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찬송 하십시오
(김성수 목사)
(여러분이 지금 몇 번째 인이 떨어진 상태이고 언제 그 다음 인이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그런 몰지각한 성경 해석을 너무 많이 들어오셔서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인은 차례차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전쟁, 기근, 질병, 자연재해 이런 것은 노아 때도 아브라함 때도 모세 때도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마지막으로 치달으면서 점점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다보면 너무 불편한 것이 많습니다. 너무 손해 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게 맞는 삶인가?’ 가끔 의심도 듭니다. 어떨 때는 ‘진짜 하나님이 있기는 있는 건가?’ 이런 생각까지 들게 됩니다. 자기 꼴을 보면 전혀 변할 것 같지 않거든요.)
(계 5:7-14) “7 그 어린 양이 나와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두루마리를 받았습니다. 8 그가 그 두루마리를 받아 들었을 때에, 네 생물과 스물네 장로가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히 담긴 금 대접을 가지고 어린 양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9 그들은 이런 말로 새로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시고, 봉인을 떼실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죽임을 당하시고, 주님의 피로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사람들을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10 주께서 그들에게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 제사장이 되게 하셔서, 땅 위에서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11 나는 또 그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를 보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천 수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은 큰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마땅히 받으실 만합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13 나는 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또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 14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서 경배하였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4장과 5장의 내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5장을 다 마치고 다음 주에 6장 첫 번째 인이 떼어지는 장면으로 들어가겠습니다. 5장까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짚어 보면 1장에서는 서론 부분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를 배웠고 2장과 3장에서 이 땅에 있는 지상의 교회, 아직 불완전한 이 땅의 교회에 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 2장과 3장은 21장 22장의 완성된 천상의 교회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했지요? 지금 이 땅에 존재하는 가시적인 교회는 사탄의 미혹과 완성을 향한 성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여전히 struggle하고 있지만 반드시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된 교회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 땅에서 주의하고 유념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4장과 5장에서는 천상의 교회의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우리 교회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왕이 되시는 분이신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 4장과 5장은 계시록 19장11절부터 21장 7절까지의 내용과 대칭이 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19장11절 이하를 보면 백마를 타고 머리에 면류관을 쓰시고 피 뿌린 옷을 입으시고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천하만국을 심판하시고 승리를 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4장과 5장에 묘사된 하늘에서의 승리와 정복이 땅에서 실질적으로 완성이 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4장 5장에서는 책이 일곱인으로 봉함이 되어 있는 모습으로 보여 지지만 20장에서는 그 책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4장과 5장은 그러한 승리의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자격으로 그러한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인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합니다.
그 분은 성부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서실 수 있는 성자 하나님이시고 십자가에서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심으로 단번에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심으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시작과 완성의 책을 여실 수 있게 된 유다 지파의 사자요 어린양이십니다. 그 분은 일곱 뿔로 표현된 전능의 힘을 가지신 분이시고 일곱 눈, 일곱 영인 성령 하나님과 하나이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를 하시려고 하면 절대 안 됩니다.
요한 계시록은 논리적인 순서로 이해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서정을 이야기할 때 소명,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수양, 성화, 견인, 영화 이렇게 순서를 매기는데 이것이 시간 적순서가 아닌 논리 적 순서이듯이 요한 계시록도 시간 적인 배열로 보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4장과 5장을 이해하시기를,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신 후에 거기서 다시 책을 받아서 그 인봉을 여시면서 지상에서의 사역을 시작하시고 결국에는 모두 물리치시고 먼 훗날 완전한 승리를 하게 된다는 이런 식의 시간 적인 순서로의 이해는 요한 계시록을 잘 이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관점으로, 시간과 공간의 너머에서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미 창세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창세전에 하나님 나라는 완성이 된 것이고 창세전에 승리는 이루어 진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은 어떤 일을 계획하시고 목적하시는 순간 그 일은 이루어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 13:8)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개역 성경에는 ‘죽임을 당한’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원어 성경에 보면 ‘에스파그메누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 ‘창세전에 죽임을 당하신’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도 slain from the creation of the world. 라고 되어 있지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창세전에 이미 선 것이고 그 십자가는 창세로부터 최후의 종말까지 유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 우주의 역사동안 우리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간 적인 순서로 계시록을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몇 번째 인이 떨어진 상태이고 언제 그 다음 인이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그런 몰지각한 성경 해석을 너무 많이 들어오셔서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인은 차례차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전쟁, 기근, 질병, 자연재해 이런 것은 노아 때도 아브라함 때도 모세 때도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마지막으로 치달으면서 점점 강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건 제가 일곱 재앙들을 공부하면서 차차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요한 계시록은 시간 적인 순서로 배열이 된 사건들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그 ‘책의 인을 떼어서 책을 열 자격 있으신 분’이 하나님의 손에서 그 구속 역사의 시작과 완성이 들어있는 책을 취하십니다. 그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그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시작이 되게 된 것입니다. 보세요. 이런 부분도 시간 적인 순서로 이해를 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기 전인 기원 전 사람들은 전혀 구원을 못 받았다는 결론이 나게 되지요? 아닙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아들게 되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대접을 들고 찬양을 합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시작이 되게 되니까요. 찬양을 하는데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대접을 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그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는 것을 공부했습니다. 찬양을 하는데 필요한 거문고와 기도를 상징하는 향이 가득한 대접이 함께 등장을 하는 것을 보면 무슨 연관이 있을 법하지요? 일찍이 칼빈은 ‘찬양은 곡조가 붙은 기도’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나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졸라서 얻어내는 것’으로 정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우리가 공부한 것처럼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수렴이 되는 향기 나는 예물로 정의를 한다면 그 말이 금방 이해가 갑니다.
기도는 우리의 욕심을 따라 이 땅에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연약하고 자라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자신의 성숙 그리고 거룩으로의 열망‘ 그런 것으로 수렴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들의 바른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새 창조의 완성에 대한 염원이 성도들의 기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새 노래로 부르는 찬양은 어떤 내용이겠습니까? 그 새 노래도 역시 새 창조의 완성에 대한 찬양이겠지요? 구약 중에 시편과 이사야서에도 새 노래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두 군데만 찾아보고 가지요.
(시 96:1-2)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 지어다 2 여호와께 노래하여 그 이름을 송축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파할 지어다
(시 98:1) “1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이렇게 새 노래는 구원과 관계있는 노래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쓰인 ‘새 노래’의 ‘새롭다’라는 단어는 ‘네오스’‘new’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여기서 쓰인 단어는 ‘카이넨’입니다. 그 단어는 시간적인 새로움이 아닌 질적인 면에서의 새로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9절의 ‘새 노래’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룩된 재창조, 그러니까 구원의 새로운 완성에 대한 노래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가 찬양을 하는 찬양의 이유가 9절과 10절에서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계 5:9-10)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하더라“
찬양의 이유가 뭡니까?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셔서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그 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게 새 노래입니다. 1장6절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계 1:6) 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시록을 읽으시다보면 시제가 자꾸 헛갈리시지요? 4장과 5장을 잘 보시면 이제 그 구속의 시작과 완성이 적혀 있는 책이 열리고 그 일이 지상에서 실행에 옮겨지는 일이 남은 것 같은데 벌써 하나님은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라고 과거로 말씀하십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께서 already... not yet의 원리를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영적으로 이미 이루어져 있고 시간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와 제사장이 이미 되어 있고 또 이 시간 속에서 나라와 제사장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쉽게 ‘신분적 운명적으로는 이미 완성이 되어 있고 존재론 적, 시간 적으로는 아직 완성으로 가는 상태다’라고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만 그 설명도 사실 조금 빈약한 설명입니다. 그것을 인간의 짧은 언어로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성경을 차근차근 공부하시다 보면 차차 명확하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 10절에 있는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의 찬양의 이유에 대한 묘사는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것에 대한 성취입니다.
(출 19:5-6)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 지니라”
여기서 내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은 같은 내용을 담은 다른 표현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목적은 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를 삼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요 17:4)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 19:30)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제 하나님의 소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된 것입니다.
(벧전 2:9)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하늘의 완성된 교회들은 새 노래로 찬양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이미 완성이 되어 있다고 하는 교회더러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벧전 2:1-5)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신령한 집으로, 거룩한 제사장으로 지어져 가라’ 그러죠? 오늘 본문 계시록 5장에 보면 이미 예수께서 피로 우리를 사서(에고라사스, 과거시제)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대로 우리는 이미 제사장 나라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거룩한 제사장으로 지어져 가라’고 하십니다. 게다가 그렇게 거룩한 제사장으로 지어져 가는 방법이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말씀) 사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쉽습니까? 힘들지요? 생각해 보세요. 그 힘든 신앙의 여정에서도 여러분은 새 노래로 찬양을 하는 그 하늘의 완성된 교회의 찬양을 부르실 수 있겠습니까?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하늘의 교회가 부르고 있는 그 천상의 찬양은 정말 만족하고 기쁘고 가슴 벅찬 찬양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시간 속에서 그 재창조의 과정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찬양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다보면 너무 불편한 것이 많습니다. 너무 손해 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이게 맞는 삶인가?’ 가끔 의심도 듭니다. 어떨 때는 ‘진짜 하나님이 있기는 있는 건가?’ 이런 생각까지 들게 됩니다. 자기 꼴을 보면 전혀 변할 것 같지 않거든요.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찬양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힘이 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찬양이 나옵니까? 그러나 우리도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와 똑같은 찬양을 오늘, 지금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요 17:11,15)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이 땅에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들을 지켜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테레오) 그런데 그 ‘지킴’은 단순히 무균 실, 진공상태로 보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 빠지지 않게 지키시는 지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악이 지배하는 세상 원리대로 살지 못하게 하나님은 가시로 담으로 우리의 진로를 막으시고 때로는 패기도 하시면서 우리는 지키시는 것입니다.
(호 2:6-7) “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이게 하나님의 지키심, 보호하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겪으시는 좌절, 실패,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 시간 속에서 신령한 집으로 제사장 나라로 만들어 가시는 손길인 것입니다. 어떨 때는 (아주 가끔이지만) 신자로서 잘 살아보기 위해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말씀) 사모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도 해 보는데 그렇게 살면 ‘만사형통’이 아니라 더 피곤하고 더 고단하고 더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 때도 여러분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신령한 집으로 제사장 나라로 만들어 가고 계신 증거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습니다. ‘아버지, 내 형제들을 꼭 지켜 주세요.‘ 여러분이 신앙의 여정에서 겪으시는 모든 일은 전부 하나님의 지키심입니다. 무엇을 배우셔도 배우시게 될 것입니다.
지난주에 최근에 어려운 일을 경험하신 우리 교회 성도 한 분이 제 사무실에 오셔서 많이 우시고 가셨습니다. 그 분이 가신 후에 저도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 분은 최근에 당한 그 어려움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는커녕 ‘목사님, 이번 일로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신앙인으로서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고 나는 어느 곳을 향해 자라가야 하는지 많이 배웠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새 노래로 부르는 찬양입니다. 그리고 지난 화요일에는 우리 교회 한 청년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친구는 최근에 하는 일이 잘 되어서 승승장구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욕심 부리지 않게 기도해 주세요. 일이 잘 되는 데도 이 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시간이 부족해짐을 느낍니다. 만일 이런 성공이 하나님과 저와의 관계에 있어서 방해가 된다면 완전히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세요. 저에게는 하나님이 더 중요합니다. 확실히 우리 인간은 세상이 주는 편안함 속에서는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이 번에 배웠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게 새 노래로 부르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성공이나 실패나 좌절이나 기쁨이나 모든 것이 합력해서 그들을 신령한 집으로 제사장 나라로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범사에 감사한 것입니다. 범사에 기쁜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목표 지점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으니까 어떤 것도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지금 완성되어져 가는 이 시간 속에서도 그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가 새 노래로 찬양을 하고 있는 그 나라를 보실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지금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서 나를 지키시며 완성해 나가시는 그 손길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새 노래로 찬양하십시오. ’아, 이 삶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보존하시고 지키시는 삶이구나.‘’이렇게 가다보면 나 같은 불가능한 인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완성이 되겠구나.‘ 찬양하는 것입니다.
(요 6:38-39)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 주님은 다 건져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답답한 과정 속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엡 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보세요. 오직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이 신자들의 기쁨이요 찬송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잘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필요가 채워지고 안 채워지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모든 것은 나의 거룩을 위한 도구요 수단이요 방법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오직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나의 거룩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 미래의 사진을 이미 보았기 때문입니다.
(계 14:1-5)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완성이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되어 있지요? 네 우리의 모든 상황과 처지와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모두 그리로 가는 과정이에요. 그러니까 큰 소리로 찬양하자고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 여정이 그렇게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대적이 있고 또 때때로 하나님의 징계도 받아야 하고 시험도 봐야 하고 ... 힘이 들 겁니다. 그럴 때에, 힘이 들 때에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점도 없이 흠도 없이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만드시기 위해 지금 우리의 아픔을 보시면서도 꾹 참고 계신 그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나 이 나그네 인생 길,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결국 우리가 그 하늘나라에 도달했을 때 맨 발로 뛰어나와 우리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실 그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 따뜻한 손으로 여러분의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손수 닦아주실 그 하나님만 바라보세요. 전지전능한 그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완성시키실 거니까요. 그 하나님만 생각하세요. 그러면 이기실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내편인데요.
삼국지를 보면 관우가 조조에게 붙잡혔던 적이 있습니다. 조조가 관우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선물과 좋은 것으로 회유를 했습니다만 관우는 전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조조가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적토마를 관우에게 선물하자 관우가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조조가 물었습니다. ‘장군 그렇게 금은보화를 비롯한 좋은 것들도 다 마다하더니 이 말 한필에 그렇게 기뻐하십니까?’ 그 때 관우가 대답합니다. ‘이제 하루에 천리를 가는 말이 생겼으니 우리 주군 유비 형님이 어디 계신지만 알면 단번에 달려갈 수 있을 것 아니오’ 어디에 있던 무슨 일을 당하건 잘 먹고 잘 살던 못 먹고 굶던 관우의 마음속에는 오직 유비 현덕 밖에 없었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주인으로 모신 그 분이 나의 목표가 되면 나의 상황과 처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려움, 고난, 슬픔, 좌절, 배고픔, 혹은 재물, 쾌락 그 어떤 것도 주군을 향한 마음을 뒤집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그렇게 자리 잡고 계신가요?
나폴레옹의 휘하에 있던 어느 병사가 총을 맞고 병원에 후송되었습니다. 심장 부위에 총알이 박혀서 의사가 그 총알을 빼려고 하는데 그 병사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의사선생님 조심하세요. 자칫 잘못하면 내 심장 안에 있는 나폴레옹 황제를 건드릴 수 있습니다.’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누군가의 마음속에 어떤 사람이 자리하고 있게 되면 정말 그 사람의 심장은 그 존재로 꽉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병사의 심장에는 오직 나폴레옹 황제만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병사만큼이라도 하나님을 마음속에 품고 있습니까? 관우가 유비를 생각하는 것만큼이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속에 품고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 바로 지금 찬양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주 나의 예수 님,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나를 당신의 피로 사서 이렇게 하나님의 소유로 만들어 주시고 제사장 나라로 삼아주시고 또 지금 시간 속에서 나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고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저는 반드시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완성이 될 것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그 찬양에 14절에 있는 말씀처럼 하늘에 있는 네 생물이 ‘아멘’하고 화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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