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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예수님의 기도와 눈을 뜬 자들의 기도(II) /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1. 24.

 

 

예수님의 기도와 눈을 뜬 자들의 기도(II)

 

(김성수 목사)

 

 

(요 9:26-31) “26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 하는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우리는 지난주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소경의 진술을 통하여 하나님은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기도만 들으신다는 것에서 출발하여 쉬우면서도 어려운 성도의 ‘기도’에 대하여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통하여 성도의 기도는 결국 죄와 악이 모두 사라진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기도로 수렴이 되어지는 것임을 확인 했습니다. 성도는 바로 그 것을 밤낮으로 기도하면서 낙망치 않아야 한다는 것이 불의한 재판관이 담고 있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의 필요와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정작 기도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엉뚱한 기도만 하고 있기에 하나님은 그 비유의 마지막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결론으로 붙어있는 것이라 했지요? 기도는 그 양이나 횟수로 그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공식화해서 이해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의 정당성이나 유익함 등을 고려하지 않으시고 무조건 간절하고 절박하게 땡깡을 부린다고 다 들어주신다면 이 세상은 얼마못가 엉망진창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1장의 강청하는 친구의 비유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으로 다 응답하시겠다는 말씀의 그 좋은 것은 ‘성령’임을 확인했습니다. 성령은 구하는 자에게 오셔서 무엇을 하신다고 했지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가십니다. 그 말은 아무나 성령을 구하면 무조건 성령이 임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성도의 기도로 성도의 삶 속에서 성령이 오셔서 이루시는 일, 즉 성도 안에서 구현이 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더욱 더 성숙되어져 간다는 의미라 했습니다. 그건 얼마든지 구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페르시아의 여섯 번째 왕이었던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기도를 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즉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 지점을 목표로 하여 올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늘은 먼저 ‘그렇다면 왜 우리의 기도 응답은 그리 더딘 것인가? 왜 우리 안에 지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더디게 지어지는 것이며 왜 오리라던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올 기미도 안 보이는가?’에 관해 야고보서로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약 4:1-3)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 이니라”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안 되는 것은 첫 번째로 구하지 않음이고 두 번째가 정욕으로 쓰기 위해 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구하지 않음이라는 것은 잘 알겠는데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를 말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나의 유익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라 하나요? 그렇다면 모든 기도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까? 나의 자녀, 나의 부모, 나의 배우자를 위한 기도는 모두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인가요? ‘우리 아이는 꼴찌를 해도 좋으니 옆집 철이는 꼭 1등 하게 해주세요. 우리 남편은 평생 대리여도 좋으니 우리 교회 아무개 집사님은 1년 만에 부장되게 해 주시고 1년 만에 이사되게 해주세요.’이런 것은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가 아닌가요?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는 단순히 그런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야고보는 초대교회에 만연해 있던 독선의 문제를 짚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신앙적 독선이 참으로 만연해 있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삶에서 나타나는 도덕적인 행위 등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주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가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부류들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질책하며 ‘왜 너희들은 그렇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가?’하고 비분강개 할 때에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왜 기도했는데도 변화가 없는가?’하는 항의가 있었겠지요? 야고보는 거기에 대한 해답으로 ‘그건 너희들이 정욕으로 구했기 때문이다’라고 답변을 한 것입니다. 바로 그 구절 앞에 사도 야고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보세요.

 

(약 3:17-18)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위에서 난 지혜, 즉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고,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런데 너희는 왜 정욕으로 구하고 있느냐?’고 연결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욕으로 구하지 않는 기도는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어야 하는데 왜 여전히 너희들은 기도를 하면서도 너희는 마치 온전히 순결하고 완벽한 사람인 것처럼 그들을 바라볼 때는 마귀처럼 바라보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 보세요. 정욕으로 구하지 않는,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이 뭡니까?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거짓과 편벽이 없고,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삶’을 바탕으로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나의 변화와 성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먼저 무엇이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기도의 응답’이 우선이 아니라 ‘나의 거룩’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란 ‘나’의 변화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의 요구만을 관철하려하는 기도를 정욕으로 하는 기도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우리 아들 문제아에서 모범생으로 변하게 해 주세요’ 혹은 ‘하나님, 저 신앙생활 좀 자유롭게 할 수 있게 우리 남편 성질 좀 고쳐 주세요.’ 혹은 ‘하나님 우리 교회 아무개 집사님 나한테 인사 좀 잘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하면서 자기 자신이 그 일에 어떠한 기여를 하고 얼마만큼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도울 것인가를 하나도 계산하지 않고(나의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무조건 자기의 요구만을 관철시켜 달라고 하는 기도는 허공에 날리는 기도인 것입니다. 정욕으로 구하지 않는 기도는 우리 아이가 문제아에서 모범생으로 변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그렇게 손발을 움직이는 것이 기도의 응답 요구에 선행되어야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 집사님이 먼저 나에게 인사를 잘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그 집사님에게 무엇을 해 드려야 할지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기도의 응답에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는 먼저 그 기도의 응답에 대응하는 우리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의 응답에 앞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우리 자신의 변화가 이루어질 때 거기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기도는 하나님 나라인 내가 변하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것이 얻어지는 것이 일차적 목표가 아닌 것입니다. 나의 변화라는 전제 없이 내 필요와 욕심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닌 것입니다. ‘대한민국 교회가 좀 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성숙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를 하면서 자기는 여전히 사기나 치고 약한 사람들 등이나 쳐 먹고 그런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훌륭한 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정욕으로 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기도는 ‘나’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가 변할 생각을 하지 않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나 조건이 변하고 문제가 해결되고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에 초점이 있으니 내 안의 하나님 나라가 쉽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이렇게 기도의 목적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나의 환경을 변화시켜 보다 성공적이고 안락한 삶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 나의 변화와 나의 성숙에 두는 사람은 그 자신이 한 기도의 응답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정작 중요한 것은 나의 소원 성취나 나의 목적 달성이 아니라 나 자신의 변화와 성숙이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나의 변화를 전제하지 않고 나의 소원의 해결이나 환경의 변화만을 기도의 내용과 목적으로 아시는 분들이 제일 많이 궁금해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어떻게 감지하여 분별하는가?’입니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변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자기의 요구 관철에만 관심을 두고 마치 점쟁이들이 점을 치듯 하나님의 뜻을 점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도 어떤 게 하나님의 뜻인지 궁금할 때가 참 많지요?

 

예를 들어 어떤 여자가 두 남자를 놓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 배우자인지 알려 주세요.’라고 기도를 한다고 해 보자고요. 아니면 사업을 하는 사람이 ‘중요한 사업상의 결정을 해야 하는데 어떤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정인지 알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한 남자의 얼굴이 환하게 금빛으로 빛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다른 남자는 송곳니를 내 놓고 토마토케첩을 흘리는 마귀의 모습으로 스러지는 환상이 나타나면 그 것으로 결정지을 수 있나요? 아니면 기도 하는데 ‘너는 삼성 말고 LG와 거래를 하 거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시나요?

 

이곳에 있는 청년들 중에 어떤 사람이 우리 교회에 오기 전에 자기 이상형을 그려놓고 배우자를 위해 열심히 기도를 하다가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그래도 괜찮은 어떤 자매를 만나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응답인가보다 하고 교제를 하고 결혼까지 약속을 했다고 해 봅시다. 그 때까지는 철썩 같이 그 자매가 하나님의 응답인 줄 알았는데 서머나 교회 청년부에 왔더니 꿈에 그리던 자기의 이상형이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상형의 여자도 자기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둘 중에 어떤 게 하나님의 응답입니까? 그 이상형의 출현은 마귀의 시험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입니까? 가끔 우리 교인들이 그런 기도 부탁을 해 올 때면 저는 아주 난감합니다.

 

마치 두 길이 있는데 어떤 길은 하나님이 복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길이고 다른 길은 마귀가 수렁을 파 놓은 길인데 어떤 길이 복이 쌓인 길인지 예지의 능력을 발휘하여 골라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아주 힘이 들어요. 하나님은 한 번도 저에게 ‘이게 맞는 길이다’하고 말씀해 주시거나 환상을 보여주신 일이 없거든요. 하나님은 그렇게 야바위꾼들처럼 당신이 준비하신 길과 마귀의 길을 제시하시고는 ‘골라, 골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절대 우리에게 그러한 예지의 능력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찾아갈 수 있는가?

 

제가 한 가지 예를 들어 그 것을 가지고 성경으로 들어가 설명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선교지로 떠나려고 하는데 어디로 가야할 지 고민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고요. 아프리카로 가야할 지 아니면 아마존으로 가야할 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려주세요.’ 그런데 어느 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제가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형제는 아프리카로 가랍니다.’하고 말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것을 하나님의 답으로 알고 아프리카로 가시겠습니까? 나는 기도했고 누군가에 의해 응답이 왔습니다. 그럼 그 응답을 따라야 하나요?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바울이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에서 거둔 헌금을 가지고 기근으로 고생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로하고 유대 파 교회와 헬라 파 교회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못 가게 합니다.

 

(행 21:4)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그렇지요? 그들이 모두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말립니다. 그것도 성령의 감동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 전도자 빌립의 집에 거하는데 유대에서 선지자라 하는 아가보라는 사람이 내려와서 그가 왜 예루살렘으로 가면 안 되는지 마임까지 동원해서 보여주며 말립니다.

 

(행 21:8-15)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 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5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 갈 새"

 

보세요. 모든 사람이 말립니다. 그것도 성령의 감동으로 말립니다. 그 쯤 되면 바울이 그 모든 정황을 종합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가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바울이 자기의 편안한 앞길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반드시 그래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기필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바울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간 것인가요? 바울이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천국에 갔을 때 그 일로 하나님께 야단을 맞았을까요? ‘너는 이놈아 그 때 내가 그렇게 여러 사람을 통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올라가서 내 일을 이렇게 망쳐 놓았으니 곤장 열대를 맞아라.’그러셨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원래 A라는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데 B라는 사람과 결혼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천국에서 여러분을 질책하실까요? ‘넌 내가 정해 놓은 배필을 마다하고 네 마음대로 네 배우자를 택해서 그렇게 지지리도 복도 없이 살다 온 거야.’하고 약을 올리실까요?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예지의 능력을 시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예지의 능력이 부족하여 엉뚱한 길을 선택한 것을 질책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갈림길 앞에서도 자신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 어떤 상황과 선택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겠다는 우리의 마음을 원하시는 것이지 절대 복의 길과 파멸의 길을 준비해 놓고 우리를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래를 할 때 A사를 택하지 않고 B사를 택함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A사를 택하도록 준비해 놓으셨는데 내가 B사를 택함으로 망했다고 자책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결과가 나를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르겠다고 선택한 것이므로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삶에 자신의 선택을 두고 후회를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 때 내가 이 남자가 아닌 저 남자를 택했더라면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텐데, 그 때 내가 B사를 택했더라면 내가 이처럼 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런 후회는 성도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어떤 선택을 들어서도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자기의 욕심을 따른 옳지 않은 선택으로 다른 이들한테까지 피해를 주고 스스로도 고통을 당한 것에 대해서는 깊은 회개와 함께 다시는 그러한 무모한 선택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단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한 발 더 성숙하게 되는 것이며 이 세상 땅에서 조금 더 눈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내가 좀 더 성공적이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라는 그런 정욕적인 후회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망하고 흥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로 지어져 가는 가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나의 안전과 성공과 평안을 위해 올바른 선택일까를 고민하기 전에 내가 하나님의 어떠한 인도하심에도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가를 먼저 챙기십시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자기가 오라에 묶여 감옥에 가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를 위로하고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교회와의 화목을 주선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에 그 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여러분 앞에 보여 지는 환상이나 기도의 응답 같은 것들이 마귀의 방해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만일 바울이 제자들의 말이나 선지자 아가보와 빌립의 네 딸들의 말을 듣고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으로 생각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다면 사도행전은 지속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14절을 보시면 그 사람들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바울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그 말은 그렇게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을 말렸던 사람들조차 주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나에게 유익이 되는 길이 어떤 길인가?’로 변질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럴 거라면 묻지도 마세요.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길이라도 순종으로 가겠습니다.’라는 고백을 먼저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원하시는 길은 복이 쌓여있는 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나의 욕심을 버리고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어떤 길이라도 순종하겠다는 그러한 마음을 품는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우리의 기도가 우리 자신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와 가시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면 굳이 똑같은 기도를 반복해서 할 필요가 있는가? 그건 혹시 성경이 금하는 중언부언이 되지 않을까? 왜 성경은 밤낮으로 항상 기도를 하라 하는 것일까?

 

(마 6:7)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 하느니라"

 

여기서 주님이 금하시는 중언부언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같은 기도를 반복하지 말라는 말씀일까요? 그렇다면 이 말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주기도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주님은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시고는 곧이어 ‘이렇게 기도하라’하시면서 주기도문을 일러주셨습니다. 그 주기도문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천 번씩 반복하는 기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가 될 때까지 반복하여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것을 중언부언이라 하나요? 주님께서 세 번 기도하셨다는 것은 응답 받을 때까지 목숨 걸고 기도하셨다는 의미라 했지요? 주님은 그렇게 기도를 반복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의 요구를 들어줄 것으로 믿고 반복하신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사단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얼마나 열심히 반복하여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 모든 기도들이 중언부언일까요?

 

부모가 아이의 신앙과 올바른 성숙을 위해 매일 매일 반복하여 드리는 기도를 중언부언이라 하나요? 조지 뮬러가 한 친구의 구원을 위해 50년을 기도했습니다. 그것을 중언부언이라 합니까? 우리 조국의 통일을 위해 수 십 년간 기도하다 가신 우리 할머니의 기도를 중언부언이라 해야 하나요? 중언부언 ‘바톨로게오’는 ‘쉴 새 없이 중얼거리다, 공연히 반복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따라서 반복을 말하는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왜 반복하는가에 따라 중언부언이 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반복하여 기도하던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중언부언의 기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반복하여 기도하는 행위를 자신의 공적으로 삼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도는 다분히 형식적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도의 횟수와 형식을 들어 인정을 받으려 반복하는 행위가 바로 중언부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도했으니까 당연히 응답이 와야 한다는 그러한 식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인과율을 전제하여 반복하는 기도는 모두 중언부언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는 멋들어지게 하는데 방금 자기가 기도한 내용도 잘 기억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 예배 시간에 공중기도 시켜 놓으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한 번도 막힘이 없이 청산유수처럼 기도를 하는데 그저 습관처럼 나오는 말을 나열하는 것에 불과한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중언부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의 반복된 행위와 형식이 반드시 하나님을 감동시킬 거라 착각을 합니다. 그러한 의미 없는 반복을 향하여 하나님은 중언부언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절박한 소원과 열정이 있을 때 우리는 반복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의 무능력함을 인정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열심인 것이지 절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중언부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과 우리의 한없이 보잘것없음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반복하여 드릴 수밖에 없는 소원과 열정이 담긴 기도도 우리 안의 거룩을 성숙시켜가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기도로 수렴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한 번 거듭 강조하여 말씀 드리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어서 어서 버려야 할 아주 무서운 마귀의 속삭임인 것입니다. 오죽하면 미국의 한 여론 조사 기관에서 교회 출구 조사를 했더니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구절이 성경에 있다고 말을 했다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게 바로 이방 종교의 핵심 사상입니다. 옛날 인도에서 사역하시던 선교사님의 책을 보니까 인도에서는 한동안 마을의 풍요와 번영을 위해 그 마을에서 가장 실하고 똑똑한 아이를 갠지스 강에 던져 죽여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 선교사님의 책을 보면 한 어머니가 마르고 골골한 아이를 안고 똘똘하고 건강한 아이는 손을 잡고 걸려서 갠지스 강으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어머니는 한참을 번갈아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통곡을 하며 손에 잡은 아이를 갠지스 강에 던지고 그 아이가 헤엄쳐 나오지 못하도록 작대기로 밀어 넣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마을에 해를 끼치는 포악한 신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사상은 바로 그러한 사상입니다. 그런데 그게 기독교에까지 들어와 버렸어요.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정성을 다하여 자신의 안전과 풍요를 비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상황과 환경과 조건은 여전히 불편하고 힘들다 할지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모든 기도를 자기 안에 지어져 가는 하나님 나라와 완성에 초점을 두고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필요나 소원 등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기도가 죄가 소멸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수렴이 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이 역사 안에서 구체적인 과정과 사건 속에서 무르익고 완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가 소멸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거시적인 기도 제목과 함께 그 죄가 소멸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우리 인간들이 손발을 움직여 해내야 할 부분에 대해서도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십니까? 기도하세요. 너무 가난해서 먹을 것이 필요하세요? 열심히 기도하세요. 내 이웃을 하나님께 소개하고 싶으세요? 열심히 기도하세요. 거기에 대한 응답은 우리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하게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열심 있는 기도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로 성숙되어져 가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인 우리 삶의 필요를 아뢰는 기도가 왜 필요한지를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약 5:13-16) "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 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 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교회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거든 장로들을 초청하여 기도하라’ 여기서 장로들이란 교회의 대표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권고는 교회 전체에게 주시는 권고인 것입니다. ‘교회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거든 모두 함께 기도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질병을 자꾸 ‘죄’와 연관시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에 질병이 존재하게 된 이유는 인류의 죄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그 질병을 앓고 있는 당사자나 어떤 특정한 집단의 죄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병이 당사자의 죄와 아무 관계없는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질병은 죄의 결과인 사망의 증상인 것은 분명합니다.

 

위의 본문은 그렇게 우리의 형제자매가 죄와 사망의 증상인 질병으로 고생을 할 때 우리 교회는 한 마음으로 그 고통당하는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인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커서 그 환자가 질병에서 놓임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어제 USC병원으로 가서 협심증으로 수술을 받으시고 회복중인 우리 교회 김신권 장로님 심방을 했습니다. 저는 산소 호흡기를 꽂고 가쁜 숨을 몰아쉬시는 장로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하루속히 회복시켜 달라고요. 당연합니다. 우리는 우리 지체들의 고통을 우리의 어깨에 짊어지고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몸이 아픈 형제자매의 고통이 마치 나의 고통인 것처럼 나의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눈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질병을 치유해 주시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질병이 하나님이 그만 그 자녀를 불러올리시기 위해 주신 질병일 때는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순종과 인내를 키우시기 위해 주신 것일 때는 어떨까요? 아니면 바울처럼 그가 건강으로 교만하지 않고 또 너무 건강함으로 죄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 일부러 주신 사단의 가시 같은 질병일 때는 어떨까요? 아니면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하게 하시려고 주신 성숙의 수단으로서의 질병일 때는 어떨까요? 그럴 때는 우리가 아무리 곁에서 기도한다해도 그 질병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질병이 없어지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고통당하는 이웃을 향하여 교회의 본무인 순결한 사랑과 섬김을 발휘하고 있느냐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교회는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지체가 있을 때 그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삼아 함께 열심히 기도하면 그 뿐입니다. 우리가 건방지게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저 사람의 질병은 회개를 촉구하는 질병이야, 저 사람의 질병은 인내를 키우게 하시려는 질병이야’라는 식의 판단을 내려 기도를 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하는 그런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다른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삼아 기도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이니까요. 그래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는 구절에 ‘구원’ ‘소조’ ‘save, restoration’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의 본무는 열심히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추구하며 자기만을 위해 살던 이기적인 ‘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언어로 바꾸면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롬8:13)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죄와 사망의 증상인 질병 앞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형제 사랑을 퍼부으며 기도할 때 그 곳에 죄와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그러한 질병이 모든 인간들에게 닥치게 되었지만 거기에 아담의 죄와 정반대의 모습인 나를 비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 나라가 구현될 때 거기에 죄를 밟고 일어서는 구원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구원’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질병은 나을 수도 있고 안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지체를 위해 기도할 때 그 곳에 죄와 상관없는 하나님 나라, 즉 구원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의 필요나 아픔을 감지하게 되었을 때에 목숨 걸고 반복하여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해서 병이 낫는 것보다 우리가 함께 기도한다는 그 현실이 더 위대한 체험인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만을 위해 살던 이기적인 사람들이 함께 모여 나 아닌 다른 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안고 기도를 드립니까? 그런 일이 실제로 내 눈 앞에서 벌어질 때 우리가 얼마나 감격해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병 낫는 것을 너무나 큰 기적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진짜 큰 기적은 죄인들이 회개하여 진심으로 나아닌 다른 이의 고통을 두고 기도하는 그 현실이 진짜 큰 기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왕에 시작한 김에 마지막으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조용히 기도해야 옳은 것인가에 대해 공부를 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시 27:7-9) "7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 하소서 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9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다윗은 그의 시에서 종종 그의 기도가 부르짖는 기도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부르짖음은 위에서 보시는 것처럼 거의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부르짖음이란 간절함과 절박함을 대변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르짖음은 말씀드린 대로 자기의 소원이 들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간절함이나 절박함이 아니라 마치 놀이공원에서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가 엄마를 찾아 헤매며 엄마를 간절하게 부르는 그런 류의 부르짖음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렸을 때 속으로 ‘엄마 어디 있어? ,엄마 보고 싶어’하나요? 창피를 무릎 쓰고 부르짖지요? 그러니까 성도의 부르짖음의 기도는 소원의 성취나 기도의 응답에 대한 간절함이 아니라 아버지의 임재를 간절히 바라는 부르짖음이 바로 성도의 부르짖음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자신이 곤란에 빠지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아버지가 인식되지 않고 감지되지 않을 때 마치 아버지가 나를 떠나버리신 것 같은 생각에 불안하고 두려워 질 때 성도는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절박한 상황 속에 빠지거나 아니면 간절히 원하는 것이 이루어 지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일의 모면이나 소원의 성취를 위해서가 아닌 ‘왜 아버지가 나를 모른 체하시는 걸까?’에 대한 간절함과 절박함 속에서 부르짖어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침묵하고 계시는 것 같을 때 참으로 답답합니다. 우리는 대부분 그럴 때 간절한 기도를 하지요? 여러분의 삶에 아무런 일이 없이 평안하고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는 것을 확신하고 있을 때 기도 자주 하시나요? 그렇지 못할 때 주로 기도를 하지요? 그러므로 사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소리를 질러 기도할 수도 있고 울부짖으며 기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건 그냥 소리를 크게 내어야 신앙이 깊은 것으로 착각하고 외치는 통성기도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만한 절박한 일이 없거나 아니면 부르짖어 하나님을 부를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때일 것입니다. 따라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이들을 보며 예수를 믿으려면 좀 고상하게 믿을 것이지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느냐는 식의 핀잔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부르짖을만한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냥 자기의 신앙을 자랑하기 위해 마치 기름을 바른 바리새인들처럼 소리쳐 자기의 기도를 자랑하려는 것과 간절함과 절박함에서 나오는 기도는 쉽게 구별이 가지 않습니까? 주님의 임재를 더욱 더 깊이 느끼고 싶고 주님의 얼굴을 찾으며 주님을 더욱 의지하고 싶어서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며 죄와 악이 소멸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한 성도들의 신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에 필요한 구체적인 필요는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가 우리의 예지의 능력을 발휘하여 찍는 것이 아니라 어느 상황 속에서도 나의 욕심을 좇지 않는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겠다는 마음가짐 속에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듣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중요한 팁을 한 가지 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여러분, 기도한 후에 하나님의 답을 잘 알아듣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바른 결정을 내려 올바른 길로 가고 싶으시지요? 거기에 비결이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세요. 그게 무슨 비결이냐고요? 한국에 있는 제 막내 동생의 아들 녀석이 지금 유치원을 다니는데 말이 좀 늦어서 통 알아들을 수 가 없어요. 그런데 제 동생은 자기 아들의 말을 모두 알아듣습니다. 아이가 ‘어, 어’하는데 ‘화장실 갈래?’하고 화장실 문을 열어 줍니다. 아이가 ‘우, 우’만 해도 ‘배고프구나?’하고 밥을 먹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오랜 시간 친밀한 관계 속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둘은 ‘아’하면 ‘어’하고 알아듣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뇌졸중으로 말을 잘 못하시는 남편들의 말을 아내는 모두 알아듣습니다. 아십니까?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시간 친밀한 관계 속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는 길밖에 비결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말씀 속에서 ‘내가 자고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까지 읽어내었습니다. 오랜 기도의 습관에서 그는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 많이 꿇어 앉아 긴 시간 반복해서 기도를 하다보면 아버지의 답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날이 꼭 옵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정말로 쉬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만이 나의 삶을 올바르게 영위할 수 있는 길임을 인정하며 매일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을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루에 얼마나 하나님과 대화를 하십니까?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도 정말 하나님의 올바른 뜻을 좇아 사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도움이 별로 필요 없어서 그렇게 기도를 안 하시는 것입니까? 기도하셔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당신을 향해 돌을 들어 치려하던 자들의 눈을 뜨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좇아 사랑하며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로 잘 지어져서 결국에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그 날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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