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강. 참 이스라엘과 구원 (롬 11:22-32)
롬 11:22-3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數)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 나라를 일컬어 “은혜의 나라” 라고 합니다.
은혜의 나라에서는 은혜에 속한 자들만이 살 수가 있습니다.
은혜가 무엇인가요?
이는 은혜의 반대를 알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은혜의 반대는 법입니다.
법은 정죄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은혜는 덮어주고 용서하며 살리는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자들인가요?
허물의 사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죄의 수치를 덮음 입고 죄 용서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사람과,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두 방식의 대하심이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은 긍휼로 대하시고,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은 법으로 대하십니다.
노아에게 두 아들이 있습니다.
셈(야벳)과 함입니다.
이 두 아들은 두 부류에 속한 자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은혜에 속하였고, 다른 하나는 법에 속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축복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는 결국 하나는 복의 후손이고, 다른 하나는 저주의 후손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셈(야벳)과 함은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 하체를 드러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셈(야벳)과 함은 대조적으로 일을 처리 합니다.
함은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고 폭로하였고!
반면에 셈(야벳)은 아비의 수치를 덮어주고 가려주었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곧 그들의 속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잠에서 깬 노아는 두 아들의 행동을 근거로 상벌(賞罰)을 줍니다.
수치를 드러낸 함은 저주하였고!
수치를 가려준 셈(야벳)에게는 축복을 하였습니다.
겉보기에는 두 아들의 상벌(賞罰)은 마치 자신들의 행동으로 인한 것처럼 보입니다.
쉬운 말로 셈(야벳)은 복 받을 짓을 해서 복을 받았고, 함은 저주 받을 짓을 해서 저주를 받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게 법 아래서 해석하는 인과율(因果律)적 해석법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과율을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를 말합니다.
성경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열매라는 나타난 결과물은 나무라는 원인에 의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 복 받을 짓을 해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니고, 복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복 받을 짓을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셈(야벳)은 복에 속하였기 때문에 복 받을 행동이 나온 것이고, 함은 저주에 속하였기 때문에 저주 받을 행동이 나온 것입니다.
함은 저주에 속하였기 때문에 저주 받은 자의 모습을 보인 것이고!
셈(야벳)은 복에 속하였기 때문에 복 받은 자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한 것입니다.
왜? 셈을 칭찬하지 않고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했을까요?
이는 셈의 행동이 여호와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여호와가 셈으로 하여금 수치를 가려주게 해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셈은 여호와께 속하였기 때문에 허물을 덮어주는 일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함은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수치를 드러내고 정죄하는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에 속한 자들은 셈(야벳)처럼 수치를 가려주는 삶을 살게 되고, 법에 속한 자들은 함과 같이 수치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의 삶이 그 사람의 속성(은혜와 법)을 증거 해 주고 있는 셈입니다.
은혜에 속한 사람은 은혜로 살고, 법에 속한 자는 법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리고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도란? 하나님으로부터 허물의 사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죄의 수치를 가리움 받았고 용서를 받은 자들입니다.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아서 자기 백성이 된 것이 아니고, 자기 백성이기 때문에 죄사함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세요.
주께로부터 덮어줌을 받았고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은혜가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용서는 내 것이 아니고 주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로부터 받은 것을 삶으로 토해내게 되는 것일 뿐입니다.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24-32=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32절부터 꺼꾸러 거슬러 올라가면서 해석을 해 봅시다.
그럼 이해가 쉬울 겁니다.
32절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이 먼저 용서 했으니 너희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 받았느냐!
그럼 용서해라!
하나님께서는 먼저 주시고 달라고 하세요.
씨를 주시고 열매를 달라고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씨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그 열매를 내어 놓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열매인가요?
그 은혜와 긍휼이라는 열매입니다.
감사라는 열매입니다.
열매를 억지로 맺고자 하지 말고!
열매가 자연적으로 맺히고 있는지를 살펴보세요.
열매가 자연스럽게 맺히고 있는 사람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당한 성도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심이 먼저에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용서를 받았어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자가 바로 새 사람입니다.
새 사람이란? 하나님의 용서를 옷처럼 입고 있는 자들입니다.
24절에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은 우리더러 입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는 하나님께서 새 사람이 되게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새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새 사람이 되게 해 주셔서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새 사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 사람으로 대하십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그리스도라는 옷을 보시고 새 사람으로 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새 사람이니까 새 사람 답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새 사람 답게 사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았으니까!
이해하라고 합니다.
분노하지 말고 용서를 보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이제 새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은혜로운 말을 하라고 합니다.
도적질 안 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합니다.
왜?
용서 받았으니까!
이건 온전이나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향성을 말해요.
이러한 성향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니고!
새 사람이 되었으니 이렇게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전도 시키지 마세요.
이걸 전도 시키면 종교생활이 됩니다.
종교생활은 내가 주체가 되어서 뭔가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우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의 끝에는 내 자랑이 있지만, 신앙생활의 끝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종교생활은 자아를 확장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신앙생활은 자기 주체를 차압당하고 자기 부인으로 나타납니다.
종교생활은 신을 이용하여 내가 사는 것이지만, 신앙생활은 내가 죽고 신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날마다 내가 죽고 예수가 사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십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들 속에서 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성도는 은혜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사는 자를 일컬어 오늘 본문에서는 인자(仁慈)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인자(仁慈)란? 은혜를 말합니다.
은혜에 거하기 때문에 은혜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 안에서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넘어지는 자들은 엄위에 거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2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엄위(嚴威)란? 법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넘어지는 자에게는 엄위가 있다는 말은 법으로 사는 자에게는 하나님은 법으로 대하신다는 말입니다.
법으로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법은 죽이는 것입니다.
법 앞에서 살아남을 자는 없습니다.
이 세상은 법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죽음이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이 은혜로 대하시는 나라가 생겼습니다.
이름하여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 백성을 말합니다.
이건 혈통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를 말합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고서 얻어진 이름입니다.
창세기 32장을 봅시다.
창 32:24-30=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씨름을 하면서도 그 분이 하나님인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니 이름을 말하지 않고 축복을 합니다.
축복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에 야곱이 죄인이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살아났다는 의미로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합니다.
브니엘이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살았습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은혜로 대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은 자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거두어 가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다투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속에는 하나님과 다투고도 살아남은 자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살아남았다는 뜻으로 그곳 이름을 “브니엘” 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자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에 의미는 국가적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무리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이 신약으로 오면 교회로 나타납니다.
교회란? 은혜를 입은 자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나 교회는 영적으로는 동의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들은 모두가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모두가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걸 오해 했어요.
혈통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인줄 알았어요.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스라엘인줄 안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에요.
혈통적 이스라엘 속에 약속으로 난 이스라엘이 있었어요.
이들이 은혜에 속한 이스라엘입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의 두 아들과 같아요.
아브라함에게는 혈통으로 난 이스마엘과 약속으로 난 이삭이 있었어요.
표면적으로는 이스마엘이나 이삭은 모두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유업 문제에 봉착하면 달라집니다.
아들과 종으로 신분이 달라집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이삭을 다르게 대하였습니다.
이삭만 아들로 인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유업을 이을 아들이라고 하고 이스마엘은 종이라고 하면서 집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아들과 종은 신분이 다릅니다.
아들은 사랑의 관계에 있고, 종은 법적 관계에 있습니다.
아들은 인자에 거하는 자이고, 종은 엄위에 거하는 자에요.
이러한 영적 구조가 육적 이스라엘 속에 그대로 흐르고 있었어요.
한 집안 속에서도 이삭처럼 인자에 거하는 자들과 이스마엘처럼 엄위에 거하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둘 다 표면상으로는 아브라함 후손입니다.
이게 이삭에게서는 야곱과 에서 라는 두 아들로 나타납니다.
야곱 안에서도 요셉과 그 형제들로 나타납니다.
야곱과 에서 요셉과 그 형제들은 영적인 의미에서는 다르지만 육적으로는 모두가 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육적으로 난 자도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약속으로 난 자도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둘을 구분하시고 갈라내는 일을 하십니다.
진짜 이스라엘과 가짜 이스라엘을 분리했습니다.
어떻게 분리하는가 하면 인자에 거하는 자와 엄위에 거하는 자로 구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의미가 있다고 했지요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라고 했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산다는 것을 아는 자가 진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은 인자로 대하세요.
은혜와 용서로 대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이스라엘은 인자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엄위로 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법으로 사는 자들이 있었어요.
이에 하나님은 그들은 인자에 거하지 않는 자로 간주하고 잘라내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합당하게 인자로 살아야 함에도 인자로 살지 않고 상반되게 법으로 살기 때문에 골라낸 것입니다.
법으로 살았다는 것은 스스로 나는 법에 거하는 자입니다 라고 드러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은 이스라엘에 합당한 자가 아니라고 잘라낸 것입니다.
잘라냈다는 것은 곧 골라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표면적(表面的) 유대인은 혈통에 속한 자를 말하고!
이면적(裏面的) 유대인은 약속에 속한 자를 말합니다.
혈통적 유대인들은 법으로 살고! 약속에 속한 유대인들은 은혜로 살아요.
모두가 하나인줄 알았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혈통에 속한 자들과 약속에 속한 자들을 골라내고 갈라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골라냄을 당한 것을 잘라냈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해 내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밥을 짓고자 쌀 속에 있는 돌을 골라내는 것과 같습니다.
쌀과 돌은 달라요.
쌀이 돌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쌀은 쌀이고, 돌은 돌이에요.
그런데 쌀 속에 돌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밥을 짓기 전에 쌀 속에 있는 돌들을 골라내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인자에 거하던 자들이 엄위에 거하다가 잘려나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엄위에 거하는 자들인데 이들이 인자에 거하는 자들 속에 섞여 있던 것을 골라낸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은 토기장이가 되셔서 애초에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을 만들었어요.
바로는 진노의 그릇으로 지음을 받았고, 모세는 긍휼의 그릇으로 지음을 입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용도에 합당하게 바로는 진노의 그릇으로 사용하셨고, 모세는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로가 못나서 저주를 받았고, 모세가 잘나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나 모세의 조건에서 저주와 구원이 주어진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먼저 사용할 용도를 정하시고 그 용도에 맞게 그릇을 만든 것이기 때문에 만드시고는 그 용도대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로가 진노 받을 짓을 해서 진노를 받은 것이 아니고 진노의 그릇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진노 받을 짓을 한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두 민족을 계획하시고 창조를 하셨어요.
은혜에 속한 민족과 법에 속한 민족을 만드셨어요.
한 민족은 은혜로 대하시고 다른 한 민족은 법으로 대하세요.
은혜로 대하는 자를 아들이라고 하고 법으로 대하는 자들을 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 둘이 섞여 있습니다.
마치 창세기 1장 2절의 빛과 어둠이 섞여서 혼돈된 모습으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습니다.
아들이나 종 모두가 법 아래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서 예수님을 보내서 법 아래서 종노릇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찾아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아들이 종들 속에 섞여서 종처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서 아들들을 종들 속에서 빼내게 하신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1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 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잘 보세요.
유업을 이을 자가 있습니다.
유업을 이을 자란? 주인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아들을 어렸을 동안에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두었어요.
후견인과 청기지를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합니다.
초등학문을 율법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유업을 이를 아들을 정한 때까지 잠시 동안 마귀 아래 두어서 율법으로 다스림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받아야 할 자들을 지옥에 둔 것입니다.
지옥에 주관자는 마귀에요.
마귀는 법으로 다스려요.
그러니까 마귀 아래서 율법에 다스림을 받는 자들은 종처럼 지옥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속에 아들이 섞여 있습니다.
쉬운 말로 아버지가 아들을 마귀라는 후견인에게 맡겨서 고생을 좀 하게 한 것입니다.
마귀는 주인으로부터 위탁을 받고 주인의 아들을 법으로서 종처럼 다스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종 살이 하던 곳으로부터 빼내 오게 하신 것입니다.
법으로부터 빼내 오게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종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율법에서 은혜로 빼냈어요.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 준 것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의 자리로 옮겨준 것입니다.
종에서 아들이 된 것이 아니고,,
원래 아들이었어요.
이걸 잊지 마세요.
6-7절을 보세요.
6-7절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에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셨다고 하지요.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에 영을 보내 주었어요.
아들에 영이 와서 아들이 된 것이 아니고,,,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을 자에게 예수가 믿어지게 되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 믿음이 예수를 믿게 하였어요.
이걸 로마서 1장 17절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고 합니다.
두 믿음이 나오지요.
앞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라는 믿음은 견인하는 믿음이고, 뒤에서 말하는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라는 믿음은 앞에서 견인한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해요.
믿음이 믿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하지요.
이는 믿음이 하나님이 믿으라고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말하는 “믿음으로”가 바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예수를 알아보고 믿게 하였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믿음으로 예수를 알아보고 믿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선물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을 아들들에게만 주셨어요.
그래서 바울이 너희가 아들인고로 아들에 영을 보내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기억하세요.
종이 아들에 영을 받아서 아들이 된 것이 아니고!
원래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에 영을 보내 주신 것이라구요.
아들에 영이 오고 나니까!
아! 내가 종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을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에요.
아들에 영을 받고 보니 자기 존재를 알게 된 것입니다.
아! 내가 원래 아들이었네!
그런데 종노릇하고 살았었네!아이구~ 원통해라!
그런데 마귀라는 놈이 자꾸만 옛날 정을 들먹이면서 율법을 가지고 종 노릇하라고 장난을 친단 말입니다.
율법의 잣대를 들이댄단 말입니다.
예수가 와서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잊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귀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그 당시 갈라디아 지역에 창궐한 유대교 이단사상이었어요.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온전해 진다는 사상이에요.
예수 믿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살아야 온전해 진다고 했어요.
마치 이 시대 성화주의 사상과 같아요.
이게 사람들에게 먹혔어요.
왜? 먹히느냐 하면 인간들의 가치를 챙겨주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부여해 주기 때문입니다.
율법 지킨 것을 의가 된다고 하니까 사람들의 이성에 딱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라지고 율법 지킴이 신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소리치는 것입니다.
야! 이놈들아!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더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것이 너희 눈에 밝히 보이지 않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다 이루셨는데!
왜? 또 그 딴 것을 지키려 하느냐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9-11절을 보세요.
9-11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너희는 이제 종이 아니고!
아들이잖아!
아들은 법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살어!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은 종들이나 하는 짓이지 아들이 할 일이 아니란 말이야!
예수님이 너희들을 그 종의 자리에서 건져 내 주었는데!
왜? 또 종노릇하느냐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지금까지 핍박을 받아가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너희들에게 전한 것이 말짱 헛 것이 되지 않느냐!
내가 전한 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날과 달과 절기와 같이 종들이 지키는 법에 속한 것들을 다 폐한 것인데!
다시 그 짓을 하면 예수님이 헛 죽은 것이 되지 않느냐!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법 아래 있던 자들을 은혜 아래로 빼내 주었는데!
왜? 법으로 살고자 하느냐!
너희가 정녕 법으로 산다고 한다면 아들이 아니고 종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아들에 영을 받은 아들들은 율법에 종 노릇 하지 않아요.
아들에 영이신 성령이 그 안에서 은혜로 살도록 간섭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참 감람나무의 진액이 가지를 보존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보면 안 되어요.
그럼 전혀 엉뚱한 해석을 낳게 됩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잘려나가기도 하고 또한 잘하면 접붙임이 되기도 한다는 식의 율법적인 인과응보(因果應報)식 해석을 낳게 한단 말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오늘 본문을 가지고 인간의 행위 차원으로 해석해요.
봐라! 유대인도 잘려 나가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우리도 잘못하면 잘려 나갈 수가 있다!
그러니까 잘해야 한다고 합니다.
구원은 우리가 열심히 지켜서 이루어 가야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들으면 그럴 듯해요.
문자적으로 보면 전혀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걸 쉽게 비유적으로 설명할게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너~ 이 애비 말 안 들으면 호적에서 파고 내 쫓아 버릴거야!
그러니 말 잘 들어! 라고 했어요.
문자적으로 보면 아버지 말을 안 들으면 집에서 쫓겨나가야 합니다.
그럼 묻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식들에게 말 안 들으면 호적에서 파내고 쫓아낸다고 하는 말이 정말로 아들을 집에서 쫓아내고자 하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진짜 아들은 아버지의 이런 말을 액면 그대로 듣지 않아요.
그러니까 진짜 구원을 받고 은혜에 속한 자들은 내가 잘못하면 참 감람나무에서 짤려 나가면 어쩌지 라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 은혜에 거하는 자가 아니고 엄위에 거하는 자들이에요.
자기 안에 법이 작동을 하니까 법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이 은혜로 주어진 것이므로 은혜로 보존이 되어요.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없어요.
하나님은 그런 구원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상선벌악(償善罰惡)이니,
인과응보(因果應報)니,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니 하는 말들은 율법 아래서나 하는 말이지 은혜 안에는 없는 말입니다.
은혜 안에서는 너 그 따위로 하면 잘려나간다는 말이 없어요.
은혜 안에는 인과율(因果律)이 없어요.
내 행위로 인하여 복을 받거나 저주 받는 것이 없어요.
은혜 안에서는 오로지 언약에 의하여 다스려져요.
언약 안에 있으면 복이고 언약 바깥에 나가면 저주에요.
구원은 자기 자리 찾아가는 것이에요.
이 일을 누가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하세요.
하나님이 분리수거 하듯이 인자에 거할 자와 엄위에 거할 자들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서 엄위에 거하던 자들을 솎아 냈잖아요.
그럼 이방인들 속에서도 인자에 거하여야 할 자들을 솎아 오겠지요.
이방인들 속에도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있어요.
이들이 바로 인자에 거할 자들입니다.
은혜라는 동네에 살아야 할 자들이에요.
그런데 잠시 이방인이라는 법의 동네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법 아래서 종 노릇하면서 살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이방인들 속에 거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뽑아서 은혜 아래로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오셔서 이방인들 속에 있던 자기 백성들을 법에서 뽑아서 은혜 안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자리를 옮겨준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이 구원을 바울은 참 감람나무 비유에 접붙임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엄위에 거하는 자들은 잘라내고 인자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數)를 채우는 일을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비밀(秘密)인가 하면?
이방인들 중에서 인자로 접붙임 당할 자들을 찾아내는 비밀인 겁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엄위에 거하던 자들이 빠져 나간 자리에 이방인들 속에서 인자에 거하여야 할 자들을 찾아와서 채우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은혜의 자리에 법에 속한 자가 떡 허니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동네에서 법으로 살면서 은혜를 훼방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야! 임마!
너 왜? 여기 앉아 있는데!
여긴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야!
저리 꺼져!
그리고는 말석(末席)에 앉아 있던 이방인 중에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와서는 네가 앉을 자리는 여기야! 라고 하면서 이제부터는 이 자리에 앉아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뽑아 낼 자는 뽑아내고, 앉힐 자는 앉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건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로 말하면 어둠 속에서 빛을 불려내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창조와 같은 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나 창조나 같은 의미에요.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빼내서 가나안으로 이주시키고!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신 것과 같아요.
새 이름을 준 것은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창조에요.
이게 구원이에요.
예수님을 일컬어 시온에 거치는 반석이라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시온에 거하는 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하여 오셨다는 뜻입니다.
넘어뜨린다는 것은 잘못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온이란?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그럼 예루살렘에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루살렘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잘못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어떤 예배를 드렸나요?
율법적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인자에 거하지 않고 엄위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자(仁慈)란? 은혜를 말하고!
엄위(嚴威)란? 법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이 은혜 아래 있지 않고 법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유대인들에게 애들아! 아버지는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셔!
너희들은 지금 제사 지내기에만 급급했지 긍휼이 없어!
그건 제사의 본 뜻이 아니야!
제사 속에는 긍휼이 담겨져 있어야 하는데!
너희들은 지금 제사 지냈다는 행위만 붙잡고 있잖아!
제사 지낸 것을 의로 생각하잖아!
그건 껍데기야!
제사 지낸 것에는 의가 나오면 안 되고 긍휼이 나와야 해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고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가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이걸 예수 믿는 것으로 적용하면!
예수 믿는 것이 자랑스러우면 안 되어요.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복음 아는 것이 자랑스러우면 안 되어요.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자랑스러우면 반드시 그 자랑스러움으로 남과 차별을 두게 되어 있어요.
이게 법이에요.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율법으로 나오는 것을 원치 않고 은혜로 나아오는 것을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복음 아는 것을 자랑하는 자를 원하지 않고,
복음 아는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사는 자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것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감사로 나아오는 것은 본인이 은혜 받음을 아는 자만이 할 수가 있어요.
즉 하나님의 인자 안에 거하는 자들만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인자에 거하는 것은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거하게 해 주신 능력에 의해서입니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랑할 수가 없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것이에요.
자랑을 해도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나를 자랑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은혜라는 동네와 법이라는 두 동네를 만드셨습니다.
동네가 둘이란 말은 자연히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은혜에 속한 자와 법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은혜의 동네에 사는 사람은 은혜로 대하시고, 법이라는 동네에 사는 사람은 법으로 대하십니다.
은혜의 동네에서 법을 말하면 이단이고!
법의 동네에서 은혜를 말하면 이단입니다.
은혜와 법은 성질이 상극(相剋)으로서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본능적으로 밀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둘을 갈라내는 일을 하십니다.
은혜라는 동네에서는 법으로 사는 사람을 골라내고!
법이라는 동네에서는 은혜로 사는 사람을 골라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 자리에 찾아주는 것을 잘라냄과 접붙임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엄위에 거하는 자는 잘라내고, 인자에 거한 자들만 남기는 일을 하세요.
엄위에 거한다는 말은 법으로 산다는 말이고, 인자에 거한다는 말은 은혜로 산다는 말입니다.
법은 죽이는 것이고,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법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 아래로 부르셨어요.
이걸 죄인인 돌 감람나무를 예수라는 참 감람나무에게 접을 붙였다고 합니다.
참 감람나무인 예수에게 접붙임을 당한 사람은 참 감람나무인 예수가 공급해 주는 인자라는 진액을 공급받음으로 은혜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가지가 인자에 거하고 싶다고 해서 거하는 것이 아니고 뿌리가 인자에 거하게 합니다.
가지를 보존하는 것은 뿌리이지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지에게서 맺어지는 것마다 뿌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가지고 나무를 추적해 갑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즉 참 감람나무에 접을 붙인 자는 참 감람나무의 진액인 인자를 뿜어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은혜의 나라입니다.
당연히 천국 백성은 은혜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예수가 은혜입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모두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농부가 되셔서 농사를 짓습니다.
어떤 농사인가 하면 아들 농사입니다.
예수라는 아들을 통해서 아들들을 만드는 농사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속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속성을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의 피를 수혈을 시켜 주세요.
이걸 참 감람나무가 돌 감람나무를 자기 몸에 접을 붙여서 진액을 공급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참 감람나무에게 접붙임을 당한 자들은 참 감람나무의 진액인 은혜를 받아서 은혜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당하여 은혜라는 진액을 공급받아서 사는 것을 일컬어 인자에 거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나라입니다.
그럼 이스라엘 속에는 은혜가 흘러야 합니다.
진정한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한다면 은혜 가운데 거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속에 법에 거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법에 거하는 자들의 특징이 자기 기준의 답을 가지고 있어요.
그 답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답은 자기 행위에서 만들어진 답입니다.
이렇게 산 자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에 율법주의자들로 나타났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대표로 바리새인을 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행함을 근거로 선과 악을 구분했습니다.
쉬운 말로 율법 지킴이라는 행위로 신자와 불신자로 구분했습니다.
자기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는 자는 신자로 인정했고 반면에 자기들과 다르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불신자로 취급을 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은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신자와 불신자는 부르심에 있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는 신자이고 부르심을 입지 않는 자는 불신자입니다.
율법지킴과 상관없습니다.
알다시피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인자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은혜의 나라를 법에 나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림 때 오셔서 보니까 시온이 온통 법으로 다스려지고 있었어요.
은혜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어요.
백성들이 율법이라는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엄위에 거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서 법에 거하는 자들을 솎아내는 일을 단행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엄위에 거하는 자들은 골라내는 일을 하셨어요.
이걸 심판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법 아래서 출생을 합니다.
법으로 행하는 것이란?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행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옳다 그르다를 심판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모두가 심판자가 되었습니다.
각자 자기 법이 있습니다.
그 법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곧 자기가 하나님인 것입니다.
자기 판단 기준이 있어요.
각자 그 판단 기준으로 하나님처럼 심판자로 살아가요.
뱀이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한 것이 틀린 말이 아니에요.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다 하나님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조차도 판단하는 신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이 세상에 자기 법으로 심판하는 가짜 신들을 죽이게 하셨어요.
우리가 곧 가짜 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가짜 하나님을 죽이는 일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이 신과 싸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서 엄위에 거하는 자들과 싸우신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각자가 자기 법을 가지고 신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엄위에 거하는 자들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들을 자행했습니다.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행사한 법이 무엇인가요?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한 법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킨 자는 의롭다 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불의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안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전부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율법을 지킨 자신들만 의인이라고 자긍했어요.
결국 자기들의 행위가 곧 남을 판다는 하는 잣대가 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자기들의 기준으로 예수를 판단했어요.
바리새인의 법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단이에요.
그들의 기준이 못 미쳤어요.
함량 미달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행사한 법에 의하여 이단으로 정죄당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바울도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이 기준으로 스데반을 이단이라 정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성령을 받고 나서 과거 바리새인으로 있었을 때 하던 말과는 정반대의 말을 합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바리새인들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성령을 받고 보니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은혜와 법은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함께 있으면 서로 상함을 입게 되고 불편해요.
왜냐하면! 은혜 안에서는 법은 죄로 들어나고, 법 아래서는 은혜가 죄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소리칩니다.
25절에 형제들아 잘난 척 하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알라고 합니다.
그 지혜가 뭔고 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속에서 법으로 사는 자를 잘라낸 것은 이방인 속에 인자에 속한 자들을 찾아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이 잘못해서 잘라내고 이방인이 잘나서 붙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지고 해 보다가 이스라엘이 실패하니까 그 자리에 이방인을 앉혔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대타(代打)가 아니에요.
애초에 하나님은 이방인 중에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을 두셨어요.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5-18=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니라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이스라엘의 조상이 누구인가요?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자체가 은혜의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율법을 근거로 나오면 안 되어요.
은혜로 나와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율법적 행위를 근거로 나왔어요.
바리새인들은 자칭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내어 놓는 것은 전혀 아브라함 적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은혜를 내어 놓았는데 바리새인들은 법을 내어 놓고 있어요.
이는 스스로 아브라함 후손 아님을 자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 후손이 맞아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아닌 겁니다.
알다시피 하나님 나라는 혈과 육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 나야지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행위를 근거로 나오는 자는 혈과 육에 속한 자들이에요.
이들은 율법적 행위를 믿음이 근거로 제시해요.
이게 불법이고 악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입을 때는 율법이 없었어요.
율법은 아브라함이 죽고 난 후 430년 후에 주어졌어요.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하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어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것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은 것은 은혜로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럼 누가 아브라함 후손인가 하면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율법적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셔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게 그대로 이방인에게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 중에서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부르심 속에는 이방인의 부르심도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을 하는가 하면 아브라함처럼 부르심으로 해요.
은혜로 한단 말입니다.
그럼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자는 아브라함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에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바울이 알았습니다.
아브라함 속에 담겨 있던 믿음으로 주어지는 구원은 장차 예수그리스도에게 나타날 것임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은 그리스도 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자들이 바로 믿음에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역으로 말하면 아브라함도 그리스도를 믿음을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진짜 믿음에 조상은 그리스도에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자들은 자기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나와요.
이들이 바로 진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참 이스라엘을 구원키 위함입니다.
참 이스라엘은 온 세계 민족 속에 흩어져 있어요.
이들은 구원이 율법적 행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어요.
이게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이미 구약 시대 아브라함을 통해서 전했어요.
이삭을 가지고 말해주었어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능력으로 낳은 자가 아니에요.
약속으로 낳았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낳았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네 후손은 이삭과 같이 약속으로 낳은 자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이삭처럼 약속으로 낳아지는 자들이 이방인 속에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이렇게 이삭처럼 약속으로 낳아지는 자들을 구원코자 함입니다.
이들을 일컬어 이방인의 충만한 수(數)라고 합니다.
충만한 수(數)는 이미 정해져 있어요.
창세전에 영생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은혜로 부르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은혜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란?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전부를 말해요.
26-27=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이들은 모두가 죄사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스스로 죄를 없이한 것이 아니라 구원자로부터 죄사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자가 시온에 와서 야곱에 경건치 않은 것들을 돌이키게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를 없이 해 주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창세전에 언약을 하셨어요.
그래서 야곱의 죄를 없애 주는 것을 내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언약이 이것이라” 는 말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구속주가 오셔서 죄를 없애 준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죄를 멀리하면 구원을 해 주겠다는 말이 아니고, 구속주가 와서 너희 죄를 없애 주는 것을 믿는 것이 내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언약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언약 당사자가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언약 당사자는 당연히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구속주로 오게 됩니다.
구속주가 오셔서 언약을 이루어 내시면 우리는 그 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혜택을 입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거저 얻는 것입니다.
이 은혜에 가장 방해거리가 뭔고 하니 자기 꼬라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에 눈이 가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에 눈이 가게 되면 믿어야 할 것은 사라지고 행하여야 할 것만 숙제로 남게 되어요.
그럼 예수 믿는 것이 쉼이 아니고 수고가 되어요.
이러면 자기 행위에 따라서 롤로코스트를 타게 되어요.
어떨 땐 천당에 갔다가 어떨 땐 지옥에 가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보이면 안심이 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안 보이고 자기 꼬라지가 보이면 맨 날 자기 꼬라지를 뜯어 고친다고 볼 일을 다 보아요.
마귀는 자꾸만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한단 말입니다.
이게 선악과 먹은 후의 아담의 모습이에요.
선악과를 먹고 나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서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아무리 견고한 치마를 해 입어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수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아무리 자기 수치를 가린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 서면 다 뜯겨져 나갈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흠 없는 제물을 잡아 그 가죽으로 옷을 해서 수치를 가려주었습니다.
이것은 곧 죄인의 수치는 죄 없는 분의 죽음으로 가려주신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 와서 신앙을 주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주 예수를 믿는 것이지 내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본문 32절을 봅시다.
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하나님 뜻에 순종이 안 되도록 하였다는 말입니다.
이건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두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 이 시대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육적 해석이에요.
자 보세요.
죄가 뭔가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잖아요.
왜? 선악과를 먹은 것이 죄입니까?
이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럼 죄 아래서 태어나는 인간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로서 출생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졌다고 하는 겁니다.
애당초부터 불순종하는 구조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불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죄가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 뜻에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나는 불순종하는 자들이에요.
그럼 불순종 가운데서 태어난 인간들에게 죄가 어떻게 역사 할까요?
순종하라고 하겠지요.
에덴동산에서는 불순종하도록 역사하였지만!
이 세상에서는 순종하도록 역사를 해요.
이걸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몰라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순종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도리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불순종이에요.
순종이 뭔가 하면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했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구약이에요.
구약에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했어요.
율법을 지키라고 했어요.
그런데 죄가 하나님 말씀대로 못 살도록 역사를 했어요.
이게 신약으로 오면 바뀝니다.
신약에서는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 뜻이에요.
그런데 죄가 예수 믿지 말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해요.
구약에서는 하나님 말씀대로 못 살도록 미혹 했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미혹을 해요.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으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죄는 항상 하나님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뜻은 무엇인가요?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마귀가 선악과를 먹게 하였어요.
그럼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 뜻은 뭔가요?
주 예수를 믿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마귀가 말씀대로 살라고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도록 가두어 두셨는데!
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미혹을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데!
마귀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미혹해요.
꼭 청개구리처럼 한단 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어요.
순종이 안 되도록 해 놓았어요.
순종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기 때문입니다.
순종하고 싶어도 안 되어요.
하나님이 왜?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을까요?
이는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용서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왜? 긍휼이고 용서입니까?
그래야 구원이 은혜로 남기 때문입니다.
은혜란? 거저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공로와 상관없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도저히 구원 받을 길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 할 때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는 자기 자랑거리가 없어요.
오로지 구원해 주신 분에 대한 감사만 있어요.
하나님은 이러한 구원을 창세전에 언약을 하셨어요.
에베소서 1장입니다.
엡 1:3-7=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창세전 언약을 보았어요.
너무도 황홀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찬송을 합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창세전 언약이 찬미 할 수밖에 없는 기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고자 작정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이 어디에 있나요?
저주를 머금고 있는 땅에 있습니다.
땅에서 뽑아내야 하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신 겁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들을 낳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낳아진 하나님의 아들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낳아주신 그 그리스도의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이처럼 창세전 언약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찬미(讚美)는 기뻐야 나와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이 기쁨이 되게 하시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가 인자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이 일을 하십니다.
은혜로 남겨진 남은 자들을 찾아내십니다.
교회란? 남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누가 남은 자인가요?
은혜로 남겨진 자들입니다.
은혜로 남겨진 자들에게는 은혜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은혜를 모르고 엄위에 거하는 자들은 골라내십니다.
자기 자랑하는 자들을 솎아 내고 계세요.
이는 교회 안에 오직 그 아들의 은혜의 영광만 찬미하는 자들을 남기시고자 함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우린 긍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들이 삶 속에서 툭툭 터져 나오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인자에 거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원함도 아니고 우리의 열심도 아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 살아가는 삶 속에서 긍휼로 주어진 구원에 더 깊이 감사케 하시고 더 많은 찬미가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the words of tru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김성수 목사) (0) | 2014.02.24 |
---|---|
[스크랩] 서머나 교회에게 편지하기를(II) / 교회의 아픔, 나의 아픔 (김성수 목사) (0) | 2014.02.22 |
[스크랩] 67강.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 당한 자들의 삶 (0) | 2014.02.19 |
[스크랩]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I) / 김성수 목사 (0) | 2014.02.18 |
[스크랩]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김성수 목사) (0) | 2014.02.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