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과 아벨과 셋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
(김성수 목사)
(창 4:1‐9-25) “1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와가 말하였다. "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 2 하와는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고, 가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3 세월이 지난 뒤에, 가인은 땅에서 거둔 곡식을 주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바쳤다. 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셨으나, 5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반기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몹시 화가 나서, 얼굴색이 변하였다. 6 주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색이 변하는 까닭이 무엇이냐? 7 네가 올바른 일을 하였다면, 어찌하여 얼굴을 펴지 못하느냐? 그러나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하니,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8 ○가인이 아우 아벨에게 말하였다. "우리 들로 나가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9 주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였다. 마침내,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가인에게 죽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나에게 허락하셨구나" 하였다. 그의 아내는 아이의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다.”
오늘은 교리부분을 다룰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시고 들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심판 속에 꽃 피는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창세기 3장을 마무리했습니다. 그 설교가 방송에 나간 후에 많은 임산부들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창세기 3장의 대 주제는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는 화염검과 그룹들로 막혀진 생명나무실과로 향하는 길을 보면서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저주받으심과 죽으심으로 열리게 되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무죄한 상태로 생명나무실과를 먹게 될 것이라는 회복의 메시지를 보았고, 잉태하는 고통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저주 속에서도 해산의 고통을 통과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귀(回歸)를 보았습니다. 그렇게 축복의 장소였던 동방이 하나님이 떠나시자 저주의 땅으로 둔갑을 해 버렸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다시 그 저주의 땅에서 쫓아내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내신다는 회복의 메시지가 창세기 3장안에 숨어서 흘러넘치는 복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확인을 했습니다.
이제 4장부터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화염검과 그룹들을 통과하여 생명나무실과를 먹게 된 하나님의 백성 즉 여인의 후손의 라인과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떠나간 뱀의 후손들의 삶이 구체적으로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 친밀하게 간섭하시며 한 쪽은 저주의 땅으로 몰아가시고 한 쪽은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또한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구속사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수많은 아담의 자손들 중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시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대표들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아담과 하와는 거의 천 년을 살았습니다. 그 둘은 천 년을 살면서 계속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창 5:4‐5) 4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5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4절의 자녀를 ‘낳다‘’야라드‘라는 히브리어 동사가 와우 계속 형입니다. 그 말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수학자가 아담과 하와가 평생 동안 낳은 자식들과 그 후손들의 자녀들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보니 아담이 죽을 때쯤의 전 세계 인구가 10억 명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아의 홍수 때는 전 세계인구가 거의 20억에 육박했을 것이라 발표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사람들의 수명이 거의 천 년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인구 증가율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람은 많은데 죽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가인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유리 하는 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면 어떡합니까?’라는 질문을 한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질문이 되겠지요? 많은 분들이 ‘가인과 아벨 당시의 인구가 달랑 네 명이었는데 또 누가 가인을 죽인단 말인가?’하는 질문을 갖고 계신 것 같은데 그 질문은 우문(愚問)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아담의 후손 가운데 신앙의 대표자와 불신앙의 대표자로 섰던 것이지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구의 인구가 달랑 네 명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구백삼십 년을 살았고 가인의 동생인 셋도 구백 십 이년을 살았으므로 가인도 천 년 가까이 살았을 것이기 때문에 가인은 아벨을 죽인 이후에도 수억의 친지들과 함께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자기를 죽일까봐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아담의 후손들 중에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이 하나님께 선택이 되어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아담의 자손들 중에서 선택을 하신 가인과 아벨을 통해 교회에게 전하시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절을 보세요.
(창 4:1) “1 아담이 자기 아내 하와와 동침하니, 아내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았다. 하와가 말하였다. "주의 도우심으로, 내가 남자 아이를 얻었다."
동쪽인 저주의 땅으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동침을 하여 아이를 낳습니다. 첫 아이가 ‘가인’이라는 아이입니다. 가인을 낳은 하와는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개역 성경의 번역을 보면 마치 하와가 ‘여호와의 도움으로 내가 아들을 낳았다’라고 감사의 고백을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히브리 원어로 보면 ‘말미암아’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I have got a man the Lord''내가 여호와 그 분을 얻었다’라는 뜻이 됩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언뜻 보면 이해가 잘 안가는 구절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얻었다는 말처럼 보이지 않으세요? 그래서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이 이 구절을 곡해해서 임의대로 ‘말미암아‘’from'의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민’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내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얻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원문 그대로 번역을 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말은 ‘내가 하나님을 낳았다‘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여호와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 메시아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창세기 3장 15절과 연결해서 이해를 해야 하는 구절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첫 아들을 낳자마자 그 아이가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하신, 자신들을 구원해 줄 여인의 후손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그 맏아들은 여인의 후손의 라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개념 정리를 해 드리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계속해서 여인의 후손이라는 단어와 뱀의 후손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쓸 텐데 여러분이 그 개념을 잘 정리를 하고 계셔야 설교의 이해가 용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인의 후손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뱀이(사단이) 여인의 후손(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물고(십자가)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뱀의 머리를 밟으신 여인의 후손 안에 한 무리가 들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따라서 여인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있던 교회, 즉 성도도 ‘여인의 후손’이라 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시는 분이 계신 것 같은데 조금 더 이해하시기 쉽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창 15:4‐5) 4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5 주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리고는, 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에게서 날 약속의 자손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하늘의 뭇 별들을 보여주십니다. 그에게서 날 약속의 자손 즉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가 그만큼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손‘’제라‘라는 단어가 단수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후손을 자손들이라고 복수를 쓰지 않으시고 ’제라‘라고 단수로 쓰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별처럼 많은 아브라함의 후손은 단 한 명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신약에서 이 구절을 설명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구절의 진의를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갈 3:16) “16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을 하여 주실 때에,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자손들에게'를 쓰시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너의 자손에게'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창세기 15장 5절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한 명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손 안에 뭇별처럼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도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 영적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창세전에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는 하나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인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 들어 있는 교회를 지칭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여인의 후손’으로 혼용하여 부르더라도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union christ의 개념은 오늘 설교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을 낳고 그 아이가 여인의 후손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맏아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여인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크게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아들 이름을 ‘아벨’이라 지은 것입니다. ‘아벨’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하벨’은 ‘nothingness' 혹은 'vanity'라는 뜻입니다. 전도서에 나오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에 쓰인 ’헛되다’가 바로 ‘하벨’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기대 속에서 가인을 낳은 후에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잘 드러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아무 것도 아닌 자인 ‘아벨의 제사’를 열납 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은 그 아벨이 타락 후 둘로 갈라지게 되는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중 바로 여인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라인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장남과 차남이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여인의 후손의 그림자로 등장하는 아벨이 가인보다 무엇을 대단하게 잘 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단지 다른 것은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고 아벨은 양을 죽여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 부분을 가리켜 아벨은 피가 있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열납 하신 것이고 가인은 피가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열납 하지 않으신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은 제사를 드리는 자의 제물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는 결론이 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우리 인간 측에서의 그 어떤 것도 근거나 조건으로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가인이 유기 되고 아벨이 선택을 받은 것은 그들이 드린 제물의 내용 때문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아벨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히 11:4) 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이 의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의인이 된 것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성경은 믿음이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엡 2:8)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니까 아벨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지 그의 제물이 특별해서 혹은 그 사람이 뭔가 다른 이들과 달라서 하나님이 그의 제사를 열납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요일 3:12) 12 우리는 가인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자기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가 동생을 쳐 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했는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가인은 악한 자에게 속해서 악한 일을 한 것이고 아벨은 선한 분에게 속해서 의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제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아벨을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 4장에 벌써 'unconditional election'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 선택과 유기의 교리를 잘 설명해 줍니다.
(롬 9:10‐16) 10 그뿐만 아니라, 리브가도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수태하였는데, 11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지속되게 하시며, 12 하나님의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3 그것은 기록된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14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16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바로 이 로마서의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창세기 4장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인간 측에서의 어떠한 공로나 노력이나 열심도 하나님께 구원의 근거로 드려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타락을 하고 저주의 지옥을 향해 달음박질하고 있을 때에 그 들 중 어떤 자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장 중(掌中)으로 끌어올리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남은 자’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사 10:20‐23) “20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저주의 땅인 동쪽으로 쫓겨난 자들 중에 그룹들과 화염검을 통과하여 다시 생명나무실과로 돌아오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 이후에 그 남은 자의 첫 번째 모델로 바로 오늘 본문의 아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전부 저주받은 ‘가인’이어야 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같이 다 저주의 땅 동쪽으로 쫓겨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으로 대표되는 그 저주받은 인간들이 드리는 어떤 것도 열납 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열납 하지 않으셨다‘라는 단어는 ’쳐다보지도 않으셨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신들이 왕이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을 쳐다보지도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하늘을 소망하는 자들이 아니고 땅을 섬기고 땅에 노예가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가인을 ‘농사짓는 자’라고 표현을 했는데 그 단어를 원어로 보면 ‘아바드’ ‘땅을 섬기는 자’ ‘땅의 노예가 된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땅에 목매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거들떠보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아벨’이라는 남은 자가 생명나무실과를 먹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을 하자마자 즉시 당신의 백성들을 건져 올리시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남은 자의 이야기를 이렇게 창세기부터 시작하셔서 요한계시록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까지 점진적으로 설명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인의 후손, 즉 남은 자들을 남겨 가시는 방법이 조금 특이하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쪽에서 기대하고 내어놓는 장자들을 모두 물리시고 기대치 않던 자들을 택해서 남겨 가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담과 하와의 기대를 잔뜩 안고 태어난 장남인 가인을 유기 시키시고 그 부모가 ‘nothingness, vanity'라는 이름을 지을 만큼 기대와는 거리가 먼 ’아무 것도 아닌 자‘’아벨‘이 여인의 후손의 라인으로 등장을 하지요? 뿐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도 장자인 이스마엘이 유기 되고 차자인 이삭이 선택을 받습니다. 이삭의 자손은 어떻습니까? 장자인 에서가 유기 되고 차자인 야곱이 선택을 받습니다. 야곱과 에서를 비교할 할 때 야곱은 에서에 비해 훨씬 유약하고 사기성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뱃속에서부터 선택을 하셨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러시는 것 같지 않으세요? 야곱의 자손은 어떻습니까? 장자의 명분이 누구에게 돌아가지요? 르우벤은 서모를 범했기 때문에 장자 권을 박탈당하지요? 따라서 그는 아닙니다. 그럼 누구입니까?
(대상 5:1‐2) “1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장자 권은 요셉에게 넘어갔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유다와 레위, 그리고 요셉에게 장자 권이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창세기 49장을 강해할 때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야곱의 자손들 중에서도 장자가 아닌 기대치 않았던 사람에게 장자 권이 넘어갑니다. 요셉의 자손은 어떤가요? 야곱이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에게는 좌수(左手)를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우수(右手)를 대고 안수를 합니다. 역시 장자 권이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넘어갑니다. 다윗은 어떤가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장자입니까? 이새의 막내입니다. 워낙 어리고 볼품없어서 전쟁터에도 못 나가고 형들 도시락 배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형이 없었나요? 나단과 압살롬이라는 형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여인의 후손의 라인에 장자들이 선택되지 않고 마치 의도적인 것처럼 기대치 않던 사람들이 선택이 될까요?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생각하는 방법을 깨는 모습으로 온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인간들은 구원에 관한 한 절대 기여할 수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다는 것을 교회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에 인간의 행위가 보태져야 한다는 알매니안 주의자들은 창세기부터 다시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부분을 고린도서에서 이렇게 풀어서 설명을 해 줍니다.
(고전 1:26‐29) “26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9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지지리도 못난 사람들만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 측에서의 어떠한 열심이나 공로도 구원의 근거로 택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과 유기의 교리가 오늘 본문인 창세기에 벌써 이렇게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장자들은 유기 해 가시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첫 것들을 당신께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출 22:19,29‐30) “19 무릇 초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 양도 다 그러하며 29 너는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을 드리기에 더디게 말지며 너의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30 너의 소와 양도 그 일례로 하되 칠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 만에 내게 줄지니라”
(출 34:26) “26 너의 토지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이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은 식물이건 동물이건 사람이건 간에 첫 것들을 제물로 받으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물의 개념에 대해서도 잘 정리를 하고 계셔야 합니다. 제물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대신해서 죽는 희생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드려지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거룩한 것‘의 의미도 그 내용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물이라는 것은 더러운 것들과 대조적으로 하나님께 열납 되어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세요. 그 분은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의 제물이었지만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있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은 예수님처럼 단순히 희생만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점도 없고 흠도 없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것을 내게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죽여서 태우라는 명령이 아니라 그 것들만 내가 받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처럼 점도 없고 흠도 없어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자들이 또 생겨났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우리 성도들에게 ‘너희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권면을 합니다. 그 말은 우리도 이제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제물로 거룩하고 새롭게 창조가 되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가 그렇게 거룩하고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지요? 진정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살아 난 자들임과 동시에 그렇게 새롭게 살아남으로 해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시겠다는 첫 것들,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물의 자격을 갖추게 된 성도들을 함께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시 union christ 의 교리가 적용이 되지요? 알기 쉽게 레위 지파를 예로 들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민 3:12‐13) “12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3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보시는 것처럼 레위 지파는 애굽에서 나올 때 살려 주신 장자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지파입니다. 그 말은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을 살려준 어린 양 즉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 바쳐진 모든 성도, 즉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지금 민수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장자들을 모두 내게 바치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고대 사회에서 장자의 개념은 남자를 대표하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한 가정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장자와 첫 것들을 모두 달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을 전부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모두 다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꼼짝 말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바쳐진 지파가 레위 지파이지요. 이렇게 레위 지파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께 드려진 하나님의 교회를 함께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장자를 모두 바치라는 명령을 하신 것은‘나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나의 진정한 장자 예수 그리스도만을 받을 것이다. 오직 나의 장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장자에 의해 그 장자 속에서 새롭게 살아난 또 다른 장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이 바로 창세전에 내가 택한 교회이다. 그들도 내 아들 예수로 말미암아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장자들이 되었으므로 나는 나의 택한 백성들인 교회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건질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명령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첫 것들, 장자들을 자기 것으로 받으실 것이라면 애초부터 첫 것들을 유기 시키실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유기 시키시고 첫 것들을 받으셨어야 지요. 그 첫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고 성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첫 것들을 유기하지 마시고 받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하나님은 인간 측의 장자를 안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작정 속에서 유기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처럼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장자들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일견 모순인 듯 보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인간 측에서 준비하여 내어놓는, 인간의 기대가 걸린 장자가 아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장자를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을 흡족하게 만족시킬 수 있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장자는 따로 있다는 것이지요. 그게 예수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하나님께 드려지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이 이 땅에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제 저녁 교회에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우리 아이들이 차 창문을 열고 장난을 치는 바람에 경찰한테 티켓을 끊었습니다. 아이들이 seat belt도 안 매고 차안에서 장난을 쳤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잘못이지만 제가 티켓을 끊으므로 그 아이들의 잘못이 사해진 것입니다. 저는 아무 잘못 없이 티켓 값도 지불해야 하고 보험료도 더 많이 내야 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겁을 좀 줬습니다. ‘너희들 때문에 이제 아빠 큰일 났다. 이 티켓 값이 얼마인 줄 알아?’ 그랬더니 집에 와서 둘째 아이가 슬그머니 제 옆에 무얼 놓고 갔습니다. 보니까 자기가 그 동안 모아 둔 동전들을 다 가져다 놓았습니다. 75전이었어요.
만일 우리 아이가 그 75전을 갖다 놓으면서 ‘이 정도면 아빠한테 큰 도움이 되겠지요?’라는 마음으로 가져다 놓았다면 그건 아빠를 조롱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기가 애써 모은 것을 갖다놓으면서 ‘아빠 내가 내 힘으로 어떻게 아빠가 지불한 것을 다 갚겠어요. 그러나 그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이거라도 기쁘게 보태고 싶어요‘라고 가져다 놓았다면 그건 참 기특하고 대견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께서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는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다른지 아시겠지요?
정리를 해 보면 하나님은 인간들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준비해서 내 놓은 장자들은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장자들을 유기 시키시고 기대치 않은 자들을 선택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장자만을 받으십니다. 헌데 그 장자는 인간이 자랑삼아 내어놓을 수 있는 인간 측에서 만들어 낸 장자가 아니라, 다른 말로 인간의 노력을 근거로 한 장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장자가 바쳐짐으로 해서 태어나게 된 예수의 형제들인 또 다른 장자들만을 받으시겠다는 것이 바로 장자들, 첫 것들을 바치라는 어구의 진의(眞意)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의인으로 등장하는 아벨이 바친 제물이 ‘양의 첫 새끼’인 것입니다.
여기서도 한 가지 주의하셔야 할 것이 있는데 그 것은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드렸기 때문에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믿음을 선물 받은 의인이었기에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진정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장자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이 첫 새끼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는 구원의 조건이나 근거가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이해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가시지요? 그러면 히브리서의 진술대로 정말 아벨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맞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 23:34‐35) “34 그러므로 내가 예언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율법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너희는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뒤쫓으며 박해할 것이다. 35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보시다시피 성경은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린 사람일 뿐 아니라 의인이었으며 선지자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무엇을 증거 하던 사람입니까?
(롬 3:21‐22)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선지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로 받아서 죄인들의 죄를 지적하고 죄인들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함을 선포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선포하던 이들을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이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이미 아담 때부터 당신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계셨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벨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삶을 살았는지 오늘 본문 속에서 찾아보도록 하지요. 먼저 아벨의 이름인 ‘하벨’은 ‘nothingness, vanity'입니다. 성경에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처럼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분이 계시지요?
(사 53:2‐3)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 모습이 바로 ‘아벨’ ‘nothingness, vanity'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하벨‘의 모습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에게 살해를 당했습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처하던 유대인들에게 살해를 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열심히 드리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다가가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드러내시는 의인이신 주님을 살해해 버린 것입니다.
가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가인은 자신이 드리는 제사의 행위와 제물로 다른 말로 이 세상의 것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혹시 이 중에 ‘그게 뭐 나쁜 일인가? ‘하고 의구심을 품으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어떤 행위나 인간이 드리는 어떤 제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어떤 것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것을 ’자기 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눅 18:11‐12)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들의 열심을 보십시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삶 속에 토색, 불의 , 간음, 사기가 없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고 십일조를 한 번도 빼먹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아주 엄격하게 지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했습니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나를 보고 죄인이라고 하느냐?’는 불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행위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이 바치는 제물이나 예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백성들의 삶과 그들의 제물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나는 죄인이고 하나님께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입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처분에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처분이 다소 이해하기 힘들고 원망스러워도 하나님께 대들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하나님께 해 드린 것이 없고 앞으로도 해 드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 속에서 나오는 거룩한 삶과 행위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나의 옛 사람이 죽어가며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매가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 것을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행위를 우습게 여기고 무시하는 예수님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내 행위를 값없다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누구와 똑같아요? 가인과 똑같지요? 오늘 본문의 가인이 정확하게 예수님을 살해한 세상의 무리들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인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세요.
(창 4:5)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 하지 아니하신 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설사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안 받으신다하더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내가 나의 것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드리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열납 하지 않으시자 심히 분해합니다. 그리고 안색까지 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하는 자들과 세상의 것들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는 자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모습으로 이 땅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의 후손을 대표하는 자의 이름이 ‘아벨’'아무 것도 아닌 자‘인 것이고 그가 세상에게 살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이 분명 아벨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예표였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히 12:24) “24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께 나아왔고,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그가 뿌리신 피 앞에 이르렀습니다.”
아벨의 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의 죽음은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을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드린 제사가 온전한 제사였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성막을 공부할 때 살펴보았듯이 일 년에 한 번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제사를 올릴 때 그 제사가 조금이라도 부정하거나 흠이 있는 제사이면 제사장은 그 지성소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제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제사였을 때 대 제사장은 그 지성소를 살아서 나올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이신 예수가 자신을 제물로 드려 대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신 것이 그 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온전하게 드리시고 살아나셨습니다. 그게 부활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볼까요?
(창 4:25)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여기서 ‘대신에‘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쉬트‘는 ’두다, 임명하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의 그림자로 왔던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셋‘은 죽은 여인의 후손의 재등장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과 셋의 이야기는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이 역사 속에 나타나는 성도들의 십자가의 삶과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세상의 힘의 원리에 맞아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지만 바로 그 삶이 ‘셋’으로 부활하는 삶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아벨을 선지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삶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렇게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아벨과 같이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늘 가인이라는 세상의 공격에 노출이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21세기의 가인들에게 늘 맞아 죽는 모습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여러분을 때려죽이려고 눈을 부릅뜨고 달려듭니다. 그 때 죽어 주세요. 져 주십시오. 그런데 성경은 그게 부활이라고 합니다. 맞아죽은 아벨 대신에 셋이 탄생했습니다.
세상에게 맞아 죽은 자들의 삶을 밖에서 보면 사랑이요, 인내요, 온유요, 절제요, 용서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서의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탄생하게 될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 사람 ‘셋‘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에게 맞아죽은 우리의 죽음 뒤에 영광스러운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정말 부활을 기다리십니까? 부활을 하려면 죽어야지요. 나의 옛 사람의 죽음이 없이 어떻게 부활을 기대하십니까? 다 같이 이번 주도 열심히 죽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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