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가인, 라멕, 네피림, 니므롯, 바벨탑 그리고 아브라함(II)
(김성수 목사)
(창 11:1-9) “1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주께서는, 사람들이 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다. 6 주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8 주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주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지난주에 우리는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의 원 역사를 타고 흐르는 인간의 죄가 어떻게 바벨탑까지 흘러오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떠나 자신이 용사가 되고 자신이 스스로의 인생에 왕이 되어 살고자 하는 인간의 죄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하여 가인과 라멕과 네피림과 니므롯으로 이어져 바벨탑까지 이어졌으며 그러한 바벨의 정신은 인류의 역사 끝까지 이어지게 되어 최후의 종말에 그러한 바벨의 정신으로 이 땅을 살다간 모든 세력들이 전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한 죄악의 세력들을 총칭하여 바벨론이라 칭하였던 것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성경과 역사와 인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반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께서 그러한 바벨론 적 삶의 전형인 바벨탑 건립을 왜 그토록 미워하셨는가에 대한 첫 번째 항목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뭐였지요? 본문 4절에 나오지요? 인간들이 스스로 하늘에 닿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힘으로 하늘에 닿아 하나님의 지배와 권위를 폐하고 싶어 하는 죄인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했지요? 우리 인간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지배를 벗어나 스스로 왕이 되어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지어지기를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한시도 참 행복과 만족에 이를 수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며 살 때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하나님 대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올라 앉아, 하나님 나라 대신 자신들이 일구고 발전시킨 인간의 왕국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치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늘에 닿으려하는 죄인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에 나와 있는 두 번째 세 번째 이유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저주를 초래한 ‘인간들이 바벨탑을 세우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보세요.
(창 11:4)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왜 나쁜 것인가요? 하나님은 왜 이름을 내려고 하는 인간들을 심판하셨을까요? 여러분, 성경에서 이름이라는 것은 특히 구약에서의 이름은 단순히 호칭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특성과 가치와 본질과 위상을 나타내는 것이라 했지요?(광개토 대왕, 장수왕) 그러면 성경에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이름의 의미를 잘 이해를 하면 우리 인간들의 본질과 가치와 위상과 특성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 있겠지요?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처음 주어진 이름이 뭡니까?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그냥 ‘사람’이라는 뜻으로 우리 인간 전체를 그 속에 담고 있는 상징적인 이름이고요.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창세기 3장 15절의 원시 복음을 받은 후에 자신의 아내에게 주는 최초의 이름이 ‘하와’입니다.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70인 역에서는 그 하와를 생명이라는 단어 ‘조에’로 표기를 합니다. 이렇게 인간에게 최초로 주어진 이름인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두 이름 사이에 일어난 인간의 타락과 창세기 3장 15절을 통한 회복의 약속을 종합해 보세요. 그러면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이름의 의미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정리가 됩니다.
전체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이름, 즉 우리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은 ‘죽어야 할 티끌 같은 죄인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된 생명을 받은 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짧은 어구로 줄이면 인간의 이름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부여 받은 자’ 즉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자녀는 아비의 생명을 부여 받아 그 아비의 생명의 특성대로 사는 자를 자녀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 받은 자로서 아비인 하나님의 생명을 발산해 내고, 다른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러한 생명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찬양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신적 됨됨이, 신적 본질, 그리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 계시되는 상태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표적인 성품인 사랑이 드러난 십자가를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사건을 가리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라고 하시지요? 그 십자가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하신 일이 나타났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지시는 사랑과 용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분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아버지의 생명의 특성, 다른 말로 영생의 특성을 그 안에서 발산해 내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존재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우리의 이름을 내고’ ‘웨나아세 라누 쉠’이라는 어구를 직역하면 ‘우리가 스스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이름을 만들자’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이름을 주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이름을 주는 행위는 독점적인 지배권과 소유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창 2:19, 3:20, 왕하 23:34, 24:17)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아담이라는 이름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의 지배와 간섭을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기 위해 자기들 스스로에게 이름을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이름에 맞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을 팽개치고 자신들 스스로 자신들에게 이름을 주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름이겠습니까? 영걸, 영웅, 네피림, 거인, 유명한 자 등등의 이름을 주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필로(phillo)에 의하면 실제로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자기들이 쌓아 올린 벽돌에다가 자기의 이름을 써서 쌓았다고 합니다.
큰 교회나 신학교 등을 방문해 보면 대부분 거기에 신학교나 교회 건축 때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을 딴 방들이 있습니다. 그 건물을 건축할 때 세상의 힘을 보탠 영웅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지요. 그건 이름을 내고 싶어 하는 바벨탑의 망령인 것입니다. 신학교나 교회에까지 이런 바벨탑의 망령들이 들어와 있으니 세상은 오죽하겠습니까? 세상은 저마다 자기들의 이름을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과 자원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자기의 이름을 위해 탑을 쌓았다가 망한 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과 압살롬입니다.
(삼상 15:12) "12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누군가가, 사울이 갈멜로 가서 승전비를 세우고 나서, 거기에서 떠나 계속 행진하여 길갈로 내려갔다고 전해 주었다."
사울은 그 일로 왕의 자리에서 폐위를 당하고 전쟁터에서 처참하게 죽습니다.
(삼하 18:18) "18 ○평소에 압살롬은, 자기의 이름을 후대에 남길 아들이 없다고 생각하여, 살아 있을 때에 이미 자기 비석을 준비하여 세웠는데, 그것이 지금 '왕의 골짜기'에 있다. 압살롬이 그 돌기둥을 자기의 이름을 따서 불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오늘날까지도 '압살롬의 비석'이라고 한다."
압살롬이 요압에게 쫓기다가 나무에 걸려서 요압에게 심장을 찔려 죽은 후에 압살롬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그리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렇게 처참한 말로를 맞은 압살롬을 한 마디로 표현을 하면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운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이름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소비하는 자들의 말로는 이토록 처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온통 자기 스스로에게 영웅이라는 이름을 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멸망당할 인간들 중에서 어떤 한 무리를 건져서 그들에게 다시 하나님이 주시는 이름을 주실 것이라는 게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부터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이라는 사람을 건져내셔서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그를 통해 교회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계 3:12) "12 이기는 사람은,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 그는 다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또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 위에 써 두겠다."
우리 인간들은 원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창조가 된 피조물들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계시하는 ‘하나님 junior’로 지어진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생명력을 받아 그 생명력을 밖으로 발산해 내는 삶을 살도록 지어진 것입니다. 환언하면 하나님을 닮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 바로 인간인 것입니다. 그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 했지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창조의 목적인 것입니다.
(사 43:7) "7 나의 이름을 부르는 나의 백성,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창조한 사람들, 내가 빚어 만든 사람들을 모두 오게 하여라' 하고 말하겠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 절대 하위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세상에 공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이런 고백을 하지요.
(시 115:1) "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의중을 읽을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떠세요? 바벨탑을 쌓던 자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누구의 이름을 위해 사는가가 다릅니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자신들의 이름을 위해 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 48:11) "11 나를 위하여, 바로 나를 위하여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겠느냐? 내 영광이 남에게 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만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높으신 하나님의 처소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 다른 말로 그 하나님의 이름을 받아 그 안에서 높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을 짓고 있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아브람을 11장과 12장에서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 12:1-2)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잘 보시면 바벨탑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이름을 창대케 하려던 자들을 심판 하셨는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둘 다 이름이 창대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 의해 창대케 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하나님에 의해 창대케 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창대케 하려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처소로서, 그 하나님의 성품과 됨됨이, 즉 사랑하며, 용납해 주며, 섬겨주며, 참아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 때 높아지는 것이지 자신들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이 세상의 힘을 쌓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시간에 진정한 영걸은 이 세상에서 커다란 명예를 얻고, 엄청난 부를 쌓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고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대로 잘 살아내는 사람을 영걸이라 한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자랑하시는 아들은 자기들의 이름을 위해 이 땅에서 큰 업적 이루어 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잘 살아내는 아들인 것입니다.
(계 14:1) "1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서 있었습니다. 그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제 새 창조 속에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우리의 이름은 아담과 하와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 이름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과 동일한 이름입니다. 그 말은 우리가 종국에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인격과 그 분의 누리는 모든 것들을 함께 누리게 될 때 그러한 모습으로 높아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다가 결국 바벨론처럼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 17:3-5) "3 그리고 그 천사는 성령으로 나를 휩싸서, 빈 들로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한 여자가 빨간 짐승을 타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짐승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로 가득하였고, 머리 일곱과 뿔 열 개가 달려 있었습니다. 4 이 여자는 자주색과 빨간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는 금잔을 들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가증한 것들과 자기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였습니다. 5 그리고 이마에는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물건들의 어머니, 큰 바빌론'이라는 비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 사는 자들의 몸체를 보니 그게 바벨론이더라는 말입니다. 그 바벨론은 반드시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 요한 계시록의 논증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는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러한 세상 사람들과는 정 반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하지 않는 그런 삶,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이중계명을 잘 지키며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원리로 이 땅을 성실하게 살아냄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신적인 삶인 영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이름을 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창대케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저주를 초래한 ‘인간들이 바벨탑을 세우려고 했던 이유’는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입니다. 거기서 ‘흩어짐’으로 번역이 된 단어는 ‘펜’과 ‘나푸츠’의 합성어입니다. 히브리어 ‘나푸츠’는 ‘널리 퍼져나가다’라는 의미의 ‘푸츠’의 미 완료형으로 계속하여 널리 퍼져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그렇게 계속하여 땅에 흩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쓰인 ‘펜’은 ‘제거, 방해’를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 말은 인간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다른 말로 ‘흩어져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며 살라’는 하나님의 축복의 명령을 정면으로, 그리고 고의적으로 반대하여 제거하고자 하는 의도로, 절대로 흩어지지 않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연합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살기위해 바벨탑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들은 강제로 온 세상에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도 역시 신약과 비교해 보면 다소 의문스러운 부분입니다. 신약에서는 분명 하나님께서 ‘너희는 서로 하나가 되어라, 연합해라’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왜 하나가 되어서 자기들끼리 사이좋게 잘 살겠다는 데 왜 심판을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하나 됨은 성령 안에서의 하나 됨입니다. 그 말은 그리스도라는 머리를 중심으로 그 머리의 명령에 순종하는 지체로서의 하나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엡 4:3‐4,13,15) "3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4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한 희망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이,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15 우리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면서,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 됨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 자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일사불란하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살게 되는 하나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 됨 속으로 초청이 된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반상(班常)의 구별이나 주종(主從)의 구별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는 평등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요구하는 하나 됨은 그러한 자격과 능력을 부여받은, 다른 말로 성령을 받은 어떤 특별히 구별된 공동체에게 국한된 하나 됨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 됨은 절대 인간들의 능력이나 열심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들을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의 부으심을 입은 자들만이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언제 일어났습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났지요? 적어도 15개 국 이상에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의 신분은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그렇게 언어도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고, 성별도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이 하나로 묶여 한 가지 언어를 쓰는 자들처럼 서로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 됨의 회복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에서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 됨을 이루려 하는 인간들이 어떠한 차이가 있는 지 잘 생각해 보세요. 오순절 날 성령에 의해 교회가 하나 되는 모습은 바벨탑을 쌓으며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 연합하려 했던 자들이 하나님의 저주로 흩어지게 된 그 사건의 종말론적 회복인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 됨은 너희들이 너희들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연합하는 그런 하나 됨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이 부어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그 분이 하나님께 목숨을 바쳐 순종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로서의 하나 됨이라는 것을 두 사건을 통하여 대조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광과 유익을 위해 하나 됨과 연합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죄인들의 속성은 누차 말씀드린 것처럼 자기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비롯한 자기 이외의 모든 존재들이 자기를 위해 존재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정말 사심 없이 함께 뭉칠 수 있을까요? 그러한 자들의 연합은 오직 자기의 필요에 의한 연합일 뿐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연합은 자기중심의, 자기 이익을 기준으로 하는 연합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의 필요가 다 채워지지 않으면 세상은 다른 모양의 더 큰 연합을 추구합니다.
근대에도 그러한 이기적인 세상 연합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표면화 되어 나타났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시작된 구미 열강과 러시아 일본 등의 제국주의 경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었지요? 그들은 각기 자기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 왕국의 건설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야망은 달성되지 못하고 그 여파로 1차 세계대전이라는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기들의 탐욕을 성취는 시키되 그 후유증은 없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그게 국제 연맹이라는 세계 연합 단체였습니다. 우리 인간들끼리 싸우지 말고 서로 연합해서 행복한 세계, 지상낙원을 만들어 보자는 모토 아래 1920년에 국제 연맹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큰 나라들이 서로의 국익 때문에 서로 싸우게 되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을 일으킨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탈퇴로 1939년에 완전히 해체 되었습니다. 그렇게 전쟁을 치르고 난 세계는 이번에는 국제 연맹보다 더 크고 단단한 연합체를 구성하여 또 다시 세계 평화와 세계 정의를 구현해 보자고 UN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연합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고 스스로 행복에 이르려 하는 바벨탑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저마다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연합을 하고 바벨탑을 쌓습니다.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 온 세상에 퍼져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자들로 당신의 백성들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성령 안에서의 하나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뭉쳐서 스스로의 안전을 지켜보겠노라고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연합이라는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들의 연합은 계속해서 와해되었고 ‘자국의 이익을 배제한 진정한 연합은 없다’는 잠정적 결론 하에 인간들은 껍데기뿐인 연합을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자기들의 유익과 필요를 위해서만 사는 세상 사람들의 연합의 시도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고 스스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교만한 연합을 절대 용인하지 않으신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합은 성령의 부으심을 입고 머리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로를 사랑으로 용납하고 섬겨줄 때 그 때 진정한 하나 됨의 연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진짜 연합의 열매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한번 돌아보자고요. 우리가 정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그 한 영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하나 됨, 즉 섬김과 용납함과 사랑함의 연합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통하여 분투하고 추구하여야 할 것이 바로 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엉뚱하게도 그러한 연합체 속에서 여전히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러면 우리는 예배당 안에서 여전히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기적인 세계관과 인생관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삶을 견지하면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우기고 있는 그런 집단은 바벨탑을 쌓는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겉으로는 하나가 되어 연합이 되어 있는 듯 보이지만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는 하나님을 알고 나 자신을 알고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하나님 나라를 알기에 세상 사람들처럼 우리를 자랑하고 우리의 이름을 내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 없이 우리끼리 연합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 지금은 좀 바보 같고, 어리숙해 보이고, 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러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잘 살아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영웅이셨던 우리 주님이 살다 가신 삶이고 그게 바로 영생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고 아무리 우리의 잔꾀를 사용하여 하나님 몰래 바벨탑을 쌓는다 하여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 무수한 우리 인생의 바벨탑들을 속속들이 찾아내셔서 부수어 버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영광과 우리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 2:2‐4) "2 어찌하여 세상의 임금들이 나서고, 어찌하여 통치자들이 음모를 꾸며 주를 거역하고, '기름 부음 받은 분'을 거역하면서 이르기를 3 "이 족쇄를 벗어 던지자. 동여맨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하는가? 4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웃으신다. 내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
여러분, 이 긴 역사 동안에 인간들이 자기들 스스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내어놓은 수많은 해답들을 보세요. 민주주의, 공산주의 등의 이데올로기며, 수많은 종교, 르네상스, 과학, 문명, 문화 그 어느 것이 인간들을 참 행복으로 이끌었습니까? 인간들은 끝없이 역사 속에서 자기들 힘으로 행복에 이르겠다는 바벨탑들을 쌓아왔고 그 것들을 역사의 해답으로 제시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도들은 허사로 끝났고 지금도 허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를 짚어 보면서 참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들이 쌓아 올린 바벨탑들로 내려오셔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박살을 내심으로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문예 부흥을 통한 계몽과 교육이라는 바벨탑은 세계 양차 대전으로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공산주의라는 바벨탑은 연이은 공산권의 붕괴로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자본주의라는 바벨탑 역시 피 튀기는 분규와 끊이지 않고 점점 흉폭 해 지는 범죄의 모습으로 허무셨습니다. 과학 문명이라는 바벨탑도 허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인류가 발전시켜온 과학 문명은 인류 스스로를 살해 하는 살상 무기 제조에 가장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류가 내어놓은 행복에 이르는 길에 대한 해답을 모두 허물어 버리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괴롭히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행복의 길을 하나하나 다 허무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행복이 그러한 인간과 세상의 것으로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섬세한 배려는 성도의 삶 속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삶 속에서도 그들이 이 세상의 것들로 행복에 이르려 차곡차곡 쌓아놓은 바벨탑들을 허물어 가십니다.
(신 8:1-2) "1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가 살아서 번성할 것이며, 주께서 너희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2 너희가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 그렇게 오랫동안 너희를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너희를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너희의 마음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1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행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놓고 그것을 잘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시험을 하시는데, 다른 말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시는데 그 시험의 방법이 광야를 걷게 하고 그들을 낮추시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보지요. 여러분이 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졌다고 가정을 해 보자고요. 다행히 좋은 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고 한동안 목발을 짚고 다녔습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다리가 다 낳은 것 같아서 의사에게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그 사람에게 당신이 의지하던 목발을 놓고 한 번 걸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목발을 의지하고 걷는 것이 너무 익숙해 져서 쉽게 목발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 때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목발을 강제로 빼앗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걸어보라고 합니다. 그 때 그 사람이 의지해 오던 목발을 빼앗기고도 잘 걸을 수 있으면 그 사람은 다 나은 것이지만 여전히 목발 없이는 걸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나은 사람이 아닌 것이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너희는 이 세상 것 의지하지 말고 나만을 믿고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는 하나님의 요구를 듣습니다. 열심히 노력도 하고 의지도 발동하여 그 말씀을 따라 살아봅니다. 때로는 그렇게 노력하고 열심을 내는 자신이 자랑스럽고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미 버렸다고 하는 우리의 바벨탑을 진짜 허물어 버리십니다. 목발을 빼앗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돈, 명예, 자식, 건강, 일 등등의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행복에 이르려 했던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허물어 버리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런 처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일 그 상황에서 ‘하나님 왜 나한테 이렇게 대우를 하십니까? 내가 하나님께 뭘 잘못했기에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나는 그것 없이는 절대 견딜 수가 없습니다.’하고 대든다면 그 사람은 아직 자신의 바벨탑을 허물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 조금 아쉽고 불편하기는 하지만 지금 주님께서 허물고 거두어 가신 것들은 제가 주님을 믿기 전에 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도구로 착각하며 살던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그 것들이 없으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들이 허물어졌는데도 이렇게 담담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 때문에 행복 합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목발 없이 걷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쌓고 있는 바벨탑의 종류가 많은 것 같지만 사실은 ‘나’라는 단어 하나로 축약이 됩니다. 우리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이 기대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나’를 신뢰합니다. 그래서 나의 능력과 나의 자원을 사용하여 이 세상의 바벨탑들을 쌓으며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가 없으면 절대 못 살아요. ‘나’가 내 행복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나’가 잘 되어야 ‘나’가 행복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의 근거는 ‘하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행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고 신뢰하는 성도의 ‘나’를 부인 시키시고 그 신뢰와 기대를 ‘하나님’께로 옮기시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게 사기도 당하게 하시고 억울한 누명도 쓰게 하시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손해도 보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 나의 바벨탑들이 무너져 내리면서 ‘나’라는 거대한 바벨탑의 실체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나님 말고 의지하고 있는 행복의 수단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바벨탑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건강입니까? 자식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일입니까? 만일 그것들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허물어진다면 여러분은 그 때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감사하실 수 있으십니까? 만일 아니라면 여러분은 아직도 ‘나’라는 바벨탑을 열심히 쌓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발을 놓으셔야 합니다. 그 목발을 놓고도 씩씩하고 당당하게 걸으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산 자’입니다. 그게 사망을 치료받은 이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 목발을 놓으실 자신이 없으시다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 땅에서 여러분이 의지하고 있던 목발들이 하나하나 치워져 갈 때 너무 당황해 하지 마세요. 혹시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등을 돌리셨나 하고 서운해 하지도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내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고 떠나지 아니하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침 삼킬 동안도 쉬지 않으시고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지키심이 우리에게서 목발을 치워가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욥을 당신의 자녀로 성숙시키기 위해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때 욥은 ‘하나님 왜 침 삼킬 동안도 나를 가만 두시지 않고 괴롭히십니까?’ 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하나님은 묵묵히 당신의 백성의 영적 유익을 위해 자식의 고통을 지켜보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새디스트가 아닙니다. 자식이 고통당하는 모습을 즐기는 분이 아닙니다. 그 자식의 고통 속에서 그 자식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 아버지입니다. 그럼에도 자식의 유익을 위해 놔두시는 것입니다.
우리 큰 아이가 태어나면서 양수를 먹어서 오랜 시간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의 온 몸에 보기에도 무서운 커다란 주사 바늘들이 여기 저기 꽂혀 있었고 그 주사 바늘들을 통해 아기에게 약과 영양분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아비와 어미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차라리 내 온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우리 아기를 저 고통 속에서 건져 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는 고통당하는 자식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그 자식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사바늘들을 빼 버리면 그 아이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도 그 자식의 고통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목발을 빼앗기시고 슬퍼하고 계십니까? 우리 아버지는 더 아파하십니다. 그러나 그게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기에 놔두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너무 유명해 지려 하지 마세요. 너무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려 하지 마세요. 다른 이들이 모두 나를 존경하고 좋아해 주기를 원하지 마세요. 그렇게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려 하고 인정받으려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서 목발을 놓지 못하게 하는 아주 나쁜 마음인 것입니다. 바울의 이 일갈을 들어 보십시오.
(갈 1:10)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이 세상의 힘을 못 가졌다고 해서 여러분을 인정해 주지 않고 존경해 주지 않고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서운해 하지 마세요. 그건 세상이 인정하는 여러분의 목발이 하나님에 의해 허물어졌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운해 하지 마시고 부끄러워하지도 마세요. 그냥 그 자리에서 ‘정말 나는 이 세상이 자랑하고 의지하고 있는 목발들이 없는데도,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이렇게 무시하는 데도 이렇게 하나님만으로 행복 하구나’라는 사실이 확인 되시면 기뻐하십시오.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나만을 사랑해 주고 나만을 존경해 줄 것을 기대하지 마세요. 물론 서로 서로 사랑해 주며 존경해 주며 살아야지요. 그러나 여전히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 사랑 기대하다가 오히려 분란이 일어납니다. ‘왜 나만 사랑해 주지 않는 거야? 왜 나를 인정하고 존경해 주지 않는 거야?’가 분노가 되고 복수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해 주세요. 상대방에게서 돌아 올 반대급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먼저 사랑해 주십시오. 기독교의 사랑은 항상 나의 손해와 나의 상해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보고 내가 다쳐서 상대방이 유익을 보고 상대방이 안전해 지는 것을 기독교의 사랑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로 나타난 것입니다.
상대방에게서 나에게 돌아 올 어떤 반대급부를 노리고 사랑을 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기생충 같은 사랑입니다. 기생충들은 자기가 기생하고 있는 생물이 살아있을 때는 영원히 그 곁을 떠나지 않을 것처럼 단 물만 쏙쏙 빼 먹고 살다가 그 생물이 죽으면 곧바로 밖으로 다 기어 나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그건 기생충의 사랑과 다름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건 ‘난 기생충입니다’라고 광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살기로 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날마다 지는 사람들입니다. 손해 보세요. 내가 해(害)를 입으세요. 그리고 상대방이 유익을 보고 상대방이 살아나게 하십시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 하세요.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면서 그 사랑을 하세요. 괜히 ‘내가 이렇게까지 잘 해 주는데 자기 나 죽으면 당신도 따라 죽을 거야?’ 이런 거 기대하지 마세요. (우리 아내) (로미오와 줄리엣) 자기를 비워서 상대방을 살리는 하늘의 삶, 하늘의 사랑을 하는 이들이 바로 이 세상의 바벨탑인 ‘나’를 허물어 버린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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