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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72강. 그 사랑 앞에 서서

by IMmiji 2014. 5. 6.

72강. 그 사랑 앞에 서서 (롬 12:9-20)

 

롬 12:9-20=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교회는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상과 다른 원리로 다스려 가십니다.

세상 방법이 아닌 하늘나라의 방법으로 다스리십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 은혜의 원리로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교회들을 다스립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에게 하늘나라에 속한 것들을 주셨습니다.

이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합니다.

이름하여 성령의 은사입니다.

 

하늘나라에 속한 교회와 세상은 서로 상반된 원리로 다스려져 가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는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하늘나라를 빛이라고 하면 세상은 어둠입니다.

하늘나라를 생명이라고 하면 세상은 죽음입니다.

하늘나라는 은혜로 다스려지지만 세상 나라는 법으로 다스려집니다.

하늘나라는 산 자들이 모여서 함께 살아서 생명을 나눔으로 살아가지만, 세상 나라는 죽은 자들이 모여서 서로 죽이고 살아갑니다.

 

법은 죽이고 은혜는 살립니다.

이를 우리들 삶에 적용해 봅시다.

 

법으로 사는 사람은 인정머리가 없고,

은혜로 사는 사람은 인정머리가 있습니다.

법으로 사는 사람은 매사를 비판과 정죄를 일 삼지만,

은혜로 사는 사람은 이해하고 용서하고 덮어주면서 삽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가지고도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법으로 사용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율법을 가지고도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은혜로 사용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지만,

예수님은 율법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했습니다.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소속을 알 수가 있습니다.

법을 행하면 법에 속한 사람이고 은혜로 행하면 은혜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안다 모른다 보다 그 사람이 어디에 속하였느냐 중요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법 아래 속한 사람은 살려는 복음을 가지고도 사람을 죽이는 법으로 사용을 하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죽이는 율법을 가지고도 사람을 살려 내는 은혜로 사용을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서 자기 백성들을 은혜로 간섭을 해 가십니다.

 

어떤 은혜의 간섭입니까?

서로 사랑하게 하는 간섭입니다.

우린 누구를 사랑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린 나만 사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예수님의 것인 하늘에 속한 사랑을 가지고 교회를 통하여서 펼쳐 보이십니다.

이러한 모습을 초대교회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세워진 초대교회는 “교회란 이런 곳이다” 라고 샘플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이 세상의 교회의 표지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건 우리더러 초대교회와 같이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를 고발하는 차원으로 일을 합니다.

 

성경은 우리더러 뭘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비록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명령법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그 명령법이 우리를 고발하는 것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를 가지고 이 시대 교회들을 고발하고 계신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가지고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와 성도들은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나아갈 길을 모본으로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착각하기를 성령 받아서 좋은 교회를 만들자고 합니다.

그건 우리의 희망사항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은 좋은 교회 만들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일을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만유의 주 되심을 증거하십니다.

그리하여 성령은 우리는 틀렸고 예수님만 옳다고 증거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자고 합니다.

아니에요.

이건 착각이고 교만입니다.

우리 주제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해도 천국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천국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을 봅시다.

 

계 21:1-2=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서 올려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피조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어서 올려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우리의 신앙생활도 모두가 주께로부터 받는 것으로 하는 것이지 우리가 만들고 생산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신앙의 모습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그것도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되 돌려드리는 의미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린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삽니다.

이 사실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입니다.

 

벧전 4:7-1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열심히 사랑하라고 합니다.

또한 서로 대접도 하라고 합니다.

말씀도 전하고 봉사도 하라고 합니다.

 

단 각각 받은 은사로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것으로 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고 합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성도가 교회 안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성령의 은사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든 봉사이든 연보든 복음을 깨닫고 증거하는 것이든 모두가 성령의 은사입니다.

 

내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봉사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이 행하게 하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을 봅니다.

 

엡 4:7-16=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성령의 은사를 누가 보내 주셨는가요?

예수님이 보내 주셨습니다.

누구에게 보내주셨는가 하면 죄와 사망으로부터 살아난 자들에게 보내 주셨어요.

즉 예수님이 하늘나라 소속인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주신 겁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이 승천 하셔서 하늘나라에 있는 신령한 것들을 자기 백성들에게 택배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주신 택배를 열어보니 그 속에 하늘나라에 속한 각양의 것들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들입니다.

그 속에 직분도 있고 봉사도 있고 예수님의 성품과 마음도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야! 너희들 중에 예수로부터 택배 받은 사람 있으면 앞으로 나와 봐라!

그리곤 예수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들을 내어 놓아 보라고 합니다.

 

그럼 예수로부터 택배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가 받은 것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각양의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거짓 없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선물을 택배로 받은 사람은 일을 하고도 자기 자랑이 없습니다.

도리어 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하게 됩니다.

성도가 행하는 봉사와 충성도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만 받습니다.

우리 것을 받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 것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범사 속에서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먹고 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지옥 같은 세상을 개조해서 천국을 만들고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천국은 우리 힘으로 만들 수도 없을뿐더러 만들어지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지옥 같은 이 세상 속에서 죄로 인하여 신음하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노력해서 이런 교회를 만들자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돌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 각 사람 하나 하나를 간섭하여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하늘에 속한 일들을 발생 시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게 이러한 것들이 나타나거들랑 아! 예수님이 여전히 교회의 주인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야! 정낙원이 내가 너의 주인이야!

이 사실을 기억해!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이 툭툭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 안하던 봉사도 하고!

남들의 잘못도 이해도 하게 되고!

사랑도 하게 되고!

절제도 하게 되고!

감사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성령이 맺은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나타나거들랑 아! 예수님이 살아서 나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살이가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예수님의 간섭하심으로 살고 있으니 진 것 같으나 이긴 것이니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망한 것 같으나 실상은 흥하고 성공한 것이니 기뻐하라고 합니다.

 

고난이 닥치고 환란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미 천국백성이기 때문에 실패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증인으로 보여주고 게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너희와 이렇게 함께 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세상에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한다 하여도 슬퍼하지 말고!

실패한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말고!

죽는다고 하여도 애통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말해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이 자기 백성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어떤 혜택을 주고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교리(敎理)라고 합니다.

 

교리(敎理)란?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의 교리를 통하여서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12장 이후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교리가 성도들에게 어떻게 적용이 되고 교회를 통해서 어떻게 구체화 되어서 성도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타나지는 것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항상 당부 드리는 것이지만 어떤 말씀을 듣더라도 그 말씀을 우리더러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의 우리 행위 차원으로 접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성경을 주신 목적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주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간섭하여서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일들을 벌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모든 삶이 은혜이고 은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말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주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어서 교회를 섬기게 하였으니 각자 받은 대로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3-8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예언도, 섬김도, 가르침도, 권면도, 구제도, 다스림도 모두가 은사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교회에다 하늘에 것을 주어서 하늘에 방식으로 다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예수님이 이루었다고 한다면 구원 이후의 우리의 삶도 예수님이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12장 이후부터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기 전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이 알아서 각각의 분량에 따라 성령의 은사를 주신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일들을 발생 시킨다는 것은 여전히 예수님이 나와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을 하면 성도들 안에서 성령의 은사적인 것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예수님이 성도들을 주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자기 백성들을 간섭하고 계세요.

그러니 어떤 상황이든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도 나의 간섭 하에 있었고,

지금도 간섭당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간섭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간섭을 했으니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요만큼이라도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간섭하지 않았다면 우린 벌써 세상 속에 푹 파묻혀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간섭을 시작했으면 중간에 포기 되는 것이 없습니다.

끝까지 책임을 지십니다.

예수님이 일을 시작하셨으니까 예수님이 끝장을 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끝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로부터 구원을 입은 자들을 예수 이름으로 하나로 연합케 하여 모이게 한 곳을 일컬어 교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일하시고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뭔고 하니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입니다.

 

십계명(十誡命)을 크게 나누면 두 계명으로 함축이 됩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정의하시기를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으로 귀결이 됩니다.

 

이걸 창조 사건으로 봅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사랑이 본질이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도 사랑하는 자로 창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누구냐?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이게 사람을 지은 목적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하나님은 볼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뭐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모인 곳이므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랑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3장을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언급된 교회가 에베소교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사랑이 없어서 촛대를 옮겨 버린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을 봅시다.

 

계 2:1-5=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예수님이 촛대 사이로 다니십니다.

 

내가 너의 수고도 알고,

너의 행위도 알고,

참고 인내한 것도 알고,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고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쫓아낸 것도 다 안다고 합니다.

또한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내어서 섬긴 것도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왜? 사랑을 버렸는지 생각하고 돌이켜 회개 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겨 버리겠다고 합니다.

 

뭐가 없기 때문에 촛대를 옮긴다고 합니까?

사랑입니다.

이로보건데 교회는 사랑이 생명이란 말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는데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려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갖가지 일을 한다고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건 교회 아니다 라고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얼 하다가 사랑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하고 돌이키라고 합니다.

 

촛대란?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어둠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빛입니다.

그 빛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할 교회가 그 구실을 못하니까 옮겨버린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모인 모임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당연히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사랑이 교회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이단을 축출하고 종교적인 일을 한다고 하면서 교회의 본질인 사랑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일 때문에 니가 옳니! 내가 옳니! 변론하고 논쟁하고 쌈박질을 했다는 말입니다.

마음들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건 교회가 아니다 라고 하시면서 “나는 간다” 라고 하시면서 에베소 교회를 떠나 버리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꽝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꽝입니다.

크고 비밀한 것을 말해도 사랑이 없으면 꽝입니다.

사랑이 없는 교회나 성도는 앙꼬 없는 찐빵과 같습니다.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 마음 속에 오셨나요?

이는 예수님 마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인 사랑을 공급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것은 그 속에 예수님이 안 계시는 것이므로 빛 좋은 개살구이고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은 것입니다.

 

이건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경향성이 나타나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네 안에 이러한 것이 역사하느냐 입니다.

 

없는 사랑을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회와 성도에게는 반드시 이러한 것들이 경향성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교회와 성도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공급하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공급 받는 성도는 압니다.

자기가 행하는 사랑이 자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란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행하고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다른 것 다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다 없음”이 됩니다.

반대로 다른 것 다 없어도 “사랑이 있으면 다 있음”이 됩니다.

그 사랑이 바로 예수님 마음입니다.

예수를 가졌으면 다 가진 겁니다.

 

고린도후서 6장을 봅시다.

 

고후 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너희들 보기에 내가 무명한자 같지만 실상은 유명하다고 합니다.

너희들 보기에 내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 가졌다고 합니다.

바울이 뭘 가졌나요?

 

예수입니다.

예수를 가진 자는 다 가진 자입니다.

반대로 예수가 없는 자는 다 없는 자입니다.

 

신앙생활은 엄청난 성경적 지식을 쌓는 것도 아닙니다.

현란한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정의입니다.

 

이 원리를 교회에 그대로 적용해 보세요.

에베소교회 식으로 적용해 보세요.

예수를 사랑으로 의역해 보세요.

 

예수가 없는 것이나 사랑이 없는 것이나 동일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듯이,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마귀는 교회를 어떻게 미혹합니까?

에베소교회를 통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일 때문에 사랑을 깨트리는 식으로 일을 합니다.

 

마귀의 목표는 단 하나입니다.

교회 안에 사랑만 빼내는 것입니다.

성도들 안에 사랑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으로 변론하고 논쟁을 하게 하여서 서로 서로 잘났다고 하면서 쌈박질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다리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용납하여서 서로 연합하는 것이고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연합과 하나 됨이 언제 깨어지는가 하면 일 때문에 깨어집니다.

신앙이 지식으로 치달으면 깨어집니다.

교회를 일하는 곳으로 만들면 깨어집니다.

일 때문에 반목과 갈등이 생기고 그로 인하여 사랑이 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일 먼저 에베소교회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애들아!

내가 바라는 것은 어떤 일을 하고 누굴 정죄하고 판단하고 쫓아내는 것이 아니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란다!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은 내가 할 테니!

너희는 내게 받은 그 사랑으로 서로 사귐을 가지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봅니다.

 

마 13:24-30=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 집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태복음 13장은 천국의 비유입니다.

이 땅에 천국이 어떤 모습으로 와 있는가 하면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원수가 가라지를 뿌려 놓은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 말은 죄인들 가운데 천국이 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밭이란 교회 안에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있음이 됩니다.

종들이 와서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님!

밭에 가리지가 보이는데 뽑아낼까요?

이에 주인이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괜히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이 다친다고 합니다.

즉 옳은 놈 그른 놈 갈라내다가 사랑이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가라지를 골라내고자 하다가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를 판단하다가 정작 해야 할 사랑을 놓쳐 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인하여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 되는데!

이러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복음을 가지고 니가 옳니! 내가 옳으니! 남을 판단하면서 판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스스로 점검해 보세요.

복음 아는 것이 은혜와 사랑으로 따스함으로 묻어나옵니까?

아니면 정죄와 비판으로 나옵니까?

복음 안다고 하면서 정죄와 비판하는 법이 나온다면 당신은 지금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 당신이 아는 예수는 관념이고 당신이 안다는 그 복음은 은사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학습으로 알아진 지식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은 반드시 그 잘남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은사로 알아진 복음은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용서하고 관용하며 기다림으로 나타납니다.

죽이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살리는 것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우린 에베소 교회의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난 지금 어떤 모습인가요?

복음 아는 것을 사랑으로 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복음 안다는 것을 법으로 사용하여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여 심판하는 일을 행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감사한 것은 주님께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떠나지 않고 아직도 남아서 책망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떠나지 않고 간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책망하는 것은 잘라내기 위함이 아니고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알았다면 돌이키십시오.

회개가 뭔가요?

가던 길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아! 이게 아니구나!

깨달았으면 돌이키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린 날마다 회개의 삶을 살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잘못된 길을 돌이키게 하는 촉매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의 길로 행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사랑하기 보다는 내 옳음을 증명하고자 남을 틀렸다고 정죄하고 잘라내는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회를 통하여 책망한 것이 나를 향한 책망임을 알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임을 알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죄가 뭐냐?

자기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을 창조 하실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창조를 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난 후로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시작 하였습니다.

 

여기에 십계명이 말하는 죄목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형제를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았는데!

죄가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이웃을 헤치게 한 것입니다.

 

죄가 내가 살고자 남을 죽이고!

내 배를 채우고자 남에 것을 도적질하고!

내 유익을 얻고자 거짓 증거를 하게 되고!

내 쾌락을 위하여 남의 아내를 탐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세상 속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작게는 가족 간에 다툼이고!

중간으로는 이웃 간의 다툼이고!

크게는 국가 간의 전쟁입니다.

 

왜? 전쟁을 합니까?

내 배를 채우기 위하여 남에 것을 빼앗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을 위하여 남에 사랑을 강탈해 오는 것이 전쟁입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았는데 죄가 내 사랑을 위하여 남이 나를 사랑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가 세상을 힘으로 지배했습니다.

힘으로 타인(他人)을 자기를 사랑하도록 강제하고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혀온 힘없는 자들을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고 자기들은 날마다 쾌락을 즐겼습니다.

남들을 자신들 몸뚱이를 즐겁게 하는 향락의 도구로 삼았습니다.

 

이게 이 세상의 본질입니다.

약육강식의 짐승의 법칙으로 다스려지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 나라를 짐승의 나라라고 합니다.

이러한 힘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짐승들이 사는 곳이 지옥입니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십니다.

너희가 바로 세월호 선장이라고 합니다.

선장의 행태를 인간적으로 보면 마땅히 비난 받아야 합니다.

돌로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본능적으로 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

어떻게 저런 사람이 선장이라고 하느냐?

욕이 저절로 나오고 본능적으로 화가 치밉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너는 어떻느냐?” 고 묻습니다.

 

“너는 과연 저 선장을 참소할 수 있는 인간이냐?” 라고 묻습니다.

“너도 목사 노릇하면서 교인들보다 너 잇속을 먼저 챙기는 놈이 아니냐” 라고 책망을 하십니다.

결국 세월호 선장을 통해서 내가 고발당하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선장을 비난하기에 앞서서 내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비난하지 말자! 가 아니라 나는 과연 비난 받지 않은 자인가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선장이 저 혼자 살고자 탈출한 것이나 우리가 내 유익을 위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나 그 본질은 동일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이면에 흐르는 자기 사랑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의 잘못을 나무랄 자들이 못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러한 사건을 통해서 내 죄가 발각당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죄 작은 죄는 없습니다.

오로지 죄 뿐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살기 위하여 다른 누군가를 죽이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는 이 세상 구조가 남을 죽이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나라에서 짐승의 법으로 살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산다는 것 자체가 내가 살고자 남을 헤치는 모습으로 살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내가 이익을 얻는 것만큼 다른 하나는 손해를 입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세상의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세월호 선장의 모습이 곧 우리의 자화상(自畵像)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앞으로는 선장 교육을 잘 시켜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까?

물론 그래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몸 담고 사는 한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하고 방지하여야 합니다.

고치고 또 고쳐야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선장 교육 잘 시켜서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자고 합시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가 아무리 범죄 없는 나라를 만들고 사고 없는 세상을 만든다고 하여도 모두가 저주 받은 이 세상에 일이라고 합니다.

 

신앙이란? 좋은 나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살기 좋은 세상을 건설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살기 좋은 나라를 건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신앙이란? 날마다 이 세상을 떠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가 가야 할 나라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입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하늘나라로 사는 자들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멸망의 징조들을 보면 너희 구속이 가까웠으니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닥치고, 홍수가 나고, 갖가지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또한 배가 침몰하고, 비행기가 떨어지고 하는 이러한 사건과 사고를 통해서 이 세상은 정착할 곳이 아니고 떠나야 할 곳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묻습니다.

너희들 이런 세상이 오래 살고 싶니!

떠나야 하지 않겠느냐!

사건과 사고가 없고 눈물 없고 고통이 없고 사망이 없는 곳으로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너희가 살 곳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모세를 애굽으로 보냅니다.

모세가 애굽에 가서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킵니다.

모세가 일으킨 재앙은 곧 애굽에 실상을 알려주는 재앙입니다.

 

인간들이 생명수라고 먹는 나일강이 실상은 피의 죽음에 강이고!

너희가 먹는 떡이 개구리 같은 짐승들이 먹는 밥이고!

너희가 사는 세상이 어둠이고!

이 세상 자체가 갖가지 재앙들이 일어나는 저주 받은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애굽에서 이런 것을 없애 달라고 하지 말고 애굽을 떠나야지요.

애굽에 실존을 알려 준 것은 애굽을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곳에 살고 싶니?

떠나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본질을 알았으면 아브람과 언약을 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가야지요.

 

지옥은 지옥다워야 합니다.

이 세상은 천국을 가장한 지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의인인 척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한 세월호 선장의 기이한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은 너희가 바로 세월호 선장과 같은 자들이고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것을 까발리는 일들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이 그럽니다.

타자의 잘못을 보고 큰 소리 치는 것은 자기 속에 방어기재가 본능적으로 발동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선장 저 놈 죽여라! 라고 하는 것은 곧 자기 안에 방어기재가 발동한 것입니다.

내 안에도 그 모습이 들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선장과 같은 자라는 뜻입니다.

 

선장의 행태를 보고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선장을 욕합니다.

결국 우린 모두가 다 선장과 같은 종자들이란 뜻입니다.

선장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우리 모두가 다 자기 하나 살고자 남에 목숨을 거지 발에 때같이도 여기지 않는 자들입니다.

 

우린 내 유익에 반하는 일들을 당하면 본능적으로 적개심이 발동합니다.

죽이고 싶어집니다.

결국 우린 살인자들입니다.

 

포장하지 마세요.

우리가 그런 자들입니다.

아무리 포장해도 죄인입니다.

 

그래서 울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곧 내 입에 밥을 넣기 위하여 남의 입속에 들어가는 밥을 빼앗아 먹는 악당들이라고 고백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또한 인면수심(人面獸心)인 자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린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던질 자들이 아니고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간음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간음하고 살아왔고!

지금도 간음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간음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간음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애초부터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간음하는 자로 출생을 한 것입니다.

 

앞으로 간음 안 할게요! 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게 곧 자기 주제를 모르는 교만이고 불경입니다.

주여! 내가 간음 중에 잡힌 여자입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여야 합니다.

 

우린 날마다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은혜이고 감사임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왜? 십계명을 주셨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으로 너희가 이런 자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네 실존이 이렇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희는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죽이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은 지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실존을 알려주기 위하여 주어진 계명입니다.

애굽에서는 몰랐는데 광야에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서 보니 내구 누구인지 내가 어떤 자인지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너희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느냐?

이는 모두가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도 떠나고 이웃과도 원수가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럼 죄를 싹 빼내면 어찌 될까요?

본래 창조의 목적대로 되겠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겠지요.

죄가 없으면 원래 창조의 목적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사신 분이 있습니다.

누구신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진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일컬어 참 사람이라는 뜻으로 인자(人子)라고 합니다.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진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은 예수님 앞에서 가짜로 드러납니다.

예수님만 참 사람이고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참 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지고 인간들을 고발합니다.

너희는 인간이 아니고 짐승(죄인)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죄인을 일컬어 짐승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참 사람으로 보내서 짐승들을 사람 만드는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만드는가 하면 아들을 짐승의 양식으로 주어서 만드십니다.

참 사람인 그 아들을 짐승들에게 먹잇감으로 주어서 그 아들을 먹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는 일을 하십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죄인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의인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짐승이 예수를 먹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생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를 먹은 자들은 참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를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답게 살 수가 있어집니다.

예수는 한번만 먹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먹어야 할 양식입니다.

 

양식이란? 날마다 먹는 것이지 한 달에 한 번 먹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먹은 자는 많이 나타나고 적게 먹은 자는 적게 나타납니다.

먹은 만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생명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양식이 바로 예수입니다.

예수는 하루 하루 먹어야 할 양식입니다.

 

예수를 먹은 죄인이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는가요?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 됩니다.

예수가 그렇게 간섭해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먹으면 예수가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십니다.

남을 뜯어 먹고 살던 짐승들이 예수를 양식으로 먹음으로서 죄인에게 없던 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건 성도의 정체성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이 부르심과 정체성이 정답이 되어서 계속하여서 우리를 고발합니다.

우린 이 정답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 감사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와 용서하심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가 지켜 낼 수 없는 정답을 가지고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 앉게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를 말씀 앞에 세워서 넌 죄인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말씀이 명경(明鏡)처럼 우리의 속속들을 다 파헤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정답을 쓰지 못하는 자라는 것을 깊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더 크게 와 닿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를 향한 명령이고 권면입니다.

교회를 향하여 너희는 이제부터 예수 안에서 한 몸이고 한 권속이 되었으니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너희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누구에게 말합니까?

예수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를 지나온 자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을 한 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그 명령 속에 담겨진 역설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미움을 품고 있으면 그 미움이 나를 장악하여 나로 하여금 불행하게 만듭니다.

누군가를 미워해 보세요.

내가 불편합니다.

 

내 마음이 지옥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忿)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忿)이 나를 태우기 때문입니다.

 

분(忿)을 다른 말로 하면 스트레스입니다.

만병의 원인이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의사들은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스트레스를 왜 받습니까?

남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을 미워하는 분노가 지옥불이 되어서 나를 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忿怒)를 품어 보세요.

그럼 남을 향한 분노가 나를 태우는 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노를 품지 말라는 것은 곧 나를 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사랑으로 이해해 보세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면 어찌 될까요?

내가 행복해요.

 

학교 다닐 때 선생님을 짝 사랑해 보았지요.

누군가를 혼자 사랑해 본 경험들이 있지요.

없으면 해 보세요.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행복해 집니다.

이는 사랑이 행복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아주머니들이 연예인들을 좋아합니다.

연예인들은 아주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주머니만 그들을 짝 사랑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아주머니는 행복해 합니다.

왜냐하면! 연예인들이 죽었던 사랑을 일깨워주어서 자기 안에 행복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누군가를 사랑하면 행복해 지게 되어 있어요.

상대방이 자기를 사랑하느냐 안하느냐는 중요치 않아요.

내가 그를 사랑함으로서 내가 행복한 겁니다.

 

그를 보면 가슴이 뛰고 몸이 뜨거워져요.

몸이 살아서 움직여요.

결국 내가 행복하고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내 안에 품어진 그 사랑이 나를 힐링(치료)시키고 행복하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에서 남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은 결국은 나를 사랑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반어법(反語法)적 사랑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을 통하여서 나를 행복하게 해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을 품고 있으면 그 사랑이 나를 장악하여 나를 행복하게 해 줍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위하여 남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한 사랑이지만 결국 나를 위한 사랑입니다.

남을 사랑했는데 결국에는 내가 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의 속성(續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밖으로 드러날 때는 이타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물론 이타(利他) 속에는 이기(利己)가 들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이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는 자식을 사랑함으로서 부모가 행복해 합니다.

겉으로는 분명히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이타적인 것이 맞는데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부모는 자식을 사랑함으로서 부모 자신이 행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므로 결국에는 이기적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봉사하고 헌신하고 형제를 섬기는 것은 분명히 이타적인 것입니다.

내가 희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봉사와 헌신과 섬김을 통해서 우리가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사랑이지만 내 자신의 사랑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리와 삶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교리를 뼈대라고 한다면 삶은 살과 같습니다.

뼈대만 앙상하게 있으면 흉측합니다.

 

에스겔 37장의 해골골짜기에 모습들이 어떠합니까?

 

뼈만 앙상합니다.

그 위에 생기가 붑니다.

성령이 운행하면서 일을 합니다.

성령이 그들 속에 들어가니까 살이 생기고 근육도 생기게 됩니다.

그러자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합니다.

즉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게 되더란 말입니다.

 

이게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구체화 되어서 나타났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율법 아래서는 볼 수 없는 광경들이 일어납니다.

날마다 모여서 주를 찬미하고 자기 재물을 내어 놓고 성도를 섬깁니다.

서로 사랑합니다.

 

에스겔의 해골들이 성령에 의하여 살아난 것입니다.

그 성령이 지금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봉사도 하게 하고 사랑도 하게 합니다.

그동안 입으로만 믿던 예수가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이 율법 아래서 화석화 되었던 뼈만 앙상한 우리들 신앙 속에서 은혜의 살을 입히고 사랑의 근육을 만들어서 성도를 섬기고 봉사하고 사랑하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교리라는 뼈대에 사랑이라는 살이 입혀지면 사랑하는 삶이 나옵니다.

뼈대는 살을 입히기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리도 삶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진짜 교리를 아는 사람은 교리와 삶을 이원화 하지 않습니다.

 

교리와 삶을 분리해서 이해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이 둘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이 하나가 될 때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하라고 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7-16=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 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사랑 안에서 서로 서로가 도움을 입고 사랑 안에서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라고 합니다.

 

예수로 구원을 받았느냐?

그럼 구원 받은 자로서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함으로서 그 몸에 지체로 부르심을 입는 내가 사랑을 입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사랑이라는 말씀 앞에 우리를 세워 보십시다.

 

그 사랑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봅시다.

나를 어디에 세우는지 살펴봅시다.

 

사랑엔 거짓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도 거짓 없는 사랑을 하라고 합니다.

그럼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과연 그 거짓 없는 사랑을 일향 행할 수 있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먼저 우리의 가능성으로 출발을 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여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고 성도의 본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러한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도를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는 맞지만 본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 아들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낸 자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가지고 하실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을 하는가 하면 예수를 믿게 하는 일을 하십니다.

즉 아들을 공경하게 하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아들을 보냈습니다.

아들을 보낸 것은 창세로부터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살리고자 대신 죽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뜻에 따라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십니다.

내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아들에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는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 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구원의 능력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일컬어 아들을 공경하고 영화롭게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영화롭게 될 때 기뻐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뜻은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들을 영화롭게 합니까?

그 아들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 아들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자들이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의 죄를 폭로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우리가 죄인임을 알게 하시고 아들을 믿게 하려고 말씀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세요.

 

죄 아래서 난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요구를 담아 낼 수가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담아내고 싶어도 육신이 할 수가 없습니다.

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가 없어요.

이건 하나님 말씀 앞에 서 보면 우리 실존을 알게 됩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성도라고 한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하여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이런 지향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 지향성이 우리의 한계를 드러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합니다.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란 중에 참으라고 합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라고 합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합니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마음을 두라고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합니다.

원수를 갚지 말로 하나님께 맡기라고 합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마시우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 같이 우리에게 부담스러운 말씀들입니다.

우리의 본성과 반하는 것들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위에서 하신 말씀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너 죽고 남을 살리라는 말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엔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린 과연 거짓 없는 사랑을 할 수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우리 몸은 거짓의 아비로부터 낳아진 것입니다.

우리 자체가 거짓 덩어리입니다.

우리 몸은 거짓으로 살아요.

몸과 마음이 다르게 살아요.

 

우리는 남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다가갑니다.

자기 것을 얻고자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탁 깨놓고 보면 남편이나 아내에게도 내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하여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에게도 내가 바라는 것을 얻고자 사랑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뱉어내는 모든 말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거짓의 아비로부터 태어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몸뚱이를 가지고 사는 한 우린 거짓 없는 사랑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따라주지 못해요.

우리는 누구를 사랑한다고 말을 해도 그 저변에는 나를 위한 사랑일 뿐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 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서면 우린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말씀 앞에 서면 작아져야 합니다.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우리 밖에 모릅니다.

나 이외 사랑할 대상이 없습니다.

나는 나만 사랑합니다.

이게 나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펴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으라고 합니다.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내게 잘 해주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아요.

비록 부모라 할지라도 나를 힘들게 하면 싫습니다.

자식이라 할지라도!

남편이나 아내라 할지라도 싫습니다.

날 힘들게 하면 속으로 하루에 수 없이 죽이고 또 죽입니다.

 

우린 내 유익을 위하여 누군가를 좋아합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좋아하듯이 말입니다.

모두가 내 유익을 얻기 위하여 좋아하는 것입니다.

내 유익이 사라지면 언제든지 버립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말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흔하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들이 사랑에 목말라 한다는 말입니다..

또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토록 사랑 타령을 하는 것입니다.

안 되니까 사랑 사랑하는 것입니다.

되면 사랑 타령하지 않아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만큼 자기희생이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나의 죽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지 않는 한 사랑은 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만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자신을 죽여서 우리를 살려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것보다 먼저 예수님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하셨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입고 사는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 이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싸우라고 합니다.

 

이걸 우리의 신앙에 적용하면 먼저 내 주제를 알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추상같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여도 내가 그 명령을 지켜 낼 수 있느냐 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제사보다도 하나님의 뜻 앞에 불가능성을 알고 긍휼을 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비유로 말합니다.

중풍병자에게 축구를 하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축구를 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축구를 해야 할 사람이 중풍병자입니다.

 

그럼 중풍병자는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축구를 할 수 없는 중풍병자에게 축구를 하라고 하셨을까?

그 진의를 찾아야 합니다.

 

중풍병자가 말씀에 순종한다고 하여서 축구를 하면 그것이 곧 참람이고 악이 됩니다.

축구를 해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축구를 안 해도 죄에요.

중풍병자로 있는 것 자체가 죄인 겁니다.

 

성경은 죄인을 중풍병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죄인들 앞에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는 것은 중풍병자에게 축구를 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죄인들이 자기가 중풍병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축구를 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 한단 말입니다.

 

오호라 통재라!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너희는 내 말에 순종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불가능한 것을 역설적으로 순종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계명을 준 것은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상을 알려주고자 주신 것입니다.

 

모든 말씀이 십계명과 같아요.

우리 실존을 고발하고자 주어진 말씀들이에요.

 

오늘 본문도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도무지 우리가 지켜 낼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몸은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걸 교회에다 주었어요.

그럼 교회는 이 말씀 앞에서 “주여 우리는 중풍병자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소경거지 바디메오처럼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여! 당신이 보게 해 주어야 볼 수가 있습니다!

 

이걸 우리식으로 말하면 “주여 당신이 이 말씀을 지켜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말씀 앞에서 예수를 찾고 만나야 합니다.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아들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마음이 순수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신앙일 수는 없습니다.

신앙이란? 끊임없이 자기가 죄인임을 절감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구원의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크고 높고 깊은 것인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혜에 압도당하여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여야 합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 어디에 가는가요?

천국입니다.

천국에 가서 무얼 하는가요?

 

요한계시록 4-5장을 봅시다.

 

계 4:1-1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 5:11-14=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성령께서 사도 요한을 하늘로 끌어 올립니다.

천국을 보여 주십니다.

사도요한은 하늘나라에서 교회의 원형을 보았습니다.

성령이 “교회란 이런 곳이다” 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보좌가 있습니다.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은 보석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로 무지개가 둘러 진을 쳐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이 누군가 보니 어린 양이십니다.

그런데 그 앞에 24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분에게 자신들이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으로 던지며 세세토록 경배를 합니다.

어린 양이 승리자입니다.

24 장로는 어린 양의 전리품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어린 양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상급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양의 전쟁으로 구원을 받은 24장로들은 자기들이 얻은 구원이라는 영광의 면류관들을 어린 양에게 돌려 드리면서 찬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가 이루어 낸 것이 아니고 어린 양께서 이루신 것이므로 우리의 영광이 아니고 어린 양의 영광입니다 라고 하면서 감사와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이 이루신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이 다 예수님한테만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찬양하고 예수님께만 감사하는 그런 나라가 바로 천국입니다.

 

교회는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의 피 값으로 세워진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인간들의 영광은 없습니다.

오직 어린 양의 영광과 어린 양만이 찬미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공로로 구원을 얻고 모인 자들이 어린 양의 공덕(功德)을 기리고 자랑하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어린 양의 영광과 어린 양만이 찬미를 받는다고 한다면 교회 안에서는 역설적으로 인간들의 가치는 부정당하여야 합니다.

인간의 불가능성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영광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그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어린 양 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말씀을 다 이루신 것을 시혜(施惠)로 받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지 못한 것을 어린 양이 대신 하여서 선물로 주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구원이 은혜가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 은혜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죄인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서로 서로 이 사실을 알면 사랑이 됩니다.

이 사실을 알고 섬기면 거짓 없는 사랑이 됩니다.

구원 받음이 너무도 고마워서 24장로들처럼 자기의 것을 다 내어 놓게 될 때 거짓 없는 사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원칙이고 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린 이 원리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나를 부인하고 죽여야 함에도 우린 교회 안에서 우리 가치성을 인정받고자 합니다.

자기 의를 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력함을 고발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답을 뻔히 알면서도 그 정답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의 실존이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음을 자각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가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 속에는 영웅본색이 들어가 있습니다.

누구나가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하고 으뜸이 되고 영웅이 되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영웅사상이 신앙생활 속에서도 그대로 녹아져 있습니다.

 

자기를 증명하고자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를 증명해 보이라고 합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영웅이 되어서 증명해 보라고 합니다.

이 일에 마귀가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유약해서 되겠느냐?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형편이 어려워서야 되겠느냐?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당당하고 멋져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돌이 떡 되게 하고!

성전 꼭대기서 뛰어 내리고!

세상 천하만국의 영광을 차지하라고 합니다.

마귀의 이러한 속삭임은 우리 귀에 착 달라붙는 달콤한 캔디 같은 말들입니다.

 

인간은 무슨 일을 하여도 인정을 받고자 합니다.

그 일을 통하여서 자기 이름이 나고,

자기 유익과 자기 영광을 얻고자 합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야! 정낙원이!

너 복음 전하는 목사라면서!

그럼 하나님 말씀을 멋지게 지켜봐!

너도 예수님처럼 너를 핍박하는 자들을 보고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 하소서! 라고 성자가 되어 보이라고 합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고 합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 스스로를 비춰 보세요.

과연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 추상같다고 하여도 내가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무엇을 봅니까?

내 가능성을 봅니까?

아니면 불가능성을 봅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로마서 12장 이후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살아야 할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이런 인간으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이 부르심 앞에 나를 세우십시오.

 

열심을 다하여서 말씀대로 사십시오.

단 나는 도무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인간임을 알기 위해서 사십시오.

순종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위하여 살아 보십시오.

 

해 보지도 않고 안 돼! 라고 하는 것은 관념이고 추상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지키게 하십니까?

이는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관념으로나 추상으로 알아선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자기 백성들에게 능력으로 남게 하기 위하여서입니다.

나의 불가능성을 알 때 비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나의 구원 사건으로 실제화 되어서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의 죄인 됨과 우리의 불가능을 알게 하시려고 가능을 요구하시는 이 하나님의 역설(逆說)을 이해하는 은혜가 임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앞에 펼쳐진 암담한 사건과 사고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는 은혜가 임하게 되와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망대가 무너져 죽은 자들 이야기를 하시면서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그들과 같다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도 말씀 앞에서 늘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울 산 목 양 교 회
글쓴이 : 정낙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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