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속에 꽃피는 구원
(김성수 목사)
(창 3:8,16‐24) “8 ○그 남자와 그 아내는,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16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17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18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20 ○아담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하였다. 그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21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22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23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 24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우리는 지난주에 타락의 결과로 인간들에게 나타난 변화와 인간들에게 주어진 저주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첫 번째가 영적인 파탄이었고 두 번째가 지적 능력의 파탄이었습니다. 세 번째가 심리적 파탄이었고 네 번째가 사회적 파탄이었습니다. 다섯 번째는 육체적 파탄이었고 여섯 번째가 환경의 파탄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완성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고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모든 파탄의 현장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것을 우리가 구속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구속사가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서 인간들에게 보여 지는 부분을 우리는 인류의 역사라고 부릅니다.
그러한 구속사 속에서 인간이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스스로 해 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잠시도 살 수 없음을 증명해 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아, 어서 항복하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돌아오라’ 그게 성경과 역사가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남자와 여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내었다면 이 땅에서 지상의 낙원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억측은 어서 지워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왜 달팽이나 히드라처럼 암수한몸으로 만드시지 않고 굳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을까요?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통해 인간들 스스로는 절대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없음을 증명하시고 그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담고 있고 그 역할의 표면에 나타나는 내용을 바탕으로 진정한 남편, 남자는 하나님이셔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에게 자신을 의뢰하는 여자요 신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앞서 설명해 드렸다시피 우리 성도들의 진정한 돕는 배필은 하나님이십니다.(보혜사) 그리고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은 남자, 즉 남편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영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히려 남자가 여자를 도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남자이고 성도가 여자니까요. 생각을 해 보세요. 남자인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선악과와 생명나무실과에 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자는 그 후에 생겨났고 아담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남자인 아담은 생명나무실과를 먹고 여자인 하와에게 그 생명의 씨를 전해야 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실과를 먹고 영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여자는 다소곳이 남자의 도움을 청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자인 아담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스스로 생명나무실과를 따먹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결론이 나옵니까? 남자든 여자든 모든 인간은 진정한 남자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여자의 자리에서 다소곳이 기다려야 했던 것입니다.(여러분은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신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의 의미를 확실하게 배우고 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는 마귀의 속임에 넘어가서 그렇게 되면 자신이 정말 남자를 도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실수를 저질렀고 남자 또한 하나님 절대 하위의 자신의 신분을 잊고 여자의 미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절대 스스로를 도와 영화로운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이 땅에서 남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부 어떤 내용이라고 했지요? ‘인간들아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너희의 삶을 의뢰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너희는 속히 너희가 앉아 있는 그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나에게 항복하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어떠한 것인지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게 성경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든 인간들은 남자의 도움을 기다리는 여자로 이 역사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 난 당신의 도움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수가 없다는 온전한 고백을 하게 될 때 진짜 신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치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여자 혹은 신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남자라는 역할을 주시면서 ‘너희가 정말 여자를 이끌고 도와서 영생에 도달 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확인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자는 두 말할 것도 없고요. 오히려 저승사가가 되어 남자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인간들에게 맡김으로 모든 인간은 불가능하고 절대 의존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 속에 그러한 구속사의 이야기를 힌트 하시며 담아 놓고 계십니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 속에 어떻게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가 내용으로 담겨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역사 속의 남자들은 그들 안에 생명의 씨를 소유하고 있는 존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의 씨를 여자에게 주어서 여자가 생명을 잉태하게 되는 메카니즘이 그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남자의 역할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 분의 백성들에게 어떠한 일을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을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실과를 따먹고 여자에게 그 씨(하나님의 생명)를 주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는 아담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렸을 때 아담은 여자에게 생명의 씨를 전해주기는커녕 함께 죽음 속으로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 말은 모든 인간 중에 누구도 다른 이에게 생명의 씨를 전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남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씨를 받아야 하는 여자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모든 인간들은 남자를 기다려야 하는 여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이신 하나님은 남편을 기다리는 열 처녀를 모두 신부로 맞으시지 않고 그 중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남편이 보이지 않아도 남편이 온 것처럼 믿음을 갖고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을 신부로 맞으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도 남편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남편이 주시는 믿음을 소유한 진짜 신부들은 이 땅에서 남편이 오신 것처럼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반복적으로 성도들을 남편을 기다리는 신부로 표기를 하는 것입니다.
(고후 11:2) “2 나는, 하나님께서 질투하심과 같이, 여러분을 두고 질투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오직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리스도와 정혼을 시켰습니다.”
(계 21:2,9) “2 나는 또,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9 ○일곱 천사가 마지막 때에 일곱 재난이 가득 담긴 일곱 대접을 가졌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이리로 오너라. 어린 양의 아내인 신부를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그렇게 해서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생명의 씨를 받은 신부는 비로소 생명의 씨를 소유하고 그 생명의 씨를 다른 이에게 전해줄 수 있는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신부라고도 표기하지만 ‘아들’이라고도 표기를 하는 것입니다.
(롬 8:14)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렇게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의 씨를 받아먹고 살아야 하는 신부(여자)로 서는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생명의 씨를 소유한,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을 전해주는 ‘아들’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여성명사인 것이고 아울러 그 여자인 교회를 ‘아들’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의 우리 성도들의 실존은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력을 받아서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신부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을 아직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나머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어야 하는 아들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의 씨를 받은 성도들은 이제 그 씨가 온전한 생명으로 잘 자라나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애를 쓰게 됩니다. 마치 밭에 씨가 뿌려지게 되면 그 밭이 자신의 모든 영양분을 동원해서 그 씨가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돕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생명을 잉태하게 되면 모든 영양분이 그 여자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에게 흐르는 것처럼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를 받은 성도는 그의 옛 사람을 죽여 그 안에 뿌려진 생명의 씨가 온전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옛 사람을 죽여 새 사람을 입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자가 남자의 씨를 받으면 여자의 모든 생체 리듬은 그 안에 잉태된 아이에게로 맞추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가 원하는 음식을 자기도 원하게 됩니다. 그 것을 입덧이라 하는 것입니다.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여자는 이제 아이가 찾는 것을 자신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여자 안에 잉태된 새 생명인 아이가 여자를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새 생명인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조종 받게 됩니다. 여자의 주인이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것을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신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갈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가게 되는 것을 우리가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그러한 변화를 ‘성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임신한 여자들을 유심히 보면 자기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계속해서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말은 생명을 잉태한 여자는 이제 원래 자기가 좋아하고 원했던 음식과 전혀 다른 것들을 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혀 먹어보지도 않고 평상시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심지어 혐오하던 음식까지 먹고 싶어집니다. 옷을 입어도 아이가 편한 것을 입게 됩니다.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은 다 사라지고 오로지 아이를 위한 삶으로 모든 것이 변하게 됩니다.
이렇게 생명을 잉태한 여자는 모든 것을 아이에게 맞추게 되고 아이에게 조종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을 가치관의 변화요 세계관의 변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그렇게 자신 안에 들어 온 새 생명에 의해 가치관과 세계관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새 생명의 씨가 새로운 세계를 몰고 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남을 밟아서 나의 유익을 챙기고 어떻게 해서든 성공해서 남들보다 높은 곳에 오르려는 삶을 살았었는데 이제는 자신을 비워 남의 유익을 구하고, 낮아지고, 겸손하고, 섬기는 삶을 추구할 수 있게 됩니다. 속에 있는 새 생명이신 예수에 의해 그의 삶이 주관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경은 ‘겉 사람이 후패 해 지고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삶’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겉 사람이 후패 해 지고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현상은 결국 씨가(예수의 생명) 여자(옛 사람)를 잡아먹고 결국 하나님의 아들들이 탄생하게 되는 성도의 신앙 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잉태한 여인이 열 달 동안 뱃속의 아이에게 모든 영양분을 다 빼앗기고 열 달 후에 아이를 출산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씨가 여자를 잡아먹고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해산의 고통’이라는 것이 반드시 따라오게 됩니다. 옛 사람인 여자는 원래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만 존재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 온 새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로 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만을 위해 살던 옛 사람 여자의 삶을 주장하기 시작하십니다. 여자 속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거룩과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던 옛 사람 여자가 이제 사랑하고 용서하며 인내하고 온유한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상은 여전히 자신들만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러한 옛 삶에 오염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어찌 쉬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삶을 고난, 고통, 환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고 심지어 그러한 성도의 신앙 여정을 해산의 고통이라고까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딤전 2:15) “15 그러나 여자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보세요. 성도인 여자들은 정절을 지키고 믿음을 발휘하며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게 됩니다. 그게 성도가 신앙생활을 통해 배우고 구현해 내야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그 삶이 마치 해산하는 것처럼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 여자에게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받은 성도는 그 속에 잉태된 생명의 씨에 의해 반드시 그러한 해산의 고통을 방불 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처럼 여자의 삶에서 아들이신 예수의 삶으로 바뀌어 가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력을 공급받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이며 그 분이 나의 주장과 나의 소원과 욕심을 꺾으시고 나에게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나오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이 나의 안에 풍성히 자리 잡을수록 옛 사람 여자가 그만큼 더 많이 죽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성도들은 더욱 더 자신을 비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남자의 삶으로 바뀌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남자답게 강건 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고전 16:13) “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교회야, 성도들아 어서 어서 여자인 옛 사람의 삶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 남자다움을 발휘하라’ 는 말입니다. 이 말의 진의를 이제 아시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 속에서는 자꾸 아들의 삶, 남자의 삶 속으로 성숙되어져 가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산의 고통을 통과하며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과 내 이웃을 위해 낮아질 수 있는 자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진짜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여자, 남자, 신부, 아들 이러한 의미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지 이제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와를 저주하시면서 여자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더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여자들이 해산하는 고통을 통해서 생명의 존귀함을 알게 되듯이 여자인 성도들이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입는 생명의 여정 속에서 해산의 고통을 느끼며 하나님의 은혜아래에서 하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게 하시겠다는 회복의 메시지가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의 삶 속에 해산의 고통과 같은 고난이 없으면 그건 뭔가 이상한 것입니다. 여자들이 아이를 낳으면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지요? 우리는 그 비명을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제 절대 하나님의 은혜의 장 중(掌中)에서 떠나지 않겠습니다’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회복의 메시지는 계속해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는 장면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분명 여인의 후손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그들을 쫓아내실까요? 거기에 하나님의 회복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동산에서 내어 쫓고 그 생명나무실과로 가는 길을 화염검과 그룹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십니다.
(창 3:24)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생명나무실과는 여러분이 익히 아시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게 되면 영생을 하게 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 벌(永罰)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실과는 모든 인간들을 영생과 영벌로 나누는 예수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무죄한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왕 노릇하며 영원하고 영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자가 생명나무실과를 먹게 되면 죄의 결과인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는 상태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경은 그 것을 지옥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굳이 그들을 그 곳에서 쫓아내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무리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어 보냈다. 쫓아내셨다‘라고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강제로 쫓아내셨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나무실과를 없애 버리지도 않으시고 그 나무로 향하는 길도 없애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단지 그 길에 화염검과 그룹들을 두셨습니다. 그 것은 누군가는 반드시 그 길을 통과해서 생명나무실과로 가게 될 것임을 암시해 주고 계십니다. 그룹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은 그 길이 열려있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요 14:3‐6)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당신이 생명이시고 당신이 그 생명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들로 막혀진 생명나무의 그림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리게 될 생명의 길에 관한 은혜의 복음을 미리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숨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성경에서 화염검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사 66:16) “16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 즉 여호와께 살육 당할 자가 많으리니”
불과 칼, 화염검이지요? 성경에서 불과 검은 심판과 저주,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생명나무로 가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로 인한 죽음을 반드시 통과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품에 안으시고 그 저주를 받아내셨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그러니까 그 두루 도는 화염 검(劍) 안에 십자가가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생명나무실과를 먹기 위해서는 그 생명나무를 지키고 있는 그룹들도 통과해야 합니다. 그 그룹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흠 없으신 거룩하심 속으로 그 어떤 티나 먼지도 들어올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장면이 성 막과 성전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휘장에는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생명나무를 지키는 그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제물의 피로 정결케 된 대 제사장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시은 좌도 그룹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그룹들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거룩한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칼을 뽑아들고 지키고 있는 천사를 만나는 것이고 야곱이 거룩한 땅 가나안으로 돌아갈 때 얍복 강가에서 역시 천사를 만나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거룩한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곳을 지키는 그룹을 통과해야 합니다. 거룩하지 못한 자들은 절대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사기꾼 야곱도 환도 뼈가 부러지는 전인의 죽음을 통과한 후에 새 사람 이스라엘이 되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는 휘장이 찢어져 버렸습니다.
(막 15:37‐38)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38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삶을 몽땅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그 분이 품으신 모든 죄인들을 거룩한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 그룹들을 통과하게 만들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 휘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찢겨짐으로 그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룹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히 10:19‐20) “19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 예수께서는 휘장을 꿰뚫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화염검의 저주가 풀리고 생명나무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그룹들이 사라져 우리는 감히 생명나무실과를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나무실과로 가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열리게 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것을 믿는 자들만이 그 열린 길을 통과해서 생명나무실과를 따먹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여시는 분이 먼저 그 길을 앞서 올라가고 하나님께서 먼저 선두로 행하실 것이라 예언을 한 것입니다.
(미 2:13) “13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성문들을 부수고, 바깥으로 나갈 것이다. 그들의 왕이 앞장서서 걸어가며 나 주가 선두에 서서 그들을 인도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영원히 타락하지 않을 영화로운 삶을 살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될 것인지를 창세기부터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창세기 3장 말미의 이야기를 통해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진리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는 데 동쪽으로 쫓아내신다는 것입니다. 화염검과 그룹들이 에덴동산 동편에 있었지요?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동쪽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원래 동쪽은 빛이신 하나님을 상징하는 은혜의 해가 뜨는 곳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도 동방에 세워진 것입니다. 이렇게 동쪽은 원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떠나신 동쪽은 저주의 땅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일관성이 있는지 몇 군데만 찾아드리지요.
(창 11:2)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타락한 인간들이 동방으로 가서 바벨탑을 쌓는 장면입니다. 동쪽은 이제 인간들이 하나님처럼 되겠다고 만용을 부리는 저주의 땅이 된 것입니다.
(창 13:11)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여기는 어디입니까?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동쪽은 이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쾌락을 추구하고 죄악을 즐겨하는 저주받은 자들이 사는 곳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출 14:21)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땅이 된지라”
홍해를 말리 우는 바람도 동풍입니다. 혹자는 홍해를 가른 동풍은 은혜의 바람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홍해가 갈라진 것을 무엇이라 표현합니까? 세례라고 표현을 하지요? 세례는 무엇입니까? 옛 사람이 물에 빠져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세례라고 합니다. 따라서 홍해를 가른 동풍은 저주받은 자들을 물에 넣어 죽여 버리는 심판의 바람인 것입니다. 이 이외의 여러 곳에서 동풍은 땅을 황폐하게 만드는 바람으로, 동쪽은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지고 저주가 실행되는 그러한 곳으로 표기가 됩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 성도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 곳이 아무리 환경 적으로 훌륭하고 아무리 편안하고 아무리 엄청난 쾌락을 줄 수 있는 곳이라도 그 곳은 저주의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창세기 3장까지에서 각기 다른 ‘하나님 같이’라는 말이 몇 번 나오는지 아세요? 세 번 나옵니다.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에 나오는 ‘하나님 같이’ 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같이’만들어 졌습니다. 두 번째는 사단이 하와를 미혹하는 부분에 나옵니다.
(창 3:5)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세 번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 같이’입니다.
(창 3:22)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똑같이 다 ‘하나님 같이’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것과 두 번째, 세 번째 것은 다른 내용의 ‘하나님 같이’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 같이‘는 ’like God, with god'의 ‘하나님 같이’ 입니다만 두 번째 와 세 번째의 ‘하나님 같이’는 ’like God, without god'입니다. 이것 보세요. 똑같이 ‘하나님 같이‘인데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 같이‘와 하나님이 떠나버린 ’하나님 같이‘는 이렇게 천지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 같이’는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은‘이라는 복된 어구가 되지만 하나님이 떠나신 ’하나님 같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죄인들의 교만과 만용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정말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는 시도나 노력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후자의 ‘하나님 같이’를 추구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 같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을 의지해서는 선악과를 따먹을 수밖에 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생명나무실과를 먹고 아들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채워지게 될 때 그 아들의 생명의 씨가 우리 옛 사람을 먹고 우리가 ‘하나님 같이‘’like God, with god'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 같이‘는 저주받을 자들의 외식으로서의 ’하나님 같이‘가 되는 것이고 성경은 그 것을 가리켜 ’자기 의‘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 같이’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채워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고 ‘하나님 같이‘’like God, with god'으로 변화하게 될까요?
말씀과 기도입니다.
(요 5:39) “9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를 증언하고 있다.”
성경은 모두 예수에 대해 증거 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채우는 길은 그 예수에 대해 증거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절대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가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채워질 때 우리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가 이렇게 말씀을 공부하는 데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은 ‘하나님 같이’도 ‘외식과 만용’이 되는 것이고 축복의 땅도 저주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그 저주의 땅에서 다시 불러들이십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 저주의 땅에서 다시 축복의 땅으로 쫓아내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쫓아내다‘’가라쉬‘라는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있습니다.
(출 6:1,6)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1절에 쓰인 ‘쫓아내리라’가 오늘 본문의 ‘쫓아내시고‘와 같은 단어입니다. 잘 보시면 모세가 창세기의 단어를 그대로 가져다가 출애굽기에 쓰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언가를 주지시키고 있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을 동쪽으로 쫓아내셨지만 그들 중 창세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을 그 저주의 땅인 동쪽에서 서쪽으로 다시 쫓아내신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시면 이 세상 권세 잡은 자를 상징하는 애굽의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쫓아내는 사건을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빼어내고 건지시는 것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다른 말로 저주의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주의 땅은 살기 좋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아 우르이고 축복의 땅은 하늘만 바라봐야 하는 가나안입니다. 저주의 땅은 나일 강 유역의 삼각주 땅인 애굽이고 축복의 땅은 천수답 농사를 지어야 하는 팔레스타인인 것입니다. 그게 이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쫓겨난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난 이후의 삶이 그렇게 억지와 조롱과 비난과 누명으로 점철되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쫓겨나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항상 심판을 전제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모든 인간들이 다 심판을 받아 저주의 자리로 떨어 져야 합니다. 그것은 필연입니다. 그런데 유독 하나님의 백성들만 예수 안으로 들어가 그 예수가 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가셔서 그들의 부끄러움을 무죄한 짐승의 가죽으로 가려 주신 날을 ‘심판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3:8)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는 날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날이 서늘할 때에’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히브리 원어는 ‘욤 루아흐’입니다. ‘바람의 날에’ 혹은 ‘성령의 날에’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그 말을 신약에서 찾는다면 ‘주의 날’이 됩니다.
(살전 5:2)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주의 날은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심판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8절의 ‘날이 서늘할 때에’는 ‘심판의 날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지은 모든 인간들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 심판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솔라 그라티아’ 바로 그 은혜의 십자가 이야기가 창세기 3장의 대 주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심판의 자리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떠한 처지나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못 배웠어도 조금 가난해도 조금 못 생겼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심판의 자리를 벗어난 그 사실이 우리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당당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만드는 것이고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고 기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은 자들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무시할 수 없고, 정죄할 수 없으며, 용서하지 못할 것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우리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 어디로 건짐을 받은 것인지를 수시로 확인하시고 세상이 여러 가지 문제로 여러분을 낙담시키려 할 때 세상을 비웃어 줄 수 있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여러분을 곤란케 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굳게 서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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