에 없어질 재물을 주목하지 말아라. 재물은 날개를 달고, 독수리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딤전 6:6‐10) “6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줍니다. 7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8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9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의 힘을 잘 운용할 수 있는 실력을 키우기 전에 어떤 이에게 주어지게 되는 힘은 그에게 커다란 해(害)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브로스 대 주교는 “부는 모든 악덕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부는 우리의 가장 악한 욕망까지도 실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돈은 인간이 하고 싶은 것을 이루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는 인간이 가진 욕망이라 봐야 전부 죄 뿐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힘이라는 것을 어떻게 올바로 써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타락한 죄인들에게 세상의 힘은 모든 악덕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사랑이라는 것은 밖으로 쏟아 부어질 때 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사랑은 그렇게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밖으로 쏟아 부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이제 자기를 왕으로 삼아 살기로 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안으로 쏟아 부어 자기만을 사랑합니다. 성도는 그러한 자기 사랑의 해악을 깨닫고 자기를 향하던 그 이기적인 사랑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쏟아 부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 참 사랑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부나 명예나 건강 등의 세상의 힘이 남을 섬기는 훌륭한 도구로 쓰여 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력자로 성숙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만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에게 주어진 세상의 힘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만 쓰여 지게 됩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세상의 힘은 자신을 이기적인 죄 속으로 몰아넣는 파멸의 도구로 쓰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성숙하지 못한 자들에게 세상의 힘이 주어지면 그 힘들이 자신의 탐욕을 이루는 도구로 쓰여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신앙생활 잘하던 사람이 사업이 잘 풀리고 돈이 좀 생기자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들이 몇 있습니다. 그 전에는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것 다 못하고 그나마 교회라도 나왔는데 이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인 돈이 생기니까 너무 재미있는 게 많아서 교회까지 나와 줄 시간을 못 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저주라는 것입니다. 돈이 그 사람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만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주 인색합니다. 절대 자기 것을 남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자기 것이 줄어들게 되면 자신의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자기를 보호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이 이 세상의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렇게 굶어죽는 이들이 많은 것입니다.
WFP 세계 식량기구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구 중에 매일 밤 굶주림에 지쳐 잠이 드는 사람이 15억 명이라고 합니다. 상상이 가세요? 그리고 다섯 살 이하 어린이 3억 명 정도가 못 먹어서 체중 미달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삼 만 명 이상이 굶어서 죽고 있습니다. 그리고 7초마다 한 명씩 어린이가 굶어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 아연하게 만드는 사실은 지금 세계에는 모든 인류가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남아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식량이 전부 부자 나라의 곳간에 쌓여 있든지, 곡가(穀價)를 유지하기 위해 태평양에 버려지든지, 지나치게 많이 가진 자들이 먹다 버린 쓰레기로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세상의 것들을 힘으로 여기는 자들에 의해 인간 세상에 부어진 저주스러운 모습들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성도들에게 자기가 가진 것으로 이웃들과 나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단순히 선행을 하라는 차원의 권고가 아닙니다. 그 권고 속에는 세상의 힘들이 너희의 힘이 아니라는 참 된 신앙고백을 나에게 보여 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들을 자신의 유일한 힘으로 삼고 사는 이들은 절대 자기의 것을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 15:11)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 지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너희가 힘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자꾸 벗어 버려라‘라고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실행하기 요원(遙遠)한 명령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양과 염소를 심판하시면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사랑과 구제와 섬김을 행하지 않은 자들은 나에게 하지 않은 것과 똑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지옥으로 보내셨던 것 기억나세요? 주님께서 마치 구원의 조건으로 행위를 강조하시는 것처럼 보이지요? 아닙니다. 그 말씀은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그런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 말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주님을 섬기겠습니다.”하고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은 당연히 그 섬김이 수평적으로 이웃들에게로 전해질 수밖에 없다는 수평적 사랑의 필연성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거듭나서 주님만을 자신의 힘으로 삼고 따르게 된 자들은 이제 자신을 위해 이웃을 늑탈하고 밟고 자신의 자랑을 위한 이웃과의 경쟁으로 세상의 힘을 쌓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신보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보며 상대적, 비교 우위적 쾌감을 느끼는 비열한 자리에서 벗어나서 이웃들을 섬기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낌없이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주고 섬겨 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다른 이들의 궁핍과 약함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은 부르고 있지만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 신인 맘몬을 섬기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염소들에게 지옥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힘을 어떻게 유용하게 써야 하는 지를 배우지 못하고 자기가 가진 세상의 힘으로 자기 배만 채우며 사는 자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쌓고 있는 그 힘으로 지옥으로 가는 티켓을 사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운용할 실력이 없음에도 세상의 힘을 소유한 자들은 악한 영적 세력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배를 신으로 삼아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세상에서 건져진 교회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옛 적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며 살게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게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게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율법 전체가 요약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초대 교회의 유무상통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행 2:44‐47)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45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가졌다. 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마다 빵을 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이 모습이 바로 이 땅에서 교회가 추구해야 할 삶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바로 그러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공산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아는 성도들은 자기의 것을 쌓아서 남들에게 자랑을 함으로 얻는 비열한 쾌락 같은 것에서는 좀 벗어나자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자기 것을 비워 다른 이를 부요하게 하는 십자가의 원리가 삶의 원리가 되는 천국의 모습을 그림자로 그려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바로 그 삶을 추구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보여주신 구속의 원리가 뭡니까? 부요하신 우리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가난한 자들이 부요하게 된 십자가의 원리(고후8:9) 아닙니까?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으로서만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삶이 천국의 삶이며 그 삶이 진정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주님을 통해 비우는 삶, 나눔의 삶, 이타적인 삶, 섬기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자꾸 비우고, 버리고, 옛 사람을 죽이는 모습으로 변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헌금이나 구제나 봉사 등을 맡기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돈이나 힘이 없으면 당신의 일을 못하시나요?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 성도가 가진 세상의 힘들을 당신께 내 놓으라고 성도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힘을 빼는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땅에서 너희가 힘으로 여기고 있던 것들을 나를 위해 비워낼 수 있느냐?”를 묻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게 성숙한 신앙의 척도이니까요. 이렇게 성도에게 맡겨진 헌금이나 구제나 봉사 등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을 가르치시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이 행하는 헌금이나 구제나 봉사 같은 것들은 단순히 자기 것을 나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힘을 포기하는 성도의 신앙고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부의 맛, 세상의 힘의 맛을 보게 되고 그 물질과 명예가 갖고 있는 힘을 맛보게 되면 거기에서 쉽게 빠져 나올 수 가 없습니다. 너무 좋으니까요. 너무 달콤하니까요. 그래서 재테크보다 먼저 재(財)theology, 재(財)philosophy의 습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세상의 힘이라는 것이 어떠한 해악을 줄 수 있는지 몇 가지 예를 들어드리고 마치지요.
일단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힘, 부와 명예 등에 관심을 쏟게 되면 그것들이 결국 영적인 생활의 목을 조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가게 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 땅에서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의 힘을 추구할 때 그 사람은 그의 마음을 온통 그 세상의 보물에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이고요.
여러분, 이 세상 것들 중에 여러분이 보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말씀을 하신 것은 단순히 자기가 가진 돈이나 명예, 힘으로 구제나 선교 같은 좋은 곳에 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만일 그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라면 좋은 곳에 쓸 돈조차 없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보물과 상관없이 살고 하늘나라에도 보물을 쌓지 못하게 되잖아요? 그리고 아울러 그렇게 되면 하늘에 보물을 쌓기 위해 이 땅의 힘을 소유해야 한다는 모순이 성립이 됩니다. 그렇게 하늘에 보물을 쌓기 위해 이 땅의 보물들을 많이 확보하라는 것이 주님의 권고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명령하신 것은 ‘쌓으라.’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에 초점이 있는 구절인 것입니다. 즉 이 땅에는 너희가 쌓을 보물이라는 것이 전혀 없으니 참 보물이 있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보물을 추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보물이 뭡니까? 성도에게 있어서 보물은 질그릇인 자신 안에 담겨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영생, 하나님 나라 뿐 인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보물이며 우리의 힘입니다.
그렇게 참된 보물인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보물로 여기는 자들은 그 곳에 마음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모양으로든 이 땅의 것을 보물 삼아 사는 자들은 절대 하나님 나라를 열망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보물로 여기고 있고 우리도 자칫 그것들을 보물로 오인할 수 있는 이 땅의 힘이라는 것에서 자꾸 관심을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꾸 힘을 빼는 연습을 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의 보물이 빠져야 하늘의 보물이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안에 그 두 주인을 함께 채울 수 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 사람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자기의 소유를 그것이 필요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소유를 비워 그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가난으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저는 지금 해방신학이나 민중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처럼 우리 성도들이 ‘그렇게 해야 이 땅이 살기 좋은 땅이 될 것이다‘에 강세(强勢)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힘을 빼고 하늘의 힘으로 우리를 채우는 것이 성도의 바른 삶이고 그 삶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니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자꾸 이 땅의 보물에서 관심을 돌려 하늘의 보물로 향하자는 것이지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잘 새겨서 우리의 마음을 하늘에 두자는 것입니다. 여전히 마음은 땅에 두고 몸만 천국에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두 번째로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것이 성숙하지 못한 성도에게 주는 해악은, 그 세상의 힘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가 채워지게 되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힘을 유지하고 늘리기 위해 불안감에 시달리고 염려와 근심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의 힘에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그 힘이 쌓이는 만큼 걱정과 근심이 늘어난다는 말입니다. 빠른 시간 안에 큰돈을 모으려는 조바심, 모은 돈을 가장 효율적으로 늘리려는 고민, 모은 돈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불안감, 그 돈으로 인해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을 침해받지 않으려는 욕구 등이 그 사람의 삶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그렇게 해서 정말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돈을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보관해 놓은 사람은 불안에서 빠져 나오게 되는 것인가? 아니요. 그때는 불안보다 더 무서운 불신앙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제 무서운 것이 없거든요. 그런데 왜 신을 찾습니까? 그게 인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혹은 성숙하지 못한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들이 힘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을 모으는 만큼 근심도 함께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세상의 힘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의 힘을 많이 소유하고 누리다 보면 그게 너무 좋아서 그것을 혼자 즐기는 일에 빠져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문제를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다루십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담고 있는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는 부자가 매일같이 잔치를 벌이면서 그의 문 앞에서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있는 거지를 여전히 거지로 놔두었다는 것에 대한 책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로 드신 부자와 나사로는 둘 다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갔고 한 사람은 천국으로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이 거기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신 것일까요? 단순히 부자는 지옥가고 거지는 천국 간다는 메시지는 아닐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부자가 지옥에 가 있지요?
부자가 유대인으로서 정말 하나님을 마음으로 신실하게 섬긴 자였다면 다른 말로 부자가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이었다면 그는 그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어떠한 관심을 갖고 계신지를 알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찾아 읽었던 신명기의 말씀을 비롯하여 구약 성경 여러 곳에는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향한 아버지의 긍휼한 마음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매일같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즐기고 누리느라 하나님의 관심을 살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건 올바른 신앙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세상의 힘을 지나치게 소유한 사람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들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존 허기(John C Haughey)는 맘몬 병(mammon illness)의 대표적인 증상이 바로 무감각증 (numbness)라고 한 것입니다. 마리 앙뜨와네뜨처럼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왜 저렇게 난리들이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무감각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세상의 힘은 그 힘으로 스스로의 삶을 보장하고 책임질 수 있겠다는 불신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돈과 명예를 많이 지녀 보았더니 하나님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자기가 가진 것으로 문제들이 해결되고 쾌락이 주어집니다. 그럴 때 성숙하지 못한 인간들은 반드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힘은 자칫 자신을 자기 삶의 지배자로 만들어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아담의 자리로 다시 우리를 내 몰수 있습니다.
화폐 중심의 시장 경제가 지배하고 있는 현대에는 돈이면 해결 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물건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도 살 수 있습니다. 여자 연예인들이 재벌가로 시집가고 싶어 안달을 부리는 이유가 뭡니까? 돈이 그들의 마음을 산 것입니다. 그렇게 돈으로, 세상의 명예로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께 별로 기대할 것이 없게 됩니다. 돈의 힘으로, 명예의 힘으로 거의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기대할 것은 겨우 죽은 후의 문제 정도일 뿐입니다.
이렇게 부자가 된다는 것, 세상의 힘을 소유한다는 것은 거부하기 힘든 강한 ‘매력(魅力)’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마력(魔力)’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의 힘은 분명 우리에게 매력적인 여러 가지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달콤한 매력이 주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즐거움에 빠져 영성이 고갈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액튼(John Acton)은 “세상의 힘이라는 것은 인간을 타락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이 소유하는 그 힘이 클수록 그 경향도 강해진다.”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세상의 힘을 많이 가지면 많이 가질수록 타락을 향한 그의 경향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계십니까? 아니면 세상의 힘을 주님으로 여기고 살고 계십니까? 다른 것은 다 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답만은 여러분의 심중에서 꼭 확인하고 가셔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에게 대답을 해 보세요. 그리고 이 구절을 한번 보세요.
(빌 3:19) “9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들의 배를 신으로 삼는 자들은 그들의 마침을 멸망으로 끝내시리라고 공언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자기 배를 신으로 삼아 살게 되면 여러분의 마침은 멸망으로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우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상의 힘을 여러분의 목적으로 삼고 사시겠습니까? 여러분을 자랑하기 위해 서슴없이 다른 교우들을 미워하고 헐뜯고 시기하고 질투하시겠습니까? 그게 노아의 홍수 심판으로 몰살당한 죄인들의 모습인데도 여전히 그렇게 사시겠어요? 우리는 세상의 힘으로 강해지는 자들이 아니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라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좇는 것으로 강함을 입증하는 성도들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강함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힘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하늘나라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계 5:12‐13) “12 그들은 큰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마땅히 받으실 만합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13 나는 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또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
똑똑히 보십시오.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에게 있습니다. 이게 바로 비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처럼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셔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의 원리에 따라 당해주고 손해보고 그럼에도 섬겨주고 사랑해 주는 ‘죽임’을 당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세상의 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진짜 힘이고 능력이며 존귀와 영광과 찬송에 합당한 삶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강함으로 세상에 자신을 증명하고 자랑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져 주고 용서해 주고 섬겨 주는 삶을 삶으로 그들에게 약하게 보임으로 우리의 강함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강함입니다.
(고후 12:9~10) “9 그러나 주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려고,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병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란을 겪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힘을 빌려 강해지려 하지 마세요. 약한 것이 강함이라는 이 역설이 여러분에게 반드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주님이 원수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셨듯이 그렇게 주님처럼 이 땅에서 큰 환난인 십자가의 죽음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 11:7-10)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개역한글]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이미 공부했으니까 잘 아시지요? 두 촛대, 두 감람나무, 두 증인이 누구입니까? 교회입니다. 그 교회들은 이 땅 바벨론에서 죽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계 7:13~17) “13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14 나는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15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16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태양이나 그 밖의 어떤 열도 그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 17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성도가 어디서 나오는 사람들이라 합니까?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이라 합니다. 우리는 천국에 입성하게 될 때 비로소 환난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성도에게는 이 땅의 삶이 모두 환난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을 밟아 자신의 쾌락을 챙기는 세상에서 자꾸 비워주고 밟혀 주어야 하니 그것보다 더 큰 환난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는 분투에서 나오는 눈물을 반드시 흘려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눈물이 있는 자들만 골라서 그들의 눈물을 씻어주시고 그들을 당신의 나라로 입성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당해 주세요. 많이 섬겨 주십시오. 성도의 힘은 칼을 들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끝까지 성도의 본분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며 복음을 증언하는 순교의 힘인 것입니다. 무력(武力)을 가지고 달려드는 자들에게 똑같이 무력(武力)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無力)하게 당해 주는 것이 성도의 힘인 것입니다.
패권주의 기독교가 남긴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군 전쟁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소모전뿐이었습니다. 그 십자군 전쟁 정신이 만들어 낸 것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아닙니까? 911, 아프간 인질 사태, 지긋지긋한 중동 전쟁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입니까? 패권주의 기독교가 만들어 낸 배설물들인 것입니다.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어린 아이와 여자 노인들을 포함한 이슬람교도 수백 만 명을 학살한 것이 기독교인 들입니다. 그 이후 기독교는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도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십자군 정신으로 다른 이들을 무참히 밟는 그런 무식한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가 전파되었습니까? 왜 단군 상의 목을 자르고 다닙니까? 왜 불상을 부수고 다니지요? 왜 절에 불을 지르고 다닙니까? 하나님이 언제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교회의 강함을 증명하라 하셨습니까? 고작 신화에 나오는 단군과 싸우라고 우리를 구원하셨겠습니까? 미션이라는 영화에 보면 원주민들과 함께 죽는 수사들과 그들을 몰살시키는 힘의 상징 종교 제도권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나옵니다.
세상 적으로 보기에는 무력으로 원주민들과 수사들을 쓸어버린 종교 제도권이 힘을 가진 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신앙의 관점에서는 십자가를 들고 그들의 총 칼에 맞아 죽은 로버트 드니로와 수사들과 원주민들이 진짜 힘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자들이 아니라 무력하게 죽어주는 십자가로 세상을 정복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힘을 빼세요. 많이 나누십시오.
신앙생활은 나의 욕심을 채우고 나의 소원을 이루는 것과는 정 반대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 주기도문 보다 야베스의 기도가 더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가히 기독교의 위기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주기도문)는 ‘나’가 아니라 ‘하나님’,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소유’가 아니라 ‘존재’,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믿고 사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러한 삶을 살라고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그러한 주님의 기도는 전혀 매력 없는 기도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저 ‘내게 복에 복을 더하시고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는 야베스의 기도만이 교회의 관심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의 생존 경쟁에서 당신의 백성들의 편을 들어 그 싸움에서 이기시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생존 경쟁의 싸움에서 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아니 좀 더 현실감 있게 표현을 하자면 거기서 져 주라고 응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싸워서 이기기 위해 살던 자들을 그 싸움에서 나와 섬기는 자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전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책을 읽으면서 그의 설교 속에서 이러한 명언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부유해질수록 우리는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빈곤해진다. 우리는 새처럼 공중을 날고 물고기처럼 바다를 잠수하여 헤엄 칠 수 있는 복잡한 기술을 터득했지만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며 모두가 형제처럼 살아가는 간단한 기술은 터득하지 못했다.” 성도는 그 기술을 터득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재테크에는 어두워도 ‘나눔 테크(tech)’에는 능한 것이 우리 성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소비가 아닌 절제에서, 축재(蓄財)가 아닌 나눔에서, 풍요가 아니라 청빈(淸貧)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돈쓰는 재미요? 좋지요. 그러나 나누는 재미에 한 번 빠져 보세요. 돈 쓰는 재미는 명함도 못 내밀어요. 노블리스 오블리제, 가진 자들의 책임, 높은 신분에 따르는 의무가 우리에게 반드시 요구된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돈, 명예, 건강, 뛰어난 외모 그런 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잘 누리세요. 그러나 그 전에 먼저 그러한 것을 잘 운용할 수 있는 신앙의 실력을 키우세요. 그러면 그러한 것들이 주어져도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악한 도구로 쓰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이 나쁘지 않지만 거기에 탐욕이 들어가면 식탐이 되고, 시각에 의한 미적 감각이 문화를 발전시키는 좋은 도구가 되지만 시각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이 지나치면 필경 사치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돈은 우리가 이웃을 섬기고 나누는 데에 유용하게 잘 쓰면 아주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돈을 버신다면 여러분은 반드시 그 돈 때문에 멸망의 길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토마스 홉스가 그의 책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인간의 권력 지향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힘에 대한 항구적이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는 모든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본성인데, 그것은 죽을 때에나 끝이 난다” 맞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렇게 살다가 결국 멸망의 길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이제 어디를 목표로 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알기에 이 세상에서도 세상의 힘을 목적삼아 살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을 빼는 삶,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입니다. 힘 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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