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가라
(김성수 목사)
(창 1:26‐31) “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29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준다"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31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우리는 지난주에 우리에게 회복되어진, 그리고 회복해 가야 할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 공부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셔서 인간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 다른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풍성하게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대권 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며 그 만물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잘 부합하게 존재하도록 기여하는 삶을 살아냄으로 해서, 역시 만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복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아담 안에서 모두 타락을 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타락한 인간들 중 어떤 무리를 미리 택하셨고 그 택 자 들을 역사 속에서 하나하나 불러내십니다.(제가 지금 타락 후 선택설에 근거해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기 쉽게 이러한 순서로 설명을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을 한 후에 하나님의 백성 될 자들을 선택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러한 순서로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것은 여러분의 이해의 편이를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들어주세요) 하나님은 그렇게 타락을 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자들의 무리 속에서 어떤 무리들을 택하시고 그들을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그들 속에 찢기고 훼손되어 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 시켜 가십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반드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벧전 2:9‐10)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드러내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능력’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거룩한 삶이 우리 안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에 관한 ‘능력’이지 성도가 신비한 재주를 부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의 가나의 혼인잔치를 공부하면서 배웠지요? 우리의 삶 속에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주님의 창조의 능력이라고)
아무튼 성도는 타락한 죄인들과 뭔가 구별된 모습이 있어야 하고 가는 길이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회복된 영과 이성과 자율성과 인격을 가지고 하나님과 긴밀하게 교제하며 그 분의 형상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성경은 그러한 삶을 가리켜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며 사는 삶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오늘 공부할 주제입니다. 지금부터 출발합니다. 잘 들어보세요. 그 부분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 26절과 27절의 차이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26절과 27절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창 1:26‐27)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6절에서는 동사 ‘만들다’ ‘아싸’가 복수였지요? 그런데 27절의 ‘창조하다‘ ’바라‘는 단수 동사입니다. 26절에는 하나님이 복수로 쓰였고 27절에는 다시 단수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의 내용을 설명할 때만 하나님을 ‘복수’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들이 이 피조 계에서 해야 할 일의 본질이 그 복수 적 표현 안에 들어 있다는 뜻이 됩니다. 다른 말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며 이 역사 속에서 해야 할 일의 내용이 삼위 하나님의 복수 적 관계에서 드러나는 어떤 것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속성 적으로 하나이십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번 설명해 드렸으니까 넘어가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위 하나님은 관계 적으로도 하나이십니다. 그 말은 삼위 하나님은 그 연합이 너무나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어서 각 위의 나누어짐이 구별하기가 어렵다, 라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관계론 적, 하나 됨을 이루고 계신 삼위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결혼을 시키신 후 그들을 역시 관계 적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결혼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셨습니다.
(창 2:24)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은 삼위 하나님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바로 그 친밀한 연합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人間)이라는 말이 사람인(人)자와 사이 간(間)자를 쓰는 것입니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도록 지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인(人)’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사람이 독처 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라는 말씀으로 사람에게 부어진 사회성을 강조하셨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창 2:8)
거기서 ’좋지 못하다’는 히브리어로 ‘토브로’입니다. 여러분이 이 ‘토브’라는 단어를 여러 번 들으셨으니까 이제 아시지요?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때 쓰인 단어가 ‘토브’입니다. 그러니까 ‘토브로’ ‘좋지 못하다’라는 것은 사람이 혼자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불완전함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지 못한 상태‘ ’선하지 않은 상태‘이니까요. 그 말은 독신으로 사는 것이 나쁘다, 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으로 살 수 있도록 지어졌다는 말인 것입니다.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 결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결혼은 하나 됨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야 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사회인 것입니다. 인간들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 문득문득 나타나는 하나 됨을 통해 ‘아, 사람이 타락을 하기 전에는 이렇게 네가 나이고 나가 너인 한 몸의 상태로 살게 되어 있었던 것이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 때론 머리가 터지게 싸우면서 ‘인간의 타락이 가져온 분열과 깨어짐과 파괴’를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고 있는 성도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들어 있는 삼위 하나님의 사회성을 배우고 익혀서 자신의 삶 속에 적용시켜 가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요 17:11) “11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은 우리 성도들이 삼위 하나님의 연합처럼 연합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렇게 죄로 인해 분열되어지고 깨어진 세상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적 연합의 모습인 ‘하나 됨’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하나 됨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비로소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혼자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만 만드시거나 여자만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은 지난주에 언급한 대로 남자와 여자의 관계 뿐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부터 출생하게 될 모든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도록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랑, 용서, 자비, 온유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들이 독처하는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홀로 존재하는 사람에게 무슨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온유가 나옵니까? 그 것들은 모두 상대가 있어야 그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삼위 일체 하나님의 관계처럼 인간들 서로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 17:21‐24)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삼위 일체 하나님의 사회적 관계 속으로 우리 성도들을 집어넣고 계시지요? 구원받은 성도들이 서로의 관계 속에서 하나 됨 이루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연합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의 구원의 목표지점은 삼위 하나님의 하나 되심처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지어졌던 태초의 그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삼위 하나님의 하나 됨은 무엇을 근거로 한 하나 됨일까요? 계속해서 23절 보세요.
(23-24) “23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어서 보겠습니다.
(요 15:9)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이렇게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 그리고 성령하나님을 하나로 묶었던 것은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요일 4:8)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은 원래 사랑으로 하나이셨던 삼위 일체 하나님처럼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 됨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하자마자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하나 됨부터 깨져 버렸습니다.
(창 2:23)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애초에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을 때는 ‘네가 나이고 나가 너’라는 것이지요? 이 구절과 창세기 3장11절 이하를 비교해 보세요.
(창 3:11‐13) “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죄가 들어오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로 지어졌던 ‘남자와 여자가’ 둘로 갈라집니다. 이제 더 이상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아니라 ‘나’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적’으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남자와 여자만의 분열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 말미암게 되는 전 인류의 분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죄는 사람과의 사이에만 분열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에도 분열을 가져 왔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게 다시 하나로 재통일되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애나케 팔라이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무리들을 택하셔서 그렇게 분열과 찢어짐의 관계로 훼손되어 버린 사람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다시 삼위 하나님의 하나 되심과 같은 하나 됨 이루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엡 4:3) “3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이렇게 우리 성도들은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됨을 지킨다는 것, 다른 말로 삼위 일체 하나님과 같은 하나 됨의 회복을 지켜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 본 것처럼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셨듯이 우리보고 너희들에게 주어진 관계 속에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해도 되도 안 해도 되는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명령이며 책임인 동시에 의무이며 필연적인 열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계명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 15:12) “12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7)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갈 5:13‐14)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그러니까 성도에게 요구되는 성경의 모든 계명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랑’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사랑을 근거로 연합해 계신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라는 말과 동의어 인 것입니다. 이제 분명해 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가는 우리 성도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바로 ‘사랑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알아야 사랑을 해도 할 거 아닙니까?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눈물의 씨앗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을 정의하기를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 쏟아 붓는 호의’ 혹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하사하는 적선이나 배려’ 혹은 ’남에 대한 친절’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러한 기계적인 행동이나 인간의 친분관계가 아닙니다. 성경은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일 2:9‐11) “9 빛 가운데 있다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보세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오직 ‘신자’들만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다거나 호감이 가는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 같은 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닌 것이지요? 그런 것은 불신자들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간디나 슈바이처가 하고 간 그러한 일들을 성경이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무 파격적인 발언인가요? 물론 그러한 것들이 전혀 사랑과 관계없는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이 외형적으로는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보여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은 본질이 다릅니다. 쉬운 말로 똑같은 행위인데 어떤 것은 사랑이 아닐 수 있고 어떤 것은 사랑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 13:3)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보세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털어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심지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그 것이 ‘사랑’이 됩니다. 조금 어려운 개념이지만 잘 들어보세요. 요한 일서로 가겠습니다.
(요일 2:7‐8)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7절을 보면 요한이 성도들에게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면서 이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옛 계명이다‘라고 말을 하지요? 그래놓고 8절에서는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라고 말을 바꿉니다. 맞습니까? 요한은 ’서로 사랑하라‘가 새 계명이 아니라고 했다가 다시 새 계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분명 주님께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하시면서 그 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러면 8절이 맞는 것입니까? 아니면 7절이 맞는 것입니까? 요한이 잠시 헛갈린 걸까요?
(레 19:17‐18) “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긴 분명 옛 계명이지요? 그렇다면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 옛 계명입니까? 새 계명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은 옛 계명이나 새 계명이나 모두 그 내용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구구하게 많은 계명들이 성경에 나오지만 그 계명들은 모두 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라는 계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어떤 곳에서는 새 계명을 그렇게 둘로 나누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것은 차차 보시겠지만 이웃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전제되지 못하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기에 때로는 한 마디로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시고 때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굳이 성경이 ‘새 계명’이라는 말을 썼을까요? 그리고 요한은 지금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런 모순적이고 파격적인 문장의 대비를 동원하는 것일까요? 요한이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옛 계명이나 새 계명이나 그 내용은 모두 ‘서로 사랑하라’이다. 그러나 옛 계명의 ‘서로 사랑하라‘는 ’너희들이 말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너희들은 절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자들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면 새 계명의 ‘서로 사랑하라’는 ‘이제 너희는 어떤 분의 공로로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 그러니 사랑하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그러니까 옛 계명과 새 계명은 그 내용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과 이후의 차이인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논리를 놓치지 마시고 그대로 13절로 가보세요.
(요일 2:13‐17) “13 아버지이신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태초로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4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이신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태초로부터 계신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어서, 여러분이 그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5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의 자랑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17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잘 연결을 해 보세요. 요한이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 한 후에 ‘이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옛 계명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전한다. 서로 사랑하라. 그 말은 이제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그리고 13절로 이어져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라고 쓸 수 있는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고, 주님을 알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악한 자를 이기었기 때문에 나는 너희에게 ‘사랑하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주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며, 악한 자를 이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 것을 새 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게 된 새로운 피조물들만이 할 수 있는 어떤 것‘ 그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제 정리를 해 보자고요.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은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주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며, 악한 자를 이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알고 주님을 알고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마귀를 이겼다는 것은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풍성하신 은혜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복음을 깨달았다는 말이지요?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듬뿍 받아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며 거기에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인 됨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나보다 못 배운 사람, 나보다 가난한 사람, 나보다 못난 사람, 나보다 종교 행위를 왕성하게 못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을 대할 때 구별의식이나 차별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가 존재 할 수 없었다는 자각이 있는 사람이 나보다 못나고 미성숙한 사람을 볼 때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내가 죄인 중의 괴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풍성하신 은혜로 나를 구해 주셨다는 자각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그래도 난 저 사람과는 뭔가 달라‘라는 교만을 떨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그러한 자각이 있는 사람은 늘 자기 자신을 가장 아래로 내려놓습니다. 그게 사랑의 출발 지점인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 자기를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놓고 다른 이들을 대하는 행위를 성경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이 신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황홀하고 감격스러워서, 도대체 감당할 수가 없어서 가장 아래로 내려가 하나님과 내 이웃을 섬기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행위가 ‘구제’로 ‘봉사’로 ‘선교’로 ‘순교’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외양은 똑같아 보이지만 ‘내가 가진 것을 나보다 못나고 나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에서 비롯된 것과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져질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그 한량없으신 은혜로 난 살아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은(지식, 재물, 힘) 하나님께서 내 이웃을 섬기라고 맡겨주신 하나님의 은사이니 청지기의 삶을 잘 살다가 가야지’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지옥과 천국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전자는 자신의 의로 돌아가 죄로 쌓이게 되고 후자는 ‘사랑’으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보시와 기독교의 구제와 헌금은 그 본질이 다른 것입니다. 은혜의 십자가 복음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모든 행위들은 ‘은혜의 복음’을 근거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지경에서 구원을 받았고 얼마나 엄청난 용서를 받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행위로서의 구제나 보시나 봉사는 자랑도 자랑이려니와 자칫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위화감마저 만들어 질 수 있는 가짜 사랑인 것입니다. 복음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자가 베푸는 자선과 구제와 봉사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라는 구별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러한 구별의식은 이내 지배의식으로 발전을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보다 가난하거나 못 사는 사람들을 대할 때 자기가 지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헌금 꽤나 하는 장로들, 일 꽤나 한다는 집사들이 교회에서 뒷짐 지고 헛기침하고 다니는 것 많이 보셨지요? 그 사람들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쌓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말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자가 다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의식’을 가지지 못했다는 말이고 그 것은 동시에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털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정의를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왜 하는가? ‘를 정확히 복음 안에서 정리하고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정리되지 않은 채 하는 모든 선한 일은 오히려 자기 의를 쌓는 씻을 수 없는 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복음을 근거로 한 사랑이 없으면 nothing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회복되지 못한 사람은 절대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모양을 한 죄는 지을지언정 진정한 사랑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을 성도의 표지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요일 4:7‐12)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10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요일 5:1) “1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낳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 그에게서 태어난 이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자각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그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앞에 자신의 전부를 빼앗긴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으로도 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가장 패역 한 죄인이고 자기가 가장 더러운 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살려 내셨다는 자각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부인합니다. 자기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준비를 합니다. 내가 가장 낮은 자이고 내가 가장 큰 죄인이었음을 알기에 다른 이들 위에 군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뒤에서 헐뜯거나 욕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뒤에서 다른 이를 헐뜯고 욕을 한다는 것은 ‘난 아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뭔지 모릅니다. 그래서 여전히 내가 최고여야 합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말은 그 사람이 아직 하나님의 구원과 한참 소원한 사람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가 맞다 면 여러분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희생함으로 해서 다른 이들의 유익을 구하는 참 사랑을 하는 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 속에서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분열과 다툼은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올려놓고 거만을 떠는 사람들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김용옥 교수가 이번에 내놓은 단행본 요한복음 강해에서 기독교는 이기심과 패거리 의식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라고 지적을 했는데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에게까지 욕을 먹어야 합니까?
왜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그렇게 우습게볼까요? 세상은 우리에게 너희가 믿는 하나님을 보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을 보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보일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세상에 하나님을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라는 사람들이 오히려 약한 자들 등 쳐먹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우고들 있으니 세상이 우리를 향해 그런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잠 22:10) “10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요삼 9) “9 ○내가 그 교회에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항상 교회 공동체의 문제는 복음을 알지 못하는 거만한 자와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드러나지 말고 자꾸 숨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눅 22:26)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막 10:43‐45)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게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구별의식과 지배의식이 사라진 삶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비웃으며 누가 누구를 욕하며 누가 누구를 업신여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어져 가고 있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본질을 갖고 있던 동등한 지체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그 사실을 확실하게 붙들고 계실 때에야 비로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네가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없고 내가 없이 네가 존재할 수 없는 한 몸’인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당신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인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구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절박함을 갖고 계십니까?
라이얼 왓슨의 ‘생명 조류’라는 책에 아주 신기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animal 채널이나 영화 같은 데 보면 남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흰개미 떼가 자주 나오지요? 들판에 불쑥 솟아 있는 그 흰개미 집이 살아있는 고립적인 복합 동물이라는 것을 아시나요? 그 흰개미 집에는 뇌와 위, 간, 생식기, 손발까지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집 자체가 살아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흰개미들이 뇌의 명령을 받아 음식을 모으고 저장하고 배설하고 하는 하나의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그 흰개미 집단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그 신비한 힘이 무엇일까를 연구한 결과 페로몬이라는 호르몬이 그 흰개미들을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여왕개미에게서 나오는 페로몬이 다른 흰개미에게 전달되고 그 것이 또 다른 흰개미에게 전달되고 해서 개미탑 전체로 이동해서 마치 개미들이 하나의 명령체계에 의해 움직이는 몸처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물학 계에서는 그 개미집을 아예 복합 동물로 분류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배웁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고 성령에 의해 하나로 움직이는 거대한 유기체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의 지체는 다른 지체의 도움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들이 한데 모여 자기의 임무를 잘 수행해 낼 때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사랑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의 페로몬을 여러분의 이웃에게 전해 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생기가 막혀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몸은 거기서부터 죽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화나 거룩이라는 말을 들을 때 참 부담스럽지요? 잘 안되니까. 여러분이 이웃 사랑을 회복하게 되면 그 것은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아니 성화나 거룩이나 이웃 사랑은 동의어입니다. 내가 거룩하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은 아직까지 삶의 중심이 ‘나’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람들을 밟고,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사고가 분열과 다툼과 시기와 험담과 전쟁을 가져오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복음을 깨닫고 잘 배워서 ‘나’가 비워지고 하나님과 그 분에게서 난 내 이웃이 내 삶의 중심에 들어오게 될 때 우리는 이웃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고 거룩할 수 있는 것이고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 5:2‐3)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압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나의 모든 것을 빼앗긴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난 내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그들은 ‘나’를 위해서만 살던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난 자유인이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가볍게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출발 될 수 있다고요?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그 사랑을 공부하시고 묵상하시고 알아 가십시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5장 1절과 2절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엡 5:1‐2) “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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