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강.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당한 자들 (롬 11:16-24)
롬 11:16-24=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 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 감람나무 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 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오늘은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당한 자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게 되는지에 대하여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즉 참 감람나무이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접붙임 당한 자들을 어떻게 간섭하고 어떤 삶을 살게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게 접붙임 당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돌 감람나무는 죄인을 말하고!
참 감람나무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또한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한 돌 감람나무는 이방인을 말하고 찍혀 나간 가지들은 유대인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참 감람나무인 유대인들 중에 얼마를 잘라내고 그곳에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을 접붙임 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유대인을 잘라냈는가 하면 자긍하여서입니다.
인자(仁慈)에 거하지 않고 엄위(嚴威)에 거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의 은혜에 거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 의(義)를 붙잡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대로 산 것을 의로 여겼습니다.
그걸 자랑했습니다.
자기 의 때문에 예수님의 의를 거부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로 얼마든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20절에 보면 자긍(自矜)한 것을 “믿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내 것을 붙잡지 않고 예수님 것을 붙잡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 속에는 반드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자기 부정이 깔려 있습니다.
자긍이란? 난 죄인이 아닙니다!
난 예수 없어도 괜찮아요!
내 능력으로도 얼마든지 구원 받을 수 있어요! 라는 자기 긍정이 깔려 있습니다.
이걸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는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당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참 감람나무에서는 교만이 나오지 않습니다.
법이 나오지 않고 은혜가 나옵니다.
왜냐하면! 참 감람나무이신 예수님이 은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참 감람나무에 접 붙임을 당한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살펴봅시다.
자긍이란? 교만입니다.
교만은 자기 능력을 의지 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신앙의 주체를 자기가 가지고 있을 때 나타납니다.
능력이란? 힘입니다.
힘은 반드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간에 우열(優劣)이 생깁니다.
자긍하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행위를 힘으로 삼습니다.
복음 아는 것을 힘으로 사용합니다.
난 복음 아는데!
넌 모르지 하면서 남을 무시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하게 됩니다.
만약에 지금 내가 복음 안다는 것으로 복음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고 남보다 낫다고 우월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엄위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알다시피 복음을 깨닫는 것은 은사에 속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감동해 주셔야지만 믿어지는 것입니다.
은사란?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거저 주는 선물입니다.
성경을 깨닫는 것도 은사입니다.
은사로 깨달아진 복음은 자랑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아는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은사로 알아진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학습으로 알아진 것이기 때문에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랑이 결국에는 상대와 차별성을 갖게 되고 급기야 우열(優劣)을 나누고 남을 가르치고자 선생 노릇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은사로 받은 사람은 절대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못합니다.
남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남과 차별을 두지도 않습니다.
누가 복음을 모르면 하나님이 나에게 눈과 귀를 열어서 복음을 깨닫게 해 주셨듯이 저 사람에게도 하나님 은혜를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긍휼의 마음이 생긴단 말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 속에서 말하는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당하여 은혜에 거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은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달아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지금 엄위로 사는지 인자로 사는지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복음 아는 것을 힘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에 열심으로 충성한 것을 힘으로 시용하고 있습니다.
힘은 자기 근거로부터 나옵니다.
자기 근거에서 나온 것은 반드시 자신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와 다르면 나는 너와 다르다는 식으로 차별성을 두고 상대방을 무시하게 됩니다.
이렇게 산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을 자기 의로 삼고 세리나 창기들을 이방인 취급하였습니다.
이들은 율법 지킴을 힘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개 같은 자라고 취급하여 상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은혜에 거하지 않고 엄위에 거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저주하고 세리와 창기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선 자긍하던 가지는 잘라내고 거기에 긍휼로 이방인을 접붙였다고 합니다.
세리와 창기 같은 이방인들을 은혜로 접붙임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죄인들입니다.
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잘남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접붙임 당한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너희들도 엄위에 거하면 잘린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잘난 척하지 말라는 겁니다.
너희가 구원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도 잘려나간 유대인들처럼 엄위에 거하면 언제든지 잘려 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은혜를 다른 말로 긍휼이라고 합니다.
이 긍휼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약 이 긍휼을 잊고 잘난 척하면 유대인들이 잘난 척하다가 짤려 나간 것과 같이 짤려 나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인자란? 은혜이고!
엄위란? 법입니다.
인자란? 주여 부족하니 도와주소서 이고!
엄위는 나는 다 압니다! 라는 교만입니다.
이는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지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긍하면 잘린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보면 마치 우리의 행실에 따라서 구원이 보존되기도 하고 잘려 나가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구원을 받은 성도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접붙일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접을 붙였다 함은 붙이고 잘라내는 능력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않습니다.
한 번 구원해 주신다고 한다면 그 구원을 중간에 인간의 조건으로 취소되지가 않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조건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고 창세전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은혜로 보존이 되는 것이지 우리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지 않고 엄위에 거하면 잘린다고 하는 것은 자칭 유대인들을 골라내신다는 뜻입니다.
육에 속한 자칭 신자들은 이런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은혜 받은 자는 이런 자들이라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거하는 자들은 은혜를 토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뿌리에서 은혜를 공급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나오지 않고 엄위가 나온다는 것은 뿌리에 붙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법(엄위)이 나온다는 것은 가짜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참 감람나무 뿌리에서는 가지에게 은혜를 공급하지 엄위를 공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위는 법이에요.
법은 죽이는 것으로서 마귀가 행사해요.
요한계시록 2장 3장을 봅시다.
계 2: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會)라”
계 3:9절 “보라 사단의 회(會)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면 이런 자들을 자칭 사도요 자칭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실상은 사단의 회(會)이라고 했습니다.
사단의 회(會)란? 마귀의 자식들이 모인 곳이라는 뜻입니다.
어디가 그렇다고 합니까?
교회가 그렇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그러합니까?
자칭 믿음 좋고 자칭 복음 다 안다고 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그러하다고 합니다.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 하였던 것입니다.
왜? 자칭이라는 말을 할까요.
이는 그 속에는 예수가 없는데 예수를 믿는 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척 하기 때문에 인자가 나오지 않고 엄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뿌리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인자를 맛보지 못하여서 마귀의 본성인 엄위를 토해내는 것입니다.
엄위가 나온다는 것은 은혜와 단절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 아는 것을 잘난 척 한다는 것은 그 복음은 은사로 받은 것이 아니고 신학이라는 학문과 철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인문학으로 공교하게 만들어서 지식으로 쌓아진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학문으로 알아진 복음은 지식이 되어서 엄위를 토하여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음 안다는 것으로 선생 노릇이나 하지 그 복음이 함유(含有)하고 있는 예수님의 생명에 속성인 용서와 사랑과 은혜와 긍휼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한 번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단절이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토해내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가 있으면 은혜를 토해내고 법이 있으면 법을 토해내요.
누가복음 6장을 봅시다.
눅 6:45절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예수님은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자기 안에 쌓여진 선(善)이 있으면 선(善)을 내어 놓고!
자기 안에 악(惡)이 쌓여져 있으면 악(惡)을 내어 놓아요.
선(善)과 악(惡)이란? 은혜(恩惠)와 법(法)을 말합니다.
긍휼(矜恤)이냐! 엄위(嚴威)냐!
사랑이냐! 미움이냐! 를 말합니다.
흔히들 그런 말을 하지요.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한다고,,,
맞아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사랑을 입은 성도는 그 안에 받은 은혜로서 용서와 긍휼을 토하여내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주께로부터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은 인간 본연의 선악과가 주는 심판하는 법을 토해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 받은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고상하게 복음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여도 내어 놓는 것은 반(反) 십자가 정신의 것들을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는 옛 사람의 것인 법을 쏟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입만 열면 미움이고 시기이고 다툼이고 비판이고 정죄이고 심판입니다.
이걸 바울은 엄위에 거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귀처럼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연합이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와 계신 예수님이 우리 스스로 살아가게 하지 않아요.
옛 사람의 본성을 죽이고 새 사람의 성품으로 살아가도록 간섭하신단 말입니다.
성도는 그 안에서 말씀이 살아서 간섭을 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생명을 낳는 일을 하십니다.
살아 있다 함은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담고 있는 내용을 토해내고 성취한다는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은 역사(歷史)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묵시(黙示)라고 합니다.
보이는 역사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보이지 않는 묵시에서 나왔습니다.
묵시에서 나온 내용이 뭔가 하면 창세전 언약입니다.
그럼 역사는 창세전 언약에서 나왔다는 말이 되지요.
창세전 언약을 펼쳐 보이기 위해서 역사라는 만물이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역사가 없으면 언약을 펼칠 수가 없어요.
그럼 이 역사 속에는 창세전 언약이 옴팡 담겨져 있겠지요.
역사가 꿈틀 거릴 때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들이 사건화 되어서 터져 나오겠지요.
이걸 말씀의 현현(顯現)이라고 합니다.
말씀에 내용이 되어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역사라는 보자기에 언약을 싸고 있다고 합시다.
그럼 보자기가 풀럭 거릴 때마다 그 속에 있는 언약이 나올 것이 아닙니까!
알기 쉬운 비유로 말합니다.
제가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제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그림이 도화지에 그려지기 전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 머리 속에는 이미 있었습니다.
제 머리 속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묵시라고 했습니다.
그럼 제 머리 속은 묵시와 같은 것이 됩니다.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제가 도화지를 사왔습니다.
그리곤 거기다가 제 머리 속에 있던 그림을 하나 둘씩 그려나갑니다.
이렇게 되면 그림이 그려지는 도화지는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러해요.
역사라는 곳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언약 하신 것을 그려내는 장소에요.
도화지와 같단 말입니다.
역사라는 도화지가 없으면 창세전 언약이라는 그림을 그려낼 수가 없어요.
창세전 언약을 그려내자면 반드시 역사라는 도화지가 있어야 합니다.
이걸 우리 구원이야기로 풀어 봅시다.
우리 몸은 예수의 구원 이야기를 풀어내는 도화지와 같아요.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의 생명에 속한 것들을 삶으로 그리세요.
고린도전서 6장을 봅시다.
고전 6:15-20=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3: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이 우리 몸을 값을 주고 사왔다고 합니다.
어떤 값을 주었는가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왔습니다.
뭘 하고자 사왔다고 합니까?
성전 삼고자 사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인데 그 성전을 우리 안에 옮겨 놓은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성전이 뭘 하는 곳인가요?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죄인이 죄사함을 받는 곳입니다.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곳입니다.
그럼 우리 몸에서 이러한 화목 된 사건들이 일어나겠지요.
위로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아래로는 이웃과 화목하는 것으로 나타나겠지요.
이게 십자가 도에요.
성도는 십자가 도를 신앙생활로 풀어내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구원을 했어요.
하나님이 우리 무엇을 구원 했습니까?
몸입니다.
우리의 몸을 구원 했어요.
이걸 잊지 마세요.
왜? 우리 몸을 구원 했는가 하면 새 언약이라는 그림을 우리 몸에다 그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몸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맺은 새 언약을 그려내는 도화지에요.
성령이 우리 몸에 오신 것도 다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우리 삶으로 그려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몸이 필요해서 몸을 구원한 겁니다.
우리 몸에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그려야 할 그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서 친히 화가가 되셔서 새 언약이라는 그림을 우리 몸에서 하나 둘씩 그려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여백을 예수라는 그림으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마치 엿새가 차기까지 천지를 만들고 그 공간 속에 만물을 하나 둘씩 채워가듯이 말입니다.
이걸 아들에 형상을 본 받는다고 하고!
혹은 그에게까지 자라 간다고 하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간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삶이라는 그림으로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실체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니 성도의 삶 속에서 십자가 사건이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바울은 내 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생은 예수님의 삶으로 점철이 되어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적인 것을 말합니다.
12장 이후로는 그 교리가 몸을 통해서 어떻게 그려지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리는 복음이에요.
우리 몸은 교리라는 복음을 담는 그릇이에요.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서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산 제사를 우리 힘으로 드리지 못하므로 성령의 은사를 주어서 드려지게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산 제사란?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말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 몸에 재현시키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이 일으키는 옛 사람이 제물처럼 죽임 당하는 십자가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하나님이 성도를 구원했습니다.
우리의 정신만 구원했습니까?
아니면 우리 몸과 마음 모두를 구원했습니까?
몸과 마음 전체이지요.
그럼 하나님이 성도의 몸과 마음에 창세전 언약을 그려나가겠지요.
몸과 마음 모두 속에 그려나가시겠지요.
몸과 마음 모두에요.
정신만 아니고,,,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성품적인 마음들이 품어지게 되고!
삶 속에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긍휼의 삶이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거룩한 산 제사라고 하고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만약에 정신만 구원했으면 머리로만 예수 믿지 몸으로는 예수 안 믿어요.
이런 것을 바울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자라고 했어요.
이걸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안에 이런 사상이 팽배했어요.
그래서 사도들이 이런 것들과 싸웠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어떤 도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머리로 예수를 믿으면 마치 공갈 젖꼭지 먹는 아이들 같이 되어요.
아이가 공갈 젖꼭지를 빨게 되면 배가 고파 성질이 난폭해져요.
물어 버려요.
이처럼 머리로 예수 믿는 사람은 입으로만 조잘거리고 성질이 난폭해져요.
사나운 개가 되어요.
아무나 물어 버립니다.
그건 그 속이 허해서 그래요.
배가 고파서 그래요.
밥을 못 먹어서 그래요.
말씀을 밥으로 먹지 않고 지식으로 쌓기 때문이에요.
지식에 속한 죽은 말씀을 들으면 공갈 젖꼭지를 빨듯이 그런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만 커지고 사나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는 짓들이 거라사 지역 무덤가에 옷을 벗고 사는 광인(狂人)처럼 되어가는 것입니다.
미친 사람이 옷을 벗는 이유는 옷 벗음이 수치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말씀을 들으면 수치를 몰라요.
죄 의식이 사라져요.
뻔뻔스러워진단 말입니다.
마치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무슨 복음에 합당한 것인 줄 안단 말입니다.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를 지음으로서 예수의 의(義)를 더 드러낸다고 해요.
그래서 막 살아도 된다고 합니다.
이는 복음을 자기의 악함과 게으름을 합리화 하는 논리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걸 공교하게 지은 말이라고 합니다.
아주 무서운 뱀 사상이에요.
이건 마치 로마서 6장에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지어도 되겠네!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무슨 그런 망발을 하느냐!
죄에 대하여 죽은 놈이 어찌 죄를 먹고 마신단 말인가 라고 했어요.
이러한 논리는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지금 성도는 죄를 짓지 않고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행실을 똑바로 하라고 말 하는 것도 아니에요.
온전해지라는 것도 아니에요.
죄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짜 성령을 받고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을 먹으면 죄를 싫어하는 자각 증상이 일어나요.
죄를 미워하고 아파하고 멀리하고자 하는 반응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에스겔 36장을 보세요.
겔 36:24-32=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靈)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神)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 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둔다고 하지요.
새 영이란? 성령을 말해요.
이는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마귀에게서 빼내서 새 영(靈)을 부어준다고 합니다.
이는 십자가 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서 성령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오면 새 마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새 마음을 준다는 것은 성령이 오면 예수님의 마음에 생긴다는 말입니다.
이건 반드시 생기게 되어 있어요.
성령 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새 마음이란? 예수의 마음인데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에요.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성령이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과거에 하던 일들을 미워하고 싫어하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소욕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참 감람나무의 진액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참 감람나무 진액이 새 마음이에요.
성령이 임하면 예전에 즐기던 것으로부터 멀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단 말입니다.
과거 죄 아래서 살던 삶으로부터 단절하고자 하는 애통함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과거에 좋아하던 것들을 버리고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하던 짓을 부끄러워하고!
옛 사람이 즐기던 것들을 멀리하게 되어요.
이는 죄를 전혀 안 짖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를 미워하게 멀리하고자 하는 성향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죄가 미워지게 되어 있어요.
죄가 미워져야 그 사람이 성령을 받은 성도에요.
그렇지 않고 죄에 대하여 미움이 없으면 그 사람은 거짓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나타나는 자연 발생적인 자각증상이 일어나게 하세요.
죄를 미워하고 아파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으켜요.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죄에 대하여 아파하고 미워하는 자각 증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죽은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공갈 젖꼭지를 빨고 있는 겁니다.
그럼 머리에 지식만 가득 채워져서 입으로만 예수를 믿고 영적 깡패가 되어 가요.
영적 깡패가 되면 자기하고 생각이 다르면 물어뜯고 죽여요.
니편 내편으로 편 가르기를 하고 적을 만들어요.
토해내는 말마다 악독이고 썩은 송장 냄새가 나고 마귀 냄새가 풀풀 나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거짓 선지자이고 이들이 말하는 것은 말씀이 아니고 몽사를 받은 것이라고 했어요.
하나님 말씀을 먹지 않고 몽사를 먹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통제를 못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그러지요.
하나님 말씀을 반석을 쳐서 깨트리는 방망이 같다고 했지요.
이건 하나님 말씀이 반석처럼 굳은 우리 마음을 깨트린단 말입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을 받은 사람은 깨트려져요.
그 말씀 앞에 꼬꾸라져요.
깨어지고 꼬꾸라진다는 것은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지향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양식이라고 하지요.
말씀을 양식이라고 하잖아요.
양식이란 먹고 배부름을 얻는 겁니다.
양식은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 하실 때 각자에게 먹을 양식을 주셨어요.
두 양식이 있어요.
풀과 고기에요.
풀을 먹는 초식동물이 있고, 고기를 먹는 육식 동물이 있어요.
초식 동물을 온순하고 남을 헤치지 않아요.
그러나 육식동물은 사납고 남을 헤쳐요.
그래서 초식 동물은 인간과 같이 살지만 육식동물은 같이 살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을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육식동물들을 거친 들판에 살도록 하였고 초식동물들은 사람과 가까이 살게 하신 겁니다.
성경에선 풀을 하나님 말씀을 은유(隱喩)하고 있어요.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왕의 신하로 천거 되어 일을 합니다.
이 때 왕이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게 자신이 먹는 왕의 진미(珍味)를 줍니다.
왕의 진미는 육식이었어요.
이 때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왕의 진미를 거절합니다.
물과 채소를 먹겠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 잡고 있는 바벨론 왕은 사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마귀는 자기가 먹는 양식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먹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를 알고 다니엘은 하나님의 백성은 마귀의 양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 백성이 먹을 양식을 달라고 합니다.
그게 바로 채소와 물이에요.
채소와 물은 초식동물이 먹는 양식입니다.
초식동물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들이에요.
이는 하나님의 백성은 소나 양처럼 풀을 먹는 자란 뜻입니다.
그러자 왕의 신하가 당신이 만약에 고기를 먹지 않아서 얼굴이 초췌하게 되면 난 왕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제발 왕에 음식을 먹으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러자 다니엘이 그 신하에게 제안 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우리가 열흘 동안 물과 채소만 먹을 테니 그 때 우리 얼굴이 초췌하면 그 때 우리가 당신이 주는 왕에 음식을 먹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자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얼굴이 도리어 광채가 나고 빛이 나는 겁니다.
그러자 왕의 신하가 다니엘과 그 친구들에겐 채식만 주었어요.
이건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이에요.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채소만 먹었다는 것은 우린 초식 동물입니다 라는 말과 같아요.
우린 양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풀을 주세요! 그랬어요.
양이기 때문에 고기는 거부하고 풀을 먹은 겁니다.
이게 나중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아세요.
그냥 은혜로 들으세요.
시비 걸지 말고 전 이렇게 은혜를 받으니까요.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가지요.
이 때 사자가 다니엘을 안 잡아먹어요.
시큰둥해요.
사자가 왜? 시큰둥하고 다니엘을 안 잡아먹습니까?
사자 눈에는 다니엘은 풀이기 때문입니다.
사자는 고기를 먹는 육식 동물이에요.
그런데 풀이 들어 온 겁니다.
다니엘이 들어오자 왠 풀이야! 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겁니다.
그래서 사자가 다니엘을 소 닭 보듯 했어요.
그런데 다니엘을 음해하던 자들은 사자 굴 입구에서 사자가 씹어 먹었어요.
고기가 들어 온 겁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잡아 먹은 거에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에요.
이들이 풀무불 속에 들어가지요.
그런데 불꽃이 이들을 사르지 못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들이 물통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 속에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아까 이들이 먹은 음식이 뭐라고 했나요.
물과 채소라고 했지요.
그러니 물통이 불에 들어가니 불이 그들을 태우지 못한 겁니다.
그런데 이들을 불 속에 집어넣으려던 사람은 불 입구에서 타 죽었어요.
왜? 그럽니까?
이들은 불에 탈 고깃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시비 걸지 마세요.
양식이란 이런 겁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은유적으로 말한 것이니 오해하지 마세요.
은유적으로 말하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전 이렇게 은혜를 받고 있으니까요.
예수님이 양식이에요.
양들이 먹을 양식이란 말입니다.
양식은 사람의 성격을 결정해요.
그래서 예수를 먹은 사람마다 양처럼 온순해져요.
자 보세요.
우린 돌 감람나무였어요.
그런데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했어요.
그럼 참 감람나무 진액이 가지에 공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서서히 돌 감람나무 성질은 빠져 나가고 참 감람나무 진액으로 채워지겠지요.
그럼 참 감람나무 속성들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 감람 열매를 맺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먹고 사는 자들이에요.
예수를 먹고 사는 양과 같은 성도는 남을 헤치지 못해요.
도리어 헤침 당해요.
양들이 얼마나 바보인가 하면 이리가 와서 자기 몸을 뜯어 먹는데도 가만있어요.
싸우질 못해요.
그 속에 싸우는 기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아무 말 안 해요.
그냥 당하기만 해요.
그래서 그 속에 진짜 예수가 있는 성도는 예수처럼 당하기만 해요.
예수님이 양식이라고 한다면 마귀도 양식입니다.
마귀는 육식동물들이 먹을 양식이에요.
그러니 마귀의 말씀을 먹은 사람은 사납고 남을 헤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는 것입니다.
제가 남을 설득시키려고 하지 말고 변론을 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복음은 변론이나 설득으로 알아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깨달아지게 해 주셔야지만 가능해요.
이걸 알면 자기하고 다른 사람을 시비 걸 이유가 없어요.
그 사람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가 받은 은혜로 살면 되어요.
자기가 받은 은혜로 감사하며 봉사하고 섬기면서 살면 되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왜? 나하고 다른 말을 하느냐!
너 이단이지!
너 복음 모르지!
너 성령 안 받았지! 그러고 있어요.
우리는 자기하고 다르면 쫓아내요.
그러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런 짓이 마귀가 하는 짓인지 몰라요.
심판하는 것은 주님께 맡겨야 하는데 자기가 심판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선악과를 먹고 스스로 하나님이 된 마귀의 양식을 먹은 자들이 하는 짓인 겁니다.
이 모두는 마귀가 주는 선악과라는 법에 양식을 먹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주는 말씀을 먹는 사람은 복음을 힘으로 사용해요.
법으로 이용해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해요.
그 좋은 복음으로 남을 살려내지를 못하고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예수 예수 하는데 나타나는 행사 머리는 영락없는 마귀에요.
이는 예수를 먹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명에 속한 것들이 안 나오는 겁니다.
공갈 젖꼭지를 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짜 예수를 먹은 사람은 그 속에서 예수의 생명이 유출되어요.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요.
예수님의 마음은 한 마디로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생명을 살리는 마음이에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요.
생명을 살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줄 아세요.
이건 자기가 죽지 않고서는 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엄마가 뱃속에서 나온 갓난아이를 키우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일입니다.
자기 생명을 죽이고 그 아이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여자는 약하고 엄마는 강하다는 말을 하지요.
여기서 여자는 아이를 낳지 않은 자를 말하고, 엄마는 아이를 낳은 자를 말해요.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는 자기 몸뚱이만 챙기고 살지만, 아이를 낳은 엄마는 자기 몸뚱이가 걸레가 되어도 낳은 아이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 그토록 속을 썩이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낳았다고 하잖아요.
바울은 스스로를 아비(엄마)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울은 예수라는 양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참아주고 용서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끌어안고 보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을 많지만 아비(엄마)는 적다고 했어요.
스승은 여자같이 자기 몸뚱이만 챙기는 자이고!
아비는 엄마처럼 자기 몸이 걸레가 되어도 자식을 키우는 자에요.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다는 것은 엄마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보듬고 살피고 먹이고 입히고 하면서 자신의 몸을 걸레처럼 버리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엄마 같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어요.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낳아진 아이가 있어요.
누군가 하면 새 사람이에요.
이 새 사람을 키우려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겁니다.
우리를 탄식하면서 돌보고 계신 겁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한다고 하지요.
왜? 탄식을 합니까?
우리가 말을 안 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탄식하면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스승 같으면 확 내 팽개치고 니 마음대로 해 하고 떠나가겠지만!
예수님은 스승이 아니고 엄마이기 때문에 끝까지 붙어서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지면 예수님도 아파하고!
우리가 일어서면 예수님도 기뻐해요.
엄마는 자식에 따라서 울다가 웃다가 합니다.
자식이 잘 되면 웃고 못 되면 아파해요.
엄마는 자식에게 엄마의 사랑을 새기는 겁니다.
자식은 엄마의 사랑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엄마는 지식의 몸에다 자기 사랑을 새겨 넣는 겁니다.
그럼 그 자식은 엄마로부터 받은 사랑을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어요.
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생명은 새끼로부터 출발합니다.
커 가는 과정이 있어요.
짐승과 사람의 차이는 짐승의 새끼는 낳자 말자 스스로 엄마 젖을 찾아서 먹고 자라가는 능력이 있어요.
이는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본성이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미숙아(未熟兒)로 태어납니다.
미숙아(未熟兒)란? 부모의 절대적인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엄마가 젖을 입에 넣어주지 않으면 갓난 아이 스스로 젖을 찾을 수가 없어요.
미숙아는 독자적으로 자랄 수가 없어요.
반드시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결국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 것입니다.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란 아이 속에는 엄마의 사랑이라는 생명이 채워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의 새끼에게는 반드시 엄마의 사랑이 필요한 겁니다.
이처럼 사람은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자들입니다.
사람이 누구인가?
엄마의 사랑을 먹고 자란 생명이에요.
사랑 받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는 겁니다.
엄마가 그 아이에게 젖을 주면서 자기의 사랑을 아이에게 새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엄마의 사랑이 새겨진 아이는 또 남을 사랑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 받은 자는 반드시 남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명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다 어린 아이로 출발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낳았어요.
그리고 사랑으로 말씀이라는 젖으로 키우세요.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자라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고 그 은혜를 더 많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 항상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져 주는 식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많이 안다는 것은 그만큼 섬김이 많아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 보다 더 열심을 내고!
남 보다 더 연보도 하게 되고!
남보다 더 성도들을 섬겨야 한단 말입니다.
자기 몸은 걸레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이처럼 은혜를 알고 말씀을 많이 알아갈수록 자기가 점점 부인되어져 가요.
성경은 하나님의 자식은 사람이라고 하고 마귀의 새끼는 짐승이라고 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의 자녀는 사랑하는 자들이고 마귀의 새끼들을 서로 물고 뜯고 죽이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예수님의 사랑을 먹고 자란 성도는 사랑하며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겨놓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랑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도 우리 몸에다 하나님의 사랑을 새겨 넣으세요.
공급해 주세요.
하나님 말씀을 새겨 넣으십니다.
말씀이 우리 몸에 새겨진다는 것은 말씀이 일하신 흔적들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묵시에 속한 창세전 언약을 그려낸다고 하였잖아요.
언약이 뭡니까?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잖아요.
예수님이 피로 맺은 그 새 언약을 어디에 새깁니까?
우리 몸에 새깁니다.
그럼 우리 몸에서 새 언약의 그림들이 하나 둘씩 구체적으로 그려지겠지요.
다른 말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 속에 담겨 있는 속성들이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겠지요.
하나님이 우리 몸에다가 희생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고 하는 것들을 새겨 넣습니다.
누가 그려갑니까?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그려 가세요.
우리가 그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몸에다가 새겨 넣으십니다.
우린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화가가 되셔서 우리 몸에다 새 언약이라는 그림을 그려나가신단 말입니다.
묵시에 속한 하나님이 역사에 침투하여 역사 속에다 묵시적 내용을 그려낸다고 했습니다.
이 원리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럼 우리 몸에다가 하늘에 것들을 그려나가시겠지요.
예수라는 그림을 그리려고 우리 몸에 오신 겁니다.
우리 몸을 누구 몸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면 예수를 맏아들이 되게 하는 일로 사용하세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예수와 한 형제라고 합니다.
형제라 할 때는 한 아버지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예수와 한 몸입니다.
한 몸이란? 같은 팔자를 띠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대하듯이 성도를 대하세요.
예수님만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십자가에 죽여요.
정과 욕심을 죽인단 말입니다.
옛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이건 우리가 안 죽여도 하나님이 죽여요.
시편 44편을 봅시다.
시 44:11-26=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13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14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15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16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18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19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2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21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 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시편 44편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고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시편의 이야기들을 십자가상에서 토하여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시편 44편의 내용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편의 말씀을 예수님의 몸에다 새겨버리신 것입니다.
조롱당하고!
버림당하고!
치욕을 당하고!
팔리심을 당하게 하셨어요.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성도의 운명을 시편 44편 이야기로 말했어요.
자기는 매일 도살당할 양처럼 죽음을 당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시편 기자나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똑 같은 말씀을 몸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몸으로 그려졌다는 것은 그 말씀이 몸에 그대로 성취가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님 몸이나 바울의 몸에 시편 44편의 말씀이 몸에 새겨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이 육신이 된 겁니다.
예수님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말씀이 우리 육신으로 새겨집니다.
그러니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구원이란? 불 타고 있는 나무를 조각가가 불 속에서 건져 내는 것과 같아요.
나무들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던 조각가가 불 속에서 한 나무를 건져 냅니다.
옆에 수많은 나무들이 타고 있어요.
그들은 잠시 후에 재로 변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불 타는 나무 중에 조각가가 임의대로 하나를 건져 냈어요.
이게 구원이에요.
그러자 그 나무가 휴~ 살았다!
야~ 난 살았다!
고맙습니다! 라고 기뻐합니다.
일단은 불 속에서 건짐 받았으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건짐 받은 나무가 옆에 불 속에서 타고 있는 나무들을 보면서 자기를 불 속에서 건져준 조각가에게 고맙다고 하겠지요.
처음엔 그래요.
그런데 조금 있자 조각가가 나무를 자기 작업실로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러더니 껍질을 벗기고 톱으로 켜고 도끼로 자르고 끌로 파고 사포로 밀고하는 겁니다.
껍질이 벗겨지고 톱으로 켜 질 때마다 나무는 죽겠다고 합니다.
도끼로 잘라질 땐 까무러칩니다.
끌로 팔 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아픕니다.
이걸 오늘 우리의 구원 이야기로 풀어봅시다.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조각합니다.
옛 사람의 껍질을 벗겨내고 톱으로 켜고 도끼로 잘라내고 끌로 파내요.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의 것들을 뽑아내는 일을 합니다.
미움을 뽑아내고!
시기를 잘라내고!
욕심을 도려내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잘라냅니다.
그리고 새사람으로 만들어 가요.
온유와 겸손과 자비와 양선과 오래 참음과 관용과 섬김과 봉사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들로 새겨 넣습니다.
이런 것들은 전부 우리 본성과 거스리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아픈 겁니다.
이건 불 속에서 타는 것 보다 더 아파요.
차라리 구원 받지 않은 것이 더 나아요.
그래서 나무가 소리칩니다.
야~ 차라리 불에 타 죽었으면 좋을 뻔하였다!
왜? 날 건져내서 이 개고생을 시키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차라리 죽이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조각가는 나무의 원망과 상관없이 자기가 만들고자 하는 것을 그 나무에게 새깁니다.
애초부터 나무를 불 속에서 건진 것은 조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라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나무를 위해서가 아니고 조각가 자신을 위해서 건져 낸 겁니다.
그런데 나무가 착각한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건져 준 줄 알았어요.
불 속에서 건져 놓고 나무 마음대로 살라고 해 주는 줄 알았던 겁니다.
그건 착각이에요.
나무 마음대로 살라고 건져 준 것이 아니고 그 나무에다가 조각가의 혼(魂)을 불어 넣은 작품을 만들려고 건져낸 겁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목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잖아요.
이건 성도는 이렇게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렇게 만들어 가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고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고 한다면 반드시 아들에 형상을 입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고야 맙니다.
장차 천국에 가면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처럼 되어 있을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 불타 버릴 나무 같은 우리를 가지고 예수라는 하나님의 아들에 형상을 입은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보고 변하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변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의 열심이 아니고 주님의 열심이 해 내십니다.
예수님이 가장 쓸모없는 불타는 나무와 같은 자들을 선택해서 조각가가 열심히 갈고 닦아서 멋진 작품을 만들어서 짠~ 하고 사람들 앞에 전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세리와 창기들을 의인 만들어서 바리새인들과 같은 마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걸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푼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 여기 보세요.
이 조각품이 예전에 이렇게 불에 타던 것이었습니다.
불 속에 타던 것을 제가 건져내서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기 이 작품을 보고 기뻐해 주세요!
그런단 말입니다.
이 때 조각가의 손에 의하여 멋진 작품으로 변화된 불에서 건짐 받은 나무는 조각가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우리의 구원이 이처럼 죄인 중에 괴수인 자들을 예수님이 그 속에서 갈고 닦고 다듬어서 천국에서 예수의 신부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의 신부가 되기까지 불에서 타던 흔적들을 지워내야 하잖아요.
우리 옛 사람을 지워내야 하잖아요.
그리고 새사람을 입혀야 하잖아요.
그 일을 지금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벌리는 겁니다.
이 일을 하려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이걸 말씀을 우리 몸에 새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우리 몸으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아니! 바울이 로마서에서 아들에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우리를 구원 했다고 했잖아요.
그럼 하나님이 우리 속에 아들에 형상을 본받는 일을 하실 것이 아닙니까!
아들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실 것이 아니에요.
우린 원래 마귀 형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속에 있는 마귀의 형상을 끄집어내고 예수의 형상을 심는 겁니다.
마귀적인 것은 톱으로 켜고 도끼로 잘라내고 대패로 밀고 끌로 파내서 예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한 돌 감람나무를 참 감람나무로 만들어 간단 말입니다.
참 감람나무가 자신의 진액을 쏟아서 말이에요.
우리가 참 감람나무인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당하면 그 때부터 예수님인 참 감람나무가 우리를 자신의 것으로 채워 갑니다.
이걸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다고 합니다.
이 일을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거에요.
우리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거에요.
이에 우리는 죽겠다고 아우성칩니다.
이게 꼭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생활과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불타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예수)를 보내서 그 불구덩이 속에서 건져 낸 겁니다.
불구덩이 속에서 건져 질 때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호! 했어요.
홍해 바다를 건너서 춤 추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서서히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조각가가 나무에 조각하는 것과 같이 간섭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애굽에 사람은 죽이고 가나안에서 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겁니다.
가나안에서 살 사람으로 만드는 거에요.
그러자 이스라엘이 난리를 칩니다.
아! 애굽이 그립다!
속았다!
이건 사기다! 사기!
괜히 애굽에서 나왔다!
우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래!
징징거리고 난리를 칩니다.
사람이 자기 본성을 고친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합니까?
안 고쳐져요.
그러니 광야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죽여서라도 하나님은 기어코 이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입니다.
이걸 우리 구원에 적용해 봅시다.
출애굽한 세대들이 광야에서 죽었다는 것은 우리 옛 사람이 죽는 것과 같아요.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들이 이 땅에 삶은 광야와 같아요.
옛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린 애굽인이었어요.
그런데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 교회라는 광야로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었어요.
스데반은 광야를 교회라고 했어요.
교회라는 광야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기 시작합니다.
우리 옛 사람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우린 반항합니다.
예수 안 믿었을 때가 좋았다!
실제로 우리 육신은 예수 안 믿었을 때가 훨씬 좋아요.
그땐 죄 지어도 아픔이 없었어요.
그 때는 우리 육신이 이끄는 대로 살아도 마음에 전혀 부담이 없었어요.
그런데 성령 오셔서 사사건건 죄라고 들추어내는 겁니다.
아주 고약한 시어머니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불편해요.
그러니 늘 죄와 싸우면서 상한 심령 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탄식은 오직 그 안에 성령이 거하는 성도에게만 나타나요.
어떤 이들은 구원을 예수님 피로 죄사함 받는 것을 끝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십자가 알면 다 되는 줄 알아요.
우리 육신은 어차피 죄 아래 팔렸기 때문에 죄 짓고 십자가만 쳐다보면 된다고 말해요.
그래야 예수님의 의(義)를 더욱 드러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불 구덩이에서 건져진 나무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그건 왜? 구원 했는지를 모르는 처사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시지 않고 부활하시고 우리 안에 오셨어요.
우리 몸을 성전 삼고 살고 있단 말입니다.
성전은 날마다 제사가 지내지는 곳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옛 사람을 날마다 죽인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는 옛 사람과의 싸움은 날마다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의 끝이면서 새 사람의 시작이에요.
십자가는 옛 사람이 죽는 것에선 끝이지만 새 사람으로서의 시작이에요.
성령의 오심은 옛 사람으로서의 삶을 종식시키고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옛 사람의 죽음을 근거로 한 새 사람의 삶입니다.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없다면 옛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어요.
새 사람으로서의 살게 하려고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서 살리신 겁니다.
신앙생활은 십자가라는 공식을 외우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십자가에 의미를 안다면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져주신 그 은혜를 우리 몸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은 그 십자가에다 나의 옛 사람을 죽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하고 십자가가 끝인 줄 알아요.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산다고 하는 겁니다.
죄 짓고 십자가만 쳐다보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 예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예수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건 영지주의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은 그런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에 의미를 안다고 하면 죄를 멀리하고 죄와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죽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라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죄 짓고 십자가만 쳐다보면 거기에 무슨 고난이 있고!
애통함과 탄식이 있으며!
자기 부인이 있고!
자기 옛 사람이 죽는 것이 있으며!
죄에 대한 아픔이 있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있겠어요.
없어요.
그럼에도 복음을 곡해하는 자들은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하지 뭐 어때!
그러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을 말하면 마치 이단이라도 되는냥 비아냥 거려요.
이 사람들은 왜? 구원시켜 주었는지를 모르고 있어요.
왜? 우리 몸을 구원해 주셨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출애굽에서부터 가나안까지 에요.
홍해 바다 건너면 끝이 아니에요.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은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의 사람은 새 사람을 상징해요.
하나님께서 광야에 나온 자들에게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합니다.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를 인도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어디로 인도하는가 하면 인간의 살 수 없는 길로 인도해요.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길이 힘들고 험악했으면 우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래! 라고 데모를 하였겠어요.
이건 옛 사람을 벗어버리는 아픔이에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고난입니다.
구원이란? 차라리 애굽에 있는 것이 나았다고 할 정도로 입에 단내가 풀풀 나듯이 하나님이 끌고 가는 일들이 앞에 놓여 있어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고난인 것입니다.
육이라는 본성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고난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엄청난 큰 고난이기 때문에 그 유업으로 엄청난 천국에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그만큼 영광도 커요.
이건 고난을 받아야 천국에 간다는 말이 아니고 천국이 유업으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지옥을 경험케 하신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옛 사람이 죽어지는 아픔이 있어요.
이 아픔은 조각가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톱으로 켜고 도끼로 잘라내고 끌로 파내고 대패로 밀어내는 아픔과 같아요.
성도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조롱받고 버려짐을 당하고 고난당하는 그런 아픔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구원은 예수님과 한 몸 되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몸이란? 같은 팔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힘들고 아픈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팔자이니 우리 몸에서 예수님이 그려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의 삶이 하나 둘씩 새겨지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가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죄가 터져 나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의 피로 용서 받은 것이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몸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받음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죄를 토하여 내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몸이 언제 편합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 때가 가장 편해요.
죄 짓고 살 때가 가장 행복해요.
반대로 말씀대로 살라고 하면 발악을 합니다.
이건 마치 공부하기 싫어하고 오락만 하고 싶은 아이에게 오락하지 말고 공부하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우리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세요.
말씀이 그 일을 하게 만들어요.
속에 미움이 가득한데 원수를 사랑해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순순히 예~ 사랑할게요! 가 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더 미움이 나와요.
이건 애초부터 안 되는 일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죄인에게 말씀을 지키라고 합니다.
이건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넌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고발을 해 주어야 아~ 난 저주 받아 마땅한 인간이구나! 를 알게 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아는 인간이라야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이 복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죄인에게 말씀을 쏘아 대는 겁니다.
너 이것 했어! 안 했어!
너 저것 했어! 안 했어!
성경이 나와 있는 명령을 보세요.
꼭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은 겁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말씀을 지키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는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죄를 끄집어내려는 것입니다.
그럼 제대로 말씀을 받아서 자기 죄가 고발당한 사람은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우리 몸은 항상 두 가지가 교차해서 나타나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과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요.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 탄식을 하잖아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과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우리 몸이 도무지 하나님 말씀을 담아 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말씀대로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단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세요.
아니 보세요.
성도의 몸이 누구 겁니까?
예수님 것이지요.
그럼 우리 몸에서 예수가 그려지겠지요.
하나님이 우리 몸에 예수를 그려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들을 그려낸단 말입니다.
이걸 시편 44편의 이야기로 말했습니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미움 받게 하고 수욕을 당하게 하고 버림당하게 하고 사망의 그늘을 드리우게 한다고 했잖아요.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의 몸에 장차 오실 메시야를 그렸지요.
그러니 시편 기자는 죽겠다고 아우성치잖아요.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이 우리 몸에 예수님을 그린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난리를 칩니다.
난리를 칠 때마다 죄가 툭툭 터져 나오는 겁니다.
죄가 터져 나올 때마다 예수님의 피가 뿌려지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의 삶이 고달픈 겁니다.
만약에 자기 마음대로 사는데도 어떤 징계가 없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히브리서 12장에선 아비가 없는 사생아라고 했어요.
사생아(私生兒)란? 구원 받은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당시에도 실제 이런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여호와가 목자가 되어서 양들을 어디로 인도 한다고 합니까?
푸른 초장이나 맑은 시냇가로 인도 한다고 하지요.
그리고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런다는 겁니다.
목자는 자기 자존심 때문에 자기 양을 혹독하게 간섭하는 겁니다.
지금 목자는 양 속에 자기 이름을 새기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이름이란? 목자의 인생이란 말입니다.
목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에요.
그러니 양인 성도는 곧 목자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두 돌 판에다 말씀을 새기지요.
그런데 바울은 새 언약에선 그 돌 판을 우리의 마음에 새긴다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에 말씀을 새긴다고 하셨어요.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의 삶을 살아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말씀대로 살면 우리 몸은 죽어나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말씀을 감당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맨 날 죄가 터져 나오는 겁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탄식을 한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왜? 탄식 합니까?
자기 몸이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내지 못한다는 것은 죄가 터져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탄식이 나오지요.
그러나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야~ 바울아! 너의 이런 죄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고 알려 줍니다.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가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그건 그 아들에게 우리 죄를 대신 담당시키심으로 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를 죽인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마다 예수가 우리 대신 죽임 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은 그 예수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용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돌 판에 새긴 율법을 이스라엘 진 속에 두셨지요.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온 겁니다.
그들 속에 말씀을 새긴다는 말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죄인과 동행한다는 것은 죄인으로서는 날마다 죽임 당하는 일입니다.
말씀이 새겨지면서 이들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런 죄인이야! 라고 고발을 하고!
그리고 흠 없는 제물의 피로 용서가 주어집니다.
그러니 말씀이 우리 안에 떨어진다는 것은 우리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고발하겠다는 겁니다.
고발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말씀이 어떻게 고발합니까?
우리 몸으로 말씀대로 살라고 고발해요.
한 번 살아보라고!
잘 생각해 보세요.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게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그럼 돌 감람나무에 있던 것들을 뱉어냄을 당하게 되고 참 감람나무의 것으로 채움을 입을 것이 아니에요.
참 감람나무의 진액이 공급 될 때마다 돌 감람나무의 성질은 빠져나가고 참 감람나무의 성질이 채워집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조각가가 되셔서 우리 몸에서 제할 것은 제하고 새길 것은 새기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돌 감람나무인 우리를 참 감람나무인 예수님에게 접을 붙이셨으니 참 감람나무이신 예수님이 부지런히 자신의 진액을 공급하셔서 맺고자 하는 열매들을 반드시 맺어 가실 것입니다.
참 감람나무의 진액을 공급 받은 자들의 삶에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로마서 12장 이후의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에서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게 접붙임 당한 이야기를 하고 12장 이후부터는 성도의 삶에 모습을 자기 몸을 산 제사로 드려지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들의 형상으로 그려 가실 것입니다.
주께서 주의 열심으로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러 할 때 성도의 몸에서 아들이 하신 일이 드러나게 되고 이는 곧 아들에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엿새가 차기까지,,,,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돌 감람나무인 우리를 참 감람나무인 예수님에게 접 붙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주님이시므로 끝 날까지 이루어 가실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몸에 새겨질 때마다 은혜로서 붙잡아 주시고 든든하게 세워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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