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김성수 목사)
(엡 2:4-7) “4 (그러나)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지난주까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어떤 자들이었으며 어떤 지경으로 던져질 뻔했던 자들이었는지를 공부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과 죄에 대해 공부를 한 것은 복음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환자라는 자각이 없으면 의사의 필요를 못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모르고 구원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자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과 사랑을 허락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영영 그렇게 지옥으로 떨어질 뻔했던 자들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요즘 TV에서 아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어떤 철학자가 자기는 성경을 아주 깊이 공부를 했다고 하시면서 성경에 나오는 좋은 말은 명심보감이나 노자 장자에 더 많다고 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분은 성경을 잘 못 공부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명심보감처럼 ‘우리가 어떻게 도덕적으로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는 가’가 적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우리는 얼마나 죄인인가’가 적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불가능한 죄인이었는가?’가 구약1400페이지에 걸쳐서 기록이 되어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죄인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가 기록되어있는 책이 성경입니다.
지금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아주 뛰어나다고 인정받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셔서 1500년 동안 시험을 하신 결과를 책에 기록해 놓으신 것이 구약입니다. 어벙한 민족을 택해서 그 민족이 실패를 하면 혹 나중에 “저 민족은 어벙해서 그랬지 처음부터 우리 같은 우수한 민족에게 율법을 주셨으면 실패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변명을 사전에 차단하시기 위해 뛰어난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어 보신 것입니다. 그들도 실패했습니다. 성경이 왜 우리에게 그렇게 우리 죄인의 불가능함을 강조합니까? 구원은 거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왜 그렇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강조 강조하면서 기록하고 있는지를 뼈 속 깊이 자각하고 계셔야 합니다.
우리는 다 죽었던 자들입니다. 김세윤 교수님의 표현처럼 마치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우리는 아직 생명이 붙어 있지만 곧 영원한 죽음으로 던져질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복음을 아는 학자들은 “기독교는 절망의 종교다“라고까지 표현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절망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절망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엡 2:12)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그런데 성경에는 언제나 그러한 절망적인 선언 다음에 대 반전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한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까지는 절망적인 우리의 옛 모습이 적나라하게 기술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4절에 이르러서 “호 데” “그러나” 하고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1-3절까지와 4-7절까지는 완벽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 말 그대로 복음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유앙겔리온”
“유”라는 접두어는 기쁨을 상징하는 접두어입니다. 옛날에 그 나라에 왕자가 태어났을 때 그 소식은 온 나라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 때에 쓰인 단어가 “유앙겔리온”입니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복된 기쁜 소식이 바로 성경의 복음(유앙겔리온)입니다. 그 복음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쁜 소식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그러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인데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 크신 사랑을 인하여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 내셨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감각기관인 영이 죽었었다는 말입니다. 그 영을 살려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이유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1차 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잘 정리하고 계셔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을 하셔서 우리를 구원했다“라고만 구원을 정리하고 계시면 자칫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조건이 나에게 있는 것처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어쨌든 내가 사랑 받을만하고 내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만하다는 말이 됩니다. 이러한 개념은 주관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1차적으로 우리가 구원에 대해 정리를 하고 있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구원을 내가 느끼고 누리고 경험한 것으로써 감격과 흥분의 차원에서 말하고 있지 않고 객관적 차원에서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엡 2:4-7) “4 (그러나)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왜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육체의 욕심대로 살던 그 더럽고 추악하고 하나님이 볼 때에 진노 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한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까지, 그런 희생을 치르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했는가? 7절 보시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 세대에 증명하시려고” 구원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1차 적인 이유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이렇게 나옵니다.
(롬 3:25-26)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이 놓치시면 안 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자랑하시려고 그랬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분의 속성상 그 분의 의로우심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성품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 의로우심, 공의로우심, 은혜로우심 등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딤후 2:11-13)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여기서 미쁘다는 말은 (faithful)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롬 3:1-31) “1. 그러면 유대 사람의 특권은 무엇이고,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2.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3.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얼마가 신실하지 못했으면, 어떻습니까? 그들이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습니까? 4.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이지만,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주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고, 주께서 판단을 받으실 때에 주께서 이기십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5.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내가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합니다마는,) 6.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7. 또 "나의 거짓으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그분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아야 하느냐?" 하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8. 그러나 "좋은 일이 생기라고, 악한 일을 하자"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9.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에게 더 나은 것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14.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15.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이 있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19. ○우리는,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25.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사람에게 속죄제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믿으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26.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27.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어떠한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 28.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29.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30. 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십니다. 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미1500년 전부터 구약 율법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지냈으며 그들은 할례를 받았고 800년 동안 성전을 가지고 있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너희들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을 합니다. “할례를 받은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근거나 조건이 아니다. 진짜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다“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그러면 우리 유대인의 유익이 뭐냐?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지금까지 죽을 고생하며 율법을 지켜왔고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고 할례를 받고 했는데 우리는 뭐냐? 그렇게 묻습니다. 거기에 사도 바울이 “너희는 그 수많은 민족 중에 말씀을 맡았던 자들이다. 그것 자체가 유익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는 종교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말씀을 맡아 가지고 있었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힌두교, 불교가 있었고 바알, 아세라, 몰렉 같은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힌두교에는 "샬“이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화장을 하게 되는데 그 남편의 시체가 가장 활활 타고 있을 때 살아 있는 아내가 뛰어 들어야 하는 그런 의식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목욕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누 경전에는 인간의 몸에서 생겨나는 땀, 각질, 손톱, 똥, 오줌 같은 것이 인간을 오염시킨다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매일 흐르는 물에서 목욕을 합니다. 남이 목욕한 물에서는 절대 목욕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중탕이 없습니다. 그렇게 목욕을 함으로 그들은 매일 매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 성스러운 강이 갠지스 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갠지tm 강에서 목욕을 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그 인도의 갠지스 강은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강입니다. 그들은 시체를 태워서 갠지스 강에 뿌립니다. 그런데 시체를 태우는 연료가 비싸서 다 못 태우고 남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면 그 남은 시체도 같이 버립니다. 그리고 한 쪽에서는 빨래를 하고 한 쪽에서는 그 물을 마십니다.
인도인들이 가장 큰 신으로 여기는 신은 비쉬뉴입니다. 그 비쉬뉴의 축일에는 인도의 갠지스 강에 모두 모입니다. 그래서 그 강에서 숙식과 목욕과 화장을 다 해결합니다. 암몬 자손들은 풍요를 빌기 위해 자기 아이들을 몰렉에게 바쳤습니다. 아이들을 몰렉의 우상 가슴 판에 있는 토펫에 넣어 태워 죽이는 것입니다. 레위기나 에스겔서에 나옵니다. 아프리카의 미개한 저질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나 중국에도 순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저승 가는 길에 외롭지 말라고 많은 하인들과 첩들을 산 채로 무덤에 묻어 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행위들을 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은 진짜 하나님에 관한 그 분의 말씀을 맡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짜 지도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유익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바울이 그들더러 너희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묻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뭐냐? 우리가 신실하지 못 하다고 하나님도 약속을 어기시는 분이냐? 하고 묻습니다. 거기에 대해 바울이 “너희들이 신실하지 못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너희들의 상태와는 전혀 무관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시편 51편 다윗의 시를 인용해서 “하나님은 온 세상이 원고가 되어 하나님을 피고로 몬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승소하실 것이다.(원고 패소 판결을 받아내실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홀로 의롭고 신실하시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그러면 우리가 신실하지 못해서 그 신실하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드러난다면 우리가 잘한 것 아니냐?” 그런 사람들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것은 하나님이 불의 하신 것 아니냐?“ 하고 질문합니다. 마치 돌아온 탕자가 “내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우리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드러났으니 내가 집 나간 게 잘한 일이다” 이렇게 우기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니까 바울이 “그런 이야기하는 놈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일침을 가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 하나님은 속성 자체가 의로우신 분이시다. 그 의가 뭔지 아느냐? 설명해 줄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인이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그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이렇게 십자가를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공의로우심, 은혜로우심을 어떻게 표현을 하셔서 나타내셨는가 하면 골고다의 십자가로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셨습니까? 하나님은 속성상 죄를 그냥 지나치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실패를 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 죄를 벌하시고 하나님의 원래 목적이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복구 시켜 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가시적으로 역사에 드러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의 나타내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이 땅에 사건화 시키신 것입니다. 실제로 아들을 십자가에 다셔서 아들의 피를 뽑아 내셨고 실제로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그렇게 객관적 사실로 세상에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얼마나 집요한 것인지 그 긍휼하심의 풍성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객관적인 사실인 십자가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전능자 이십니다.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꼭 십자가를 세우셨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객관적인 사실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여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느낌과 사실은 다른 것입니다. 사실에는 파워가 실립니다.
앙리 샤리에르가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썼던 빠삐용이라는 책에는 이런 서문이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는 어느 날 서점을 지나가는데 베스트셀러 중에 세 번 탈옥을 한 죄수의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열 번도 넘게 탈옥을 시도했고 성공을 한 사람이다. 세 번 탈옥을 한 사람의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면 나의 이야기는 분명 더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예를 좀 이상한 걸 들었는데 아무튼 객관적 사실은 막연한 느낌이나 상상 보다 더 큰 파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이며 객관적 사실은 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확실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정리할 때 느낌으로 감정으로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데서 끝나면 안 됩니다. 분명 감정은 , 느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객관적 사실과 이지적 판단이 함께 가지 않으면 그 신앙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깊은 영적 체험을 하고 은혜에 감동하여 눈이 빠지게 울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 중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주관적인 체험과 감동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정의하고 있는 분들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습니다. 자기 기분에 따라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가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기분이 안 좋아도 2000년 전에 세워진 십자가가 뽑혀졌다 박혔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그렇게 십자가로 역사에 드러내셨고, 그 십자가라는 객관적인 사실의 열매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려고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소문이 아닌, 풍문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객관적인 사실로 세상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의로우심,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내실 수 있습니까? 매일 매일 십자가를 꽂으셔야 하나요? 십자가의 사건은 영 단번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 영 단번의 십자가 사건은 다시 재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의로우심을 드러내실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십자가의 열매인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7절에서 구원의 이유를 이렇게 묘사하는 것입니다.
(엡 2:7)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오는 여러 세대’ “아이오신 에페르코메노이스“는 영원이라는 말입니다. 영원히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구원받은 우리들을 통해 나타내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고 그저 죄만 짓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속성이요 인격이요 성품이신 그 분의 신실하심, 의로우심, 은혜로우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 분의 의로우심은 온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그 십자가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을 나타내며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보며“어떻게 저 인간이 저렇게 변했을까?”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은 저 인간이 구원을 받다니” 그런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실존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는커녕 먹칠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안심하세요. 그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조차도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십니다.
조각가의 영광은 그의 작품에 있습니다. 그의 작품이 훌륭하면 그 작품을 통해 조각가가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작품은 조각가가 만듭니다. 돌맹이가 조각가를 어떻게 무엇으로 도울 수 있습니까? 그냥 꼼지락거리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최고의 걸작품을 만들어 내실 수 있는 그 분이 자신에게 영광이 될 최고의 작품을 스스로 만들어 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 44:21-23) “21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23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삼림과 그 가운데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실 것임이로다”
중간 정리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있었고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져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자들 중에 한 무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왜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오는 모든 세대에 나타내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시기 위해 십자가를 택하셨고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자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모든 세대에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의가 드러나는 인생조차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만들어 내고 계시며 반드시 만들 것이라는 것이 지금까지 공부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예수 안에서 해결하셨습니다. 5절부터 7절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엡 2:5-7)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그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해 얼마나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는가를 계속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때문에 어떤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셨는가를 바울은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고후 5:20-21) “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그러한 것입니다. “나에게 죄를 지은 것들은 싹 없애버리고 다시 새 걸로 만들겠다.”가 아니라 희생을 감수하시면서 아들인 예수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삶에서도 그러한 희생이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때문에 밑져 보셨습니까? 여러분의 형제의 유익을 위하여 밑져 보셨습니까? 시간을 밑지고 물질을 밑지는 그런 삶을 살아 보셨나요? 교회 안에서도 절대 밑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나는 이만큼 일 하는 데 쟤는 왜 조만큼 밖에 일 안하고 칭찬 받아? 밑지는 것 같지요? 그러나 형제를 위해 밑지고 손해 보는 삶이 예수의 삶이었으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핵심입니다.
(고후 8:9-15)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나의 소유로 형제의 부족함을 채우라는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고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부요함으로 자신은 가난해 지고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셨듯이 너희도 그렇게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더러 예수님처럼 희생의 삶을 살라는 권고입니다. 여기서 15절의 말씀이 어디에 나오는 말씀입니까?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이야기입니다.
(출 16:3-5) “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출 16:17-20)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바로 이 만나의 이야기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만나로 하여금 자신들의 배고픔을 채웠습니다. 이스라엘의 부족을 만나가 채워준 것입니다.
(요 6:48-51)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성경은 그 만나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이야기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 것입니다. 그 예수께서 자신의 부요함을 비우시고 자기가 가난해 짐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시는 희생의 삶을 살아내셨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출애굽기의 만나 이야기를 인용해서 예수를 설명하며 우리더러 그러한 예수의 삶을 살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의 삶이 우리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예수 믿으면 혼자 잘 먹고 잘 산다고 했습니까? 누가 예수 믿으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기적인 축복 받으며 잘먹고 잘 산다고 했습니까? 오히려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눅 9:57-58) “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어떤 사람이 예수를 좇겠다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너, 나를 따르면 어떤 유익이 있을 줄 알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냐? 네가 나를 따르면 병원에 안 가도 병이 낫고 일하지 않아도 먹을 게 떨어지고 그럴 줄 아느냐? 아니다. 나는 머리 둘 곳 없는 자다“ 이 이야기는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희생과 섬김의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욕심을 채워주시는 분 아닙니다.
(사 53:1-11) “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여러분, 이것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집나간 자식을 위해 맏아들을 죽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거기에 순종하여 죽으신 맏아들의 희생을 아십니까? 아들이 집 나가면 사실상 물질적으로는 이익입니다. 방도 하나 남고 등록금 안 줘도 되고 숙제해라 공부해라 신경 안 써도 되고 이익이죠? 그런데 왜 울며불며 찾아다닙니까? 사랑하는 내 새끼니까 그런 것입니다. 집 나가 쥐엄 열매도 못 먹던 우리를 품에 안아주시고 반지를 끼워주시고 좋은 옷을 입히시고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경험하신 여러분, 우리의 삶에 그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의 삶이 나오게 하셔야 합니다.
아니, 분명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패서라도 그렇게 만드시고야 마십니다. 죽은 시체를 살려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히신 그 능력이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힘들지 않으시려면 미리미리 항복하시고 자신을 쳐서 노력하세요. 너무 힘이 들 때면 은혜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크신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시며 다시 일어서서 노력하세요.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죽지도 못 합니다. 괜 히 약 먹고 쇼하고 그러지 마세요. 위장만 버립니다. 절대 안 죽이세요. 살려서 끌고 가십니다.
(요 6:44)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헬퀴오”는 그냥 순순히 순응하는 자를 데리고 간다는 말이 아니라 “반항하는 자를 끌고 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코뚜레를 꿰어서라도 끌고 가실 것입니다. 험악한 인생 보내시지 않으시려거든 우리의 삶에 예수 의 삶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세요. 빌레몬서를 보시면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그가 빚진 것을 다 내게 돌리라고 합니다. 그게 바로 우리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은혜의 삶인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대언 자(변호사)이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향해 돌을 들어 찍었던 자들인데 우리의 변호사가 되셔서 내가 저들의 빚을 다 갚겠다고 나서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 희생을 아는 자들이 맞습니까?
(요일 2:1-3) “1 나의 자녀 여러분,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씁니다. 누가 죄를 지을지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속죄제물이 되셨으니, 우리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그렇게 되셨습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참으로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분의 그 따뜻한 배려를 아는 사람들은 죄를 멀리하려고 노력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아는 만큼...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면서 그런 삶이 나오지 않는 사람은 아직 성경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지적 동의만 했을 뿐입니다. 자기의 전 존재가 그 앎에 반응하는 것을 “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육체의 욕심대로 살았으며 더럽고 추악하고 하나님이 볼 때에 진노 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지옥으로 떨어져 영원히 타는 불 속에서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에서 살아야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는 만천하에 드러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그 분의 사랑과 긍휼에 앞서 자신의 의로우심을 세세토록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 내실 것이고 그렇게 되기까지
“헬퀴오” 이끌고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늘 묵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을 떠올리면서 하나님께서 이끌고자 하시는 그 길로 한발 한발 발길을 내 딛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 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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