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또 은혜
(김성수 목사)
(요 1:29-44)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분은 나보다 먼저 계시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다'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분을 두고 한 말입니다. 31.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32. 요한이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은 이분 위에 머물렀습니다. 33.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34.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 35. ○다음날 요한이 다시 자기 제자 두 사람과 같이 서 있다가, 36.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하는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38.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는 무엇을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랍비'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고 대답하시니, 그들이 따라가서, 예수께서 묵고 계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을 그분과 함께 지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이다. 41.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42. 그런 다음에, 시몬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로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게바'는 베드로라는 말이다.) 43. ○다음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려고 하셨다. 그 때에 빌립을 만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44. 빌립은 벳새다 사람으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고을 사람이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소개하는 세례 요한을 통해서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함께 공부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빛으로 추앙을 받아서는 안 되며, 빛이신 주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진 삶이어야 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배웠습니다. 오늘은 29절부터 44 절까지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이 담고 있는 내용은 아주 방대하고 깊습니다. 복음의 내용이 아주 선명하게 기록이 되어있는 부분이니 만큼 여러분께서 잘 공부해 놓으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빛이 이 세상에 오셨는데 자기 백성조차도 그 빛을 알아보지 못 하더라’는 탄식 끝에 그 빛을 알아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치는 세례 요한의 포효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는 어떻게 그 초라한 주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그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 쓰인 용어에 대해 몇 가지 알아 두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대시대 때는 ‘밀교(密敎) ‘라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 밀교라는 것은 비밀스러운 종교입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에 있었던 여신 이시스의 남편이자 아들인 오시리스를 섬기는 그러한 종교를 밀교(密敎)라고 불렀습니다. 그 밀교 안에는 그 밀교의 멤버들에게만 밝혀지는 비밀스러운 가르침과 의식들이 있었는데 그 비밀스러운 가르침 때문에 그 종교를 ’밀교(密敎) ‘라 불렀던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일반사람들이 범부(凡夫)지견(知見)으로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밀교(密敎) ‘라 불렀습니다.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대중적인 가르침은 현교)그러니까 밀교(密敎)의 특징은 ’범부(凡夫)들에게 아무렇게나 밝혀지지 않는 비밀스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대의 밀교에는 일반 사람들이 참석할 수 없는 집회가 있었습니다. 소위 passion play 라는 연극이 행해지는 집회입니다. 그 passion play라는 것은 그들이 섬기는 신의 수난과 영광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아주 흡사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passion play가 행해지는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준비 기간과 입교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입교를 ‘initiation'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initiation'까지의 기간 동안에 밀교(密敎)의 내용을 배우고, 금식하고 금욕하며, 신에게 기도하면서 지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을 잘 보낸 사람에 한해 입교(入敎)가 허락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입교가 되면 그들은 비로소 passion play가 행해지는 밀교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일단 입교를 통과하고 그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 연극에 등장하는 신의 수난과 그 수난을 이겨낸 자신들의 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이해하게 되고 그 신의 삶에 자신의 삶이 연합되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그 ‘밀교’를 ‘무스테리온’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대시대 때 그러한 ‘비밀스러운 밀교(密敎) ‘ 의 의미로 통용되던 그 ‘무스테리온’이라는 단어가 성경에도 여러 번 나옵니다.
(마 13:10-11)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롬 16:25-26) “25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엡 3:3-4)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골 2:2)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성경 기자들은 당시 사람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이 ‘무스테리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복음이 아무에게나 보여 지고 알려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밀교의 예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당시 고대 시대 사람들은 밀교의 ‘무스테리온’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 밀교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initiation의 단계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대의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이 ‘무스테리온’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을 때 성경과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알아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initiation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감을 잡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복음의 비밀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initiation'이 뭘까요? 그것을 신학에서 ‘회심’ ‘conversion'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그 ’무스테리온‘을 알아볼 수 있게끔 그 비밀의 지식을 전수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무스타고그’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왜 이 ‘무스테리온‘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내용을 설명해 드리는가 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오늘 본문에 보면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예수님이 담고 있는 비밀을 그가 알아보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무스타고그‘의 역할을 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종 사촌 형입니다. 아마도 어렸을 적부터 예수님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겨우 6개월 차이니까 예수님의 약한 모습, 지저분한 모습, 추한 모습도 모두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initiation을 통과하여 ’하늘의 비밀, 무스테리온‘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본문 32절과 33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이해했으며 성령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의 모습을 정확하게 어린양과 연결을 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요한은 가난한 사촌 나사렛의 목수 예수와 그의 머리에 성령이 임한 것과 어린양을 연결시킬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단 한 사람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볼 수 없었던 그 시대에 요한 만이 그 분을 메시아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까? 분명 구약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할 것과 어린양에 대한 이야기가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스테리온’이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이야기들을 모두 듣고 읽고 공부했지만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곡해를 해서 정작 그 것들이 상징하는 예수그리스도로 연결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나사렛의 목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임하는 것과 어린양을 정확하게 연결을 시켰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요? 답은 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에 의해 선택이 되어진 자였기 때문에 어느 날 하나님에 의해 그 눈이 뜨여지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 너무 생뚱맞으리만큼 기초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런데 이 생뚱맞으리만큼 기초적인 교리에서부터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 제가 또 확인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세례 요한은 알아보고 다른 이들은 알아보지 못한 ‘성령이 임하는 사건’과 ‘어린양’에 대한 예언이 구약 성경에 어떻게 기술이 되어 있는지 rough하게 훑어보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왜 문자로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들을 다른 이들은 못 알아보았을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위에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 어디서 출발해서 어떻게 오늘 본문으로 이어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것을 살피기 위해서는 모세의 기도로 먼저 가 보아야 합니다.
(민 11:26-29) “26 그 녹명 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한지라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더이다 하매 28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가로되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70 장로를 세우라고 명령하시고 그 70장로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70장로로 녹명 된 자 중에 엘닷과 메닷이라는 자가 진중에서 나오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역시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여호수아가 ‘금하게 하라’고 모세에게 건의를 합니다. 그 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는 그의 소원을 말하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어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예언적 청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세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이 임해서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예언할 수 있는 자들이 될 것임을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러한 기도를 합니다.
(시 51:10-11)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구약 때에도 성령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삶에 관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필요할 때마다 왔다 갔다 하시면서 일을 하셨습니다. 그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지난 주 토요일 장로 교육시간에 어떤 집사님께서 ‘구약 시대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왔다 갔다 하셨다는 데 어느 때 오시고 어느 때 가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 성령께서 정말 왔다 갔다 하시나요?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시며 편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그 품에 품고 계신 분이십니다. 다른 말로 모든 만물은 성령의 품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성령 하나님이 오셨다 가셨다 하는 것처럼 기록했는가? 사울이나 다윗의 예를 보아도 그 분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패역 한 일을 했을 때는 여지없이 떠나버리시지요?
그 것은 성경을 읽는 독자인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심경을 알려주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얼마나 분노하시는지 그리고 그 분의 백성들의 불순종을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시는지를 ’성령이 떠나는 것‘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했을 때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하지요? 다윗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주의 성령이 자신을 떠난 것 같은 고통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기도를 드렸지요. 그렇다고 정말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셨었나요? 그 후로 다윗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후에도 다윗의 삶을 홀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성령 하나님을 잃는 경험을 하게 함으로 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후대의 우리 교회에게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의 죄악에 어떻게 반응하시며 성령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시고 이끌지 않으시는 영혼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는 지도 아울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이 성령이 떠날까봐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시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그려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이 떠날까봐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찾으면 되겠지요? 성령이 영원히 떠나지 않고 그 안에 거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해 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은 죄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이루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령이 오셨다 가셨다 하는 모습을 그려놓았던 것입니다. 차치 하고 그 다윗의 기도가 어떻게 예수님의 세례로 이어지는지 잘 보세요. 그 다윗의 기도는 요엘의 예언으로 이어지지요.
(욜 2:28) “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하나님은 이렇게 요엘을 통해 이제 하나님의 성령이 그 분의 백성들에게 부어져서 절대 떠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오순절 다락방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불의 혀 같은 성령이 하나님의 교회에 영원히 거하시게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 바로 오순절 다락방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 다락방 사건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단순히 second blessing으로 성도가 방언을 하게 되고 입신을 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 오순절 사건은 그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임했던 것을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은 모세의 예언적 청원에서부터 시작해서 다윗의 기도와 요엘의 예언을 거쳐 신약의 교회에 실제로 이루어지게 되는 새 창조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세례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교회가 생기기 전 교회를 품으시고 교회를 대표하신 분이 계십니다. inclusive representative (내포적 대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그 분은 교회를 내포하시고 대표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교회에게 일어날 일을 먼저 그대로 사셨습니다. 예표 적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교회가 성령을 받아 영원히 타락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재창조가 되는 그 장엄한 언약의 성취를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심’으로 먼저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 분이 교회를 품으시고 교회의 대표로 먼저 성령을 받으시는 모습이 바로 요단강에서의 예수님의 세례 사건인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의 preview인 것입니다. 교회의 대표이신 예수님께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그 것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사건’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모세 오경서부터 시작되어 요단강까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어린양으로 죽는 방법으로 이루어 질 것임을 구약 전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시는 사건과 어린양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 하늘의 것을 볼 수가 없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그걸 안 것입니다. 자신에게 물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세례 요한은 구약 전체가 가리키던 메시아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내 그 분이 구약 전체에 흐르는 어린양의 실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29절을 보시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에서 ‘지고 가다‘’아이론‘이라는 동사가 현재 시제로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죄의 심판이라는 것은 마지막 때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지금 세상 죄를 지고 가고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론’이라는 동사는 ‘치워 없애버리다, 값을 주고 사 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이미 2,000년 전에 마지막 죄의 심판의 사건이 뚫고 들어와 버린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구약의 어린양 사상은 성경에 어떻게 편만 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역시 개괄적으로 훑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의 어린양 사상은 이삭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성경은 이삭이 자기를 번제 할 나무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통해 자신이 매달려 죽을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죽어야 할 이삭을 대신해 어린양이 등장하는 장면을 통해 죽어야 할 자를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줍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모리아 산을 보면 그 곳에 참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미리 예고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유월절로 넘어가서 무죄한 어린양의 피가 인방과 문설주에 발려지고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나는 것을 통해 십자가를 지실 하나님의 어린양이 또 설명이 되지요. 그런데 그 양은 그 달 10일에서 14일까지 그 집 가족과 함께 지내야 합니다. 그렇게 양을 바로 잡아서 죽이지 않고 식구들과 함께 거하게 한 것은 그 어린양과 그 집 가족이 하나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어린양이 그 집 가족의 대표가 되어 죽는 것입니다. 그 것도 역시 우리 교회를 위해 교회의 대표가 되어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제사 제도를 통해 수 없이 많은 어린양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했습니다. 역시 그 제물들도 모두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그 어린양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것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어린양이 여전히 ‘무스테리온’이었던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선민인 이스라엘에게 주신 제사제도를 잘 행하면 그들은 구원받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 분이 바로 구약에 수없이 예고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실체라는 것을 알아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이 복음을 알아들을 수 없도록 그들을 하늘의 생명력과 단절시켜 버리셨습니다. 인간의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은 초월과 완전히 단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절대 그 하늘의 비밀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마 13:13-15)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 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막 4:10-12)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12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잘 보시면 주님께서 택함을 받은 자들 외에는 일부러 못 알아듣게 하시려고 비유로 말씀을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비밀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이외에는 절대 못 알아듣게 귀를 막아버리시고 눈을 막아버리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설득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과 귀가 막혀 버렸기 때문에요.
(사 6:8-10)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이 혹시 복음을 알아 들을까봐 걱정을 하시는 듯 한 느낌까지 받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죄인들에게 복음을 철저하게 막아 버리십니다. 그래서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아무도 못 알아듣는 ‘무스테리온’을 외치는 것이 전도이기 때문에 성경이 그 것을 미련한 것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고전 1:18-24)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런데 그 미련한 이야기를 알아듣고 감격하며 나오는 무리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무스테리온’을 알아듣고 구약의 마지막 ‘무스타고그’가 되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예수’를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듣고 또 다른 제자들이 ‘무스테리온’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두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무스타고그’가 됩니다. 그 ‘무스테리온’을 알아듣고 지금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도 역시 ‘무스타고그’로 부름을 받은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하늘의 비밀을 알았을까요? 그리고 그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나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은 어떻게 바로 주님을 좇을 수 있었을까요? 아니 멀리 갈 것 없이 여러분은 어떻게 그 ‘무스테리온’을 알아듣고 이렇게 감격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게 바로 ‘선택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례요한의 이야기로부터 이어지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구약에 예언되었던 바로 그 교회가 어떻게 시작될 것인 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을 천천히 그림으로 그려 드리겠습니다. 죄악으로 빛을 잃은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중에서 한 사람이 그 빛을 알아보고 ‘저 분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 된 어린양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이 정말 구약에 예언 된 그 메시아라는 것이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 세례를 받으신 주님처럼 성령 세례를 받고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이 될 사람들이 신약의 첫 번째 무스타고그이신 주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 둘씩 부름을 받게 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 분은 자신이 ‘무스테리온‘이면서 ‘무스타고그‘ 이시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전혀 빛을 알아보는 자가 없었던 그 곳에서 ‘주님을 알아 본 세례 요한을 비롯하여 신약의 교회를 상징하는 12사도가 주님께 선택을 받는 모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부름을 받게 될 것인가를 미리 그의 책 서론에서 preview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렇게 은혜로 부름을 받게 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세요.
(요 1:34)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 하니라”
여기서 ‘보고‘는 ’호라오‘라는 단어입니다. 이 ’호라오‘라는 단어는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사람을 볼 때 ‘내적 impression, 깊은 인상’이 남도록 주의하여 관찰하다, 구별하다”라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을 볼 때 그냥 본 것이 아니라 ‘호라오’한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들은 온 정신과 시선이 그 비밀에 집중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라오’ ‘집중하여 관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떻게 주님을 ‘호라오’할 수 있습니까? 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잘 설명이 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호라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배우는 일을 다른 모든 일 위에 얹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은 그 사람들을 ‘떼아오마이’하십니다. 37절을 보세요.
(요 1:37-38)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8절에 쓰인 ‘보시고’ ‘떼아오마이’는 관심과 의도를 가지고 깊이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떼아오마이’하실 뿐만 아니라 ‘엠블레포’하십니다. 본문 42절 보세요.
(요 1:42)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여기서 쓰인 ‘보시고’는 ‘엠블레포’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의 ‘보다’라는 단어가 굉장히 다양하지요? 이 ‘엠블레포’라는 단어는 ‘신적인 통찰을 가지고 사람과 사물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그러한 신적인 통찰로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아십니다. 그래서 여전히 추한 이 육신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새겨 놓으신 새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를 보시고 우리를 그렇게 가꿔 가십니다. 그게 바로 ‘엠블레포’입니다.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을 보시고 그의 이름을 '게바‘라고 지어 주십니다.’게바‘는 아람어로 ’반석‘’바위‘라는 뜻입니다. 그 게바를 헬라어로 ’베드로‘라고 부르는 것이고요. 주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지어주심으로 조약돌보다 못한 의지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요한의 아들 시몬의 참 본질을 이미 아셨음을 보여주셨고 거기에서 그를 ’게바‘’반석‘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천명하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셈족의 문화권에서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소유권과 통치권을 말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베드로에게 ’너는 내 것이다. 그리고 난 반드시 너에게 너의 참 본질을 찾아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지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의 이름을 지어주시지요?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창 5:1-2)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2절의 ‘일컬으셨다‘’카라‘라는 단어는 ’이름을 짓다‘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모으시는 과정에서, 다른 말로 새 창조 속의 새 백성을 만드시면서 베드로의 이름을 지어주시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첫 창조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이름을 받고도 타락을 한 것과 비교하여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타락할 수 없고 영원히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순복 하는 참 하나님의 백성, 참 이스라엘을 만들고 계심을 요한복음의 베드로의 이름을 지으시는 장면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창조와 요한복음의 일곱 날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고 했지요? 그 장면은 요한 계시록 마지막 장으로 이어집니다.
(계 22:3-4)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름을 주신 당신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발휘 하셔서 그 분의 성품과 인격을 그 이름을 받은 사람들 속에서 반드시 만들어 내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게 바로 창세기의 아담의 이름을 지으시는 하나님 안에서, 요한복음의 베드로의 이름을 지으시는 예수 님 속에서 힌트 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 창조와 요한복음의 새 창조가 어떻게 대조가 되고 있는지 이해가 가시지요?
우리 성도들은 거듭난 후에도 자신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헛갈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가 우리 성도의 참 모습을 엉뚱한 것으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골방에 묻어둔 채로 마귀가 만들어 준 엉뚱한 옷을 입고 그게 나인 것처럼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을 ’호라오‘하게 된 사람들을 ’떼아오마이‘하시고 ’엠블레포‘하시면서 그들의 참 본질을 찾아주십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미운 오리 새끼라는 동화가 있지요. 그 동화 속의 미운 오리 새끼는 사실 백조였습니다. 그런데 그 미운 오리 새끼가 자신이 그냥 못 생긴 오리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너무나 불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애써 오리의 삶을 흉내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너무나도 아름다운 백조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못 생긴 오리 새끼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주님은 신앙생활을 통해 바로 그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주님의 은혜로 백 점을 받아 놓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5점짜리 인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꾸 사단이 씌어 놓은 엉뚱한 가짜 자기를 바라보면서 ‘넌 5점도 감지덕지야’라고 자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가 백 점짜리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신분으로 변화되게 되었는가를 오관 속에서 경험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목사는 바로 그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통해 여러분의 참 실존을 깨닫게 해 드리고 그 신분에 걸 맞는 삶을 끌어내는 것이 목사의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에게 다른 것 바라지 마세요.
그리고 사도 요한은 본문 38절에서 주님을 좇아 온 세례 요한의 두 제자 안드레와 다른 제자(사도 요한이 거의 분명함)와 주님의 선문답 같은 대화를 통해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주님이 주시는 어떤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을 추구하며 주님 자신만을 찾는 자들임을 보여주십니다.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주님을 좇아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좇아 온 두 제자에게 ‘누구를 찾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 말은 주님께서 두 제자의 마음을 이미 읽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나중에 많은 실수를 하고 어처구니없는 행동들을 하기도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것은 이 세상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함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셨던 것이고 제자들은 자신들이 그 ‘무엇’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닐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답으로 ‘랍비여 어디에 묶으십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주님은 그들에게 ‘와 보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 함께 거하십니다.
(요 1:39)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거하다’하면 생각나는 구절이 있지요?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말은 ’장막을 치다‘’성막을 치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그 분을 좇는 자들 위에 장막을 치시고 하늘의 비밀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바로 안드레가 자기 형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은 성도는 주님을 ’호라오‘해야 할 뿐 아니라 ’주님을, 진리만을’추구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은 우리에게 더 풍성한 하늘의 비밀을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 오늘날 성도들이 쉽게 빠지게 될 오류에 대해서도 지적해 줍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왕까지도 그를 흠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악하고 고집불통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까지도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왔던 것입니다. 그도 사람인데 사람들의 칭찬과 자신의 명성을 왜 싫어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단호하게 그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까지도 주님께로 보냈습니다. 성도는 이 땅의 안내자와 지도자에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내자와 지도자를 통해 주님께로 가야 하는 것이지 목사를 여러분의 하나님으로 삼으셔서는 안 됩니다. 많은 분들이 목사를 통해 하나님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지으면 자신들의 신앙까지 총체적으로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그건 안 됩니다. 목사는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안내하는 안내자요 잠정적인 지도자일 뿐입니다. 절대 목사에게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목사들도 성도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면 안 됩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르치던 성도가 하나님을 더 잘 배우고 더 깊은 신앙의 성숙으로 들어 갈 수 있다면 언제든지 더 나은 곳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성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신 것처럼 주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습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하늘의 비밀을 알고 주님을 좇게 된 사람들은 그보다 더 귀하고 영광스러운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눅 3:1-2) “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 짧은 구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한번 꼽아보세요. 로마의 황제 디베료 가이사(티베리우스 황제), 유대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 빌립, 아빌레네의 분봉왕 루사니아, 유대의 대 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등 당시 세상의 권세를 잡은 사람들은 몽땅 이 구절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당시 세계를 이끌어 가던 세계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여기 등장했습니까? 세상의 역사가들의 눈에는 전혀 띄지 않았던 약대 털옷을 입고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던 세례요한의 때를 가리키는 데 자리 매김 용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이 주인공이었을지 몰라도 성경에서는 세례 요한이 주인공인 것입니다. 그 가치를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증인들은 이 세상의 힘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초개처럼 버리고 주님을 좇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눈에는 바로 여러분이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바로 그 은혜의 복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 은혜를 확인하고 그 은혜 앞에 감읍하여 주님을 더 많이 알고 싶어 말씀을 ‘호라오’하고, 주님이 주시는 어떤 것이 아닌 주님을 추구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안내자와 지도자를 통해 하나님께로 한발 한 발 다가가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경주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나를 완성시키실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에게 실망하실 때마다 그 은혜의 십자가 뒤로 숨으십시오. ‘그래서 내게는 예수가 필요하다’로 가십시오. 여러분의 실존을 보고 절망하지 마세요. 우리에게는 은혜의 십자가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했을 때 인간적인 관점으로 누가 더 남자답고 멋집니까? 당연히 유다입니다.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받은 돈까지 다 돌려주고 당당하게 자신의 죄에 책임을 지고 목매달아 죽습니다. 그러나 그 유다는 그 후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악인의 대명사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 종 앞에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쪼다 베드로는 자기의 불가능함과 추함과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 뒤로 숨었습니다. 그리고는 뻔뻔스럽게 주님께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 뒤로 숨은 베드로는 그 은혜에 의해 자라나서 예수님의 수제자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오직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여러분의 삶을 바꾸고 그 은혜가 여러분을 성숙시켜 주실 것입니다. 은혜 또 은혜, 오직 그 은혜만을 의지하여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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