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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우리 기업의 보증으로 오신 성령님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3. 6. 22.

 

 

우리 기업의 보증으로 오신 성령님

 

(김성수 목사)

 

 

(엡 1:11-14)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잠깐 정리를 하고 오늘 공부할 부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하고 영원한 목적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한 때가 되었습니다. 그 때가 찬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예정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만물은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었습니다. 물론 영적으로 완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가시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완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 된 상태를 이 땅에 가시적으로 맛볼 수 있게 하신 한 공동체가 있으니 그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인 통일된 조화된 모습을 가시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이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 나라를 입으로 삶으로 전파 하다가 간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가 보여 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바로 그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다 갔음을 성경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입으로 삶으로 하나님 나라와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다 가는 자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 하고,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듯이 나를 희생해서 남을 세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므로 우리 교회는 이 땅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이며 살아내야 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죄로 인해 질서가 카오스로 되어 버렸고, 질서와 아름다움을 카오스로 만들어 버린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를 해결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이제 질서와 조화가 회복되는 것을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라 하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인간의 구원이고, 그렇게 구원받은 조화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 자들은 이제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자들이므로 이 땅에서의 경쟁이나 다툼 시기와 질투에서 벗어난 천국 시민다운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지난주까지의 내용이었습니다. 잘 정리하게 계세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재통일이 이 에베소서의 주제이며 성경 전체의 주제인 것입니다. 잠시 확인해 볼까요?

 

(엡 1:21-22)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여기서는 우주적인 통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과 3장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는 조화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고, 4장은 교회의 하나 됨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엡 4:4)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장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질서, 조화에 대해서 6장에서는 부모와 자식, 그리고 주인과 종의 질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재통일이 가시적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보여 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하나님의 경륜으로 이루어내실 하나님의 완성된 작품은 누구의 요구에 의해서도 아닌 하나님의 마음의 원대로 이루어 내셨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엡 1:11)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엿장수가 하루에 가위질을 몇 번 합니까? 엿장수 마음대로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원대로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똑같은 말을 우리는 4절과 5절에서 공부했습니다.

 

(엡 1:5)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짧은 문장 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할 정도로 그 사실은 중요한 것입니다. 원래 헬라어 원문 성경을 보면 3절에서 14절까지는 한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암 3:1-2) “1 "이스라엘 자손아, 이 말을 들어라. 이것은 나 주가 너희에게 내리는 심판의 말이다.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모든 족속에게, 내가 선언한다. 2 나는 이 땅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서 오직 너희만을 선택하였으나, 너희가 이 모든 악을 저질렀으니 내가 너희를 처벌하겠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아래서 무엇을 해야 하지요? 아무 것도 안 해도 됩니까? 성경에서 답을 찾아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빌 2:12-13)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우리더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면서 우리에게 이루어 가라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어떠한 행위를 요구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다 하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기쁘신 뜻을 향한 소원을 갖게 하시고 행하게도 하신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우리의 노력과 열심을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시는 방법과 수단으로 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엡 1:13)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게 하고, 행하게 하시나니”

 

왜 그렇게 일을 하시는지 우리가 따지고 들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로 하셨기에 우리는 그냥 수긍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 40:13) “13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롬 11:34)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우리가 그 분의 뜻을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그런데 이해는 안 가는데 믿겨진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8절과 9절에서 공부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허락하셔서 그 비밀을 알게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알리시는 것이 어느 날 기적적으로 자고 일어나니까 알게 되는 그런 식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비밀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만들기 위해 언제나 쓰시는 동일한 방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3절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방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성령의 인침을 받았는가 보세요.

 

(엡 1:13)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유일한 길은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말씀을,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어야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어떤 체험이나 경험 소문, 추측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을 듣고, 들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 지혜와 총명을 부어 주셔서 그 비밀을 알게 하셔야 믿게 되는 수순을 밟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강단에서는 어떤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만이 전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이요, 구원의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무나 많이 반복해서 이제 머릿속에 얼른 떠오르시지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행하신 일에 관한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가 무엇을 행하셨는가가 진리의 말씀이요 복음입니다. 우리는 ‘열심을 내서 새벽기도하자, 금식기도하자, 헌금하자, 봉사하자’를 복음이라 하지 않는다. 그건 오히려 짐이지요.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양하자, 하나님을 빼먹지 말고 예배하자, 열심을 내자’를 복음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착하게 살자, 인내하자, 남을 돕자’를 복음이라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가 빠진 그런 행위에 대한 강요는 Good News가 아니라 Bad News일 뿐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어떻게 Good News가 되겠습니까? Good News는 오직 예수에 관한 이야기이며 은혜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시며, 우리는 누구이며,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이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분이 어떻게 바뀌었고, 우리는 어떤 상속을 받게 되어있는 자인가’가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바꿉니다. 자기에게 쏟아 부어진 은혜가 너무나 감당하기 벅차서 무언가 그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하고 싶은 것이 바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는 말씀의 진의 입니다. 요즈음은 그런 열심 있는 종교행위와 선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서 우리가 점수를 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신 어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을 받아 그 깊은 비밀을 알게 되고 구속 곧 죄 사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 말씀을 성경 두 구절로 정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행 16:14) “14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유럽에서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다가 강가에 여인네 들이 모여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랬더니 그곳에 자주장사 루디아라는 여인이 복음을 듣고, 믿어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지요? 하나님께서 그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놓았더니 그 루디아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 루디아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인치심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즉, 진리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을 알아듣고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그 사실을 성령이 인을 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에 의해 예수께서 오셔서 이루어 놓으신 그 애나케 팔라이오, 재통일이 우리에게 적용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에게 찾아오셔야만 비로소 이루어 질 수 있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성령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인 치심을 다르게 보고 계신데 아무리 그 분의 주장을 읽고 또 읽어도 그 부분은 동의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박영선 목사님도 그 분의 책에다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기 때문에 당신도 성령 론에 관해서는 양다리를 걸쳤다고 말씀하신 것을 읽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자신을 가리켜 기회주의자라고 하는데 자신은 중용의 도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이 성령의 인침에 대해서 보고 있는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먼저 인을 친다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통용이 되는지, 일반적이고 관례적인 용례를 생각해 보지요. 첫째로, 인은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품임을 보증하는 것이지요. 집을 사고 팔 때 우리는 계약서를 씁니다. 계약서는 거기에 사인이나 도장이 찍히지 않으면 효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도장이 찍히고 사인이 들어가야 비로소 그 계약서는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인’은 ‘이것은 진짜다’ ‘진짜임을 보증 한다’는 진정성과 신빙성과 견고함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침에 부여되는 또 다른 의미는 소유자의 표지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소유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전에 서부영화들을 보면 자기소나 말에게 인두를 달궈서 엉덩이 부분에 지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인입니다. 주인들이 각자 자기들만의 표시를 새겨서 ‘이것은 내 것이다’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T자가 새겨져 있으면 윗마을 토마스네 소, L자가 새겨져 있으면 아랫마을 ‘럭셔리 강 네 소’ 이렇게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재산이나 문서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만의 특별한 인감도장이 있어서 그 인이 찍혀 있으면 자기 것이라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한국의 동사무소에 가면 인감도장을 비닐에 찍어서 진짜와 겹쳐보지요? 인감도장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인은 안전 보장의 의미가 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갈 때 대학 성적 증명서와 졸업 증명서를 요구합니다. 그러한 증명서들을 자기가 졸업한 학교에 요청을 하면 그 졸업학교에서는 그 문서들을 봉투에 넣고 거기에 인을 찍어서 해당 학교로 보냅니다. 그래서 혹시 그것이 변조되거나 위조되는 것을 방지합니다. 그 도장을 찍은 부분이 이가 안 맞거나 뜯었다가 붙인 흔적이 있으면 공신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인을 찍는 것은 ‘이것은 이 인이 제대로 찍혀 있는 한 안전한 것이다’라는 증명인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는 이 ‘인침’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요 3:31-33)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 쳤느니라”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진리임을 동조하며 진정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복음을 믿는 다는 것은 우리가 그 복음에 우리의 인을 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진정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바로 나의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곳을 한 군데 더 보지요.

 

(요 6:27)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 치신 분이셨습니다.

 

(마 3:17)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을 자기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라고 인을 치십니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게 해 주십니다.

 

(눅 7:22) “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은 모두 이사야서에 예언된 메시야의 이적입니다. 이러한 이적들이 나타남으로 그 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심을 보증해 주는 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를 오해하고 배반하고 멸시하고 죽여 버렸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 분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주이시고 지옥 권세가 대적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그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침을 받은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속에 어떤 고난과 시험과 역경이 온다 해도 성령의 인침을 받은 것만 확실하다면 우리는 결국에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계 7:2-4) 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 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4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인을 맞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것은 확실하게 우리는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인침을 받으신 자로서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죽으셨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죄의 몸을 가지고 있어서 계속해서 실망하고 실패하겠지만 하나님의 일은 실패치 않으실 것이요 하나님의 계획하신 일은 변개치 않으실 것을 보증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인을 치신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인을 치신다’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상당히 분분합니다. 전통적인 우리 개혁주의 에서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이 바로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순절파나 순 복음 쪽에서는 성령의 인침은 믿은 이후에 경험 할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분명 사도행전에서의 성령이 가시적으로 임한 사건들이 모두 그들이 믿은 이후라는 것을 근거로 그렇게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에 성령 론에서도 다루었지만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한 것이나 8장의 사마리아 전도사건, 19장의 에베소 전도사건, 그리고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은 모두, 이제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민족을 근거로 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성령을 받은 자들’이 교회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하나로(교회로) 통일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그 일은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서만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건들에서는 믿는 자들이 또 다른 어떤 체험을 한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 불리게 될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성령이 임하셔야 함을 설명할 뿐입니다.

 

(롬 8:9-11) “9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10 또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영은 의 때문에 생명을 얻습니다. 11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보세요.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성령이 거 하시는가, 아닌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인을 치신다는 말은 믿은 다음에 그 믿음을 확증해 주는 어떤 체험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눈을 뜨게 되고 하나님의 비밀을 이해하게 되어 예수를 믿게 되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된 사실을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정리를 해 드리면 우리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영원히 죽을 자들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로 바뀌었다는 보증인 것입니다.

 

(고후 5:1-5)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성경이 잘 요약해 주고 있지요? 오늘 본문 13절과 1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엡 1:13-14)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의 ‘이는’은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의 인침을 받는 다는 것은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신다는 것이지요. 바울은 성령의 인침과 보증을 항상 불가분해적으로 연결을 시키고 있습니다.

 

(고후 1:22) “2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여기서 보증이라는 말로 쓰인 헬라어 ‘알라본’은 당시 사람들이 상거래에서 쓰던 말이었습니다. 즉 어떤 것을 사고 팔 때, 사는 사람이 그 물건을 사기 위해서 계약금으로 거는 것을 ‘알라본’ 보증‘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담보‘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담보는 어떤 것을 구입하려고 그에 상응하는 다른 것을 맡기고 다음에 돈을 가져와서 그 담보물을 찾아는 것이지만, 보증은 그가 치러야 할 것의 일부를 미리 치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천불짜리 자전거를 사려고 하는데 이것을 확실하게 사겠다는 의지로 100불을 걸고 가는 것을 ‘보증’ ‘알라본’이라 하고, 반지를 맡기고 훗날 천불을 가져와서 그 자전거를 사고 반지를 찾아가는 것을 ‘담보’라 합니다. 즉 보증으로 지불하는 것은 나중에 지불할 것과 동일한 것의 일부분인 것이다. 나중에 사과 천개로 지불할 것의 보증금은 사과 열 개여야 하는 것입니다. 배 열 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왜 이 구별을 굳이 하는가 하는 것은 조금 있다가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 보증을 해 주시는가하면 하나님의 소유들, 하나님의 기업들의 구속의 날까지 성령으로 보증해 주신다고 합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전에 자세히 공부했지요. 구속은 영화까지 다 포함 하는 거라 했지요? 죄 사함에서 시작하여 영화까지 포함한 구원의 최종적 완성을 뜻하는 단어가 ‘구속’입니다. 즉,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와 계획이 다 이루어지는 날까지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는 말은 ‘구속이 완성되어 완전한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의 맛을 우리가 이 땅의 삶 속에서 맛 볼 수 있게 계약금으로, 완전치는 않지만 동일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가끔씩 맛 볼 수 있도록,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롬 8:23)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표현을 합니다. ‘성령의 인 치심을 받은 자들’이나 마찬가지의 의미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기다린다고 합니까?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구속은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을 의미한다고 했지요? 여기서 성령의 인 치심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고 설명을 하는데, 그 말뜻을 이해하면 성령의 인 치심과 그것이 우리 기업에 보증이 된다는 말이 쉽게 이해가 갈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 추수를 하기 전에 항상 들에 나가 처음 익은 이삭 몇 개를 끊어다가 밀가루를 만들어서 자기들이 지은 올해 농사의 맛을 보기 위해 빵을 구워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빵이 맛있으면 그 밀 밭 전체가 농사가 잘 된 것이고, 그 빵이 맛이 형편없으면 농사는 망쳤다고 판단했었습니다. 즉 성령을 처음 익은 열매라고 표현한 것은 그 성령의 인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천국에서 누릴 그 영광과 기쁨과 충만함을 미리 맛 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바로 그 것이 성령의 역할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성령을 처음 익은 열매요, 보증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보증은 나중에 완전한 것으로 온전하게 지불되어질 것의 일부라고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성령의 인 치심을 받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맛을 미리 보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바로 우리가 성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성령의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 성령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애나케팔라이오, 재통일되는 날, 하나님 계획의 완성의 날’에 우리가 누릴 모든 것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아 알 수 있게 하시는 보증이시며, 계약금이시며 처음 익은 열매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마땅히 그 하늘의 영광을 경험하며 살 수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하늘을 소망하라고 하나님께서 그 하늘을 맛볼 수 있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인을 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삶 속에서 ‘와! 정말 천국가면 이런 기쁨 속에서 살게 되겠구나.’라는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교회가 모이는 것을 통해서, 그러한 하늘나라 삶의 맛보기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면서 그 하늘을 미리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오심은 우리로 하여금 임마누엘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임마누엘이 무슨 뜻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입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천국 현실을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우리가 경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분으로 받아들이고 그 분의 통치를 현실로 받아들여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인침을 받고 나면 그 성령은 계속해서 우리 안에 내주 하십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 흐르는 하나의 언약의 실현인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일관성 있게 흐르는 가장 중요한 핵심 언약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 되고 저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이라고 했지요? 구약의 전체가 그 내용을 담고 있고 성경의 끝이 그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계 21:1-4)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입니다. 역사의 결론이라 할 수 있지요. 그 결론이 어떻게 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바로 이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해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태초부터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인침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 언약의 실현을 미리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지옥에 갈려고 해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면 하나님이 따라 가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십니다.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우리와 성령이 하나로 묶이게 되어 우리에게 구원의 완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살아가게 되는 그 하늘의 기쁨을 이 세상에서 맛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하늘을 살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하늘의 천국과 지옥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유 1:24-25)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 지어다 아멘”

 

우리는 분명 흠 없이 완전한 자가 되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계 21:8)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27)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 책에 기록된 자들 뿐이라”

 

(계 22:11)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계 22:14-15) “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이렇게 모든 흠과 점이 다 걸러 내어진 완전한 자들만으로 이루어진 그 하늘나라의 삶을 우리가 이 땅에서 처음 익은 열매, 성령의 침으로 말미암아 맛보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함과 정결함과 의로움에서 오는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의 미움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앞에서 걸러질 세상의 모든 소원, 세상의 모습을 보고 혐오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불의를 미워해야 합니다.

 

(딤후 2:19)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기초는 이미 튼튼히 서 있고, 거기에는 "주께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아신다"는 말씀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다 불의에서 떠나라" 는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그 인 침의 내용이 바로 ‘주께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아신다.’는 것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다 불의에서 떠나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 인 침을 받은 자들은 당연히 그 불의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엡 3:16-19) “16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자들, 성령으로 보증을 받고 있는 자들은 그러한 삶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심으로 우리는 피 흘리기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네덜란드 자유대학의 미술사를 가르치는 한스 루크마커가 쓴 ‘Art needs no justification 이라는 책에 1800년경의 일본 화가인 호쿠사이에 관한 이야기가 써있습니다. 호쿠사이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닭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림을 부탁한 사람은 호쿠사이 정도면 하루 안에 그 닭 그림을 그려 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쿠사이는 일주일 후에 그림을 찾으러 오라고 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찾아갔더니 한 달 후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미루기를 삼 년이 걸렸습니다. 그림을 부탁한 사람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그 날을 결판을 내기로 하고 찾아 갔습니다. 호쿠사이는 그제 서야 일필휘지로 한 순간에 닭 그림을 그려 주었습니다. 그림을 부탁한 사람은 더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 한 순간에 그릴 수 있는 사람이 자기를 삼 년이나 기다리게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호쿠사이에게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호쿠사이는 말없이 구석에 있는 자기의 방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는 지난 삼 년간 호쿠사이가 연습하며 그린 닭 그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예술은 핑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호쿠사이는 자기의 닭 그림이 스스로에게 만족스러울 때가지 닭 그림을 연습한 후에 그림을 그려 준 것입니다. 이러한 자존심과 열심이 왜 우리 성도들에게는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심을 가지고 열심히 연습하고 훈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늘이 주는 기쁨과 행복과 만족감을 맛보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하늘의 것으로만 즐겁고 기쁜 사람들입니다.

 

(벧전 1:8)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빌 4:4) “4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우리는 이렇게 이 세상에서 하늘의 것들을 누리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누릴 수밖에 없게끔 되어 있습니다. 정말 그 평강을 누리고 계세요?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까? 정말 우리는 성령을 보증으로 받은 자들 맞습니까? 그럼 이제 13절 14절을 우리가 공부한 것을 대입해서 풀어서 읽어보겠습니다.

 

(엡 1:13-14)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인 치심을 받았습니다. 14 이 성령은 우리가 받을 하늘나라 상속의 보증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구속을 받을 때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기뻐하며 찬미하게 합니다.”

 

됐습니까? 이해가 가세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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