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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애나캐팔라이오’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1. 29.

 

 

‘애나캐팔라이오’

 

(김성수 목사)

 

 

(엡 1:7-10)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은 10절의 말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중점적으로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최종적 목적을 7절로 제한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저 우리 개인의 구원, 그것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은 그보다 더 큰 것입니다. 물론 우리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10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포괄적이고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그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때가 찼다’는 말과 ‘경륜’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10절의 말씀의 풀이가 용이합니다. 먼저 경륜(經綸)이라는 말을 영어 성경으로 보면 ‘dispensation’ 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신의 섭리, 신의 계획, 결정, 신이 정해 놓은 세대’ 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단어 같지 않으세요? ‘dispensationalism’ 우리가 익히 들어 온 세대주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대주의가 뭡니까? 세대주의란 인간의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그 세대마다 다르게 나타났다는 주장을 말합니다. 여기서 유명한 사람이 스코필드 주석을 쓴 스코필드 박사입니다. 제가 요한 계시록 강해 때 그 세대주의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 테니까 여기서는 간단하게만 짚고 가자고요.

 

그러니까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께서 여러 번 구원과 역사를 간섭하시는 방법을 바꿔 오셨다는 주장입니다. 한번 썼던 방법이 조금 미비하면 또 다른 방법으로, 그게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으로 이렇게 인류의 역사와 구원을 간섭하시는 방법을 바꿔 오셨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실패와 실수투성이인 하나님께 정말 영원한 생명을 맡기시겠습니까? 그들의 주장은 참으로 얼토당토한 주장입니다. 아무튼 그 dispensation 이란 말 ‘경륜’이라는 말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지혜를 동원하시고 섭리해 나가시는 능력까지도 포함한 것을 통틀어 ‘경륜(經綸)’ 이라합니다. 에베소서 3장에 가면 경륜이라는 말이 이렇게도 나옵니다.

 

(엡 3:2)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If ye have heard of the dispensation of the grace of God which is given me to you-ward :

 

똑같은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그 dispensation이 ‘직분’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곳을 보지요.

 

(엡 3:9)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도 ‘오이코노모스’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오이코노모스가 권위를 가진 이가 계획을 가지고 그 계획을 시행하는 힘도 있고 그것을 결론까지 이루고야마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9장17절에도 오이코노모스가 나옵니다.

 

(고전 9:17) “17 내가 자진해서 이 일을 하면 삯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마지못해서 하면, 직무를 따라 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오이코노모스가 직분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오이코노모스’ ‘dispensation’ ‘경륜’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오늘 본문 10절의 말씀이나 3장9절의 말씀처럼 권위를 가진 이가 계획을 가지고 그 계획을 시행하는 힘도 있고 그것을 결론까지 이루고야마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을 경륜이라 쓰고, 에베소서 3장2절이나 고린도전서9장17절처럼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데 있어서 그 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맡겨진 직분을 가리켜서도 ‘경륜’ ‘오이코노모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러니까 경륜은 하나님께서 원대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계획을 세우시고 능력과 포부와 지혜를 동원하셔서 시행해 나가시고 완성하시는 것 모두를 포함해 ‘경륜’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렵지 않지요? 그러면 ‘때가 찼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때가 찬 경륜’ ‘that in the dispensation of the fullness of times' 라고 나와 있지요? 얼추 추측이 가능하지요? 갈라디아서로 가서 그 의미를 좀 더 자세하게 밝혀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같은 말이 있습니다.

 

(갈 4:4)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잘 보시면 때가 찼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이 그 분기점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이 실행에 옮겨질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이 완성이 되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이 되게 되는 그 때를 말합니다. 성경은 때가 찬 그 때를 ‘말세’ ‘마지막 때’ ‘세상 끝’ 등으로 표현을 합니다.

 

(벧전 1:20)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여기서 말세라고 번역이 된 ‘에스카토스’는 ‘마지막 의’ ‘종말의’ 라는 뜻이 있습니다.

 

(히 9:26)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고 하지요? 거기서 쓰인 ‘쉰텔레이야’는 ‘completion, consummation, 완전한 끝’을 뜻합니다.

 

(고전 10:11) “11 이런 일들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은 본보기가 되게 하려는 것이며, 그것들이 기록된 것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고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세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텔로스‘입니다. 텔로스는 ’한계로서의 도달점‘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구절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히 1:1-2)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오신 시점을 모든 날 마지막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시 ‘에스카토스’ ‘마지막, 종말에’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오신 그 때부터 성경은 줄곧 ‘말세’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때가 찼다, 말세다, 마지막 때다’ 하는 단어들 속에는 완전한 끝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이렇게 역사는 진행되어져 가고 있는데 완전한 끝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오신 그 시점이 세상의 완전한 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끝은 오늘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의 모든 역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지금 완전히 끝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성경에서의 ‘마지막’이라는 말은 더 이상 그 뒤에 올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성경에서 마지막이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고 그것은 영적으로 완성이 되었으며 그것은 곧 ‘영원’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지막’이라는 말과 ‘새 것’이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의 단어입니다.

 

새것도 더 이상의 새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 하면 그 보다 더 새 것은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것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마지막’ ‘새것’ ‘영원’ 모두 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때가 찼다’ ‘말세다’ ‘마지막 때다’ 하는 단어들 속에는 완전한 끝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때가 차매’ 라는 것은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스런 계획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시기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실행에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었기에 이제 인류 최후의 마지막 날에 행해질 최후의 심판도 그 때 다 판가름 나 버렸기에, 좀 더 쉽게 표현을 하면 최후의 심판이 역사 속에 미리 뚫고 들어와 버렸기에 그 때를 말세라 하는 것이고 그 이후의 역사는 모두 말세의 기간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전지전능하신 분의 계획이 때가 되어 실행에 옮겨졌다는 것은 완성을 의미하므로 우리는 그것이 이루어졌다고 표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때가 찬 경륜’의 의미를 아시겠어요? 그런데 그러한 때가 찬 경륜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사도는 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엡 1:9-10)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의 대답은 언제나 그리스도입니다. 그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있기에 사도는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와 계획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계획의 본질에 대해서 숙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가 오늘의 본론입니다. 먼저 우리말 개역 성경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한다’ 는 말 앞에 번역에서 빠진 단어가 있습니다. ‘통일되게 하다’라는 말의 ‘애나케팔라이오’에는 ‘다시’라는 뜻을 가진 접두어 ana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번역하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가 맞습니다. 단순히 통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총합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다시’ 총합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라는 말입니다. ‘애나케팔라이오’는 ‘통일시키다. 거느리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10절은 이렇게도 번역이 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거느려 지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데 그 목표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all things, 만물이 포함됩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which are in heaven)땅에 있는 것들(which are on earth) 즉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부터 시작되어 영적으로는 완성이 되어 있지만 가시적인 결과를 향해서 오늘도 진행되어 나가고 있으며, 그 계획, 목적은 ‘모든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 재통일시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잘 들으세요. 그러면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구절 때문에 보편 구원론이 탄력을 받았었습니다. 첫 번째로 이 구절을 근거로 혹자는 하나님은 all things, 모든 만물을 재통일하실 것이므로 결국 누구나 다 구원을 받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악한 천사들, 악한 사람들, 누구나 다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두 번째로 어떤 이들은 이 구절에서의 ‘하늘에 있는 것’은 유대인을 말하고, ‘땅에 있는 것들’은 이방인을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 이지적인 존재는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역시 모양은 다르지만 보편 구원론입니다. 세 번째로 어떤 이들은 ‘하늘에 있는 것은 구원받고 죽은 그리스도인’이라 하고, ‘땅에 있는 것들은 재림 시에 아직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의 typical한 보편 구원론에 대해서는 주일 설교에서 자세히 다루어 보았으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견해에 대해서는 같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렇게 갈라서 보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그 두 번째 견해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골 3:10-11) “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렇지요? 구원에 있어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늘에 있는 것은 구원받고 죽은 자들이고, 땅에 있는 것들은 구원받았으나 재림 시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라는 주장도 골로새서 1장의 이와 비슷한 구절을 보면 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골 1:20)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즉 하늘에 있는 것들은 원래의 창조 상태를 지키고 있던‘선한 천사’들도 내포하고 있으며, 땅에 있는 것들이라는 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뿐만 아니라 피조 세계 자체, 땅과 동물과 짐승들을 내포한 모든 피조 세계를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 된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악한 천사와 인간이 타락하기 전입니다. 골로새서로 가보세요.

 

(골 1:15-18)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7절의 ‘섰느니라’는 말은 ‘쉬니스 타오’ ‘응집하다, 결합 시키다’라는 말입니다. 첫 창조 때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응집하고 결합되어 질서가 잡혀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주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주의 큰 특성이 뭡니까? 바로 결합과 응집력 아닙니까?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가 응집되어 있고,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 원자가 결합하여 물질을 구성합니다. 그 모든 것을 응집시키고, 결합시키는 게 누구입니까? 어떻게 그 거대한 우주의 항성과 행성, 위성들이 그렇게 응집이 되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까? 어떻게 원자나 분자들이 응집하고 결합하여 물질을 이룹니까? 어떠한 힘에 의해 그렇게 질서 속에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힘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성경 참 놀랍습니다. 그렇지요? 따라서 예수께서 우주를 붙들고 계신 손을 놓는 순간 우주는 멸망당할 것입니다. 바로 예수 안에서의 그러한 결합, 통일, 응집, 질서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2장으로 가보세요. 거기에는 천사들까지도 그 질서 속에 붙들려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골 2:10)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이 구절의 ‘모든 정사와 권세’(principality and power)는 언제나 성경에서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정사와 권세는 천사의 위계(位階)의 하나입니다. 즉, 천사를 포함한 하늘에 있는 모든 것, 땅에 있는 모든 것,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이 모두 예수 안에서 창조되었고 예수 안에서 통일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타락했고, 그 타락한 천사는 인간을 타락시켰고, 그 때부터 그 질서가 무질서가 되고 혼돈(混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영원히 타락하지 않을 새로운 질서로 잡아가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그것을 우리는 재창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최종 목표지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애나케팔라이오’ ‘다시 통일 시키신다’는 단어가 등장한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창세기의 창조가 무엇을 상징하고 있다고 했습니까? 새 가족 성경 공부 때 며칠에 걸쳐서 설명해 드리는 내용 있지요? 창세기의 창조는 혼돈을 그리고 무질서를 질서로 잡으시고, 공허를 충만으로 채우시는 것, 즉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루실 재창조를 미리 힌트하고 계신 것이라고 했지요?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셔서 어둠과 광명을 나누시고 둘째 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어서 정리를 하시지요? 그리고 셋째날 물과 뭍이 갈라짐으로 피조물들이 거할 지구에 틀이 잡힙니다. 그리고 넷째 날부터 그 정리된 틀에다 차곡차곡 풍성하게 채우시는 것이 바로 첫 창조 안에 들어 있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창조가 끝난 후에 심히 좋아하셨습니다. 그리고 일곱 째날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자 그 첫 창조와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자취를 비교해 볼까요? 첫째 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성경은 그 예수님을 빛이라 표현합니다. 창세기의 첫째 날과 맞아 떨어지지요? 주님은 둘째 날(성경에는 ‘그 이튿날’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십니다. 여러분 고린도 전서 10장에 보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넌 사건을 ‘세례’라고 표현 합니다. 홍해를 어떻게 건넜지요? 홍해가 양쪽으로 갈라졌습니다. 창세기의 둘째 날과 비교해 보세요.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셋째 날 그의 제자들과 밤을 보내십니다. 하늘의 것과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을 우리는 천국이라 합니다. 창세기의 셋째날 물과 뭍이 갈린 것은 이제 마지막 날에는 물이 물러가고 뭍이 남게 될 것임을 담고 있는 예언적 사건이라는 것을 설명해 드렸었지요? 그래서 요한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바다도 다시 있지 않다’라는 상징적 묘사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할 죄인들이 하늘의 왕과 함께 거하게 되는 천국, 즉 창세기의 셋째 날이 담고 있는 역사의 궁극적 종착점이 예수님의 셋째 날 사역에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는 넷째 날부터 주님은 제자들을 모으십니다. 그 것은 창세기의 넷째 날부터 하나님께서 셋째 날 까지 준비하신 틀에다가 내용물을 채우시는 것으로 미리 창세기에서 보여 진 것입니다. 그렇게 여섯 째날 까지 12명의 제자가 다 차게 됩니다. 창세기의 천지 창조가 완성된 여섯째 날을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주님은 일곱째 날에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 잔치를 잔치답게 만드십니다. 바로 영원한 하늘나라가 완성되어 어린양 예수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혼인잔치를 하게 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그곳에서 예표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것을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안식’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일치하지요?

 

출애굽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양이 대신 죽고, 죽어야 할 자들이 살아나는 유월절에서 출애굽은 시작 됩니다. 바로 빛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홍해를 건넙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창세기의 둘째 날이 오버랩 되지요? 그들은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넙니다. 물이 물러가고 뭍이 드러나는 천국으로의 입성을 예표하기 위해 성경이 굳이 마른 땅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의 물,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시며 마침내 가나안에 넣으십니다.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막의 입구에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물이 죽어 태워지는 번제 단이 있습니다. 그 번제 단을 지나면 커다란 물두멍위의 물을 거쳐야 성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물두멍은 두들겨 펴서 만든다고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똑같은 단어가 하나님께서 하늘을, 궁창을 펴신다는 곳에 함께 쓰입니다. 물두멍은 다름 아닌 궁창, 즉 하늘 위의 물, 창세기의 둘째 날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궁창 위의 물을 상징하는 물두멍에서 깨끗이 씻지 않으면 성소의 하나님을 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물두멍을 박살 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물두멍에서의 정결의식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된 것입니다. 그 물두멍을 지나게 되면 성소가 나오고 그 성소를 지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있는 지성소가 나옵니다. 성소에는 불기둥, 구름기둥, 만나가 있습니다. 광야의 불기둥과 구름기둥과 만나가 생각나시지요? 맞습니다. 그리고 지성소에는 인간의 실수를 품어 안은 법궤가 놓여 있습니다. 법궤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십계명 돌판, 만나 항아리입니다. 그게 다 뭡니까? 인간의 죄와 실패와 실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의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법궤가 감싸 안고 있습니다. 그 위에 제물의 피가 흘러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것은 인간의 죄를 품어 안은 예수가 대신 죽어 피가 흘러넘쳐야 죄인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필연성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곳을 ‘mercy seat’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들의 죄가 사해지고 새롭게 ‘죄 없는 인간’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재창조, 재통일, 새 창조를 성경은 일관성 있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의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잘 아시겠지요? 성경에는 오직 복음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삶의 문제 해결방법이나 부자 되는 방법, 병 낫는 방법 같은 것 찾아다니지 마세요. 그런 내용은 단 한 줄도 없습니다. 무질서의 상태, 죄의 상태,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질서를 깨뜨려 버린 것이 바로 죄 아닙니까? 남자는 여자를 대표하며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에게 선악과를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 밑에 뱀을 포함한 피조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뱀이 남자에게 가지 않고 여자에게 가서 남자에게 선악과를 먹게 만들었습니다. 피조물이 여자를 다스린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질서가 거꾸로 되어 버렸습니다. 뱀이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유혹합니다. 그리고 남자는 그 것을 나무라시는 하나님께 ‘당신이 만들어 내게 주신 여자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라고 항변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께 책임을 돌려 버리는 것이지요. 하나님까지도 내가 다스리겠다는 오만함,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것을 다시 질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시키시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십니다. 성경을 보시면 피조물의 대표인 인간이 타락하자 그로부터 다스림을 받던 피조물들도 그 대표의죄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 3:14) “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 지니라”

 

인간이 타락을 하고 모든 짐승들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새겨 보세요. 하나님은 뱀에게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무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들도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되지요? 그 뒤로 인간의 다스림에 순종했던 자연은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자연이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자연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홍수가 인간을 덮치기도 합니다. 화산이 인간을 태우기도 하고 토네이도가 인간의 소유를 날려 버립니다. 인간은 하다못해 인간은 똥 개 한 마리도 다스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타락을 하게 되자 육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육식을 하라 하십니다. 식량이 부족해져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제 피조 계는 자기의 배를 위해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는 살벌한 생존경쟁의 장이 되었다는 것을 담고 있는 사건입니다. 짐승들도 서로를 잡아먹게 되었습니다. 피를 흘려 밥을 먹게 된 것입니다.

 

(창 1:29-30) “29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준다"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창 9:2-3) “2 땅에 사는 모든 짐승과, 공중에 나는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에 사는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할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다 너희 손에 맡긴다. 3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채소를 너희에게 먹을거리로 준 것 같이, 내가 이것들도 다 너희에게 준다.”

 

그리고 타락을 하자 인간은 땅을 열심히 갈아 땀을 흘려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 3:17)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어 우리를 당황케 합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땅에는 가시와 엉겅퀴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고통과 질병, 전염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화는 깨어졌고 이제 원래의 조화로 다시 회복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이후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완성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저주받아 있다는 증거이니 것입니다.

 

(롬 8:19-21) “19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21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여기서 피조물들이 허무에 굴복했다고 나오는데 ‘허무’ 헬라어로 ‘마타이오테스’라는 말은 ‘도덕적인 타락,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기능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 원래 하나님에 의해 의도된 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떠나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은 피조물을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피조물’이라 표현을 합니다. 썩는 다는 것은 부패와 죽음과 멸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꽃들도 시들고 말라비틀어지고, 부패합니다. 동물도 늙고 추해지고 죽어 곧 썩어 버립니다. 마지막 날 가시적 재통일 ‘애나케팔라이오’가 되면 피조물들은 그런 썩어짐의 종노릇에서도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그 허무에 굴복해 있는 자연, 부패해서 썩어버릴 이 땅의 모든 것과 하늘의 모든 것들을 예수께서 다시 통일 하셔서 그 모든 만물을 거느리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최종적인 목적이십니다. 그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인간의 구원이 들어 있는 것뿐입니다. ‘애나케팔라이오’는 ‘통일시키다, 거느리다’라는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타락한 천사들과 인간들은 모두 불 못에 던져지고,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백성들과 새롭게 회복된 자연에서 우리는 영원히 평화롭게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타락을 하여 하나님의 다스림과 거느림을 거부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이용하고 거느리려 했던 죄인들이 하나님께 항복하고, 순종하며, 그 분의 거느림과 다스림을 기쁘게 받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계 20:10) “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벧후 3:12-13)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사 11:6-9) “6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7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히 12:22-24)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계 5:11-12) “11 나는 또 그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를 보고, 그들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들의 수는 수천 수만이었습니다. 12 그들은 큰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마땅히 받으실 만합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모든 악한 것들은 다 불살라지고 새 질서 속으로 들어 온 것들만이 새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짐승들과 천사들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애나케 팔라이오’‘재통일’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요 위대한 목적입니다. 그러나 더욱더 소망스러운 것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영광의 몸의 형체로 변화되어 왕으로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스리는 자로 선다는 것입니다.

 

(빌 3:21)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히 2:5-9) “5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6 어떤 이가 성경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기억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돌보십니까? 7 주님께서는 그를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셨으나, 영광과 존귀로써 그에게 관을 씌우셨으며, 8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사람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기로는, 아직도 만물이 다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9 예수께서 다만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낮아지셔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받아 신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그 일이 이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적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고,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전하게 완성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 때가 찬 경륜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아직 보이지 않기에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 믿음을 선물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천국을 지금부터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지요?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통치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게 재통일 된 하늘나라의 삶이니까요. 조금 고생이 돼도 소망이 있기에 아무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지금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그 분은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이 없으시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성경에 기록된 언약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못 사는 줄 아세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천국은 결국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그 분이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아는 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앞서 읽었던 이사야서 11장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사 11:6-9) “6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7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보세요. 천국에 있는 자들은 주님을 아는 지식이 가득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항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통치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골 3:10) “10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방법은 딱 한가지입니다. 여호와를 아셔야 합니다. 힘써 여호와를 아셔야 합니다. 오직 그 길뿐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세요. 정리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스려 지는 계시록 21장 22장의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목적으로 하여 우주와 인간을 창조 하셨고 인간을 ‘의의 흰옷을 입고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때를 정하셨고, 그 때가 차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셨으며, 그 목적을 이미 영적으로 완성하셨고, 이제 예수께서 가시적인 재림을 하셔서 그 것이 가시적으로 완성 될 때까지 그 백성들에게 거룩을 가르치시고 교훈하시고 훈련하셔서 결국에는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예수님 안에서 다시 통일이 되어 조화 있게 다스려 지는 천국을 완성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때가 찬 경륜이며 ‘하늘에 있는 모든 것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려 하신다’는 말의 참 뜻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분명 지금은 이렇게 분열이 있고 미움이 있어도 그 날에는 하나가 되고 통일이 되고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믿음으로 그 천국을 연습하는 자들입니다. 미워하는 자가 있거든 사랑하기로 연습하세요.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 자들도 그가 교회라는 것이 확인이 되면 여러분은 천국에서의 조화로운 회복된 그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모르지요? 잘 모르겠거든 연습 한다 셈치고 조화와 평화를 만들어보세요.

 

사람들은 미래의 길흉화복을 점치러 용한 점쟁이들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 적인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년 뒤 2년 뒤의 우리 인생의 불확실함이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졸업하면 뭐할까? 직장서 짤리면 뭐할까? 이런 걱정 하지 마세요. 어찌어찌 뭐하다가 천국 갈 것입니다. ‘어찌어찌 뭐하다’에 한 눈이 팔려 궁극적 목적을 잊어버리지 마세요. 주님이 언제 오시느냐가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가 언제 주님 앞에 갈 것인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요? 반드시 가게 된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의 통치 속에 복종하는 것에서 오는 희열을 맛보는 사람이 무엇을 그리 탐하겠습니까? 좀 당당하게 자신감을 갖고 사세요. 다른 이들이 걱정하는 세상살이에 부화뇌동하지 마세요. 그리스도인만이 가지는 독창적인 삶, 독창적으로 사십시오. ‘애나케팔라이오’ ‘재통일’이 되는 날 그날은 속히, 곧 올 테니까요.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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