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2. 24.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김성수 목사)

 

 

(일곱 교회를 살펴보는 동안 여러분께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칭찬 받는 교회가 되자’라는 데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곱 교회를 보면서 오늘 날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날 기독교가 참 잘 못 오해되어져서 예수를 믿으면 삶이 부흥하고 유명해 지고 화려해지고 번영이 되어 져야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교회도 커지고 목사도 유명해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행음을 한다고 하니까 무슨 거창한 죄들을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우상이라는 것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자기 존재의 만족과 행복의 근거로 삼는 것을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 2:12-17) “12 "버가모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날카로운 양날 칼을 가지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13 나는 네가 어디에 거주하는지를 알고 있다. 그 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너는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또 내 신실한 증인인 안디바가 너희 곁, 곧 사탄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14 그러나 나는 네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너희 가운데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발람은 발락을 시켜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일을 하게 한 자다. 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 16 그러니 회개하여라.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속히 너에게로 가서, 내 입에서 나오는 칼을 가지고 그들과 싸우겠다. 1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감추어 둔 만나를 주겠고, 흰 돌도 주겠다. 그 돌 위에는 새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돌을 받는 사람 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계속해서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를 살펴보는 동안 여러분께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칭찬 받는 교회가 되자’라는 데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꾸중을 들었고 서머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 받은 교회이니까 우리는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 같은 ‘칭찬 받는 교회가 되자’ 쪽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는 교회시대를 통해서 사탄이 우리를 어떻게 미혹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이라고 했지요? 우리는 일곱 교회를 보면서 오늘 날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2절을 보시면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라고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좌우에 날 선 검은 우리가 전에 공부를 했다시피 말씀입니다. 검이라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쟁의 상징이었고 권위와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의 로마 총독들은 생사여탈권을 손에 쥔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고 심판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총독들을 가리켜 ‘검의 법’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진정한 권위와 심판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먼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권세와 심판권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예수를 묘사했을까요? 그 이유가 13절에 나오지요?

 

13절을 보시면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미 순교자가 나왔을 정도로 로마에 의해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버가모 교회는 그 로마의 권세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정한 권세와 심판은 우리 주님 것이라는 것을 먼저 확인시키면서 편지를 여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버가모 라는 도시는 로마 ‘아시아도’의 행정수도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신전인 아우구스투스 신전을 비롯한 황제의 신전이 3개나 있었고 제우스 신전, 아테네 신전,

 

디오니소스 신전, 아스클레 피오스 신전 같은 그들의 신을 섬기는 신전이 4개나 있던 그야 말로 우상 천지인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버가모를 가리켜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는 표현을 쓰신 것입니다. 당연히 우상 숭배와 황제 숭배가 강요되어졌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는 그러한 외부적인 핍박을 잘 견뎌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아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안디바라는 순교자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안디바는 성경에 여기에 한번 나오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버가모 교회의 순교자 명단에도 빠져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다른 도시에서 와서 순교를 한 사람일 것이라 추측을 할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안디바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역사도 그를 기억하지 않고 버가모 교회조차 그를 대단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직접 호명하시며 편지에 기록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날 기독교가 참 잘 못 오해되어져서 예수를 믿으면 삶이 부흥하고 유명해 지고 화려해지고 번영이 되어 져야 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교회도 커지고 목사도 유명해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세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처럼 살겠다고 일어선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길은 예수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살다 가셨습니까? 예수님은 화려한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가 아닌 초라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으로 이 땅의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것이 승리의 삶이었다고 성경은 진술을 합니다. 죽으시기 전에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조롱을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한번 내려와 봐’ 라고 조롱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못 내려가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자기를 못 박은 빌라도나 로마 병정들이나 대 제사장 앞에 나타나서 통쾌하게 복수도 안 하십니다. 그냥 그들에게는 불쌍한 나사렛의 목수로 우스개 거리로 남으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승리였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경험 없으세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분은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며 바른 복음을 알고 있으며 또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고 열심히 노력도 합니다. 다른 한 분은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가 누구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도 잘 모릅니다. 한 마디로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 하고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자기가 믿는 것이 맞는 줄 알고 열심히 우기며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보기에 참 안타까워서 몇 번이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충고를 해 줍니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그 사람을 예수에 미친 광신자 취급을 하며 ‘믿으려면 곱게 믿어라’고 되레 충고를 합니다. 둘이 비슷한 시기에 비즈니스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분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크게 성공한다는 것을 저 사람에게 보여 주세요, 뽄때 한번 보여 주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나쁜 기도 아니지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의 비즈니스는 기울고 엉터리로 교회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자기가 예수를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은 날마다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조롱합니다. ‘봐라, 너는 예수 잘 믿는다면서 왜 그렇게 일이 안되니? 난 이렇게 잘 되는데’ 얼마나 약 올라요? 혹시 그런 경험 없으세요? 하나님이 그렇게 일을 하십니다. 절대 복수할 기회를 안 주세요. 제 설교를 듣고 유명한 교회 목사님 몇 분이 어떤 분들을 통해 제게 아주 기분 나쁜 소리를 했습니다. ‘정말 네가 맞으면 하나님이 그 교회 크게 부흥시켜 줄 거다’ 그런 소리 들었을 때 솔직히 저도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서머나 교회에 사람들 좀 많이 보내 주세요. 그래서 저 사람들 코를 좀 납작하게 해주게요.’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일을 안 하신다는 거예요. ‘그냥 썩어지는 밀알’로 가라고 해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래요.

 

엘리야가 이세벨의 협박을 받고 로뎀 나무에 머리를 박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렇게 일 하실 수가 있습니까?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 하나님께서 그를 호렙산으로 부르시고 거기서 엘리야에게 대답하십니다. 엘리야야, 네가 원하는 것이 이런 것이냐? 크고 강한 바람을 불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안에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곧 이어 커다란 지진이 일어납니다. 거기에도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큰불이 그 앞에 있었는데 거기도 안 계십니다. 그리고는 작고 세미한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의 삶을 좇겠다고 나선 그리스도인들도, 바로 그런 모습으로 가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엘리야의 사건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아주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가지만 우리 예수님께서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칭찬하십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안디바를 가리켜 ‘충성된 증인’이라고 불러 주십니다. 그 이름은 계시록1장5절에서 예수님께 붙여졌던 이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사신 길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버가모 교회를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계 2:14)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버가모 교회가 외적으로는 핍박을 잘 견뎌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이 잘 못된 가르침에 속아 우상을 섬기고 행음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교회는 우상을 섬기지 않기 위하여 핍박을 당하면서도 이겨내고 있는데 그 중의 어떤 자들은 우상을 섬기고 행음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먼저 발람의 교훈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을 아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이방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 그를 선지자라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와 함께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가면서 그 여정에 있는 이방 민족들을 하나하나 치면서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연전연승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길에 모압 왕 발락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선지자를 매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습니다. 발락이 발람에게 사람들을 보냅니다. 발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지 않습니다. 두 번째 사람들을 보냅니다. 발람이 따라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저주해야 하는 대목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계속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맙니다. 성경에서 발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는 듯싶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5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습니다.

 

(민 25:1-3) “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이 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염병으로 이만 사천 명이 죽습니다. 이게 브올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일이 왜 일어났는가?

 

(민 31:16) “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바로 발람이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했을 때 그냥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는 돈에 눈이 어두워 꾀를 내서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게 만들어서 이스라엘이 모압 여자들이 모시는 우상을 섬기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 발람의 꾀에 넘어갔고 하나님께 혼쭐이 납니다. 그게 발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버가모 교회의 문제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돈에 눈이 멀어 바르지 못한 교리를 가르쳤고 교인들 중에 그 교리에 넘어가서 우상을 섬기고 행음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버가모의 신전에는 여 사제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창기였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자들은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는 것과 동시에 그 신을 섬기는 여 사제와 관계를 가짐으로 그 신을 온전히 섬기게 된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 안에 그러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우상도 섬기는 혼합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외적인 핍박은 잘 견뎌냈으나 내적인 부패를 막지 못 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잘 가고 있는 것 같았고 실제로 순교자까지 나왔는데 속으로는 엉터리 교리에 젖은 가짜들이 득실거리고 있었습니다.

 

멀리 볼 필요 없이 우리 교회를 한번 보자고요. 우리교회는 이제 일 년 남짓 되었지만 이제 LA에서 꽤 유명해 졌습니다. 자주 들리는 말이 ‘서머나 교회는 꼴통 보수다’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다른 사람들이 질투가 나서 하는 말이지 ‘잘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인들 스스로도 우리는 정도를 걷고 있는 교회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 안에 서머나 교회가 가는 방향과 전혀 상관없이 여전히 우상을 섬기고 행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아십니까? 우상을 섬기고 행음을 한다고 하니까 무슨 거창한 죄들을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우상이라는 것은 하나님도 섬기면서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자기 존재의 만족과 행복의 근거로 삼는 것을 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섬기면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우상을 만들어 함께 섬겼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나를 버렸다’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를 가리켜 ‘이스라엘이 행음하였다’ 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 말고 다른 것으로부터 만족과 행복을 얻어내려 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과거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행복을 위하여 집착했었고, 중독되어졌던 것들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발람의 교훈을 좇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오늘날의 기독교가 얼마나 이 발람의 교훈에 놀아나고 있습니까? 선지자인 발람이 돈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팔아먹은 것처럼 자기의 입신양명이나 자신의 명예를 위해 교인들 등을 치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교인들의 등을 치기 위해 그들의 입으로 퍼부어 주는 그 ‘복’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까? 이것이 발람의 교훈입니다.

 

그들은 또한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켰다고 합니다. 니골라당은 당시 초기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무 율법주의를 가르쳤던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천국 간다.’ 이게 무 율법주의입니다. 영지 주의라는 것은 ‘영적인 것은 고급한 것이고 육적인 것은 아주 저급한 것이어서 육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니까 육적으로 지은 죄가 영적으로 얻은 구원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그 영지주의 자들은 교회 안에서는 아주 신실하게 종교 생활을 하다가 자기 삶의 현장에 나가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사는 그런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막 살아도 구원받는 데 아무 지장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유와 자율을 오해한 것입니다. 자율은 자기가 신이라는 God Illusion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유는 ‘하나님의 뜻’ 이라는 제한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상은 없는 것이니까)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그 고기를 안 먹는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자율은 하나님과 다른 이들은 전혀 생각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을 자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니골라 당입니다.

 

오늘 날 이 영지주의가 교회 안에 고스란히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아주 경건한 척 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믿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삽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런 엉터리 교리들을 전해서 교인들을 타락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지도자가 바르게 전해도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여전히 엉터리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암 8:11)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마지막 때가 되면 교회는 많아지고 설교는 많아지는데 진짜 말씀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말씀을 바로 전하는 자도 드물어지지만 바른 말씀을 깨닫는 자들도 드물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른 교리를 듣고 바르게 이해하고 바른 행위가 나오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맞습니까? 한번 점검해 보세요. 그리스도인은 삶의 전 영역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추구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 나가서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 내셔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런 삶이 나오고 있습니까? 안 나오고 계시다면 기도하셔야 지요. 그리고 이를 악 물고 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힘이 들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것을 순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네, 성도의 삶은 순교라 부를 만큼 힘이 듭니다.

 

(딤후 3:12)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계 6:9-11)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여러분이 선교 지에 가서 목 베임을 당하는 것만이 순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열심히 살아내는 것이 순교입니다. 순교자들이 왜 죽임을 당했습니까? ‘가이사가 주가 아니라 예수가 주’라는 것을 외치다 죽은 것입니다. 예수가 주라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므로 나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뜻에 맞게 사시는 것이 순교인 것입니다. 아니 어떤 면에 있어서는 칼에 목이 베이는 것보다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칼에 목이 베이는 것은 순간에 끝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인생 내내 그 삶을 살아내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그래도 살아보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살라고 하셨으니까. 아무도 안 알아줄 것 같지만 예수께서 안디바의 이름을 부르셨듯이 여러분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불러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매일 매일을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계 12:11)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여러분은 이런 구절들을 읽으시면서 막연히 어떤 미래에 있을 일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바로 지금 여러분 교회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거룩을 향한 전투가 없다면 여러분은 지금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이 주는 달콤함에 여전히 빠져 있는 분들입니다. 발람이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 발람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니골라’입니다. 그러한 교훈은 여러분을 결국 파멸시키고 말 것입니다.

 

어제 아침에 집에서 가족예배를 드렸습니다. 야고보서 4장을 돌아가면서 읽고 제가 간단히 설명을 해주고 돌아가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둘째 아이 차례가 왔는데 그 녀석이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Dear God, Please Let us throw the sins in the trash can. 기도가 끝나고 제가 아이를 많이 칭찬해 주었습니다. 제가 너무 감격스러워 하니까 제가 교회로 나오는데 아이들이 전부 문 앞에까지 와서 아빠 기분 좋으라고 Dear God, Please Let us throw the sins in the trash can. 이렇게 합창을 했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아이의 속에서도 이런 열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픈 욕구와 의지가 나오지 않는다면 글쎄, 정말 그 분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있으신 분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요일 1:6)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우리의 삶이 따라주지 않는 신앙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발람과 니골라의 교훈을 좇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그를 추종하는 자들에게 엄히 경고하십니다. ‘회개하라,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너희와 싸우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그들과 싸우겠다고 하시는데 그 그들은 마귀의 세력이 아닙니다. 주님은 너희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에 빠져있고 엉터리 무 율법주의에 빠져 게으르고 나태하고 죄에 빠져 거기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너희들을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확인했지요? 우리는 종말에 무엇으로 심판을 받습니까? 말씀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좌우에 날선 검이 뭐라고요? 말씀입니다. 그 좌우에 날선 검으로 주님이 우리와 싸우시겠다는 것은 뭡니까? 우리는 영원히 지옥에 던져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는 자에게는 무엇을 주시겠다고 하십니까? 감추어진 만나와 흰 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만나는 여러분이 요한복음에서 배우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 6:31-35) “31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복음서나 서신 서를 보면 예수님이 감추어졌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지요? 그리고 천국의 비유에서도 천국은 감추어진 보배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렇게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흰 돌은 뭡니까?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을 주시는데 그 흰 돌에는 새 이름이 쓰여 있고 그 이름은 받는 자밖에 모른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지요? 한번 보지요.

 

당시 사람들이 흰 돌 하면 떠올리는 것이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법정에서 흰 돌을 주면 무죄였고 검은 돌을 주면 유죄였습니다. 그리고 흰 돌은 성결과 거룩을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버가모 교회 사람들이 이 편지를 받아 읽으면서 흰 돌을 주겠다고 하셨을 때에 죄를 사하여 주시고 거룩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극장에 들어갈 때 입장권이 돌에 이름을 새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흰 돌에 이름을 새겨서 주시겠다고 했을 때 그들이 아마 천국의 입장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달달 외우고 있었던 구약의 이야기를 떠올렸겠지요?

 

(출 28:9-11) “9 호마노 두개를 취하여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10 그들의 연치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11 보석을 새기는 자가 인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테에 물리고”

 

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보석이라고 번역이 된‘에벤’은 ‘돌, stone’을 말하는 것입니다. 돌 위에 이름을 새기는데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깁니다. 제사장이 이스라엘의 아들들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버가모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 도시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을까요?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이 뭔지를 살펴보면 알게 되겠지요? 이사야서로 가보지요.

 

(사 56:3-7) “3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나무라 말하지 말라 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6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새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성산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 62:2) “2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보세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이 이제 어떤 한 무리, 새 이름을 얻은 영적 이스라엘이 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 65:15) “15 또 너희의 끼친 이름은 나의 택한 자의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주 여호와 내가 너를 죽이고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칭하리라”

 

이방인이건 유대인이건 간에 이제 새 이름을 받은 새 민족, 새 나라,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을 진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받는 자들은 바로 여러분,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바로 여러분의 이름인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잘 알고 있는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은 그 구절을 볼 때에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어떤 용기를 얻었는지 보자고요.

 

(사 65:13) “13 이러므로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로되 너희는 갈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버가모 교회의 사람들이 이 편지를 읽어나가면서 이기는 자들에게는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을 주시겠다는 대목에서 이방인인 자기들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성소에 나갈 특권을 얻은 자들이며, 자기 주위에 무 율법주의나 혼합주의 같은 엉터리 교리에 빠져서 자기들의 유익만을 구하던 자들이, 겉으로는 배부르고 행복해 보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누리는 것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천국의 배부름과 천국의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이고 지금 누리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 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을 줄 것이다’라고 하셨다고 그것이 미래에 주어질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복음은 항상 already not yet으로 이해하셔야 한다고 했지요? 특히 계시록은 천상의 완성된 교회와 지상의 가시적인 교회를 동시에 띄워 놓고 설명을 하시기 때문에 더더욱 잘 해석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계 2:10) 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 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서머나 교회에게는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미래로 말씀하십니다.

 

(계 3:11) “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미 면류관을 받았고 그 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하라고 충고를 하십니다. 어떤 교회는 면류관을 먼저 받고 어떤 교회는 나중에 받고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님 다시 오시는 날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이미 면류관을 받아, 쓰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기는 자들에게 감추인 만나와 흰 돌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구원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그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 잔치입니다.

 

(계 19:7-12)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10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데 그 분이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을 받으셨습니다. 아까는 여러분의 이름이었는데 여기서는 예수의 이름입니다. 종합해서 정리를 해 드리겠습니다. 이기는 자들이 감추인 만나를 먹고 이름이 적힌 흰 돌을 받게 된다는 것이 주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자들은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을 받으신 대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져서(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의 이름이 되고 여러분의 이름이 예수의 이름이 되는 연합) 이미 하나님 전에 나아가 하나님이 베푸시는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만나와 포도주를 배 터지게 먹고 마시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자들은 발람과 니골라의 교훈으로 미혹하는 마귀의 세력을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순교의 삶을 기쁘게 살아내게 된다고.. 그러한 자들은 이 세상의 풍요를 위해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목마르지 않고 배가 고프지 않을 만큼 하늘의 잔치를 온 몸으로 느끼고 누리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시 23편)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여러분의 잔이 넘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으시다 면 지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환난과 궁핍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그 속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만족하고 행복하여 배가 터지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예수를 바로 아십시오. 하늘나라를 바로 아십시오. 분명 여러분의 잔이 넘치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