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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라오디게아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2. 26.

 

 

라오디게아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김성수 목사)

 

 

(이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은 전체 요한 계시록의 요약입니다. 그 내용을 점진적이며 반복적으로 기술을 해 가면서 영광스러운 결론을 맺는 것이 요한 계시록의 내용입니다. ‘아멘 하나님’에 들어있는 내용은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때문에, 하나님의 그 언약 때문에 기쁘고 안전감을 느끼고 부요함을 느껴야 하는 자들입니다. 말씀 때문이 아닌 나의 환경과 나의 열심으로 맺은 결과물들을 보며 안전감과 부요함을 느끼는 자들을 주님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하신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뭡니까? 미움인가요? 무관심입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왜 책망하고 징계합니까? 다 사랑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제가 다소 과하게 우리 청년들의 게으름이나 불성실함을 혼내는 것은 제가 그들을 사랑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망과 징계가 있는 삶은 하나님께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계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책망과 징계는 하나님의 열심의 증거입니다.)

 

 

(계 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1)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15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7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18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20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1 이기는 사람은 마치,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22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치면 일곱 교회에 보내시는 일곱 편지는 끝이 납니다.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보내시는 일곱 편지는 사탄이 교회시대를 통해 교회를 어떻게 미혹할 것인가에 대한 충고와 조언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했지요? 우리는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공부하면서 교회가 첫사랑을 잃어버린 이파리만 풍성한 행위(바른 복음에 근거한, 은혜로 말미암은 자발적이요 자연적인 성도로서의 행위가 아닌 가식적이고 외식 적인 그러한 행위)가 교회를 엉터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공부하면서 사탄은 환난과 핍박과 궁핍으로 교회를 좌절시키고 낙담시키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환난과 핍박과 궁핍에 굴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을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공부하면서 사탄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의 교훈 같은 잘못된 교리와 교훈을 교회로 스며들게 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행음을 하게 만든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고 그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만을 좇다보면 언제든지 그러한 잘못된 교리에 현혹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공부하면서 사탄이 교회를 이세벨의 가르침인 우상 숭배나 신비주의, 기복주의 같은 엉터리 교리로 미혹한다는 것을 배웠지요?

 

그리고 사데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공부하면서 사탄은 교회에게 하나님과 관계없는 많은 일을 하게 만들고, 사람도 많이 모아 주고 물질도 풍성하게 공급해서, 그 자체에 만족하는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로 만들려고 우는 사자처럼 교회를 미혹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공부하면서 사탄은 가난과 궁핍과 초라함으로 교회를 낙담시키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으로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소망을 바라보며 이겨낸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은 전체 요한 계시록의 요약입니다. 그 내용을 점진적이며 반복적으로 기술을 해 가면서 영광스러운 결론을 맺는 것이 요한 계시록의 내용입니다. 그럼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한절 한 절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교통의 요충지였고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부유한 도시였고 인구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은행업이 발달해 있었고 아주 유명한 의술 학교와 의료 시설이 있었던 도시입니다. 그 의료시설에서는 안질을 낫게 하는 훌륭한 안약이 생산 되었습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에서 북쪽으로 6마일 떨어진 곳에는 온천으로 유명한 히에라 폴리스라는 도시가 있었고 남쪽으로 10마일 떨어진 곳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차가운 생수로 유명한 골로새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편지를 보낼 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도 읽게 하라고 당부를 할 정도로 아주 가까운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는 식수가 형편없었습니다. 석회처럼 보이는 진흙이 물에 섞여 있었기 때문에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웃 도시인 히에라 폴리스의 온천물과 골로새의 차가운 생수를 수로를 통해 끌어다가 사용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긴 거리를 오면서 미지근해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미지근한 물을 마시면 토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배경이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의 이해에 아주 도움이 됩니다. 먼저 14절을 보겠습니다.

 

(계 3:14)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주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멘’이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확실하고 참되다’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단어입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서 65장으로 가 보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사 65:16) “16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

 

이 이사야서 65장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할 것이며 그 중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시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읽은 16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를 히브리어로 보면 ‘이트바렉 벨로헤 아멘’입니다. 정확히 번역을 하면 ‘아멘의 하나님으로 복을 빌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도 ‘잇사바 벨로헤 아멘’입니다. ‘아멘 하나님으로 맹세할 것이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아멘 하나님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러면 아멘 하나님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가 읽은 16절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내시리라는 언약을 하셨으므로 복을 구하는 자들은 ‘아멘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맹세를 하는 자들도 ‘아멘 하나님’께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멘 하나님’에 들어있는 내용은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어떤 언약을 이루실 것인가? 계속해서 17절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보세요.

 

(사 65:17-18)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그 언약의 하나님, 아멘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실 것이냐 하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 하실 것입니다. 오늘 계시록 본문에서 주님을 ‘아멘이시요’라고 묘사를 한 것은 그 새 하늘과 새 땅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새 마음을 창조하시는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진짜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셔서 그 새 창조 사역을 완성 시키시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멘이시요’다음에 ‘충성되고 참된 증’“(마르튀스)이라고 붙여 놓은 것입니다. 이 아멘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70인 역에서 헬라어로 ‘피스토스’ 나 ‘알레띠노스’‘신실한, 진실한, 참 된’의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그래서 ‘아멘이시오’ 바로 다음에 나오는 ‘충성되고 참 된 증인이시오’라는 말은 ‘아멘’이라는 말의 본질적인 의미를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분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근본’이라고 번역이 된 ‘하르케’라는 말은 ‘시작’ 혹은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를 곡해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첫 번째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거기서 쓰인 단어 ‘하르케’는 수동형 명사가 아닙니다. 능동형 명사입니다. 예수님께서 ‘피조물 중에 시작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역동적으로 창조의 사역을 하시는 창조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능동형 명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피조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창조의 근본’‘하르케 테스 크티세오스’라고 묘사를 한 것은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절대적인 탁월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창조의 시작이십니다.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창조의 원인이십니다. 예수께서 창세기 1장 2장에서 우주와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셨던 그 장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죄인들의 마음속에 뚫고 들어오셔서 그리스도의 빛으로 새 창조를 하실 것임을 예고편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아멘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의 하나님은 한번 하신 언약을 확실하게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창조를 시작하시고 6일 만에 마치시고 일곱 번째 날 쉬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시작된 그 새 창조의 사역이 반드시 성공적으로 끝날까요? 실패할까요? 실패 할 수가 없지요? 그분이 이미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마르튀스,martyr)오셨다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 뿐 아니라 창세기의 창조 때 보증으로 서 계셨던 성령께서 똑같이 보증으로 우리 안에 와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서두에 나오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를 보면 이 교회에 보내시는 편지의 내용은 새 하늘과 새 땅과 그 안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의 창조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14절 다시 한 번 읽어보지요.

 

(계 3:14)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이해가 가십니까? 이제 15절 16절로 넘어갑니다.

 

(계 3:15-16)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이 구절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구절입니다. ‘차가울 거면 확실하게 차던지 더울 거면 확실하게 뜨겁든지 미지근하게 믿지는 말라’ 그러니까 ‘믿으려면 확실하게 열심히 믿고 안 믿을 거면 확실하게 관두라’는 말로들 많이 이해를 하고 계시지요? ‘믿는다고 하면서도 미지근하게 믿는 사람보다 차갑던 사람이 돌아서면 더 확실하게 돌아 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정말 그런 의미로 말씀하셨을까요? 문맥을 잘 보시면 찬 것이나 더운 것이나 둘 다 좋은 것입니다. 단지 미지근하지만 말라는 것입니다. 히에라 폴리스의 온천수와 골로새의 차가운 생수를 수로를 통해 대다 먹던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은 그 말뜻을 금방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럼 미지근한 신앙이 무엇인지 알면 우리가 차든지 뜨겁든지 할 수 있겠지요? 그들을 미지근하다고 말씀하시는 근거가 17절부터 나오는 내용입니다.

 

(계 3:17)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을 부자라 했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했습니다. 그게 왜 미지근한 신앙의 근거가 되느냐? ‘부자라 부요하여’에 쓰인 단어 ‘페플루테카’는 직설법 완료시제입니다. ‘나는 부자인데 나를 부요하게 만든 것은 나다’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자기의 힘으로 부자가 되어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걸 미지근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로 가서 부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호 12:8) “8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그러면서도 에브라임은 자랑한다. '아, 내가 정말 부자가 되었구나. 이제는 한 밑천 톡톡히 잡았다. 모두 내가 피땀을 흘려서 모은 재산이니, 누가 나더러 부정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말하겠는가?'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의 성숙까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의 종교행위를 자랑하고 자기가 이루어 놓은 경제적이며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모든 결과들을 마치 자기 것 인양 자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호 2:8) “8 "바로 내가 그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주었으며, 또 내가 그에게 은과 금을 넉넉하게 주었으나, 그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그 금과 은으로 바알의 우상들을 만들었다.”

 

(호 13:5-6) “5 나는 저 광야에서, 그 메마른 땅에서, 너희를 먹이고 살렸다. 6 그들을 잘 먹였더니 먹는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를수록 마음이 교만해지더니, 마침내 나를 잊었다.”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이 배부르고 등 따스우니까 하나님을 잊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이 정말 하나님을 잊었나요? 에브라임은 하나님께 계속 예배를 드렸고 순교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잊었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든지 왕성한 종교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풍성하고 부요한 행위를 만들어 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놓치고 ‘내가 순교했고 내가 열심히 종교행위 했고 내가 열심히 돈 벌어서 헌금했다’로 가는 것을 ‘하나님을 잊었다, 미지근한 신앙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그러한 자들이 실상은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굉장히 풍성한 열심과 노력과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는데 주님은 그 것을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

 

(암 8:11)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부요와 하나님의 복을 아주 교묘하게 흉내를 냅니다. 그런 것으로부터 안전감도 느끼게 해 줍니다. 여러분, 돈 좋아하시죠? 돈은 참 편리함을 줍니다. 온 세상이 그 돈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 같아요. 제가 20대 때부터 그랜저를 타고 다녔는데 친구들이 괜히 제 앞에서 주눅이 들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언젠가 부터는 그것을 즐기게 되더라고요. 그런가 하면 미국에 와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 끼니를 걱정할 만큼 빈곤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차도 800불짜리 중고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하니까 사람 참 우습게보더라고요. 돈은 그렇게 우리에게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은근히 자기는 뭔가 다른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은 자칫 잘 못하면 진짜 영적인 부요와 안전을 놓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때문에, 하나님의 그 언약 때문에 기쁘고 안전감을 느끼고 부요함을 느껴야 하는 자들입니다. 말씀 때문이 아닌 나의 환경과 나의 열심으로 맺은 결과물들을 보며 안전감과 부요함을 느끼는 자들을 주님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작고 더러움을 더욱더 발견하게 되어서 ‘하나님 혹시 저 가짜 아닙니까?’이런 반응이 나올지언정 ‘나는 다른 사람과 달라, 난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있거든, 난 진짜 잘하고 있어. 신앙적인 면이나 사생활이나 난 참으로 부요하고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반응이 나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이 아무리 많고, 우리를 통해 맺혀지는 열매가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는 부요한 사람이라고 자평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청년 중에 하림이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홈페이지 제목을 보니까 ‘아무래도 난 가짜 같다’였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연륜이 깊어갈 수록 이러한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이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우리를 낙심케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대적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점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추악한 모습이 빛이신 그 분 앞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자들에게 이런 처방을 주십니다.

 

(계 3:18)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첫째로 불로 연단한 금을 사고, 흰옷을 사서 입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인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럼 미지근하고 가난한 신앙이 아닌 뜨겁든지 차든지 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이 무엇인지 한번 보자고요. 먼저 그 세 가지를 누구로부터 사야하는지를 보겠습니다. 18절을 다시 보시면,

 

(계 3:18)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누구에게서 사라고요? 예수님에게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부자라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실상은 너희가 가난한 자들이니 내게 금을 사서 부요해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금은 그냥 금이 아니라 불로 연단 한 금입니다. 그럼 불로 연단 한 금이 무엇인지 한번 보지요.

 

(말 3:2-3)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주가 홀연히 임할 것인데 그 주님은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같이 임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3절에는 주님께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만드시기 위해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신다고 하십니다. 왜요?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만드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불로 연단을 하십니다. 그들을 깨끗케 하기 위해서 그리고 의로운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게 만들기 위해서...

 

(슥 13:9) 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하신다구요? 시험하신 답니다. 은같이 연단하고 금같이 시험하신 답니다.

 

(벧전 1:6-7)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믿음의 시련은 왜 주어진다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해서 연단하신다는 것입니다.

 

(호 2:6) “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음하고 부끄러운 곳으로 가는 길을 가시로 막고 담을 쌓아 못 가게 막아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는 고난과 환난으로 보여 질 수가 있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불로 연단한 금입니다. 그런데 그 불로 연단 한 금은 주님으로부터 사야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시험과 고난은 바로 주님이 겪으신 주님의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낮아지고, 배반당하고, 모함을 받고, 나를 죽여서 남을 살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오해를 받고, 원수를 사랑하고’ 하는 주님의 고난이 바로 불로 연단 한 금입니다. 그 불로 연단 한 금이 없는 자들이 가난한 신앙을 가진 자,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불로 금을 제련할 때 2000도가 넘는 불로 제련을 합니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작업이지요. 우리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져 가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그 불로 연단되어지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나쁜 성품, 우리가 가진 악한 습관들, 버릇들 모두 불로 태워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변하기 어려운 존재들입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흰옷을 사서 입으라는 말씀은 마태복음의 변화 산 사건을 보면 조금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마 17:3)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막 9:2-3)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변화 산상에서 주님의 옷이 심히 희어졌습니다. 변화 산 사건은 주님께서 낙심해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심으로 그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사건입니다.

 

(마 16:28)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바로 이 말씀을 하시고 변화 산 사건이 그 뒤에 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화 산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 영광스러운 부활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벌거벗었다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리가 부실하다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흰옷을 사서 입으라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그 십자가의 삶이 영광스러운 부활로 가는 길임을 깨달아 참된 부요의 삶을 살라는 충고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하십니다. 안약으로 유명했던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갔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사야 하는 안약은 뭘까요? 예수께서 안약이 되셔서 소경을 고쳐주시는 사건이 복음서에 여러 번 나오지요? 그 중에서 요한복음 9장의 사건을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요 9:1-7)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빛이신 주님께서 오셔서 흑암에 갇혀있는 죄인들을 부르셔서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얼마 전 수요 성경공부 시간에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렸지요? 그런데 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안약이 되셔서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뭡니까? 창조입니다. 예수께서 안약이 되셔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는 사건은 하나님의 창조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이죠. 서두에서 잠깐 언급을 했지만 창세기 1장 2장의 창조 사건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던져져있는 죄인들에게 빛이 찾아오셔서 그들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시는 새 창조를 예고편으로 보여주신 것이라고 했지요? 바로 그러한 새 창조의 사역,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미지근한 신앙이요 눈 먼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혹시 이 안에는 이렇게 곤고하고, 가난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신앙인 들이 없습니까? 찔리시는 분들 계시지요? 그렇지만 여러분, 안심하세요. 이렇게 호되게 꾸중을 하시면서도 1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 3:19)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렇게 야단치고 책망을 하신 라오디게아 교회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요? 사랑하신 답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하신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반대말이 뭡니까? 미움인가요? 무관심입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왜 책망하고 징계합니까? 다 사랑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제가 다소 과하게 우리 청년들의 게으름이나 불성실함을 혼내는 것은 제가 그들을 사랑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망과 징계가 있는 삶은 하나님께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계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책망과 징계는 하나님의 열심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19절 후반부에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끌고 가실 것이므로 이제 그만 항복하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좇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가 오거든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라오디게아 교회는 비록 많은 책망을 들었지만 이렇게 그 가운데 샘솟는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고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을 보시면,

 

(계 3:20) “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구절을 전도할 때 많이 쓰지요?‘“문을 여세요. 그러면 주님이 들어가십니다. 주님을 영접 하세요. 그럽니다. 정말 우리가 문을 열면 주님이 들어오십니까? 구원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까?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뚫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무슨 문을 두드립니까? 여러분 정말 여러분이 주님이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시고 여러분이 문을 열어서 구원을 받으셨나요? 아니죠. 그럼 이 구절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합니까?

 

(눅 12:35-40)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깨어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많은 책망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였습니다. 지금 누가복음 12장 35절 이하도 바로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주님께서 두드리시는 문은 누구네 집 문입니까? 우리 집 문이 아니라 주님 집의 문입니다. 36절 보시면 ‘너희는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주인이 자기 집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권 적으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계시록 3장20절을 다시 보시면,

 

(계 3:20) “20 볼 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이라고 되어 있지요 그 구절은 ‘에안’이라는 헬라어로 시작되는데 영어의 ‘If ’절입니다. 이 단어에 ‘듣고, 열면’이 다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은 두 동작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듣는 사람은 열게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문을 열 것인지 말 것인지를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권 적으로 열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문을 열게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문을 열어 주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맞아들이고 우리는 그의 종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 삶의 운전대를 내가 잡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문을 열지 않은 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정말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종말론 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의 문은 주님께 활짝 열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가자는 대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과 주님께서 함께 식사를 나누시겠다고 하십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나 하고 한 상에서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대우해 주며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으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함께 먹는다는 것이 그러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문을 연 자들은 우리 주님과 그러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주님께 산, 불로 연단 한 금이 있으십니까? 주님으로부터 산 흰옷을 입고 계십니까? 주님으로부터 산 안약으로 여러분의 눈이 밝아져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끄시는 길을 기쁘게 따라 갑니다. 그 길이 만사형통의 길이 아니고 세상 적인 부요의 길도 아니고 삐까번쩍한 황금 길이 아닐 지라도 주님이 가자하면 가는 사람들이 진짜 부요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이기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혀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계 3:21)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라오디게아 교회는 심한 책망만 받은 교회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의 진정한 위로와 복이 무엇인가를 잘 가르쳐 주는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불가능하고 연약하여 책망만 받아 마땅한 자들이지만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싸시고 책망하시며 징계하시며 결국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신다는 하나님의 열심을 읽을 수 있는 편지인 것입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우리의 신앙의 성패가 우리의 열심과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국 실패 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열심히 우리를 끌고 가시기에 우리는 안전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실력과 여러분의 소유로 여러분의 안전의 근거를 삼지 마시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여러분의 안전과 행복의 근거를 삼으십시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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