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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오병이어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 그리스도(II) /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1. 21.

 

 

오병이어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 그리스도(II)

 

(김성수 목사)

 

 

(요 6:15-21)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 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우리는 지난주에 두 가지 사건에 대해 공부를 했습니다. 첫 번째로 광야에서 떡을 배불리 먹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좇아와서 자신들의 왕을 삼으려 하자 주님께서 그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 기도를 하신 사건을 통해 주님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기도의 중요성에 관한 공부를 했고, 두 번째는 요한복음의 다섯 번째 표적인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밤새도록 풍랑 속에서 사투를 했던 제자들과 또 주님께 물위를 걷게 해 달라고 요구를 했던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우리의 힘으로 열심히 노를 젓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베드로가 요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 땅에서 우리의 힘과 노력을 보태어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이 무저갱(無底坑)같이 뻥 뚫린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길은, 다른 말로 우리가 가려던 땅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한 배의 방향키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조종이 됩니다. 마치 물위를 걷는 예수의 원시(原始) 모형(模型)이었던 노아의 방주에 방향키가 없었던 것처럼 이제 우리의 삶의 방향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난 후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명하심과 이끄심에 반항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역으로 노를 젓는 짓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습니까? 그래봐야 우리의 인생만 고단해 질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 우리의 삶의 방향키를 내어 드리고 그 분이 이끄시는 대로 끌려가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참으로 만족할 수 있으며 참으로 기쁠 수 있으며 참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욕심을 따라 우리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삶인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우리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좇을 때에 그 속에서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지 주님의 통치를 벗어나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 진정한 행복은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것은 우리 주님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어떻게 우리 주님을 ‘폭풍 속에서 표류하던 우리 인생의 배’에 영접하게 되어 가려던 땅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면, 다른 말로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를 올바로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리로 자연스럽게 옮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우리 인생의 방향키를 우리 손으로 움켜쥐고 있을 때가 많은 것은 우리가 그 주님의 은혜를 자주 잊고 살고 있다는 증거이며 혹은 복음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모여 반복해서 복음을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 물위를 걷는 자가 되어 가려던 땅에 도달하게 되었는지에 관해 간단하게 살펴보고 왜 주님을 영접한 우리의 삶 속에 여전히 풍랑이 일고 있는지, 순종하겠다고 열심히 분투하고 있는 제자들의 배가 풍랑에 표류한 것처럼 열심히 순종하겠노라고 결심하고 그렇게 살고자 하는 우리의 삶에 왜 오히려 때때로 풍랑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 풍랑을 견딜 수 있는지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의 풍랑이 이는 바다를 그림으로 그려보세요. 저녁 무렵에 배를 타고 떠난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새벽 세시가 넘도록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고 제자들은 그렇게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얼른 주님을 자신들의 배로 영접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배가 즉시 가려던 땅에 도달을 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이러한 그림을 통하여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우리가 금방 세상의 풍랑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에만 초점을 두고 바라봅니다. 어떻게 해서 그 풍랑이 이는 바다 속에 빠지지 않고 그 풍랑이 이는 바다를 밟고 서게 되는지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감사가 없는 것이고 감사가 없는 삶에서 여전한 불순종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주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를 그 저주와 풍랑의 바다 위로 끌어올려 방주처럼 물위를 걷게 하시나요? 우리가 이미 공부한 것처럼 풍랑이 이는 바다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인은 자신의 인생을 통해 그 저주의 바다 속에서 헤매다가 영원히 그 저주의 바다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건 죄인들의 필연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라는 ‘구원받은 죄인들’은 어떻게 그 죄로 말미암은 저주의 바다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지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그냥 무작정 용서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물위에 뜨게 된 것입니까? 너무 쉬운 질문인가요?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빠져 죽어야 할 저주의 바다 속에 우리 주님께서 대신 빠져 죽으심으로 우리가 그 저주의 바다 위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 예수님의 익사(溺死)로 연결이 되는지 보세요.

 

(눅 12:50)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께서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가리켜 ‘받을 세례’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여기서 ‘세례’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는 ‘밥티조’입니다. ‘밥티조’는 ‘물에 잠그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침례교에서는 침례를 줄 때 물에 푹 넣었다가 빼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세례의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사건을 가리켜 ’받을 세례‘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빠져 죽어야 할 저주의 물, 풍랑 속으로 푹 빠져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그 풍랑 속에서 죽으셨습니다. 바로 저주의 물을 맞고 죽는 방주의 모습입니다. 방주는 저주의 물에 맞아 죽고 그 안에 들어있는 노아의 여덟 식구가 살아난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렇게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물위를 걸어, 가려던 땅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송구영신 예배 때 공부한 것처럼 바로 그 이야기가 요나서에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는,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표적들을 가리켜 요나의 표적이라 하시지요?

 

(눅 11:29-30)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여기 보시면 요나와 예수님은 같은 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 12:38-40) “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 하나이다 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자신도 요나가 스올(음부)이라고 표현을 한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밤낮을 머무르며 지옥을 경험한 것처럼 당신께서도 사흘 밤낮을 땅 속에서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가 풍랑 속에서 겪은 일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예수님의 지옥 경험 사건과 부활 사건을 잘 이해할 수 있겠지요? 요나서 1장 11절 이하를 보면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려고 얻어 타고 가던 배가 폭풍을 만나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을 판입니다. 그 때 요나는 자신을 바다 속으로 던지라고 합니다.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 속으로 던지자 바다가 이내 잔잔해 졌습니다. 예수를 상징하는 요나가 물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요나가 물속에 빠짐으로 선원들이 살아납니다. 그게 바로 요나의 표적이고 그 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빠져 죽어야 할 풍랑 속에 빠져 죽으신 것입니다. 요나가 물에 빠져 물고기 뱃속인 스올로 들어감으로 해서 죽어야 할 이방 선원들이 폭풍 속에서 살아난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그 저주의 풍랑 속에 빠져 죽으심으로 우리는 물위에 둥둥 떠서, 다른 말로 물위를 걸어서 우리가 가고자 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인생의 배로 주님을 영접하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닌 예수님의 익사(溺死)로 말미암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우리 생명의 은인이신 예수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기를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우리의 자발적인 순종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조금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풍랑이 잔잔해 진다고 하고 홍수도 피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 삶에 일어나는 이 풍랑은 무엇인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하면 ‘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배를 띄운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이 들지 않으세요? 네, 좋은 질문입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우리 성도들에게서 그 풍랑은 모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풍랑이 이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풍랑이 이는 세상에서 풍랑이 사라진 하늘나라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발휘해야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 나라가 아직 우리 눈에 가시적으로 닥치진 않았지만 우리는 이 땅에서 모든 풍랑이 사라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처럼 소망으로 그 풍랑을 이겨내며 살아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과 확신을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는 풍랑 속에서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그 풍랑 속에서 잔잔하게 물위를 걸으셔야 하는 분들이라는 말입니다. 풍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풍랑 저편의 다시는 바다도 있지 않은 평화와 안식의 땅을 바라보며 풍랑을 이기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내 아들이, 내 딸이 정말 믿음이 있는 자인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풍랑 속에서 정말 그 풍랑을 밟고 일어서는지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 내 자녀들의 믿음입니다. 왜요? 그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인데 얼토당토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믿음이 있다고 헛소리들을 해 대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하고 세상에게 보여주시기 위해,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을 확인하시기 위해 당신의 자녀들의 삶 속에 그 믿음을 발휘할 수 있는 사건들을, 폭풍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히 11:1-3)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롬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아나서 또 그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에 눈에 보이는 평정과 평안이 아닌 폭풍과 같은 시련이 몰아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발휘하라고. 하나님의 요구는 그 속에서 폭풍이 가라앉은 하늘을 살아내는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환경은 몰아치는 폭풍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하고 말씀하셨기에, 그리고 그 약속의 땅에 반드시 나를 데리고 들어가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 까짓 거’하면서 믿음으로 물위를 걷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이러한 풍랑들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발 한 발 믿음을 발휘하며 가다보면 언젠가 이 가시적인 모든 풍랑들이 다 사라지고 우리는 영원한 행복과 안식과 기쁨만 있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계 21:1)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보세요. 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이제 저주의 바다, 심판의 폭풍이 없습니다. 그게 예수 믿는 여러분의 실존입니다. 그 땅을 바라보며 이 땅의 풍랑을 잘 이겨내십시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주신 믿음이 없는 자들은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절대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을 올바로 전하시기 위해 세상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시고 고생 고생하시며 복음을 전하시던 어떤 선배 목사님의 두 딸이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목사님이 “이제 내가 그동안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평안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입으로만 전하던 내 설교가 내 삶 속에서 경험되어지고 시험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의 삶에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 폭풍을 밟고 일어서신 것입니다. 찬송가 470장을 쓴 스패포드씨가 사고로 네 딸을 모두 잃고 시카고 대 화재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날린 후에 ‘그래도 내 영혼은 평안해’ ‘It is well'이라고 외쳤던 것 기억하시지요?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제가 지금 열거한 이 분들이 저주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고후 1:5-9)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6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보시다시피 성도의 삶에 닥치는 풍랑은 다른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어지기도 하고 우리를 하나님만 의뢰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도 쓰인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폭풍 속에서도 그 폭풍에 허우적대지 않고 믿음으로 그 폭풍을 밟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러한 분들은 다시 풍랑의 바다가 있지 않은 영원한 평화의 나라로 이제 곧 들어가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받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관철시켜 이 땅에서의 풍랑을 없애달라고 조르는 가짜 믿음을 가진 자들은 결국 다시는 헤어날 수 없는 무서운 불바다 속으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계 21:8)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여러분 인생의 풍랑은 영원한 불바다에 빠지지 않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일 때가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풍랑을 잘 견뎌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이러한 풍랑은 여지없이 우리에게 덮쳐옵니다. 원수 같은 인간들이 나를 공격하기도 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하고 억울한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 때 여러분은 그 풍랑을 피해서 도망 다니시면 안 됩니다. 그 풍랑 속에서 믿음을 발휘하셔야 합니다. 이겨내셔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을 바라보면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실 때도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빠져 나갈 길이 없다’하고 외치고 계신 분들이 이곳에도 계실 것입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제가 예전에 주일 설교 때도 말씀드렸지만 이 세상에서 성도가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찾아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만이 길입니다. 주님 이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만일에 돈이 우리의 행복의 길이 된다면 주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돈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어야 지요. 명예가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면 주님은 명예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성취가 여러분의 행복의 길이 된다면 주님은 ‘너희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곧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 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오직 주님만이 생명에 이르는 길이요,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면 이 세상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성도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모두가 낭떠러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금 낭떠러지로 밀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드십니까? 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라는 유일한 길을 찾아 올라오라고, 오직 그 길로만 들어서라고 주님은 여러분을 낭떠러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라는 길을 찾으십시오. 우리가 예수라는 유일한 길을 찾아 올바로 생명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세상이 제시한 수많은 다른 길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다른 길로 접어들지 않고 예수라는 길을 올곧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에 낭떠러지와 같은 사건들이, 풍랑들이 간혹 경험이 되시거든 ‘아,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길만을 붙들라고 이렇게 낭떠러지 같은 상황들을 내게 허락하시는구나.’하고 감사하십시오.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부 합력하여 우리의 거룩을 이루는 하나님의 도구들인 것입니다. 좌절하지 마세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이겨내십시오.

 

성도는 이 땅에서, 풍랑이 이는 바다 같은 이 땅에서, 홍수가 무섭게 창궐하는 이 땅에서 잔잔하게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만을 붙드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 여러분의 삶 속에 그렇게 고통스러운 홍수와 풍랑이 일고 있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예수를 붙드세요. 세상에서 이름 떨치고, 세상에서 자랑스러운 자가 되려하지 마세요. 눈에 보이는 행복, 잔잔한 바다만을 소원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 보면 정작 붙들어야 할 예수를 놓치는 수가 있습니다.

 

(눅 16:15)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풍랑 속에서도 믿음을 발휘하고 계신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잘 가고 계신 것입니다. 힘내십시오. 여러분의 목적, 여러분의 계획, 여러분의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려 하지 마세요. 우리 인생의 배의 방향키를 잡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좇아가세요. 우리의 뜻이 관철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셔야 합니다. 풍랑 속에서도 우리를 도우시는 우리 주님을 의지하세요. 마지막으로 정말 주님은 우리 인생의 풍랑 속에서 우리를 지키고 계신가를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찾아서 확인한 것처럼 제자들은 분명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막 6:45)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여기 보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앞서 가게 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조금 이상하지요? 구약 성경에 보면 원래 하나님은 백성들 앞서 행하시며 그들을 위해 싸우시는 분으로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주님께서 뒤로 가시고 백성들을 앞서게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의 행보를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막 6:48)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 요한복음을 창세기의 창조사건과 출애굽기의 출애굽 사건과 비교하고 대조하며 풀어가고 있지요?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도 광야의 만나 사건으로 풀어서 해석을 해 보았고 이 물위를 걷는 사건도 요단 동쪽에서 요단 서쪽으로 들어가는 홍해를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때의 홍해 도하 사건으로 돌아가서 이 그림을 한 번 찾아보는 것은 어떠세요? 구약에도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오늘 본문의 내용과 똑같은 내용의 그림이 있습니다.

 

(출 14:14-15, 19-20)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19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편은 밤이 광명 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편에 가까이 못 하였더라”

 

홍해를 건너기 바로 전에 앞서 행하며 이스라엘을 이끄시던 여호와의 사자,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뒤로 물러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세우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금 요단 동쪽에서 요단 서쪽으로 건너가고 있는 제자들 뒤로 물러가셔서 그들을 지켜보시는 주님과 동일한 그림이 나오지요? 그런데 지금 읽은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뒤로 물러가신 이유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좇는 자들과 싸우시기 위함이랍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세요. 그렇다면 지금 주님은 제자들을 앞서 보내시고 제자들을 위해 싸우신다는 말이 됩니다. 그 싸움이 어떤 싸움이었지요? 우리가 이미 공부한 것처럼 하나님이 저주의 바다인 홍해에 빠져 죽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살려내시는 싸움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의 공격에, 세상의 폭풍 속에 우리 주님이 빠져 죽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살려내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조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밤이 맞도록 폭풍과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위해 싸우고 계시는 현실이 왜 이렇게 보여 집니까? 분명 우리는 출애굽기의 홍해 도하 사건을 통해 주님이 뒤로 물러가시고 백성들이 앞서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싸우시는 장면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제자들이 건너는 바다는 잔잔한 순풍의 바다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거의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지금 무엇과 싸우고 계신 것입니까? 적어도 제자들이 당하고 있는 폭풍의 바다와 싸우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와 싸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싸움은 우리의 삶의 문제나 해결해 주는 그런 유치한 싸움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싸움인가?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오늘 사건 앞서 일어났던 어떤 사건으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풍랑의 바다 이전에 제자들이 또 한 번의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넌 적이 있었습니다.

 

(막 4:35-41) “35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 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 하라 고요 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잘 보시면 이때는 제자들이 풍랑이 이는 바다를 심히 두려워하며 건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어찌하여 너희들이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질책을 듣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제 두 번째 풍랑 속에서의 제자들이 풍랑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풍랑을 두려워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나타나시자 주님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요 6:19-20)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 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그 말은 제자들은 이미 풍랑 정도에는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만큼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자라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폭풍이 이는 바다를 꾸짖으시는 일로 단순히 제자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자랑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불신앙과 싸우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폭풍과 싸우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불신앙과 제자들의 죄와 제자들의 불의함과 제자들의 미성숙함과 싸우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홍해 바다에서 하나님의 싸움의 대상은 애굽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셔서 홍해를 건너게 하시는 그 사건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을 계시하시고 당신의 백성들로 성숙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역시 당신의 백성들의 불신앙과 불순종과 미성숙함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제자들은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면서도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성숙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자기들에게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건 단순히 주님이 유령인가 하여 놀란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제자들이 이러한 풍랑 속에 주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자기들이 풍랑 속에서 싸우는 중에도 주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에 놀란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싸워서 폭풍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폭풍 속에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본문 20절에 나오는 ‘두려워하다’라는 단어는 ‘프호베오’입니다. 그 단어는 단순히 ‘무서워하다’라는 뜻이 아니라 ‘경외하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무서워 떤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한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풍랑 속에서의 사투가 주님의 무관심 속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시면서 자기들의 믿음의 성숙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고 즉시 기쁘게 영접을 한 것입니다. 조금 지나친 비약 같으세요?

 

(요 6:20-21)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20절에서 쓰인 ‘내니’라는 단어는 ‘에고 에이미’즉 ‘나는 하나님이다’라는 뜻이라 했지요? 제자들은 그 말을 듣자 이 모든 풍랑의 사건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 속에 들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쁘게 주님을 배로 영접했고 그 배가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 다른 말로 그 사건이 목적하던 바가 이루어졌다는 어구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의 다섯 번째 기적인 주님께서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은 크게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 성도들의 구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과 동시에 현실의 눈을 통해 보게 되면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 우리 속에서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는지에 관한 친절한 해설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참 행복은 세상의 떡이나 세상의 힘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주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의 힘과 자원을 보태어 이루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참 행복은 영생, 즉 구원이 주어졌을 때 비로소 오게 되는 것이고 그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시고 영생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은 폭풍을 잠재우고 탄탄대로를 허락하시는 방법이 아닌 폭풍 속에서 함께 하시며 우리의 믿음을 키워 가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약속한 땅으로 이끄신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뒤에서 우리를 위해 함께 싸우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때로 폭풍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마치 우리 주님이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고 당혹해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침 삼킬 동안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계시는 우리 주님의 불꽃같은 눈을 기억하세요. 여러분의 뒤에서 여러분과 함께 싸우시는 우리 주님의 눈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함께 싸워 주시니까요.

 

(히 13:5-6) “5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그렇지요? 주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세요.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싸워 주십니다. 여러분, 절대 잊지 마세요. 우리 주님께서 싸우시는 대상은 사탄도 아니고 마귀도 아니고 귀신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싸움 대상은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사탄과 마귀와 귀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의 속성과 상태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존재들이지 결코 하나님의 전쟁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사단과 마귀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입김 한 번으로 다 소멸되어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을 이렇게 놔두시지요? 왜 그들을 존재케 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이 그들에게 고통을 당하게 놔두십니까? 우리의 믿음을 성숙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역사를 통해 하나님 백성들의 불순종과 불신앙과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것들을 하나하나 죽여 가심으로 결국에는 우리를 순종의 자녀로 참 신앙의 자녀로 완성해 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등을 돌리신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 뒤에서 여러분의 죄와 싸우고 계신 것입니다. 그 여러분의 인생의 풍랑 속에서 여러분의 죄와 불순종을 조금 씩 조금 씩 허물어 내고 계신 것입니다. 두려워 마세요.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모든 일들은 전부 하나님이 우리의 죄와 싸우시는 은혜의 자리인 것입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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