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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6. 24.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김성수 목사)

 

 

(요 1:19-28) “19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그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20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7)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그는 고백하였다. 또는 '메시아'. 그리스어 그리스도와 히브리어 메시아는 둘 다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뜻함 21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요? 엘리야요?"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 예언자요?" 하고 그들이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시오?" 23 요한이 대답하였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8)'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말이오." 사 40:3(칠십인역) 24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그들이 또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9)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면, 어찌하여 10)세례를 주시오?" 또는 '메시아'. 그리스어 그리스도와 히브리어 메시아는 둘 다 '기름 부음 받은 이'를 뜻함 또는 '침례' 26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11)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또는 '침례' 27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도 없소." 28 이것은 요한이 12)세례를 주던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모두가 전적으로 불가능한 타락의 상태로 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도저히 자력으로 구원을 이룰 수가 없기에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그 분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부으셔서 그들을 어두움 속에서 불러내시고 빛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그 하나님의 은혜는 단발 적이며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며 계속적인 영향력이며 경향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절대 그 것을 잊지 마세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우리 ‘성도의 순종‘을 방법으로 사용하셔서 영향력을 미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은혜가 일을 하는 곳에는 성도의 순종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함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오늘은 요한복음의 첫째 날을 설명하고 있는 19절부터 28절까지를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다시피 요한복음 1장 19절부터 2장11절까지의 일곱 날은 창세기의 천지 창조의 구조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빛으로 시작해서 일곱째 날 하나님의 안식으로 끝나는 창세기의 천지 창조와 빛이신 예수로 시작해서 일곱째 날 ‘어린양의 혼인 잔치로 시작되는 하늘의 안식’을 상징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로 끝나는 두 일곱 날을 잘 기억해 두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1장 18절까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천명한 후에 19절부터 2장 11절까지 창세기의 일곱 날과 똑같은 구조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 질 것임을 보여주시고 2장 11절부터 2장 마지막까지에서 성전을 청소하시는 장면을 통해 구원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재확인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3장에서 유대 관원인 니고데모를 등장시켜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 쪽의 조건을 따라 오는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4장에서 전혀 구원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역시 구원은 인간 쪽의 조건이나 열심을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5장에서 38년 된 베데스다 못 가의 병자의 이야기를 통해 구원은 그렇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나을 수 없는 자들에게 은혜로 임하는 것임을 천명하시고 그 구원은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지게 되는 것임을 6장의 오병 이어의 기적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많은 이적 사건 중에 일곱 개의 이적만을 선별해서 기록함으로 해서 성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임을 또 상징적으로 보여주지요. 요한복음의 일곱 기적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납니까?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시작해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사건으로 끝이 납니다. 그 것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성사되기 위해서는 ‘어린양의 보혈이 뿌려져야 함’을 상징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보여주시고 그 결과 죽은 자들이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죽은 나사로의 부활로 성도의 첫째 부활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만이 기록되어 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은혜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칭의 성화 영화 모두 은혜로 완성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오늘 본문 주해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보낸 제사장들과 레위인 들이 요한에게 찾아와서 질문을 하고 요한이 거기에 답을 하는 형식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그들의 질문에 아주 성의 없는 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 들이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묻습니다. 요한이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이건 당연한 대답이지요.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과 세 번째 질문은 요한이 충분하게 설명을 해 주었더라면 그들이 이해를 했을 법한 질문이었는데 요한은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질문이 ‘네가 엘리야냐?’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아주 짧게 ‘아니라’라고 대답을 합니다. 세 번째 질문은 ‘그럼 네가 그 선지자냐?’라고 묻습니다. 역시 요한은 ‘아니라’라고 짧게 대답을 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주님께서 세례 요한이 바로 ‘오리라 한 엘리야’라고 정확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마 11:13-14) “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그런데 왜 세례 요한은 단박에 ‘아니라’라고 대답을 했을까요? 그리고 요한은 분명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아니라’라고 대답을 했을까요?

 

(눅 16:16)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이렇게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요한을 가리켜 선지자 중의 선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자신이 선지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2절 23절을 보세요.

 

(요 1:22-23) “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요한이 자신을 가리켜 이사야서에 기록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40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사 40:3-5)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마태복음에서는 바로 그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세례요한이라고 명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 3:1-3)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요한 자신도 자신이 바로 이사야서에 예언된 그 선지자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도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이사야서에 예언된 선지자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구구하게 설명을 하지 않고 그냥 ‘난 아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요한은 지금 그의 대답을 통해 ‘너희들이 살고 있는 어둠의 세계와 내가 살고 있는 빛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너희는 내가 설명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라는 것을 이면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엘리야와 성경이 말하는 엘리야, 그리고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선지자와 성경이 말하는 그 선지자가 다른 것임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엘리야와 그 선지자,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엘리야와 그 선지자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엘리야는 어떤 엘리야인가?

 

(말 4:4-6)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에 엘리야에 관한 예언이 나와 있습니다. 이 말라기의 예언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말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타락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심으로 아비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다시 돌이켜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자녀들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그 마음을 돌이켜 아비에게로 향하게 하실 것을 가리켜 엘리야의 사역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예수 님 앞서 와서 예수님과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자녀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사역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엘리야 사역은 예수님의 엘리야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지 그 요한의 사역 자체가 아비의 마음과 자녀들의 마음을 화목하게 돌이키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참 엘리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엘리야의 사역을 미리 보여주고 간 세례요한을 가리켜 주님은 ’엘리야’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게 세례 요한의 삶을 가리켜 ‘엘리야의 삶‘이라고 가르치신 후에 자신도 바로 그 수난과 죽음을 살게 될 것임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바로 주님 자신도 말라기에 예언 된 엘리야의 삶을 살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 17:10-13)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그러니까 말라기에 예언 된 엘리야는 세례 요한과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자녀들의 마음을 돌이켜 화목케 하는 역할을 지칭한 것입니다. 좀 더 확대해 보면 그 엘리야의 역할은 지금 우리 성도들에게 전수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삶을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 하나님의 영광을 효과적으로 반사해 내는 삶’이라고 했지요?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엘리야였습니다. 유대인들도 그 말라기의 내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말라기에서 예언 된 엘리야는 불 말과 불 병거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진짜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엘리야가 와서 회개를 외치며 자녀들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리려 할 것이고 그 뒤를 이어 메시아가 오실 것이며 메시아가 오셔서 다윗 왕국을 회복하실 것으로 확고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매불망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라기 4장 6절의 말씀처럼 그 엘리야가 와서 회개를 외치며 그들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려 할 때 그 것을 거부하면 그들의 땅을 하나님께서 치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와 비슷한 옷차림에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이 왔을 때 그들이 ‘혹시 저 사람이 말라기에 예언된 엘리야가 아닌가?’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러 요한 앞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마 3:1-7)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런데 요한이 그렇게 죄를 자복하고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 인들에게 ‘그래 참 기특하다. 어쩜 그렇게 말을 잘 듣니?’라고 하지 않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저주의 욕을 퍼붓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은 세례의 의미도 단지 정결 예식의 하나로 오해하고 있었고 (정결 예식은 율법. 인간이 인간의 노력으로 깨끗해 질 수 있다고 하는 오해의 상징) 엘리야의 역할을 하고 있는 세례 요한도 잘 못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메시아의 길을 닦는 그런 엘리야로 본 것이지요. 그들의 관심은 죄인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여전히 ‘나’와 ‘나의 행복’에만 있었습니다. 타락한 죄인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복된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길은 그들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방법밖에 없음을 예표 하는 것이 요한의 세례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예표 하는 것이 요한의 세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내용을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유대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을 한 것이며 그들은 설명을 해 줘도 알아들을 수 없기에 그들이 ‘네가 엘리야냐?’라고 물었을 때 그냥 ‘난 엘리야가 아니다’라고만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그 선지자는 신명기 18장에 나오는 선지자입니다.

 

(신 18:15-19)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16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산에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1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19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유대인들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와서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들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달해 주어서 자신들의 힘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고 구원을 얻으며 이 땅에서 찬란한 다윗 왕국을 다시 재건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세례 요한이 신명기에 예언 된 그 선지자가 아닌가를 물어 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신명기에 예언 된 그 선지자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연유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도 엘리야나 선지자일 것이라고 추측했던 것입니다.

 

(마 16:13-14) “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렇게 빛을 보고 빛 속에 들어온 사람과 아직 어두움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서로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공간에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두 세계 간에는 대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관심사도 틀립니다. 여전히 어두움 속에 있는 사람들은 빛의 세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빛의 세계의 행위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굳이 설명하거나 설득하려 하지 않고 어두움에 속한 자들의 질문에 자기가 속한 빛의 세계의 언어로 대답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간혹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자기 혼자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실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대화의 주제부터 내용까지 전혀 일치되는 것이 없을 때가 종종 있지 않으세요? 여러분은 빛의 세계로 이미 들어와 버렸고 세계관과 가치관과 행동양식이 이미 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주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굳이 밝히지 않으시고 감추신 것입니다. 어차피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고 설사 알아본다 하더라도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메시아로 오해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주님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감추시고 제자들에게 입단속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빛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성경이 말하는 메시아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세계에 속한 자들과 빛의 세계로 나온 사람들‘ 여러분은 정말 빛의 세계로 들어오신 분들이 맞습니까? 서로 서로 대화들이 통하세요? 서로의 삶을 보면서 그 삶이 정말 이해가 가세요?

 

지난주에 우리 교회에 나오신 지 얼마 안 되는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미용사이십니다. 그런데 같은 미용실에서 근무하는 우리 교회 집사님의 사는 모습을 보고 교회에 나오시게 되셨답니다. 큰 미용실에서 일을 하시는 분들은 서로 서로에게 질투심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누가 얼마를 벌고 누가 몇 명의 손님을 받았는가를 가지고 얼마나 들 질투를 하는지 거기서 한 번 눈 밖에 난 사람은 한 달을 못 버티고 그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디 비단 미용실뿐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의례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시기나 질투를 받을 때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 자기 손님을 보내주기도 하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 분이 우리 교회 집사님한테 충고를 했대요. 언니는 왜 바보 같이 당하고만 있냐고, 같이 부딪쳐서 본때를 보여줘야 다시는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충고를 했답니다. 그랬더니 우리 교회 집사님께서 그러더래요. ‘유리야 넌 아직 복음을 몰라서 그래, 네가 복음을 알게 되면 너도 나처럼 살게 될 거야’ 그 말을 듣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잘 다니고 계십니다. 어제 제가 이발을 하러 그 집사님께 갔었는데 새로 나오신 분과 두 분이 같이 계셨습니다. 그 집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아침에 유리가 그러는데 ’언니가 맨날 교회에 가서 그런 설교를 들으니까 그렇게 사는 거구나’하면서 드디어 이해를 하기 시작하더랍니다.

 

빛 밖에서 빛의 삶을 보게 되면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어두움 속에서 빛의 삶의 원리로 사는 사람들을 볼 때는 나약하고 바보 같고 어리숙한 멍청이처럼 보이지만 그가 빛으로 들어오게 되면 비로소 ‘이게 옳은 삶이구나’하고 공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세상 원리인 힘의 원리와 빛의 세상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는 완전히 반대의 것이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아주 기분 좋은 전화를 두 통 받았습니다. 두 분 다 지금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두 분 다 마치 약속이나 하신 것처럼 저에게 ‘목사님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들이 닥쳐도 이제 절망이나 자포자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희 가족에게 세심하게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느껴져서 힘이 납니다.’ 이게 이해가 가십니까? 이것이 바로 빛의 세계 속으로 들어온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저는 이런 교인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지요. 빛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환경이나 상황이나 조건이나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자에는 ‘듣는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를 문(聞)과 청(聽)이렇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둘 다 ‘듣는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지만 문(聞)은 무엇이든 그냥 들리는 대로 듣는 것을 말하고 청(聽)은 들리는 것들 중에서 필요한 것을 귀를 기울여 주의 깊게 듣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소문(所聞)이라고 하면 그냥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 전하여 들리는 말‘을 뜻합니다. 소문을 소청이라 하지 않는 이유는 소문이라는 것은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귀를 기울여 주의 깊게 듣는 것은 경청(傾聽)이라고 하지 ’경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보는 것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보이는 것을 그저 보는 것을 견(見)이라고 하고 무엇인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을 관(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두루 두루 보는 것을 견문(見聞)이라고 하고 무엇을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을 ‘견찰‘이 아닌 관찰(觀察)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971년에 아폴로 15호를 타고 달에 갔던 우주인 제임스 어윈은 달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서 우주를 쳐다보면서 ‘어떻게 이 거대한 우주가 하나의 질서 속에서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 질서 속의 우주를 보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지금 저 아래에서는 또 한사람의 지구인이 달 위를 걷고 있다고 대서특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 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구에 오셔서 지구 위를 걸으셨다는 것은 이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사건임을 지금 나는 달 위에서 통감하고 있다’라고 수기를 적었습니다. 제임스 어윈은 달 위에서 하나님을 관(觀)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임스 어윈이 그러한 고백을 한 같은 자리에서 소련 우주인은 ‘우주를 가로질러 달에 와보니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더라’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는 달 위에서 단지 우주를 견(見)한 것이지요.

 

가룟 유다는 3년 반 동안 주님과 함께 다녔지만 관(觀)해야 할 주님은 견(見)하고 견(見)해야 할 돈을 관(觀)했기 때문에 그는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聽)하고 사단의 말을 문(聞)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사단의 말을 청(聽)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문(聞)해 버림으로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문(聞)하고 견(見)합니다. 그러나 빛에 속한 사람들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청(聽)하고 관(觀)합니다. 대신 그들은 세상을 문(聞)하고 견(見)하지요. 여러분은 무엇을 관(觀)하고 무엇을 청(聽)하십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까? 아니면 세상입니까?

 

우리가 오늘 본문의 세례 요한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두 번째 메시지는 ‘빛에 속한 사람은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보신 분은 오늘 본문에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사람이 보낸 사람들이고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은 뚜렷하게 구별이 됩니다. 사람이 보낸 사람들은 사람과 세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이 있고 그 분만을 높이려고 합니다.

 

(요 1:25-27) “25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요 3:28-30) 28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러한 세례 요한의 모습은 바로 빛을 보고 구원을 받은 모든 성도의 삶의 모습이 이러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나는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시며 그 분만이 흥해야 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 공부한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고 가지요.

 

(요 1:6-8) “6 하나님께 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

 

신자는 이처럼 그리스도 앞에서 다만 그 분의 증인일 뿐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는 ‘나는 아니라’라고 자기를 부인하며 그의 삶을 통해 주님이 증거 되며 주님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증인의 삶이 바로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삶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삶입니까? 연못에 달이 비추어 연못에도 달이 뜨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비추어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어떤 삶이었습니까? 십자가의 삶입니다. 나를 비우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과 내 이웃이 득을 보는 삶. 그 삶을 살아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이기도 하며 그 삶이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 1장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이 19절에서 마지막 절까지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요한은 19절에서 28절에서 자기는 빛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29절에서 34절까지에는 빛에 대해 증거 하는 요한의 모습이 나오고 35절부터는 결실이 맺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 두 명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성도의 삶은 첫째 자기가 빛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두 번째 성도의 삶은 빛을 증거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 성도의 삶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진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의 상황과 조건과 환경에 일희일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성도의 삶에 ‘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자꾸 부인되고 내 안에 사시는 예수가 자꾸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소유도 나를 절망케 하거나 교만케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진 소유라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는 나의 소유도 나의 행복을 좌지우지하는 근거가 될 수 있지만 내가 부인되고 죽게 되면 나의 소유가 나의 행복을 결정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고 주님의 증인으로만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족을 인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자랑을 해지도 않습니다. 나의 가족도 ’나‘의 존재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가족이 다른 이들이 보기에 보잘것없고 초라해 보이면 내가 부끄러워지지요? 그래서 젊은이들이 결혼할 때 이왕이면 ‘나’를 돋보이게 해 줄 배우자를 고르는 것입니다. 예쁘고 잘 생기고 부자면서 공부도 많이 한 사람, 그렇게 출발한 사람들은 배우자나 가족이 다른 이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행동을 하고 자기의 체면을 구기게 되면 부끄러워서 거침없이 잘라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도는 자기가 부인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자기 소유의 적음이나 자기의 배우자의 부끄러움도 자기를 절망케 할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 5:44)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죄인들의 본성은 자기들의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제사장들과 레위인 들이 ‘네가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면 도대체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에서 인용이 된 구절인데 우리가 서두에서도 찾아보았지만 한 번 더 찾아 읽도록 하겠습니다.

 

(사 40:3-8)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하라”

 

소리는 소리를 내는 자를 보게 하는 것이지 소리를 내서 소리 자신을 보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는 소리인 자신으로 하여금 사람들이 예수를 바라보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6절의 말씀처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다‘를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의 삶을 통해 인간은 풀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들이 세상에 쌓아놓은 모든 것들은 들의 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자꾸 자신을 비워내고 자기를 포기하고 탐심을 털어 내는 쪽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아닌 돈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삶 속에서 그 물질을 털어 버리실 것입니다. 그가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행복에만 너무 몰두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의 삶 속에서 그 행복의 조건들을 부수어 버리실 것입니다. 그가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만을 위해 살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 몸에 질병을 일으키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가 미워서 그러시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궁극에 도달해야 할 목적지로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우리는 주님을 증거 하는 소리로서의 삶을 열심히 경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경주는 치열해야 합니다. 오늘 새벽 기도 성경 본문이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거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의 신앙생활을 ‘경주‘’아곤‘이라 표현하고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격투‘로 표현합니다. 당시 헬라 문화 안에서 아주 인기를 끌던 마라톤과 검투사의 경기를 인용해서 신자의 신앙생활을 표현합니다. 멈춰 서서도 안 되고 방심해서도 안 됩니다. 목적지까지 끊임없이 달려야 하고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 신자의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열심히 그 길을 경주합시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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