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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은혜(恩惠) /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1. 26.

 

 

은혜(恩惠)

 

(김성수 목사)

 

 

(엡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지난주에 우리는 평강에 관해서 공부했습니다. 평강, 평화, 평안, 에이레네 모두 같은 말인데 그냥 전쟁이 없는 상태 정도가 아닌 둘이 화해를 하고, 부둥켜안은 상태를 평강이라 한다고 했지요? 그 평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것으로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국어사전의 그 평강과는 다른 것임을 우리는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 평강은 하나님과 우리 하나님 백성과의 평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은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 속에서도 그 복된 선물로 인해 흔들리지 않는 하늘의 선물을 성경은 평강이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감옥에서도 평강을 노래했고 카타콤에서도 평강을 누리며 살다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평강은 믿음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시작은 무엇이라 했지요? 선물 하면 생각나는 게 무엇입니까? 은혜지요.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하늘의 평강을 새겨버리는 그 믿음은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데서 오늘은 시작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은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단어입니다. 은혜의 의미를 한 문장으로 정리를 하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을 은혜라 합니다. 평강은 그 은혜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우리가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은혜의 의미를 잘 정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에게 왜 은혜가 필요한가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왜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가? 왜 여러분에게 은혜가 필요합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죄가 인간에게 들어오기 전에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가 된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짓기 이전에 인간에게 필요한 사랑도 은혜를 근거로 한 사랑이지요.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논하려고 하는 은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부어지게 된 복음의 다른 명칭으로서의 은혜를 공부하려고 하는 것이므로 굳이 이렇게 분류를 해서 설명을 드리는 것입니다. 잘 유념해 두세요.

 

그렇게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하게 된 이유는 이러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저주와 심판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 스스로 그 저주와 심판에서 놓여 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연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더 오롯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도대체 우리 힘으로는 그 죄에 대한 욕구와 소원을 멈추거나 다스릴 수 가 없음을 저는 점점 더 절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혹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셔서 그 예수를 믿으면 구원하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알아 볼 능력도, 요구도 준비도 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아예 죽어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이 그 것을 명확하게 증언합니다.

 

(엡 2:1)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는 죽었던 자들입니다. 시체가 무슨 말을 알아듣습니까? 시체가 사리 분별을 하나요? 어떤 요구를 할 수 있습니까? 노력은요? 그렇게 우리는 완전히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시체들에게는 은혜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매다신 것입니다. 은혜는 그렇게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요 1:17)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정확하지요? 율법으로 따지자면 우리는 모두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할 자들인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를 입고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세 번이나 쓰고 있는 것입니다. 편지를 쓰는 사도도 예수로 말미암아 된 자요, 편지를 받는 성도들도 예수로 말미암아 성도 된 자요, 그들에게 주어진 은혜도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에서 그 예수가 빠지면 그건 기독교 아닙니다. 요한복음으로 가서 그 은혜가 어떤 것인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요 3:17-19)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에베소서 강해가 끝나면 요한복음 강해를 할 것입니다. 그 때 더욱 자세하게 다루겠습니다만 이 부분은 여러분이 꼭 숙지해 두셔야 할 부분이니 잘 들어주세요. 하나님은 죄인들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빛이 세상에 왔는데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 1:1-5)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요 1:10-11)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빛이 왔으나 세상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자기 백성은 당시의 이스라엘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한 하나님께서 구속하기로 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전에 불림을 받았다는 그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체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완전히 죽어있던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연적으로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이해가 가시지요? 그럼 구원 역사적 측면에서 이 은혜를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하나님은 왜 하고 많은 민족들 중에 이스라엘을 택하셨는가?’하는 질문을 종종 하곤 했습니다. ‘왜 한국은 아닌가? 왜 이스라엘을 택하셨나? 아담이 한국 사람이었으면 뱀이 유혹했을 때 뱀을 홀랑 잡아 먹어버릴 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의 전개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셨는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추축도 해 보곤 했지요? 여러분은 아세요? 왜 하필 이스라엘입니까? 나중에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대답을 해 주십니다.

 

(신 7:6-7) “6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요,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땅 위의 많은 백성 가운데서 선택하셔서, 자기의 보배로 삼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7 주님께서 당신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것은, 당신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수가 더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모든 민족 가운데서 수가 가장 적은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를 대시는데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잘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어떻게 당신의 능력을 입혀,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내시는지를 알리시기 위해 가장 적은 민족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특별함을 증거 하시기 위함이 아닌, 당신의 능력의 크심을 증명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부분을 더 볼까요?

 

(신 9:4-5) “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5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보시다시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은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유대인이 똑똑하고 잘나서가 아닙니다. 의로워서도 아닙니다. 은혜라는 것은 그렇게 아무 자격이 없고, 준비도 없고, 요구도 없었던 자들에게 값없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전체 교회에게 공지하고 계신 것입니다. 공짜!!!! 그래서 하나님은 고지론 자들이 부르짖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잘난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만들지 않으십니다.

 

(고전 1:26-29)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한번 주위를 둘러보세요. 도대체 우리는 믿지 않는 다른 이들과 뭐가 달라서 여기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장 속기 쉬운 것이 목사에 관한 편견입니다. 여러분들은 목사들은 뭔가 남 달라서 하나님께서 들어서 쓰시는 줄 아시지요? 정말 그렇습니까? 한국의 큰 교회들 보면 그 교회의 목사님들의 학력이 참으로 대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세상 적으로 인정받는 잘 난 목사들의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까요? ‘저 분은 뭔가 남 다른 데가 있다’는 것을 애써 찾고 싶은 인간들의 욕구가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는 자로 서는 것이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하나님을 돕는 자들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분께서 ‘하나님 제 덕 좀 보세요.’라는 책을 쓰셨던데 그건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덕을 보시다니요?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에게 그 것을 보여주고 가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약하고, 여전히 추악한데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개입하셔서 끝까지 목적지로 끌고 가시는구나.‘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저도 가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여러분 앞에 한번 까서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불가능하고 추한 인간인지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러다가도 금방 ‘내가 이런 사람인 것을 알면 사람들이 이 교회에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을까?’아며 몸서리를 칩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 분께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선 목사인 저도 그 정도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항복하고 그 분의 은혜만을 구하는 자로 서야 하는 것이고 당연히 그렇게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함께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 중에 정말 신실하고 착하고 똑똑한 사람 많았습니다. 세상 적인 생각으로 그런 분들이 목사님이 되셔야 옳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매일 술이나 먹고,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자(老子) 장자(長子)나 읽던 저를 목사로 부르시냔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격을 가지고 목사를 뽑았다면 어떻게 저 같은 사람이 목사로 뽑혔겠습니까? 그런 것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저 자신을 이렇게 난도질하는 제 심정을 잘 좀 헤아리셔서 졸지 마시고 잘 들어주세요.

 

그러면 이 에베소서를 쓴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사도로서 적합한 자였나요?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가장 많이 핍박하고 스데반을 때려죽인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가 옷을 맡아 가지고 있었지요? 그건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책임진다.’는 책임 맡은 자의 행위였습니다. 그러고도 아무런 뉘우침 없이 또 기독교인들 잡아 죽이려고 분기탱천하여 가다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택했을까요? 차라리 죽으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살려서 쓰셨으면 더 좋았잖아요. 그걸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전 15:10)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본인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수고를 하고 사도가 된 모든 것을 은혜로 돌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과장하고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것을 겸손을 가장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수고와 노력이 정말 자기가 한 것이 아닌 것을 안 사람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 성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려 간다는 것이 명확해 집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한 발짝도 진보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실감을 하지요. 혹 여러분 중에서도 자기가 뭔가 남들과 달라서 예수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빨리 그 생각 버리십시오. 우리의 행동과 노력은 단 1%도 그 은혜에 보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열심히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그 은혜를 계속해서 저버립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끝까지 쫓아가시면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사 1:24-26) “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 25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 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26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렘 31:31-33)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 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우리가 받은 은혜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마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과 로마서로 가서 확실하게 요약을 하고 확인도장을 찍고 가겠습니다.

 

(엡 2:1-3)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롬 5:8-10)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우리가 뭔가 하나님을 위해 하려고 노력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원수였을 때 우리를 위해 예수가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어있던 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죽음에서 벗어나려 하지도 않았고 세상 죄 속에서 몸을 굴리며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4절의 시작이 but로 시작합니다. 헬라어로는 ‘데’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한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시체였습니다. 시체는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혹자는 구원을 당신은 지금 죽을병에 걸려있습니다. 그 병은 약을 먹어야 낫습니다. 자 하나님의 은혜로 약이 만들어졌습니다. 약이 여기 있습니다. 당신이 입만 벌려 받아먹으면 당신은 살 수 있습니다. 라고 구원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시체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은혜를 주시는 분 쪽에서 먼저 살려내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이란 전적으로 베푸는 쪽에서 시작해서 베푸는 쪽에서 끝을 내는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은혜를 오해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마치겠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을 보면 그렇게 죽어있던 자들을 불순종의 아들들이라 일컫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을 비롯해서 자기 이외의 어떤 존재에게도 순종할 수 없는 자, 자기가 왕인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게 쫓아내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했던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이들을, 아니 하나님까지도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 주기 위한 엑스트라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모두 자기를 위해서만 삽니다. 자기를 위해 이웃을 밟습니다. 심지어 부모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지요? 자식은 부모가 자기를 나타내는 최고의 자기표현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부모의 자식사랑도 결국에는 자기를 위함인 것입니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식을 통해서 이루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 이외의 것을 가진 신에게 주문을 외우거나 뭘 갖다 바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도 그리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여전히 불순종의 자식들로 살아가던 자들을 뒤집어서 예수를 알아보게끔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자기가 아닌 진짜 왕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기꺼이 받기를 원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은혜 받은 자, 그리스도인, 순종의 사람들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와 연결해서 정리를 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믿음을 심으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평강, 평화 , 화목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 6:5)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막 12:30)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이것이 바로 은혜를 주시는 목적인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여전히 주인이고, 신이며, 폭군인 그런 사람으로 계속 살라고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을 전심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고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고후 5:14-17)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습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입니다. 15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육신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알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보편 구원론 자들이 15절의 ‘모든’ 이라는 말을 걸고 ‘봐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고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주일 설교 때 자세하게 다루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택하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지 모든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은 아닙니다. 제가 주일 설교 때는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여러 근거 구절을 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그 정도로만 알고 계세요. 하나님은 죽어야 할 모든 인간 중에 어떤 한 무리를 택하시고 그들에게만 은혜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새 창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재창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심은 이제는 우리가 불순종의 아들들로 살지 않고 예수를 위해 살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은혜 받으러 왔다고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내가 당신께 이 정도 성의를 보일 테니 내가 원하는 것 주쇼. 치성 드릴 테니 우리 아들 대학 붙여 주쇼!’ 이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 요구가 들어지면 은혜 받았다고 외치지요. 여전히 똑같이 불순종의 아들들이 행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여전히 그 사람의 왕은 자기 배요,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욕심에 순종하는, 불순종의 자녀인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완전히 다시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 은혜를 아는 자들은 절대 그렇게만 살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제 삶 속에서 저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은혜를 받은 자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 은혜는 모두에게 동일한 완성품으로 주어집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은혜가 편파적으로 우리에게 임하겠습니까? 그 은혜가 어떤 사람에게는 더 풍족하게, 어떤 사람에게는 조금 부족하게 주어지겠습니까? 병으로 고통당하며, 감옥에 끌려가 고생하고, 걸핏하면 매를 맞던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고생하던 바울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풍족하게, 완성품으로 주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고후 12:9)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 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지금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만족하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도 풍성하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이 ‘내 백성을 내 백성답게 만드셔서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사시는 것’이므로 여러분은 지금 그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답게 지어져 가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상황에 따라 많아졌다, 줄어들었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내게 족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그 은혜로 주어진 영원한 생명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할 자들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것 같이 살지 마세요. 무슨 일을 당하건, 어떠한 일이 있건, 기뻐하는 삶을 산 신앙의 선배들의 삶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우리의 하루하루도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다하더라도 불쌍하지 않습니다. 너무 매몰찬가요?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것을 알기에 여러분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불쌍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어 훌륭한 걸작으로 만들어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왜 불쌍합니까? 위대한 새 창조에 동참하고 있는 여러분은 오히려 자랑스러운 분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고도 여러분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어쩌면 잘 못 믿고 있는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다시 한 번 본문을 볼까요?

 

(엡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럼 우리는 예수님의 친형제입니다. 그런데 예수 앞에 ‘주’ ‘큐리오스’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헬라어 큐리오스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취급해 주신다는 것입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취급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흙으로 지어져 언제 쓸어버려도 불평할 수 없는 피조물들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과 동등하게 공동 상속자로 취급해 주시며, 당신께서 누리시는 영원한 안식과 기쁨과 거룩을 우리에게 함께 누리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사이비들이 말하는 어줍지 않은 값싼 은혜에 놀아나지 마세요. 거기에 어떤 은혜가 더 보태져야 행복하시겠어요.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기가 누구였는지, 어떤 처지에 있던 사람이었는지,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그 은혜가 무엇인지 정말 아는 자들이라면 자기의 처지나 환경에 좌지우지 되지 않고 늘 평강하며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어 이상 잃을 것이 없었던 시체였으니까요. 그런데 무엇이 그리 아까우며, 무엇을 그렇게 이루고 싶어 하며, 무엇을 그렇게 갖고 싶어 하십니까? 그 평안과 그 은혜를 누리십시오.

 

 

 

 

출처 : 우림과둠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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