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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 그 후...

가을 그 끄트머리에서

by IMmiji 2012. 10. 23.

이번 가을을 병원에서 맞고 다 보내다시피 했다.

수술 일주일만에 생일을 맞았고,

그 후 보름만에 추석을 보냈었다.

9월을 정신없이 보내고 시월을 한참 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창문 너머로 계절을 가늠하며 하루 하루를 지냈다.

좁은 병실 안을 운동삼아 하루에도 백 여 차례 오가며 보냈다.

내 병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의사들이든 간호사들이든

혹은 시도때도 없이 들어오는 검사원들이든,

들어올 때마다 손세정제를 하고 마스크를 쓰고 슬리퍼를 잠시 바꿔 신었지만,

그 병실에 24시간 있는 나는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

내내 마스크를 쓰고 지냈었다.

지금도 나는 마스크를 쓰고 있고 잘 때도 꼭 쓰고 잔다.

 

그렇게 가을을 잊고 살았지만,

2012년의 가을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을이 되었다.

소아당뇨로 진단 받은 지 올해로 꼭 38년이 된다.

성경 속의 38년된 병자처럼, 나도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

이식을 받지 않았어도 투석을 하며 살기야 했겠지만,

그렇게 사는 것과 투석하지 않고 스스로 소변을 보며 사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신장이 제 기능을 하니, 혈액의 흐름이 원활해져 장 운동이 활발해졌고,

늘 백짓장같던 내 손바닥이 붉은 색이 돌며 손가락 끝에도 피가 돈다.

투석 시간에 쫓겨 나갔다가도 들어오고 제 시간에 맞춰 돌아오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이렇게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어느새 이것이 내게 주어진 현실임을 깨닫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된다.

나름대로 신장환우들의 카페에서 투석하며 이식을 준비하거나,

혹은 이식을 받고 생활하는 이들의 얘기를 접하며 지식을 쌓는다고 했음에도,

병원에 있으면서 이식 후의 문제들에 대해 알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식 수술전이나 후나 생활에 있어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투석할 때 받던 혜택들이 이식과 함께 없어지고,

면역억제제를 비롯한 엄청난 투약비용으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다는 소식으로

잠시 심란하고 생각이 복잡했었다.

 

병원에서야, 환자들 각자의 처지나 형편을 모르니 일일이 다 말해 줄 수야 없었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이식 후의 일들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이 의무가 아닌가 싶다.

나 역시도 그저 단순하게 이식을 받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지,

이식만 받으면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나고 해결이 되는 줄만 알았었다.

면역억제제란 것도 한 일 이년 먹으면 장기가 내 몸에 적응이 되어 더는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려니 편하게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나처럼 가진 것 없는 사람은, 힘들어도 합병증이 생겨도

그냥 투석만 받으면서 목숨 다하는 날까지 사는 게 맞지 않나 싶을 정도로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고 감당하기 버거운 것임을 알았다.

그렇게 힘들고 돈 많이 드는 수술을 하고도 신장이 제 기능을 다하는 날까지는

면역억제제를 복용해야 하는데 그 비용을 감당치 못해 힘들어 한다면

그건 무슨 얄궂은 일이란 말인가.

그렇게 심란해 하다가 지금 내가 뭘 하는가 싶었다.

언제 내가 가진 게 있어서, 능력이 있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가.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오려했다면 나는 이미 예전에 사라졌어야 했다.

수술 전에도 수술 자체도 그리고 수술 후에도... 나는 내가 사는 게 아님을 잊고

시건방진 생각을 하고 교만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지껏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내와 놓고서는, 앞으로는 나 스스로의 힘으로

살겠다고 그런 염려를 한다는 것인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해 주신 하나님께서,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부터는 너 스스로 네 힘으로 한 번 살아봐라...

그러실 분인가 말이다.

한 번 택하셔서 책임져 주신 분이 중간에 그만두실 거라면 시작도 않으셨겠지.

어차피 나를 핏값으로 사신 분은 주님이시니까, 이 몸은 주님 것이니까,

죽이시든 살리시든 알아서 하시려니 하고 믿고 맡기지 않았던가 말이다.

맡겨놓고 새삼스레 무슨 걱정이고 불안이란 말인가.

웃긴다.

 

혼자서 들까부는 나를 하나님께서 참 잘 논다...고 웃으며 보고 계실 것 같다.

이게 다 내 믿음이 아직도 많이 어려서 그렇다.

언제쯤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단단한 것을 먹게 될는지...

험한 길 넘어 왔다고 여겼는데 아직 갈 길이 먼 듯하다.

내 몸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면서도 이러니 할 말이 없다.

 

이렇게 기나긴 시간을 보내며 혼자 고민하고 혼자 기도하며 가을을 살았다.

병실 창문 너머의 하늘을 하나님 얼굴을 바라보듯 보며 기도할 때가 많았다.

거기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종일토록 혼자 지내면서도 외롭지 않게, 혼자가 아닌 것처럼 지낼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던 적이 또 언제 있었나 싶을 만큼

그래서 이 가을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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