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김성수 목사)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 즉,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 되게 하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재 통일이라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다른 말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아래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는 것이 천지 창조의 목적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며 결국 종말론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는 종말로 이어지는 것이고 그 종말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인 것입니다. .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지 않는 그 슈바이처가 아무리 훌륭한 실천을 하며 살았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바른 교리가 없이 아무리 훌륭한 실천을 하며 산다고 해도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계 2:1-7) “1 "에베소 교회의 천사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말씀하신다. 2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3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내고, 낙심한 적이 없다. 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6 그런데 네게는 잘 하는 일이 있다. 너는 니골라 당이 하는 일을 미워한다.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7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서 먹게 하겠다.”
지난 시간에 일곱 편지는 전체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이며 선지 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바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편지로 읽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곱 편지를 잘 읽어 보셨습니까? 지난주에 나누어 드린 handout은 집에 가셔서 그것을 참고로 성경을 읽으시라고 나누어 드린 것인데 읽어는 보셨나요? 성경을 잘 보시면 일곱 교회는 칭찬도 받지만 꾸중도 듣습니다. 그 꾸중의 내용을 보면 니골라, 발람, 이세벨, 도덕과 윤리적인 교회의 모습 등등 교회가 당면하게 되는 어떤 유혹이나 핍박에 의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궁극적으로 그러한 공격은 누구에 의한 것입니까? 그것은 모두 사탄의 궤계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압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 즉,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 되게 하기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재 통일이라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다른 말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아래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내는 것이 천지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창조의 목적이 어그러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어그러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설명의 편의상 그렇게 표현하는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이 피조물에 의해 어그러진 채로 놔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인간의 역사에 간섭하심으로 그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역사 속에서 완성되어져 가는 것이지 어그러졌다가 다시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라는 것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며 결국 종말론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는 종말로 이어지는 것이고 그 종말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인 것입니다. 거기에 관해서는 요한 계시록 강해가 끝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거기까지만 가자고요. 아무튼 바로 그 하나님의 목적이 완성되는 날이 사탄의 제삿날입니다. 그 날은 사탄이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는 날입니다. 그러면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지 못 하도록 방해를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교회를 미혹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일곱 교회가 공격을 받는 모습은 바로 현재 지상에 있는 교회를 비롯한 전체 교회가 사탄으로부터 어떻게 공격을 받을 것인가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공격에 대해 어떻게 하면 교회가 변질되지 않고 방어해서 이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편지들을 보면서 현재 어떤 교회들이 성경이 경고한 가짜 교회들인지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여기서 주님께서 경고하고 책망하신 모습으로 가는 교회들은 모두 가짜겠지요. 에베소는 로마 속령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고 번창하는 항구도시였습니다. 남자의 인구가 40,000명이 넘었고 전체 인구가 225,000명이나 되는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거기다 에베소는 로마에 대한 충성과 봉사를 인정받아서 자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군이 주둔하지 않았고 가끔 총독이 방문해서 회의를 주재하고 가는 그러한 자유로운 도시였습니다. 에베소에는 카이스터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강에 무역을 위한 항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강이 주변 산들에서 내려온 침적(沈積) 토 때문에 점점 강이 낮아져서, 그럴 때는 항구를 다른 곳으로 옮겨서 다시 도시를 재 정비해야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배경을 갖고 있는 에베소 교회이기에 5절에 있는 에베소 교회에 대한 책망의 부분에 ‘회개치 않으면 내가 속히 임해서 촛대를 옮기리라’ 라는 부분을 읽으면서 섬뜩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촛대가 옮겨지면 그 곳이 얼마나 황폐케 되는지를 항구를 옮기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을 섬기고 있었고 아데미 뿐 아니라 많은 우상들을 섬기던 도시였습니다. 오죽하면 우상을 만들어 팔던 사람들에게 바울이 쫓겨날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아데미 신을 섬기던 자들과 다른 우상을 섬기던 많은 사람들이 광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되면서 우상 판매가 시들해 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베소는 에베소 원주민들과 헬라인들 그리고 다른 헬라계 주민들과 유대인들이 섞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에베소는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기 전까지 목회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던 곳이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에베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서 60마일 떨어져 있는 밧모 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편지를 받는데 처음 편지가 ‘에베소 교회에게 주시는 편지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계 2:2-3)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일단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십니다. 여기서 쓰인 ‘알다’라는 단어는 ‘기노스코’가 아니라‘오이다’입니다. 기노스코는 후천적인 교육과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지식의 진보’를 나타낼 때 쓰는 단어입니다. 반면에 ‘오이다’는 처음부터 완전하고 완벽하게 삶의 모든 사실들을 사진 찍듯이 아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하십니다. 거기서 쓰인 행위는 ‘엘가’입니다. 이것은 복수입니다. ‘행위들을 안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실천에 있어서도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복수의 실천이 있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님이 칭찬하실 행위들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가 행함이 없는 것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욕을 먹습니다. 과거에 학생 운동을 하는 아이들이 공공연히, 행함이 없는 대형교회들(일 년에 수백 억 수천 억 원씩의 예산으로 엉뚱한 짓만 하는)을 다 불태워 버리겠다고 협박을 했었지요? 그렇게 교회들이 행함이 없는 것으로 세상의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그러한 행함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게다가 그 행함은 그저 하는 척하는 행함이 아니라 ‘수고’라고 예수님이 말씀해 주실 정도로 강도가 깊은 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고는 한 두 번 하고 마는 수고가 아닌 지속성이 있는 ‘인내’의 수고였습니다. 어떤 박해와 방해가 와도 참고 견디는 지속적인 수고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그 행위들과 수고와 인내는 인간적인 야망이나 자랑이 아니라 ‘내 이름을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렇게 대단한 실천이 있던 교회였습니다. 성경에서 한 가지만 예로 찾아보고 갈까요?
(행 19:17-19) “17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 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우상을 섬기던 에베소 사람들이 마술과 우상에 대한 책을 은 오만 원어치 지금으로 따지면 천 만 원 가량의 책들을 다 불살라 버렸습니다. 똑 부러지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여러 번 강조했지만 자유주의 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실천은 잘합니다.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 보세요. 슈바이처에게 예수님은 이 땅을 살아갔던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박애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예수님을 닮기 위해 평생을 아프리카에서 원주민들을 치료하다 갔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하지 않는 그 슈바이처가 아무리 훌륭한 실천을 하며 살았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이슬람이나 불교인들이나 여호와의 증인들도 아주 훌륭한 실천을 하면서 삽니다.
어떤 선교사님이 중국에서 기차를 타고 24시간에 걸쳐서 다른 성으로 이동하는데 한 지저분한 아이가 멀미를 하는지 계속 토하고 비실비실 하더랍니다. 그 칸에는 당신 이외에 많은 선교사님들이 타고 있었고 한국에서 온 단기 선교 팀이 함께 있었는데 모두 외면했다는 것이지요. 너무 들 피곤했고 그 아이가 너무 더럽고 냄새가 나서 오히려 저만치 피해 있었답니다. 그런데 머리에 모자를 쓴 한 중국 회교도가 그 아이를 자기 자리에 앉히고 자기는 그 옆에 서서 24시간을 꼬박 간호를 하면서 가더랍니다. 이렇게 회교도들이 기독교인들보다 더 많은 실천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선행을 천국행 기차표 값에 보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천국에 갑니까? 바른 교리가 없이 아무리 훌륭한 실천을 하며 산다고 해도 절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정통 교리마저 가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디모데-아볼로-브리스길라-사도 요한 같은 성경에 나오는 쟁쟁한 인물들이 목회를 한 교회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3차전도 여행 때 삼 년간 머무르면서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5시간씩 2년 동안 기독교 교리 설교를 했던 교회입니다. 매일 다섯 시간이면 오늘 날로 따지면 보통 하루에 7편씩의 설교를 들은 것입니다. 거의 5000편의 설교에 해당하는 교리를 사도 바울로부터 직접 배운 사람들입니다. 일주일에 한편씩 설교를 듣고 가는 Sunday christian들이 꼬박 안 빠지고 100년을 들어야 할 분량입니다. 여러분 그런데도 우리 교회가 성경공부를 많이 한다고 불만이세요? 설교가 길다고 불만이십니까? 에베소 교회는 그렇게 정통교리에 바로 서 있었기 때문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했고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낼 수 있는 실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날 때 이미 경고한 것들이었습니다.
(행 18:29-31)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면서 경고한 것들을 바른 교리에 입각해서 그렇게 성실하게 수행해 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대단한 행함과 바른 교리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너희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처음 사랑이 뭘까요? 단순히 처음에 뜨겁게 불붙었던 것이 식어졌다는 말일까요? 그 처음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에베소서로 가보셔야 합니다.
(엡 1:3-15)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4절까지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무엇인지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 구구 절절이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14절까지의 내용으로 인하여’너희가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처음 사랑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첫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를 바탕으로 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5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계 2:4-5)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바로 그 처음 사랑, 처음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행위이며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40년 후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이 편지를 받아 적을 때는 ‘행위도 여전히 풍성했고 교리도 바르게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형식적인 행위요 형식적인 지식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바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행위로 이단들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부터 디모데, 아볼로, 브리스길라, 요한 같은 자기들의 목회자들을 들어 자기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비록 그러한 외적인 완벽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난 남가주 서머나 교회에 다녀요’‘ 우리 교회는 성경공부를 머리에 쥐나게 시켜요 ’‘우리 교회는 선교에도 열심을 내요’‘ 개척교회가 벌써 다른 개척교회를 두 군데나 지원하고 있어요’ 그러고도 가짜일 수 있다는 것 아세요? 엄청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데 그게 그냥 지식으로 끝나버리는 가짜가 있다는 말입니다. 남들이 존경할 만한 행위들을 하는데 자기의 의를 쌓는 가짜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나오지 않은 것들은 아무리 화려한 모양을 하고 있어도 책망 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아무런 감사나 감격 없이 하나님에 대해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공부를 많이 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 속에 감사는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해 내야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 냈을 때 자랑이 난무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내가 이만큼 해 냈으니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칭찬하셔야 한다‘라고 은연중에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것은 우리에게 허락된 은혜가 내 속에 믿음으로 녹아져서 감사와 감격이 흘러넘치게 되고 너무 감사해서 자연스럽게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에 맞게 살고픈 욕구와 노력이 나오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내 마음속에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있으십니까? 그런 사람들은 절대 자랑치 않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불가능한 죄인이었는지를 깨달아 알고 자신은 저 지옥의 가장 낮은 곳에 떨어져 버릴 존재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 냈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과 형제들에게 자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눅 7:41-47) “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47절을 보세요. 누가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누가 많은 사랑을 할 수 있다고요? 자기가 얼마나 불가능한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는지를 깨달은 자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큰 사함을 받았구나.’ 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만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거듭난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여인은 차마 주님의 얼굴을 쳐다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동네 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받은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창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 분이 자기의 구원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자기의 전 재산이었을 값비싼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랑했을까요?‘동네사람들, 내가 예수님께 네가 제일 아끼는 나의 전 재산인 향유를 부었습니다. 나 잘했지요?’ 그랬을까요?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 뭔 일 좀 한다는 사람들은 전 부 마이크에 대고 ‘동네 사람들, 나 좀 봐줘요’ 그러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정말 거듭난 사람들은 , 은혜가 뭔지 믿음이 뭔지 아는 사람들은 절대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마태복음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들은 하나님 제가 언제 그런 일들을 했습니까? 하고 묻지만 지옥에 떨어질 염소들은 ‘하나님 내가 언제 안 했습니까? 정신 좀 똑바로 차리시고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세요.’ 그럽니다. 둘 다 행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쪽은 기억을 하고 한 쪽은 기억을 못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나온 행위는 자랑이 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의로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억을 못하는데 무슨 자랑을 합니까? 모래 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지은 집 둘 다 집은 짓습니다. 모래 위의 집이 더 화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지은 것이 구원의 근거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교사 노릇했고 목사 노릇했고 이렇게 기적도 일으키고 했는데 나를 모르시다니요?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떠나가라’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여러분 안에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으십니까? 그게 있어야 성도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교회에서 사경회가 있으면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목포에서 평양까지 자기가 그 사경회 기간 동안 먹을 쌀하고 연보하고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걸어서 그 사경회에 참석을 했다고 합니다. 너무 말씀이 듣고 싶어서 천리 길 이천 리 길을 걸어서 며칠 말씀을 듣고, 감격해서 또 걸어서 목포까지 강원도까지 내려갔습니다. 무엇을 자랑하려고 그랬겠습니까? 그 분들이 ‘난 걸어서 사경회 참석했다’ 자랑하고 다녔겠습니까? 이렇게 교회가 많고 말씀이 풍성하다고 하는 오늘날 그런 열심과 처음 사랑은 다 어디 갔습니까? 모여서 기도하자고 하는데 외면합니다. 잠 하나도 못 이깁니다. 그게 감사와 사랑을 아는 자들입니까? 예배에 와 달라고 부탁을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밤 시간에 중독되어 있는 것들부터 이겨보세요. 인터넷, 비디오 보는 것, 술 마시는 것, 잡담하는 것, 게임 그런 것 한 두 시간만 끊어내도 여러분, 넉넉히 기도할 수 있고 성경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진짜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분들입니까? 자기가 할 것들은 하나도 안 하고 매일 교회에 와서 징징 거립니다. 말뿐인 신앙들 , 이제 그런 것 보는 것도 지겹습니다. 그 감사와 은혜에서 떠난, 메마른 행위를 하고, 머리만 커져있는 교회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처방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계 2:5)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 고 하십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라고 하는 것은 그저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말이 아니라 그 헬라어 단어‘므네모뉴오’는 ‘remember‘’기억하라’는 말입니다. 현재 시제입니다. 계속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계속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계속 상고하고 묵상하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방 교만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억하고 계속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도 안 하고 성경도 안 읽고 무슨 배짱으로 신앙생활들 하시는 것입니까?
두 번째로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연이어 ‘행하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둘 다 부정과거 시제입니다.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김 유신 장군이 기생집 출입을 끊겠다고 결심한 후에 말 위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이 김 유신 장군이 평소에 잘 가던 대로 기생집으로 향했습니다. 김 유신 장군이 잠에서 깨어 말을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것은 말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그러한 바른 선택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동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처방은 늘 복음을 기억하고 그 복음에 근거하여 자신의 그릇된 삶을 회개하고 바른 선택에 대한 행함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렇게 돌이켜 회개하고 행하는 자들이 알곡입니다. 가짜들은요? 조금 마음에 찔리기는 하겠지만 계속해서 그 개가 토해놓은 것 속에서 허우적거릴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공과 실패는 차후 문제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거룩에 대한 소원과 행함을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계 17:14) “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거듭난 자들만 이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이기는 쪽으로 끌고 가십니다. 노력하다가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우리에게 옵니다. 그러나 성도는 거듭 실패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고통스러워하고, 번뇌하고, 좌절하다가 또 정진합니다. 그러나 또 연거푸 실패를 합니다. 성도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나는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자라는 은혜의 필연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쑥 성장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더러 이루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루어 낼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실 일도 없었겠지요. 열심히 교육하고 훈련시키면 가능한 일이라면 예수께서 굳이 죽으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거기에 우리의 열심을 동원시키시는 것입니다. 아, 여러분이 이 진리를 잘 깨닫고 계셔야 하는데 정말 더 이상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요한이 쓴 요한 서신으로 가서 조금 더 설명을 해 보지요.
(요일 5:4-5)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믿는 자들, 즉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세상을 이기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 그 구원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의 마음속에 어찌 감사가 없겠으며 그 감사가 있는 자들에게 어찌 행함에 대한 의지가 없겠습니까? 우리는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함께 하시고 지금 우리를 거룩으로 몰고 가고 계시니까요. 여러분이 먼저 확인하셔야 할 것은 ‘내가 매순간 기억해야 할 복음이 내 안에 있는가?’를 확인하세요. 목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다른 교인들에게 존경받기 위해서 여러분이 어떤 종교 행위를 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큰일 난 것입니다. 주님께 매달려 기도 하셔야 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니골라당을 몰아낼 정도로 교리에 밝았습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을 만큼 행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원의 은혜와 감사에 근거하지 않은 그러한 대단한 지식과 행위는 절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없음을 여러분은 아셔야 합니다. 실제로 에베소 교회는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촛대는 옮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계속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믿음에서 나온 처음 사랑을 모르는 자들은 다 가짜다.’ 은혜를 아는 자들이 이기는 자들이고 이기는 자들만이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들만이 화염검으로 막혀있는 생명나무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계 2:7)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막혀버린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우리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지 않으십니까?
(계 22:14) “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맞다 면 여러분은 이미 생명나무의 열매를 드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드시게 될 것입니다. 전 그걸로 만족합니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마흔 아홉에 죽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신하 서복이 불로초를 찾으러 나갔다가 그게 불가능한 것을 알고 아예 중국을 탈출한 것을 기억하십니까? 진시황은 동해에 신선이 산다고 전해 듣고 3000명의 소년 소녀들을 배에 태우고 보물들을 가득 실어서 불로장생 초를 구해 오라 시켰습니다. 그런데 의원 서복은 그게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을 일찍이 안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고 싶었으면 그랬겠습니까? 그가 누렸던 것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래서 오래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리실 것은 진시황이 누렸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늘의 왕 노릇을 하실 분들입니다. 게다가 생명나무의 과실까지 드셔서 영원을 사십니다.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이 어찌 감사하지 않겠으며 어찌 그 신분에 맞는 삶을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은혜와 감사에 근거한 결단과 행위가 함께 나오는 자들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 뒤로 자꾸 숨으시면 안 됩니다. 수요일에 계속 살펴보고 있지만 여러분은 해야 할 의무가 있는 분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의무를 기쁘게 수행해 냅니다.
제가 권해 드렸던 아더핑크의 책을 보시고 여러분들이 너무 방종해 지지 않았는가 걱정입니다. 아더핑크가 너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다보니 구원받은 자들이 살아야 할 삶에 대해 간과하고 넘어간 것입니다. 우리 성도가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더핑크의 ‘하나님의 주권‘만 보고 안심하지 마세요. 아더핑크의 다른 대부분의 책은 인간의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쓰여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세요. 에베소 교회가 행했던 그 처음 사랑이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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