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기도와 눈을 뜬 자들의 기도(III)
(김성수 목사)
(요 9:26-31) "26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는 2주간에 걸쳐서 눈을 뜬 소경의 진술을 통하여 기도의 본질과 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잠깐 복습을 하고 넘어가지요. 우리는 2주전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소경의 진술을 통하여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기도만 들으신다는 것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통하여 성도의 기도는 결국 죄와 악이 모두 사라진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기도로 수렴이 되어지는 것임을 확인 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성도들의 원한은 요한 계시록의 성도들의 신원과 연결이 되는 것이었고 그 성도들의 원한은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당한 것에 대한 복수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수인 죄와 죄의 세력의 척결에 대한 기도라 했지요? 죄와 악이 모두 사라지고 선과 의가 풍성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간구하는 기도가 바로 성도의 원한이요 신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완성의 때는 하나님만이 아시기에 우리가 기도를 하고도 낙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바로 그 것을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은 반드시 그 나라를 완성해 내실 것임을 바라보고 그 기도의 응답이 쉬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도 낙망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담고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의 필요와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정작 기도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엉뚱한 기도만 하고 있기에 하나님은 그 비유의 마지막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가 결론으로 붙어있는 것이라 했지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 비유를 ‘하나님은 강청하면 귀찮아서라도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식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기도는 그 양이나 횟수로 그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공식화해서 이해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의 정당성이나 유익함 등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무조건 간절하고 절박하게 땡깡을 부린다고 다 들어주신다면 이 세상은 얼마못가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짐 캐리가 열연을 한 Bruce almighty라는 영화에서 짐 캐리가 잠시 하나님의 대역을 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런데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아침에 일어나면 세계 각국에서 하나님께 올라오는 기도를 다 해결해야 하는 것이 참 귀찮은 일입니다. 그래서 짐 캐리는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하나님의 컴퓨터에 올라온 전 세계 모든 성도들의 기도를 마치 정크 메일 처리하듯이 읽어보지도 않고 다 yes로 응답해 버립니다. 그러자 지구에 대 혼란이 일어나지요? 그도 그럴 것이 올림픽 경기를 하는데 양 팀에서 전부 자기네가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면 누구를 이기게 해 주어야 합니까? 좀 더 정성을 들여 기도한 팀을 이기게 해야 하나요?
어떤 사람은 자기가 죽이고 싶도록 미운 원수를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떼를 쓴다고 그 상대방을 없애 버리실 수 있나요? 이 지구상에 자기 로또가 당첨되게 해 달라고 떼를 쓰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겠어요? 그거 다 들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처구니가 없지요?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그런 유치한 기도와 많이 다른가요? ‘로또 당첨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격이 다릅니까? 계속해서 우리는 누가복음 11장의 강청하는 친구의 비유에서도 지성이면 감천 식의 기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기도인지를 확인 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으로 다 응답하시겠다는 말씀의 그 좋은 것은 ‘성령’임을 확인했습니다.
성령은 구하는 자에게 오셔서 무엇을 하신다고 했지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가십니다. 그 말은 아무나 성령을 구하면 무조건 성령이 임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성도의 기도로 성도의 삶 속에서 성령이 오셔서 이루시는 일, 즉 성도 안에서 구현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더욱 더 성숙되어져 간다는 의미라 했습니다. 그건 얼마든지 구하라는 말입니다. 다 들어주신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거룩의 완성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은 반드시 완성이 될 것이기 때문에 성령 충만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모두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이번 주일날 조금 더 부연하여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페르시아의 여섯 번째 왕이었던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기도를 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야고보서 4장을 공부를 하면서 왜 우리 안에 건설되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가 이렇게 더딘지에 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많은 부분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는 나의 욕심을 위한 기도라기보다는 나의 변화와 성숙과 내가 치러야할 대가를 전제하거나 감수하지 않고 그저 내 환경이나 나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변화만을 요구하는 기도를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라 했지요?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좀 더 상식적이고 윤리적이며 건강하고 건전하게 성숙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면서 자신은 여전히 비윤리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에 머물러 있다면 그게 바로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라 했습니다. 자기 가족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면서 자기가 그들의 성숙을 위해 어떠한 섬김과 손해와 상함을 감수해내야 하는 지를 계산하지 않는 기도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라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변화와 성숙에는 관심이 없고 나의 환경과 조건과 상황과 내 주변 사람들의 변화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에 정작 우리 안에서 성숙되어지고 완성되어져야 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더디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기도는 하나님 나라인 내가 변하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것이 얻어지는 것이 일차적 목표가 아닌 것입니다. 나의 변화라는 전제 없이 내 필요와 욕심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행전 21장을 공부하면서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았던 여러 동료들의 이야기를 통해 마치 예지의 능력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어떤 인생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지만 그 선택이 마치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복이 쌓인 길과 마귀의 시험으로 주어진 고통의 길을 예지의 능력을 발휘하여 선택해 내야한다는 식의 발상은 여전히 이 땅에서의 힘을 추구하는 불신자들의 행위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갈림길 앞에서도 자신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 어떤 상황과 선택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겠다는 우리의 마음을 원하시는 것이지 절대 복의 길과 파멸의 길을 준비해 놓고 우리를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망하고 흥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로 지어져 가는 가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나의 안전과 성공과 평안을 위해 올바른 선택일까를 고민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의 어떠한 인도하심에도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가를 먼저 챙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하겠습니다.’라는 올바른 신앙의 고백을 하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예수께서 금하신 중언부언의 내용도 공부를 했습니다. 기도할 때 중언부언 하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같은 말을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했지요? 분명 그 중언부언이라는 말 ‘바톨로게오’는 반복의 의미를 함의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바울처럼 간절함과 절박함을 토로하기 위해 반복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형식적인 반복으로 하나님께 떼를 쓰려하는 의미 없는 반복의 기도를 중언부언이라 한다했습니다.
쉬운 말로 내가 기도했으니까 당연히 응답이 와야 한다는 그러한 식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인과율을 전제하여 반복하는 기도는 모두 중언부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야고보서 5장을 통해 성도는 자기들의 지체가 고통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그 고통과 어려움을 자기의 어깨에 짊어지고 합심하여 기도를 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거기서 교회의 장로들은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이들이라 했지요? 우리 교회의 본무는 열심히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추구하며 자기만을 위해 살던 이기적인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렇게 죄와 사망의 증상인 질병을 앓고 있는 형제를 위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형제 사랑을 퍼부으며 기도할 때 그 곳에 죄와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그러한 질병이 모든 인간들에게 닥치게 되었지만 거기에 아담의 죄와 정반대의 모습인 나를 비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가 구현될 때 거기에 죄를 밟고 일어서는 구원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구원’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질병은 나을 수도 있고 안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지체를 위해 기도할 때 그 곳에 죄와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 즉 구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의 필요나 아픔을 감지하게 되었을 때에 목숨 걸고 반복하여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들을 보면서 우리의 기도가 부르짖는 기도여야 함도 배웠습니다.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질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싶어 하는 간절함에서 나오는 부르짖음이라 했지요? 마치 놀이터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의 절규처럼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부르짖는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아서 원망과 탄식의 부르짖음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관계없는 분이시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거룩한 경외감에서 비롯되는 부르짖음이 우리에게서 격발되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부르짖음이 간절할 때 소리를 높여 기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방법도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비결은 다름 아닌 ‘기도’였습니다. 말이 어눌한 아기의 말을 모두 다 알아듣는 부모의 예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와 많은 대화를 가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점차로 깊이 이해하고 올바로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경에 등장하는, 그동안 많이 오해되어져 왔던 기도의 내용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아마도 제가 준비한 것을 다 말씀드릴 시간은 없을 것 같고 다행히 이번 주 주일 창세기 강해 본문이 이삭의 기도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주일날 마저 다 다루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많이 오해하고 있는 열왕기서와 이사야서에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해 공부를 해 보지요.
(사 38:1-8) "1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2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3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 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4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5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 오년을 더하고 6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7 나 여호와가 말한 것을 네게 이룰 증거로 이 징조를 네게 주리라 8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도를 물러 가니라"
이 짧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가지고 이미 여러 저자들에 의해 여러 권의 단행본이 출간되었을 정도로 히스기야의 기도는 인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회개하여 생명을 15년이나 연장 받은 능력의 기도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히스기야의 기도가 정말 하나님 앞에 떼를 쓰면 생명도 연장 받을 수 있다는 그런 기도일까요? 다른 것은 차치하고 우선 성도라는 사람이 이 땅에서 더 오래 살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 상식적으로 옳은 기도입니까? 우리가 정말 이 시간 너머에 있다는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인식하고 소망하고 있다면 그렇게 애걸복걸하면서 이 땅에서 더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합당합니까?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죄도 없고 악도 없고 사망도 없는 곳에서 나를 목숨 바쳐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다면 우리가 과연 죽음 앞에서 그렇게 두려워 떨며 안타까워하겠는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의 기도는 단순히 성도가 병이 들었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병을 낫게 해주시고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는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릴 때마다 기도를 해서 지금까지 살아 있어야지요.
여러분은 일단 이 부분이 어느 맥락에 들어있는지를 잘 살피셔야 합니다. 이사야서 36장에서 39장까지는 온 우주와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실존적 차원에서의 체험부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약속들과 소망들이 어떻게 사실인가를 그의 백성들에게 체험케 하시고 확신케 하시는 하나님의 간섭과 찾아오심에 관한 기록인 것입니다. 어떠한 목적지를 정해 놓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친히 간섭하셔서 은혜로 이끄시고 징계도 하시면서 결국에는 그 목적지에 데려다 놓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실존적 그림으로 볼 수 있는 것이 36장,37장,38장,39장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포위에 속수무책이 되어 버린 남 유다와 설상가상으로 그 지경에 죽을병이 걸려버린 히스기야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은혜의 풍성함을 동시에 보여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시 교만에 빠지는 인간군상 들의 불가능함을 적나라하게 지적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 다 들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공부해 보시면 아시겠지만 앗수르의 침공, 히스기야의 질병과 회복 모두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게 무언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해 이러한 역사의 사건들과 인물들을 들어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패역한 짓을 행하고 우상을 섬기게 될 것인가를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징치하실 것인지에 관해서도 확실하고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신 31:16-22)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 당신 앞에서 범죄하고 다른 신을 좇을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노래를 만들어 부르게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만들어 부르라고 하시는 이유가 그들의 범죄와 우상숭배를 예방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실 때 그 노래를 증거로 삼으시기 위함이랍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패역은 이미 확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신 28:15,45-57)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45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네게 명하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너를 따르고 네게 미쳐서 필경 너를 멸하리니 46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적과 감계가 되리라 47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48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할 것이라 49 곧 여호와께서 원방에서,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의 날음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 50 그 용모가 흉악한 민족이라 노인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유치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51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의 소산을 먹어서 필경은 너를 멸망시키며 또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이나 소의 새끼나 양의 새끼를 너를 위하여 남기지 아니하고 필경은 너를 멸절시키리라 52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 53 네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54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라도 그 형제와 그 품의 아내와 그 남은 자녀를 질시하여 55 자기의 먹는 그 자녀의 고기를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 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연고일 것이며 56 또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 곧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그 품의 남편과 그 자녀를 질시하여 57 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하나님께서 무시무시한 경고를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그들이 저주를 받게 되는데 심지어 대적의 공격으로 고립이 되어 자기가 낳은 자식들의 고기를 먹게 되는 지경까지 가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돌이켜라’가 아닙니다. 너희는 죄인이기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것이지요. 똑같은 저주가 레위기에도 등장합니다.
(레 26:27-35) "27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28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배나 더 징 책하리니 29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30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31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32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33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34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35 너희가 그 땅에 거한 동안 너희 안식 시에 쉼을 얻지 못하던 땅이 그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가 실제로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열왕기하 6장을 보시면 아람이 이스라엘을 포위하자 어미들이 실제로 자식들을 삶아 먹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들 곁을 지나가자 자기 자식을 삶아 먹은 어미가 다른 어미를 고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기 자식은 삶아서 같이 먹었는데 오늘 자식을 삶기로 한 다른 어미가 오리발을 내민다는 것이지요.
(왕하 6:28-29) "28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29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어떠세요? 하나님의 예언이 무섭게 맞아 떨어지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지금 읽었던 레위기 26장 34절과 35절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삶을 살지 않으면 대적의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고 그 때 가나안 땅은 안식을 하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 일은 무엇을 예언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사건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대하 36:17-21) "17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18 또 하나님의 전의 대소 기명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19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을 헐며 그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 모든 귀한 기명을 훼파하고 20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 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 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 하였더라"
이렇게 이스라엘의 패역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바벨론 유수라는 하나님의 징벌 또한 이미 결정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 포로 사건이 바로 이사야서 39장을 근거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의 실수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있어야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히스기야의 실수는 하나님의 은혜로 15년의 생명을 연장 받은 후에 그 은혜를 저버린 실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징계, 즉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 위해서는 히스기야의 교만이 전제되어야 했고 그 히스기야의 실수는 히스기야의 죽을병의 치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의 병 치유는 단순히 한 개인이 기도를 열심히 하여 병에서 놓임을 받은 사건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고 큰 메시지가 담겨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읽었던 히스기야의 기도는 바로 그러한 맥락 가운데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15년 생명 연장이 결국 남 유다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복일까요?
하나님께서 남 유다와 히스기야라는 사람을 들어서 그들의 패역과 불순종과 징계의 장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우리 인간들은 환경이나 조건에 의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고는 도저히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자들임을 확인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생명이 연장된 그 큰 은혜를 체험하고도 교만에 빠져 바벨론 유수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당신 백성들의 실수조차 선용하셔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징치하심으로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완성해 내시고야 만다는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가 공부하는 히스기야의 기도와 연결된 이사야서의 주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지 않으면 여전히 패역한 자리에서 스스로 나올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 ‘히스기야가 열심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생명까지 연장시켜 주었다’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직시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절망케 하시기 위해 우리의 인생과 역사 내내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신 8:1-4)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주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배가 고파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만나로 배를 불린 후에도 여전히 죄를 짓는 것을 확인케 하시고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주지시키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만나는 그렇게 하나님의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거듭되는 실패와 넘어짐을 보면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지 않고는 그 어떤 생래적, 선천적 조건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배가 고파도 죄를 짓고 배가 불러도 죄를 짓는, 날 때부터 죄인인 우리의 실존이 거기서 폭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교회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거기에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치시기 위해 모델로 택해진 개인들과 민족들 그리고 나라들을 시험하시고 그 시험의 결과를 성경과 역사에 기록해 놓으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도 그러한 실수와 넘어짐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십자가 뒤로 바짝 숨는 과정을 통과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거듭되는 실수와 넘어짐은 필연적인 구원의 과정이며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넘어짐이나 실수를 대할 때 ‘난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닌가봐’로 가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의 우리의 불가능함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그 어떤 것도 내어 놓을 것이 없는 그런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맥락을 놓치지 마시고 오늘 우리가 공부할 히스기야의 기도를 보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히스기야는 다윗 이후에 가장 훌륭한 왕이라는 평가를 얻었던 남 유다의 왕입니다.
(왕하 18:1-6) "1 이스라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2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을 치리 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비라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3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4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어떠세요? 가히 메시아와 견줄만한 멋진 업적들을 쌓은 왕이지요? 뿐만 아니라 남 유다는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선민이라고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 유다와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둘 다 죽게 된 것입니다. 유다는 앗수르에 포위당하고 히스기야는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메시아와 버금가는 듯해 보이는 히스기야 왕과 북 이스라엘은 모반의 나라이고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적자들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남 유다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과 남 유다마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한다면 이 세상 그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남 유다와 히스기야에게 ‘너희들도 죄를 지으면 이렇게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었던 이사야서 38장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유다 백성들을 앗수르 군사로 포위를 하여 백성들이 자기가 싸놓은 대변과 소변을 먹고 마셔야 하는 지경입니다. 하나님이 거기까지 몰고 가신 것입니다. 선민이라 자처하던 유다의 교만이 완전히 꺾였겠지요?
(왕하 18:25-27) "25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26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알아듣겠사오니 청컨대 아람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시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의 듣는데 유다 방언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옵소서 27 랍사게가 저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네 주와 네게만 이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성 위에 앉은 사람들로도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25절을 보시면 앗수르 왕 산헤립이 보낸 랍사게가 자기는 여호와의 뜻을 좇아 이스라엘을 멸하러 왔다고 합니다. 랍사게는 여호와가 직접 자기에게 이 땅으로 올라와서 유다를 쳐서 멸하라고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랍사게의 너스레 속에서 앗수르의 공격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음을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 남 유다의 위기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의해 야기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히스기야의 질병 또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이었던 것입니다.
(사 38:1) "1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여기 보시면 분명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시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게다가 그 때는 유다가 앗수르에게 포위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수명을 15년 연장하실 때에 그와 그의 성을 앗수르의 손에서 건지시겠다는 약속도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 후에 천사 하나가 내려와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전멸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설상가상이라 하지요?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의 라인이라고 하는 남 유다와 누가 봐도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왕 히스기야 왕을 한꺼번에 멸망시키시려 합니다.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은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려 하는 것일까요? 아니 우리 교회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으신 것일까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이사야서 36장에서 39장은 온 우주와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실존적 차원에서의 체험부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약속들과 소망들이 어떻게 사실인가를 그의 백성들에게 체험케 하시고 확신케 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찾아오심에 관한 기록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삶 속에 친히 세밀하게 간섭하셔서 그들의 불가능함과 치부를 들춰 보게 하시고, 때로는 징계도 하시고 징치를 하시면서 당신의 백성들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히스기야는 이사야서 39장에서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대에서 그 징계가 오지 않음에 대해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또 가로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사39:8)’하고 유치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우리가 읽어 본 것처럼 히스기야는 마치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던 메시아처럼 보입니다. 그는 유다에서 공의와 종교적 신앙을 회복시켰고 산당과 우상을 파괴했으며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훌륭한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러한 히스기야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티끌 같은 인간일 뿐임을 보여주시고 그도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언제든지 교만의 자리로 올라서고 자기만을 위해 후대의 고난 앞에서 ‘좋소이다’라는 유치찬란한 답을 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언뜻 보면 이사야서 9장의 아기, 11장의 이새의 줄기, 16장의 보좌에 앉은 이, 32장에서 33장에서의 의롭고 아름다운 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죽을병에 걸려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 하는 모습이 38장에 삽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존재조차 할 수 없는 자, 그게 인간입니다. 그렇게 인간들의 불가능함과 추악함과 부족함이 폭로가 되고 이사야서 40장에서부터 66장까지에서 참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히스기야는 왜 죽을병에 걸린 것인가? 사실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죽이실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그것은 신인동형적 표현일 뿐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만일 히스기야가 거기서 죽으면 히스기야의 대가 끊기게 됩니다.
(대하 32:33-33:1) "33 히스기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이 저를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하여 저의 죽음에 존경함을 표하였더라 그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1 므낫세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이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 오년을 치리하며"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15년을 더 살고 죽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아들의 나이가 열 두 살입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가 이사야 38장에서 그냥 죽었으면 성경이 거기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다지파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오실 것을 이미 창세기에서 예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창 49:9-10)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여기서 홀은 왕의 권세를 의미하고 실로는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이라 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애초에 히스기야를 죽이실 생각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하여 히스기야와 남 유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교회에게 무언가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무엇을요? 정신 차리라는 것이지요. 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렇게 왕과 나라가 한꺼번에 쫄딱 망할 수 있으니 정신 차리라는 암시를 주신 것입니다. 너희도 하나님 은혜 의지하지 않고 너희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의지하면 무시무시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이 이사야서 36장에서 39장까지의 내용은 사실 7장에서부터 12장까지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부분입니다. 앞부분에서는 아하스가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를 의지하다가 도리어 호되게 당하는 내용이 나오지요?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부분 또한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의존하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병을 고쳐주시고 앗수르의 공격에서 건져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히스기야에게 징조를 보여주시는데 아하스의 해시계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한 것입니다.
(사 38:8) "8 보라 아하스의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도를 물러 가니라"
아하스의 일영표가 가만히 있는 채 뒤로 십도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하스의 일영표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항상 세상의 힘과 지식을 의지하고 살았던 왕입니다. 세상의 기술과 지식으로 이스라엘을 얼마든지 부강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왕입니다. 해시계는 과학입니다. 즉 인간의 부강과 발전을 위한 지식입니다. 아하스는 이것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과 재능도 하나님 앞에서는 무용지물임을 보여주심으로 인간이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 지를 명확하게 밝히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해시계가 거꾸로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의 질병치유는 인간의 불가능함과 하나님 은혜의 풍성함을 보여주는 한편의 드라마인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 연장된 인생동안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열심히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만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격노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70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기도해서 생명을 연장 받은 히스기야가 부러우세요? 우리도 지금 연장 받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를 가리켜 죄와 허물로 죽어있던 자들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아나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연장 받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벌써 죽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아니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서 매일매일 새로운 삶을 배우고 익히고 있습니다. 이 연장된 은혜의 날 동안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요? 이 세상의 힘의 원리를 배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께만 의존하여 우리의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고 살게 되면 우리는 언제든지 히스기야와 같은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끈질기게 우리를 좇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을 시켜 예루살렘을 박살내게 하시고 70년 동안 포로 생활도 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성숙시키고 완성시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게 히스기야의 기도입니다. 오늘 하려했던 나머지 부분은 주일날 창세기 25장 강해 이삭의 기도에 관해 공부하면서 마저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끝
'the words of truth'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찬송하리로다 (김성수 목사) (0) | 2014.01.26 |
---|---|
[스크랩] 은혜(恩惠) / 김성수 목사 (0) | 2014.01.26 |
[스크랩] 예수님의 기도와 눈을 뜬 자들의 기도(II) / 김성수 목사 (0) | 2014.01.24 |
[스크랩] 예수님의 기도와 눈을 뜬 자들의 기도(I) / 김성수 목사 (0) | 2014.01.22 |
[스크랩] 요한복음 6장을 통해서 본 개혁주의 오대 강령 (김성수 목사) (0) | 2014.01.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