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본질(I)
(김성수 목사)
(엡 2:8-10)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지난주에 우리는 2장 7절까지를 공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일 차적인 이유가 사랑과 긍휼을 앞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을 확인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고 그 분에 대해 점점 깊이 알게 되면서 그 분의 거룩하심과 선하심과 광대하심을 알게 되고 그 분이 나의 아버지시라는 것을 즐기게 되고 우리가 그 분을 알아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고 그러한 삶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아가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황금 같은 구절입니다. 아마 암송하고 계신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혹 이 자리에 전도폭발 훈련을 받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그 분들은 이 구절들을 필 수 적으로 암기 하셨을 것이고요. 10절에 보면 지난주와 일맥상통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목적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8절과 9절에는 복음을 설명하는 주옥같은 단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은혜, 믿음, 구원, 선물, 행위, 자랑’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복음의 핵심을 설명하는 단어들입니다. 오늘과 다음 주, 그리고 그 다음 주까지 저는 여러분과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성경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감히 이 본문에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이 구절들은 기독교의 핵심 본질을 담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여러분 혹시 레마겐의 철교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레마겐의 철교라는 영화를 보면 연합군이 독일군들의 철교를 무력하게 만들기 위해 그 철교의 윗 쪽에 있는 댐을 폭파하러 갑니다. 그런데 다이너마이트를 한 뭉치 다 터뜨렸는데도 그 댐은 꼼짝도 안 합니다. 다들 낙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폭발로 댐에 작은 금이 갔습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던 그 금이 점점 벌어지더니 급기야 댐이 무너지고 레마겐의 철교는 붕괴가 되지요. 제가 왜 이런 영화 이야기를 하냐면 우리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교리들이나 이단 사설들을 우리가 조금씩이라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기독교 신앙 전체가 무너지는 무서운 일이 우리에게 닥칠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삼 주간에 걸쳐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가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될 기독교의 본질과 핵심에 관해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구원의 서정, 논리적 순서를 다시 한 번 짚어 보는 것으로 시작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이 구원의 서정을 짚는 것으로 저는 오늘 본문의 ‘은혜’를 먼저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로마서로 가서 그 구원의 서정(敍情)을 시작해 보지요.
(롬 8:29-30)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구원의 논리적인 순서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미리 아신 자들’이라는 구절을 보겠습니다. 알매니안 주의자들은 이 말을 근거로 예지 예정설을 주장한다고 했지요? 기억이 가물가물 하세요?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역사 속에서 누가 믿을지 안 믿을지를 미리 보시고 그렇게 자기의 의지로 예수를 믿을 자들을 택하시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고 했지요? 지금도 그들은 그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단어 ‘알다’‘기노스코’는 여러분에게 여러 차례 설명 드렸다시피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기노스코’는 부부 관계처럼 상대방에 대해 깊은 이해와 사랑을 근거로 한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구약에서 그 비슷한 단어를 찾아볼까요?
(호 13:4-5) “4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5 내가 광야 마른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알았거늘)”
여기서 ‘권고 하였거늘’은 히브리어 ‘야다’‘안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도 안다는 말이 ‘사랑해서 돌보아 주다’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아모스서로 가보세요.
(암 3:2) “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하셨나니”
하나님께서 정말 이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이스라엘만 아셨나요? 아니지요? 그러면 그 분은 하나님이 아니지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족속 중에서 이스라엘만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히브리 사람들의 ‘안다’라는 단어의 개념은 ‘사랑하여 돌보아 주는 것’에 초점이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존 머레이는 “히브리 사람들의 ’안다’라는 단어는 사랑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라고 까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 그러면 그 히브리 사람들의 ‘안다’라는 단어의 개념을 가지고 복음으로 들어가 보지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우리를 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셨다는 것은 우리를 그 분의 마음속에 품고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예수 믿을 것을 아셨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품에 안고 사랑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예수님까지도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이고 그 독생자의 가슴에 칼을 꽂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창세전부터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미리 사랑하신 자들을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예정하셨다고 합니다.
(롬 8:29)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인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예정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미리 사랑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에베소서 1장에 아주 잘 설명이 되어 있지요?
(엡 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예정론과 숙명론을 혼돈하시면 안 된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예정을 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서 구원의 조건이나 근거를 일체 요구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 자들에 관한 계획을 세우시고 그들을 택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지시켜줍니다. 알매니안 주의자들은 그것부터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에게 스스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정도의 자유의지, 선행적 은총을 주셔서 인간들이 자기 의지를 발동해서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를 자발적으로 믿은 자는 구원을 얻는 것이고 믿지 않은 자들은 유기되는 것이라는 주장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계획은 수시로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자신의 의지대로 경륜해 가실 수 없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런 분을 믿고 따르실 수 있으세요? 하나님은 자기가 구원할 백성들을 미리 사랑하시고 미리 정하셔서 계획을 세우시고 건져 내시는 것입니다. 아더 핑크 목사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것을 계획하시고 그 것을 완성해 내시는 데 절대 실패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정되었다는 것은 우리 예정된 자 중에 이 인생동안에 아무리 악하고 더러운 것에 빠지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패서라도 완성시켜서 천국에 집어넣으실 거라는 말입니다. 이 예정을 성경 그대로 믿느냐, 자기의 사견을 보탰느냐에 따라 성화 론이 갈리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만 우리가 거룩에 이르는 성화에 실패하면 구원도 중도에 탈락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구원받은 자는 이제 완전한 의인이 되었기에 절대 죄를 짓지 않는다고도 가르칩니다. 그래서 애인 사이라 할지라도 결혼 전에는 손도 못 잡게 하고, 비디오, 영화, TV같은 것도 금합니다. 죄에 대한 욕구를 원천 봉쇄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도 유익은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고 우리 마음 에 죄에 대한 욕구가 없어집니까? 그렇게 될 줄 알고 수도원으로 올라갔던 수많은 수도사와 수녀들이 그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도원 마룻바닥 아래의 수많은 영아의 유골들로 증명해 내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교회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숨어서 TV를 보고, 숨어서 영화를 보고, 숨어서 키스를 하는 진풍경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겉만 깨끗하게 씻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그 검은 속까지도 하얗다고 인정해 주실까요?
그것은 자유를 선포하는 기독교와는 아주 거리가 먼 또 다른 율법주의를 양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또 완전성화가 가능하다고도 합니다. 그 말을 가장 처음 썼던 요한 웨슬레도 나중에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완전성화는 거룩을 향한 노력을 말하는 것이라고 정정을 했는데 그 사람들은 이 땅에서 인간의 완전성화가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땅에서 완전성화가 가능하다면 우리가 왜 죽습니까? 우리 몸이 죽는 것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새 몸을 주시려고 우리의 옛 몸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완전 성화가 된다면 왜 우리 몸이 죽어야 합니까? 그 몸 그대로 가지고 하늘나라 가도 되잖아요?
기독교인의 완전 성화가 가능하다면 솔로몬은 천국에 갔을까요, 지옥에 갔을까요? 솔로몬은 오히려 말년에 우상을 섬기고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지 않았습니까? 그리고는 헛되고 헛되다고 넋두리를 했던 사람 아닙니까? 다윗은 왜 그렇게 말년이 힘들었습니까? 아브라함은요? 왜 바울은 자기 사역 말미에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 불렀을까요? 그들이 자주 인용하는 요한일서를 찾아보겠습니다.
(요일 3:4-6)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 하였느니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은 범죄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절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주장하는 그들 자신은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릴까요? 참 불쌍합니다. 이 요한 일서의 내용은 예수를 믿는 자들은 아무런 죄도 안 지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6절에 쓰인 ‘범죄 하다’가 현재형이므로 습관적인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제 죄가 무엇이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어떠한 것이며, 그 형벌을 누가 대신 받았는지를 이제 알기게 아무런 죄책감 없이 습관적으로 범죄행위를 반복할 수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죄의 영역, 죄의 통치에서 벗어났다는 말이지요. 이제 그들은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 것은 죽을 몸, 육신(하나님 없이 살도록 길들여지고 훈련되어진 옛 성품)이 하는 것이므로 이제 그 죄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죄의 나라에서 벗어났기에 그들은 이제 죄와는 아무상관 없고 더 이상 그 죄가 그들을 정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똑같은 요한일서 1장에 어떻게 나와 있는가 보세요.
(요일 1:8)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이거 보세요. 요한일서 3장을 그들의 주장대로 해석을 한다면 성경 자체가 모순처럼 보이지 않아요? 우리가 어떻게 죄를 안 짓습니까? 저도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할복을 하는 제 모습을 그려봅니다. 어떨 때는 정말 배를 가르고 그 더러운 것들을 뿜어내는 무언가를 찾아 불태워 버리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토록 우리는 죽는 날까지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자주 실패하고 실수 하면서요.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의 그러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짓는 죄가 우리의 구원을 막을 수 있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죄까지만 유효한 것입니까? 살인, 간음 같은 것 까지만 유효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렇게 불완전한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신 것입니다. 우리 죄의 일부만 지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요한일서 2장의 내용을 들어서 우기기도 합니다.
(요일 2:3-6)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 할지니라"
이 구절을 들어서‘봐라 예수 믿는 자들은 계명을 다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계명을 다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그 신분에 맞게 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계명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우리는 피 흘리기 까지 우리의 옛 본성과 경향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얻어진 ‘자유’속에서의 싸움입니다. 그것을 못 지키면 구원에서 제외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구속의 자유 속에서 기쁘고 자발적인 노력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당시 활동하던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는 경고의 서신입니다. 당시에 거짓 선지자들이 무 율법주의를 가르쳤었거든요. ‘이제 구원받았으니 우리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식의 가르침이 거짓 교사들로부터 마구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그 거짓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삶은 엉망이면서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여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가 그랬지요? 성도라는 사람들이 근친상간도 하고 온갖 지저분한 죄를 마음 놓고 짓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대갈일성을 합니다. 사도 요한도 그 거짓 선지자들, 무 율법주의를 가르치는 자들에 대해 진짜들은 그렇게 계명과 아무 상관없이 살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느라 그런 언어들을 구사한 것이지 성도는 절대 죄를 지을 수 없으며 죄를 짓는 자들은 다 가짜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닙니다.
이단들은 그렇게 자기들의 의를 쌓아서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그것이 죄인지요. 먼저 유진 피터슨이 설명해 놓은 ‘복’의 개념을 여러분께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인생에 덤으로 얹어주시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다. 복이란 영혼의 내적인 힘이다. 우리 내면에는 영혼의 집이 있는데, 그 곳에 하나님은 복이라는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부으신다. 행복도 거기서 창출되고 생명력도 거기서 창출된다. 행복이란 것은 인간 바깥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영혼의 외부가 아닌 영혼의 중심부를 겨냥한다. 그런 만큼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은 외면적인 것이 아니요, 내적인 에너지요, 또 행복을 창출하는 능력이다. 복은 어떠한 생명체도 그 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삶의 활력이다. 그러나 죄 때문에 인간은 그 복의 근원과 단절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잘 보세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인간이 최선의 행복을 누리는데 꼭 필요한 하나님의 생명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은 하나님과 인간이 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만 유효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관계를 저버리고 타락을 해 버렸습니다. 인간은 그 복을 잃었고 스스로 자신들의 행복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말로하면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택한 두 가지 체계가 있는데 첫 번째가 지식체계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머리를 이용해서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성을 쌓았습니다. 제도를 만듭니다. 인간 안에는 아직 구조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들을 위해 원래 하나님의 복으로만 우리에게 가능한 ‘행복’이라는 것을 비슷하게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물질문명을 발달시킵니다. 과학을 발달시켰습니다. 삶이 편리해 졌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행복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간의 행복을 위해 발달시킨 인간의 기술과 지식이 서로를 죽이는 전쟁에 제일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인간들은 아차 싶었습니다.
‘과학과 기술만을 추구하다보니 이런 결과가 있구나, 인간 자체를 교육하고 계몽하자, 그러면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인간들은 확신했습니다. 교육과 계몽이 살기 좋은 세상을 분명히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육이 발달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더욱 더 악해져만 갑니다. 양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간들은 교육과 계몽이 절대 인간을 선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천륜마저 무너집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청부 살해하고, 아버지가 아내와 딸을 난자해서 죽이고, 아들이 어머니가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고 망치로 때려죽이는 사건들이 왕왕 일어납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발전시켜 온 물질문명은 인간의 가치관을 아예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최고입니다. 과거에는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던 백정 노릇을 하든, 쓰레기를 치우든 무조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존경을 받고 성공을 한 사람이 대접을 받습니다. 이제는 물질이 인간을 추월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돈 몇 만원에 사람을 죽입니다. 죄인들은 그러한 불합리를 어떻게 바로 잡아보려고 공산주의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함께 공평하게 나누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이데올로기도 수많은 사람의 목숨만 앗아갔지 아무런 소득 없이 80년 만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인간들의 모든 지식체계들은 이렇게 자중지란에 빠져 버렸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지식체계들은 신을 도외시 한 것이었습니다. 신의 도움은 필요 없고 자기들끼리 한 번 해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실패로 끝나 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나쁜 시도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행체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나마 신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신인지는 모르지만 그 신이 존재하며 그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 신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다리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신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알라‘라고도 불리고, ’비쉬뉴’라고도 불리고 ’하나님’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들은 그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자식도 제단에서 태웁니다. 유대교인들처럼 자기들이 부르는 신이 시킨 것을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노력도 해 봅니다. 이슬람교처럼 그들의 어깨에 두 천사가 있어서 하나는 악을 계수하고 하나님 선을 계수해서 나중에 합산해서 선이 더 많으면 천국을 가고 악이 더 많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여 이를 악물고 선을 행하기도 합니다. 불교처럼 자기가 저지른 죄를 덕을 쌓아 상쇄시키겠다고 노력도 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윤회에서 탈출을 하겠다고 고행과 수도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종교라는 이름으로 노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악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을 얻어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회복시켜 주어 하나님의 백성들로 만드시는 것이지 우리의 열심을 바탕으로 사다리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인간의 시도, 선행체계, 지식체계를 성경은 모두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어떤 것을 보태려고 하는 그 모든 시도는 악마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고도 그런 선행체계인 율법주의 속으로 또 빠져든다면 그런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하나님께서 마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인간은 자신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사랑하시고, 미리 예정하시고, 영화롭게 만드시기까지 전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은 자들은 아주 자연스럽고 기쁘게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변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억지가 아닌 자발적인 노력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이미 완성된 구원을 선물 받은 자의 예정된 자로서의 자유 속에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 예정에 관해 잘 요약해 놓은 곳이 로마서9장입니다.
(롬 9:6-16) "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더 이상 부연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명쾌한 설명이지만 그래도 조금 부연을 하자면 당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나면 무조건 구원을 얻는 것으로 착각을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나 다 들어 올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라 어떤 한정된 테두리가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의해 선택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선택이었던 것이지 이스라엘은 무언가 잘나서 그들만을 무조건 구원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처음부터 가인은 버리고 아벨은 태한 것이며 셋의 후손 중에서도 노아만 택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서도 이삭만 택하신 것입니다. 이삭의 후손은 어떤가요? 사기꾼 야곱이 택해졌지요? 하나님은 아울러 이방 민족 중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해 가십니다. 모압 여자 룻이 그러하고, 여리고의 라합이 구원을 받습니다. 아람의 나아만 장군도 구원을 받지요? 이렇게 구원은 우리 쪽의 혈통, 노력, 사람됨, 이런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한 사람만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아주 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2장으로 가보지요.
(롬 2:28-29) "28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29 오히려 속이 유대 사람인 사람이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롬 4:16) "16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9:7) "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창 21:12) "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아브라함이 75세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상속할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에게 아들이 태어난 것은 그로부터 25년 후인 100살 때였습니다. 그 14년 전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들의 욕심과 방법대로 사라의 하녀인 애굽 여자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 장자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라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 7절에서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무조건 선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스말엘을 봐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되지 않았니?’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유대인들이 이렇게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지만 이스마엘은 서자라서 그런 것 아닌가?’ 그 때 바울이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로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의 예를 듭니다.
(롬 9:11-13)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13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곳 13절은 창세기 25장 23절과 말라기 1장 2절과 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창 25:23)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말 1:2-3)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그들이 아직 나지도 않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았을 때 이미 구원은 결정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엄마 뱃속에 들어서기도 전에,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 선택과 유기가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택은 모든 피조물이 창조도 되기 전인 창세전에 이미 있었던 것입니다.
(살전 1:4)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살후 2:13) "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행 13:48) "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8:10)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벧전 1:2)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이렇게 우리 구원은 창세전에 이미 예정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버리시기로 하신 사람들도 있다는 말인가요? 아예 버려지기 위해 탄생한 사람도 있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이중예정’이라 부릅니다. 이런 용어는 잘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당장 이런 질문이 드시지요? ‘말도 안 돼, 아무 근거도 없이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버리는 그런 불공평한 하나님이 어디 있어? 태어나서 살아보고 선악 간에 행할 기회라도 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잖아요? 그래서 이 예정론을 향한 엄청난 공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칼빈은 그들에 대해 ‘악독한 개들이 하나님을 향해 뿜어내는 독’ ‘추악한 모독적 언사로 예정론을 더럽히는 돼지들의 꿀꿀대는 것’이라 했습니다.
스튜어트 엘리트는 예정론을 이렇게 옹호했습니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이 진리를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들으면 그들의 마음속에는 온갖 반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교리는 거듭난 사람에게만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그 분이 부어주시는 지혜와 총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가지고 거듭난 사람과 아닌 사람을 가리는 시금석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구원받은 자들만 이 예정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자고요. 선택의 교리, 예정의 교리를 이해할 수 있는 대 전제는 ‘인간의 타락’입니다. 선택과 예정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전제로 하여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3장까지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타락의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자들 중 어떤 무리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셋, 요셉 모두 다 죽어야 할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은 멸망 속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들에게 손을 벌리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니면 그 귀가 막혀서 절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중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얼마의 무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귀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들만이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정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사 65:1-6) "1 "나는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2 제멋대로 가며, 악한 길로 가는 반역하는 저 백성을 맞이하려고 내가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3 이 백성은 동산에서 우상에게 제사하며, 벽돌 제단 위에 분향하여, 내 앞에서 늘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백성이다. 4 그들은 밤마다 무덤 사이로 다니면서, 죽은 자의 영들에게 물어 본다. 돼지고기를 먹으며, 이방 제삿 상에 올랐던 고기 국물을 마신다. 5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멀찍이 서 있어라, 우리는 거룩하니, 너희가 우리에게 닿아서는 안 된다. 가까이 오지 말아라' 하고 말하는 백성이다. 이런 자들을 내가 참지 못한다. 그들을 향한 나의 분노는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오른다. 6 보아라, 이 모든 것이 내 앞에 기록되어 있으니, 내가 갚고야 말겠다. 그들의 품에 갚을 때까지는, 내가 절대로 잠잠하지 않겠다." [표준 새 번역]
(롬 10:20-21) "20 또한, 이사야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를 찾지 않던 사람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나를 구하지 않던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21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 하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손을 벌리시고 죄인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다 버려도 됩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중의 몇 명을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하심으로 불러 내셨습니다. 그게 불의 한 일입니까? 그게 불공평한 일인가요? 태어나서 살아보고 말 것도 없이 인간은 모두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는 삶을 즐기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죄의 무서움을 안다면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구원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유기 시키셨을까’ 에 대한 질문 자체를 할 수가 없습니다.
(벧후 3:20)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아무도 하나님의 선택을 소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은 없다고 손사래를 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그렇게 내 버려두신 것입니다.
(롬 1:28)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보세요. 그냥 내 버려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들은 구원하시기로 하십니까? 로마서 9장으로 가보세요.
(롬 9:15-16)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 말씀은 출애굽기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출 33:18-19) "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긍휼’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할 형벌을 하나님께서 면제 해 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하나님은 다 죽여 버려도 무방한 죄인들 중 어떤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꾸리에 엘레이송’ 그래서 예전에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꾸리에 엘레이송’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긍휼을 베풀지 않으셔도 하나님의 공의에 손상이 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타락했고 모두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가만 놔두어도 하나님의 공의에는 손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 얼마를 건져주신 것을 우리가 불의하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 것을 은혜의 차원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어린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르지 않았다면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라는 어떤 방법을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시고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왜 꼭 우리 성도들만 구원하셔야 했는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두 죽어야 할 자들 중에 얼마만을 사랑하시고, 예정하시고,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 다음 살펴 볼 것이 부르심입니다. 소명.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미리 사랑하시고 미리 예정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건져내시는 것을 부르심이라 합니다. 로마서 8장 30절을 다시 읽어 볼까요?
(롬 8:30)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백성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보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통해서 구원을 하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전혀 모르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부르심은 반드시 말씀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과거에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가 신문에 실렸었는데 그 설교가 실린 신문으로 싼 소포를 배달하던 어떤 우편배달부가 그 소포 겉에 실린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를 읽다가 회심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게 소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많이 던져 지지만 그것에 반응하는 자들은 창세전에 미리 예정된 사람만 방응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학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성령께서 눈을 뜨게 해 주지 않으시면 그 부르심에 반응 할 수 없습니다. 이단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보면 정말 똑똑한 사람들은 다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고전 1:18-21)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학식과 사람됨과 외모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불러내신 사람들만 복음을 알아듣습니다. 그들만 그 부르심에 반응합니다.
(딤후 1:9)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리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러분은 성경에 나오는 ‘의롭다’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시고 계셔야 합니다. 우리가 ‘칭의, 칭의’하면서 정작 ‘의’가 뭔지를 잘 모르고 계신 것 같아요 여러분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쉰들러는 군수 물품을 만드는 공장을 하면서 자기의 돈을 들여 많은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호색한이었고, 술주정뱅이에, 욕심쟁이였다고 합니다. 영화에 보면 마지막에 쉰들러에 의해 구원을 받은 유대인들이 금 이를 빼서 감사의 반지를 만들어 주지요? 실화입니다. 그 반지에는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한 것은 온 세상을 구한 것이다’라는 탈무드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다시 만들어지고 유대인들이 쉰들러를 추억하면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칭호를 쉰들러에게 부여했습니다. 쉰들러는 나중에 여러 번 사업에 실패를 하고 술에 찌들어서 급기야 유대인들이 만들어 준 반지까지 팔아서 술을 먹은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쉰들러의 그런 사생활을 이미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쉰들러에게 ‘의롭다’는 칭호를 붙입니다.
이렇듯 유대인들, 히브리인들의 사상 속에서 의롭다는 말은 단순히 객관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표준에 비추어서 올바른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의롭다’는 개념은 어떤 두 대상이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의’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쉰들러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본받을 만한 사람이 아닐지라도 자기들 유대인들에게 할 바는 충실하게 해 주었기에 쉰들러를 ‘의롭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의‘도 바로 그런 뜻입니다. 성경에서 ’의롭다‘라고 하는 것은 죄를 짓지 않는 올바른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의롭다‘라고 하는 것은 항상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의 개념으로는 성경의 ’의‘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개념으로는 하나님께서 벌을 받아야 하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이 의로운 것입니다.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 벌을 받지 않고 대신 예수님께 벌을 내리시는 것을 우리가 가진 의의 개념에 비추어 볼 때 정말 의롭다 말할 수 있나요? 아니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의’라는 개념을 잘 정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셈 족의 언어 연구라는 책을 보면 그 샘 족의 언어에서 ‘의’라는 단어는 ‘도덕적 오류가 없는 올바른 언행’이라는 뜻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 ‘의’가 우리에게 그렇게 이해되고 있을까요? 성경이 서구 문명과 사고를 통해 우리에게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약의 ‘의’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쯔다카’라는 말을 그의 저서에서 ‘virtue'의 뜻인 ’디카이오수네‘라고 썼습니다. 그러한 서구 문명과 사상 안에서 단어들이 이해되어졌고 더구나 우리의 오랜 유교적 사고 때문에 성경의 그런 개념들이 오해되어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 속에서 ’의‘의 개념이 어떠한 것인지를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삿 4:21) "21 그가 곤비하여 깊이 잠든지라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하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삿 5:11) "11 활 쏘는 자의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를 몰살시키시고 군대장관 시스라의 머리에 말뚝을 박아서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드보라는 그 행위를 ‘의롭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뭐가 의롭습니까? 이렇게 성경의 ‘의’는 선악의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 편을 드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행하실 일을 충실하게 하셨다는 의미에서 드보라는 그 일을 ‘의롭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삼상 12:6-7) "6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을 세우시며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시니 7 그런즉 가만히 섰으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행하신 모든 의로운 일에 대하여 내가 여호와 앞에서 너희와 담론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건져 내시기 위해 애굽 군대를 홍해에 넣으셔서 다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도 애굽의 장남과 첫 것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셨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의 개념과 맞아 떨어집니까? 집단 살해가 의로운 것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 모든 일을 ‘의로운 일’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 편을 들어 이스라엘에게 하실 일을 충실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우리 삶을 인도 하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의로우심’입니다. 창세전에 당신의 뜻에 따라 예정하신 어떤 무리에게 하나님은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하실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우리의 구원이 실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로우신 일로 이 세상에 십자가가 섰을 때 그 놀라운 구원 사역을 하나님의 의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 분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우리 하늘 백성들은 아버지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면 우리는 의로운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이루어서 우리에게 전가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순종의 극치입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셨지요?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의가 어떠한 것인지를 아는 ‘의롭게 된 자’들은 이제 그 하나님의 의에 감격하여 이 땅에서 순종의 삶, 다시 말해 의로운 삶을 경주하게 되는 것이고요. 여러분 그 고집스러운 하나님의 의가 여러분을 이끌고 있습니다. 뭐가 두려우세요. 하나님은 끝까지 의로우신데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이라면 자기의 형제자매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 관계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윤리 도덕이 일차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일 차적인 덕목은 관계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맺고 있는 관계에 있어서 충실해야 합니다. 자 이런 예를 한 번 들어 보세요. 로마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이 로마 병정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쫓기는 그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로마병정들이 찾아와서 ‘여기 도망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오지 않았나?’하고 물었을 때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그들을 내어주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그들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의 ‘의’는 관계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맺고 있는 옳은 관계 속에서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해주는 것을 ‘의’라 하는 것입니다.
(롬 3:21-26,30)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완전하게 순종하고, 의뢰하고, 사랑하게 하시는 ‘의’를 선물해 주신 것입니다.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아빠 손을 꼭 잡고 위험한 길을 건너는 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아빠 손을 잡고 길을 건너는 아이에게 ‘아빠 손 꼭 잡아’하는 것은 ‘너 손 놓으면 아빠도 확 놓아버릴 거야’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아빠는 아이가 손을 놓더라도 절대 그 손을 놓지 않습니다. 설사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할지라도 그 손을 절대 놓지 않습니다. 그게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아이의 손을 힘 있게 꼭 잡고 가면 아이의 손에 힘이 빠져도 안전한 것입니다. 구원은 그런 것입니다. 길을 건너갈 때 내가 건너가지만 아버지가 이끄시는 대로 그 분의 힘에 의해 가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손을 꼭 안 잡으면 나도 놓아버리겠다는 매정한 아버지를 가르치는 것이 알매니안 주의 아닙니까? 아닙니다. 구원은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가는 아름답고 따뜻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펴 볼 부분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다는 어절입니다. 30절의 ‘영화롭게 하셨다’ ‘에독사센’은 ‘독사조‘라는 단어의 과거시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아주 단정 지어 선포합니다. 이런 것을 신학 용어로 예언적 과거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단 하시기로 한 것은 이미 이루어 진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과거로 써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미 영화롭게 된 자들이 이 땅에서 조금 실수 한다고 그 구원이 파기 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자, 지금까지 살펴보면서 조금 신중하게 들으신 분들은 뭐가 하나 빠졌다 싶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칭의(justification)를 공부했고 영화(glorification)를 공부했습니다. 뭐가 빠졌지요? 성화(sanctification)가 빠졌지요? 왜 빠졌을까요? 여러분, 성화라는 것은 영화의 시작이며 과정입니다. 영화는 성화의 완성이고요. 성화와 영화가 서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영화롭게 된 자들은 반드시 성화의 단계를 거쳐 영화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공짜로 주시고 우리가 그 은혜를 찬미하며 그 감사의 찬미를 통해 거룩한 자로 바뀌어져 가게 만드신 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엡 1:6)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이리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다음 주에는 오늘 공부한 부분에 조금 더 살을 붙여 쉽게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공부한 부분은 기독교의 핵심이며 본질입니다. 잘 공부해 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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