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words of truth

[스크랩] 환난의 밧모 섬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자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2. 14.

 

 

환난의 밧모 섬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바라보는 자

 

(김성수 목사)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면 왜들 그렇게 신기하게 생각하세요? 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들 하십니까? 정말 죽었다가 천국을 보고 내려온 사람이면 자기를 다시 살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증하고 다닐 수 있을까요? 다시 살아난 게 정말 감사할까요? 진정한 영성은 신비적인 체험을 많이 한다거나 현실은 무시하고 영적인 것만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성은 복음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회복된 것을 믿으며 그것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거룩을 향해 발을 내 딛는 것을 진정한 영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현실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계 1:10-16)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 안에서 내 뒤에서 나팔과 같이 울리는 큰 음성을 들었는데, 11 이르시기를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로 보내어라" 하셨습니다. 12 그래서 나는 내게 들려 오는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일곱 금 촛대가 있는데, 13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이'가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14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또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15 발은 화덕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16 또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뻗어 나오고, 얼굴은 해가 세차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본론으로 들어가서 사도 요한이 자신을 소개하는 부분인 9절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서 우리 성도들의 신분을 아울러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형제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분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감격 속에 확인했습니다. 오늘 본문10절을 보시면 사도 요한이 그 계시를 받은 날이 명확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주의 날에 사도 요한은 성령 안에서 무언가를 봅니다. 여기서 주의 날이라고 번역이 된 말은 ‘큐리오케 헤메라’입니다. 원래 구약에서도 ‘주의 날’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암 5:18) “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여호와의 날이 히브리어로 ‘예호바 욤’입니다. 주의 날입니다.

 

(습 1:18)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예호바 욤’ 주의 날에 우주적인 멸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 2:12,17) “1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 자와 거만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사 13:8-10) “9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임하여 땅을 황무케 하며 그 중에서 죄인을 멸하리니 10 하늘의 별들과 별 떨기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취지 아니할 것이로다”

 

(욜 2:31)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이처럼 구약의 주의 날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적들에게 진노하시는 날 즉, 심판의 날입니다.”

 

신약에도 심판의 날인 주의 날에 대한 묘사가 여러 군데 나옵니다.

 

(벧후 3:10)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살전 5:2-3) “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쓰인 단어는 조금 다릅니다. 다른 곳에 쓰인 단어는 ‘주의 날’‘큐리오 헤메라’입니다. 주님을 가리키는 ‘큐리오스’가 소유격으로 쓰여서 주의 날‘큐리오 헤메라’입니다만 오늘 본문 10절에 쓰인 주의 날에는 ‘큐리오케 헤메라’라고 형용사가 쓰였습니다. 이 ‘큐리오케 헤메라’라는 말은 성경 전체에서 여기에 딱 한번 쓰였습니다. 이 ‘큐리오케 헤메라’라는 말은 어떤 특정한 한 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안식 후 첫날인 오늘날의 주일을 이 단어를 써서 표기를 했었습니다. 즉, 계시록 1장10절의 주의 날은 다른 곳에서처럼 심판의 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주의 날, 오늘날의 주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구약에 나오는 주의 날이나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 쓰인 주의 날과 오늘 본문 10절의 주의 날이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퍼부어지는 심판의 날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의 날입니다. 그 일이 언제 이루어졌습니까?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가시적으로 그 일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이미 십자가상에서 모두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 주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세상의 심판을 보는 것입니다. 아울러 구원 받은 자들로서 승리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으신 분들 그래엄 골즈워디의 Gospel in Revelation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사도 요한이 여기서 ‘큐리오케 헤메라’라고 표현을 한 것은 그 날은 역사상에 존재했던 어떤 특정한 한 날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주의 날에 사도 요한이 성령 안에서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습니다. 10절에 나오는 ‘성령에 감동하여’는 ‘엔 프뉴마티’ ‘성령 안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는 밧모 섬이라는 환난의 장소에서, 주일에,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본문 12절 13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보시면서 그 모습을 한번 그려보자고요.

 

(계 1:12-13)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주의 날에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일곱 금 촛대를 봅니다. 일곱 금 촛대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교회라고 했습니다.

 

(계 1:20) “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입니다. 일곱 교회는 일곱이라는 완전수를 써서 전체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 교회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서 계십니다. 인자 같은 이는 어디서 인용한 것이라고 했습니까?

 

(단 7:13-14)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다니엘서의 이 구절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인자 같은 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이 말을 요한이 그대로 가져다 인용한 것입니다. 바로 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예전에 변화 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본 바로 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뒤에 계신데 그 분이 일곱 촛대, 즉 교회 사이에 계신 것을 본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저 하늘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앉으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세세토록 우리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지하셔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교회 사이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부러우세요? 여러분 혹시 사도 요한을 부러워하십니까? 나도 그런 체험 한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시나요? 여러분은 지금 사도 요한과 똑같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계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예배하고 계십니까?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고 계십니다.

 

(요 4:24)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여기에서 ‘신령‘이 ‘엔 프뉴마’와 같은 단어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진정으로 예배를 하고 계신 분들이면 여러분도 지금 사도 요한과 꼭 같이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계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의 날에 성령 안에서 교회와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환난을 당하는 밧모라는 섬의 현실 속에서,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보고 있는 그 현실이 바로 지금 여러분의 현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환상으로 하늘나라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지만 여러분은 지금 말씀으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계신 분들입니다. 사도 요한이 환난의 현실 속에서 성령 안에서 하늘을 체험하듯이 여러분도 이 지긋지긋한, 세상 권세 잡은 자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는 환난의 현실 속에서 성령 안에서 천국을 체험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정말 여기가 천국이세요? 우리가 처한 상황은 요한의 밧모 섬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기서 믿음으로, 말씀으로 천국을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 한 교회가 모인 이곳은 천국입니다.

 

(히 12:22-24) “22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인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여러분은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과 23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집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께 나아왔고,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그가 뿌리신 피 앞에 이르렀습니다.”

 

(계 7:9-12) “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지로다 아멘 하더라”

 

여러분은 믿음으로, 또 말씀으로 이 곳에서 지금 읽으신 말씀 속에 있는 하늘나라를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천상의 삶의 모형을 믿음으로 말씀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줍지 않은 간증 같은 것 듣고 감동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매일매일 천국을 왔다 갔다 하시는 분들입니다. 사도 요한을 부러워하십니까? 천국을 다녀왔다고 사기를 치고 다니는 펄시콜레를 부러워하세요? 여러분, 정말 천국에 가고 싶으세요? 그러면 거기가 어떤 곳인지는 아세요? 천국이 왜 좋으며 얼마나 좋은 곳인지 아세요? 여러분 천국을 기다리신다면서요? 가고 싶다면서요.

 

그럼 한번 가정해 보자고요. 여러분이 지금 천국에 가셨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잠깐 다시 내려갔다 오라고 하세요. 여러분 그 때 어떻게 하시겠어요. 여러분이 정말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아신다면 거기서 이 아래로 다시 내려오시고 싶으시겠습니까? 안 내려오고 싶지요. 어떻게 거기까지 갔는데 또 내려가요?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면 왜들 그렇게 신기하게 생각하세요? 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들 하십니까? 정말 죽었다가 천국을 보고 내려온 사람이면 자기를 다시 살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증하고 다닐 수 있을까요? 다시 살아난 게 정말 감사할까요? 죽었다가 살아난 도르가나 나사로가 정말 기뻐하기만 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친구였고 초대교회의 성실한 성도였습니다. 분명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잠시 더 머물러야 합니다. 그건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지요.

 

여러분, 솔직히 아직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잘 모르시지요? 제가 그 나라를 맛 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게요. 어떻게 그 나라를 맛보며 그 나라를 배울 수 있느냐? 바로 말씀과 교회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으로 천국을 보고 교회 안에서 천국을 실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분의 나라인 천국을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말씀을 통해, 성령의 도우심으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현실 속에서 천국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그 맛을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에베소서를 공부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증으로 와 계시다는 뜻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우리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부분 공부할 때 배웠잖아요. 보증‘알라본’은 나중에 우리가 받을 것의 일부로 주어진 ‘deposit’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현실 속에서 성령 안에서 천국을 미리 맛 볼 수 있습니다.

 

왜 사도 요한이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고 하늘나라를 본 장소와 시간을 밧모 섬, 주의 날 이라고 명확하게 기록해 놓았는지 아십니까? 사도 요한은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때 정신이 나가서 혼수상태로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뚜렷하고 객관적인 현실 안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입신한다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 보면 거의 혼수상태로 하나님 만나고 왔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게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2000년 전 골고다에 실제로 섰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근거로 믿음을 정리하고 있어야 하며 객관적인 현실 속에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영성은 신비적인 체험을 많이 한다거나 현실은 무시하고 영 적인 것만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성은 복음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회복된 것을 믿으며 그것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거룩을 향해 발을 내 딛는 것을 진정한 영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현실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아는 만큼 이 땅에서 그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 안에 여러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천국의 비밀을 조금씩 알려 주십니다.

 

11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로 보내어라’ 하셨습니다. (이 교회의 순서는 편지를 전달하는 우편배달부가 가기 쉬운 순서대로 나열 된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2장3장을 자세히 보시면 각 교회에 하신 말씀 뒤에 하나같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하신 말씀을 들어라’ 하십니다.

 

(계 2:7)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신 자들은 성령을 통해 하늘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으로 탄생되어진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눈을 감고도 천국을 누리실 수 있어야 합니다.

 

(벧전 1:8)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모세가 누렸던 하늘의 영광이 사도 바울이 경험했던 천국의 풍요가,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이 말에서 떨어져서도 한동안 황홀경에 빠져있었던 천국의 전율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경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 나라를 아는 만큼, 믿음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롬 10:17)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이 첫 번째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을 볼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천국의 영광을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내는 만큼 여러분은 그 하늘의 삶을 몸으로 느끼실 수 있습니다.

 

(히 12:14) “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변해서 함께 모여 사는 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천국을 사는 사람들은 모두 거룩한 삶을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의 목적을 ‘거룩’이라고 성경에 명시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거룩한 자로 만들어져 가는 것, 그 것이 교회가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유일한 목표입니다.

 

(엡 1:4-5)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2:10)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천국 백성의 흉내라도 내는 삶을 살아낼 때 그 천국의 삶을 조금이라도 맛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때 그 백성이 그 나라에서 살 때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이 왜 그렇게 하나님 백성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종이에 써 가지고 다니시면서 매일 매일 확인 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조지 휫필드 목사님이 왜 그렇게 설교 때마다 경건의 삶을 강조했는지 아세요? 그렇게 살아야 천국 가기 때문이 아니라 이 땅에서 그 천국의 풍요를 경험하며 천국 백성으로 사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우주는 하나님 성전의 거대한 모형입니다.

 

(사 66:1)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이고 땅이 하나님의 발등상이라는 것은 이 우주 전체가 거대한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늘나라 즉 하나님 성전의 모형으로 만드셨습니다. 성막이 그렇고 성전이 그렇고 노아의 방주가 그렇고 우주가 그렇습니다. 모두 하늘의 모양인 삼중구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에덴은 어떻습니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에덴도 하나님 나라를 원형으로 만들어 놓은 하늘나라의 모형입니다. 그러면 그 에덴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면 그 안에 있는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 나라, 성전의 살아있는 벽돌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을 했고 벽돌이 성전의 보좌에 앉아버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회복된, 제 자리를 찾은 성전 벽돌들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성전은 자체가 빛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성전으로 회복된 자들이 맞다 면 우리 몸에서, 우리의 삶에서 빛이 나야 합니다. 우리는 성전이니까요.

 

(계 21:22-23) “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성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이 빛이십니다. 빛으로 이 땅에 오셨던 그 참 빛이십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해와 달이 필요 없습니다. 그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의 삶에서 그 성전의 빛이 비추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곱 촛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촛대는 성전 안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아 온 세상을 비추는 것이 촛대입니다. 일곱 촛대라는 것은 촛대 하나에 일곱 개의 등잔이 있으니까 전부 49개의 불입니다. 49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희년입니다. 희년이 무엇이지요? 유대인들은 7년마다 한 번씩 땅을 쉬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렇게 일곱 번째가 희년입니다. 그 때에는 땅을 모든 원주인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모든 땅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종들도 다 자유롭게 풀어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안식과 자유의 상징이 희년입니다. 그러한 안식과 자유에 들어간 자들이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 촛대가 빛을 내고 있다는 것은 교회는 반드시 빛이 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망갈 수가 없습니다. 빛이 안 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빛을 내면서 비로소 천국을 맛 볼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서 빛이 나도록 만드십니다.

 

(롬 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뒤가 꽉 막힌 고립이나 핍박(디오그모스, 무언가에 쫓김)이나 기근이나 위험(귐노테스,창피를 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함)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만들어져 가는데 그런 것들이 방해가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그런 일이 성도들의 삶에 있다는 것 아닙니까? 31절로 한번 올라가 보세요.

 

(롬 8:31)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적하는 것들을 박살을 내시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위험과 칼이 있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습니다. 잘 보세요. 여러분, 정말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시는데 여러분 주변에서 여러분이 예수 믿는다고 핍박을 가하는 대적이 많으세요? 정말 견디기 힘들만큼 괴롭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으세요?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교회의 목적인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져 가는데 진짜로 방해가 되는 대적들이 무엇입니까? ‘돈, 출세, 자식, 건강, 가정의 행복’ 그런 것 이루고 지켜 내느라 신앙생활 잘 못 하시잖아요? 그게 여러분의 대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대적을 물리쳐 주시는 거예요. 돈이 여러분의 거룩을 방해하면 하나님께서 돈이라는 대적을 물리쳐 주십니다. 사업이 망하는 거예요. 여러분의 건강이 여러분의 거룩을 막는 다면 하나님께서 그 대적을 물리쳐 주세요. 건강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너무 몰두해서 그것이 여러분의 거룩을 막으면 하나님은 그 대적을 부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에게는 환난이요 곤고요 핍박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대적을 치시는 하나님의 미친 듯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 미친 듯이 사랑하세요. 질투하시면서 까지 사랑하세요. 다른 것 다 끊어버리고 나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세요. 그것이 피조물인 우리가 유일하게 살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후 1:8-9)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오직 우리만을 바라보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맹렬하신 사랑을 아십니까? 그 사랑이 우리의 거룩을 방해하는 것들을 부수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을 내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천국의 삶을 조금씩 조금 씩 알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 있는 사도 요한에게 나팔 같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나팔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울 때 쓰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빛을 잃어 가는 이 시대의 교회에게 나팔을 부시는 것입니다. ‘너는 내 말을 잘 기록해서 일곱 교회에게 보내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환난과 핍박으로 사탄의 공격으로 점점 빛을 잃어 가고 있는 교회에게 하실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오히려 너희의 거룩을 만들어 가는 나의 손길이라는 것을 알라고 나팔을 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빛을 내라는 것입니다. ‘빛을 내기가 힘들거든 스가랴서에서 공부한 것처럼 감람나무에서 끊임없이 공급되는 금 기름, 성령이 너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다시 재확인하고 심지를 북돋워라’ 는 것입니다. 너희의 환난과 곤고와 핍박의 상황은 내가 지금 너희대적을 부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겨라‘ 이게 계시록 전체에서 예수께서 교회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망한 것이 그렇게 아까우세요? 좋은 대학 졸업하고도 변변한 직장 잡지 못하고 빌빌대는 것이 창피하세요? 홀아비로 사는 게 부끄러우십니까? 과부가 된 게 부끄럽기만 하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만 확인이 되셨다면 지금 하나님은 여러분의 대적을 부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부터 확인하세요. 그리고 감사하세요. 미유라 아야꼬 여사는 70평생에 40년을 병상에 누워서 지낸 분입니다. 폐결핵, 대장암, 디스크 그 분이 말년에 뭐라고 고백하셨는지 아세요?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편애하세요? 하나님, 왜 저만 이렇게 특별히 사랑해 주시는 거죠? 이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진짜 그리스도인이 맞는지 매일 매일 확인하시면서 가셔야 합니다. 재작년에 세상을 떠난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오늘날의 교회는 nominal christian으로 꽉 차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명목상의 신자들일 뿐이지 구원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가짜라는 것이죠.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인 존 스토트 목사님도,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존 맥아더 목사님도 자신이 시무 하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시면서 이 중에 진짜는 극소수라는 것을 자주 천명하셨습니다.

 

종의 기원을 쓴 진화론을 완성한 챨스다윈은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생이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했었고 목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신학을 공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칼막스도 베를린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그가 신학교에서 써낸 요한복음 15장에 관한 논문은 지금도 신학생들이 참고하고 있는 논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째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삶으로 결론을 맺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은 정말 자신 있으세요? 난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무엇을 목표로 살고 있는가? 난 진짜 그리스도인이 맞는가? 매일 확인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성전으로서의 빛을 발할 때에만 천국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해결되고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천국을 보는 자들입니다.

 

교회인 여러분, 감람나무에서 금 기름이 계속 흘러 촛대인 , 교회인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빛을 발하게 하고 계십니다. 대적들의 방해를 막아내시면서 빛을 발하게 하고 계십니다. 이제 여러분의 인생을 바라보는 여러분의 인생관을 바꾸세요. 이제 세계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세계관을 바꾸세요. 이제 우주를 바라보는 여러분의 우주관을 바꾸세요. 이 주의 날에 성령 안에서 믿음으로 천국을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거룩한 삶 속에서 천국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해결되고 돈이 많이 벌리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얻는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한 나의 상황과 환경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성령 안에서 누리게 되는 하늘의 풍요와 자유와 안식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그 처절한 상황이 오히려 여러분의 빛을 막는 대적을 하나님께서 부수고 계시는 축복의 순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으셨으면 여러분의 좌절의 자리, 절망의 자리에서 이제 일어나세요. 그리고 주위 분들에게 크게 말해 주세요. ‘왜 하나님이 나만 이렇게 편애하시지?’ 거기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메모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