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동이를 버리고
(김성수 목사)
(요 4:25-42) “25 여자가 예수께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2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에게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다." 27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그 여자와 말씀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 "웬일이십니까?" 하거나, "어찌하여 이 여자와 말씀을 나누고 계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29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30 사람들이 동네에서 나와서, 예수께로 갔다. 31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께, "랍비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셨다. 33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 하고 서로 말하였다. 3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35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된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서 밭을 보아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 36 추수하는 사람은 품삯을 받으며,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들인다. 그리하면 씨를 뿌리는 사람과 추수하는 사람이 함께 기뻐할 것이다. 37 그러므로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를 보내서,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였다. 수고는 남들이 하였는데, 너희는 그들의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39 그 동네에서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것은 그 여자가, 자기가 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맞히셨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40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시기를 청하므로, 예수께서는 이틀 동안 거기에 머무르셨다. 41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 믿게 되었다. 42 그들은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의 말 때문만은 아니오. 우리가 그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 이분이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심을 알았기 때문이오."
지난주까지 공부한 부분을 잠깐 복습을 하고 오늘 본문 주해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원수 취급을 했던 사마리아 땅에 살고 있는 당신의 백성을 만나시기 위해 불원천리(不遠千里) 육신이 고단해 지실 정도의 잰걸음으로 사마리아 땅에 도착하셨습니다. 주님은 시간의 여유를 두고 당신의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모든 제자들을 물리십니다. 모든 제자들이 양식을 구하러 가고 우물가에는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만 남았습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목이 마르니 물을 좀 달라’는 부탁을 하심으로 그 여인과의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주님께서 물을 드셨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주님의 목을 축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쉽게 추론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전개 속에서 주님께서는 그 여인이 갖고 있는 진짜 목마름의 정체를 폭로시키고 ‘그 목마름을 오직 은혜로 채워 주시겠노라‘는 복음을 설명하시기 위해 ’물을 좀 달라‘는 부탁으로 대화를 여신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부탁을 받은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왜 유대인이 평소에는 상종치도 않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대꾸를 합니다.
그 말을 들으신 주님은 엉뚱하게도 ‘네가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 줄 알고 너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가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께서 먼저 ‘물을 달라’고 요구를 하셨으면서 ‘왜 생수를 구하지 않니?’라고 대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대화 속에서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라고 부탁을 하신 것이 예수님의 목마름을 해결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영적인 목마름으로 말라 죽어가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주시려는 의도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소유한 사람은 그 지역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으로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아시스도 아니고 ‘끊임없이 솟아올라 흐르는 물‘’휘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하는 그 ’휘돌‘’생수‘를 세상 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여인은 주님께 자신이 이렇게 육신의 목이 말라 물을 길러 나오지도 않을 수 있는 솟아나는 샘물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갑자기 그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을 데려 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여인은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엉겁결에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라’라고 그 여인의 치부를 들추어내십니다. 주님은 사실상 이 세상의 것들로 목마름을 채우려, 끊임없이 ‘이내 말라버릴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있는 모든 죄인들의 모습을 그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폭로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힘을 상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남편‘이라는 존재를 통해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려 했던 그 여인의 잘못된 갈망의 변이를 적나라하게 폭로를 하심으로 해서 그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실체를 직시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남편의 이야기는 곧바로 예배의 이야기로 전개가 되어집니다. 그 것은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이 우리 인간들의 해갈을 향한 잘못된 갈망의 변이(變移) 중 가장 사악한 것이 바로 ‘예배’의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는 무서운 타락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무언가에 대한 목마름에 대한 해결책을 선택을 한 것은 남편들이었습니다. 그 것도 결국은 잘못된 예배의 행위인 것입니다. 예배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가장 소중한 것을 내 삶의 중심에 올려놓고 섬기는 행위를 ‘예배’라 한다 했지요? 이 역사 속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들고 자신을 위해 종교를 만들고 자신을 위해 윤리와 도덕도 만듭니다.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예배하는 행위들인 것입니다. 주님은 오고 오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잘못된 갈망의 변이로서의 예배 행위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 당신께서 생수가 되셔서 이 땅에 내려 오셨음을 그 예배의 이야기를 통해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정으로 예배를 할 수 있는 자들은 생수이신 주님을 마시는 방법 이외에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의 핵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복음을 복음(福音)으로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예배하기 위해 언제라도 남을 밟아 죽일 수 있는 죄인이었음을 인정하고 여전히 자기 속에 내재되어 살아있는 자신의 추악함에 대한 통렬한 자각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주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본인의 생각에 자신은 별로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 그 사람에게 용서라는 것이 복음으로 들릴까요?
자신의 죄는 그저 경미한 도덕적 윤리적 사회법상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속죄의 선물이 정말 기쁜 복음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 인간들이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내어놓는 이 세상의 모든 해결책을 남편의 이야기로부터 끌어내셔서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을 예배하는 행위’로 결론을 지으시면서 죄인들의 잘못된 해갈의 변이를 폭로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자각 속에서 대속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이 세상 것들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목마름을 위해 이 세상 것들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신령과 진리로, 성령에 의해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드리는 감사의 예배를 삶으로 살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난주까지 공부한 24절까지의 내용이고요. 오늘은 본문 25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요 4:25-26)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여자는 이제 자신의 정체가 낱낱이 폭로가 되어지고 자기에게 필요한 생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아닌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이제는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실체(알레떼이아)로 예배를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자 그 여인은 ‘메시아,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가 그로라‘라고 대답을 해 주십니다. 거기까지가 우리 주님과 그 여인의 대화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메시아를 전하러 달려갔습니다. 주님께서 그 여인 앞에서 무슨 기적을 보여 주셨나요? 무슨 깜짝쇼를 하셨습니까? 대단한 철학과 논리를 동원하셔서 복음을 설명하셨나요?
주님은 그저 그 여인의 죄인 됨을 폭로하시고 그러한 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수가 필요하다는 간단한 복음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자기육신의 목마름을 채워줄 유일한 도구요 수단인 물동이까지 버려두고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라고 외치며 동네로 뛰어갔습니다. 마치 26절과 27절 사이에 많은 내용이 생략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그럴 때 우리가 자주 쓰는 해결책이 있지요? 이 요한복음이라는 책을 가장 처음 받아서 읽었던 초대 교회 교인들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했을까를 당시의 관습과 그들의 사고의 틀 등을 대입해서 풀어보면 되겠지요?
26절을 보시면 ‘내가 그로라’라는 어구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이 메시아,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하니까 주님께서 ‘내가 메시아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주님께서 처음으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밝히시는 장면입니다. 그 어구를 헬라어로 보면 ‘에고 에이미’입니다. 영어로는 ‘I am'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지요? 'I am who I am' 하나님께서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가르쳐 주신 당신의 이름입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지칭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주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I am'이라고 직접 지칭하신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요 8:24) “24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주님께서 너희는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라고 경고를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에고 에이미‘’I am'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요 8:28) “28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 8:30) “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여기도 주님의 이름이 ‘에고 에이미’로 드러납니다. 그렇게 ‘에고 에이미’라는 주님의 이름이 들려지자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요 8:58)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하시니”
(요 18:4-6)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주님께서 주님을 잡으러 온 유다와 군대에게 ‘에고 에이미’라고 당신의 이름을 말씀하시자 그 하나님의 이름 앞에 유다와 군대가 나가 떨어졌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난 곳에는 마치 그 이름이 무슨 힘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고대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신의 이름 속에는 그 신의 성품과 속성이 들어 있고 그 신이 인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약속이 들어 있고 또 그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파워가, 권능이 실제로 들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이유에서 신들이 자신의 이름을 잘 안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기자들은 병자가 낫고 표적과 기사가 일어날 때 그 것들이 주님의 이름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고 기록을 했던 것입니다.
(요 20:31)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행 3:6)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 3:16)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 4:30)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이렇게 고대 히브리 사람들의 사고 속에는 신의 이름이 바로 그 신의 성품이며 속성이며 그 신의 약속이며 약속을 이루시는 능력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무엇이라 말해야 합니까?’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본 것은 단순히 그가 하나님의 이름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이제 당신이 나와 내 민족에게 약속을 해 주고 능력을 발휘해서 그 약속을 이루어 달라는 부탁’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최초의 수신자였던 이스라엘과 초대교회 교인들의 그러한 사고의 틀과 인식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되어지는 곳에서 실제로 하나님의 능력이 보여 지는 사건을 일으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최초 수신자였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이 ‘에고 에이미’로 선포된 이후에 그 여인이 변화가 되어 물동이까지 버려두고 주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선포된 곳에는 반드시 주님의 능력과 약속의 실행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그 여인이 변화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었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이 ‘에고 에이미’로 밝혀지고 그 여인이 변화를 받아 전도자가 된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으로 그 여인이 구원을 받아 거듭나게 된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러한 성경의 최초의 수신자들의 관습과 사고방식에 대한 배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성경의 해석이 용이하지 않은 부분들이 더러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그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복음에 의한 최초의 회심 자가 나오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지금까지 그녀가 관심이 있었던 이 세상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그릇인 물동이마저 팽개친 채로 복음을 전하러 마을로 달려갑니다.
그 동안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의해 자신의 과거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남의 눈을 피해 대 낮에 물을 길러 나와야 했던 그녀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녀에게서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없어졌습니다. 자신의 그 부끄러움은 메시아가 다 지고 가셨다는 확고한 복음의 말씀이 그 속에 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다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온 구원 얻은 성도들은 자신의 처지로 인해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스스로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쌓아두었던 세상의 가치들을 초개처럼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소와 쟁기를 버려두고 따랐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물과 세리의 책상을 버려두고 따랐던 것도 기억나시지요?
아프리카 선교의 주역이었던 씨티 스터드나 모라비아 형제단을 창설한 진젠도르프 백작은 백만 장자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로 했을 때 그들의 전 재산을 교회에 헌금을 했던 것은 아주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냥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 목회도 하고 선교도 하고 하면 안 되나요? 왜 그 분들은 당시로서는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많은 재산을 스스로 포기를 했을까요? 그 분들은 그 후에 WEC선교회와 모라비아 형제단을 창설을 해야 했기 때문에 분명히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선교회를 창설할 때 필요한 자금은 성도들의 헌금과 여러 단체들의 기부금으로 충당을 했습니다. 자기들 재산을 그냥 갖고 있다가 나중에 필요할 때 썼으면 번거롭지 않고 좋았을 텐데 왜 자기들 돈은 전부 헌금을 해 버리고 선교에 필요한 재정은 다시 모아서 썼을까요?
그 분들의 책을 읽어보면 그들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아프리카로 또 다른 선교지로 떠나려 했을 때 자신들이 갖고 있던 재산 때문에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재산을 두고 떠나게 되면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치게 되면 그 재산을 향해 발길이 돌려질 것 같아서 아예 처분을 해 버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자금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어 썼다는 것입니다. 그게 쉽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재산과 힘을 한 번에 놓아버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의 힘만이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재산을 다 버리고 함께 거지가 되자는 말은 아닙니다. 적어도 그러한 세상의 힘에 지배당하면서 살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이해한 사람들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나라의 소망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지 않습니다.
(마 13:44)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잃는다 해도 그 천국 소망을 절대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 ‘너 정말 그러니?’하고 테스트를 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건강도, 재산도, 가정의 행복까지도 거둬가 버리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보임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하나님과 세상 앞에 입증해 내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30절을 보세요.
(요 4:30-34)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32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 대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렇게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받은 마을 사람들이 주님께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주님의 제자들이 양식을 갖고 도착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음식을 드리면서 ‘선생님 드세요’하고 권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했던 똑같은 뉘앙스의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육신의 굶주림을 해결해 줄 음식을 갖다 드리고 ‘드십시오’했더니 주님은 그러한 세상의 음식이 아닌 다른 음식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마치 이 땅의 생수를 찾던 여인에게 영원한 생수를 말씀하시듯 이 땅의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하늘의 양식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양식은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며 그 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 명확하게 그리스도인의 양식에 관해 정의를 해 주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행하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요 6:38-40)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우리 주님의 양식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려내라고 하신 그 분의 백성들을 살려내는 일을 완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은 십자가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에 나오는 ‘온전히 이루다’라는 단어가 ‘테텔레스타이’입니다. 그 단어는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과 정확하게 같은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양식이 될 수 있나요?
양식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 정말 주님께 힘이 되는 양식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아버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그 성부 하나님이 누구 신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 분이 시키시는 것은 모두 옳으며 선한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시키시는 일을 하는 것은 선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셨기에 비록 그 분의 명령이 ‘십자가’였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께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히 12:2)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은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텔레이오테스’역시 ‘테텔레스타이’의 파생어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양식으로 삼고 사는지 때때로 시험을 하십니다.
(신 8:2-3)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광야 길을 허락하신 이유가 사람은 떡으로 양식을 삼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진짜 힘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 광야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께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여러분이 정말 이 세상의 양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힘을 얻고 행복해 하고 기뻐하실 수 있는 성도인지 확인하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십시오. 주님은 그렇게 당신의 양식에 관해 말씀을 하신 후에 히브리 잠언을 사용해서 제자들에게 임박한 종말을 알리시고 그들을 주님의 동역 자로 부르십니다.
(요 4:35)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른다‘라는 어구는 히브리 잠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추수하는 일의 긴급함과 긴박성을 알리시기 위해 히브리 잠언을 사용하셔서 이 세상의 추수와 영적 추수를 비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추수로 비유해서 말씀하신 곳이 여러 곳 있습니다.
(마 3:11-12) “11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13:29-30)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 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지금 그 상황을 잘 그려보세요. 사마리아 여인이 마을에 가서 ‘메시아가 왔다‘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주님께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요 4:28-30)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러한 광경 속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라 밭이 희어져 추수할 때가 왔다‘ 그러니까 지금 추수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인 것입니다. 이제 선민이라 자처하던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본문 42절에 ‘세상의 구주’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만의 구주가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에게 열려진 구원의 완성 자 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6절 이하를 보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추수 꾼으로 부르십니다. 제자들은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이 세상 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영의 양식을 말씀하시는 데 ‘누가 선생님께 먹을 것을 갖다드렸나?’라고 갸우뚱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미련한 제자들을 추수 꾼으로 부르십니다.
(요 4:36-38)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36절을 보시면 거두는 자들이 나오는데 그 거두는 자들이 이미 삯을 받았다고 나옵니다. 원래 인부의 삯은 일이 끝난 후에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삯을 주었다는 것은 거두는 일이 이제 너무 긴급한 상황에 이르렀기에 미리 삯을 주어야 할 정도로 긴박해 졌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36절을 보시면 뿌리는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거두는 자들은 제자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왜 주님께서 심으셔 놓고 아무 자격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은 성도들에게 거두라고 하십니까? 그 이유가 36절입니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함께 즐거워하게 하려고‘
주님은 당신께서 뿌려놓은 씨의 열매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거두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과 주님의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선교나 전도는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뿌려놓으신 알곡들을 거저주워 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통해 기쁨을 얻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으로 우리에게 오는 기쁨은 가히 우리의 양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지요? 복음을 전하다보면 육신 적으로는 참 힘이 드는데도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있어요.
그러한 거둠의 기쁨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것인지가 37절과 38절에 나옵니다. 저는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 중에서 이 구절이 가장 핵심적이 요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37절에 보면 주님께서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말이 사실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자신을 ’당신의 백성들 대신에 저주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시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에서 인용된 말씀입니다.
(신 20:3-7) “3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날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인하여 놀라지 말라 4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시는 자니라 할 것이며 5 유사들은 백성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새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치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6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7 여자와 약혼하고 그를 취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취할까 하노라 하고”
새집을 짓고 자신이 그 집을 취하는 것, 포도원을 만들고 자신이 그 열매를 거두는 것, 여자와 약혼하고 그 여자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의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게 되면 벌이 내리게 되는데 그 벌이 이러합니다.
(신 28:30-35) “30 네가 여자와 약혼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이 잘 것이요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며 31 네 소를 네 목전에서 잡았으나 네가 먹지 못할 것이며 네 나귀를 네 목전에서 빼앗아 감을 당하여도 도로 찾지 못할 것이며 네 양을 대적에게 빼앗길 것이나 너를 도와 줄 자가 없을 것이며 32 네 자녀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종일 생각하고 알아봄으로 눈이 쇠하여지나 네 손에 능이 없을 것이며 33 네 토지소산과 네 수고로 얻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하는 민족이 먹겠고 너는 항상 압제와 학대를 받을 뿐이리니 34 이러므로 네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하여 네가 미치리라 35 여호와께서 네 무릎과 다리를 쳐서 고치지 못할 심한 종기로 발하게 하여 발바닥으로 정수리까지 이르게 하시리라”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자기 약혼자를 다른 이가 빼앗아가고, 소를 잡아도 다른 사람이 그 소를 먹으며, 자녀들도 다른 이들에게 빼앗기고, 토지의 소산도 알지 못하는 민족이 와서 다 빼앗아 갈 것이라는 저주가 내려집니다. 여러분, 이 신명기의 저주가 누구에게 내려진 것입니까? 우리 주님께 내려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심으시고 주님께서 거두셔야 하는데 주님은 우리의 부끄러움과 불순종이 되셔서 자신이 심으시고 수고하시고 노력하셔 놓고 그 소산을 우리에게 거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혼인 잔치 집의 포도주가 되셔서 잔치를 잔치답게 회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달려야 할 그 저주의 자리에 우리 주님께서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러한 주님의 공로와 은혜를 알고 있다면 우리가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해서 어떤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을 때 어떻게 고개를 쳐들고 자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거룩하다 거룩하다’하면서 면류관을 벗어 주님께로 돌려 드리는 천상의 24장로의 모습처럼 우리도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일을 맡기심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거두는 기쁨에 동참 한 것만으로도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해야지요. 마지막으로 40절 이하를 보시면 사마리아 사람들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되는데 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오게 되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요 4:40-42)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에 전도자의 지혜나 전도자의 언변이나 전도자의 학식이 도움이 된다고 하나요? 예수의 말씀을 친히 듣고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결국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목사의 설득이나 권고가 되면 사람들은 감동은 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 올 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의 설교나 전도자의 전도는 어설픈 예화의 나열이나 감동적인 체험이나 간증을 곁들인 그러한 비빔밥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진의만을 차근차근 풀어서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능력이 되어 사람을 바꾸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는 것도 주님이 하시는 것이고 거두시는 것도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거두는 기쁨에 동참시켜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에 의해 거두는 자로 세우심을 받는 것뿐이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루시고 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 앞에 부복하며 나를 위해서만 살던 그 이기적인 삶에서 돌이켜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살다보면 거기에서 오는 영의 양식과 즐거움이 우리를 강권하여 계속해서 그러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도 물동이를 버리고 주님을 자랑하고 싶어 못 견뎌 뛰어 갔던 사마리아 여인처럼 여러분이 힘으로 여기고 있었던 이 세상의 물동이를 던져 버리시고 주님의 말씀을 좇아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삶을 경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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