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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능력에서 능력으로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1. 30.

 

 

능력에서 능력으로

 

(김성수 목사)

 

 

(엡 1:15-23) “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나누어 드린 핸드아웃의 본문 말씀을 펴시고 계속 그 본문을 읽으시면서 공부를 하도록 하세요. 그래서 마지막에 공부가 끝났을 때에는 오늘 읽으신 그 본문의 의미가 명확하게 머리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설교나 성경공부의 목적은 여러분이 성경을 바로 읽으실 수 있게 도와드리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설교를 듣고 혹은 성경공부를 하고 나서 여러분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 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난 후에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셨다는 사실은 여러분이 성경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소유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나 여러 가지 성경 공부 등을 통해 여러분에게 지혜와 총명을 더하셔서 성경의 깊은 보고를 여시는 것입니다. 목사는 거기에 길잡이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시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분으로 만드신 것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며, 그 능력이 오늘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에르게이아, working power)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려내셨고 그 능력이 반드시 이끌고 가시기에 우리는 안전한 것이고, 그 엄청난 힘과 열심히 우리를 저 천국까지 반드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감히 객관적 구원의 확신을 논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오늘은 좀 더 구체적으로 그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살펴보고 에베소서 1장의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바울 신학의 백미를 바로 이 에베소서 1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1장을 그렇게 긴 시간 자세하게 공부를 한 것입니다. 우리가 거의 8개월 간 이 에베소서 1장을 가지고 씨름을 했는데요, 여러분이 그 공부한 내용을 머릿속에 일목요연하게 잘 간직하고 계셔야 합니다. 그러면 에베소서 전체의 이해가 아주 쉬워지고, 더 나아가 성경 전체에 대한 안목이 뚫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시니 것이 무엇인가를 어떤 것으로 예를 들고 있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교회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에베소서 1장은 사실 2장 9절까지 계속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장과 절은 사실 원래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장은 영국의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램튼이 나눈 것이고 절은 1551년경 비전문가인 파리의 인쇄업자 로버트 스테판, 스테파누스에 의해 나누어졌기 때문에, 그것도 말 위에서, 간혹 비도 맞아가며, 나눈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장과 절이 어떤 때는 성경의 이해를 방해 할 때도 있습니다. 이왕이면 죽 연결해서 읽는 버릇을 들이세요. 에베소서 2장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첫 단어가 ‘카이’입니다. 그 ‘카이’라는 말은 ‘또한(also) 그리고(and)의 뜻을 가진 접속사입니다. 그러니까 2장의 서두는 1장 말미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의 예증과 계속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1장 말미와 2장을 연결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한번 연결해서 읽어 볼까요?

 

(엡 1:19-2:9) “19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는데 그 사실이 왜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하는 예가 되는지가 2장 1절부터 설명하는 것입니다. 계속 보세요)

 

(엡 2:1-9) “1 (또한)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너희에게 아무조건도 없었고, 너희가 그 방면에 대해서 아무런 깨우침이 없었을 때에, 즉 아무런 요구도 소원도 없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다. 너희가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힘과 지혜의 열심으로 된 것인지 너희는 아느냐’에 관한 것을 2장까지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교회에게 너희가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얼마나 강력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인지 알고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분께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완전하게 이루어 내실 것을 확신한다는 사도바울 식의 확신을 알게 하고 싶어서 지금 그 능력에 대해서 계속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우리가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40일 금식해서 깊어지는 것도 아니고, 신비적인 체험을 해서 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 분은 얼마나 위대하고 크신 분인지를 아는 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아셔야지요?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이 그 능력의 예증으로 들고 있는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왕 노릇하신다는 구절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공부를 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장의 결론을 맺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어떤 것도 부패와 변질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모든 만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행 2:31-32) “31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살리심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우리 성도들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본보기로 살다가 가셨습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우리가 분명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새로운 몸으로 부활을 할 것이라는 것을 교회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의 증명이나 자랑을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시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해서만 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하라고 하신 말과 하라고 하신 일만 하시다가 가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시고 장사되어진 후에 하나님께서 그 분을 살려내지 않으시면 계속 무덤에 계셔야 하는 그 자리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늘 하나님이 동작의 주체가 되시고 예수님은 동작의 대상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그 분의 부활에 있어서는 수동적이십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마치 예수님께서 부활에 있어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신 것처럼 표현을 합니다. 함께 몇 구절만 보실까요?

 

(요 2:19)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10:17-18)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 부분에 대해서 Gaffin이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요한복음을 비롯한 사복음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와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신데 그 능력을 비우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런 표현들을 쓰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 요한복음 10장 17절 18절을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을 해 드리면 이러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그런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명령‘엔톨레’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건져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내포적 대신의 죽음을 명령하셨고 주님은 교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살아나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살려내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지경으로 떨어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주님도 그렇게 낮은 자리로 떨어지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주님은 살아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는 거지요. 두 번째로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을 살아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살아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왕 노릇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편 110편1절의 말씀인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시 110:1)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으로 자주 표현을 하지요? 그것은 어떤 특별한 장소적 개념의 말이 아닙니다. 존 칼빈의 에베소서 강해를 보면 칼빈은 그 말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가 그의 이름으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실 수 있도록 그리스도에게 주신 권능을 뜻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신 후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최고의 통치 권한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얼마나 높으신가를 본문 21절과 22절에서 설명을 합니다.

 

(엡 1:21-22) “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여기서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는 말씀드렸다시피 천사를 가리킵니다. 어떤 분들은 그 천사들이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악한 천사들을 일컫는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분들은 선한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주장합니다. 존 스토트나 아놀드 같은 분들은 악한 천사들이라고 단정 지어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지금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주님이 악한 천사들을 다스리느냐, 선한 천사들을 다스리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단순히 이 곳, 이 세상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전체에 해당함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 구절의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는 하늘의 지성적 존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천사들까지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럼 왜 그냥 천사라고 써도 될 것을 굳이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라는 표현을 썼을 까요? 바울은 천사의 명칭을 이렇게 높임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확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까지도 주님께서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도는 그 하늘의 존재들이 어떠한 종류의 이름으로 불려 질지라도 그리스도의 위엄에 복종하지 않을 만큼 탁월한 이름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을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의 모든 존재들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라는 개념으로 당시 유대주의의 두 세대 개념을 자신의 교훈에 맞도록 수정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세대 개념은 이 세대가 끝나야 다음 세대가 오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두 세대가 공존하는 시기가 되었다고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상은 아주 중요한 기독교 핵심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미 오는 세대에 속해 있습니다. 다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패역한 세대에 속해 살고 있지만 이 세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표현을 씁니다.

 

(롬 6:12-13)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우리는 이 세대에서 죽음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는 세상은 이미 시작 된 것입니다. 거기에 살 사람들이 벌써 살아났기 때문에 그렇지요. 요한 계시록에서 말씀하시는 첫 번째 부활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자로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세대가 오버랩 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5장에 나오는 일곱 인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유일하신 분, 그 역사의 두루마리의 인을 떼시는 분, 바로 그 분이 오늘도 이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왕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 다스리는 자리에 올려놓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죠. 그래서 너희의 신앙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구절이 빌립보서에 나옵니다.

 

(빌 2:9-10)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만물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그 구절을 잘 보시면 성경은 모든 만물을 주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으신 인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입니다. 그 인성이 지금 하늘에 올라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실 때 인성을 땅에다 다 벗어놓고 가신 것이 아니라 이 천년 전 구유에 오셨고, 열두 살 때 성전에서 성경을 이야기 하셨고, 가구를 수리하러 다니셨고, 배반당하고 매 맞고 죽으신 그 인성을 가지시고 변화된 몸을 입으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입니다.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왕 노릇하실 예수님이 지금 인성을 함께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보좌에 앉아 계시던 그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닌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서 그 하늘 보좌 우편에서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은 우리에게 이처럼 힘을 줍니다. 그의 서신은 실제적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예수님과 함께 변화된 육신의 몸을 가지고 왕 노릇 할 것임을 말씀으로 체감하게 해 주고 계십니다.

 

(히 2:5-8) “5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6 어떤 이가 성경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기억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돌보십니까? 7 주님께서는 그를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셨으나, 영광과 존귀로써 그에게 관을 씌우셨으며, 8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사람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 만물을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예수님께 복종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빌 3:20-21)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신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미루어 짐작 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고린도서로 가보세요.

 

(고전 3:21-23)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상이나 삶이나 죽음이나, 현재의 일이나 장래의 일이나,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만물을 다스릴 사람들인데 나는 베드로 파다,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바울 파다 이런 것으로 다투십니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바로 세 번째로 나와 있지요? 세 번째로 그 엄청난 권세를 가지신 예수께서 바로 우리의 머리가 되셨다는 것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우리와 한 영이 흐르고, 한 피가 흐르는 하나의 유기체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한 몸이라는 것을 에베소서 5장에서는 이렇게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엡 5:25-32)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그 살과 뼈니라) 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여기를 잘 보시면 ‘남편들아 아내를 목숨 걸고 사랑해라, 아내들아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한 후에 너희는 한 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지요? 그리고 그 부부라는 관계에 숨겨진 모든 비밀이 바로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을 해 줍니다. 30절 말씀을 원어로 보면 우리 말 성경에는 빠져있는 ‘사륵스’ ‘살’과 ‘오스테온’‘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우리는 그 몸의 지체이며 살과 뼈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함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 지니라’입니다. 그 똑같은 말을 어디서 보셨습니까? 바로 창세기 2장23절과 24절에 있는 아담이 하와에게 한 말에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을 정확하게 이곳에서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주실 때 돕는 배필로 주십니다.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말 ‘에제르’는 단순히 조력자, helper의뜻이 아닙니다. 그 정확한 뜻은 ‘하와가 없으면 아담은 완전하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면 불구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부부관계로 설명이 됩니다. 그 말은 예수님은 교회가 없이는 완전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입니다. 본문 23절을 보시면 그 말이 이렇게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엡 1:23)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사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립니다. 그 한 가지는, 교회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충만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충만함의 근거를 교회로 갖고 계신 것입니다. 교회가 없이는 충만하지 않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그 분의 충만으로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아버지를 떠나 인간과 한 몸이 되신 신랑 예수님이십니다. 이렇게 해석을 하시는 분들이 칼빈이나 핸드릭슨, 그리고 하지 같은 신학자들입니다. 그 ‘충만’ ‘플레로마’라는 단어를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이 부분을 다른 면에서 보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존 스토트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분들은 이 ‘충만’‘플레로마’를 수동적 의미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를 충만하게 채우시는 것을 이 구절을 해석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른 23절의 해석은 이러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으로부터 채워진 충만함이 교회이다’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제 생각은 이러합니다. ‘충만’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능동적 의미로 해석을 하나, 수동적인 의미로 해석을 하나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너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몸인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고 완성된 신부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없이 혼자서는 충만하지 않기로 하신 그 분이 그 집념 속에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를 충만하게 채우시는 방편으로 우리를 거룩의 자리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 보좌 우편에 앉히시고 이 세대와 오는 세대, 모든 세대의 만물 위에 뛰어나게 하신 그 분의 그 능력이 지금 우리 안에 동일하게 ‘에네르게이아’ 역사하면서 우리에게 거룩의 자리고 가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충만이 채워지는 것이고, 그 자체가 우리의 충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충만’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어떠한 모양으로 해석을 해도 결론은 하나로 맺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도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딸입니다. 우리는 오는 세대 사람이지, 썩어질 세대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 뿐 아니라 오는 세대의 왕 노릇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하고 완성된 신부로 살아가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혼인 관습이 어떠하다는 것은 누차 설명해 드렸지요?

 

정혼한 신부가 혼인 잔치 날까지 자기 몸을 정갈하게 보존하지 못하면 그 신부는 언제든 파혼을 당할 수 있다고 했지요? 그렇다고 구원받은 사람이 중도에 버려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신부로 택한 자들은 반드시 정결한 신부의 자리로 이끌고 가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러한 분투가 나오지 않으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라는 말입니다.

 

(계 19:7-8) “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12)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보시다 시피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행위를 전가 받아 당당하게 주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의 행위를 의지해서 구원을 얻은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삶을 닮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성도의 삶에 이렇게 거룩한 삶이 명령으로 하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여겨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권고와 충고와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는 말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그 옳은 행실이 나오고 있는가를 늘 점검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성도의 삶 속에서 나와야 하는 옳은 행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엡 4:25-32)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32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로 한 번 가볼까요?

 

(골 3:5-10) “5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6 이런 것들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7 여러분도 전에 그런 것에 빠져서 살 때에는, 그렇게 행동하였습니다. 8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그 모든 것, 곧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훼방과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말을 버리십시오. 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10 새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바로 우리가 마땅히 살아내야 할 내용들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 신자에게 요구된 삶을 살아내실 것입니까? 사 십을 금식 기도 한 번 할까요? 그러면 살아질까요? 어떤 사람들처럼 천 일 새벽기도하면 살아지나요? ‘거룩하게 살아야지’ 하고 생각만 하면 살아집니까? ‘거룩하게 살게 해 주옵소서’하면 살아져요? 아닙니다. 먼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을 충분하게 배우세요. 그리고 느끼십시오. 그리고 그 감사와 감격을 바탕으로 여러분의 손과 발을 이제 움직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의지의 발동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물론 복음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움직이세요.

 

(갈 6:7-10) 7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8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9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10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우리는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아니, 바꾸어 말하면 진짜 신자들은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결실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봄에 씨를 뿌려야 하고 비가 부족하면 부지런히 물을 대어야 하고, 가을이 되면 낫을 들고 나가서 열매를 따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열매도 하나님께서 주시고 모든 상황, 조건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만 우리의 팔과 다리를 움직여 그 열매를 얻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앉아서 기도만 하면 저절로 추수가 되고, 저절로 씨가 뿌려지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우리 몸의 각 지체는 머리에 있는 중추에서 오는 명령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몸의 각 지체는 근육을 가지고 있고 그 근육을 움직여서 그 중추 신경을 통해 하달되는 명령을 수행합니다. 모든 근육마다 함과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근육이 연마가 되어 있지 않고,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뇌에서 명령이 내려와도 근육이 일을 수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뇌에서 200 파운드를 들어라 하고 명령이 떨어졌는데 실제 내 근육은 50 파운드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상태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아무리 머리가 시켜도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일을 하십니다. 분명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거룩한 삶을 이끌어 내시지만 우리의 근육과 신경을 단련시키시고 연마시키셔서 우리에게 들게 하십니다. 절대 기적적으로 수퍼맨 같은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과 환난을 통과하면서 근육을 훈련하는 것이고, 말씀 공부를 통해 힘을 키우는 것입니다.

 

힘은 신경조직을 통해 두뇌로부터 근육으로 전달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힘이 두뇌에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근육이 없으면 그 힘은 힘으로 발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두뇌는 발달된 근육을 통해서 일을 하는 것이니까요. 워치만 니처럼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야, 그러니까 우리는 섣불리 나서지 말고 가만히 하나님이 해주실 때를 기다려야 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신앙입니다.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실수해도 괜찮아요. 아니, 우리는 당연히 실패하고 실수 할 것입니다. 그래도 뻔뻔스럽게 또 일어나서 해보는 게 성도의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신 7:1-5) “1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으로 너희를 이끌어 들이시고, 너희 앞에서 여러 민족 곧, 너희보다 강하고 수가 많은 일곱 민족인 헷 족과 기르가스 족과 아모리 족과 가나안 족과 브리스 족과 히위 족과 여부스 족을 다 쫓아내실 것이다. 2 주 너희의 하나님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주셔서, 너희가 그들을 치게 하실 것이니, 그 때에 너희는 그들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과 어떤 언약도 세우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아라. 3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어서도 안 된다. 너희 딸을 그들의 아들과 결혼시키지 말고, 너희 아들을 그들의 딸과 결혼시키지도 말아라. 4 그렇게 했다가는 그들의 꾐에 빠져서, 너희의 아들이 주를 떠나 그들의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께서 진노하셔서, 곧바로 너희를 멸하실 것이다. 5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에게 이렇게 하여야 한다.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석상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고 우상들을 불살라라.”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너희는 이제 그들의 삶의 원리와 단절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괜히 사람들을 다 죽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하신 것은 그만큼 성도의 거룩이 완벽하게 요구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모두 몰아내라고 명령하신 것은 ‘이제 너희는 죄악 된 세상과 타협해서 살지 마라, 죄를 짓는 사람으로 살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내 족속이요, 나의 백성이요, 나의 거룩한 나라 시민인고로 그 나라 시민답게 살아야 하며 그들과 멍에를 나누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인 것입니다. 신약 식으로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말과 행동은 다 벗어버리고 악은 모양이라도 취하지 말하고 하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궁극적으로 들어가야 할 영적 가나안인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렇게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치러내야 할 전쟁이 있는 것입니다.

 

(신 7:6-11) “6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당신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이다. 7 주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너희가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이다. 8 그런데도 주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너희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을 지키시려고, 강한 손으로 너희를 이집트 왕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어 주신 것이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천 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약을 지키시며, 또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10 그러나 주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당장에 벌을 내려서 그를 멸하신다. 주께서는 당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징벌을 늦추지 아니하신다. 11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야 한다."

 

너희가 뭐가 잘나서 건져 낸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건짐을 받은 자들이니 이제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건져내시고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시는 것은 ‘이제 너희는 거룩한 자들이니 거룩하게 살라’는 의미에서 주시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너희는 이 십계명을 다 지킨 자가 되었으니 그 계명을 대신 지켜서 너희에게 전가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라‘는 교회를 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십계명 사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은 가나안을 모두 진멸하는 것이었음에도 이스라엘은 대적을 모두 진멸하지 않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 아낙 사람들을 조금 남겼지요? 그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사의 블레셋이 삼손을 죽였습니다. 가드의 블레셋에서 골리앗이 나왔습니다. 아스돗의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남겨놓은 작은 죄의 불씨들이 언젠가는 누룩처럼 우리의 죄를 부풀게 해서 우리를 먹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우리의 작은 약점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넘어뜨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리던 옛 것에 자꾸 미련을 갖게 되면 여러분은 롯의 아내처럼 될지도 모릅니다. 롯의 아내는 의인인 롯과 한 식구였고, 아브라함의 신앙을 곁에서 지켜보던 사람이었고, 남편에게 천사들이 와서 빨리 소돔을 떠나라고 자비로운 경고를 할 때도 곁에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그들이 미적거리자 천사들이 손을 잡고 함께 뛰어 주었을 때 그 천사의 손에 이끌려 소돔을 빠져 나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향해 달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구원의 장소인 소알에 거의 다 와서 그녀의 그 모든 것이 진짜 믿음이 아니었음이 폭로됩니다. 성경이 ‘롯이 소알에 다다르자 해가 돋았다’고 하지요? 그녀는 달리면서 태양이 여느 때처럼 뜨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진짜 소돔이 멸망할까?’라는 의심을 하게 되었고, 자기가 두고 온 소돔에서의 달콤한 쾌락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녀는 이내 천사들의 경고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옛 것들,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거기까지 천사들의 손을 잡고 달려온 것은 일순간에 허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엄청난 영적 체험을 하고, 성경을 많이 배우고, 실제로 종교 행위도 열심히 하고, 훌륭한 신앙인 가족을 두었고, 예수를 믿은 지가 오래 되었고, 모태 신앙이고, 벌써 소돔을 떠나 많이 달린 사람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다시 확인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소돔을 버리려는, 소돔을 잊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면, 자꾸 거기로 돌아가고 싶다면 혹시 우리는 롯의 아내와 같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롯은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지 말라면 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여느 때처럼 아무 일 없을 거라는 듯이 해가 뜨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마지막 때는 반드시, 속히 온다는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안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살 길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만이 우리가 살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옛 습관들을 절제하고 있지 못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사명이 있지 않습니까? 무슨 사명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통해 아직 주님께 돌아오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완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쓰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겔 5:5-9) “5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예루살렘이다. 내가 그 성읍을 이방 사람들 한가운데 두고,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다. 6 그런데도 그 성읍은 다른 민족들보다 더 악하여 내 규례를 거스르고, 둘러 있는 이방 사람들보다 더 내 율례를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내 규례를 거역하고, 내 율례를 지키지 않았다. 7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 사람들보다 더 거스르는 사람이 되어서, 내 율례를 따르지도 않고, 내 규례를 지키지도 않고, 심지어는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 사람들이 지키는 규례를 따라 살지도 않았다. 8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친히 너희를 대적하겠다. 그리고 뭇 이방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벌을 내리겠다. 9 너희의 온갖 역겨운 일들 때문에,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는 없을 그런 일을, 내가 너희 가운데서 일으키겠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주님께 돌아오게 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하나님의 능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왜 에스겔에 나오는 새로운 성전에는 법궤가 없는 줄 아십니까? 그 법궤가 이제 참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성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은 법궤 안에 있지 않고 우리 교회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벌써 받아먹었다고요. 그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는데 왜 ‘난 안될 거야’라고 자포자기(自暴自棄) 하십니까?

 

(시 119:9) “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보세요. 말씀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실을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이미 우리 속에 침투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작고하신 필라델피아의 제 십 장로교회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열심을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을 내다가 그 열심 때문에 순교를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순교를 당한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언가 양보할 수 없는 목표가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주님을 따르다가 순교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순교의 정신으로 이 땅에서 우리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 모든 성도를 ‘순교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롬 8:17)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과 공동 상속자들입니다. 그럼 그 신분에 맞게 좀 살아 보자고요.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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