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혼인 관계와 심판이 담고 있는 것(II)
(김성수 목사)
(창 6:1‐8) “1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3 주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을 주는 나의 영이 사람 속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은 살과 피를 지닌 육체요,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다." 4 그 무렵에 땅 위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와서 자식들을 낳으니, 그들은 옛날에 있던 용사들로서 유명한 사람들이다. 5 ○주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 7 주께서는 "내가 창조한 것이지만, 사람을 이 땅 위에서 쓸어 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렇게 하겠다.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되는구나" 하고 탄식하셨다.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다.”
우리는 지난주에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까지를 두루 살피면서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첫 창조의 하나님께서 노아에게는 무지개로 나타나시고 출애굽 광야에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나타나셨으며 성전에서는 광채(빛)와 구름과 소리로 나타나셨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도 불의 혀와 같은 광채와 바람과 소리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연결해서 보았습니다. 모세는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을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덮는 모습으로 묘사를 하기도 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황무지에서 건지시고 보호하시는 것으로 표현을 하기도 했습니다.(신 32:10‐12)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건지심과 인도하심을 에스겔서에서는 당신의 옷자락으로 벌거벗은 적신의 신부를 덮어 자신과 하나로 연합시키는 신랑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도 확인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의 실체가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가 치르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첫 창조를 위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신과 홍수 심판 후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당신의 백성 노아에게 나타난 무지개, 그리고 광야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독수리의 날개로 새끼들을 덮는 모습, 적신의 신부를 자신의 옷자락으로 덮어 신부를 삼는 모습,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와 불의 혀처럼 임하신 성령 하나님의 모습은 모두 한 이야기의 각기 다른 그림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인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당신의 영광의 옷자락으로 덮으시고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셔서 그들을 당신과 한 몸인 어린양의 신부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만을 점진적이며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지난주에 마지막 부분에서 찾아 읽었던 에스겔서 16장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함께 읽어보았듯이 에스겔서 16장 7절에서 14절까지에는 부끄러운 적신이었던 신부에게 화려한 신부의 옷을 입히시는 신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물로 씻기고, 기름을 바르고, 물 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금은으로 장식을 하고, 베로 된 옷을 입히는 등 화려하게 옷을 입힙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난주에 찾아 읽었던 요한 계시록 19장의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화려한 세마포를 입은, 신부인 교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항상 성전에서 그렇게 화려한 신부의 모습으로 씻겨 지고, 기름부음을 받고, 금은 장식과 세마포 옷으로 단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제사장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 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에스겔서 16장의 그 신부의 모습은 그 옷의 재질이나 외관에 있어서 출애굽기 28장과 29장의 제사장의 옷차림과 거의 동일한 옷차림입니다. 그것이 함의(含意) 하는 의미는 제사장의 옷과 신부인 교회가 입게 되는 옷이 같은 옷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신부의 옷과 제사장의 옷을 동일하게 묘사를 함으로 해서 혼인 언약하의 신부가 담고 있는 상징적인 내용과 구약의 제사장이 담고 있는 상징적인 내용이 같은 것이라는 걸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어린양의 신부들을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신부의 옷과 제사장의 옷의 관계가 연결이 되시지요? 그런데 우리가 전에도 공부했지만 제사장의 옷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인 성막과 동일한 재질과 패턴으로 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말로 구약의 제사장 옷은 성막의 축소판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인 성막을 입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잘 보시면 하나님은 출애굽기 25장에서 31장까지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어떠한 식양과 재료로 지어야 하는지에 관해 아주 상세하게 지시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 중간의 28장과 29장을 할애하셔서 제사장 옷의 재질과 식양에 관한 설명을 끼워 넣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성막을 짓는 천과 금은 재료들을 축소하여 제사장의 옷을 짓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이 왜 성막을 짓는 재료와 식양 사이에 제사장의 옷의 재질과 식양에 관한 설명을 끼워 넣었는지 아시겠지요? 성막과 제사장의 옷은 같은 상징을 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성막을 싸는 천과 제사장의 옷의 재질은 정확하게 같은데 그 지성소와 제사장을 감싸는 천의 순서는 정 반대입니다. 제사장의 에봇과 겉옷과 속옷을 만드는 식양과 재질은 지성소를 감싸는 세 겹의 천의 식양과 재질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막에서는 그 천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가 나타나는 지성소 안의 법궤를 감싸고 있는 반면에 제사장의 옷에서는 지성소에 해당하는 열 두 보석으로 만들어진 제사장의 흉패가 가장 밖으로 나와 있고 그 아래에 에봇이 있고 다시 그 아래에 겉옷과 속옷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렇게 성막과 제사장의 옷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감싸고 있는 것들이 정확하게 거꾸로 배열이 된 것은 성막이 하나님의 영광을 감싸고 있는 것이라면 제사장의 옷은 하나님의 영광을 밖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의 옷은 에스겔서에서 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혼인 언약 하에 있는 신부의 옷차림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삼단 논법에 의해 어린양의 신부인 성도들이 입고 있는 새하얀 세마포 옷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입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뿜어내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성경이 어떻게 정의하지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하나님의 성품 등의 하늘의 것들이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거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 즉 성령의 열매들이 향기로 풍겨져 나오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 했지요? 그 말은 단순히 순종이나 복종의 차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당신이 누리고 계신 좋은 것을 나누어주시고 공유케 하신다는 의미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것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문득 문득 보여 질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것들이 우리에게서 나타나게 될 때 우리는 가장 행복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때를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신부의 옷, 즉 하나님의 영광을 입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는 선하시고 크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부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당신의 생명력,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그 분의 영광과 존귀와 기쁨과 행복을 동일하게 함께 나누는 존재가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신부가 되어 하나님과 한 몸이 되는 혼인 언약의 비밀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으로 가보세요.
(마 19:5‐6)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 하신 것을 아직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단순히 이혼을 금하시는 사회법상의 경고가 아니라고 했지요? 이 구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혼인 언약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하나가 되셔서 당신이 누리시는 것을 모두 누리게 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의 언약이며 그 언약은 반드시 깨어지지 않고 이루어 질것이라는 복음의 메시지가 담긴 경고인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 성도들이 신부가 입고 있는 그 영광의 세마포를 입게 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인지 성경에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신부의 옷은 제사장의 옷이 담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고 제사장의 옷은 성막이 담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라 했지요? 따라서 우리는 먼저 제사장의 옷이 담고 있는 내용을 찾아서 성도가 입게 되는 세마포 옷의 의미를 밝혀 보겠습니다. 제사장의 옷에 관한 내용은 출애굽기 28장과 29장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 중에서 출애굽기 28장의 몇 구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출 28:1‐3) “1 너는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너의 형 아론과 그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불러내서, 나를 섬기는 제사장 일을 맡겨라. 2 너는 너의 형 아론이 입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보이는 거룩한 예복을 만들어라. 3 내가 슬기로운 생각으로 가득 채워 준 모든 재주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나를 섬길 아론이 제사장이 되어서 입을 예복을 만들라고 하여라.”
여기 보시면 제사장의 옷이 의미하는 것이 몇 가지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의 옷은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인 성막의 축소판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따라서 첫 번째로 제사장이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인 성막을 입고 있다는 것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처소를 자신의 처소로 삼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을 그들의 옷으로 입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제사장이 함께 한 처소에 머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막에 거하게 하고 따로 처소를 주지 않은 것입니다. 이 말은 대 제사장의 옷과 같은 신부의 세마포를 입고 있는 우리 성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임을 미리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신랑이신 하나님의 신부로 서게 될 자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특권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2절을 보시면 제사장의 옷은 그 제사장들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으셔서 그들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만드실 것이라는 상징인 것입니다. 영화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나는 것이라 했지요?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성품과 그 분이 누리는 모든 것들을 나누어 받게 되어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추하고 더러운 모습이 다 사라지고 아름다운 하늘의 것들로 다시 재창조 된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로 3절을 보시면 제사장은 제사장의 옷을 입음으로 해서 그들이 다른 이들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됩니다. 제사장이 다른 이들과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제사장은 그렇게 제사장의 옷을 입음으로 해서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인 지성소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대 제사장 이외의 세상은 지성소 안에 들어가게 되면 즉사(卽死)하게 됩니다. 유일하게 제사장 예복을 올바로 갖춰 입은 대 제사장만이 일 년에 단 한번 속죄일에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대 제사장은 그 순간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양의 신부인 우리도 신부의 옷을 거룩하게 차려 입고 그렇게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3절이 함의(含意)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제사장의 옷을 차려입은 제사장에게는 기름이 부어집니다. 구약에서 성막의 기름, 성전의 기름은 항상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었지요? 성령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성령이 부어져서 영원히 하나님과 우리가 한 영으로 묶이게 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리시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제사장 옷과 신부의 옷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신부들을 창조하셔서 그들과 당신이 누리시는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을 나누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설명해 나가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가 된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바로 하나님의 신부인 교회의 모형으로 이 땅에 창조가 되었던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존재했던 것은 하나님의 영광 이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지요? 따라서 그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던 처소는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물질과 공간을 만드시고 그 속에 존재하는 것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물질과 공간인 우주를 당신의 처소 삼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천지 창조입니다. 그 중에서도 상징적인 하나님의 처소가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은 그 곳에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거하시며, 말씀하시고, 교제하시고, 그들을 이끄시며 당신이 누리시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상징적인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나와 같은 왕’이라는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하담과 하와에게 선악과와 생명나무열매를 주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서 지속적으로 거하게 됨을 암시해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을 지키면, 다른 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게 되면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되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살 수 있다는 상징이 선악과와 생명나무 실과에 담겨 있는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게 되면 그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선한 것들을 그들에게서 반사하여 하나님처럼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곳을 우리가 하나님 나라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때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는 처소를 자신의 처소로 삼아, 다른 말로 하나님을 자신의 처소로 삼아 살게 되는 것이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때에 인간은 자신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 하게 되는 것이고 그 말은 곧 성도가 하나님의 처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이 인간의 처소가 되어 주시고 인간을 당신의 처소로 삼아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모든 성품과 하늘의 좋은 것들을 공유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인간의 처소가 되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처소가 된다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union christ라 하지요.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네피림이 되고, 용사가 되고, 유명한 자가 되어 보겠다고 불순종의 길을 택하게 되자 그 모든 것들이 틀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에게서 떠나가고 인간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죄와 허물로 죽은 자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과 우주의 역사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림으로 보여주시고 그들에게 인생이라는 것을 허락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게 되면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인간들에게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주신 믿음과 삶의 경험을 통하여, 또 성경에 기록된 불순종의 역사와 심판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사는 길만이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인생과 역사와 신앙생활의 참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된 자들을 모으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고 그 곳에서 영원히 반역과 불순종을 모르는 당신의 백성들과 거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커다란 청사진을 가지고 이 역사와 우주를 경륜(經綸)해 나가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지요.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제사장의 옷은 하나님의 영광의 거처인 성막의 축소판이며 그 옷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성도가 입는 화려한 신부의 옷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반드시 확인해 두실 것이 있는데 그 것은 이 땅에 지어졌던 성막은 하나님 거하시는 하늘 처소의 그림자이며 상징적인 것이었던 것이지 그 제한된 공간에만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그런 의미의 처소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왕상 8:27) "27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솔로몬이 참으로 멋지게 성전을 완성하고 나서 하는 말입니다. 자신이 그토록 멋진 성전을 지어놓았지만 어찌 하나님께서 그 성전(聖殿)에 한정된 거처(居處)를 가지시겠느냐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성막(聖幕)과 성전(聖殿)은 하늘의 것의 모형으로 주어진 것일 뿐입니다. 성막과 성전이 하늘의 것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들은 실체가 오게 되었을 때 ‘나는 진짜가 아니라 모형’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반드시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그 모형인 성막과 성전이 무너지고 진짜 하늘의 성막과 성전이 내려와 성도들에게 입혀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라는 것을 신약과 구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그림자나 모형은 빛과 원형이 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어떠한 실체의 모형으로, 그림자로 주셨던 것을 그 실체가 온 뒤에 파기해 버리시는 것을 종종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막과 성전이 그러한 것이고 희생 제사와 여러 가지 율법이 대표적인 것이지요. 희생 제사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 되심과 유일한 중보자로서의 제사장 되심으로 하나님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게 되는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희생 제사를 통하여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골고다 언덕에 그 희생 제사의 실체가 드려졌을 때 그 희생 제사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잘 나와 있지요? 그러므로 그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드려지는 희생 제사는 오히려 하나님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무서운 죄가 되는 것이지요. 성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성막’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미쉬칸’이라는 단어가 70인 역에서는 헬라어 ‘스케네’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은 그 ‘스케네’라는 단어를 ‘장막’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옛 장막을 벗고 새로운 장막을 덧입는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고후 5:1‐5) "1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질 때에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압니다. 2 우리는 이 장막 집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덧입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3 우리가 이 장막집을 벗을지라도 벌거벗은 몸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4 우리는 이 장막에서 살면서, 무거운 짐에 눌려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장막을 벗어 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입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킴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 5 이런 일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시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잘 보시면 모든 인간들이 이 땅에서 장막을 입고 있는데 그러한 이 땅의 장막은 하늘의 장막, 즉 하늘의 처소로 덧입혀지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목표 지점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구약의 장막, 즉 율법과 하늘의 장막인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네피림으로, 용사로, 유명한 자 되려는 모든 시도들을 다 벗고(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르겠다는 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옷을 입으라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을 모형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모형을 반드시 벗고 진짜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비로소 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의 참 장막은 이미 성도들에게 입혀져 있고 그 사실을 보증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라고 5절이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은 지금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그 하늘 제사장의 옷을 이미 입고 있는 것이고 어린양의 신부로서 그 화려한 세마포 옷을 이미 입고 있다는 말이며, 이미 하나님의 처소를 입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짜 성전, 진짜 장막, 진짜 하나님의 처소가 뭐라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 2:19‐21)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였다. 20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습니까?"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그렇지요?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덧입고 있고, 덧입어야 하는 하늘의 처소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네피림으로, 용사로, 유명한 자로 서려고 하는 율법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은혜를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입고 있는 제사장 옷, 신부의 세마포, 하늘 처소, 하늘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후의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볼까요?
(계 21:1‐4) "1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2 나는 또,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 때에 나는 보좌에서 큰 음성이 울려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완성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장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거하시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 영광은 아버지께서 주신 독생자의 영광이며, 그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여기서 ‘거하시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스케노오’는 ‘천막을 치다’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의 단어라 했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독수리 날개가 새끼들을 덮어 황무지에서 인도하고 보호하듯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의 장막으로 덮어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며 하나님 나라에서도 영원히 우리를 당신의 장막으로 덮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성도들이 입고 있는 순결한 세마포를 가리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계 19:8) "8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고운 모시옷을 입게 하셨다. 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에게서 나올 수 있는 옳은 행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것들을 우리가 입고 하나님 앞에 선다면 우리가 정말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서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죠. 악취 나는 누더기를 입고 있는 자로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입고 선 빛나고 깨끗한 옳은 행실이라는 세마포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삶을 우리가 덧입고 만군의 왕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를 목숨을 걸고 당신의 뜻에 순종한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아들 예수로 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합한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바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지옥의 무서운 저주를 홀로 받아 내셨습니다. 성부의 뜻이 곧 성자의 뜻이었고 성자의 뜻이 곧 성부의 뜻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리켜 성자가 성부 하나님 안에, 성부 하나님이 성자 안에 계시는 것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다른 말로 성자 하나님의 완전한 순종에 의해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상태를 서로가 서로에게 거하는 상태인 처소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 14:10‐11)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는 바로 우리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완전한 뜻의 일치를 이루는, 온전한 순종을 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나요? 10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행동과 말이 전부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안에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으로 표현을 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로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고 아버지의 말이 나의 말이 되는 삼위 일체 속으로 초대가 된 자들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어떤 존재들이 서로 서로 상대방 속에 거하는 일체의 상태를 가리켜 서로가 서로를 가장 사랑하는 상태라고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아 6:3,7:10) "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떼를 먹이는구나 10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서로가 너무 너무 사랑해서 상대방의 뜻을 나의 뜻으로 기쁘게 받아들이고 서로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진정한 혼인 관계 속의 사랑을 가리켜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있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러한 하나님과의 혼인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하나님의 선하심등을 우리 안에서 뿜어내며 하나님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 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의 성품인 성령의 열매들은 이렇게 하나님의 내주(內住)하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옛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종종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조명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며 자주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실수와 실패 속에서 우리가 영원 속에서 입게 될 새로운 몸을 대망(待望)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영원 속에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새로운 몸을 입고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거처(居處)가 되어 그 분이 우리 안에서 맺으시는 열매를 아무런 저항 없이 주렁주렁 맺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새 창조를 반드시 이루어 내실 것이라는 것을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의 모습에서부터 차근차근 그림으로 성도들에게 계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한 천국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임했습니다.
(요 14:20)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여기서 그 날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된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이 된 것이고 하나님은 그들을 거처로 삼아 그들을 통치하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1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의 혼인잔치가 성령이 이 땅에 오심으로 이렇게 영적으로 이미 완성이 되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가 하나로 연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가 성도, 하나님의 백성, 왕 같은 제사장, 어린양의 신부 등 여러 가지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이미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연합된 하나님의 신부요 거처가 된 것이고 지금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로, 장막으로, 그 분의 영광이 거하심으로 그 분의 영광이 반사되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계 13:6) "6 그 짐승은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니, 하나님의 이름과 거처와 하늘에 사는 이들을 모독하였습니다."
여기 보시면 성경이 하나님의 장막은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다 라고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순결하시고 무흠하신 하나님께서 기쁘게 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처소로, 장막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엡 2:21‐22)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확실하지요? 그런데 그 일은 이미 운명적으로, 신분적으로, 영적으로 완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실패하고 실수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또 일어서서 그 분의 처소로 지어져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소로 삼으셔서 당신의 영광을 우리를 통해 드러내시겠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고요. 그 부분에 관해 조금만 더 부연(附椽)을 해 드리겠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이유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출 15:13,17) "13 주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손수 구원하신 이 백성을 이끌어 주시고,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17 주께서 그들을 데려다가 주의 소유인 주의 산에 심으실 것입니다. 주님, 이곳이 바로 주께서 계시려고 만드신 곳입니다. 주님, 주께서 손수 세우신 성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것은 그들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라고 13절에 나오지요? 그런데 17 절에 보면 바로 그 일이 ‘이스라엘 백성을 주님의 처소’를 삼기 위함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처소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소로 삼는 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시고 신명기로 가보겠습니다.
(신 33:27) "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조금 전 읽었던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시는 이유를 하나님이 마련하신 처소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셨는데 신명기에서는 바로 그 처소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출애굽기 15장 17절로 가면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처소 삼는 일이라고 합니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잘 그려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처소가 되시고 우리가 또 하나님의 처소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처소를 주기 위함이라 해놓고 그 처소가 바로 하나님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 분의 처소로 삼으시겠다고 하세요. 서로가 서로를 거처로 삼게 된다는 그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삼위 일체 하나님 속으로 끌어넣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시 91:9) "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표준새번역] "9 네가 주님을 네 피난처로 삼았으니, 가장 높으신 분을 너의 처소로 삼았으니,"
(시 132:13) "13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표준새번역] "13 주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그 곳을 당신의 처소로 삼으시기를 원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도 동일한 말씀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로 성숙시켜 가시며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목표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처럼 순종하게 되는 현실을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새 사람을 입는다.’ ‘장막을 입는다.’ ‘처소를 덧입는다.’ ‘신부의 옷을 입는다.’ ‘제사장 옷을 입는다.’ ‘영광으로 옷 입는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옷 입는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옷 입는다’ ‘신의 성품에 참여 한다’ 등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이미 그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있는 자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장막으로 안전하게 덮여 보호를 받고 있는 자들, 그 분의 신부로 지키심을 받고 있는 자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어야 옳을까요? 이사야서 59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사 59:16‐18) "16 압박받는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주께서는 놀라셨다. 주께서는 직접,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반드시 공의를 이루시려고, 당신의 능력을 친히 발휘하실 것이다. 17 주께서 공의를 갑옷으로 입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셨다. 응징을 속옷으로 입으셨다. 열심을 겉옷으로 입으셨다. 18 그들이 한 대로 갚으신다. 적들에게 진노하시며, 원수들에게 보복하신다. 섬들에게도 보복하신다."
이 구절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전투하는 병사의 옷차림에 비교하여 묘사를 해 놓은 장면입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스스로 자기 의를 의지하시며, 그 자기의 의를 호심경(흉패)을 삼아 구원을 투구로 쓰시고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고 열심으로 겉옷을 삼으시며 대적들과 전쟁을 하십니다. ‘속옷, 겉옷, 호심경(흉패) 투구(모자) 이게 누구의 옷차림입니까? 제사장의 옷차림이지요? 그 제사장의 옷차림을 전투하는 병사의 전신 갑주로 바꾸어 표현을 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유일한 중보요 제사장으로서 대 제사장의 의복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제사장의 옷을 입으시고 전쟁을 하십니다. 바로 우리 성도들의 죄와 싸우시고 그 죄에게 보복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이러한 똑같은 옷차림을 요구하십니다.
(엡 6:11‐17) "11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12 우리의 싸움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와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여러분은 악한 날에 능히 대항할 수 있고 모든 일을 한 뒤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장비로 완전무장을 하십시오. 14 그러므로 여러분은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의 가슴막이를 하고, 버티어 서십시오. 15 발에다가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채비를 하십시오. 16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으로,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17 그리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십시오."
(살전 5:6‐8)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면서, 정신을 차립시다. 7 잠자는 사람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사람들도 밤에 취합니다. 8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을 가슴막이로 하고, 구원의 소망을 투구로 씁시다."
이사야서에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옷과 동일한 옷입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에게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들은 지금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까? ‘너희는 이미 하나님의 신부로 혼인 언약이 되어 있는 자들이니 예수께서 의의 흉배와 구원의 투구를 쓰시고 죄와 싸우셨듯이 너희의 삶을 정결하게 하라, 죄와 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죄와 싸우신 것은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싸움 상대가 되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 하나님은 죄와는 전혀 공존할 수 없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도 종국(終局)에는 그렇게 죄와는 전혀 공존(共存)할 수 없는 온전히 순결하고 온전히 깨끗한 자들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지점을 목표지점으로 삼아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에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불순종의 죄, 성공주의, 물질주의, 네피림의 망상, 거인 숭배 사상, 기복주의 등과 전투를 벌이는 군사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과 힘의 과시 그로부터 얻는 비열한 쾌감, 이런 것들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정혼한 이들의 올바른 이 땅에서의 삶인 것이고 그 삶을 가리켜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혼인 관계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이 담겨 있는 것이고 그 혼인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져 가는 삶을 살도록 되어 있기에 하나님 앞에서 네피림으로, 용사로, 유명한 자로 서려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라는 혼인 관계의 왜곡으로 묘사를 한 것이고 그들이 저주의 물, 심판의 물인 홍수로 다 멸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의 우리 모습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 완성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 참으로 불가능 할 것 같고 소망이 없어 보이지요? 그래서 성경이 예수님께서 새로운 옷, 부활의 몸, 새로운 장막, 하나님의 처소로 옷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 앞으로 들어가신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히 9:11‐14)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좋은 일을 주관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다시 말하면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거쳐서, 12 오직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룩하여 주셨습니다. 13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려도, 그 육체가 깨끗해져서 그들이 거룩하게 되거든, 14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장막, 참 처소, 참된 신부의 옷, 참된 제사장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렇게 부활의 몸인 새로운 옷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따라서 그 예수로 옷 입고 있는 우리들도 반드시 새로운 옷을 차려입고 하나님 처소로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시는 처소로 서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이런 더러운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신부로 멋진 향기를 뿜어내며 하나님이 누리시는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하늘의 백성들로 사시게 될 것입니다. 그 소망을 바라보며 오늘을 열심히 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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