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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ds of truth

[스크랩]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김성수 목사)

by IMmiji 2014. 1. 14.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김성수 목사)

 

 

(창 2:1‐3) “1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2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엿샛날까지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3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으므로,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우리는 지난주에 ‘안식’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안식’이라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과 능력과 지혜를 온전히 발휘하셔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를 완성하셔서 그 처소를 보호하고 유지하시면서 그 속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인간 쪽에서 보면 ‘인간이 자신을 처소 삼아 거하고 계신 그 하나님의 영광에 정상적으로 반응을 하여 그 분께 항복하고 순종하며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맡기는 상태’를 ‘안식’이라고 한다고 했지요? 창세기의 일곱째 날은 바로 그 완성될 하늘의 안식을 미리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그 안식으로의 출발 지점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늘은 그 완성될 하늘의 ‘안식’이 성경에서 어떻게 점진적이며 점층적으로 전개되어지고 설명되어지고 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완성될 하늘의 안식을 창세기의 창조기사에서 안식일로, 그리고 안식일에서 안식의 땅인 가나안으로, 그 안식의 땅 가나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되는 참 안식으로, 점점 뚜렷하고 명확하게 진술해 나가고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의 창조기사 속에 숨어 있는 ‘안식’의 그림자부터 추적해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창세기의 창조기사 속에 숨어있는 안식의 그림자를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공부하셨다시피 하나님은 창세기의 셋째 날에 기식하는 동물과 인간이 살 ‘터전’을 다 마련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물과 뭍이 잘 조화 된 지구에 각종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로 먹거리까지 준비를 해 주십니다. 우리는 그 기식하는 생물의 터전에 죄가 들어옴으로 해서 그 셋째 날의 창조가 다시 원래대로 저주의 물로 뒤덮이는 사건을 창세기 7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기식하는 생물들의 터전이 다시 혼돈으로 돌아가게 되고 기식하는 모든 생물이 몰살을 당합니다. 다름 아닌 심판의 모습입니다. 그 것은 하나님께서 죄와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살아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겠다는 그 분의 의지가 담겨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창 7:21‐23) “21 새와 집짐승과 들짐승과 땅에서 기어 다니는 모든 것과 사람까지,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다 죽었다. 22 마른 땅 위에서 코로 숨을 쉬며 사는 것들이 모두 죽었다. 23 이렇게 주께서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을 없애 버리셨다. 사람을 비롯하여 짐승까지, 길짐승과 공중의 새에 이르기까지, 땅 위에서 모두 없애 버리셨다. 다만, 노아와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과 짐승들만이 살아남았다.”

 

이렇게 물과 뭍으로 갈라졌던 셋째 날의 창조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 다시 혼돈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함한 기식 있는 생물들의 터전을 완전히 포기하셨을까요? 그럴 수는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택해 놓으신 그 분의 백성들에게 그 엉망이 된 셋째 날의 터전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노아에게 아담에게 주셨던 창세기 1장의 명령을 그대로 주신 것입니다. 그 것 역시 재창조의 의지가 담긴 상징인 것입니다.

 

(창 9:1‐2) “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그런데 그 회복될 셋째 날의 터전이 또 죄로 말미암아 저주의 물로 뒤덮이게 되면 안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회복될 셋째 날의 터전이 다시는 저주의 물로 덮이지 않도록 그 회복될 터전에 사는 자들을 모두 의인으로 만드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인간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율성을 이용해서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 죄를 지을 수 없는 당신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그 백성들의 모든 죄를 해결하시고 그들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넣어 죽이시고 다시 살리심으로 이제 죄와는 전혀 관계없는 ‘의인들’로 만들어 버리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회복된 셋째 날의 터전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셋째 날의 터전을 회복해 내시겠다는 것을 우리가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언약’을 반드시 지켜내시고야 마실 것이라는 것이 바로 ‘믿음’이요 ‘소망’인 것입니다. 그 회복 될 셋째 날의 땅, 언약의 땅은 지금 죄악 된 인류가 살고 있는 세상과는 완전히 구별되어 떨어진 그러한 땅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종종 죄악 된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터전과 ‘사흘’이라는 단어가 함께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처하는 곳은 거룩하게 구별되고 회복되어질 셋째 날의 땅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창 22:3‐4)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4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4절에 ‘제 삼일’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단어가 ‘쉐리쉬 욤’입니다. ‘셋째 날에‘입니다. 창세기의 셋째 날과 똑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의 셋째 날의 회복, 즉 기식하는 생물들이 거할 터전의 회복이 죽어야 할 자를 대신해 죽으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것임을 이곳에서 미리 예표 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회복 될 언약의 땅은 인간의 노력으로 마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시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창 39:36) “36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떼를 치니라”

 

여기도 보시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 야곱의 거처와 세상을 상징하는 외삼촌 라반의 거처가 ‘사흘’ ‘솨로쉬 욤’만큼 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셋째 날의 터전, 언약의 땅은 죄악 된 세상과 완전히 구별되고 떨어진 그러한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例)입니다.

 

(창 40:13,19) “13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 19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이곳에서는 사흘이라는 날이 새 생명을 얻거나 혹은 목숨을 잃는 것과 관계되는 날로 등장하지요? 심판과 구원입니다. 술 맡은 관원 장은 사흘째에 새 생명을 얻게 될 것이고 떡 굽는 관원 장은 사흘째에 목숨을 잃게 되고 그 시체의 고기를 새들이 뜯어먹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해몽입니다. 창세기에 우리가 공부한 요한 계시록의 언어들이 등장하지요?

 

(출 8:25‐27)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26 모세가 가로되 그리함은 불가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의 미워하는 바이온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희생을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하나이다”

 

여기도 보시면 사흘 길 떨어진 곳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과 구별되어 떨어져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출 15:22‐25)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 새”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라의 쓴 물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뒤 사흘 길을 가서 만난 것이 마라의 쓴 물입니다. 그 쓴 물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한 나무를 던졌더니 그 쓴 물이 단 물이 되었습니다. 그 한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쓴 물에 불과했던 ‘마라‘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단물로 변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요한 계시록 강해를 할 때 성경이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선 많은 여인들 중에 유독 ’마리아’라는 이름만 기록을 하는 이유를 설명해 드린 적이 있지요? 그리고 지난주에는 예수님과 함께 동산에 선 막달라 마리아에 관해 이야기를 해 드렸습니다. 이 마라의 쓴 물 사건은 마로 그 마리아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한 나무인 십자가와 사흘‘ 점점 제가 어디로 여러분을 끌고 가려하는지 그 윤곽이 드러나고 있지요? 그러면 이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을 건너는 장면으로 가보겠습니다.

 

(수 1:11,3:2) “11 진중에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예비하라 삼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 3:2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땅으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거룩한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역시 상징입니다. 어김없이 11절에 ‘셋째 날’ ‘쉐리쉬 욤’이라는 창세기의 단어가 똑같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3장2절에도 똑같이 ‘셋째 날’이 나오지요? 여기서 ‘삼일 후에‘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삼일 째 끝자락에‘라고 번역을 해야 맞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사흘 째 날’과 회복될 언약의 땅은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익히 아시는 것처럼 언약의 땅, 그 회복 될 셋째 날의 터전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셋째 날‘ ’쉐리쉬 욤‘에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도 아닌 사흘 만에 부활을 하셨는지 아시겠지요? 제가 지금 설명해 드린 그 전체의 내용이 일곱째 날의 안식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의 안식을 보면서 하나님은 그렇게 언제든지 타락할 여지가 있는 그 어두움과 빛, 그리고 뭍과 바다가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도 반드시 안식을 완성해 내시고야 마는 분이시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창세기의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을 통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참 안식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이 참 안식의 그림자가 율법의 안식일 속에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일곱째 날에서부터 시작된 그 율법 속의 안식일이 어떻게 참된 안식으로 향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보자고요. 오늘 본문 3절로 가보겠습니다.

 

(창 2:3)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여기에 안식일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가 나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고’ 그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은 생물이나 물질 위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런데 성경은 그 하나님의 ‘복’과 ‘거룩’이 일곱째 날인 ‘시간’에 주어졌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복’과 ‘거룩‘ 그리고 하나님의 ’복과 거룩‘은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간에 ‘복’과 ’거룩‘을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복을 쏟아 부으셔서 거룩하게 구별시키실 참 안식의 땅은 물질과 공간의 ‘감각 세계’가 아닌 ‘시간의 세계’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헬라의 공간적 이원론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과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공간적 이원론이 아니라 시간적 이원론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지 너무나 좋은 공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직 ‘하나님 나라’라는 가시적 공간이 오지 않았음에도 ‘이 땅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와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시간‘은 나중에 가시적 공간과 합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사람과 땅에 복과 거룩이 부어지는 장면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망‘을 그러한 감각적인 물질세계에 두시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에 두셔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주실 어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나님과 관계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여러분의 천국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과 거룩’이라는 단어가 안식일이라는 ‘시간’에 먼저 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안식일’이라는 시간 안에 ‘복’과 ‘거룩’이라는 씨앗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 안식일은 복과 거룩의 실체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죄로 말미암아 엉망이 되어버린 셋째 날의 터전이 어떻게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떻게 그 셋째 날의 터전이 언약의 땅으로 회복이 되었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두 번째 그림자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내면 되는 것이지요? 지금부터 찾아보지요. 출애굽기로 가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언약의 표징’이라고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출 31:13‐17)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세워진 표징이 되어, 너희를 거룩하게 구별한 이가 나 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14 안식일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그 날을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날에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의 겨레로부터 제거될 것이다. 15 엿새 동안은 일을 하고, 이렛날은 주에게 바친 거룩한 날이므로, 완전히 쉬어야 한다.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16 이스라엘 자손은 이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아, 그들 대대로 지켜야 한다. 17 이것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표징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복을 부으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신 안식일은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하신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아야겠지요?

 

(창 17:7‐8)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어떻게 이 언약의 표징이 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까지 이 세상에서 ‘7days life cycle’을 가진 민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생활주기가 전 세계 공통으로 일주일이 되었지만 그 전에는 그렇게 ‘7days life cycle’을 가진 민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달 신’을 섬기던 바벨론은 그 생활주기가 달마다 돌아갔습니다. ‘monthly cycle’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양신을 섬기던 이집트의 life cycle은 ‘하루‘1day life cycle’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시스나 오시리스 같은 계절 신을 섬기던 알렉산드리아 같은 나라는 ‘한 계절’이 그들의 life cycle 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유독 이스라엘만이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지키게 됨으로 유일하게 ‘7days life cycle’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7days life cycle’로 살면서, 일주일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세상의 모든 잡신들은 다 가짜고 오직 여호와만이 창조주이시고, 오직 이스라엘만이 진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것을 증거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언약의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언약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진노의 불 속으로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안식일을 어기면 ‘죽음’으로 응징을 한 것입니다. 그것도 잔인하게 돌로 때려 죽였습니다. 그 것은 안식일이라는 날이 대단한 날이어서가 아니라 안식일이 담고 있는 ‘언약’ 바깥에 머물게 된 자들의 종국이 어떠할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언약은 어떠한 방법으로 완성이 되었습니까? 어떻게 해서 죄인들이 언약의 백성들이 된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완성이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안식일에 복이 부어지고 안식일이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안식일 안에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거룩하고 복 된 하나님 나라를 씨앗으로 심어 놓으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그 안식일에 모형으로, 그림자로 심겨져 있던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로 속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모형으로서의 안식일은 필요가 없게 된 것이지요? 실체가 왔는데 모형이 왜 필요합니까? 그런데 지금도 안식일 운운하는 사람들은 뭐예요? 그 사람들은 안식일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지 그 안식일이 담고 있던 모형이 어떻게 실체화되었는지를 전혀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골 2:16‐17) “16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어떤 사람도 여러분을 심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17 이런 것은 앞으로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정확하게 나오지요?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었고 ‘몸‘ ’소마‘ ’실체‘는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식일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이 일부러 안식일을 골라 병자들을 고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담아놓으신 그 참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렇게 고단한 영혼들이 회복되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림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게 될 참 안식의 나라는 질병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은 안식일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친절하게 그림으로 보여주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소경이요 귀머거리들이었던 유대인들은 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에 일을 한 사람을 죽여 버리신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 땅의 인간이 왜 일을 하지요? 타락한 인간은 땅과 함께 저주를 받아서 자기가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는 일은 이제 먹고살기 위한 노동이 된 것입니다. 원래 인간의 일은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동반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그 아름답고 위대한 창조를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고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들의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무엇을 상징한다고 했습니까?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질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거기에서는 누가 우리를 먹여 주십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먹여 주십니다. 그래서 그 영생을 상징하는 안식일에는 그 천국의 삶의 모형으로 너희의 배를 위한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먹이 시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안식일에 먹을 것은 미리 그 전날 다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을 완성하실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곧 안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과 함께 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나의 배를 위한 일이 아니라 위대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을 비벼서 드신 것입니다. 일을 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 일은 주님과 함께 하는 안식 속에서의 일이었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출애굽기를 거쳐 구약 전체와 복음서에서 안식일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계속해서 demonstration해 주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넘어갑니다. 성경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들어서도 완성될 안식을 설명합니다. 창세기의 일곱째 날에 처음 등장한 ‘안식’이라는 것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거쳐 어떻게 하늘의 안식으로 향하게 되는지 보겠습니다.

 

(신 3:20) “20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같이 너희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편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땅을 얻어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고”

 

[표준새번역] “20 주께서는 너희와 마찬가지로 너희의 동기들에게도 편히 쉴 곳을 주실 것이니, 그들이 주 너희의 하나님이 요단 강 서쪽에 마련하여 주신 땅을 차지한 다음에라야, 너희는 제각기 내가 너희에게 준 이 땅으로 돌아올 수 있다.”

 

여기 보면 성경이 가나안 땅을 ‘안식’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신 12:9‐10) “9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10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여기도 가나안 땅을 ‘안식’이라고 부르지요?

 

(수 1:13) “13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주신 안식의 땅 가나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던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라는 히브리어를 헬라 식으로 발음을 하면 ’헤수스‘ ’예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던 이스라엘이 여호수아를 통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사건은, 참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된 안식의 땅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그대로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95편이 이러한 진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 95:7‐11) “7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8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다투었다)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시험하였다)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10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이 시는 다윗의 시편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가 기록된 때는 이스라엘이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지 440년 후입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다윗은 ‘오늘날’이라는 단어를 써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이스라엘아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고 너희도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치 말고 순종하여 안식에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만일 가나안 땅이 정말 안식의 땅의 실체였다면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지 440년이 지난 뒤에 다윗을 통해 또 다시 들어가라 말씀하시는 안식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가나안은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그 시편 95편을 히브리서 기자가 잘 설명해 줍니다.

 

(히 3:15‐4:11) “15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반역하던 때와 같이, 너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하는 말씀이 있는데, 16 듣고서도 하나님께 반역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 모두가 아니었습니까? 17 하나님께서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진노하셨습니까? 죄를 짓고, 시체가 되어서 광야에 쓰러진 그 사람들에게가 아닙니까? 18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까?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19 우리는, 결국 그들이 들어가지 못한 것이 믿지 않았기 때문임을 압니다. 4: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서 아무도 생기지 않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십시오. 2 그들이나 우리나, 기쁜 소식을 들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도, 그것을 믿음과 결합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그 말씀을 믿은 우리는 안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진노하여 맹세한 것과 같이,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실상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일을 끝마치셨으므로, 그 때로부터는 안식이 있어 온 것입니다. 4 일곱째 되는 날에 관하여 어디에선가 "하나님께서 일곱째 되는 날에는 그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다" 하고, 5 또 이곳에서는 그는 다시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6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안식에 들어갈 기회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을 먼저 들은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7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어떤 날을 정하시고, 이미 인용한 말씀대로, 오랜 뒤에 다윗을 시켜서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8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뒤에, 다른 날이 있을 것을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9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하는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10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마치고 쉬신 것과 같이, 그도 자기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11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을 씁시다. 아무도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히브리서의 내용을 간단하게 의역을 해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안식과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안식은 실체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 안식들은 모두 우리 교회가 들어가게 될 하늘의 안식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의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이며 영적으로 우리는 이미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영적으로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이 땅에서 안식에 들어가고 있어야 하며,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보시면 이 히브리서 4장의 주어가 전부 ‘우리’입니다. 복수지요. 1절의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3절의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 11절의 ’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전부 복수입니다. 그런데 10절의 ’안식에 들어간 자’만 단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를 포함한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나 10절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시고 7일 째 안식하신 것처럼 십자가를 지심으로 재창조를 완성하시고 안식에 들어가신 분은 예수 님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라는 사람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고, 현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안식에 들어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성도들은 그 삶 속에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안식에 들어가고 있는 삶의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4장1절에 보시면 성도는 ‘혹시 내가 안식에 미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두려움이 있어야 한다는 권고가 나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중도에 탈락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의 진의는 안식에 들어가는 성도들은 반드시 그의 신앙생활 속에서 영적 진보와 성숙에로의 열심과 분투가 있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한 열심과 분투와 조바심이 없이 세월아 네월아 하는 사람은 자칫 안식으로 초대되어진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1절의 ‘미치지 못하다’에 쓰인 ‘후스테레오’라는 단어는 ‘늦게 되다’ ‘열등하다’ ‘부족하다’라는 뜻이지만 이 히브리서가 쓰여 질 당시에는 ‘하루가 늦게 되다’의 의미로 쓰였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그 ‘후스테레오’라는 단어를 써서 ‘너희들 그렇게 안일하게 신앙생활 하다가는 하루가 늦을지 모른다, 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능통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 단어를 읽었을 때 어떤 장면을 떠올렸을까요? 구약에 하루가 늦음으로 낭패를 당했던 사건이 있었지요? 민수기 14장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러 가나안 땅으로 열두 정탐 군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이 하나님의 언약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가나안 땅의 거민들이 크고 장대한 것에 겁을 먹고 ‘우리는 절대 저 땅에 못 들어간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겁을 주었습니다. 반면에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겁먹지 말고 올라가자’라고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때려죽이려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십니다.

 

(민 14:26‐30) “26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히브리서가 이 민수기14장을 단어까지 똑같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겠지요? 모세가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이스라엘에게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가나안으로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하루가 늦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다음날 아말렉에게 크게 도륙을 당했습니다.

 

(민 14:39‐44) “39 ○모세가, 주께서 하신 말씀을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니, 백성들은 매우 슬퍼하였다. 40 다음날, 그들은 일찍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면서 외쳤다. "주께서 말씀하신 그 곳으로 올라가자. 우리가 잘못했다." 41 그러나 모세는 말렸다. "어쩌자고 주께서 하신 말씀을 거역하려는 거냐? 이 일은 결코 성공하지 못한다. 42 올라가지 말아라. 주께서 너희 가운데 계시지 않는다. 너희는 적에게 패한다. 43 아말렉 사람과 가나안 사람이 거기에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너희는 칼을 맞고 쓰러진다. 너희가 주를 등지고 돌아섰으니, 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 44 ○그들은 더 생각하지도 않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러나 주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하루 전에 갈렙의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언약과 그 분의 능력을 신뢰하고 가나안으로 진격을 했다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딱 하루가 늦는 바람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출애굽 1세들이 모두다 광야에서 시체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사건을 히브리서 기자가 인용 해다가 성도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땅히 성도로서 해야 할 분투와 열심과 진지함과 성실함을 자꾸 뒤로 미루다 보면 하루가 늦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강단에서 뿌려지는 경고를 계속해서 무시하시면 하루가 늦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니 지금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하신 그 하늘의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지금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씁니다. 여러분이 다른 것에 한 눈을 파시느라 정작 해야 할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삶을 놓치지 마십시오. 이 귀한 시간을 다른 사람 험담이나 하고 세상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불만이나 하고, 자기의 배만을 불리기 위해 허비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늘의 안식을 소망하며 살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 땅을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 히브리서의 한 구절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히 11:13‐16) “13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네가 본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15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좋은 것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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