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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요한복음 6장을 통해서 본 개혁주의 오대 강령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1. 21.

 

 

요한복음 6장을 통해서 본 개혁주의 오대 강령

 

(김성수 목사)

 

 

(요 6:36-40)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 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 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제 6장의 가운데 토막까지 왔습니다. 요한복음의 첫 열세 구절은 생명의 떡으로 군중을 먹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기술이 되어 있고 14절과 15절은 그 이적이 군중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가 기록이 되어 있으며(예수를 ‘그 선지자’라 부르고 그 분을 잡아 임금 삼으려 함) 16절부터 21절까지에는 제자들이 폭풍을 만나 표류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셔서 그들을 폭풍 속에서 건져내시는 사건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섯 번째 기적인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 또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실체가 어떠한 것인지를 함의(含意)하고 있는 사건이었지요? 그리고 22절에서 25절까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라 가버나움으로 간 것을 기술하고 있으며 26절에서 40절까지 에서는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을 찾아와 자신들의 왕이 되어 육신의 생명을 위한 떡을 풍성하게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그 군중들과 예수님께서 함께 나눈 대화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반복해서 ‘나는 너희들에게 세상의 떡을 주러 온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그들은 계속해서 세상의 떡을 달라고 조릅니다.

 

그리고 41절부터는 그 군중들 가운데 특별히 유대인들의 반응과 함께 그들을 향한 회당에서의 가르침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복음서에서의 유대인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대자로 등장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오늘까지 공부할 40절까지에서 구세주를 육신의 떡을 주는 이로 잘못 알고 있는 군중들에게 참 구세주는 육신의 생명을 위한 떡을 제공하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메시아가 아니라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어 먹히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걸 설명하시고 41절부터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민속 메시아사상 속의 메시아로 오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 이야기를 반복하심으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세주로 인해 얻게 되는 참 복이 무엇이며 그 참 복은 어떻게 주어지게 되는 것인지를 주지시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께서 주님이 주시는 참 복에 대해 반복하여 설명해 주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런 메시아라면 싫다’고 다 떠나갑니다. 66절에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는 구절이 있지요?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이 세상의 힘이나 이 세상의 떡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강하게 설명하시자 주님을 좇던 제자들 중에 많은 이들이 돌아가 다시는 주님을 찾아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자신들의 육적 욕망을 채워주지 않는 메시아를 거부합니다. 아니 거부할 뿐 아니라 아예 죽여 버립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님께서 자신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추악하고 비참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죄인들에게 소중한 영생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죄를 들춰내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떡 대신 회개의 촉구(促求)와 그로인한 죄책감을 던지셨습니다. 그러한 죄책감에서 메시아에 대한 간절한 의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메시아 앞에서 자신의 불가능함과 추악함을 인정하고 그 메시아의 도우심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 죽음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고백 속에 영생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그 대표적인 예이지요.

 

그러나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세상의 떡들로 자신의 행복을 채우려하는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지적받게 되면 메시아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이라는 불편함을 없애 버리기 위해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자를 죽여 버립니다. 불신자들에게는 영생을 주러 온 메시아가 달갑지 않습니다.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세상의 힘을 공급해 주셨다면 주님은 그렇게 외롭게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십자가가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는 이유는 십자가는 세상의 힘과 전혀 무관한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구원받은 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떡을 주러 오신 분으로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오로지 그들의 목표는 다른 이들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 많은 것을 소유하고 비열한 상대적인 행복감을 얻는 것에만 치중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물질(物質)세계는 철저하게 제로섬(zero-sum)의 원리로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승자의 득점(得點)과 패자의 실점(失點)을 합하면 zero가 되는 게임을 제로섬 게임이라 하지요. 물질이라는 것은 어떤 이가 많이 소유를 하면 할수록 어떤 이에게서는 결핍이 증가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지려고 하고 다른 이들보다 많이 가지려고 하는 만큼 누군가에게서 결핍이 증가되고 누군가가 나의 발에 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높이 올라가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그러한 시도에서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계 양차대전을 비롯한 역사 속에 일어났던 다양한 전쟁들이 다 무엇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많이 소유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힘 있는 나라가 될까라는 힘을 추구하는 인간의 탐욕에서 시작된 것들 아닙니까?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그러한 세상의 힘을 공급해 주는 분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의 힘을 이용해서 다른 이들을 밟고 올라설 수 있는 힘을 얻겠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는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자기만을 사랑하던 죄인들을 자기를 희생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회복시키러 오신 분이지 여전히 자기 이외의 다른 이들을 경쟁자로 생각하며 그들을 밟고 올라서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는 그러한 사람들을 도와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난시간에 공부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소제의 떡이 되셔서 하나님께 바쳐지시고 아울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먹히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을 먹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역시 생명의 떡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먹히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살아냄으로 해서 생명의 복이 전파되어지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사람들이 여전히 다른 이들을 잡아먹고 그보다 높은 위치에 오르고 그보다 많은 소유를 가짐으로 행복을 느끼는 그런 흡혈귀 같은 쾌감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게 어찌 가당하겠습니까? 여러분, 내가 행복해 지기 위해 다른 이들의 손해도 불사하는 것은 곧 살인(殺人)입니다. 성경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곧 형제를 죽이는 것이라고 단언(斷言)합니다.

 

(요일 3:14-18)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고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이라고 요한사도가 외치고 있습니다. 세상은 화목과 화평을 가장하기도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역시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밟고 일어서는 피바다의 현장인 것입니다. 제 표현이 너무 자극적인가요?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 이웃을 미워하는 것을 살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지 않고 행하는 모든 행위는 전부 이웃을 미워하는 일이며 그 일들은 전부 살인인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 우리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살인을 밥 먹듯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살인죄의 값을 예수께서 짊어지시고 사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밟고 올라서서 느끼는 비열한 쾌감을 얻고자 하는 살인자의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지금도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난도(亂刀)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떡이 되셔서 여전히 살인자의 삶을 살고 있던 우리에게 먹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을 올바로 이해를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자원을 탈취하여 나의 부를 채우는 세상의 제로섬 게임에서 탈취하는 쪽이 아닌 비워주는 쪽을 택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져주고 내가 손해 봄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이 풍족해지고 다른 이들이 생명으로 돌아오는 그런 떡과 복과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일 4:7-12)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떡처럼 부수고 짓 이겨 먹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게 된 성도는 그 사랑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살해하지 않을 수 있는, 다른 말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여정동안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가리켜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하늘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삶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먹히신 것입니다.

 

(렘 29:11) “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여기서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것이고 ‘평안’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솨롬’은 ‘번영, 번창’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번영이며 번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번영은 소유의 증가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존재의 번영과 번창, 즉 존재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환언하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성도의 존재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성숙하게 자라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자로 커가는 것을 ‘솨롬’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먹고 마심으로 그러한 자로 변화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의 형질(形質)을 결정하고, 그 형질이 우리의 기질(氣質)을 결정하며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독일 속담에는 ‘먹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채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덜 호전적이며 조용하고 평화주의적인 반면, 육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훨씬 호전적이고 파괴적이라는 연구발표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네가 먹는 음식이 무엇인지 내게 말해 보아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를 먹고 마심으로 그 예수의 형질이 우리의 형질이 되고, 예수를 먹고 마심으로 그분의 기질이 우리의 기질이 되며, 예수를 먹고 마심으로 그 분의 성품이 우리의 성품이 되는 것이며, 예수를 먹고 마심으로 예수의 정신이 우리의 정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어떤 형질과 기질과 성품과 정신으로 이 땅을 살다가셨나요? 그 분은 이 세상에게 뜯기고 먹히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여 결핍과 기아와 갈증에 시달리던 죄인들을 살려내시고 가신 것입니다. 예수를 먹고 마신 성도는 바로 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먹고 마심으로 예수의 살이 내 살이 되고 예수의 피가 내 피가 되었으므로 성도는 예수처럼 살다가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요 6:53-56)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여기서 먹고 마신다는 단어가 전부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진행의 뜻이 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의 살과 피를 계속해서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인데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를 계속하여 먹고 마시는 것일까요?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를 통해 원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 예수의 삶이 내 삶 속에서 토해져 나올 때 우리는 예수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아니 매 순간 매 순간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목숨을 바쳐 원수를 사랑하신 예수의 삶에 동참하여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 존재 전체를 집어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원성에 우리의 유한성이 삼켜지고 그 분의 온전한 사랑에 우리의 불완전한 사랑이 삼켜지고, 그 분의 온전한 진리에 우리의 불완전한 진리가 삼켜지고, 그분의 거룩한 영에 우리의 부정한 영이 삼켜지고 그분의 온전한 마음에 우리의 상처 난 마음이 삼켜 질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 영생으로 살아나는 사건인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는 바로 그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요 6:40)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잘 보세요. 하나님의 뜻은 믿는 자들의 영생입니다. 믿는 자들의 소원성취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다른 이들을 섬겨주고 사랑해 주고 용납해 주며 그들에게 먹혀주는 삶, 다른 말로 사랑하는 삶을 사는 자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은퇴를 하신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평생을 올바른 복음을 잔잔하게 전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훌륭한 제자들도 많이 키우셨습니다. 제가 신앙인의 관점에서 그 분을 볼 때 그 분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의 인생을 세상적인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참으로 이해할 수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선 그렇게 성실하게 올바른 복음을 전하시는 그 분의 건강이 그렇게 좋지 않으셨습니다. 위를 몇 번이나 잘라내는 수술을 하셨고 다른 장기들이 많이 고장이 나서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장성한 두 딸은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잘 마치고 은퇴를 하시자마자 중풍에 걸리셔서 몸에 마비가 오셨습니다.

 

예수를 올바로 믿는 것이 세상의 떡을 구하는 것이라는 어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이 분은 예수 헛 믿은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불행한 삶 아닙니까? 그러나 그러한 삶 속에서 그 분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사셨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향기로 전해 주셨습니다. 저희 교회 4주년 기념예배 때 그 목사님을 모시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성도의 신앙생활은 내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나 자신이 작은 예수로 변해가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로, 섬기는 자로, 용납하고 품는 자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세상의 힘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는 것에 몰두하기 위한 길은 , 다른 말로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을 살해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살해당하는, 먹히는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각하고 올바로 인식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다섯 절만 잘 이해를 해도 그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우리 몸을 푹 담글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개혁주의의 신앙의 원리가 정확하고 명료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원리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대로 (TULIP) 이라는 알파벳 글자 조립어로 가르쳐 지고 있습니다. TULIP은 Total Depravity(전적 부패), Unconditional election(무조건적 선택), Limited Atonement(제한 속죄), Irresistible Grace(불가항력적 은혜), Perseverance of the saint(성도의 견인)를 대표하는 약자입니다. 오늘 본문 36절을 보시면 개혁주의 신앙의 원리의 첫 번째 항목인 Total Depravity(전적 부패)가 어떠한 상태인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6:36)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 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44절과 병행 구를 이루는 구절입니다.

 

(요 6:44)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 둘을 종합해 보면 타락한 죄인들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끌어 아들인 주님께 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예수를 믿을 수 없을 만큼 완전한 타락의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4절에서 ‘이끌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헬퀴오’는 어부가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끌어 올릴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의 관원들 앞에 끌려 나갔을 때도 동일하게 쓰였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지로 끌려 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졌을 때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었다고 하는 그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쓰인 단어입니다.

 

물고기 스스로 배의 갑판에 올라올 수 없듯이 구원은 그렇게 하나님의 이끄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처한 상태가 어떠한 상태인지도 알지 못하며 왜 구원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전적인 타락 속에 처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택한 백성들을 그물로 강제로 끌어 올리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단호하게 전적인 타락 하에 놓여있는 죄인들의 상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4세기 때의 펠라기우스나 종교개혁 때의 알미니우스나 에라스무스 같은 이들은 인간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발동하여 하나님을 좇을 수 있는 선행적 은총이 주어져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이 아닌 부분적 타락을 주장한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그렇게 구원에 관한 인간 쪽에서의 기여(寄與)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그 모든 가르침들을 총칭하여 알미니언 주의라 부릅니다. 그들의 이단적 가르침에 대항하여 어거스틴과 칼빈과 루터가 각각 그들에게 맞서서 올바른 성경적 교리를 정립하여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분들의 가르침을 캘빈이 TULIP으로 정리를 한 것입니다.

 

잘 구별하셔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발동하여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의 구원을 당나귀를 이끄는 농부에 비유하여 설명을 합니다. 농부가 당나귀를 끌고 가려는데 당나귀가 농부의 의지에 반하여 계속 뒷걸음질을 치면 결국 농부는 그 당나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입니다. 정말 그런가요? 그러면 하나님의 전능(omnipotence)이라는 속성이 의심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이든 계획하시고 결정하신 것은 다 이루실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가지신 분이 피조물의 거부(拒否)로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거나 중도에 무산시켜 버린다면 그 분은 전능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44절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은 당나귀의 의사에 상관없이 당신의 그물로 당신의 목표물을 감싸서 그냥 끌어 올리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 ‘이끌다’라는 말은 언제나 끄는 힘에 대한 저항(抵抗)을 함축(含蓄)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는 어부의 의도대로 순순히 배 위로 올라오지 않습니다. 그물 안의 물고기는 사투(死鬪)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저항을 합니다. 바울과 실라도 빌립보 관원들에게 끌려갈 때 기분 좋게 끌려갔을 리 만무입니다. 그들도 끌려가지 않기 위해 저항을 했겠지요. 이렇게 ‘이끌다’ ‘헬퀴오’라는 단어는 저항의 개념을 함축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이끌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이끌림을 받는 자들조차도 그 이끌림을 향해 저항을 할 정도로 모든 인간은 전적인 타락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끌림이라는 단어로 저항을 함의 하고 있는 ‘헬퀴오’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알미니언 주의자들은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위해 예수님을 죽인 것이고 모든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가 주어져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구원을 선택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고 인간들이 선택을 하지 않으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라고 하지요. 끝까지 인간의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을 우리의 구원에 조금이라도 보태야 그 구원이 더 값지다는 발상입니다. 그들이 근거 구절로 내세우는 것이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그 구절의 세상이 ‘전체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전체 세상을 위해 예수님을 죽여 놓고 자신의 의지를 따라 그 예수님을 믿겠다고 좇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예수님을 좇지 않은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여서 죄를 사해 놓았는데 인간들이 하나도 안 믿어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괜히 죽으신 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획 없이 인간의 선택과 의지에 좌지우지하시며 일을 하시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인간 구원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됩니다. 그게 무슨 은혜입니까? 정당한 대가이지요. 구원은 선물입니다.(엡 2:8)

 

예수님은 일단 전 인류를 위해 죽어 주셨다가 아무도 안 믿어주면 그냥 없던 걸로 해 버리는 허탈한 일을 하시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 아무도 하나님을 좇을 수 없는 전적인 타락의 상태에 있는 세상 속에 있는 어떤 택해진 한 무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37절에도 보면 주님은 아버지께서 당신께 주신 자들만이 당신께 나올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의 의지에 따라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만 주님께 나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7장으로 가면 좀 더 쉽게 이해를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요 17:6)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예수님은 세상 중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들만을 위해 오신 분이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전체 세상이 아닙니다. 다른 곳을 한 군데 더 볼까요?

 

(요17:9) “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어떠세요? 예수님은 지금 세상을 위함이 아닌 아버지께서 당신께 주신 자들만을 위해 간구를 하고 계십니다.

 

(요 17:14-16)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보시다시피 지금 예수님의 관심은 전체 세상이 아니라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어떤 한 무리에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만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 15:19)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보고 ‘너희들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전 인류인 ‘세상’을 위해 오셨다면 왜 제자들보고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하시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은 세상에서 건짐을 받은 어떤 무리만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되어진 무리는 그들의 자격이나 노력이나 열심에 의해서 택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해 택해진 것입니다. 그러면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우기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의 ‘세상’은 무엇일까요? 전에도 말씀 드린 대로 요한복음에서는 이 “세상”이라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요한은 “세상”이라는 단어를 죄를 짓고 타락하여 영원히 영벌에 처해질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그리스도의 반대 세력들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죄로 인해 영원히 죽어야 할 자들 중, 즉 세상 중에서 건져내어짐을 받은 무리를 향해서도 “세상”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3장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의 세상이 바로 그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같은 자들을 사랑하셨다는 데에 있는 것이지 누구를 사랑하셨는지에 대한 사랑의 대상에 대해 초점이 있는 구절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세상이었으나 지금은 그 세상 중에서 건짐을 받은 바로 그 ‘세상’ 즉 교회를 사랑하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개혁주의 신앙원리의 세 번째 부분인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까지 확인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전체를 구원하시기 원하셨던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어떤 한 무리만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제한적인 속죄를 위해 어떤 선택된 무리에게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1장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묘사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과 함께 심판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죄를 속하시고 그들을 건져내시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의지를 발동하여 예수를 믿을 수 있다면 왜 주님이 굳이 죽으셔야 합니까? 계속해서 설득하시면 되지요. 인간은 절대 설득이나 교육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전적으로 타락을 해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자가 풀을 뜯어먹는 것이 불가능하고 토끼가 돼지 갈비를 먹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향해 자신의 의지를 돌이키는 것 또한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전적인 타락의 상태인 죄인들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원리의 두 번째 항목이지요? 무조건적인 선택이란 인간 쪽에서 구원의 근거로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구원에 필요한 어떤 자격이나 조건이나 노력을 보탤 수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다 전적인 타락의 상태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무조건적인 선택에 해당하는 구절이 본문 37절입니다.

 

(요 6:37)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버지가 선택하셔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인 것입니다. 그 선택에 어떤 이유와 조건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아직 태(胎)에 있기도 전인 창세전에 무조건적으로(unconditional)선택을 하신 것입니다.

 

(엡 1:4)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전도도 선교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다 선택해 놓으셨는데 우리가 전도나 선교를 할 필요가 있나요? 잘 보세요. 여기서는 분명 하나님의 선택이 과거시제로 표기가 되어 있습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다’ 과거시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7절은 시제가 현재와 미래로 되어 있습니다. 37절의 ‘내게 주시는 자’는 현재이고 ‘내게로 올 것이요’는 미래 시제입니다. 그리고 그 뒤의 ‘내게 오는 자’는 현재시제입니다. 본문 39도 시제가 특이합니다.

 

(요 6:39) “39 나를 보내신(과거) 이의 뜻을 행하려 함 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현재)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 것이니라”

 

정리를 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미 우리를 선택하셨고(과거) 그 선택하신 자들을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과거) 그런데 그 창세전에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각자의 현재(現在)에 주님께로 나아오게 되며 주님은 그 현재의 시간에 그 백성들을 챙기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은 많은 이들이 그들의 현재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바로 오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인 과거에 선택을 하셨지만 그들은 각각의 현재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본문 39절의 말씀처럼 그들이 ‘하나도 잃어버린바 되지 않고’ 모두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선택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데 쓰이는 것이 바로 전도의 미련한 것입니다.(고전 1:21) 따라서 여러분은 바로 지금 목숨을 걸고 전도를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고전 15:58)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개혁주의 신앙원리 네 번째 항목은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은 본인이 그 은혜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7절 상반 절을 보시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모두 다, 하나도 빠짐없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선택하셔서 주님께 주신 이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에서 실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게 불가항력적 은혜입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신앙원리 다섯 번째 항목인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교리는 39절 중반 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 것이니라’ 주님은 하나님께서 당신께 구원해 내라고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구원해 내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신앙의 여정동안에 그렇게 실수를 많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나요? 베드로가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하고 물고기 잡으러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주님께서 그를 포기하셨나요? 바울이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괴롭히러 다닐 때 하나님께서 바울을 포기하셨습니까? 마찬가지로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잘 못 살아내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패서라도 구원을 하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견인 교리가 아주 선명하게 설명된 곳이 로마서 8장 후반부입니다.

 

(롬 8:35,38-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분의 택한 백성들을 끊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처럼 완전하며 완벽한 완제품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서 예수의 형질과 예수의 기질과 예수의 성품과 예수의 정신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나는 혹시 예수의 살과 피가 아닌 내 이웃의 살과 피로 내 배를 채우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이들은 분명 내 이웃의 살점과 피 자국이 자신의 몸을 더럽히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어서 그 자리에서 나오세요. 그 이웃들이 생명의 떡이 된 여러분을 먹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세요.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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