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별과 일곱 촛대
(김성수 목사)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대적을 맞아 싸우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구원을 받은 교회도 역시 그 대적과 싸우는 자들입니다. ‘우리 조금만 참읍시다. 이 전쟁은 이미 이긴 전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초대교회 그 신앙의 선배들만큼 힘들겠습니까? 타협하지 맙시다.’ 진동치 않는 하늘나라를 말씀을 통해 깨달은 자들의 삶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공동체 안에서 하는 일이나 종교행위에서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찾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비적인 체험으로 자신을 만족시켜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 체험이 없으면 예배도 아닌 것 같이 느껴집니다. 눈물이 쏙 빠지게 해 주는 분위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만족하게 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교회 일을 하기도 합니다. 교회 일을 못하게 하면 불안해서 못 견딥니다. 그게 중독이며 집착입니다.)
(계 1:16-20) “16 또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뻗어 나오고, 얼굴은 해가 세차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17 그를 뵐 때에, 내가 그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과 같이 되니, 그가 내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19 그러므로 너는, 네가 본 것과 지금의 일들과 이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20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은 이러하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15절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고 있는 여러 구절들을 보면서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위와 능력과 엄위하심의 상징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분은 영광과 나라와 권세를 회복하신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의 모습으로 우리 교회와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13-15절) “15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다 기억나시죠? 그 예수님께서 오른 손에 일곱별을 들고 계십니다. 20절에 보면 그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 별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별은 이 땅의 교회들의 리더들이라고 주석을 해 놓았습니다. 쉬운 말로 ‘목사들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리더들을 오른 손에 꼭 잡고 계시므로 그들에게는 엄청난 권위가 있다고 해석을 해 놓았습니다. 목사로서는 참 바람직한(?)해석이라 동의하고 싶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20절에 ‘일곱 교회의 사자’라는 구절에서 ‘사자’‘앙겔로스’는 천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함축적으로 ‘목사’라고도 쓰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마 더욱 그 일곱별은 ‘목사’라는 해석이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각 교회의 목사에게 말씀을 하시고 목사가 교회에 그 말씀을 풀어서 전달하는, 우리의 상식에 딱 맞는 해석이지요? 과연 그 해석이 옳은 것일까? 먼저 다니엘서 12장으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단 12:3)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여기서 ‘별’은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입니다. 이 구절만 보면 전도 많이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서를 잘 읽어보시면 그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이는 미가엘입니다.
(단 12:1) “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그 천사 미가엘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별입니다. 그 전쟁이 계시록에도 나옵니다.
(계 12:7)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대적 용과 싸우는 미가엘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서 10장에 보면 인자 같은 이 즉, 예수님께서 다니엘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대적들과 싸우시는데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로 함께 싸우는 자를 또 미가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단 10:20-21) “20 그가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네게 나아온 것을 네가 아느냐 이제 내가 돌아가서 바사군과 싸우려니와 내가 나간 후에는 헬라군이 이를 것이라 21 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적하는 자는 너희 군 미가엘 뿐이니라”
그런데 그 싸움에서 승리해서 나라와 권세를 받는 자는 예수님도 아니고 미가엘도 아니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라 합니다.
(단 7:27) “27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력이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다.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할 것이다.'”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대적을 맞아 싸우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구원을 받은 교회도 역시 그 대적과 싸우는 자들입니다. 그 것을 천사 미가엘이 싸우는 모습으로 성경은 그려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읽었던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별, 일곱 교회의 사자는 바로 이미 승리한 천상의 교회의 대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천상의 교회입니다. 잘 보시면 2장부터 나오는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 서두에 모두 ‘그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를 한다.’ 하고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곱 교회의 수호천사에게, 아니면 일곱 교회의 목사에게 편지를 하신 것입니까? 사자는 천상의 교회의 대표 즉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보면 별들이 하늘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합니다. 당시 초대 교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지금 이렇게 로마의 압제 하에 핍박을 받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하늘에서 승리를 거머쥔 천상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하늘의 전쟁이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로 완성된 것처럼 이 땅의 전쟁도 결국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도우심으로 승리고 결론이 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감격 속에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그 승리의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받은 자들입니다.
(히 12:28) “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이미 진동치 못한 나라를 받아 놓은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땅의 상황과 현실에 수시로 흔들리면 어떡합니까? 분명 우리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확신 속에 기도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미혹하며 무엇이 우리를 흔들겠습니까?
(시 46:10)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너희는 세상이 너희를 흔들려고 할 때 흔들리지 말고 함께 부화뇌동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입니다.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은 자들이 왜 흔들리느냐는 말입니다.
(골 3:1-2)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땅을 바라보지 마시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진동치 못할 그 나라를 바라보시라는 것입니다. 당시 초대 교회 사람들은 이렇게 부분 적으로나마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를 보고 죽음을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완전히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성경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흔들리시면 안 됩니다. RC Sproul이 JI Packer에게 ‘우리 조금만 참읍시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루터만큼 힘들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칼빈만큼 힘들겠습니까? 타협하지 말고 목숨 걸고 그 길을 갑시다.’ 라고 편지를 썼다고 하지요? 칼빈과 루터는 어땠을까요? 아마 그들이 서로 편지를 썼다면 이렇게 썼을 겁니다. ‘우리 조금만 참읍시다. 이 전쟁은 이미 이긴 전쟁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초대교회 그 신앙의 선배들만큼 힘들겠습니까? 걸핏하면 목이 잘리고 걸핏하면 지하 감옥에 갇히고 걸핏하면 온 가족이 도륙을 당하던 그 때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 보다 힘들겠습니까? 그 분들도 잘 참고 이겨내셨습니다. 우리 조금만 참읍시다. 타협하지 맙시다.’ 진동치 않는 하늘나라를 말씀을 통해 깨달은 자들의 삶입니다. 주님은 오른 손으로 일곱 개의 별 즉, 천상의 교회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발로는 지상의 교회 사이에 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산울로 두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실패 할 수 없습니다.
(욥 1:10)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산울 ‘쑤크‘는 울타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 주위에 하늘의 울타리를 쳐 두고 계십니다. 사탄이 말합니다. ’제가 공격해 보겠습니다. 그 울타리를 좀 치워 주세요.‘ 울타리를 치워주시지 않으시면? 범접을 못합니다. 그 분이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뭐가 걱정이세요? 17절을 보세요.
(계 1:17) “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분명 오른 손에 일곱별을 잡고 계신 분이 오른 손으로 어디에 얹으셨습니까? 교회인 요한에게 얹어 놓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꼭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오른 손은 구원과 절대적인 소유와 보호와 권위와 통제를 상징합니다.
(시 138:7) “7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 하시리이다”
(사 41:10)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시 18:35) “35 주께서 또 주의 구원하는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이러한 주의 오른 손이 자기들을 붙들고 있음을 계시록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한 초대 교회 성도들의 안심과 평안과 확신이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있기를 바랍니다. 확인도장 찍고 가지요
(요 10:28)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됐습니까? 그리고 16절 후반부에 보면 예수님의 얼굴이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고 나옵니다.
(계 1:16) “16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이 표현은 사사기에서 인용을 한 구절입니다.
(삿 5:31) “31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
사사기의 한 사사의 사건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사기에서의 이 역사적 사건을 이용하여 당시 교회들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건은 바로 드보라의 이야기입니다. 드보라는 여자 사사입니다. 그 아래에는 바락이라는 쪼다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에훗이 죽자 또 다시 하나님 앞에 범죄를 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가나안 왕 야빈을 동원해서 20년간이나 이스라엘을 괴롭히게 만드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하나님은 드보라와 바락을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드보라를 통해서 바락에게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셨으니 네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바락이 드보라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당신이 안가면 나도 안 간다.’고 애걸을 합니다. 드보라가 같이 가겠다고 약속을 하자 바락은 전쟁에 나갑니다. 사실 드보라의 이야기를 보면 드보라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이스라엘에게 전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전쟁에 이기면 하나님을 찬양만 합니다. 당시 가나안 장군 시스라에게는 철로 된 병거가 900승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한 대도 없었습니다. 상대가 안 되는 전쟁입니다. 사사기의 전쟁은 모두 말도 안 되는 전쟁입니다. 삼갈은 소모는 막대기로 싸워서 이깁니다. 기드온은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로 싸웁니다. 삼손은 나귀 턱뼈로 싸웁니다. 에훗은 왼손잡이로 싸웁니다. 왜 전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전쟁의 모습으로 그려놓으셨는지 아세요? 그 전쟁은 너희의 힘으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드보라가 전쟁이 끝나고 뭐라고 찬양합니까?
(삿 5:20) “20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그 별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천상의 교회, 이 땅에서의 우리의 싸움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전쟁이며 예수께서는 그 전쟁에서 이미 승리하셨고 우리는 그 안에서 승리한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사기의 이런 표현을 가져다가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용기와 확신을 불어넣어 준 것입니다. 너희의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다. 그러나 그 분은 전능자시다. 결코 지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니 안심하라. 그 예수님의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옵니다. 좌우에 날선 검은 말할 것도 없이 말씀입니다. 좌우에 날이 서있다는 것은 그 말씀이 미치는 방향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 범위가 좌우로서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검은 전쟁을 할 때 쓰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쓰인 검 ‘롬파이아’라는 단어는 사람 키 만 한 무시무시한 칼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말씀이지만 죄인들에게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요 12:48-50) “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호 6:5)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사 49:2) “2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3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사 11:4) “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그 심판의 말씀이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세상을 이기는 무기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을 만들어 가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히 4:12)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엡 6:17)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예수님은 그 말씀으로, 그 칼로 교회를 보호하고 계신 것입니다. 정리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 권능의 오른 손으로 여러분을 붙들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 주석 같은 발로 교회를 지키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불꽃같은 눈이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칼날 같은 말씀이 세상을 심판하며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나팔 같은 말씀이 많은 물소리 같은 말씀이 우리를 격려하며 책망하며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그 분은 대제사장으로 우리의 제사를 영 단번에 드리셨고 그 분은 이제 세세토록 왕의 권세를 받으셨으며 그분과 우리는 공동 상속자가 되어 영원히 왕 노릇 할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잘 참고 견디고 이겨 내거라‘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응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조상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못이 박힌 송판 위를 걸어야 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교수대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공산당들의 손에 처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래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기쁘게 그 길을 갔던 것을 잊지 마세요. 그 길을 승리의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처지나 문제를 보시면서 ‘이게 무슨 승리한 자의 삶이냐?’하고 반문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오늘날 사람들이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 무엇을 이루려 하신 것입니까? 예수 안에서 승리한 자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하게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피조물은 그 창조주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하는 데서 진정한 행복이 오기 때문에 우리를 예수 안에서 승리자로 만드셔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뜻을 받들며 그 분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수요 성경 공부에서 아주 자세히 다뤄 드리겠습니다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만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타락을 했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과학문명과 물질문명, 교육, 이념 등의 지식체계와 종교, 사회사업 등의 선행체계로 자신의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이루려 노력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할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을 집착 혹은 중독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행복을 위해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골프를 치기도 합니다. 마약을 하기도 합니다. 도박을 하기도 합니다. 자식에게 미치기도 합니다. 종교에 미치기도 합니다. 심지어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공동체 안에서 하는 일이나 종교행위에서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찾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비적인 체험으로 자신을 만족시켜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 체험이 없으면 예배도 아닌 것 같이 느껴집니다. 눈물이 쏙 빠지게 해 주는 분위기를 원합니다. 자기를 만족하게 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교회 일을 하기도 합니다. 교회 일을 못하게 하면 불안해서 못 견딥니다. 그게 중독이며 집착입니다. 성경은 그 중독과 집착이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에너지를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다 소진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집착과 중독에서 벗어나서 하나님만을 사랑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눅 17:33)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이 말씀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쏟는 집착을 끊지 않으면 너희는 정녕 죽으리라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나 말고 집착하고 있는 것을 다 놓아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자유로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여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자유로운 사랑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이 여러분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셨을 때 ‘하나님, 이러실 수 있어요?’ 하고 원망을 하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바로바로 응답해 주시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자유로운 사랑을 가르치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박국처럼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합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와 같이 그 사랑을 받아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사랑 합니다’라는 고백을 받아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게 승리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 땅에서 승리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 말고 집착하고 있고 중독되어 있는 것에서 하나 둘씩 벗어나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소유에 집착하고 중독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치실 것이고 여러분이 교회 일에 중독되어 있으면 그 종교 행위를 막아버리실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나 자식이 하나님보다 여러분의 안전과 행복을 줄 것이라고 그들에게 집착하고 중독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여러분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집착하고 중독되어 있는 것을 하려고 할 때 여러분에게 그 것을 손쉽게 할 수 있는 돈과 시간과 힘이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아무 때나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살 수 있고 아무 때나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고 아무 때나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 쇼핑할 수 있는 돈과 시간이 있는 것이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저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금방금방 들어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찾고 또 찾고 구해 보면서 그 것들이 절대 하나님 주시는 행복과 만족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입에서‘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라는 찬송이 나오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게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자식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사주시는 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아기 때는 울면 무조건 젖 주고 울면 달래주고 울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엄마의 얼굴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때는 아기가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철이 들고 내가 원하는 것이 들어지지 않고 보고 싶을 때 못 볼 때도 있고 하는 것을 배우면서 진짜 사랑, 자유로운 사랑, 부모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 그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아이는 그 부모에게 집착과 중독을 배울 뿐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총으로 쏴 죽이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부모가 너무 과잉보호 하던 아이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마 10:37)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분명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중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진짜 사랑하는 것은 그들을 향해 집착하고 중독되어 있던 손을 놓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갈 때 아버지가 왜 말리지 않았습니까? 그 아들이 자유로운 사랑을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은 죽도록 고생한 후에 아버지의 품이야말로 내가 거할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곳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집에 있던 장남은 어땠습니까?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 그저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아버지에게 잘 보이려 했던 위선이었습니다. 삼각주 땅 애굽에서 농사도 지을 수 없는 가나안으로 끌고 가시면서 거기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심중을 헤아리셔야 합니다. 광야에서 애굽의 부추와 고기와 마늘에 대한 집착을 끊도록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을 이해하십시오. 그 길이 승리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손에 붙들려 계신 분들입니다. 예수님의 주석 같은 발이 여러분 사이에 굳게 버티고 서 계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집착과 중독을 끊어버리시고 승리자로 만들고야 마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허락된 인생을 여러분 자신만을 즐겁게 하고 여러분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만 쓰시겠습니까? 그냥 그렇게 사시다가 언젠가 죽음이 여러분을 덮치는 날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신 32:35) “35 복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사 33:12-14) “12 뭇 민족은 불에 탄 석회같이 되며, 찍어다가 태우는 가시덤불같이 될 것이다. 13 너희 먼 곳에 있는 자들아, 내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 들어보아라! 너희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깨달아라!" 14 시온에서는 죄인들이 공포에 떨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우리들 가운데 누가 사르는 불을 견디어 내겠는가? 우리들 가운데 누가 꺼지지 않는 불덩이를 견디어 내겠는가?" 하고 말한다.”
(사 66:24) “24 "그들이 나가서 나를 거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다." 그들을 먹는 벌레가 죽지 않으며, 그들을 삼키는 불도 꺼지지 않을 것이니, 모든 사람이 그들을 보고 소름이 끼칠 것이다.”
(겔 22:14) “14 내가 너를 해치우는 날에, 너의 심장이 배겨 나겠느냐? 네 두 손에 계속 힘이 있겠느냐? 나 주가 말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루겠다.”
하나님의 복수의 불이 복수의 검이 속히 임할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한보 철강 회장님 초청으로 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용광로라는 것을 처음 봤습니다. 멀리서 보았는데도 그 열이 얼마나 뜨거운지 모릅니다. 어떤 쇠도 그냥 녹아버리는 무서운 곳입니다. 여러분, 만일 거기에 1분만 들어가 있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공중목욕탕의 뜨거운 물속에 들어가는 것도 큰 맘 먹고 들어가야 하는데 화씨2200도의 용광로 속에 1분만 들어가 있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초만 지나도 나머지 59초가 100년처럼 느껴지실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10분을 들어가 있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아니 10년을 들어가 있으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넌 영원히 거기서 못나와’ 하시면 어떡하시겠어요? 거기가 지옥입니다. 화씨2200도의 용광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진노가 퍼부어진 그 뜨거운 불길 속에 육신을 가지고 고통을 느끼는 신경, 통점이 다 회복된 상태에서 영원히 죽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 고통 속에서 단 하루 휴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노력을 안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소중한 날들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그 고통의 지옥에서 단 1분의 시간을 우리에게 주신다면 여러분은 그 1 분을 가지고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골프를 치시겠습니까? 도박을 하시겠습니까? 마약을 하시겠습니까? 여행을 가시겠습니까? 쇼핑을 하시겠습니까? 거기에 다시 안 가도록 최선을 다하실 것 아닙니까? 왜 그런 진지함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아직 지옥을 모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무리에게 승리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게 안 기쁘십니까? 다른 뭔가가 더 보태져야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요? 분명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도 지옥의 그 타는 고통 속에서 오늘 저의 설교를 기억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회개하시고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지옥에서 건져진 하나님의 백성 여러분,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건져졌을 뿐 아니라 승리자가 되어 그 나라와 권세를 유산으로 받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왕 노릇을 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뭐가 더 필요하십니까?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이 더 보내져야 합니까? 기뻐하십시오. 감격하십시오. 찬양하십시오. 자랑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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