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에 나타난 동행의 삶
(김성수 목사)
(창 5:1‐32) “1 아담의 역사는 이러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2 하나님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들을 창조하시던 날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고 하셨다. 3 ○아담은 백서른 살에, 자기의 형상 곧 자기의 모습을 닮은 아이를 낳고,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다. 4 아담은 셋을 낳은 뒤에, 팔백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5 아담은 모두 구백삼십 년을 살고 죽었다. 6 ○셋은 백다섯 살에 에노스를 낳았다. 7 셋은 에노스를 낳은 뒤에, 팔백칠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8 셋은 모두 구백십이 년을 살고 죽었다. 9 ○에노스는 아흔 살에 게난을 낳았다. 10 에노스는 게난을 낳은 뒤에, 팔백십오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1 에노스는 모두 구백오 년을 살고 죽었다. 12 ○게난은 일흔 살에 마할랄렐을 낳았다. 13 게난은 마할랄렐을 낳은 뒤에, 팔백사십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4 게난은 모두 구백십 년을 살고 죽었다. 15 ○마할랄렐은 예순다섯 살에 야렛을 낳았다. 16 마할랄렐은 야렛을 낳은 뒤에, 팔백삼십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17 마할랄렐은 모두 팔백구십오 년을 살고 죽었다. 18 ○야렛은 백예순두 살에 에녹을 낳았다. 19 야렛은 에녹을 낳은 뒤에, 팔백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0 야렛은 모두 구백육십이 년을 살고 죽었다. 21 ○에녹은 예순다섯 살에 므두셀라를 낳았다. 22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뒤에,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3 에녹은 모두 삼백육십오 년을 살았다. 24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사라졌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 25 ○므두셀라는 백여든일곱 살에, 라멕을 낳았다. 26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은 뒤에, 칠백팔십이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27 므두셀라는 모두 구백육십구 년을 살고 죽었다. 28 ○라멕은 백여든두 살에 아들을 낳았다. 29 그는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하고 "주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뒤에, 오백아흔다섯 살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31 라멕은 모두 칠백칠십칠 년을 살고 죽었다. 32 노아는 오백 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다.”
오늘 창세기 5장을 다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5장은 보시다시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라인, 셋의 족보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미처 다 설명해 드리지 못한 이 족보에 계시된 복음의 메시지를 마저 다 설명해 드린 후에 이 족보의 정점에 있는 에녹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살아내야 할 동행의 삶에 대해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이 족보가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메시지를 ‘하나님의 형상을 이어받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가인의 후예들이 멋있는 모습으로 성을 쌓고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켜가며 자기에게 해를 입히는 자들을 살해하며 ‘난 절대 죽을 수 없어’라고 외치며 사는 동안 그들은 모두 ‘죽었더라‘로 자신들의 삶을 나타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도의 죽음의 삶, 비움의 삶은 생명을 낳게 되고, 그렇게 해산을 하는 여자들, 즉 교회들만이 구원을 얻은 참 성도라는 것을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해 확인을 했습니다.
그러한 성도의 죽음의 삶은 사실 죄로 인해 들어온 사망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죽음의 삶, 비움의 삶,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은 이 저주의 땅에 존재하는 모든 육신은 다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안 죽으려고 악을 쓰다가 죽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옛사람을 죽이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 사람을 죽이기 싫어 안간힘을 쓰며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간 사람들은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지금 이 땅에서 옛 사람을 죽여 가는 삶을 열심히 추구하다가 가는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지난주에 공부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라는 구절이 지닌 무서운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온통 영원한 사망을 향한 죽음들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서 옛 사람의 죽음을 위해 분투하는 삶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야말로 영원한 죽음을 이기고 승천을 하는 삶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인 창세기 5장의 족보 속에 에녹의 이야기로 설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들어 있는 에녹의 승천은 단순히 ‘믿음이 좋은 사람은 육신의 죽음도 통과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을 독려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에녹의 승천사건은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죽음의 사슬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건짐을 받게 될 영생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될 것임을 교회에게 그림으로 설명을 해 주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창세기 5장의 족보가 담고 있는 또 다른 메시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선물 받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에 관한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하나님의 일에 관해 한 마디로 답을 해 주셨습니다.
(요 6:28‐29) “28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하나님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유일한 일인 예수를 믿는 일이 오늘 족보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공부하시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가 더욱 선명해 지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세요.
(창 5:1‐2)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하나님의 라인, 여자의 후손의 라인을 시작하는 족보에 또 다시 창세기 1장의 언어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살펴 볼 중요한 어구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어구입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 ’생명력‘ ’바라크’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다 죽음으로 던져지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속성인 ‘공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복은 인간들에게 철회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한 번 약속하신 것이 철회되어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계획하신 것을 외부의 방해로 말미암아 철회를 하셔야 한다는 것은 그 분의 전지전능하심을 부인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방해 속에서도 당신께서 하신 창세기 1장의 그 축복의 약속을 택한 무리 속에서 지켜 가시고, 그러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반드시 이루어 내십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창세기 1장의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신 것이 아니라 아담과 아벨과 셋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버린 저주받을 인간들 사이에서 하나님에 의해 택해지는 셋의 후손들의 족보를 시작하시면서 창세기 1장의 그 축복의 이야기를 반복하여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께서 처음 계획하신 대로 어떠한 방해 속에서도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흘러가고야 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유혹이나 하와의 타락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오롯이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한 복의 선언이 창세기 9장에도 나옵니다.
(창 9:1) “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악들을 홍수로 쓸어버리시고 그 세상에서 선택을 받아 건져진 노아와 노아의 아들들에게 또 다시 창세기 1장의 그 복을 다시 약속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복은 아브라함에게도 주어집니다.
(창 12:2‐3)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노아의 때나 아브라함의 때나 공히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 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으로 부른 아브라함조차도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 팔았을 정도이니까 그 세상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 악한 세상은 하나님의 복과는 전혀 관계없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때마다 당신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당신이 선택하신 어떠한 사람들에게 ‘복’의 회복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을 성경은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2절의 ‘복’ 이야기는 모두 다 죽어야 할 죄악 된 세상 속에서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것처럼 선택받은 어떤 무리를 향한 ‘복의 회복‘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꼭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의 출발은 항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구약성경을 잘 읽어보시면 그 ‘복’은 항상 아버지로부터 장자에게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구약의 여러 곳에 아버지들이 죽기 전에 장자인 아들에게 축복을 해 주는 장면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것이 너무나 중요하기에 야곱은 속임수를 써서 그 장자의 축복을 훔친 것입니다. 그 것은 장자들의 총회, 즉 교회를 상징하는 장자들에게 아버지로부터 복이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은 자들은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이어받게 되고, 그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누리며 살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그 ‘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담은 영적인 의미의 ‘장자’들에게 계속해서 이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이어진 그 하나님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지요? 그게 누가복음 3장의 족보입니다.
(눅 3:23‐24,34,37‐38)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24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34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37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38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오늘 본문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이 족보를 잘 연결시켜 보세요. 지금 우리가 읽은 누가 복음의 이 족보에서 예수께로 이어진 그 복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최초로 아담에게 부어주셨던 그 복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진 그 복은 이 땅의 죄악이 관영하여 그 죄 속에 있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역사적 객관적 동의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시 약속해 주신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해 주셨던 복의 언약처럼‐ 바로 그 ‘복‘인 것입니다. 바로 그 것을 설명하기 위해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라는 구절이 반복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은 예수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누가복음 3장의 족보가 창세기 5장의 족보를 모두 포함하고 하나님으로 끝이 나는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아버지로부터 장자들, 교회들에게 전해진 그 복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 ’바라크‘가 뭐라고 했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생명력이라 했습니다.
(요 6:26)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여기서 아들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말은 아들에게 생명이 없었는데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그 하나님의 생명인 ‘복’ ‘영원한 생명’의 전달자로서의 권한을 주셨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 안에 ‘생명’ ‘바라크’ ‘복’이 있다고 성경이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 1:4)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렇게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하나님의 생명, 즉 영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복, 영생의 전달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영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로부터 장자들에게 복이 전해지는 것과 같이 그렇게 우리에게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족보에서도 보았듯이 그 ‘복’을 대대로 전해준 아버지들을 계속 따라 올라가 보면 그 맨 위의 아버지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의 진짜 아버지, 오리지널 아버지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택한 자들, 즉 영적 장자들인 너희들에게 축복을 해준 너희들의 진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성도들을 축복하시는 성도들의 진짜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 구약에서 아버지들이 장자에게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고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가?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그냥 관념적으로 던지시지 않고 성경을 통해 이렇게 선명하게 족보로 확인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의 ’톨레도트‘ ’구속사를 담은 족보들‘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가 장자인 우리를 축복하신 진짜 아버지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족보들을 통해 우리 성도들과 당신이 어떠한 관계인지 정확한 관계규명을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이 단지 관념적이 아닌 역사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질 것임을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봐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가 진짜로 역사 속에서 인간의 족보 속에서 이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니?‘ 하고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궁극적인 하나님의 언약이 뭡니까?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이 뭡니까?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다른 말로 아버지의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는 자식들을 창조해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부자지간으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담고 있는 궁극적인 내용입니다.
(고후 6:16‐18)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어울리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서, 따로 떨어져 있어라. 부정한 것에 손을 대지 말아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 18 "그래서 나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될 것이다. 나 전능한 주가 말한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부터 흐르는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언약이 창세기 5장의 족보와 누가복음 3장의 족보에서 실체로, 역사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이 우주의 역사는 모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아버지 자리를 회복하시기 위해 만들어 가시는 역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 우주의 역사의 목적까지도 알아버린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는 것을 안 우리 자녀들은 이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자식은 반드시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우리 세 아들들을 보면서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가르쳐 주지 않은 저만의 비밀들이 때로 우리 아이들에게서 문득 문득 나올 때 참 신기합니다. 기침 소리, 걸음걸이, 어렸을 때의 습관, 버릇 이런 것들이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우리 아이들에게서 보입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아버지를 닮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굳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것을 이렇게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밝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서 아버지의 성품과 아버지의 공유 적 속성들을 드러내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속성들이 피조물들에게 보여 지고 나타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한다고 했지요? 우리 성도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속성들을 닮아가며 살아내는 삶을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것이 바로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 지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 지를 알아야 그 분을 닮지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 가는 삶이 이 땅에서 성도가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이라면 우리는 열심히 그 분을 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범죄를 지적하거나, 그들에게 경고를 하거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에서 ‘우리 똑바로 살자, 범죄 하지 말자’라는 말과 함께 늘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호 4:1)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상태로 표현을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선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고 호세아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호 6:3)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왜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까? 그 분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자녀인 우리가 그 분을 잘 배우고 알아 그 분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닮음의 삶이 우리에게서 죄를 몰아내고 거룩한 자로 지어 가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 진 책이 무슨 책입니까? 학자들은 욥기를 꼽습니다. 왜냐하면 욥이 족장시대 초기인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이고 욥기에 기록된 여러 가지 정황들이 그 사건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쓰지 않았으면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욥기가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 진 책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쓰여 진 성경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기독교란 무엇인가?‘ 에 대한 설명이 그 책의 중심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욥기를 한 번 되짚어 보자고요. 욥기는 기독교라는 것은 권선징악의 문제로 착하게 살면 상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사람의 잘잘못에 관해 상과 벌을 주는 그런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이신 지를 알고 그 분께 온전히 항복하여 그 분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당대에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선하게 살았던 욥에게 환난이 닥쳤습니다.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누가 나에게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지적해 보아라’라고 말을 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욥에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친 것입니다. 욥이 욥기 31장에서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는가?’라고 항변을 하자 하나님께서 38장부터 무려 3장에 걸쳐 당신이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하신 분인지를 욥에게 직접 설명해 주십니다.
(욥 38:1‐6) “1 그 때에 주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2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3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5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6 무엇이 땅을 버티는 기둥을 잡고 있느냐? 누가 땅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그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에 관해 욥에게 자상하게 설명을 해 주시자 욥이 결국 하나님 앞에 항복을 합니다.
(욥 42:1‐6) “1 욥이 주께 대답하였다. 2 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4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이게 욥기의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욥기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는 단순히 권선징악의 문제로 착하게 살면 상을 받고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잘잘못에 관해 상과 벌을 주는 정도의 그런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그 아버지에게 항복하며 자발적인 순종을 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단순히 ‘착하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자‘를 모토로 성자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며, 그 하나님이 우리의 진짜 아버지라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 분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의뢰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나를 목숨 바쳐 사랑해 주시는 우리 진짜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는 그 분의 선하심에 의지하여 나의 모든 상황과 처지와 여건들을 다 그 분께 의뢰하고 그 아버지의 처분에 만족하며 사는 것, 그것이 진짜 신앙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한 신뢰관계를 회복한 사람은 그 아버지가 설사 나를 하늘나라에서 초가삼간에 집어넣는다 할지라도 행복해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이 중요하지 그 분이 주시는 환경이나 조건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제 밤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 둘째 아이가 친구를 칼로 살해하고 경찰서에 잡혀가는 꿈이었습니다. 저는 꿈속에서도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이게 꿈이게 해 주세요‘ ’하나님 제발 이게 현실이 아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하며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그 곳에는 우리 아이는 보이지 않고 재판관과 경찰이 무서운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제가 우리 아이 얼굴을 한번만 보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더니 그 재판관이 벌써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는 곧 죽게 될 것이라고 말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그 사람들에게 울부짖었습니다. 사실은 우리 아이가 그런 게 아니고 제가 그런 거라고 저를 잡아가라고 그 사람들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매달렸습니다. 제가 대신 죽을 테니까 제발 우리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자 저는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절대 우리 아이는 무고하게 사람을 살해할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제발 다시 한 번 사건을 조사해 달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잠이 깼습니다. 그 꿈이 얼마나 생생하던지 그 새벽에 잠이 깨어 도저히 다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저는 새벽 내내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인 저의 관계에 대해 묵상을 했습니다. 우리가 배웠듯이 우리가 아무리 작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그 것을 살인과 방불한 더러운 죄로 보십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류가 처음 저지른 죄를 ’가인의 살인‘으로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범죄의 형량은 모두 사망입니다. 사형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매일 매일 짓습니다. 그럴 때 우리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그렇게 제가 사형에 해당하는 미움, 다툼, 시기, 질투 이러한 죄를 범할 때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 아들 대신 내가 대신 죽겠다고 나서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실제로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게 아비의 마음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골고다 언덕에 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의미를 확인하고 나니까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우리 아버지가 누구이시며 우리를 향하신 그 분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깊이 알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는 것이고 내가 원하고 나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을 하기보다는 ‘아버지가 기뻐하실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그 분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이 그 분을 닮는 삶인 것이고 그러한 삶을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창 5:24)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히 11:5)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추구하며 영위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다음절을 보세요.
(히 11:6) “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신 줄 알고 그 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도가 이 땅에서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이야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인 것을 알고 그 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왜 우리는 ‘믿음‘하면 늘 ’예수를 믿는 믿음’을 떠올리지요? 바로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만큼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월자 이십니다. 초월이라는 것은 제한된 이성과 시각으로는 절대 감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월자 이신 하나님은 제한된 이성과 시각 안으로 들어오셔야 사람들에게 인식이 될 수 있고 설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과 속성과 그 분의 위대하심을 설명해 주고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이 된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요 14:1)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9‐10) “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한다는 말이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자기 계시에 의해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이고, 그 믿음에 의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자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 믿음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 삶을 성경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직 그들만이 죄의 삯인 사망과 관계없이 영광스러운 승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에녹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경은 에녹의 이야기를 통하여 ‘너희들은 모두 에녹처럼 살아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모두 에녹이다’라고 선포를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에녹처럼 살 수밖에 없음을 천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에녹이 몇 살까지 살았다고 나옵니까? 365살을 살았습니다. 365는 1년 365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이 에녹의 수명을 365년으로 기록을 한 것은 에녹의 삶의 전체 여정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에녹의 삶은 1년이 365일인 것처럼 그 중 하루가 빠지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이 그의 삶의 전체 여정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아무리 에녹이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그는 육신을 입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삶이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의 삶이 온전했음을 암시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 바로 온전한 삶을 살다 가신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에녹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그에게 전가된 예수의 삶이었음이 여기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게 된 그는 더럽고 추악한 세상 속에서 주님의 재림과 그로 말미암을 심판을 선포하며 살았습니다.
(유 14‐15) “14 ○이런 사람들을 두고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아라, 주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오셨으니, 15 이것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지른 온갖 불경건한 행실과, 또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님을 거슬러 말한 모든 거친 말을 들추어내서, 그들을 정죄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보세요. 벌써 아담의 칠 대 손 에녹 때부터 주님의 재림과 심판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시면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임하셨다‘라고 과거로 표기가 되어 있지요? 그 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기법입니다. 그러한 것을 ’결과동사‘라고 하는데, 히브리 사람들은 확실하게 일어날 미래의 일은 과거로 표현을 합니다. 따라서 에녹은 이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확실하게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가 그 시대에 벌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알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믿음으로 그가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에녹의 아들의 이름이 뭡니까?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는 ‘창던지는 자‘라는 뜻입니다. 창을 던진다는 그 단어 자체가 심판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에는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고대 시대의 전쟁에는 꼭 창던지는 자가 앞장을 서서 전쟁을 했습니다. 부족이나 마을에서 가장 창을 잘 던지는 자가 성 맨 앞에 서서 창을 던져서 상대방의 적장이나 중요한 인물들을 쓰러뜨리면 그 때 주력부대가 공격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창던지는 자가 죽으면 그 전쟁은 진 것이나 진배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배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므두셀라‘라는 이름을 들으면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라는 개념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에녹이 자기 아들을 낳고 그 아들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다는 것은 에녹이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아들이 죽는 날 이 죄악 된 세상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계시를 이미 받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나요? 하나님께서 홍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신 것이 노아가 600살 되던 해입니다. 그 때 무드셀라가 몇 살입니까?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노아를 낳은 것이 182세입니다. 그리고 라멕의 아버지 므두셀라가 라멕을 낳은 것이 187세입니다. 합하면 369입니다. 거기에 심판 때의 노아의 나이 600을 더해보세요. 969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났던 므두셀라의 손자 노아가 600살 되던 해는 므두셀라가 969세가 되던 해입니다. 므두셀라가 몇 살에 죽었습니까?
(창 5:27) “27 그는 구백 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인 노아의 홍수는 므두셀라가 죽은 해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로 정확 무오하게 완성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 5장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녹은 그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세상에 심판을 선포하며 살았습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직 눈앞에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에 실체로 받아들이고 사는 삶을 믿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바로 그 믿음의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 것이고 이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대담하게 그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살다가 간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죄의 삯인 사망과 전혀 관계없이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살게 되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부터 단 하루도 막 살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므두셀라가 감기만 들어도, 길을 가다 넘어지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그 아들이 죽는 날 심판이 임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을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삶을 가리켜 종말론적 신앙이라 부릅니다. 바로 오늘 주께서 나의 종말이 올지 모른다는 그러한 절박한 마음으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자들을 우리가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며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 애를 쓰는 삶을 살기에 그들을 가리켜 아버지와 동행하는 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죽었더라, 죽었더라’로 끝나는 세상의 죄악 속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이 땅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졌다’는 에녹의 삶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살아도 되고 안 살아도 되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도에게서 나와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미 6:8) “8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뭡니까? 공의를 행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삶,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오래 오래 기다려 주시면서 양육을 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우리의 동행자이신 하나님과 다른 길로 가려고 합니다. 우리의 욕심이, 우리의 죄악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의 동행자는 우리가 곁길로 빠지는 것을 막으십니다.
(호 2:6‐7) “6 그러므로 내가 이제 가시나무로 그의 길을 막고, 담을 둘러쳐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겠다. 7 그가 정부들을 쫓아다녀도, 그들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찾아다녀도,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이제는 발길을 돌려서 나의 남편에게로 돌아가야지. 나의 형편이 지금보다 그 때가 더 좋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길이 때때로 그렇게 막히는 것이고 여러분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의 동행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은 얼른 하나님의 의중을 알아채고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미 공군 대위 였던 에드워드 머피 대위가 주장한 머피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지요? 우리는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으면 이내 머피의 법칙을 떠올립니다. 오랜만에 마음먹고 목욕을 하러 가면 꼭 그 날이 정기 휴일이라거나, 내가 응원하는 팀은 꼭 진다거나, 미팅 나가서 짝을 지을 때 저 여자만 빼고 다른 사람은 다 괜찮아 하면 꼭 그 여자가 걸리는 그런 때에 우리는 머피의 법칙이라는 말을 씁니다. 여러분 그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간들의 피해망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간들은 신은 나의 일을 방해하는 존재라는 인식이 무의식 속에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은 그러한 피해의식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확률적으로 목욕탕 갔을 때 정기 휴일이었던 때가 더 많습니까? 아니면 목욕을 하고 온 적이 더 많습니까?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진 것이 정말 내가 응원해서 진 것일까요? 그 팀이 못해서 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이러한 머피의 법칙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안 들어 주신다‘라고 원망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우리의 잘못된 길을 막고 올바른 길을 열어두고 계신 우리의 동행자이신 것입니다. 저 같으면 그렇게 말 안 듣는 자식 다리몽둥이라도 부러뜨려서 주저 앉혀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동행자는 이리 막아주고 저리 막아주시면서 끈질기게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이가 죽으면 심판이 임한다’는 이름을 가진 므두셀라가 969세로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지 아세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므두셀라의 장수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죽으면 심판이 임하기에 그를 가장 오래 살려 두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이 이 땅에서 받은 상이 뭡니까? 장수했나요? 천 년 가까이 살았던 열 족장에 비하면 에녹은 삼분의 일도 안 되는 인생을 살다가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대단한 부자로 만들어 주셨나요? 그런데 분명 히브리서에는 에녹이 하나님은 상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고 나옵니다. 그러면 에녹은 어떤 상을 받은 것입니까?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믿고 동행의 삶을 살았던 에녹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상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요 11:25‐26)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5:24)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에녹의 삶은 예수를 믿고 영생을 상으로 얻은 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땅에서 이미 영생을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생명력을 우리의 힘을 삼아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암 3:3) “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두 사람이 뜻을 합치지 못하고는 절대 동행의 삶이 나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생의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부지런히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 그 분의 뜻에 순종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동행을 하게 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특징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배우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이 자기를 뜨겁게 데우는 경험을 자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글로바와 마리아 두 제자가 예수님과 동행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들에게 제일 처음 나타났던 특징이 뭡니까? 주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 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나타난 특징이 뭐지요? 그 길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뛰어가 주님을 증거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 해 내기를 즐거워 할 뿐 아니라 에녹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증거하고 싶어 못 견디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그게 바로 영생의 삶인 것입니다. 왜 성경이 굳이 아담의 칠 대 손 에녹의 때에 사망이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장면을 집어넣었을까요? 칠이라는 숫자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안식의 숫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칠일 째에 안식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칠이라는 숫자는 안식의 수, 완전수로 쓰여 집니다. 그 말은 아담의 칠 대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완성하시고자 하는 안식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이 땅에서 이미 안식의 맛을 보고 계셔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벗어버리고 거기서 얻는 충만한 행복을 맛 보셔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에녹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그가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실보다는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에녹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성도가 육신의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것은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육신의 죽음이란 영생으로 통하는 문을 통과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그런 사소한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도가 지금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죽음 뒤에 이어지게 되는 영생을 살고 있는 가 인 것입니다. 성도는 지금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고 살아나서 이미 영생의 맛을 보고 있어야만 영생으로 이어지는 승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주일날 예배당이나 대충 다니면서 살다가 천국에 가서는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영생은,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의 삶은 이 땅에서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이 땅에서 성도가 살아내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을 죄악 된 세상은 결사적으로 방해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임하는 꼴을 마귀는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것을 성도의 고난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은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생을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오는 책이 뭡니까?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역시 신약에서 가장 먼저 쓰인 책입니다. 그 책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이야기하면서 성도들에게 ‘직장과 가정을 다 버리고 주님의 재림에 대비하라. 기도원으로 모여라. 수도원으로 모여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데살로니가서는 재림을 이야기하면서 현실의 삶을 그 어떤 책보다 강조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 말은 이 땅에서 에녹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바로 이곳에서 그 재림 후에 완성될 영생의 삶을 미리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은 하늘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늘의 삶을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죽음 이후의 영생이 어색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수도원이나 기도원에 올라가 자기들끼리 집단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자식을 낳으며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이미 일상생활 속에서 시작이 되어 영생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에녹은 자식도 없고 가정도 없고 직장도 없는 수도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의 아버지였고, 한 여자의 남편이었고, 한 집안의 가장이었으며, 한 부족의 족장이었고 패역한 죄인들 사이에서 열심히 전도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은 그렇게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시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이 땅에서 살아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상 속에서 그 영생의 삶,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을 사시면서 그 삶이 주는 행복과 기쁨을 맛 보셔야 합니다. 거기서 소망이 자꾸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의 실과를 베어 가지고 나와 이스라엘에게 맛을 보여 주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가나안 땅의 실과를 광야에서 미리 맛보고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맛보지 않은 것을 소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나라의 삶을 이 세상에서 경험하며 사는 삶을 성경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삶이라고도 부릅니다. 하늘나라의 삶은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나를 항복시켜 끌고 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마 7:21)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반드시 토해내셔야 합니다.
(마 25:21)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눅 16:10)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지극히 작은 것이 이 땅의 삶이고 큰 것이 천국의 삶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주인이 안 보인다고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살다가는 큰 것, 즉 영생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래리 크랩의 책을 보면 그는 어차피 내 속에서 예수가 사시는 것이므로 나는 자유 하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죄를 지을 때도 ‘그래도 내 안에 예수가 사시는 것이니 나는 이 죄와 아무 상관없다. 이 얼마나 감사 한가’하고 자유 하라는 것입니다. 일견 맞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에 대한 자각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똑같은 죄악 된 삶을 살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그 죄악 된 세상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감사하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는 분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입니다. 그 삶은 꾸준히 한 발 한발 앞으로 전진 하는 것이지 건너뛰거나 지름길로 혼자 갈 수 있는 것 아닙니다. 플래스틱 신드롬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인스턴트 세상은 모든 것을 단기, 속성 완성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마저도 단기 속성으로 하고 싶어 합니다. 기도도 40일 특별기도, 100일 철야기도 등의 단기 속성 기도를 하고 싶어 합니다. 한 발 한발 걸어가는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이 어려워 무슨 신령한 은사를 받아 단기 속성으로 위대한 신앙인의 반열에 오르고 싶어 합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한 발 한발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 인생 속에서 앞으로, 앞으로 꾸준히 걸어가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한 발 한발 꾸준하게 열심히 동행하다보면 어느새 그 분과 함께 하늘에서 동행하고 있는 여러분을 자각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이 땅에서 엄연히 살아 있던 에녹이 이 땅에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에녹이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한 발 한발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다 보니 어느 날 하나님께서 ‘에녹아 오늘은 우리 더 좋은 곳으로 가보자, 오늘은 준비 단단히 하고 오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평상시와 똑같이 동행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로 걸어 올라간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만 바라보세요. 다른 것 바라보다가 자꾸 그 분과의 동행을 놓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애인과 동행하면서 자꾸 다른 여자를 바라보면 그 사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 관계는 곧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와 동행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입니까?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자식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을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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