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말씀으로
(김성수 목사)
(요 4:43-54) “43 이틀 뒤에 예수께서는 거기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셨다. 44 (예수께서 친히 밝히시기를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셨다.) 45 예수께서 갈릴리에 도착하시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였다. 그들도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께서 거기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46 예수께서 또다시 갈릴리 가나로 가셨다. 그 곳은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다. 거기에 왕의 신하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앓고 있었다. 47 그 사람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나와 갈릴리로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께 와서 "제발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서,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48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7)표징이나 기이한 일들을 보지 않고는, 결코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그리스어 세메이온) 49 그 신하가 예수께 간청하였다. "선생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 50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돌아가거라. 네 아들이 살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51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종들이 마중나와 그 아이가 살았다고 보고하였다. 52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낫게 된 때를 물어 보니 "어제 오후 한 시에, 열기가 떨어졌습니다" 하고 종들이 대답하였다. 53 아이 아버지는 그 때가, 예수께서 그에게 "네 아들이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각인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함께 예수를 믿었다.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나와서 갈릴리로 돌아오신 뒤에 행하신 두 번째 8)표징이다.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그리스어 세메이온)”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에 이어서 주님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 사건을 예수님의 두 번째 표적이라고 지칭합니다. 본문 54절 보세요.
(요 4:54) “54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그러나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월절 동안에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이미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을 두 번째 표적이라고 불렀을까요?
(요 20: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복음을 유효적절하게 설명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행하신 수 많은 표적들 가운데 일곱 개의 표적만을 나열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주님이 행하신 수많은 표적 중에 자기가 고른 두 번째 표적이라는 의미에서 두 번째 표적이라 표현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본문 속에서도 우리는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 속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담겨있는지 지금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43절 이하가 붙어 있는 41절과 42절을 보시면 오늘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내용에 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요 4:41-42)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여러분께서 지난 시간에 공부하신 부분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들의 믿음의 동기가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나 이사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이야기입니다. 죽어 가는 한 아이를 살려 내신 것입니다. 말씀과 기적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금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무언가를 보아야 믿을 수 있다는, 표적에 광분하는 어떤 무리들의 한심한 행태 들을 향해 경고를 하기 위해, 말씀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말미에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이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문 44절과 45절을 보시겠습니다.
(요 4:44-45) “44 친히 증거 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 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이 구절은 자칫 잘 못 보면 예수님께서 말실수를 하신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구절입니다. 44절에서 주님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주님은 실제로 고향에서 많은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마 13:54-58) “54 고향으로 돌아 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하고 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그런데 45절을 보시면 고향 사람들이 주님을 열렬히 환영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바로 그 두 구절이 오늘 본문의 주제를 힌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하시거나 흰소리를 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환영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본문 45절을 다시 보시면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환영한 이유가 나옵니다.
(요 4:45) “45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 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갈릴리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환영한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고 주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2장에도 나옵니다.
(요 2:23-24) “23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24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어떤 신기한 기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들에게는 당신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십니다. 그 말은 그렇게 무언가를 보고 믿으려고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질 수 없는 자들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러한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45절에 갈릴리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했다고 하는데 거기에 쓰인 단어가 ‘데코마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헬라어 ‘데코마이’와 같은 의미의 단어로 ‘람바노’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데코마이’와 ‘람바노’를 둘 다 ‘영접하다’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 단어가 나온 곳을 우리가 이미 공부했습니다.
(요 1:12)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 보시면 분명 성경이 ‘영접하는 자’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이미 주어져 있다‘라고 확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았듯이 예루살렘에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고 갈릴리에서는 주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자신을 환영하여 영접한 것이 아니라고 하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당신의 몸을 의탁하지도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절들을 통하여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믿는다는 사람도 많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영접했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모두 ‘성도’로 부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주님을 믿는다고도 하고 주님을 영접했다고도 하며 주님을 환영하고 금방이라도 자신들의 왕을 삼을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어떤 기적을 보고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들은 가짜 믿음이요 가짜 영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직후에 갈릴리에서 표적을 본 사람들이 주님을 환영하며 영접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건 가짜 영접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의 영접이 가짜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눅 4:24-29)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주님께서 고향인 나사렛에서 당하신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분명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많은 표적들로 인해 갈릴리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했고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주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시지 않고 말씀을 전하시며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시자 그들이 주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죽여 버리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기적을 보고 싶어 하고 그 기적들로 신앙생활의 척도로 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요한 계시록에 보면 성령 하나님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는 땅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한 묘사가 이렇습니다.
(계 13:11-14)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요한 계시록 13장에는 용과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 그리고 땅에서 올라 온 짐승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공부한 대로 그 셋은 마귀의 세력을 총체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귀의 세력들이 정확하게 삼위 하나님을 흉내 내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은 죽은 것 같았다가 살아난 존재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서 올라 온 짐승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면서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을 경배하게 합니다. 마치 오늘 날 예배당 안에서 기적들을 일으키면서 그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외치고 있는 어떤 무리들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주님은 말세 때에 이적과 기사를 행하며 성도까지도 미혹하게 할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누누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막 13:22-23) “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마 7:22-23)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렇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고자 하는 자들, 기적을 좇고, 체험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참 신앙인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한 것입니다. 아니 그들은 어쩌면 두 번째 예수를 살해하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마귀의 세력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기적을 추구하고 체험을 좋아하며 자신의 경험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사라져 버리면 불안해서 못 견딥니다.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히 11:6)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요 3:18)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렇지요?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히 11:1-3)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바라는 것들을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 된 것으로,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보이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처럼 선명하게 인정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보이는 것을 보고 ‘그것이 이러하다‘라고 인정하는 것을 우리는 ’감식‘ 혹은 ’인식‘ 혹은 ’인지‘라고 부릅니다. ‘믿음‘과 ‘인식’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열심히 기적을 쫓아다니며 그 기적에 신기해하고 놀라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열심히 무언가를 인식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 땅에서 성도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실까요? 그냥 다 보여주시고 인식하게 만드시면 되지 왜 굳이 믿음이라는 것을 요구하시고 그 믿음이 있는 자들만을 천국에 들여보내시겠다고 하십니까? 무엇을 보고 만지고 인식하는 것은 누구다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러한 능력을 누군가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하고 여전히 ‘보여주면 믿겠노라‘는 세상 사람들과의 구별을 위해 ‘믿음’을 보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내 백성인지는 오직 믿음의 행사를 통해서만 구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보이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보고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들에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병을 낫게 해 준다든지 예언을 해 준다든지 은 이빨을 금이빨로 바꾸어 준다든지 하는 그런 보이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내 감정이 복받치도록 분위기를 안 만들어 줘도 괜찮습니다. 눈에 보이는 나의 감정이나 기적의 체험이 없이도 믿음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마귀는 그 믿음을 희석시키기 위해 눈에 보이는 기적들을 동원해서 ‘택한 백성들까지도 미혹’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기적은 정말 신기하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야릇한 쾌감도 줍니다. 마귀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놀라운 일들을 동원해서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감동과 기쁨을 자꾸 보이는 것으로 인한 감동과 놀라움으로 대체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의 삶 속에 기적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기적처럼 건져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으로 성숙되기까지 우리가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에 기적으로 간섭을 하십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한 번은 집 rent비가 없어서 거리로 쫓겨날 뻔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교회 집사님께서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해서 식사를 하러 나갔는데 식사 후에 그 집사님께서 그 다음날 지불해야 할 저희 집 rent비를 봉투에 넣어서 차안으로 던져 넣고 가신 적이 있습니다. 저희 가족 중 누구도 rent비가 없어서 쫓겨나게 생겼다는 말을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었고 저희 아파트 rent비가 얼마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께서 그 달에 사업이 기대 이상으로 너무 잘 되어서 하나님께 ‘이 나머지 돈들을 어떻게 써야 잘 쓰는 것입니까‘라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우리 전도사님이 어려울 텐데 이번에는 전도사님을 좀 도와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드셨답니다. 그렇게 해서 저희는 한 달을 무사히 넘겼습니다.
영국 고아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지 뮬러가 사역을 할 때 동시대에 사역을 하신 분이 찰스 스펄전 목사님이십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께서 조카의 부탁으로 돈을 마련해 주기 위해 부흥회를 몇 차례 인도하시고 3,000불을 마련하신 적이 있으셨답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속에 ‘그 돈을 조지 뮬러에게 갖다 주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너무나 확연하게 그러한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자 스펄전 목사님께서 조지 뮬러의 고아원으로 그 돈을 들고 가셨답니다. 그 때 조지 뮬러는 고아원 한 구석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 3,000불을 보내 주세요. 그 돈이 없으면 우리 아이들이 굶어 죽습니다’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퉁명스럽게 ‘여기 당신 기도 응답이 왔소’라고 하시고 그 돈을 조지 뮬러에게 던져 주셨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간섭하심 아래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러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성도의 삶 속에 일어난 기적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은 절대 성도의 욕심을 따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욕심을 따라 나타난 기적은 절대로 성도의 신앙 성숙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성도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데에 쓰여 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의 삶에 나타나야 하는 진짜 기적, 성도의 신앙 성숙에 필요한 진짜 기적은 세상 것들이 부족하고 없는 상태에서도 다른 이들처럼 절망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그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며 찬양하는 기적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그 속에서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 그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에 베푸시는 진짜 기적인 것입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은 바로 그러한 관점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게 표적만을 보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했던 갈릴리 사람들이 끝내는 예수님을 살해해 버린 것과는 다르게 어떤 사람이 그러한 표적들과는 관계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사건이 바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본문 46절을 보세요.
(요 4:46) “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예수님께서 갈리리 가나에 이르셨을 때 가나에서 34km, 25마일 정도 떨어진 가버나움에서 헤롯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 왕의 신하가 찾아온 가나를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주님께서 가나에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과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했다시피 주님께서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은 진정한 혼인 잔치의 즐거움은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회복할 수 없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잔치의 즐거움은 회복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만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비로소 완성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죽어 가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죽은 자를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설명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었다‘라고 표현을 하지 않고 ’죽어 간다‘라로 표현을 한 것이고 ’그의 병이 나았다‘라고 표현을 하지 않고 ’그가 살았다‘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이 치유되는 사건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죄인들이 새 사람으로 살아나게 되는 사건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가 어떻게 흡사한지 보세요.
(요 2:1) “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요한은 가나의 혼인 잔치를 설명하면서 굳이 별로 필요할 것 같지 않은 ‘사흘’이라는 단어를 동원합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에도 똑같이 사흘이 등장합니다.
(요 4:43) “43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이틀이 지나 사흘 째 되는 날 주님께서 갈릴리 가나로 들어 가셨다는 말입니다. 제가 전에 창세기 강해 때 이 사흘의 의미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지요?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의미적으로 볼 때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질서로 엉망이 되어버린 창세기의 셋째 날을 회복하시는 것이기에 성경에 사흘이라는 단어가 구속과 관련하여 등장하는 것이라 했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고 요나도 사흘을 물고기 뱃속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사흘이라는 단어 속에서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사건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속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읽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두 이야기의 흡사한 점은 이 외에도 많습니다. 두 이적 다 주님께서 그 이적을 구한 사람을 책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첫 번째의 경우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책망이었고 오늘 본문의 경우는 왕의 신하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다 주님께서 말씀만으로 이적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종들이 그 이적의 최초 목격자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공통점은 두 사건 모두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생기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건 모두 어떻게 예수를 믿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는가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1장을 공부할 때 이 표적의 책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인자 위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고 말씀하시고 표적의 책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표적들은 죄인들에게 막혔던 하늘이 열리게 되는 이야기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따라서 오늘 본문도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하늘이 열리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복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죽어 가는 아들을 살려달라는 왕의 신하에게 주님은 매몰차게 야단을 치십니다.
(요 4:48) “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사실 오늘 본문을 여는 키는 이 구절에 들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표적을 보고 주님을 영접한 갈릴리 사람들을 포함하여 기적을 바라고 찾아 온 왕의 신하를 책망하시는 말씀인 동시에 죄인들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만 가능하다는 복음의 선포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표적‘’세메이온‘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첫 번째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보고 싶어 하고 경험하고 싶어 하는 기적과 이사’라는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 표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상징하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입니다. 후자의 긍정적인 의미의 ‘표적‘’세메이온‘이 쓰인 곳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오지요.
(요 6:26)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오병 이어로 배를 불린 무리가 주님을 찾아오자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오병 이어의 기적을 통해 표적을 보았어야 하는데 표적은 보지 못하고 배부른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책망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표적을 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오병 이어의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게 될 하늘의 풍요를 설명하는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 기적 속에 들어 있는 표적을 보지 못하고 단순히 그 기적만을 신기해하며 열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무리들에게 ‘제발 표적을 보아라, 그 속에 담긴 십자가의 복음을 보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들은 전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주이신 것을 설명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표적은 반드시 보아야 하는 것들인 것입니다.
(마 12:38-40)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지요? 주님의 모든 표적들은 전부 요나의 표적,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로 말미암게 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46절에서 주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을 하신 것을 의역을 하면 이러한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들의 욕심을 따라 표적과 기사를 구하고 좇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너희는 반드시 표적을 보아야 한다. 너희는 그 표적과 기사 속에서 표적과 기사가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지 못하면 절대 나를 좇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만 해도 주님은 주님이 누구이신 지, 그리고 주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이며 그 일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알려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사야 서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병자들을 고치신 것입니다.
(사 35:5-6) “5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러한 이사야서의 예언은 단순히 메시아가 오면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저는 자를 뛰게 하고 귀머거리의 귀를 여는 치유의 사역을 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죽음의 포로가 되어 버린 영적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절름발이의 상태인 죄인들의 자유롭게 해방시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사역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한 상징적인 의미에서 주님은 병자들을 고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죄인들을 살리러 오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 죽었던 자들을 살려 내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자연에게조차 명령을 내리시는 그런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물위를 걷기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주님을 그저 나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기적이나 일으켜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이 살아나는 표적이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4:49-50) “49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여기에 등장하는 왕의 신하는 왕족이거나 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아주 높은 귀족입니다. 그를 가리키는 ‘바실리코스’는 왕을 가리키는 ‘바실류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당시에는 왕족이나 왕과 밀접한 관계의 귀족들에게 쓰던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왕의 신하는 당시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헤롯 안티파스의 친척이거나 그와 아주 가까운 귀족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귀족이 25마일을 걸어서 나사렛의 목수를 찾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미천한 목수에게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그의 아들은 외아들이었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그 아들이라는 단어 앞에 모두 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말은 그 죽어 가는 아들이 외아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라는 단어를 헬라어 ‘파이디온‘과 ‘파이스‘로 번갈아 쓰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 아들이 어린아이가 아닌 자랄 만큼 자란 아이란 뜻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절박했겠습니까? 다 자란 고관대작의 외아들이 지금 열병에 걸려 죽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불원천리 25 마일을 걸어서 찾아 온 사람에게 네 아들이 살았으니 그냥 가라고 하십니다. 그 신하는 주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셔서 자기 아들에게 안수를 하던 치료를 하던 무엇인가를 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계속 자기 아들이 죽기 전에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50절에 쓰인 ‘살았다‘’제‘라는 헬라어 동사는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쓰인 동사입니다. 그 말은 ’네가 돌아갈 때쯤 되면 그 아이는 이미 회복되어서 살아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아이가 지금 살아나서 네가 도착할 때쯤 되면 이미 오래 전에 회복된 상태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믿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신하가 ‘그래도 표적을 보기 위해 왔으니 표적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않고 말씀을 믿고 자기 집으로 떠납니다. 50절을 보면 확실히 나타나지요? 여러 주석가들이 왕의 신하가 표적을 보여주지 않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하여 떠난 것이라고 주석을 합니다. 저도 51절과 52절의 이야기로 미루어 그 사람이 믿지 않고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전체 문맥 속에서 차근차근 해석을 해 보니 그 왕의 신하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내려간 것이 맞습니다.
지금 이 왕의 신하의 이야기와 갈릴리 사람들의 이야기는 표적을 보고 믿으려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와 아울러 오직 말씀에 의해서만 주어지게 되는 믿음의 대조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끝까지 표적만을 좇다가 망하게 되지만 표적을 보지 못하고도 말씀만을 믿고 돌아 간 자에게 그 말씀이 실제로 표적이 되어 실현이 되고 온 가족이 믿음의 자리로 부르심을 입게 된 것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확언을 하는지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 4:51-52) 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52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 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가나에서 가버나움 까지는 25마일입니다. 당시의 도로 사정을 감안 할 때 25마일의 거리는 꽤 먼 거리였을 것입니다. 제가 가끔 러닝머신으로 달리기를 하는데 30분을 꼬박 뛰어야 2마일을 뜁니다. 왕의 신하가 포장도 안 된 25마일의 길을 가는 데에는 적어도 8시간에서 9시간은 족히 걸렸을 것입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25마일이 성인이 도보로 4시간이면 닿을 거리라고 하는데 육백만 불의 사나이 정도 되지 않고서야 25마일을 쉬지 않고 4시간에 달려 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52절이 해결이 됩니다. 많은 학자들이 왜 그 왕의 신하가 믿지 않고 포기하고 갔을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가 하면 52절에 그가 길에서 자기 하인들을 만난 시간이 다음 날로 표기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제 칠 시에 아들이 나았다’라고 대답을 하지요? 그래서 왕의 신하가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포기하고 중간에서 하루를 보내고 그 다음날 집으로 향했다는 해석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하나뿐인 아들의 치유를 위해 절박하게 예수를 찾아 온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포자기해서 중간에 놀다가 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그 신하의 청을 듣고 그의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그 신하의 종들이 자기 주인의 아들이 낫자 자기 주인에게 그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달려 왔습니다. 왕의 신하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부랴부랴 자기 집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왕의 신하가 주님을 만난 시간은 제 칠 시 즉 오후 한시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부터 가버나움의 집을 향해 가던 왕의 신하가 종들을 만난 시간은 저녁 무렵이 되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해가 지는 시간이 다음 날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저녁 무렵에 종들을 만난 주인이 묻습니다. ‘언제 아이가 나았느냐? ‘ 종들은 이미 해가 졌기 때문에 오늘 오후 한시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어제 제 칠시’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절대 쉬엄쉬엄 놀면서 가지 않았습니다.
51절을 보시면 ‘내려가는 길에’라는 어구가 있지요? 그 ‘내려가다‘라는 동사가 현재 분사입니다. 그러니까 그 왕의 신하는 부지런히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절대 포기하고 놀다가 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표적만을 좇는 자들에 대한 경고와 함께 말씀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표적을 보지 않고도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이 곧 현실이라는 것을 굳게 붙들고 간 신하는 정말 그 말씀을 현실로 보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의 믿음은 'seeing is believing'‘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믿음인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believing is seeing''믿으면 보인다’의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고 드리는 우리 기도의 응답이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생에서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보지 못하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믿음에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간구를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의 영적 유익과 성장을 위해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끊임없이 답하고 계십니다. 성도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아도 이 귀에 아무 도 들리지 않아도 믿음만을 가지고 끝까지 걷는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 8:5-8)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여기도 역시 가버나움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백부장입니다. 이 백부장은 자기 신하가 중풍 병에 걸렸으니 주님께서 말씀으로 낫게 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가셔서 고쳐 주시겠다고 하시자 백부장은 손사래를 칩니다. 그냥 말씀만 하시면 그게 현실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음을 보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그와 같은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말씀에 근거한 것이어야지 표적이나 이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왕의 신하의 가족들이 믿음을 얻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랑하는 외아들의 열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열병으로 죽어갈 때에 그 가족들은 아마 세상에서 자기들이 가장 불행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는 그 아들의 질병 때문에 주님을 찾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온 가족이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확인만 되었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주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감사함으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어떻게 표현합니까? 인간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게 놔두는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고 바라는 바가 다 성취가 되는 것이 절대 복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저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인간의 마음속에서 올바른 욕구가 일어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고난이 유익이라는 이 역설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님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들의 삶에 나타나는 질병이나 가난이나 전쟁이나 기아 같은 고통은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죽음의 그림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고통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렇게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실존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경험 속에서 참된 회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고통이라는 것은 회개로 향하게 되는 복된 사건들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통을 감지한다는 것은 복입니다.
고통을 감지하지 못하여 결국 목숨까지 잃게 되는 병이 있습니다. 한센 병입니다. 문둥병이라고도 하지요. 바람이 불면 눈이 시려야 하는데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실명을 합니다. 손가락이 압력을 감지하지 못해서 손가락이 부러질 때까지 힘을 가하다가 결국 손가락을 모두 잃기도 합니다. 뜨거운 것을 만져도 고통이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화상을 입습니다. 고통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것입니다.
사망 속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이 땅에 태어날 때에 그러한 죽음의 그림자인 고통을 품고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그러한 죄인들의 죽음의 삶에 살짝 꿀을 발라서 죄인들의 인생도 살만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삶 속에 회개가 있을 리 만 무(萬無)지요. 그건 저주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고통을 겁내지 마세요. 잘 감당해 내십시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거듭나고 변화되려는 데에 그 요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 뜻을 성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뜻을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자기 삶으로 실천하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목표입니다. 기독교 신앙엣 자기 부인과 자기 포기가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포기가 없이 그 사람이 새 사람으로 변화될 리가 만 무(萬無)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새롭게 변화되고 성숙되어지는 기독교 신앙에 왜 기적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성숙되어지는 데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엉뚱한 기적 쫓아다니지 마세요. 기적을 쫓아다니며 나의 욕구를 채우려는 것은 무속 신앙입니다. 무속 신앙은 나의 소원은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나의 변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후 5:7)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 이로라”
(롬 10:17)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만 말미암습니다.
(고후 13:5) “5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가 정말 믿음이 있는 자들이 맞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늘 확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만일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분이 이 땅에서 나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말씀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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