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요한 계시록의 내용이 나타날 때
(김성수 목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인간이 타락을 하고 부패해서 더럽고 추악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그 더러운 것들을 제하여 버리시고 새롭게 회복시키시고 재창조해 내시는 것을 우리가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 안에 있는 첫 창조의 더러운 부산물들이 씻겨 나가는 것처럼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함께 저주를 받아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된 이 자연도 그 더러운 죄로 말미암아 점점 파괴되고 우주의 질서도 점점 파괴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우주는 그렇게 첫 창조의 더러운 부분들을 잃어버리고 놓아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다 놓아버리게 될 때 새로운 것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작은 종말들을 겪으면서 결국 궁극의 종말로 치닫게 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알아듣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구원을 얻으며 이미 구원을 얻은 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거룩으로 돌이키게 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접하고 수많은 죽음들을 보면서도 그 죽음이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삽니다. 마치 자기는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들 삽니다. 자기는 영원히 건강할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영원히 부자일 것처럼 삽니다)
(계 6:12-17) “12 그 어린 양이 여섯째 봉인을 뗄 때에, 나는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해는 검은 머리털로 짠 천과 같이 검게 되고, 달은 온통 피와 같이 되고, 13 하늘의 별들은, 무화과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려서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듯이, 떨어졌습니다.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이 사라지고, 제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산이나 섬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15 그러자 땅의 왕들과 고관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세도가들과 노예와 자유인과, 모두가 동굴과 산의 바위들 틈에 숨어서, 16 산과 바위를 바라보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숨겨다오. 17 그들의 큰 진노의 날이 이르렀다. 누가 이것을 버티어 낼 수 있겠느냐?"
우리는 지난 시간에 다섯 번째 인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모두가 순교자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순교자(Martyr)는 증인이라고도 번역이 되지요? 우리는 예수를 삶으로 나타내야 하는 증인들이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 속의 고난인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이 일곱 인의 재앙을 어떤 관점으로 풀어가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첫 창조의 더러운 것들을 소멸시키시고 새 창조를 완성하시는 데에 여러 가지 환난과 궁핍 등의 재앙을 사용하시는데 그 것들이 지금 우리의 삶 속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관점에서 이 일곱 인의 재앙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서 4장 말씀처럼 우리가 구원을 받고도 우리 안에 공존하는 옛 사람, 우리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환난과 궁핍과 핍박에 그대로 노출시키신다는 관점으로 이 인의 재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종말이라는 것,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것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런 측면으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사단과 마귀의 세력, 죄, 그 더러운 것들의 완전한 죽음이다’ 맞습니까? 그런데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옛 것들이 남아 있고 사단은 그 옛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가 되어 있지만 이 시간 속에서 하나님 나라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추하고 어둡고 더러운 것들을 우리의 성품이나 인격 등의 제2원인을 전혀 강제하지 않으시며 깨 버리시는데 거기에 필요한 것들이 바로 십자가라고 표현이 되는 환난이요 고난인 것입니다. 깊은 화상을 입게 되면 의사는 화상을 입은 환자의 타버린 환부를 날카로운 칼로 마취도 없이 긁어냅니다. 그렇게 긁어내서 피를 내야 새살이 돋기 때문입니다. 당장 아픈 것을 못 참아서 의사의 손을 묶어 버리면 평생 그 사람은 쭈그러진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심지어 그 살들이 썩어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그 타버리고 썩어버린 환부를 긁어내고 새 살 돋은 새 사람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기 위한 과정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때로 그렇게 아프고 날카로운 메스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관점에서 이 일곱 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여섯 번째 인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섯 번째 인이 떼어지자 우주의 질서가 파괴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고 별들이 쏟아져 내려옵니다. 많은 이들이 이 부분을 문자 적으로 해석을 합니다만 달이 피같이 된다던 가 별들이 땅에 떨어지는 부분을 문자 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문자 적으로 해석을 하시는 분들도 별들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핵폭탄이라든지 아니면 미국의 멸망 등으로 상징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저는 이 여섯 번째 인의 환상을 상징적인 해석을 요하는 부분으로 봅니다. 우리가 나중에 21장을 공부할 때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여러분 이 우주와 우주의 삶인, 역사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인 교회의 삶과 동일한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인간이 타락을 하고 부패해서 더럽고 추악하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그 더러운 것들을 제하여 버리시고 새롭게 회복시키시고 재창조해 내시는 것을 우리가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 우주도 역시 그러한 경로를 통해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우리 안에 있는 첫 창조의 더러운 부산물들이 씻겨 나가는 것처럼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함께 저주를 받아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된 이 자연도 그 더러운 죄로 말미암아 점점 파괴되고 우주의 질서도 점점 파괴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우주는 그렇게 첫 창조의 더러운 부분들을 잃어버리고 놓아 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다 놓아버리게 될 때 새로운 것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으로 이 여섯 번째 인의 환상을 해석해 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우주를 비롯한 사람들까지도 옛 것들은 다 심판하여 불에 태워 버릴 것입니다. 타락했으니까, 더러운 것들이니까 그렇게 옛 우주도 죽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습을 좇는 옛 사람도 죽는 것입니다. 다 지옥에서 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망이며 그게 최후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어 내야할 그 지옥의 고통을 다 모아서 어떤 분이 다 겪어 내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2,000년 전에 우리를 품에 안고 그 영원의 고통을 영원이신 하나님이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 옛 사람은 이미 그 때 예수님과 함께 지옥에서 다 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미 옛 것들을 다 태워버린 새것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새것들만 최후의 사망으로부터 건짐을 받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인생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새 사람이 되기 전의 옛 사람이 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만 했으며, 어떻게 죽었는지 그리고 그 십자가는 얼마나 힘든 것인지에 대한 그 구속의 내용을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지금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그 구속의 내용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환난을 통해서 십자가를 조금 이해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가며 궁극에는 ‘하나님 저는 하나님만 따라 살겠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고 인정하며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목적입니다. 우리는 이 여섯 번째 인에서도 바로 그 내용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서 단순히 언젠가 마지막 날이 되면 해가 검어지고 달이 피같이 되고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이라는 미래주의 적 해석에서 그치시면 안 됩니다. 분명 이 사건들은 미래의 어느 날 인간들에게 닥칠 종말의 사건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일곱 재앙의 마지막인 일곱 번째 대접을 쏟으실 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계 16:18-20) 17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 하니 18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 20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
분명 마지막 종말의 때를 설명하는데 여섯 번째 인의 재앙의 내용과 똑같은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계 20:10-11)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11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역시 최후의 종말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이제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게 되는 장면입니다. ‘보좌와 거기 앉으신 분 앞에서 땅과 하늘이 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늘이 두루 마리처럼 말려 올라가고 각 산과 섬이 자리를 옮기웠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이렇게 여섯 번째 인의 환상은 마지막 종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단순히 그러한 미래에 있을 종말의 사건을 기술해 놓은 것이라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위로와 격려가 되겠습니까? 성경은 항상 그 말씀을 접하는 현재의 교회와 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여섯 번째 인의 환상에서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사 13:10,13) “10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13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오늘 본문과 흡사하지요? 그런데 이사야서에서의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이 예언은 바벨론의 심판과 종말에 관한 이중적 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 34:1,4) “1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어다 4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 마리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요한계시록의 본문과 거의 같은 단어들을 쓰고 있지요? 그런데 이 대목도 1절의 말씀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열국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시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도 열국에 대한 심판과 종말의 사건, 역시 이중적 예언입니다.
(욜 2:31-32)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오늘 계시록 본문과 거의 똑같지요? 이 요엘 서의 말씀 역시 당시 하나님을 거역하는 열 방 나라에 대한 심판의 예언입니다. 이 구절 역시 그 열방의 나라에 대한 심판의 예언과 종말의 사건을 동시에 담고 있는 이중적 예언입니다.
(겔 32:7-8) “7 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워 별로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우며 달로 빛을 발하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 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두움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나 주 여호와의 말이로다”
이 부분은 애굽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역시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이 어두워진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 부분도 역시 애굽에 대한 심판과 최후의 종말의 이중적 예언입니다.
(마 24:3-31)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AD70년에 있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종말의 사건을 동시에 이중적으로 예언을 하시는 부분입니다. 미래에 올 최후의 종말과 현재에 일어나고 있고 잠시 후에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한 사건처럼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이 모든 구절들은 역사 속에서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즉, 현재에 일어나는 사건들과 종말의 궁극적 심판을 동시에 한 사건인 것처럼 경고하고 선포하는 구절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서 읽어내야 할 것은 언젠가 이 우주는 최후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인데 지금 우리의 역사와 인생 속에서도 그 최후의 종말로 향하는 작은 종말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읽어 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 작은 종말들을 겪으면서 결국 궁극의 종말로 치닫게 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알아듣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구원을 얻으며 이미 구원을 얻은 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거룩으로 돌이키게 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다.
(엘 2:1-13) “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 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11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이 장면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죄악에 바진 열국, 즉 세상 나라들을 치는 장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나님의 자녀들을 악한 세력을 들어서 치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역시 ‘지진이 일어나고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들이 빛을 잃는다’는 똑같은 표현이 쓰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은 작은 종말의 사건을 겪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고 /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돌이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과 똑같이 종말의 사건들을 현재의 인생에서 조금 씩 조금씩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종말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옛 것들을 태워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한 발 한발 돌아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종말에 일어날 일들, 악이 완전히 소멸되고 , 타락으로 말미암은 첫 창조의 더러운 것들이 소멸되고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거룩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게 되는 마지막 종말의 사건들이 우리의 인생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삶의 모든 환난과 고난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해가 검어지고 달이 핏빛이 되고 하늘이 말려 올라가는 것같이 힘겨운 일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일들은 전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축복의 사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이루어지게 된 십자가 앞에서 똑같이 지진이 일어나고 해가 검어지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의 죄를 짊어지신 은혜와 감사의 사건이지만 택함을 받지 못한 악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과 무시무시함을 미리 보여주는 심판의 사건입니다. 똑같습니다. 지금도 우리 인생 속에 그 십자가가 계속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우리의 죄 된 경향들이 죽어 가는 은혜의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죽은 거니까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신자인 여러분의 삶 속에 이 요한계시록이 실제로 살아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서 해와 달과 별과 땅과 바다와 섬들, 즉 우리 삶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첫 창조의 것들이 자꾸 소멸되고 떨어져 나가는 것들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착각하고 삽니다. 다른 것은 다 사라져도 해와 달과 별과 땅과 바다만은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은연중에 우리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버리는 것 같은 일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접하고 수많은 죽음들을 보면서도 그 죽음이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삽니다. 마치 자기는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들 삽니다. 자기는 영원히 건강할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영원히 부자일 것처럼 삽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것들을 흔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마지막 날 다 불 타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마지막 날에 첫 창조를 대표하는 해와 달이 검어지고 핏빛이 되고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하늘이 말려 올라가고 섬들이 사라져 버릴 것처럼 너희들이 추구하고 있는 그 땅의 것들은 언젠가 다 불 타 버릴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의 삶의 작은 종말들을 통해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가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복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고난이 십자가가 나타날 때 여러분은 ‘아, 난 진짜구나’하고 감격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해와 달과 별과 땅과 바다와 섬들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해도 하나님 나라와 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는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요한 계시록이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날 때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게 다 이렇게 하릴없이 사라지는 것이구나. 모든 게 다 이렇게 허무한 것이구나. 그런데 이제 나는 영원한 축복 속에 들어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그리고 바로 이런 사건들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새 사람을 둘러 싸고 있는 악한 옛 사람을 공격하여 죽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고후 4:17-18)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환난들이 진짜 경한 것입니까? 가벼우세요? 아니요, 미치도록 무겁습니다. 이 인생만큼 무거운 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을 왜 가볍다고 표현합니까? 그 미치도록 무거운 인생의 고난들이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그 나라의 삶과 비교하니까 그것은 가볍다고 표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천국의 삶은 엄청난 영광의 삶인 것을 사도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삼층 천에 올라가서 천국을 보고 왔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까짓 거, 이런 환난쯤이야 가볍게 넘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벼운 환난은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계시록을 통해서 그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여러분,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살아남을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15절부터 보시면,
(계 6:15-17) “15 그러자 땅의 왕들과 고관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세도가들과 노예와 자유인과, 모두가 동굴과 산의 바위들 틈에 숨어서, 16 산과 바위를 바라보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과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숨겨다오. 17 그들의 큰 진노의 날이 이르렀다. 누가 이것을 버티어 낼 수 있겠느냐?"
15절에 있는 땅의 임금들 왕족들, 장군, 부자, 강한 자, 종들, 자유인들이 모두 산과 바위틈에 숨어서 벌벌 떱니다. 이 일곱 부류의 사람들은 요한이 일곱이라는 완전수를 써서 전 인류를 상징한 것입니다. 전 인류가 모두 그 하나님의 진노 앞에 벌벌 떨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차라리 산과 바위에게 ‘우리 위에 떨어져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 ‘누가 그 무시무시한 진노 앞에 능히 서겠는가?’하고 끝을 맺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 앞에 무사히 설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죄인입니다
(스 9:15) 1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나 1:5-6) “5 그로 인하여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의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솟아 오르는도다 6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그를 인하여 바위들이 깨어지는도다”
(말 3:2) “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이렇게 여호와의 진노 앞에 설 자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이 여섯 번째 인의 환상을 마치면서 ‘누가 그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있겠는가?’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그 진노에서 건짐 받은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교회다‘라고 6장 마지막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7장이 삽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서는 천상의 교회인 144,000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 무시무시한 진노 앞에 아무도 설자가 없으나 유일하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만이 그 진노에서 살아남아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지키시니까
(계 7:3) “3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도장을 찍을 때까지는,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아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통해 이 계시록을 경험하시는 것입니다. 이 미칠 것 같은 인생 속에서 세상은 그렇게 미친 짓들을 하며 살다가 영원히 불타게 되지만 이 미칠 것 같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지키시며 오히려 내가 그 일로 거룩하게 되어지고 버려야 할 옛 것들을 버리게 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걸 아는 자들만이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참 기쁨을 누립니다. 그들만이 참 평안을 누립니다. 그게 기독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평생 그거 하다가 가시는 분들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고,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 아시겠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루를 챙기지 않고 무슨 비전을 갖고 꿈을 갖고 세계를 품에 안으려고 하는 시도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운’입니까?
여러분은 여의도 광장에 모여 세계를 복음화 하겠다는 운동을 하시기 전에, 다운타운에 나가서 노숙자들 빵 나눠주시기 전에, 북한을 복음화 시키겠다는 야심찬 비전을 가지시기 전에 여러분의 거룩부터 챙기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러한 일련의 일들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거룩을 챙겨가는 그 여정 속에서 그러한 사회적 도리나 도덕적, 윤리적 행위들은 열매로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 것만을 목적으로 삼아 ‘하나님 나 이렇게 착한 일 했는데 보이세요?‘라고 하는 이러한 자기 의를 쌓는 도구로 선행이 쓰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루하루 여러분의 거룩을 열심히 챙기시는 가운데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먹이시는 것이니까요.
비전은 오늘을 회피하고 오늘로부터 도망하려는 자들의 핑계입니다. 교회는 우리의 비전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내 새끼들 거룩하게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오늘을 열심히 살아내십시오. 오늘날 많은 교회의 강대상 위에 얼마나 많은 비전들이 난무하고 있습니까? 정말 그거 할 자격 있으신 분들입니까? 정말 자신 있으세요? 먼저 여러분의 실력을 키우세요. 진짜 기독교가 무엇인지부터 정확하게 공부하십시오.
1912년에 대서양에서 침몰 한 타이타닉 호를 아시지요? 그 타이타닉 호의 별명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침몰하지 않는 배’였습니다. 그런데 첫 출항에서 침몰했습니다. 타이타닉 호는 선저가 이중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혹 배가 좌초되어서 물이 들어오게 되면 즉시 그 선실을 폐쇄해서 더 이상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설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 되어 배가 가라앉는다 할지라도 적어도 반나절의 시간이 걸리도록 설계가 되어 있던 배였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2시간 40분 만에 완전히 침몰해 버렸습니다. 배가 침몰되기 전까지 타이타닉 호에서 무선신호로 SOS가 계속 날아 왔었다고 합니다. 그 SOS가 무슨 의미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Save our ship이다, Save our soul이다’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냥 그 후부터 조난 신호나 구조 신호를 SOS로 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만들어졌고 자랑거리였던 배가 왜 그렇게 쉽게 침몰되었는지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그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그 이유인즉 당시 조선술이 합금 술보다 너무 앞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합금 술은 저온에서 잘 견뎌낼 수 있는 철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실력이었습니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한 대서양의 수온이 영하 1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만들어진 철은 그런 저온에서는 비스킷처럼 부숴 지는 철이었다고 합니다. 배를 만드는 재료인 철은 아직 비스킷인데 6만 톤이 넘는 큰 배를 만드는 조선술만 발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작정 큰 배를 만들어서 띄우는 바람에 타이타닉 호는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빙산으로 배에 작은 구멍이 나자 삽시간에 그 배의 밑바닥이 비스킷처럼 부숴 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시기 전에 먼저 여러분의 실력을 키우세요. 여러분의 거룩부터 챙기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거룩을 완성해 가는 길에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작은 종말들을 여러분의 삶 속에 허락하실 때 그 작은 종말들이 여러분의 삶에 닥치는 이유를 명확히 분별해 내십시오. 그리고 그 속에서도 평안을 잃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기뻐하시는 겁니다. 그게 실력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러분이 이 땅에 쌓는 것은 모두 침몰해 버릴 것입니다.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땅도 바다도 해도 달도 별도 모두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백성들인 여러분뿐입니다. 그러니까 불타버릴 것들을 위해 시간을 소비하지 마시고 영원한 것들을 위해 여러분의 삶을 투자하십시오. -김성수 목사님 설교문(text)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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