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의 결과
(김성수 목사)
(창3:7‐19) “7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 8 ○그 남자와 그 아내는, 날이 저물고 바람이 서늘할 때에, 주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남자와 그 아내는 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9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부르시며 "네가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11 하나님이 물으시기를 "네가 벗은 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시니, 12 그 남자는 핑계를 대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 13 주 하나님이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쩌다가,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이 저를 꾀어서 먹었습니다." 14 ○주 하나님이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서 네가 저주를 받아, 사는 동안 평생토록 배로 기어다니고, 흙을 먹어야 할 것이다.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16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17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18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올려놓고 사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세 가지 악한 경향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었습니다.(보암직도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 마귀의 미혹에 말려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긴 하와는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포로가 되어 버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까지 사라지게 되자 하와는 덥석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여자는 즉시 자기 남편에게도 권해서 남편까지 타락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타락의 순서가 뱀, 여자, 남자입니다. 이러한 타락의 순서에는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질서를 하나님에서 남자로 남자에서 여자로 여자에서 짐승으로 흐르게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짐승을 사용하여 여자를 미혹하고 여자로 하여금 남자를 미혹하게 하고 남자는 하나님께 대드는 식으로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질서를 역으로 파괴해 들어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질서가 곧 선입니다. 그래서 질서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세워 놓으신 질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를 어기고 범죄 한 자들을 다시 질서 속에서 나무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나무라시고 그 다음에 여자를 나무라시고 그 다음에 뱀을 저주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 하와가 먼저 선악과를 먹었음에도 한 사람 아담이 죄를 지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 아래의 최고 상위 질서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바로 어긋난 하나님 나라의 질서 회복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창조주 대접 해 드리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질서는 점점 무질서 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여성 상위라는 말이 공공연히 회자됩니다. 남자들이 점점 여성화되어 가고 여자들은 점점 거세집니다.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만이라도 그 질서를 회복해야 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인간은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원래 아담과 하와는 무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무죄했던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무죄한 순결함에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켜내는 ‘순종‘을 보태기만 하면 ‘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죄까지 지어버렸습니다. 이제 인간들이 해결해야 할 것이 두 가지로 늘어난 것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에 대한 순종만 보태면 되는 상태였는데 이제 죄의 문제까지 해결을 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계명의 문제와 죄의 문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 두 가지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을 하셨습니다. 먼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홀로 저주를 받아 내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성도들의 죄를 홀로 짊어지실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계명의 순종 문제는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으시는 것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육신을 입으시고 모두 순종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삶을 우리 성도들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의 문제와 순종의 문제가 모두 해결이 되고 우리는 애초에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한 하나님의 착한 백성으로 간주가 된 것입니다. 마치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구약의 창세기에 거기에 맞는 문제가 던져지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들지 않으세요? 인간들이 저질러 놓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고심 끝에 십자가와 예수를 해결책으로 내어놓으신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준비 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위해 인간의 문제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이렇게 은혜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을 해서 거꾸로 읽어 들어가면 오히려 이해가 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한 채 무턱대고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은 왜 인간이 타락을 하게 놔두셨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신 거라면 왜 인간에게 죄 책(罪責)을 물으시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서 창세기를 들여다보면 그 모든 사건들이 은혜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을 한 인간들에게 아주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타락의 결과가 여섯 가지로 나옵니다. 그 첫 번째가 ‘영적인 파탄’입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로 숨습니다.
(창 3:8) “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기서 중요한 동사가 두 개 나옵니다. ‘피하여’ 와 ’숨은지라’입니다. 분명 아담은 하나님의 등에 업혀 에덴동산의 창조를 보았던 사람이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스스로가 왕이 되어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을 피하여 숨기 시작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피해 숨어 버렸다는 것은 그 때부터 인간들이 불의한 자들이 되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의‘’짜다크‘가 뭐라고 했지요? 인간이라는 네페쉬는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데 그 필연적 관계 속에서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의‘’짜다크‘라 한다고 했지요? 타락하기 전 태초의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 그렇게 ’의’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었습니다. 물론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의’였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제 완전한 ‘불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자 더 이상 숨을 수 없는 죄인들이 그 분을 아예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때에 가장 행복한 삶을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관계가 요구하는 순종과 의뢰의 삶을 초개처럼 던져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불의 해진 인간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하고 숨습니다. 군대에서 가장 무서운 죄가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죄입니다. 군법회의에서 사형까지 언도 받을 수 있는 죄입니다. 그런데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한 병사는 군법회의에 가기 전에도 자기 상관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보다 상위 권위자인 사람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그 상관이 두렵기도 하고 차마 그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것입니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명령 불복종으로 명령이 하달되어야 하는 상관으로부터 그렇게 스스로 차단이 된 상태인 병사는 더 이상 군인일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그 분께 자신의 삶 전체를 의뢰할 때에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피해 도망 다니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하달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끊겨 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인간을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부릅니다. 상관의 명령 계통에서 끊겨 버린 군인이 더 이상 군인일 수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분별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 도 없는 인간들은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가 떨어지는 것을 육체의 죽음이라 하듯이 하나님과 떨어진 인간은 영원한 죽음, 지옥의 죽음 속으로 던져지게 된 것입니다.
병원의 중환자실에 가보면 산소호흡기 하나에 생명을 의존하고 있는 환자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 환자들의 코와 입에 걸쳐있는 그 산소 호흡기를 잠깐만 떼어 내도 그 환자들은 죽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가 바로 그 상태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되는 하나님의 생명력에 의해서만 사람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에게는 그 생명력이 차단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미 그들의 코에서 산소 호흡기가 떼어져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인생이 그토록 공허하고 고달프고 괴로운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 봐도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 가 봐도 이내 찾아오는 공허함이 바로 영원한 죽음의 냄새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그렇게 수천 년 동안을 이리 도망 다니고 저리 도망 다니다 보니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도망쳐 온 사람인지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이며 왜 이 땅을 이렇게 선택 없이 살아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수천 년 동안 자신들의 기원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 연구를 해 왔지만 현대 철학의 결론은 한 마디로 ‘I don't know''나는 모른다’입니다. 답답하지요.
조선 최고의 천재라고 하는 매월당 김시습의 시들을 읽어보면 참으로 처절합니다. 그의 시(詩) 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미친 듯이 옛 사람들에게 물어본다(古書를 읽었다는 의미). 도대체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왜 아무도 내게 대답해 주지 않는가?’ 결국 그는 방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그 해답을 얻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불경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석가모니의 제자가 석가모니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왜 이렇게 아무런 선택권도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까?’ 그 때 석가모니가 제자에게 대답을 해 줍니다.
‘지금 너에게 중요한 것은 네가 독화살을 맞았다는 것이다.(인생은 독화살을 맞은 자의 상태처럼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의미) 그런데 독화살을 맞은 자가 이 독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이며 내 몸에 퍼지고 있는 이 독의 성분이 무엇인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있느냐? 어떻게 하면 내 몸에 퍼져가고 있는 이 독의 위험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 하거라‘ 석가모니도 인생의 시작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인생의 종국은 어디로 흘러가는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목적은 수행과 참선과 득도를 통해서 인생의 백팔번뇌에서 빠져나가는 것에(해탈)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 이런 상태가 되었다고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도피의 결과인 것입니다.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뒤로 숨어 버린 인간들의 무지가 역사 속에서 그렇게 증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어 버린, 아니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살해해 버린 인간들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 속에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감지하고 분별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뒤로 숨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들어와 계신데도 전혀 두렵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이 다시 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해 드린 것도 없습니다. 오직 은혜로 하나님과의 불의 한 관계가 의롭게 회복이 되어 동산 나무 뒤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자신들은 한시도 존재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해서 그 분이 시키는 대로만 살겠노라’는 의지의 결단까지도 하게 됩니다. 그들을 ‘성도’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역사를 운행하시고 성경을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타락의 결과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것이 영적인 파탄이라면 두 번째 것은 ‘지적 능력의 파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인간이 타락을 하자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창 3:7)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졌고 그들의 상태에 대해 지각을 하고 판단을 하여 그 판단에 따라 치마를 해 입는 행동을 했습니다. 인간은 이제 자신이 부끄러운 존재라 인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 싶은 욕망은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듭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선악과를 따먹은 후의 아담이 육신 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갑자기 없던 것이 생겨났다거나 있던 것이 사라지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자기들의 벗은 것이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어야만 했습니까? 이제 본질과 자기 사유(思惟)가 분리되어 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왕이 되고픈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놓으신 자신들의 상황이나 여건이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가시적으로 전혀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있는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이제 눈이 밝아져 스스로 선악을 판별하게 된 인간들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자기들의 기준이 생겨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들의 목표는 자기 욕심에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에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들은 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지적 능력의 파탄을 맞게 된 인간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데 총력을 기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은 그들의 인생 전부를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데 허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구, 벼슬아치가 되고 싶은 욕망,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명성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이 모든 것들이 따지고 보면 전부 타락한 인간들의 자기 부끄러움 가리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타락한 아담들은 동산 나무 뒤에서 열심히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 무화과나무 잎은 집단적으로는 인간들이 역사 속에 쌓아놓은 문화, 문명, 철학, 과학, 교육, 이데올로기, 종교 등등의 선행체계와 지식체계들로도 나타납니다. 인간들의 자기 부끄러움 가리기가 얼마나 교묘하게 위장이 되어 있는지를 나타내주는 유명한 인물이 있습니다. 칠레의 공산당 당수이자 1971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파블로 네루다입니다. 그는 인민의 시인이라 칭송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너무나 유명해서 오죽하면 네루다 일 포스티노라는 소설까지 나왔을 정도입니다. 저는 그 사람의 시를 아주 좋아합니다. 그의 시에는 가진 자들의 횡포와 가난한 민중의 아픔이 아주 쉬운 언어로 웅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파블로 네루다 자신은 극도로 호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공식적인 부인만 3명이 있었고 공공연한 애인이 다섯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명성에 매료된 수많은 여인들과 평생 동안 바람을 피우다 죽었습니다. 그게 공산주의입니까? 그게 세계적인 공산주의 수장의 삶에 적합한가요? 저는 그의 공산주의 투쟁이나 엄청난 양의 저항 시들이 결국 그 자신의 부끄러움 가리기에 지나지 않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 부끄러움 가리기는 그토록 교묘하고 처절합니다. 너무 멀리 가지 않고 우리 가까이 에서도 인간들의 자기 부끄러움 가리기의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의 자기 부끄러움 가리기의 한 국면이 여자들의 화장입니다. 기미, 잡티, 땀구멍 이런 것들을 여러 가지 도구와 재료를 사용해서 가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화장은 자신이 가려야 할 부분이 점점 많아지고 깊어질수록 두꺼워 집니다.
그래서 20대 때에는 화장을 하고 30대 때에는 치장을 하고 40대 때에는 분장을 하고 50대 때에는 변장을 하고 60대 때에는 환장을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그렇게 화장을 하고 치장을 하고 분장을 하고 변장을 하다가 아무리 훌륭한 화장품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만큼 되면 환장을 하게 됩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변장을 해서라도 남들에게 예뻐 보이려 노력을 하지요? 내가 우주의 중심인데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입니까? 그래서 여자들이 나이가 들어도 눈물겨운 노력을 기울여 변장을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유명한 여배우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아예 집밖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젊었을 때의 아름다운 자신의 이미지를 나이 먹어 늙은 모습으로 퇴색시키지 않기 위함입니다. 나이 먹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제 말은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왕이면 조금 일찍 서두르셔서 예쁘게 단장을 하고 예배당에 오세요. 그래야 보는 사람들도 기분이 좋지요. 괜히 우리 목사가 화장하지 말라고 했다고 그냥 맨 얼굴로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 피해주지 마시고요. 어떤 사람은 화장을 지우면 눈썹이 없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제 요지는 그러한 인간들의 자기 부끄러움 가리기의 근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인간 측에서 내어놓은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가 없습니다. 그 것들은 모두 한시적인 무화과나무 잎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부끄러움은 하나님께서 가려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창세기 3장의 이야기는 오직 은혜 아래에서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 백성들의 실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으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창세기 3장의 언어를 빌어다 표현한 것입니다.
(사 59:6) "6 그들이 거미줄로 짠 것은 옷이 되지 못하고, 그들이 만든 것으로는 아무도 몸을 덮지 못한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죄악을 저지르는 것뿐이며, 그들의 손에는 폭행만 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하는 모든 시도들은 다 죄악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타락의 결과 어그러진 인간의 지식은 자신들을 부끄러운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그들의 모든 시간을 허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부끄러움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벌거벗겨져 죽으심을 당하시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당신의 죽음으로 가려주셨다는 것을 믿는 성도들은 더 이상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인 이 세상 것들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려 동분서주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 동안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노심초사 쏟아 부었던 그들의 노력과 시간과 힘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데에 씁니다.
돈이 많은 것이 더 이상 나에게 자랑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기에, 그 것이 나의 부끄러움을 가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주저 없이 내 이웃의 가난과 아픔을 달래는 데에 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능이 더 이상 나만의 자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 재능으로 자신을 뽐내는 데에 쓰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는 데에 씁니다. 가난한 것이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애써 그 가난을 감추려 하거나 모면하려 편법을 쓰지 않습니다. 병든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타락의 결과로 인간들에게 주어진 세 번째 것이 ‘심리적 파탄’입니다.
(창 3:9‐10) "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타락한 인간들에게 두려움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께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의뢰할 때 그들에게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을 리 만 무(萬無)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신 분과 동행하며 그 분께 나의 삶을 맡긴 사람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의 장 중(掌中)에서 떠나자 곧 그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이제 나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함께 내가 배신한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심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세상을 향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의 다른 말은 ‘불안’입니다. 모든 인간은 까닭 모를 두려움과 불안에 떱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오죽하면 괴테는 ‘불안은 모든 인간의 가장 밑바탕에 웅크리고 있는 독사’라고 까지 말을 했겠습니까? 왜 사람들이 전쟁을 하지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자원이 고갈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다른 이들의 자원을 빼앗는 행위를 표출이 되는 것입니다. 약관의 나이에 왕이 되어 세계를 정복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죽은 뒤 마케도니아는 셀류코스, 톨레미, 리스마커스, 카산더 이렇게 넷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그 중 이집트 지역을 다스리던 톨레미가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그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평생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싸웠다고 합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전쟁이라는 것을 선택했고 전쟁의 분주함 속에서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모든 인간은 그 죽음이라는 무기를 들고 있는 어떤 절대자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곧 세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고요. 왜 부부싸움을 합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홀로 버려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 짐이 더 무거워질 것 같은 두려움, 이러한 것들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 하는 사이인 부부 사이에 싸움을 만들어 냅니다.
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험담합니까? 두려움 때문입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어야 하는데 나보다 더 나은 면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안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나보다 나은 사람들을 끌어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왜 살인을 합니까? 그 상대방이 살아있으면 내가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살인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땅의 모든 더럽고 추한 인간들의 행위는 모두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 속에 필연적으로 자리 잡게 되는 두려움에서 발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들의 위선적인 자기 부끄러움 가리기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그렇게 온통 두려움에 가득 찬 삶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 ‘평안’을 소유한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요 14:27)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20:19‐21)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제 하나님이 나의 편이 아니시라는 사실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된 성도들은 그 어떤 상황이나 사건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설사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중을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해 우리가 당면한 사건들과 상황들로 어리둥절할 수도 있지만 그 분은 우주의 주관자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바로 내 안에서 역사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청준씨의 소설 중에 ‘벌레 이야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요즘 이창동 감독이 ‘밀양’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서 칸 영화제를 흥분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많은 문학 평론가들이 그 소설에 대해 평을 해 놓았지만 저는 그러한 평론가들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그 소설을 보았습니다. 이청준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그의 소설 속에는 하나님의 처사에 대한 불만이 참 많이 배어있습니다.
벌레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신애는 참으로 처절한 인생을 사는 여자입니다. 아이를 유괴범에게 잃고 남편까지 잃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힘으로 그 유괴범을 용서하러 갔는데 오히려 그 유괴범은 자신은 벌써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평온한 얼굴로 그녀를 맞습니다. 그 때 신애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자살을 해 버립니다. 자신의 인생을 그토록 힘겹게 만들고 용서라는 최소한의 권리마저도 가로채 버리는 폭군 같은 신에 대한 저항인 셈입니다. 그게 바로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나온 것입니다.
진짜 성도들은 어떠해야 합니까?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니 내가 불평할 것이 없다’는 욥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입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순종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러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는 자로 성숙되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의 두려움을 극복한 평화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지요? 왜 서로들 못 잡아먹어서 안달입니까? 두려워서 그런 거라 말씀드렸지요? 내가 나를 지켜야 하니까. 절대자의 품을 떠나 평안을 잃어버린 인간들은 절대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한 사람들은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을 비하하고 밟고 폄하(貶下)해서 나를 지켜야 한다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려움의 반대말은 사랑이다‘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입니다.
(요일 4:18)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타락이 가져온 네 번째 괴물이 ‘사회적 파탄’입니다. 본문12절과 13절을 보세요.
(창 3:12‐13)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2절을 보시면 아담이 하와를 가리켜 ‘그 여자’라 부릅니다. 우리는 2장에서 아담이 하와를 가리켜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살기 시작하자 그 인간 사이의 의로운 관계가 바로 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회적 파탄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다툼이요, 전쟁이요, 시기요, 질투요, 모함인 것입니다.
원래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었습니다. 여자라는 단어 ‘이솨’는 남자라는 단어‘이쉬’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성(性)만 다르지 사실 같은 단어입니다. 그 말은 여자는 남자에서 유래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아담이라는 ‘사람’에게서 갈비뼈를 뽑아내었더니 아담이 남자가 되었고 그 갈비뼈로 만든 하와가 여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한 몸이었던 것입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진심 어린 고백을 할 수 있는 관계,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그러한 관계, 그게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로운 관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에게서 하나님의 은혜가 빠져나가자 하나였던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깨져 버렸습니다. 그 상대방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자신을 위해 상대방에게 모든 죄를 덮어 씌워 버리는 그런 불쌍하고 잔인한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사회적 파탄은 자기 내면에서도 일어납니다. 자기가 세워 놓은 기준치에 미달하는 본인을 스스로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것이 우울증을 비롯한 각종 정신병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서로 갈라져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지 절대 인간들에게 교육이 부족하거나 지식이나 훈련이 부족해서 생겨난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르네상스는 상당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며 전쟁하지 않고 다투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든 인간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일은 천국에서나 가능하겠지만 요. 그러나 이 땅에서 그러한 회복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주는 곳이 교회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싸우지 들 마세요.
(엡 4:1‐3) "1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구절을 의역을 해 드리면 이러합니다. ‘두려움에서 평안을 회복하고 사랑하는 자가 된 성도들이여, 너희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갈라진 것처럼 갈라져 다투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하신 하나 됨을 힘써 지켜라‘ 우리는 아직까지 이 지저분한 역사 속에서 오염된 육체를 갖고 살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하나 됨을 지켜낼 수 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하나 됨을 ’힘써‘지켜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애끓는 권고를 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인간은 타락의 결과로 육체적 파탄을 맞게 되었습니다. 여자는 아이를 낳을 때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육체적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창 3:19)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인간은 타락의 결과 육체의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생기를 잃어버린 짐승과 같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 인간의 타락이 가져온 무서운 저주가 ‘환경의 파탄’입니다.
(창 3:17‐18)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인간의 타락으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땅은 인간에게 소산을 풍성하게 내 주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을 해서 겨우 먹고 살 만큼의 양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식물들도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로 양식이 부족하게 되자 짐승들이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짐승들에게 송곳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도 불의 한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언제든지 자연을 훼손하고 자연은 그 복수로 인간들에게 태풍과 기근과 홍수로 보답합니다. 태풍 쓰나미가 인도네시아를 덮쳤을 때 그토록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은 사람들이 배를 정박하기 위해 바다 밑의 산호초를 몽땅 긁어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번 신문 보도를 보니까 지구 온난화 현상이 이렇게 진행이 되면 앞으로 8년 후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의 25%‐30% 가 멸종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지구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로 치닫게 되는 것이지요. 이게 다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재앙인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폭풍이 이는 바다를 향해 외치셨습니다. ‘바다야 잔잔 하라’ 그 사건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어긋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스리고 복종하는 관계로 회복되었음을 암시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사 11:6‐9) "6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7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회복된 모든 피조물들이 이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여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구별이 사라지고 나의 자랑과 욕심을 위해 남을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나라,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화해를 하고 인간이 인간 스스로와 화해를 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하게 되는 그런 온전한 회복의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이미 그 나라가 시작이 되어 있는 것이고요.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이 땅에서 구현하며 우리 스스로 조금 씩 그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이유를 ‘당신 백성들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을 은혜로 구원해 주신 분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고후 5:15) "1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이제부터는 자기들 스스로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를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의 인간의 실패가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주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 외치고 계시는 것 같지 않으세요? ‘내 백성들아 이제 너희를 위해서만 살던 그 이기적인 삶에서 돌이켜 내 말을 듣고 나에게 순종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 내거라’ 우리는 인간의 타락의 결과 우리에게 나타난 급격한 변화와 하나님의 저주를 공부하면서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south central에 있는 다리 밑에 가서 홈리스들과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그래도 명색이 한 때 빈민 운동을 하던 사람이 미국의 노숙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직접 보고 싶어서 찾아가 하루를 묵었던 곳입니다. 이번에도 가서 밤새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왔습니다. 밤이 되면 그들 중 몇 사람이 주변을 두루 살피며 자동차 타이어를 구하러 다닙니다. 자동차 타이어 안에는 화학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유독 가스가 들어 있어서 그 안에 있는 가스를 들이마시면 일시적 뇌 손상이 와서 몽롱해 지게 됩니다. 그러면 비로소 잠을 청하곤 하지요. 일종의 알코올이나 마약 대용인 것입니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들 모두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두 번째 그들 모두가 어떤 중독에 의해 그 다리 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술, 마약, 도박 등등의 중독에 의해 결국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노숙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중독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을 황폐하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중독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우리도 모두 돈 벌기에, 일에, 자식에, 다툼에, 시기와 질투에, 커피 등에 중독이 되어 있지 않나요? 모양은 다르지만 모든 중독은 다 같은 기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렇게 무언가에 자신을 중독 시키며 삽니까?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맨 정신으로 살기에는 죽음과 그 죽음의 부산물인 질병, 가난, 전쟁, 고통 등이 두렵고 그 죽음을 쥐고 있는 어떤 절대자가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맨 정신으로는 늘 부족한 것만 같은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언가에 중독이 되어 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들을 회복시켜 주셨다는 것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죽음도 그 죽음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그건 단지 일시적인 역할일 뿐이지 우리의 실존은 하나님의 자녀이니까요.
이제 우리는 우리를 중독 시키고 있는 모든 세상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엉뚱한 것 두려워하느라 시간 허비하지 마시고 괜한 부끄러움에 자신을 자학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분별하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잘 살아내는 데에만 힘쓰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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