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나 교회에게 편지하기를(II)
/ 교회의 아픔, 나의 아픔
(김성수 목사)
(오늘날 기독교는 목표지점이 잘 못 설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 목표지점 설정이 잘못되어 있으니까 오늘 날 교회들이 이처럼 잘 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교회의 존재 목적은 거룩입니다. 병 낫고 부자 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아니라 오직 거룩을 위해 교회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 오래 죄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악하고 저급한 통제성향, 자기방어, 집착, 중독, 옛 몸, 육신을 끊어내기 위해서 우리 신자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환난과 궁핍이라는 상황을 때때로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계 2:8-11) “8 "서머나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나는 네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너는 부요하다. 또 자칭 유대 사람이라는 자들에게서 네가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유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다.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 넣으려고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 11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수요 성경공부를 자주 빼먹으신 분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단어들의 개념이 잘 서지 않으신 분들은 조금 이해하시기 어려우실 텐데, 그래도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잘 들어주세요. 우리는 서머나 교회를 공부하면서 교회의 존재 목적에 대해 확인을 했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 무엇을 이루어 내는 집단이 아니라, 교회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살면서 자신의 거룩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배웠지요? 그러니까 교회의 목표지점은 이 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화려한 상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멋진 작품으로 만들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화려한 상품은 처음에는 세상 사람들의 소유욕을 채워주고 멋진 진열대의 호사스러운 자리에 올라서지만 시간이 지나고 유행이 지나면 창고에 쳐 박혔다가, 나중에는 garage sale에 나왔다가, 그래도 안 팔리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품은 만들어져 가는 과정이 깁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여전히 돌덩이 인 것 같고 여전히 나무토막인 것 같지만 위대한 조각가의 손에 들려진 그 돌과 나무토막은 언젠가 걸작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상품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을 때 작품은 대패로 깎이고, 정에 쪼이고 하면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그 작품이 완성이 되는 날 세상은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작품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영적으로는 이미 완성이 된 걸작이고 가시적으로는 지금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공부한 에베소서 2장 10절을 보고 넘어가지요.
(엡 2:10) “10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해 지금 만드시고 계신 작품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목표지점이 잘 못 설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 목표지점 설정이 잘못되어 있으니까 오늘 날 교회들이 이처럼 잘 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교회의 존재 목적은 거룩입니다. 병 낫고 부자 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아니라 오직 거룩을 위해 교회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거룩을 위해서 때로는 질병을 허락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사업이 어려워지게도 하시며 때로는 가정의 문제를 허락하시기도 하고 천재지변을 허락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과 모든 상황과 환경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교회가 완전한 작품이 되는 날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골 1:16-18)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하지요? 그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우리와 한 유기체가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한 피가 흐르고 우리와 한 영을 소유한 분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상황과 환경은 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함인 것입니다. 우주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은하계에는 약 1000억 개의 별이 모여 있습니다. 그렇게 1000억 개의 별이 모여 있는 은하계가 또 약 1000억 개가 모여 있는 곳이 우주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예측 가능한 별이 약 150억 광년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합니다. 150억 광년은 빛이 1초에 300,000km를 달리는데 그 속도로 150억 년을 가야 도달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공간이 우주입니다. 그 우주가 왜 창조되었다고요?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몸에는 46개의 염색체가 있습니다. 그 중 22번 염색체가 인간의 질병의 유전자를 소유한 염색체입니다. 최근에 의학이 그 22번 염색체 안의 유전자 지도를 거의 완성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이제 인간의 질병의 근원을 다 밝혀 낼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염색체 안에는 220,000개의 염색체가 존재합니다. 그 22번 염색체 안에도 유전자가 200,000개가 있습니다. 그 유전자들을 거의 다 밝혀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에게 질병이 일어날 때 그 유전자 200,000개가 서로 서로 상호 작용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전자를 완전히 다 밝혀냈다 할지라도 인간의 질병의 원인을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몸 하나 안에도 엄청난 소우주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만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가히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종류가 많은 물고기들, 공중의 새들, 들 꽃들, 벌레들 그 안에 인간이 밝혀 낼 수 없는 엄청난 신비가 있습니다.
제비, 두루미, 기러기, 고니 이런 철새들이 어떻게 철 따라 남으로 북으로 길을 잃지 않고 날아갑니까? 철새들의 머리 안에 iron이 들어 있어 그것이 자석 역할을 해서 남극과 북극을 정확하게 감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새들은 자기 몸에 천연 나침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새들이 매년 길을 잃지 않고 철 따라 남으로 북으로 이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4주일 동안 수천 km를 먹이도 안 먹고 날아갑니다. 도요새는 알래스카에서 타이티까지 한 번도 안 쉬고 날아간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누가 만들었다고요? 예수님이 만드셨습니다. 왜 만드셨다고요? 바로 교회를 위해 이 모든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교회의 무엇을 위해서? 거룩을 위해서, 교회가 거룩하게 되는 그 날 하나님의 목적이 완성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왜 지구는 지금 열심히 자전을 하며 태양을 돌고 있습니까? 바로 여러분의 거룩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왜 철새들이 열심히 철 따라 집을 바꿔가며 생존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거룩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치밀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을 위해 이 거대한 우주를 지금도 붙들고 운행하고 계시고 천지만물을 존재케 하시고 계시다면 하물며 여러분 당사자에게 생기는 모든 일은 무엇을 위해 생기는 일이겠습니까? 여러분의 거룩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너무 오래 죄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악하고 저급한 통제성향, 자기방어, 집착, 중독, 옛 몸, 육신을 끊어내기 위해서 우리 신자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환난과 궁핍이라는 상황을 때때로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시 119:67,71) “67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보세요. 정확하지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롬5장으로 가보시죠.
(롬 5:3-4)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과 궁핍은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이죠? 그 소망이 뭡니까? 여러분의 소망이 뭐예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거룩한 자로 자라서 어서 그 하나님 나라, 그 소망의 항구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소망이라고 하지요?
(엡 4:13)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고전 13:11)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빌 3:20-21)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궁극적인 목표지점은 이렇게 어린아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거룩한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져 가는 데에 환난과 궁핍이 도구로 방법으로 수단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하도 그리스도인의 환난과 고난과 궁핍에 대해서 강조를 하니까 어떤 분은 굉장히 우울해 하세요. 그럼 난 이제 이 땅을 사는 동안 항상 고난을 당해야 하며 항상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아닙니다.
(전 7:14)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표준새번역] “14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공동번역] “14 일이 잘 되거든 행복을 누려라. 일이 틀려 가거든 이 모든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인 줄 알아라. 아무도 한 치 앞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아라.”
우리의 삶에는 사실 행복하고 기쁜 날이 더 많아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필요에 의해서 우리를 환난과 궁핍에 넣으실 때 그 때 당황하지 마시고 성경을 근거해서 잘 이겨내시라고 그 방법을 가르쳐 드리는 것이지 여러분에게 겁주는 것 절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도 잘 보시면 사탄이 교회 중의 몇 사람을 옥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 전부가 옥에 던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거룩을 위해 때때로 찾아오는 환난과 궁핍은 우리의 소망을 위해 당연히 교회 모두가 겪어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중 몇 사람에게는 더 심한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체 교회가 다 그 환난을 받아야 한다고 나오지요?
(계 2:10)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 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잘 보시면 마귀가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는데 환난을 받는 것은 ‘너희’입니다. 서머나 교회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교회가 거룩하게 만들어져 가기 위해서 환난과 궁핍이 도구요 수단이요 방법으로 쓰이는데 그 중 몇 사람이 더욱더 큰 어려움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고통에 던져질지, 왜 그가 거기에 던져지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때에 교회, 너희들은 한 몸이니까 함께 아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마지막에 소망의 항구에 들어가게 될 때 개인 개인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교회’라는 무리를 구원해 내셨기 때문에 그 중 한 명이라도 낙오를 하면 전체가 다 못 들어갑니다. 그것은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속성상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 됨을 연습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만 거룩해서도 안 됩니다. 함께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의 몇 사람을 옥에 던져 넣게 허락하시고 교회가 함께 아파하면서 함께 거룩에 이르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야고보 서로 한번 가볼까요?
(약 5:13-16) “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 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 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
누군가 병이 들었을 때 장로들을 초청하여 함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너희 죄를 서로 고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두 세 사람이 모여서 기도하면 병도 낫고 고난도 없어지고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함께 기도 해 보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병이 낫던가요? 그렇게 기도하면 모든 병이 낫는다면 죽는 사람이 없어야지요? 기도해도 병은 잘 안 납니다. 아주 가끔 낫지요? 그러나 대부분은 안 낫습니다. 15절의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에서 ’구원하리니‘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소조‘는 병이 낫게 된다는 뜻도 물론 있지만 말 그대로 ’구원하다‘’구조하다‘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입니다.
(막 5:34)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예수님께서 혈루(血淚) 병 앓던 여인을 고쳐 주시고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십니다. 그게 ‘소조’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네 병에서 놓여’‘이스띠 휘기에스’가 병이 낫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야고보서의 이야기는 ‘함께 기도하면 병을 고쳐 주시겠다.’는 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아픈 상황에 너희 교회가 모두 함께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어떤 병도 고치실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못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병을 걸리게 해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거룩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함께 기도했을 때 병을 낫게도 해 주셔서 함께 기도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누구의 병을 낫게 해주시고 누구의 병을 그대로 두실 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함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의 병이 무조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바르게 이루어져 이러한 상황들이 합력 되어 선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제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 됨을 훈련하는 것이고 함께 거룩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고전 12:26)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그런데 자기 지체가 아파하고 있는데 교회가 나 몰라라 하면 어떻게 됩니까? 지체가 아파하고 있는데 교회가 끝까지 모른 채 외면을 한다면 그 교회는 가짜입니다. 분명 우리는 하나의 유기체이기 때문에 형제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형제의 아픔을 돌아보고 그들과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은 우리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option이 아닙니다. 수요 성경공부 때도 살펴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 아브라함 혼자 복을 받아서 누리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자기가 받은 복을 이웃에게 나누는 데까지가 복음입니다.
제가 사랑을 설명하면서 사랑은 감정이기 이전에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히 수행하는 의무라고 말씀드렸지요?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따라주지 않아도 형제의 아픔에 동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의롭게 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롭게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의롭게 될 것입니다. ‘의’가 뭐라고 했지요? justice, correctness라고 했나요? 도덕적 윤리적 규범을 만들어 놓고 그 규범을 잘 지키는 것을 의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인간이 나면서부터 관계를 맺고 살게 되는데 그 관계 속에서 요구되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을‘의’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관계가 요구하는 사랑을 마땅히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나는 진짜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롭게 된 자들은 ‘의무’를 함께 받은 자들입니다. 로마서 1장 14절을 함께 읽지요.
(롬 1:14)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사도 바울이 구원을 받고 자신을 가리켜 빚진 자라고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 ‘빚진 자’‘오페일레테스’는 채무를 진 범죄자를 가리키는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그 빚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 가게 되는 그러한 자를 가리켜 ‘오페일레테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막연한 부담이 아니고 훨씬 구체적이고 강력하며 절박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갈 1:15-16)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은혜로 구원을 허락하셨는데 거기에 동전의 양면과 같이 숙명적으로 불가분 따라오는 것이 그 예수를 이방에 전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9:16)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 임이로라"
여기서 ‘부득불‘‘아낭케’라는 헬라어는 헬라의 숙명사상과 풍속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두 개의 신전을 갖고 있었습니다. 델포이와 아테네에 두 개의 신전을 갖고 있었는데 그 신전에서 신탁이 선포됩니다. 신탁은 신이 어떤 사람의 운명을 예언해 주는 것입니다. 그 때 헬라 사람들은 신전에서 선포되는 그 예언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절대 그 숙명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예언을 어겨서 피해 버리면 그 숙명은 숙명대로 이루어지고 벌로 더 큰 불행이 덤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이 헬라의 숙명 사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자기의 삶으로 입으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내는 것을 바로 그 숙명 사상을 나타내던 단어를 써서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자기가 그 숙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전에도 한번 설명해 드렸지만 ‘구원을 받지 못한 자가 지옥 앞에서 외치는 비명소리’ 라고 했지요? 바울은 ‘자신이 만일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으면 자신은 구원에서 제외 될 것이다’ 라고까지 표현하면서 구원받은 자에게 함께 숙명적으로 따라오는 의무를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9:23)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표준새번역] "23 나는 복음을 전하려고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이 주는 복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일은 자기가 복음이 주는 복에 동참하기 위해서 즉,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고 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조금 전에 읽었던 로마서 1장에서 자기가 복음에 합당하게 살지 않으면 ‘빚진 자’‘오페일레테스’ 가 되어서, 나는 빚을 갚지 않은 자가 되고 결국에는 감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중에 ‘우리 목사님이 미쳤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해 놓고 복음에 합당하게 살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고? 갑자기 알매니안 주의로 돌아선 건가?’ 이렇게 생각하실 분들이 계시지요? 저는 지금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진리를 훼손하거나 침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들어보세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한번 얻은 구원은 절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의 삶 속에서는 반드시 열매가 맺혀야 한다는 것을 바울이 다소 단호하고 과격하고 적극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맺혀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역할과 의무는 함께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치 자기에게 맡겨진 의무를 수행해 내지 못하면 내 구원이 취소 될 수도 있다는 절박한 심경으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과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해 내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 아닐지도 모른다는 강력하고 결연한 소명의식을 갖고 , 빚진 자의 마음을 갖고 이 땅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약 2:14-19)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강력하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완전히 가짜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들이 지옥에 가는 이유가 뭡니까?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sins of commission 때문이 아니라 sins of omission 때문인 것입니다. 선하게 살아야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원인이 아니라 증거라는 말입니다. causative가 아니라 evidential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은 천국 입성 자들의 증거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로마서를 쓴 바울 사도가 왜 그렇게 강하게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다면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식의 표현을 썼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지신 모든 것을 이용해서 여러분의 천국 형제와 자매를 섬기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매주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고백으로 헌금을 드리십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은사로 여기시는 분들입니다. 그렇지요?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으신 분들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이 받으신 ‘은혜’가 헬라 말로 뭔지 아세요? ‘카리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은사’는 헬라말로 뭔지 아세요? ‘카리스마’입니다.
‘은사’‘카리스마’는 ‘은혜‘‘카리스’의 파생어입니다. ‘카리스마’은사는 ‘카리스’은혜의 개별화되고 구체화된 양태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따로 있고 은사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 구원을 받았는데 은사를 안 받으신 분은 한 분도 안 계신 것입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남들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모든 사람은 은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 그 자체부터가 은사니까요. 노파심에서 말씀드립니다만 은사 집회다 뭐다 해서 ‘방언의 은사, 물질의 은사, 신유의 은사, 등등’ 이런 것 받게 해 주겠다고 하는 자들은 전부 마귀입니다. 여러분, 은사라는 것은 우리가 기도해서 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은사라는 단어 자체가 담지하고 있는 의미가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요구해서 받는 게 아닙니다. 누가 기도한다고 하나님께서 그 강청에 못 이겨 내려주시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그렇게 어떤 능력 있는 종이 막 주었다가 뺐었다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모두 은사를 함께 받습니다.
(고전 7:7)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자고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 은사를 왜 주시겠습니까? 무얼 하라고 은사를 주실까요?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교회인 서로를 섬기라고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에 던져 넣으신 목적이 뭐라고요? 교회의 거룩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게 주신 모든 하나님의 은사는 전부 교회의 거룩을 위해 나누라고 주신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자들은 교회를 양육하고, 봉사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열심히 봉사의 자리에서 섬기고, 물질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열심히 그 돈으로 지체들을 섬기라고 하나님은 ‘카리스마‘’은사‘’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분명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르면 내가 남을 위해 주는 만큼 나에게는 손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 목적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힘들지 않게 너무 버겁지 않게 나눌 수 있습니다.
(요일 5:1-3) "1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낳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에게서 태어난 이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압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형제의 아픔과 고난에 함께 동참하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복인 것입니다.
(행 20:34-35) "34 여러분이 아는 대로, 나는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내 손으로 일해서 마련하였습니다. 35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1장의 두 아들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뭘 잘 못한 것입니까?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예’하고는 포도원에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배당에 와서 말씀을 들으시고 ‘좋은 말이다‘ 하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그렇게 사시지 않으신다면 여러분도 똑같이 ’예‘하고 포도원에 가지 않은 큰아들처럼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늘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은사를 가지고 형제의 아픔과 고난에 동참하세요. 우리 사도 바울 선생처럼 ’난 빚진 자입니다‘ 이렇게 절박하고 강력한 채무자 의식을 가지고 살자고요. 그게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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