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의 소망이 있으십니까?
(김성수 목사)
(엡 1:16-19) “16 여러분을 두고 끊임없이 감사를 드리고 있으며, 내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합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한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상속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19 또한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교회를 위해 계속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교회는 계속해서 자라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가 17절에서 19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오늘 기도의 내용을 보면 구원받은 교회들이 단순히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어떤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1)하나님을 알고(2)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3)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고 (4)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자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것은 마땅히 죄를 짓지 않아야 하는 것과 동시에 주어진 책임도 아울러 이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책망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생이 나이트클럽에 갔다면 그것은 그 학생이 잘 못한 것입니다. 왜 잘못한 것입니까? 학생이 가지 말아야 할 나이트클럽엘 갔다는 사실과 함께 그에게는 더 중요한 잘 못이 있는 것입니다. 학생은 그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나이트클럽엘 간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그가 학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더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학생이 그 혼나는 학생을 보고 “난 나이트클럽 안 갔어.” “그냥 집에서 놀았어.” 그것도 잘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 아이도 맞아야죠. 마땅히 학생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에 있어서는 동일한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단순히 “난 죄를 짓지 않았어.”에 머물며 깐죽거리고 있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 책망을 들을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부르심의 소망에 대해서 알라 는 부분을 공부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더러 가만히 앉아서 빈둥거리지 말고 그 부르심의 소망을 알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신자 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간을 아끼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엡 5:16)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눅 21:34)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주님 다시 오시는 날을 준비하라고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을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는 경고 속에 술 취하지 말고 방탕하지 말고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지 않게 하라고 예수께서 경고하십니다. 방탕하다는 것은 탕자의 비유에서 본 바와 같이 뭔가 나쁜 일을 저지르는 것에 보다는 시간을 허비한 것에 더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술 취한다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술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술이 술을 먹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죠? 성령에 취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신자가 술에 취해서 자신이 자라가야 할 귀한 시간을 다 놓치고 엉뚱하게 술의 힘에 이끌림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술 뿐 만 아니라 우리를 중독 시키는 모든 것이 다 경계의 대상입니다. 인터넷, 도박, 쇼핑, 마약 등등 우리의 정신을 현혹시켜 시간을 빼앗는 모든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럼 생활의 염려는 뭡니까? 세상살이 걱정을 말합니다. 먹고살기 위해 걱정하는 것도 죄인가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말 우리가 굶어 죽을까봐 걱정을 하나요? 아니죠. 세상 적인 체면치레나 세상 적인 자존심에 손상을 입을까봐 걱정하는 것이지 정말 굶어 죽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요즘 홈리스들도 빵 나눠주러 가면 골라먹습니다. 생활의 염려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잘못은 아니지만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부르심의 소망을 알아 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역시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경계의 대상의 목록에 생활의 염려도 넣으신 것입니다.
(마 13:22)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때문에 막혀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많죠? 어렵고 힘들 때 신앙생활 잘 하다가 돈 좀 만지고 나서 예배당도 안 나가는 그런 사람. 그 사람에게 그 돈은 저주입니다. 그 돈 걱정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생명과 말씀이 자라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일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을까 입니까? 아니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돈을 주시는가, 그 방법을 알고 싶으신 것입니까? 우리 교인들은 괜히 욕먹어요. 다른 몰지각한 신자들에게 하는 이야기인데 매일 여러분이 대신 욕을 먹습니다.
(딤전 6:6-12) “6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줍니다. 7 우리는 아무 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아무 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8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9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 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한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11 하나님의 사람이여, 그대는 이 악한 것들을 피하십시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십시오.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십시오. 영원한 생명을 얻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또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가는 자들이지 세상에서의 체면과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부자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주가가 떨어지든 올라가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이자율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뭐가 있어야 이자도 붙고 할 것 아니에요? 참 자유롭습니다. 매일 뉴스를 보며 신문을 보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런 것에 울고 웃고 하지 않습니다. 주식투자나 저금하는 게 나쁘다는 것 아닙니다. 열심히 하세요. 올바른 주식 투자는 한 사회의 기업을 튼튼히 하고 긍정적인 면이 많지요. 그러나 그런 것을 한탕을 바라보고 한다면 늘 불안한 것입니다. 시간을 아끼십시오. 시간을 아껴 다른 일을 하지 마시고 시간을 아껴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일에 힘쓰고 그 부르심이 무엇인지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 가십시오. 우리는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있는 자들입니다.
(롬 12:1-2)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제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물이 쪼개져서 죽는 것입니다. 죽은 제물 가져다 바치는 것 하지 말고 너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여호와를 섬기며 사는 것은 그러한 산제사 같은 고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산제사로 우리 몸을 드리는 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때 즐겨 보았던 안 현필 선생의 영어 오력 일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 함께 어우러져야 영어가 된다는 의미에서 오력 일체라고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안되면 또 해보고, 안 되면 또 해보고 하면서 될 때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학 문제를 누워서 만화책 읽듯이 공부하면 됩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앉아서 풀어 보고 풀어 보고해야 겨우 풀리는 것 아닙니까? 경건은 그렇게 연습하시나요? 우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에 대해서 잘 알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한다고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18절에서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라는 말은 너희의 “총명 을 밝히사”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다시 한 번 자연인과 신자들의 상태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마음의 눈“총명”이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셔야 할 성령 하나님의 역할입니다.
(엡 4:17-19)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이렇게 우리에게 총명이 어두워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마음의 눈을 밝혀 달라고 총명을 밝혀 달라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 매일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받아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밝게 조금 더 밝게‘ 그렇게 기도하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도 우리 안에 죄의 원리가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밝혀 주시는 역사를 매일 매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왜 광야에서 만나를 주실 때 매일 매일 새 것으로 주셨는지 아십니까?
다음 날 것도 못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그날의 것만 공급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 매일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 사함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안 됩니다. 죄 사함의 차원에서 더 나아가 “의” 와“거룩”의 차원에서 까지 구원을 정의해야 합니다. 죄 사함의 차원에서만 구원을 정의 하다보면 자기는 완전한 지점에 도달하였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아닙니다. 영적 성장은 점진적인 성장과 점진적인 발전과 끊임없이 지혜가 증가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계속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힘들지요. 그러나 우리는 해 낼 수 있습니다. 왜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롬 8:18-23)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 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립니다. 완전히 영화 되어 이제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런 영광스러운 몸으로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립니다.
(고전 15:37-38)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겨자씨가 겨자 나무가 되고, 해바라기 씨가 해바라기가 되듯이 그 씨만 봐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형체가 나오듯이 우리의 몸도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할 것이란 것입니다. 애벌레가 2차원을 기어 다니다가 번데기에서 마치 죽은 것처럼 말라 비틀어져 있다가 찬란한 호랑나비가 되어 3차원을 날듯이 우리도 그렇게 변모할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3차원의 세상에 묶여 있지만 언젠가 이 3차원을 넘나드는 그런 몸으로 변할 것이란 것입니다. 그런 영광에로의 소망 때문에 우리는 이겨내고 견뎌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소망은 이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끌고 가시는 것이라서 더욱 확실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아침저녁으로 조변석개합니까? 아침에 성령의 불로 활활 타다가 저녁에 지옥까지 떨어지는 게 우리 아닙니까? 그러나 그 구원을 얻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시기 때문에 확실한 것입니다.
(롬 10:13-15)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믿어야 부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믿기 위해서는 들어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파하는 자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이지요. 그럼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나 구원 받았네” 하고 소리를 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누군가를 보내셔서 작업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전지전능하신,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게 하셨기에 우리는 안전하다는 그 확실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러한 부르심의 소망을 점점 깊이 알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소망. 부르심이라는 말은 우리가 소명이라고도 부릅니다. 소명에는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이 있습니다. 외적 소명은 일반적인 부르심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들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이 아무에게나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총명이 밝아져야, 즉 성령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야 그 부르심이 들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내적 소명, 내적 부르심이라 합니다. 사도가 여기서 부르심의 소명이라 함은 내적 소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롬 8:28-31)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바로 이 부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효 적인 부르심이지요. 이 부르심의 소망을 더욱 더 깊이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벧후 1:10)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사도들은 이렇게 계속해서 그 부르심을 굳게 하라. 더욱더 확실하게 알아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과 확실성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이어야 합니다. 유아기적 신앙을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아직은 무리이지만 여러분은 이 땅을 지나는 동안 반드시 그 신앙고백을 하셔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자기 부르심의 소망을 확실하게 알아야 하며 그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여야 한다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그 확신은 주관적이며 체험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객관적이며 이지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미 총명이 주어졌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2000년 전의 골고다에서 있었던 십자가라는 객관적인 사실과 하나님의 언약과 그 분의 신실하심을 읽고 듣고 공부하여 구원의 확실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주관적이고 체험적인 것을 바탕으로 구원을 확신하려고 할 때 우리는 늘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추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데 더 열심히 노력하여 그 부르심의 소망과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히 6:13-20) “13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당신보다 더 큰 분이 계시지 않으므로, 당신 스스로를 두고서 맹세하여 14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고, 너를 번성하게 하겠다" 하셨습니다. 15 아브라함은 오래 참은 끝에, 그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위대한 이를 두고서 맹세합니다. 그런데 맹세는 그들에게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여 주고, 확정을 지어 줍니다. 1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상속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불변함을 더욱 밝게 나타내 보이시려고, 맹세로써 보증해 주셨습니다. 18 이는,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세상에서 피신한 사람들인 우리가 이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 곧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의지하여, 큰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맹세하실 때에,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19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줍니다. 20 예수께서는 앞서서 달려가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거기에 들어가셔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맹세하시고 약속하셨으므로 우리의 구원을 확실하고 안전하다고 계속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가 그 부르심의 소망을 확실하게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그 부르심의 내용이 무엇인가 성경에 기록된 한 사건을 가지고 설명해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요 8:1-11) “1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시니, 많은 백성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에, 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4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일을 놓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보고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7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9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돌아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으며,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 한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11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모세의 율법을 들이댑니다. 모세는 간음한 여자는 현장에서 돌로 쳐서 죽이라고 했습니다. 선생은 이 여자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돌로 쳐서 죽이라 고 하시면 “ 당신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죄인들을 구하러 왔다고 하더니 그 가르침은 거짓이구만”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고 용서하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시지 않으시고 땅에다 뭔가를 쓰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는가를 궁금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손수 뭔가를 쓰시는 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찾아보면 왜 예수님께서 지금 그런 일을 하시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무엇을 쓰신 것이 세 번 나옵니다. 제일 첫 번째 나오는 것이 시내 산에서 돌 판에 율법을 쓰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바벨론의 벨사살 왕 때입니다.
(단 5:1-6) “1 벨사살 왕이 귀한 손님 천 명을 불러서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천 명과 더불어 술을 마셨다. 2 벨사살 왕은 술을 마시면서 명령을 내려서, 그의 아버지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 온 금 그릇과 은그릇들을 가져오게 하였다. 왕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모두 그것으로 술을 마시게 할 참이었다. 3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가져 온 금그릇들을 꺼내서, 왕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으로 술을 마셨다. 4 그들은 술을 마시고서, 금과 은과 동과 철과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다. 5 그런데 바로 그 때에 갑자기 사람의 손이 나타나더니, 촛대 앞에 있는 왕궁 석고 벽 위에다가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왕은 그 손가락이 글을 쓰는 것을 보고 있었다. 6 그러다가 왕의 얼굴빛이 창백해지더니, 공포에 사로잡혀서, 넓적다리의 힘을 잃고 무릎을 서로 부딪치며 떨었다.”
(단 5:17-31) “17 다니엘이 왕 앞에서 아뢰었다. "임금님이 주시겠다는 선물은 거두시고, 임금님이 내리실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지라도 저는 이 글자를 읽고서, 그 뜻을 풀이하여 임금님께 알려 드리겠습니다. 18 임금님,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임금님의 아버지 느부갓네살 왕께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습니다. 19 하나님이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들이 그 앞에서 떨면서 무서워하였으며, 부친께서는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높이기도 하고, 마음대로 사람을 낮추기도 하셨습니다. 20 그러나 부친께서 마음이 높아지고 생각이 거만해지셔서, 교만하게 행동을 하시다가, 왕위에서 쫓겨나셔서, 명예를 잃으신 일이 있었습니다. 21 사람 사는 세상에서 쫓겨나시더니, 그의 마음은 들짐승처럼 되셨고, 들 나귀와 함께 사셨으며, 소처럼 풀을 뜯으셨고, 몸은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로 젖으셨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부친께서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의 나라를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을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깨닫게 되셨습니다. 22 느부갓네살의 아들이신 벨사살 임금님은 이 모든 일을 아시면서도,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지 않으시고, 23 하늘의 임금님이시요 주님이신 분을 거역하시고, 스스로를 높이시며,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그릇들을 가져오게 하셔서, 임금님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으로 술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임금님은 보거나 듣거나 알지도 못하는, 금과 은과 동과 쇠와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은 찬양하시면서도, 임금님의 호흡과 모든 길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24 그러므로 하나님이 손을 보내셔서, 이 글자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25 기록된 글자는 바로 '메네 메네 데겔'과 '바르신'입니다. 26 그 글자를 해석하면, 이러합니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임금님의 나라의 시대를 계산하셔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27 '데겔'은, 임금님이 저울에 달리셨는데, 무게가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이고, 28 '바르신'은 임금님의 왕국이 둘로 나뉘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29 벨사살이 곧 명령을 내려서, 다니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그의 목에 금 목걸이를 걸어 주었으며, 그를 그 나라에서 셋째 가는 통치자로 삼았다. 30 바로 그 날 밤에 바빌로니아의 벨사살 왕은 살해되었고, 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그 나라를 차지하였다. 다리오의 나이는 예순 두 살이었다.”
첫 번째 하나님께서 율법을 쓰셨습니다. 그 율법을 쓰시는 동안 아래서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들이 애굽에서 알았던 아피스의 암소와 하돌의 황소 숭배를 기억하여 금 송아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가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낸 여호와라”고 그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율법이 그 현장에 내려왔습니다. 그 율법을 새긴 돌 판을 던져서 깨 버렸습니다. 그 것은 심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 벨사살 왕의 잔치에 나타난 하나님의 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읽어 본대로 하나님의 성전의 금 그릇 은그릇으로 술을 받아 마시고 금은동철 나무 돌로 된 신들을 찬양한 벨사살을 심판하셔서 그날 밤 다리오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하십니다. 역시 심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쓰셨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서로 가서 확인해 드리지요.
(렘 17:12-13) “12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더욱 더 확실해 졌지요? 성전에서 무엇을 쓰시는 예수님과 예레미야 17장에 성소이신 하나님을 언급하며 저주받은 자들은 흙에 기록이 된다는 말씀을 비교해 보십시오. 지금 예수님께서 율법을 들고 나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고소를 듣고 흙에다가 뭔가를 쓰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심판이지요? 죄 지은 자는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흙에 무엇을 쓰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심판하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나 둘씩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성전에서 참 성전이신 예수께서 그들의 죄를 지적했더니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한 종교 행위로 그들은 오만 불손해 있었습니다. 할 일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들은 그 참 성전을 못 알아보았습니다. 성전의 입구에는 번제 단이 있습니다. 그 번제 단에서는 죄를 뒤집어 쓴 제물이 죽는 곳입니다. 바로 죄 지은 우리가 죽는 곳입니다. 그 곳에 예수가 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 참 성전이 오시자 자신들의 죄를 백일하에 밝혀 버리셨고, 그 죄를 지적하십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은 죄를 죽이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옛 사람을 죽이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랬더니 모두 도망을 가버립니다. 그들은 성전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만 남습니까? 여자만 남습니다. 왜 남았습니까? 그 여인은 죽음 앞에 놓여 있어 어디로 갈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갈 곳이 없습니다, 나는 죽어야 할 자입니다’ 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땅에다 뭔가를 쓰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야기합니다. “너를 정죄 하던 자들이 다 어디 갔느냐?” 여인이 대답합니다. ‘다 도망갔습니다.’ 왜 그들이 도망갔지요? 죄가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그런데 단어를 잘 보시면 예수님께서 “나도”라는 말을 쓰십니다. 그 말씀은 ‘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너를 정죄하지 못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그 말씀은 “나도 저 유대인들처럼 죄 지은 자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아,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죄 지은 자라니요, 조금만 더 들어 보세요. 히브리서로 가보지요.
(히 4:15)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렇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를 가리켜 죄가 있다 하십니까?
(고후 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신데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가 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죄를 예수님께서 뒤집어쓰신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앉으셔서 심판을 받을 자의 이름을 쓰셔야 할 그 흙에다 자신의 이름을 쓰신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죄 없으신 예수께서 돌로 쳐서 그 죄를 죽이시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그 죄가 되셔서 그 죄를 덮어쓰시고 심판의 자리로 가신 것입니다. 그 성전의 제단에서 쪼개져서 죽어야 할, 여인 대신에 자신이 쪼개져서 죽고 그 여인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바로 그 새로운 생명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 감격스러운 부르심입니다.
(시 84)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7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죄인은 감히 범접을 못하는 주의 성전, 주의 성소가 사랑스럽습니다. 죄를 지적당하고는 모두 도망쳐 버린 그 성소가 사랑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그 제단에서 제물이 쪼개지듯 자신이 쪼개져야 하기에 고통스럽고 괴로운 심판의 제단에 참새와 제비가 알을 낳고 보금자리로 삼습니다. 새들은 가장 평온하고 안전한 곳에 알을 낳습니다. 쪼개져서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알을 낳고 보금자리를 만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누군가 우리 죄를 모두 짊어지고 죽으셨기에 거기서 평온하게 알을 낳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이십니다. 그 여인은 그 성전에서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흙에다가 그 여인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쓰시고 그 여인을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롬 8: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제 넌 내 형제요 내 자매니라. 그 자리로 부르신 부르심입니다. 여러분 그 부르심의 소망을 확실히 아십니까? 그 영광스러운 자리로 부르신 예수님께서 한마디 더 덧붙이십니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그리로 부르십니다. 하나님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땅에서 이렇게 살아달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네가 정말 그 부르심이 무엇인지 안다면 다신 죄를 짓지 말라. 네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서 예수께서 네 죄를 뒤집어쓰시고 스스로 땅에다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으시고 너를 자유롭게 해 주신 것을 안다면 이제 죄를 짓지 말라.’ 그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벧전 2:11-12)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낼 때 우리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한번 피 흘리기까지 싸워보시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베드로 전서 2장 11절에서 21절까지를 함께 큰 소리로 봉독하고 마치겠습니다.
(벧전 2:11-21) “11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적인 욕정을 멀리하십시오. 12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들이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을 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13 여러분은 주님을 위하여,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순종하십시오. 주권자인 왕에게나, 14 총독들에게나, 그렇게 하십시오. 총독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게 하려고, 왕이 보낸 이들입니다. 15 선을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16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17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신도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경하십시오. 18 하인 여러분, 가장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리하십시오. 19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20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면서 참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21 바로 이것을 위하여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그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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