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다는 것
(김성수 목사)
(창 1:26‐31) “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29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들이 너희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 곧 생명을 지닌 모든 것에게도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준다"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31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우리는 지난주까지 창세기의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를 모두 공부했습니다. 그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읽어낼 수 있었고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담겨 있는지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창조에 관해 자세하게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어떤 목적으로 지어졌으며 어떻게 살도록 의도되었었는지를 확인함으로 해서 오늘 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이 된 우리 성도들이 이 시공(時空) 속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이 조금 많기 때문에 적용의 부분은 다음 주로 미루고 오늘은 본문의 내용 분석에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다섯째 날까지의 창조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지를 간단하게 짚어보고 오늘의 주제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이 우주 만물을 다스리도록 지음을 받은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이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그 대권을 위임받아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만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칭해서 만들어 낸 호칭이지만 창세기의 내용을 잘 담고 있는 훌륭한 표현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력이 충만히 흘러넘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삶을 살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공부를 하겠지만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이름을 아담이 짓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 낮과 밤을 주관할 발광체를 창조하시고 큰 광명 작은 광명이라고만 부르셨던 해와 달과 별의 이름까지 아담이 짓습니다. 그래서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인간들은 절대 다른 짐승이나 사물, 혹은 해와 달과 별, 일월성신을 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고 인간이 타락을 하자 인간들은 하나님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떠나고, 하나님의 복이 떠나가자 죄인들은 자신들이 다스려야 할 것들에게 절을 하고 소원을 비는 어리석고 나약한 존재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땅과 바다 하늘까지도 인간들의 섬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통해서 ‘너희들이 섬기고 있는 헛된 우상들은 모두 너희를 위해 만들어진 소품일 뿐이다. 너희가 섬기고 의존해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종교 형태가 뭔지 아십니까? 토테미즘입니다. 토테미즘은 특정 동물을 숭배하는 종교형식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웅녀의 신화가 있지요? 아주 오랜 옛날 하늘나라 환인의 서자 환웅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와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서 신시를 열고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환웅에게 찾아오자 환웅이 쑥과 마늘 20개를 주고 100일 동안 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고 곰은 삼칠일(三七日)을 금기해서 여자가 되었지요. 그 여자와 환웅 사이에서 난 사람이 고조선의 시조 단군왕검이라고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실제로 믿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아십니까? 토테미즘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는 처마나 광에 사는 구렁이를 ‘지킴이’라고 해서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구렁이가 나가거나 죽으면 그 집에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고 그 구렁이에게 먹이도 주고 구렁이가 불편하지 않도록 섬겨 주었습니다. 토테미즘입니다. 인도에서는 아직도 소를 숭배하고 있습니다. 힌두교 인들은 소를 섬깁니다. 역시 토테미즘이지요. 이러한 동물숭배 의식은 모두 인간의 나약함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빈 해리스라는 인류학자가 인도의 소를 연구한 책에 보면 왜 인도 사람들이 소를 섬기게 되었는지가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인도 사람들은 소가 없으면 도저히 살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연료는 소똥입니다. 옛날부터 나무나 다른 연료를 충분히 구할 수 없었던 인도인들은 소똥을 잘 말려서 불을 지피고 음식도 해 먹고 난방도 하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똥은 인도인들이 집을 짓는데도 아주 요긴하게 쓰입니다. 인도인들은 집을 지은 후에 벽에 시멘트를 바르는 것이 아니라 소똥을 바릅니다. 소똥을 물에 잘 개서 쓰면 아주 훌륭한 벽 마감재가 됩니다. 저도 전에 선교 지에 가서 소똥으로 지은 집에서 며칠을 묵었었는데 파리가 좀 많이 꼬이는 것을 제외하면 시멘트로 지은 집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인도 사람들에게 소는 없어서는 안 될 짐승입니다.
이렇게 나약한 인간들은 소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소와 협력을 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소는 그리 흔한 짐승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소의 숭배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곰이나 사자, 독수리를 섬기는 것도 역시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곰이나 사자, 독수리는 포악한 짐승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그 짐승들의 힘을 막을 수가 없지요. 나약한 인간들은 그렇게 자신들보다 힘이 센 짐승들과 타협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는 독사 코브라를 대대로 섬긴 것입니다. 투탄카멘 왕을 비롯한 애굽 왕들의 초상화나 부조를 보면 왕들이 모두 코브라가 새겨진 왕관을 쓰고 있었던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중동지방에서 치명적인 독을 가진 코브라는 가장 두려운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약한 인간들은 그 짐승들에게 아부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를 잘 섬겨 줄 테니까 너희도 우리에게 해코지하지 말아다오, 그리고 이왕이면 너희들의 그 강한 힘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좀 도와 줄 수 있겠니?‘ 이것이 바로 토테미즘입니다. 그래서 그 짐승들에게 산처녀를 바치기도 하고 어린 아기들을 산채로 바치기도 한 것입니다. (킹콩)
하나님은 모세의 창세기를 통해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애굽에서 섬기던 그 모든 짐승들과 일월성신은 다 너희의 다스림을 받도록 너희를 위해 내가 창조한 것이다. 그러니 오직 나만 바라보아라‘라고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우상의 손아귀에서 한시도 빠져 나와 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바벨론 포로 이전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단 옆에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던 제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 놓고 두 번의 제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하나님이 주지 않는 것은 우상에게 절해서 우상에게 받아내는 이중적 종교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 때 마다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버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찾아 예배당에 나오기는 하는데 여전히 그들의 관심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에만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버렸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당 안에서도 제단을 두 개 놓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태반인 것입니다. 그처럼 마귀의 세력은 집요하고 강한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섬겨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안 주면 그냥 굶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시면 가는 것입니다.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 자꾸 다른 소리를 들으려 하지 마세요. 그저 순응하고 순종하며 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만물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아담은 처음에 그 역할을 아주 잘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지을 때 그 짐승들이 모두 아담의 명령에 의해 아담에게로 나아왔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통치권과 소유권을 의미한다고 했지요? 뿐만 아니라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 상대방의 특성과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이 만물을 장악하고 다스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 다스림이 노아 때 잠깐 회복되었었습니다. 노아가 방주 안으로 온갖 짐승들과 새들을 어떻게 데리고 들어왔겠습니까? 노아가 짐승들을 방주 안에 넣기 위해 새 잡으러 다니고 노루 잡으러 다니고 사자 잡으러 다녔다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마치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지을 때 아담의 명령을 듣고 아담에게로 나아 왔던 짐승들의 모습처럼 노아의 명령을 듣고 짐승들이 방주로 줄지어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그들을 보살피고 먹이지요. 하나님은 회복된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방주와 그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표상으로 선 노아, 그리고 그 노아의 말에 순종하는 짐승들의 모습을 통해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 그 질서의 나라를 모형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짐승들을 비롯한 천지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권 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여섯째 날에만 여섯째 날 앞에 ‘그’라는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 여섯째 날’ ‘바로 그 여섯째 날’이 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여섯째 날은 다른 다섯 날들과는 다른 무언가 특별한 날이라는 것이지요? 앞의 다섯 날들은 ‘그 여섯째 날’을 위해 존재하는 듯 한 뉘앙스를 풍기지 않습니까? 그것은 그 여섯째 날에 바로 만물의 영장이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창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인간이 어떻게 창조가 되었는지 지금부터 상세히 공부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오늘은 전체적인 내용 분석을 하고, 다음 주에 적용의 부분, 즉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며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배우시게 될 것입니다. 먼저 본문 26절을 보겠습니다.
(창 1:26)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인간 이외의 것들을 창조하실 때는 그냥 ‘무엇 무엇이 있으라’라는 명령만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명령에 따라 천지와 만물이 무에서 유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이외의 다른 자연계의 창조는 ‘종류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드십니다. 게다가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는 삼위 하나님께서 의논을 하시는 장면도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여기서 동사로 쓰인 ‘아싸’는 ‘만들다’라는 뜻인데 1인칭 복수형입니다. 히브리어는 동사가 주어를 품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들다’라는 의미가 되지요? 그리고 여기서 쓰인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엘로힘‘입니다. 그 단어는 ’하나님‘ ’엘로하‘의 복수형입니다. ’신들, 하나님들‘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그 단어를 통해 삼위 하나님께서 인간의 창조 전에 의논을 하셨다는 것을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은 ’con substantial'(호모우시오스) ‘one substance’ 본질이 같으십니다. 그렇다면 ‘의논’이라는 단어가 삼위 하나님께 적합한 단어가 아니지요? 그런데 왜 헤르만 바빙크나 존 캘빈이나 아브라함 카이퍼를 포함한 많은 신학자들이 ‘삼위 하나님께서 의논을 하셨다‘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리고 왜 성경은 이렇게 삼위 하나님의 의논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기록을 해 놓았을까요? 성경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인간들이 다른 피조물들과는 완전히 다른 특별한 피조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그저 명령으로만 창조 작업을 하시던 하나님께서 삼위 하나님의 회의를 소집하신 듯 한 표현을 씀으로 해서 하나님은 이제 다른 피조물들과는 완전히 다른 당신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실 조물(造物)을 만드실 것임을 천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심사숙고와 심적 지혜와 선과 능력에 의존하여 이루어졌음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26절의 ‘우리’라는 단어 속에서 인간의 창조 사역에 나타나는 각 위(位)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완벽한 협력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속사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인 교회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완벽한 협력 사역을 통해 탄생하게 될 것임을 미리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의논’ 속에서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의 죄를 누가 어떻게 속량 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해 내실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 것을 세상에 적용하실 것인가에 관한 것, 다른 말로 구속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의 삼위 하나님의 역할 분담을 미리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창조는 단순히 ‘아담’ 한사람의 창조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회복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인지도 함께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최초의 사람 아담이 그렇게 신중하고 특별하게 지어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탄생하게 될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존귀하고 아름답고 특별한 것인가를 미리 힌트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은 창조의 최종 목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벌거벗은 아담이 의의 흰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지어지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출발점임과 동시에 그 전체 구속사를 요약하여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은 그러한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을 담고 있는 인물이기에 사람의 창조 전에 삼위 하나님의 의논의 모습이 성경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 한글학교 교장 선생님인 순혁이가 헤르만 바빙크의 책을 읽다가 그 ‘삼위의 의논’이라는 단어를 보고 제게 질문을 했습니다. ‘삼위 하나님은 본질이 같으신 일체의 하나님이신 데 꼭 의논이 필요했는가?‘ 바로 지금 설명해 드린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이 그러한 모습을 기록한 것이고 신학자들이 ’의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인간은 그토록 존귀하고 특별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탄생하게 될 새로운 창조물,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은 얼마나 더 특별할 것인가?‘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의논의 모습 속에서 우리 성도들의 존귀한 신분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이기에 인간은 다른 자연물처럼 ‘종류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형상’이라고 번역이 된 ‘쩨렘’과 ‘모양’이라고 번역이 된 ‘데무트’는 동의어입니다. 이 두 단어는 서로 다른 단어를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고 강조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 양식에서 어떤 것을 강조할 때 동의어를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여기서도 인간이 다른 짐승들처럼 그저 ‘종류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쩨렘’과 ‘데무트’를 반복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 ‘남자와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은 남자만도 아니고 여자만도 아닌 상호결합 되고 상호의존적 관계의 ‘남자와 여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 결혼이라는 것을 왜 만들어 주셨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결혼을 통해 서로를 섬겨주고 아껴주고 용서해 주면서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해 먹는 것이 결혼이 아닌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 단순히 아담 한 사람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 안에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 남자와 여자로부터 탄생되게 될 인류‘가 포함되어 있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아담’ ‘사람’은 전 인류를 품고 있는 개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을 했을 때 전 인류가 함께 원죄 속으로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행 17:26)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여기서 ‘한 혈통’ ‘헤노스 하이마토스’는 ‘한 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전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원죄의 교리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6절의 ‘그로’ 가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실 때 이미 그 속에 수많은 인류들을 집어 넣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요? 제가 전에 에베소서를 강해할 때에 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린 적이 있는데 오늘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외적인 형태나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상식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과 비슷한 육체를 가진 원숭이나 침팬지 같은 짐승들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야 옳지요. 왜냐하면 사람 중에도 원숭이에 버금가는 얼굴이나 체형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육신을 가지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오성으로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간들에게 설명해 주라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육신을 입혀 이 땅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입혀진 하나님의 형상이 외형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요? 그럼 그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배우고 인식하고 분석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것입니다.
(고후 4:4)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골 1:15)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히 1:3)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이건 정말 엄청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종류(?)의 또 다른 아들들을 많이 만들어서 그 성자 예수님과 함께 만물의 왕을 삼아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스림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목적이 무산되는가 싶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목적이 지금 이루어졌습니다.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장자들이 되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 지체가 되어서 하늘의 왕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창세기는 요한 계시록으로 향하는 출발점인 동시에 그 요한 계시록을 그림자와 모형으로 힌트를 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의 구원의 목표 지점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으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훼손 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지요?
(롬 8:29)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갈 4:19)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골 3:9‐10)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보세요. 우리는 이거 하다가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좇아 훼손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가 결국에는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하게 회복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고전 15:49)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후 3:18)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령께서는 지금 우리 안에 내주 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인생을 통해 해야 하는 유일한 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만 잘 정리하고 있으면 우리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는 목적과 이유와 삶의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겠지요? 과연 기독교가 오늘날 자칭 교회라고 하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힘을 빌려 부자 되고, 병고치고, 만사형통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인지 잘 보세요.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 위해서는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된 성경을 잘 연구해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알겠지요?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단순히 ‘지식과 의와 거룩의 덕들’, 한마디로 ‘원의(原義)’라고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 그 ‘원의(原義)’를 상실하게 되었고 그 ‘원의’의 자리에 ‘원죄’가 들어온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하게 상실한 것이 되고 더 이상 인간 속에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타락한 이후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창 9:6) “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에게 살인을 금하시는 명령을 하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타락한 인간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약 3:9) “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여기도 다른 사람을 세 치 혀로 저주하지 말라는 권고를 하면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기는 했지만 인간에게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닌 것입니다. 제가 전에 에베소서 강해를 할 때는 하나님의 형상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기 쉽게 안토니 후크마의 표현을 빌어서 구조적 형상과 기능적 형상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해 드렸었는데 오늘은 조금 더 자세하게 세분화해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이성(理性), 즉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능력으로 인간은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도덕성이라는 것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인간은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고 선을 행할 때는 기뻐하며 악을 행할 때는 괴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기도 하고 사랑과 용서와 인내의 모양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인간은 완전한 사랑이시며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타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그 하나님의 형상의 잔여물인 사랑과 용서와 인내를 자기를 위해 쓴다는 의미에서 구조적 형상은 남아 있지만 기능적 형상이 사라졌다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형상이신 주님은 이 땅에 내려오셔서 완전한 도덕과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용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가셨습니다. 그 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도달해야할 목적지 인 것입니다.
(요 8:46)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보세요. 주님은 완전한 선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 땅에서 보여주고 가신 것입니다. 주님은 완벽한 이성과 오관으로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으셨음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영(嶺)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짐승들은 겨우 표상의 세계에 머물지만 인간들은 표상의 세계를 넘어 개념들과 이념들의 세계까지 올라갑니다. 인간은 영적 활동인 사고(思考)를 통하여 개별로부터 보편을 끌어내기도 하고 가시적인 것들을 보며 불가시적인 것들을 추론해 내며, 참과 선과 미의 이념들을 형성하기도 하고 피조물들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도출해 내어 이해하기도 합니다. 즉 인간은 표상의 세계에 국한되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느끼며 추구할 수 있도록 영적인 존재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통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그 나라를 소망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불안해합니다. 모든 인간들은 그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오늘도 이 세상의 것들로 자신들을 중독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적 능력의 한 편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영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의 장으로 이끄시기 위해 인간들에게 영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자율성, 흔히 쓰는 말로 ‘자유 의지’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생각하시고 스스로 결정하시고 스스로 판단하십니다. 인간은 그러한 자율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제한된 자율성이지만 인간은 그 자율성 때문에 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라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오리겐이나 어거스틴, 베르나르, 안셀무스 같은 교부들이 그 단어를 쓰긴 했지만 그 분들도 자유 의지를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난 인간들의 전적인 자유의 의미로 그 단어를 쓰신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지는 언제나 지식에 종속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배가 고픈 사람이 두 사람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빵집의 유리를 깨고 빵을 먹었고 한 사람은 계속 참았습니다. 계속 참은 사람은 어떻게 그런 의지의 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이 유리를 깨고 빵을 훔쳐 먹으면 도둑질을 하는 것이고 도둑질은 나쁜 것이며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그의 지식이 의지를 통제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의지는 지식에 종속됩니다. 그런데 타락한 이후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에 관한 지식을 몽땅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타락이후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을 의지로 선택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이후의 인간의 의지는 마귀에게 종속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시면 안 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이 드시지요? 칼빈은 그 것을 'compulsion' '강제‘라는 단어와 비교해서 ’necessity' ‘필연’이라는 단어로 표현을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된 것도 우리가 아담 안에서 범죄 한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죄 책을 피해갈 길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제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에게는 자율성이 부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율성에 의해 인간에게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인격’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강제로 움직여지는 로봇이 아니라 그 인격을 인정받는 독립된 개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인격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경이라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자로 대우하고 계시다는 좋은 증거인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제를 하고 싶으시다 는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격자로 대우하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은 짐승들처럼 본능 속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프로그래밍 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으로 그의 백성들을 설복 시켜 가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성경이 주어진 것이고 매주 설교자의 입을 통해 말씀을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우리 주님은 스스로 생각하시고 스스로 결정하셔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삶을 살다가 가셨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지향해야 하는 목표지점이 바로 그 곳인 것입니다. 억지로, 강제로 시켜서가 아니라 이성과 인격 속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에 합일하게 되는 그 지점까지 가는 것이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 성도들이 도달해야할 목표지점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타락을 하고 구조적인 하나님의 형상이 여전히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 지점 설정이 잘 못 되어 있기에 그 하나님의 형상을 엉뚱하게 자기 자신의 자랑과 탐심을 위해 사용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안토니 후크마는 인간이 구조적 형상은 소유하고 있지만 기능적 형상을 상실했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제 기능적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공 속에서 죄로 말미암아 찢기고 훼손된 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회복된 작은 불씨 같은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순종을 통해 무럭무럭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27절 28절을 보시면 그 원리가 아주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1:27‐28)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하셨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그 삶에서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표현이 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으로 볼 때 시간이 지나면서 그 형상은 점점 더 풍성하게 많이 나타나고 명확해 진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천지 창조의 목적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후 그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할 일을 주셨습니다. 그 말은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게 하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며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렸다면 그 전체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점점 더 뚜렷하고 풍성하게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지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다스림과 순종으로 말미암아 이 우주에 하나님의 형상이 가득 차게 되는 것이 바로 천지 창조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들의 다스림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 차게 하시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 이 세상을 자신들의 자랑과 자신들의 영광으로 가득 채워 버린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이 된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적어도 우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역사가 일어나야지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형상이 더 풍성하게 드러나게 된다고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애를 많이 낳으라는 말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을 자꾸 출산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에게 복음의 삶을 살라는 요구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담고 있는 그 사랑의 삶, 용서의 삶, 자기 부인의 삶을 살게 되면, 그리고 우리의 입으로 힘차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게 되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과 온유의 삶을 살아내었는데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 번성하고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나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옵니다. 내 자식들이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내 이웃과 내 직장 동료들이 나를 통해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들의 생육하고 번성하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6일간 일을 하고 7일째는 안식을 하라고 명령하셨는지 아세요? 하나님께서 6일간 창조를 하시고 7일째 안식을 하셨듯이 우리 인간들은 6일간의 일상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7일 째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가 맞다면 우리는 6일 동안, 다른 말로 우리의 인생동안 하나님의 창조 사역, 다른 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하나님이 새 창조 사역에 열심으로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울화가 치밀어도 참는 것입니다. 때로는 때려죽이고 싶은 원수가 나타나도 웃으며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시험이 닥쳐와도 인내로 참아 보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길이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힘이 드실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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