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
(김성수 목사)
(왜 제가 여러분들께서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강조를 했는가하면 오늘날 이 시대가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너무 안일하고 게으르게 유도하고 있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탄 듯 세상 사람들과 섞여서 방종을 일삼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우리 현실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하여 훌륭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에 만 관심을 갖습니다.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사탄이 어떻게 교회시대 전체를 통해 우리를 미혹해 왔으며 지금은 어떻게 우리를 미혹하고 있는지 간략하게 짚어 보자고요. 그러면 누가 진짜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모두 비슷비슷한 것 같은데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진짜라고 자신 있게 선포할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계 2:14-16) “14 그러나 나는 네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자다.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16 그러니 회개하여라.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속히 너에게로 가서, 내 입에서 나오는 칼을 가지고 그들과 싸우겠다.”
오늘은 우리가 소풍을 가는 날입니다. 원래 오늘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공부를 할 차례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공부할 내용이 조금 많아요. 오늘 그 부분을 하다가는 소풍도 못 갈 것 같아서 오늘은 버가모 교회에 대해 조금 보충 설명을 하고 일찍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최근에 제가 설교를 통해 조금 지나치리만큼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을 강조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요즘 제 얼굴만 떠올리면 경기를 하고 딸꾹 질을 하신다는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제가 꿈속에까지 나타나서 야단을 쳐서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셨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왜 제가 여러분들께서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강조를 했는가하면 오늘날 이 시대가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너무 안일하고 게으르게 유도하고 있고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탄 듯 세상 사람들과 섞여서 방종을 일삼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걸고 하는 단판 승부입니다. 삼판양승 같은 것 없습니다. 단판에 끝나는 승부입니다. 지면 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도박을 할 때보다도 덜 진지하고 게임을 할 때보다도 덜 절박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제가 알고 있고 느끼는 영적 전투의 현장은 너무나 무섭고 살벌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적은 살기등등해서 교회를 물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위기감도 없고 진지함도 없고 힘도 없이 너무나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저는 너무 이상하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마침 성경 본문도 연속해서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에 대해서 강조를 하는 구절들이 이어지고 해서 우리 교회를 포함한 오늘날 교회에게 그 동안 가슴에 품어두고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일전에 한국을 방문한 독일의 의사가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서울에는 참 병원이 많다’고 감탄을 했다고 합니다. 두 집 걸러 한 집 씩 붉은 네온 십자가가 걸려 있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많아졌습니다. 한국 기독교 100년 사의 쾌거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 붉은 네온 십자가가 걸린 곳이 전부 교회일까요? 일전에 동구 공산권에 숨어 들어가 선교를 하던 어떤 선교사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공산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0년간 동구권의 기독교는 뿌리 깊은 신앙 아래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숨어서 찬송을 하고 숨어서 예배를 드렸지만 우리 안에는 기쁨과 감격이 있었다. 우리는 이 공산주의가 무너지면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경을 읽고, 보란 듯이 교회에 모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기도해 왔다. 드디어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유가 왔다. 그리고 서구 교회의 신앙이 이 곳 동토의 땅에 맥도널드와 함께 들어왔다. 그 실용주의와 자본주의에 편승한 서구의 기독교 안에는 이미 예수는 보이지 않고 그들의 비전과 야망만이 남아 있었다. 안 된다. 이 기독교가 순진하고 순결하게 신앙을 지켜온 나의 형제들을 오염시키게 둘 수는 없다. 막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자유 진영의 교회가 전도를 하기 위해, 선교를 하기 위해 돈과 인력을 보냈는데 그 선교사님이 보시기에는 그건 기독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실용주의라는 것은 종교를 내 현실의 삶의 방편으로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자본주의라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투자를 하면 반드시 가시적인 결과가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독교가 들어오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의 복음은 점점 사라지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상한 종교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제 현실의 삶에 위안을 주고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것 정도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기독교가 그렇게 이해되어 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인간의 죄가 무엇이며,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의 구원은 진정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대신에,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실 것인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는 천박하고 피상적인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강단에서 전해지는 설교도 기복 적이 되고 현실중심 적인 설교가 되어 버렸지요? 그래서 성경을 우리 현실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하여 훌륭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에 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다루어 주는 설교들이 환영을 받고 그러한 설교를 하는 분들은 인기가 치솟고 유명인사들이 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듣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말은 모두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입니다. 커다란 교회를 담임하고 있고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유명한 강사이신 그런 훌륭한 분이 틀린 소리하겠는가? 네, 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말 우리가 성경에서 그런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 방면으로 더 뛰어난 책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윤리서적이나 경제학 경영학 책들 중의 한 종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선교사님은 그러한 천박한 기독교가 순수한 십자가와 고난의 복음으로 세워진 동구권에 이대로 밀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온 몸으로 막아서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실용주의와 자본주의에 젖은 서구의 교회들은 순결한 십자가의 신앙을 여지없이 퇴색시켜 버렸습니다. 왜 교회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갔는데 왜 교회가 죽어갑니까? 사탄은 이제 전략을 바꾼 것입니다. 예전에는 때리고 죽이고 핍박해서 기독교를 박해했지만 이제 사탄은 근사하고 그럴듯한 가짜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잘 들으세요. 사탄이 어떻게 교회시대 전체를 통해 우리를 미혹해 왔으며 지금은 어떻게 우리를 미혹하고 있는지 간략하게 짚어 보자고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복음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그런 복음은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그 복음이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인간의 손을 거치면서 훼손되어 지고 왜곡되어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사탄은 항상 인간의 죄 된 본성을 이용해서 복음을 훼손시키고 왜곡시켜 버립니다. 어떻게 복음을 공격하는가? 사탄은 매 시대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을 만듭니다. modernism, post modernism, 계몽주의, 민주주의, 산업사회, 종교 다원주의, New age 등등 각 시대 마다 시대를 대표하는 정신들이 있습니다. 복음과 그 시대의 정신은 항상 대립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가 세상의 풍속과 정신을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그 시대정신에 굴복하면 복음은 변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매 시대마다 복음의 본질을 늘 새롭게 규명하고 왜곡과 오염을 늘 세척해 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이 되고 인간은 스스로의 행복을 찾기 위해 문명을 발전시켰고 철학과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행복에 이르려 애를 써왔습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은 오히려 인간성의 황폐를 가져왔고 인간들은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New age 운동입니다. New age 운동은 서구의 철학과 종교와 동양 사상이 하나로 혼합이 된 인본주의의 극치이며 범신론입니다. 이 New age는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종교의 혼합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이 New age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창세기 3장의 뱀 의 꼬임에 넘어 간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 같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로 다시 돌아 간 것입니다. 인간들 스스로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명을 보고 인간 자신에게 반한 것입니다.
New age는 마치 뱀처럼 이 세상 인간들을 유혹합니다. ‘너희들도 하나님같이 될 수 있어’ 기독교는 그 New age movement에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수많은 신학자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알게 모르게 그 New age movement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종교 다원주의도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입니다. 남산에 올라가는 길은 이태원, 한남동, 장충동, 충무로 여러 갈래이다. 어디로 올라가든 남산에만 올라가면 된다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4장12절 말씀을 진리로 믿는 자들입니다.
(행 4:12) “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러나 종교다원주의는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가르치는 아주 인기 있는 시대정신입니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까지 이 매력 있는 시대정신을 수용하고 있고 지금도 많은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이 일 년에 몇 차례씩 모여 서로 손에 손을 잡고 / 고집불통인 개혁 주의를 비웃고 있습니다. 로만 카톨릭은 이미 오래 전에 종교 다원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카톨릭은 그것을 보편주의라고 부드러운 이름을 붙여 놓았지만 그것은 다분히 악마적인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복음을 훼손하는 또 하나의 시대정신은 Post modernism입니다. Post modernism이라는 것은 Post (After)라는 말이지요? ‘modernism 시대 이후’ 라는 말입니다.
modernism은 어떤 시대 사조였습니까? 17C까지 인간은 그래도 종교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성경을 숭상했습니다. 그러나 18C를 지나며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고 과학 기술이 발달하자 이제 그 이성으로 성경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비이성적인 부분, 즉 기적이라든지 부활이라든지 창조라든지 지옥이라든지 이렇게 “우리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은 모두 성경에서 빼자“ 라고 주장을 한 경험주의, 실존주의, 이성주의 이 모든 것이 바로 modernism입니다. 그래서 modernism시대에는 기독교가 아주 천박하고 무식한 종교로 홀대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곧이곧대로 믿는 책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교훈만 잘 건져내면 된다는 식의 가르침이 modernism시대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도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 나온 것이 바로 Post modernism입니다. Post modernism은 기독교를 거부하거나 부인하지는 않지만 기독교도 많은 비슷한 비중을 가진 여러 진리 중의 하나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기독교만을 절대 진리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Post modernism시대는 절대 진리나 절대 권위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그래서 이 Post modernism을 지나오면서 부모나 선생님이나 윗 사람의 권위가 실종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훈계를 하면서 회초리를 들라치면 이제는 학생들이 선생님을 신고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군대에서 고참들이 얼차려를 한 번 줄 때도 혹시 후임 병들이 소원수리라도 쓰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군기 잡기가 힘들다지요? 부모한테 혼난 자식이 아버지가 자는 사이에 넥타이로 목을 조릅니다. 아버지가 유산 상속 때 자기에게 섭섭하게 했다고 대학교수인 아들이 아버지에게 쌍 욕을 합니다. 그것이 Post modernism시대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 Post modernism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복음주의 진영 안에도 이 Post modernism이 깊이 파고 들어와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불변한 복음을 칼같이 전하는 대신에 이제 교회에 나와 주는 사람들이 취사선택을 할 수 있게 복음의 종류가 다양해졌습니다. 기복, 신비, 보수, 자유주의 조금씩 조금 씩 다 건드려 줍니다. 그래서 거기서 자기가 좋은 것을 취사선택해서 듣고 제발 나와 주기만 해 달라는 식의 구걸이 되고 말았습니다. 듣는 사람들도 이제 설교자를 자기 구미대로 평가를 합니다. ‘나는 우리 목사님이 좋아, 은혜도 많이 받아, 그런데 우리 목사님이 지옥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의 환난에 대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에 대해서 가진 관점은 나하고 많이 틀려, 그것만 빼면 다 좋아’ 그게 Post modernism의 영향입니다. 그런 곳에는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진리는 없습니다. 이제 자기한테 이해되어지고 자기 기분을 해치지 않는, 자기를 유쾌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이야기만 골라서 듣고 간직합니다. 그러니까 이 Post modernism시대에 목사를 하기 위해서는 절대 진리만을 칼같이 전해서는 인기를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절대 진리보다는 설교자의 외모나 그의 언변이나 제스츄어에 더 은혜를 받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감동시켜 주는 설교를 원하지 자기의 가슴을 후벼 파는 진리에는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금세기의 교회들이 이렇게 대형화되고 상업화 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큰 교회를 선호사지요? 교회가 크면 클수록 그 안에는 신자들이 고를 수 있는 게 많기 때문입니다. 목사들도 그 추세에 편승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상케 하는 것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신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강대상에서 갖은 아부를 다 해야 하는 시대가 post modernism 시대입니다. 때로는 코메디도 해 주고, 마음에 없는 칭찬도 해주고, ‘우리는 잘하고 있다. 잘 가고 있다’ 격려만 난무하는 것입니다.
제가 5월 6월에 몇 군데 교회 부흥회 강사로 갑니다. 그 중의 한 교회 목사님께서 설교 내용을 간략하게 보내달라고 하셔서 보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득달같이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이런 설교는 성도들이 싫어합니다. 큰 일 납니다, 다른 내용 없어요?’ 하고 전화를 하셨습니다. 이제 설교자는 회중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Post modernism입니다. 제가 이벨 극장에서 찬양 콘서트를 했을 때 사람이 1000명 이상이 왔습니다. 만일 제가 이벨 극장에서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우리 인간은 얼마나 저급하고 추악한 죄인이며 구원이란 무엇이며 그 구원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고 계신가에 대해 심혈을 기울여 설교를 한다고 광고를 하면 1000명이 올까요? 왜 찬양 집회에는 벌떼처럼 모이는 사람들이 그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에 대해 설명을 해 준다고 하는데 이렇게 외면을 합니까? 신자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Post modernism에 물든 사람들은 자기 기분을 좋게 해 주는 것만을 선호하고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복음은 어떤 식으로도 타협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어떤 식으로도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 시대 신을 거스려 더욱더 명확하게 규명되고 세척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여러분의 마음이 ‘평안하다, 즐겁다, 기쁘다, 위로가 된다.’에서 끝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과연 진리를 들었는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달변의 연설을 좋아하지 마세요. 재미있는 화술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가슴이 송곳으로 찔리는 것 같이 아프더라도 여러분은 진리를 오히려 사모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Post modernism 시대는 교회의 모양을 하고 신자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진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진짜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모두 비슷비슷한 것 같은데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진짜라고 자신 있게 선포할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 많은 유사품들 중에 무엇을 근거로 우리가 진짜라고 우길 수 있습니까? 가짜들은 그 복음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진짜들만 그 복음을 삶으로 살아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복음을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이 post modernism 시대에 난무하는 모조품 진리들 속에서 우리가 맞다 는 것을 증명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뭐지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롬 10:9)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복음은 예수가 나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입으로 삶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의 주인이시라는 것은 ‘예수가 시키는 것을 나는 의무적으로 수행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나의 구원자)로는 알고 있지만 나의 주인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에게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실 뿐 주인은 아니십니다. 신학자 반더발은 그런 복음을 반쪽짜리 복음이라고 했고 John Mcathur목사님은 ‘반쪽짜리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럼 뭡니까? 그 이야기는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이긴 하지만 나의 주인은 아니라는 태도로 사는 사람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력자, helper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났고 그 분의 손아래서 자라고 있으며 그 분께로 돌아 갈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는 그 주인이 시키는 것을 기쁘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뜻 때로 살아야 합니다. 그 분이 다 달라고 요구하시면 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곡되고 훼손된 반쪽짜리 복음에 머문다면 그게 바로 발람의 교훈이며 니골라당의 교훈인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입으로는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서도 실제 삶의 모든 영역에서는 모더니즘과 Post modernism의 산물을 즐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면서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적인 혜택을 누리고 즐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분명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기는 것입니다. 그건 안 됩니다. 이 Post modernism시대에 우리가 많은 진리를 표방한 것들과 비교해서 ‘우리가 진짜 진리다’라고 선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가 그 진리를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막 16:15-18) “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시고 가셨습니다. 어떻게 온 천하와 만민에게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삶을 복음으로 살아내면 됩니다. 입으로 전하는 복음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너의 주로 영접하라’는 복음을 전하면서 그 것을 전하는 우리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인정치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이들보고 예수가 너의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믿으라고 전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권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 적으로 감동을 찾아다닙니다. 박완서님의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어떤 주간지 기자가 대학 후배를 만나 나누는 이야기인데요,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후배가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물으니까 , 잠실야구장에 간다고 해요. 야구장에는 왜 가냐고 하니까 거기에 가면 혹시 나를 감동시켜 줄 어떤 일이 있을 것 같아 야구장엘 간다는 것입니다. 후배가 ‘주간지 기자면 감동 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취재를 할텐데 또 다른 감동을 찾아 다니냐’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그 기자가 하는 말이 ‘세상에는 야구장에서 홈런을 구경할 때만큼의 감동도 찾기 힘들어’ 그럽디다. 그러니까 그 후배가 ‘나도 잠실야구장에 가고 싶다’ 그게 끝입니다. 인간들은 끝없이 그 권태를 채울 감동을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는 좀처럼 감동이 없습니다. 그 속에서 여러분이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 보십시오. 세상은 그런 여러분을 보고 설사 예수를 믿지는 않을지라도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자식이 잘 살아내면 아버지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법입니다. 그게 예수를 주로 섬기며 사는 자들의 삶입니다. 우리 아버지를 위하여 세상을 감동시켜 보세요.
언행이 일치되는 삶을 사시고 규범을 잘 지켜내시는 삶을 사세요. 사랑을 하십시오. 용서를 하세요. 원망하지 마시고 욕심을 버리세요. 우리 때문에 우리 아버지가 칭찬을 받는 그런 삶을 좀 살아보자고요. ‘굳이 맹세를 하지 않아도 저들은 믿을 수 있어’ 이런 평가를 좀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야고보서에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굳게 약속하거나 다짐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결혼식 때 맹세하잖아요. 신랑과 신부가 영원히 변치 않고 사랑하겠다고 맹세하지 않습니까? 그거 하지 말아야 하나요? 여러분 집 사실 때 계약서에 sign 하시지요? 그거 맹세입니다. credit이 안 좋은 사람은 차 살 때도 보증인을 세웁니다. 그거 맹세입니다. 반드시 갚겠다는 맹세잖아요? 그럼 맹세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왜 맹세라는 것이 생겼지요? '그거 진짜야, 맹세해, 아니면 나를 죽여도 좋아‘’야, 지난번에 시청 앞에서 촛불 시위할 때 거짓말 안하고 500000명은 모였겠더라. 진짜야, 맹세해‘ 왜 그런 맹세를 합니까? 평소에 자기가 신용이 없이 산 것을 인정하고 cover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맹세하지 말라고 권고하는 것은 굳이 어떤 것을 걸고 맹세를 해야 상대방이 믿어 주는 그런 살지 말고, 맹세 안 해도 다른 사람들이 믿어 줄만큼 평소에 말과 행동을 잘 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보고 세상은 감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궁금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2000년 교회사를 통 털어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정신을 거스려 살았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죽음의 삶을 살았던 것을 잊지 마세요. 초기에는 진짜 사자 굴에서 화형대에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modernism 시대에는 엄청난 과학과 철학을 앞세운 이성주의 앞에서 바보 취급을 받았습니다. 죽은 것입니다. post modernism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 다른 유사품 , 모조품 , 가짜들이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환난에 동참하여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는 것이 우리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삶은 기쁨과 환희의 삶입니다.
(막 16:17-18)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은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방언도 하고 독을 마셔도 괜찮다고 하는 각각의 개별적인 표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독을 마셔도 안 죽습니까? 다 죽습니다. 이 말은 당시 초대 교회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들에게 해를 입히고 괴롭혔던 질병, 독, 귀신같은 것들에 당하지 않고 이기는 삶을 살아내는 표적이 신자들의 삶에 나타날 것이라는 상징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자라면 우리의 삶에도 그런 표적이 나타나야지요. 우리는 지금 기독교 2000년 역사 중에 가장 예수를 믿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더니즘 시대까지는 세상이 우리를 억압하고 파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너무나 명확하게 우리가 갈 길이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카타콤에 숨어서라도 예수만 믿으면 되었습니다. 칼이 날아오면 맞아 죽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제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제는 유사품이 너무 많습니다. 그 곳에서 진짜를 찾아 믿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열심히 공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으십니다. 예수를 믿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우냐? 그냥 믿으면 돼지 뭐 그렇게 성경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고민도 많이 해야 하고 그러냐? 예전에는 그게 가능했습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시대만 해도 예수 천국 , 불신 지옥 그거면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엉터리 신학이 너무 방대하게 쏟아져 나왔고 사람들이 거기에 미혹이 되어 모조품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여러분들은 어떤 자들이 진짜이고 어떤 자들이 가짜인지 구별을 할 실력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공부하셔서 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시면 언제든지 떠나셔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중대한 선택이 교회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 post modernism시대, 이 불확실한 절대 진리의 부재 시대에 어떻게 진리를 구별하고 확인하셔서 온 몸으로 그 진리를 사수하시겠습니까? 공부하셔야 합니다.
저희 교회 설교 테잎을 들으시고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고 하십니다. 저는 성경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될 수 있으면 예화도 성경 구절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잘 들어보지 못했던 설교라면 지금까지는 성경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만 들어왔다는 소리 아닙니까? 안 됩니다.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하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 가짜 유사품 모조품들을 잘 구별하고 갈라내어 청소해 버릴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 같은 엉터리 저주받을 가짜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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