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강.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 (롬 12:1-2)
롬 12: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제목이 모순처럼 들리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몸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영적 예배가 뭔가요?
영(靈)으로 드려지는 예배란 뜻입니다.
그럼 어떻게 드려지는 것이 영(靈)으로 드려지는 것인가요?
그거야 영(靈)으로 오신 분에 의하여 드려지는 것이 영적 예배이지요.
그럼 영(靈)으로 오신 분이 누구이고!
영(靈)으로 오신 그 분이 어떻게 영적 예배를 드렸는지를 추적해 봅시다.
오늘 말씀은 잘 이해하고 들으셔야 합니다.
자칫하면 오해 할 수가 있어요.
이해가 안 되시면 물으셔서 그 진의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괜히 혼자 소설을 써서 자기 이야기로 풀어내면 안 되어요.
일 못하는 사람이 연장 나무란다고!
자기가 이해력이 부족해서 진의를 모르고서는 괜히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잘 알아서 잡수시기 부탁드립니다.
로마서는 두 구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교리(敎理)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12장부터 마지막 16장까지는 교리가 담고 있는 내용을 삶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쉬운 말로 하면 교리가 집이라고 한다면 삶은 그 집 안에 채워진 내용물과 같아요.
흔히들 그러잖아요.
집 값이 1억이면 그 안에 채워지는 살림살이도 1억이 든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집과 그 집 안을 채우는 내용은 동일한 비중으로 중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동일하게 중요해요.
복음을 아는 것과 복음으로 사는 것이 동일한 중수로 중요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머리로만 알고 그 복음을 내용으로 하여 살아내는 삶이 없어요.
입술로는 예수를 말하는데 그 안에서 토하여지는 내용물은 마귀적인 것들이에요.
말과 행동이 달라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달라요.
성경은 이러한 것을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귀신의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러한 자들을 영혼 없는 사람과 같다고 했어요.
영혼 없는 사람이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믿음과 그 믿음이 뱉어내는 내용이라는 행함이 없는 사람은 믿는 신자가 아니란 뜻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교리와 삶이 그러해요.
교리가 그릇이라고 한다면 삶은 그 알맹이에요.
교리가 나무라고 한다면 삶은 그 열매인 것입니다.
나무와 열매는 분리 할 수가 없어요.
이와 같이 교리와 내용도 분리 할 수가 없어요.
예수를 아는 것과 예수로 사는 것은 분리 될 수가 없어요.
이것이 분리 되어 사는 자를 일컬어 지식을 쫓는 자들이라고 하여 그노시스주의자 즉 영지주의자라고 해요.
사도들이 율법주의자들과도 싸웠지만 아는 것과 사는 것을 분리한 영지주의자들과도 싸웠어요.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은 어느 시대이고 교회 안에서 참으로 둔갑을 하여서 기생을 하였어요.
그리하여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인에게 모독을 당하게 하였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초대 교회 안에 마귀가 설쳤듯이 지금도 교회 안에 마귀가 설치고 있어요.
마귀의 영지주의 가르침이 횡행한단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보면 니골라당이니 발람의 교훈이니 이세벨이니 하면서 교회를 헤치는 자들의 무리들이 나오지요.
이들이 곧 총체적으로 진리를 훼손하는 영지주의자들이에요.
성경이 이러한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복음을 아는 것과 복음으로 사는 것이 동일한 중수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제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자 예수 믿으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식으로 공교하게 지은 말로 현혹하는 자들에게 속지 마세요.
율법 아래서 종 노릇하는 것도 비 신앙이지만, 복음을 핑계되고 자기 사욕을 쫓으며 방종하며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도 비 신앙이에요.
인간의 행함으로 의를 만들고자 하는 것도 악한 것이지만, 복음을 빙자해서 방탕과 방종으로 타락과 자기의 게으름을 합리화 하여 아무 것도 안하는 것도 동일하게 악한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죄를 안 짓고 온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의 삶의 지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못 하는 것 하고!
안 해도 된다는 것하고는 달라요.
못하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이지만 안 하는 것은 악함이에요.
우린 죄인이에요.
죄의 몸으로 온전할 수가 없어요.
온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입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온전하세요.
성도에게 있어 온전이란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복음 알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식의 달콤한 말로 포장을 해서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고자 하는 자들로부터 벗어나세요.
그들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거짓 선지자들이에요.
우리 안에 쌓은 단을 허무는 자들이에요.
사도들이 언제 예수 믿으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했나요.
도리어 열심히 모이고 봉사하고 충성하면서 육적으로도 이방인들보다도 더 경건하게 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일을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면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일만 만드는 자들을 책망했어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도들의 모습을 보세요.
어디에 게으름을 피우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하면서 방종과 방탕으로 산 자들이 있는가요.
없어요.
모두가 모이기를 힘쓰고 자기 소유를 내어 놓고 섬기고 베풀었어요.
도리어 방탕과 방종하는 자들을 나무랐어요.
그런 자들을 경계하고 사귀지 말라고 했어요.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고 했어요.
바울은 교리와 삶을 동일한 중수로 이야기 했어요.
지금 이 시대는 너무도 교회가 타락하여서 삯군목사들이 교인들의 주머니를 강탈하고 충성을 끄집어내어서 식상해 하니까 복음 비슷한 것으로 포장을 해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이 복음이다! 라고 내어 놓는 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그러니 빛이 그 속에 없는 자들은 다 속는 겁니다.
이들의 가르침이 자기 게으름과 방종과 방탕한 삶을 합리화 하는데 딱 이거든요.
그러다보니까 마치 복음을 알면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임도 폐하고!
봉사와 헌신도 페하고!
연보도 페하고!
심지어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도 페하였어요.
마치 이러한 것을 하는 사람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해요.
그러다 보니까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더욱 더 패역해져 가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악독이 나와요.
마치 사막에 떨기나무같이 마음이 싸늘해지고 강퍅해져 가는 것입니다.
악독과 시기가 그 안에 가득하여서 복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어느 시대고 복음을 말하는 자들로부터 복음이 가리어졌어요.
쉬운 말로 예수쟁이들로부터 예수가 가려졌단 말입니다.
이 모두가 거짓 종들로부터 교리와 삶을 분리하여서 이원론적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마트에 가서 라면을 사옵니다.
라면을 사면 봉지만 주는게 아니고 그 안에 내용물인 라면도 함께 주어요.
봉지만 사오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예수를 주셨어요.
그럼 예수 안에 있는 내용물도 함께 주신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옛 사람을 죽였어요.
그리고 성령으로 그리스도가 되어서 우리에게 오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려 냈어요.
새 사람에게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야 할 내용물도 함께 은사로 주셨어요.
옛 사람을 죽였으면 옛 사람이 담고 있는 것도 죽였고, 새 사람으로 살려 내었으면 새 사람이 담고 있는 내용물들도 함께 주세요.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살아난 사람에게서는 옛 사람의 것이 죽어지는 삶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동시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하늘에 있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어요.
즉 이제는 예수쟁이 답게 살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교리와 삶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기독교의 핵심 사상이라고 하는 교리를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상세하게 이야기 하고서는, 12장에 들어서서부터는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는 내용적인 것을 말하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로마서를 말하면 1장부터 11장까지는 나무를 말하고, 12장부터 마지막 16장까지는 열매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리를 몸으로서 삶으로 풀어내는 것을 일컬어 영적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리가 뭔가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義)가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義)가 1장부터 11장까지 말해온 교리에요.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키 워드가 있습니다.
“몸”과 “산 제사”와 “영적 예배” 라는 단어입니다.
“몸”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교리를 담고 있는 내용으로 살게 되면 예수님처럼 제물이 되어서 죽임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요.
성령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이 당하셨던 일들을 적용을 시키세요.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자기가 부인당하며 죽임당하는 삶을 “산 제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몸으로 산 제사로 드려지는 것을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몸이에요.
몸!
정신이 아니고 몸이에요.
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행하는 신앙생활은 12장부터에요.
1장에서 11장까지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말하고 있고!
12장 이후부터는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해주고 있어요.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몸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에 관해서 아는 것이 아니에요.
지식이 아니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에요.
다시 말합니다.
이건 우리더러 노력해서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가 우리 안에서 이러한 일들을 행하신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는 머리로 믿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앎이란? 삶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없는 앎은 죽은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신앙이란? 마음으로 믿어지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게 되어 있어요.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곧 몸으로 살아낸다는 말과 같아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 몸을 제물이 죽임 당하여 예배가 이루어지는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지요.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너희를 시인한다고!
이 말씀은 신앙이란? 반드시 가현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즉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인간의 행위 차원으로 듣지 마세요.
사도 바울이 지금 우리의 열심과 각오로 어떤 행위를 만들어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어떻게 예수님 생명을 우리 몸에서 발현시켜내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 몸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단 말입니다.
영적이란 말은 육적이란 말의 상대적인 말입니다.
영적 예배가 있다고 한다면 상대적으로 육적 예배도 있겠지요.
영적 예배를 알면 육적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고,
육적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면 영적 예배가 무엇인지도 알 수가 있겠지요.
그럼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 영(靈)이고!
무엇이 육(肉)입니까?
영(靈)과 육(肉)을 알아야 하겠지요.
요한복음 4장을 봅시다.
요 4:20-26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靈)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영(靈)이라고 합니다.
영(靈)이란? 육(肉)의 반대입니다.
육(肉)은 피조 세계를 말합니다.
피조 세계의 반대는 창조 세계입니다.
피조 세계를 육(肉)이라고 한다면 창조 세계가 영(靈)이 됩니다.
창조주인 하나님을 영(靈)이라고 한다면 피조물인 인간은 육(肉)입니다.
육(肉)과 영(靈)은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靈)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반드시 영(靈)으로만 나아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육(肉)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육(肉)인 인간 쪽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나아갑니까?
영(靈)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영(靈)은 창조에 속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창조에 속하신 분이 와야지만 하나님께 영적 예배를 드릴 수가 있어집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이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에게 어디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예배(禮拜)에 대하여 묻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를 묻고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아니면 그리심 산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예루살렘이나 그리심 산이나 다 피조에 속한 곳입니다.
육(肉)이에요.
수가성 여인은 조상 대대로 지내온 방식의 육적 예배를 찾고 있어요.
그러자 예수님은 이 산도 아니고 저 산도 아니라고 합니다.
예루살렘도 아니고, 그리심 산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건 모르고 예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영적 예배가 아니란 말입니다.
육적 예배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인에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영적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려 줍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인은 그것은 메시야인 그리스도가 와야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바로 그 메시야인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메시야로서 여인에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알려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아가는 것이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외는 모두가 육적 예배가 됩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는 것은 다 육(肉)입니다.
예수님만이 영(靈)입니다.
그럼 오늘본문에서 말하는 영적 예배란? 예수님을 근거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서 오셨습니다.
그 길을 자기 몸으로 여셨습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흠 있는 죄인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나면서부터 흠이 있는 자들입니다.
죄인이고 육(肉)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자기 피를 자기 백성들에게 뿌려서 거룩을 입혀 주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는 거룩한 피가 됩니다.
이제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 공로를 앞세우고 나아가는 것이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창조의 세계에서 오신 영(靈)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앞세우고 나아가는 것이 곧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드려졌던 구약의 율법에 근거하여서 드려진 예배는 모두가 육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짐승의 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짐승의 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창세전에 두루마리 책에 기록해 놓은 한 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1-10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참 형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 형상이 아니란 말은 가짜란 말입니다.
그럼 율법으로 드려지는 모든 것은 가짜가 됩니다.
가짜는 진짜를 설명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가짜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나는 가짜이고 진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 줄 때는 가짜도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할 때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가짜 제사를 주신 것은 진짜 제사를 알려주시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온전케 할 수가 없고 죄를 깨닫게 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 아래서 짐승의 피로 드리는 제사는 아무리 정성을 다하여서 드렸다 할지라도 가짜이고 죽은 제사 밖에 안 됩니다.
육적 제사 밖에 안 됩니다.
이는 짐승 자체가 피조에 속한 육(肉)이고 참 제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율법으로 짐승의 피로 드려진 제사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온전치도 않은 가짜 제사를 드리라고 했을까요?
이는 장차 오는 진짜를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진짜가 뭐냐?
창조에 속한 영(靈)이신 분이 오셔서 드리는 것입니다.
영(靈)의 세계에 계시던 분이 영(靈)으로 오셔서 영(靈)으로 드릴 때 영적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은 가짜를 통해서 진짜를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짐승의 제사를 준 것은 한 몸의 제사를 알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의 피로 드려지는 제사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진짜 제물이 되실 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구약은 가짜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도 가짜입니다.
진짜는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구약의 신앙은 진짜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짐승으로 제사를 지내면서도 진짜 하늘로서 오는 제물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 제물은 하늘에서 와서 짐승처럼 죽임 당하여야 할 한 몸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신 영(靈)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창세전에 두루마리 책에 기록이 된 한 몸으로 오신 영(靈)이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내가 왔나이다!
내가 바로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두루마리 책에 기록해 놓았던 그 한 몸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내 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내가 온 것입니다.
이제부터 내 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나아오는 자들에게는 사귐을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이게 영적 예배입니다.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나아오는 자들을 만나주십니다.
이러한 예수 안에서 만나는 만남을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을 영적 예배라고 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영적 예배는 영이신 예수님의 몸으로 드려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리 몸으로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몸이 아닌 우리 몸으로 말이에요.
어떻게 우리 몸으로 영적 예배를 드릴 수가 있는가요?
이는 영(靈)이신 예수가 우리 몸 안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은 우리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제물로 삼으십니다.
이걸 산 제사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산 제사를 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 몸을 자기화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는 예수와 연합이 된 자들입니다.
연합이란? 한 몸이란 말입니다.
예수가 그 안에 계신 성도의 몸은 예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드려지기 때문에 산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 때가 온다고 하셨지요.
그 때가 언제인가요?
성령이 오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예수님)이 그 안에 오신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삶 자체가 영적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로마서는 전반부는 “교리”를 말하고, 후반부는 그 교리를 토대로 하여 살아가는 “삶”을 말해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天地創造)와 같습니다.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를 보면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 까지는 천지(天地) 즉 하늘과 땅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그 하늘과 땅이라는 공간 속에 만물(萬物)을 채우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걸 로마서 식으로 말하면 1장에서부터 11장까지 전반부의 “교리”가 신앙의 근본인 천지(天地)라는 공간을 만드는 창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12장부터 16장까지 나오는 후반부의 내용들은 교리를 삶으로 풀어내는 것이 됩니다.
교리를 “신앙의 삶”으로 풀어내는 것은 천지(天地)라는 공간 속에 만물(萬物)을 담는 창조와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지창조(天地創造) 기사를 두 부분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을 다 이루니라”
하나님은 이러한 세계에 복을 주시고 안식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는 것을 신약식으로 말하면 천지(天地)의 창조는 죄(罪) 아래서 불러냄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만물(萬物)의 창조는 의(義) 아래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걸 율법에서 건져내는 것으로 말해 봅시다.
천지 창조를 율법(律法) 아래서 불러냄을 말한다면, 만물 창조는 은혜(恩惠) 아래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천지 창조를 아담 안에 있던 옛 사람을 빼내온 것이라고 한다면, 만물 창조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새 사람으로서의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복음 속에는 파괴와 건설이 있습니다.
넘어짐과 세움이 있습니다.
옛 것의 버려짐과 새 것의 채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1장을 봅시다.
렘 1:9-10절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를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주어집니다.
말씀이란 복음입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에 무슨 말씀을 주십니까?
먼저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이건 옛 것을 죽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곧 뉴 타운을 만들기 위하여 옛 집들을 불도저를 가지고 허물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율법 아래서 빼내고!
죄 아래서 건져내고!
옛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설하고 심게 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이는 은혜의 사람으로 세움을 입는 것이고!
의롭다 여겨주심을 입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애굽에서 빼낸 것은 가나안에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애굽식이 아닌 가나안 식으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애굽 식은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지만 가나안 식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나안에서의 삶이 없으면 출애굽은 의미가 없어요.
우리를 법 아래서 왜? 빼내 주셨습니까?
이는 은혜 아래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삶이 없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삶이 없는 교리는 죽은 것입니다.
교리가 원리라고 한다면 삶은 내용입니다.
교리가 “예수 믿기” 라고 한다면, 삶은 “예수 믿기란 이렇게 나타난다” 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나타남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살아서 일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마음과 성품적인 것들이 자연스럽게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 발생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살아 있는 것들은 자연히 움직여지는 것과 같습니다.
살아 있는 자에게 움직임은 강요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음이 곧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산 자는 움직임으로 자신의 살아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움직임이 없는 자는 죽은 자이듯이, 삶이 빠진 교리는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살아내는 삶이 없는 것은 그 자체가 죽은 예수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못을 하나 쳐놓고 갑니다.
삶을 우리더러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말해두고 갑니다.
나뭇가지가 흔들립니다.
바람이 불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비록 눈에는 바람이 보이진 않지만 나뭇가지의 흔들림을 통해서 아! 바람이 부는구나!를 압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 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있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보입니까?
그럼 거듭 났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십니까?
그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계신 것입니다.
보게 하시니 보는 것이고!
살게 해 주시니 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이루어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하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이미 하셨고!현재도 하시고 있으며!
장차도 하실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에서 구원을 접붙임으로 말씀 하신 것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접붙임 당한 자들이 맺어내는 열매들이 12장 이후의 모습들입니다.
12장 이후의 모습들이 나타나야 올바르게 접붙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것이 없으면 가짜입니다.
접붙임 당한 것처럼 보일 뿐이지 접붙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접붙임은 접붙임 하는 나무도 쪼개고 접붙임 당하는 나무도 쪼개짐을 당합니다.
두 나무가 공히 쪼개어져서 하나가 됩니다.
서로 쪼개어져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진액이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진액이 흐르니까 나무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는 뿌리에서 공급되는 진액이 맺는 것이지 가지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는 다만 뿌리가 공급해 주는 것을 토해낼 뿐입니다.
그 뿌리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린 그 가지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것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몸을 가지고 맺는 것은 예수님의 열매이지 우리의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함이지 우리의 행함이 아닙니다.
이러한 행함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교리적인 것을 말하다가 12장 이후부터는 성령의 은사로 살아가는 삶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야고보식으로 말하면 믿음과 행함이라고 합니다.
12장 이후를 우리의 행위 차원으로 이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알다시피 12장 이후부터는 모두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건 하고!” “저건 하지 말라!”는 식으로서의 명령문(命令文)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마치 율법처럼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들려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러한 것들을 도출해 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장 이후의 삶도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 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빌 1:6절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다시 설명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敎理) 부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1장에서 11장까지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는 식으로 설명을 하듯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12장 이후부터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서 법적(法的)인 어투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치 행위처럼 들립니다.
잘못 이해하면 행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 할 수가 있습니다.
쉬운 말로 1장에서 11장까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으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은혜를 이야기 했으니까 12장 이후부터는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으라는 식으로 명령을 하는 것을 보니까 우리가 열심을 다해서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앞과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은혜를 이야기 하고는 12장부터는 행위를 이야기 한다면 그건 모순이에요.
은혜와 행위는 상반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의 일관성과 통일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앞에서는 “하지 말라”고 해 놓고서는, 뒤에서는 “하라”고 할 순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시대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이렇게 해석해서 가르치고 있어요.
이런 가르침을 받으면 반쪽 신앙으로 흐르게 되어 있어요.
성경 속에 이러한 무리들이 나타났는데 이를 갈라디안식 신앙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안식 신앙이란? 예수 믿기와 율법 지킴을 통해서 온전해 진다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면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율법에 특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데 있어서 획기적인 인식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과거 율법주의자로 있을 때에는 인간이 율법 지킴으로 온전해 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지킴을 의로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 지키는 것이 의로운 것이라는 명제(命題)를 가지게 되면 상대적으로 율법을 어기는 자는 불의한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이러한 명제로 율법에 반(反)하는 행동을 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탄핵하고 죽이는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여기에 걸려서 죽임당하셨고!
스데반도 여기에 걸려들어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이 율법의 잘못된 점을 이야기하자 바울이 분개하여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을 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서슴없이 행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옳음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고 보니 완전히 다른 겁니다.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 지킴의 유무(有無)로 의(義)와 불의(不義)로 나눈 유대교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이 곧 이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새로운 눈이 떠진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가는 곳마다 율법주의가 틀렸다고 증거 합니다.
상대적으로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다 완성 하였다고 증거하기 시작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얻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소리칩니다.
이에 율법주의 유대인들이 발끈합니다.
급기야 옛 동료였던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훼손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에 유대교 거짓 교사들을 파송합니다.
그리하여 바울의 가르침에 교묘하게 율법을 섞어서 십자가의 은혜성을 훼손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가르침이냐 하면 바로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대로 예수도 믿고 율법을 지키니까 율법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공격당하지 않으니 좋은 겁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갈라디안식 신앙입니다.
이에 바울이 소리칩니다.
그건 아니라고!
갈라디아서를 봅시다.
갈 3:1-5=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너희 앞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밝히 보이는데!
어찌 하여 그가 십자가에서 폐한 율법을 다시 지키느냐!
너희가 율법을 지켜서 온전해 진다고 한다면 예수가 헛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건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친다는 말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반어법(反語法)으로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그런 복음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걸 육에 속한 자들은 문자풀이를 해서 봐라!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칠 수 있으니 열심히 해서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인간의 가능성으로 구원을 이루겠다는 발상입니다.
이게 다른 복음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열심히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와 각오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은 믿음을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주인이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그 믿음의 주인이 누구인가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구원하심은 하나님의 공로이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성령(예수님,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지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받은 성도는 절대로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잠시 넘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택한 백성은 다시 일으켜 세움을 입습니다.
마치 도망친 베드로를 예수님이 끝까지 찾아가서 일으켜 세움과 같이 세워 주십니다.
영영 넘어지는 자는 애초부터 아닌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너희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소리치는 것은 곡언법(曲言法)으로 그런 복음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가르침을 복음으로 듣고 있다면 그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합니다.
갈 1:6-10=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누구라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것을 훼손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이고 이단이에요.
그건 “다른 복음”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비롯해서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용서할 수 없다고 합니다.
다른 복음이란? 예수 믿기에다가 율법 지킴을 섞는 것입니다.
이걸 포도주에 물을 섞는다고 합니다.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썩어요.
포도주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셔요.
이건 마치 에덴동산에서 뱀이 여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가르친 것과 같아요.
지금도 유대교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 안에서 뱀처럼 하나님 말씀에 자기 말을 섞어서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못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만 믿어서는 안 되고 율법을 지켜야 온전해 진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들으면 그럴듯해요.
그러니 믿음을 받지 못한 자들은 속는 겁니다.
거짓 선지자에게 속는 자들은 거짓 신자들이에요.
참 신자는 절대로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아요.
요한복음 10장을 봅시다.
요 10:3-16=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예수님은 자기 양을 찾으러 오셨어요.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럼 자기 양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알고 따르게 됩니다.
반대로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므로 따르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의 양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예수님의 양이에요.
예수님의 음성이 뭔가요?
“내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예수님의 피로 의로워진다는 새 언약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교회에 풀어 놓은 것은 거짓 신자들을 추수하기 위함이에요.
그래서 거짓 신자들은 다른 복음을 듣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넘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의 몫이 아니에요.
넘어지는 자는 애시당초 넘어지게 되어 있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줄 우리는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 안에다가 거짓 선지자들을 풀어 버리는 겁니다.
그럼 진짜와 가짜로 갈라지게 됩니다.
가짜이기 때문에 가짜의 말을 진리처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짜의 속임에 넘어가는 것은 가짜이기 때문에 넘어 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에 다니기 때문에 가짜에게 속는 것입니다.
갈 2:4-5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이단을 가르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를 빼앗고 다시 율법을 지키는 종으로 삼고자 함입니다.
쉬운 말로 자기들을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데 예수쟁이들은 안 지키니까 뿔따구가 나는 겁니다.
왠지 자기들이 손해 보는 것 같은 거에요.
그래서 공교하게 지은 말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예수도 믿고 율법을 지키면 좋지 않으냐?
구원은 예수 믿음으로 받고 율법을 지켜서 온전해지는 것이라고 미혹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구원 받은 자기의 영광과 가치도 챙기겠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말을 듣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그런 신앙을 없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구원 속에는 예수의 영광만 있지 인간의 영광은 없다고 합니다.
아니~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것은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것인데!
어떻게 예수도 믿고 율법을 지켜서 온전해 진다고 할 수가 있느냐?
그럴 순 없다고 합니다.
갈 2: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은 단호하게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어떤 인간도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질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우리 몸뚱이 자체가 율법을 담아낼 그릇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음이 의로움이고!
예수 믿음이 온전이고!
예수 믿음이 완전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장 이후부터의 말씀은 행위 차원에서 보면 안 되어요.
반대로 은혜가 일으킨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리 부분을 11장에서 마치고 교리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알려주려고 12장을 열면서 영적 예배란 이런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합니다.
1장에서 11장까지는 구원과 믿음을 설명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이해하고 알아듣고 믿으면 되는 것이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믿었으니까 이제 우리더러 행하여야 할 것들을 명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말씀을 문자적으로 하나 하나 우리의 의지와 각오를 동원하여서 지켜내고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즉 1장부터 11장까지 은혜를 받았으니 12장부터는 우리 쪽에서 죄짓지 말고 열심히 믿는 자 답게 살아야 된다는 식으로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으면 안 돼요!
믿는 데까지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하시고, 믿고 나서 사는 것은 우리 보고 해보라고 하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에 위배가 되어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데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칙이 무엇이었습니까?
은혜입니다.
롬 11:5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은혜로 다스리고 있어요.
그러므로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롬 11: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우린 원래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진 자들입니다.
순종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순종이 안 되면 저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주 받지 않고 이렇게 버젓이 살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도 은혜이고, 예수를 믿고 사는 것도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어요.
살아도 은혜이고,
죽어도 은혜입니다.
우린 원래 없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창세전 언약으로 있음이 되었어요.
없어야 할 자가 은혜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 자체가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장부터 11장까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이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우리가 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하실 일이란 말입니다.
1장부터 16장까지 모두가 하나님이 하실 일이에요.
시작도 예수님이 하셨고 끝도 예수님이 하십니다.
계획도 예수님이 세우셨고, 실행도 예수님이 하시고, 종결도 예수님이 다 하십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구원도 예수님이 하셨고!
구원 받은 자로서의 삶도 예수님께서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롬 11: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성도가 사는 이유는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어요.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신자이고, 이 사실을 모르는 자는 불신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증거하다가 보면 불신자들에게 욕을 먹겠지요.
그들은 자기들 힘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싸우면 아는 자가 욕을 먹게 되어 있어요.
이게 세상의 이치에요.
세상은 죄 아래 가두어졌어요.
그래서 역설이 정설이 되어서 진리처럼 회자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사망에 삼키운바 된단 말입니다.
빛이 어둠으로 치부되고 어둠이 빛으로 둔갑이 되어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겐 하나님은 죽은 분이에요.
그들에겐 신(神)이 없어요.
설령 그들이 신(神)이라고 부르는 그 신(神)도 자기 유익을 위하여 고안된 신(神)일 뿐이에요.
불신자들 세계에서는 신(神)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손에 조정당하는 장난감에 불과해요.
내가 필요해서 찾아가서 놀아주면 되는 신(神)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우면 왔다가 싫어지면 떠나가요.
내가 신(神)의 주인이에요.
이게 불신자들 세계의 신관이에요.
그러나 성경을 열면 이러한 사고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 버려요.
그런 생각이 죄라고 합니다.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이 창세전 언약을 이루는데 사용되어지는 도구라고 해요.
하나님이 주인이고 인간은 종이라고 합니다.
이걸 인간들이 어찌 받아들인단 말인가요?
못 받아 들여요.
그래서 발생된 사건이 하나님이 인간들 손에 죽임 당하는 사건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 당하는 사건이 발생이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러니 유구무언(有口無言)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산다는 것이 곧 은혜인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때”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에 채우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장에서 11장까지도 은혜이고 12장부터 16장에서 말하는 성도의 삶도 은혜가 만들어내는 삶인 것입니다.
내 삶이 아니고 은혜의 삶이에요.
우린 모든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야 해요.
긍휼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생활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은혜를 알고 감사하고 살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고,
감사를 모르면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몸을 가지고 산 제사인 영적 예배를 드리게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사귐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와 사귐을 통하여서 그 은혜의 풍성함을 더 많이 알아가는 시간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아버지의 마음을 품게 하시고! 우리의 눈을 열어서 아버지의 은혜와 사랑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귀를 여시고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형제들 간에 더 깊은 사귐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the words of tru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73강. 성도와 세상 권세 (0) | 2014.05.12 |
---|---|
[스크랩] 72강. 그 사랑 앞에 서서 (0) | 2014.05.06 |
[스크랩] 내 삶에 요한 계시록의 내용이 나타날 때 (김성수 목사) (0) | 2014.02.26 |
[스크랩] 지금 찬송 하십시오 (김성수 목사) (0) | 2014.02.26 |
[스크랩] 일곱 인으로 봉한 책 (김성수 목사) (0) | 2014.02.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